금남호남정맥 종주기4
*정맥구간:서구이치-팔공산-밀목치
*산행일자:2008. 8. 20일(수)
*소재지 :전북장수/진안
*산높이 :팔공산1,151m, 신무산897m, 사두봉1,015m
*산행코스:서구이치-팔공산-자고개-신무산-수분재-사두봉-밀목치
*산행시간:11시4분-19시40분(8시간36분)
*동행 :나홀로
이번 종주산행 중 전북 장수의 팔공산 능선 길에서 아주 견고해 보이는 자그마한 성 하나를 보았습니다. 성안에 군량미를 보관했다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 불리는 이 성은 후백제때 축성된 석성입니다. 성 둘레가 300m밖에 안 되는 작은 성이지만 안쪽으로 4.5m를, 바깥쪽으로 1.5m 쌓아 올린 이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다부져보였습니다. 이 성을 쌓아올린 후백제는 건국 34년 만에 멸망했지만 후백제가 쌓아올린 이 성은 아직도 견고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튼튼한 합미성이 후백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외침이 아니라 견훤과 그 아들간의 내분 때문이다 함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서기935년 후백제에서는 권력에의 집착이 견훤과 아들들을 등지게 만들었다면, 2008년 대한민국에서는 잃어버린 권력에의 향수가 광우병파동을 증폭시켜 한반도 남쪽을 요동치게 한 것은 아닌가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투른 대미협상과 국민설득에 실패한 정부의 잘못은 백 번 질책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국민들이 광우병에 걸린다고 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명명백백하게 의도된 왜곡입니다. 2백만 명이 넘는 재미교포들이 매일 쇠고기를 먹어도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전적적으로 광우병에 더 걸리기 쉽다고 한 것도 그러한 왜곡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고의적 왜곡에 우리 국민들이 쉽게 넘어간 것은 특별히 과학에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과학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발달한 미국에서 있었던 다음 사례는 어느 누구도 고의적 왜곡에 속아 넘어가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캠페인을 벌였다 합니다. 무색무취한 “일산화이수소”가 심각한 수화현상을 일으키고, 소변이 자주 마려운 증상을 일으키며, 땀이 많이 나게 하고, 구토를 일으키며, 또 기체 상태에서는 심각한 화상을 입히는 데다 이 화학물질이 말기 암 환자의 종양에서도 발견됐고 땅을 침식시키는 산성비의 주요 요소라며 50명의 학생들에 이 화학물질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해달라고 캠페인을 벌였다 합니다. 캠페인 결과는 놀랍게도 43명이 흔쾌히 서명했고 6명은 결정을 보류했으며 서명에 반대한 사람은 단 한명으로 그 물질이 바로 산소 1원자와 수소 2원자가 결합해 만들어진 물이라며 서명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 학생이 물을 "일산화이수소"로 왜곡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물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화학자 제임스 콜만 교수가 지은 “Naturally Dangerous" 책에 실린 것으로 이 책은 광우병파동이 있기 훨씬 전인 2001년에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번역판이 “내츄럴리 데인저러스”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시판 중에 있습니다. 세계의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도 이런 정도이니 우리나라에서 광우병파동이 일어난 것을 가지고 국제적 망신이라며 자괴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누가 고의적으로 왜곡을 주도하느냐 입니다.
미국의 사례처럼 고등학생 한 명이 캠페인을 벌이는 정도라면 그 피해는 제한적이겠지만 파워풀한 집단이 왜곡을 주도한다면 그 피해가 전 국민적일 수밖에 없다는데 문제의 후진성과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외침을 막고자 아무리 성벽을 튼튼히 쌓는다 해도 잘못된 정보로 국민들이 분열된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과연 온전하게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되어 합미성을 바라보는 제 소감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산본 집 앞에서 첫 버스를 놓치어 다른 때보다 40분 늦은 아침6시10분에 강남터미널에서 전주 행 일반고속버스에 승차했습니다. 9시5분에 전주를 출발한 버스가 시간 반을 조금 더 달려 장수에 도착한 시각이 10시45분경으로 잠시 후 택시를 잡아타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서구이치로 옮겼습니다. 다음날로 예정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구간산행을 어둡기 전에 끝내기 위해서 이번에 무리를 해서라도 밀목치까지 진행해야 할 것 같아 산행채비를 서둘렀습니다.
오전11시4분 서구이치를 출발했습니다.
서구이치 고개 마루에서 장수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이정표가 서있는 곳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10분 남짓 걸어올라 오른쪽으로 백운리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 다다라 왼쪽으로 꺾어 팔공산으로 향했습니다. 장수군 당국에서 길가 잡목들을 깨끗하게 정리해놓아 생각보다 산행이 빨랐고 이런 길이 계속된다면 목적지인 밀목치에 해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요즈음 며칠 동안 연이어서 비가 내린 덕에 땅이 데워지지 않아 햇살은 따가웠어도 지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산행시작 반시간이 조금 지나 표지기가 많이 달리고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무명봉에 오르자 올 여름 마지막(?)으로 열리는 산상음악회에 참가해 한껏 목청을 높이고 있는 새들과 매미들의 노래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려왔습니다. 무명봉에서 짧은 바위 길을 지나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지난 번 어둠에 쫓겨 뛰다시피 달려온 능선 길과 오른 쪽 아래 장수읍내 전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12시20분 해발1,151m의 팔공산을 올랐습니다.
서구이치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오름 길의 경사가 대체로 완만했고 길도 널찍하게 잘 나있었습니다. 전망바위에서 조금 내려섰다가 완만한 산 오름을 이어가 하늘이 훤하게 열린 헬기장에 올랐습니다. 입추는 벌써 지났지만 아직도 여름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태양이 머리 위에 남중해 내 비추는 햇살이 여간 따갑지 않았습니다. 사방이 탁 트인 헬기장에서 서둘러 사진 몇 방을 찍은 후 지척의 팔공산으로 옮겼습니다. 정상을 통신시설에 내놓은 여기 팔공산의 높이가 대구의 팔공산보다 40여m밖에 낮지 않은데도 이 산의 산행기가 한국의 산하 등 주요 사이트에 거의 올라오지 않는 것은 접근이 불편한 오지의 산이어서 금남호남정맥 종주 꾼을 제외하고는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중한 태양에 등 떠밀려 이내 팔공산을 출발했습니다. 정상아래 쳐 놓은 울타리를 따라 왼쪽으로 에돌며 합미성으로 향했습니다. 정상에서 반시간 가까이 내려가 만난 필덕리/대성리 갈림길의 삼거리에서 오른 쪽 풀 숲길로 들어섰습니다. 방금 전 하산 길에 만난 뱀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될 정도로 잡초와 잡목들이 무성한 길을 이번에 처음 걷는 것도 아닌데 앞서 한 두 시간 편안한 길을 걸어서인지 산딸기나무에 찔려가며 1013봉에 오르는 일이 꽤나 짜증스러웠습니다. 13시를 조금 지나 1013봉에 오르자 덜렁 돌탑 한 기만 세워져있을 뿐 공간도 비좁고 아무런 표지물이 없어 이 봉우리가 금남호남정맥 길이 아니라면 저라도 굳이 풀숲 길을 헤쳐 가며 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3시58분 대성고원을 알리는 커다란 바위돌이 세워진 자고개에 내려섰습니다.
1013봉에서 급한 길을 내려가다가 잡초들이 무성한 묘지를 지나 만난 희미한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자 이내 거무스레한 너럭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여기에서 길이 끊긴 것이 아닌 가해 잠시 긴장됐습니다. 새까만 나비들이 앉아 쉬는 너럭바위를 조심해서 내려가 길을 이어가다 “자고개2.0Km/팔공산정상3.0Km"의 이정표가 세워진 안부에 다다랐는데 2년 전 과천시산악연맹회원들과 함께 팔공산을 오를 때 들머리로 삼았던 대성리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쪽 아래로 나 있었습니다. 1013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좋은 길과 다시 만나는 안부사거리를 출발해 합미성을 거쳐 자고개에 이르기까지 2Km의 내림 길이 그리 가파르지 않고 길도 넓어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15시13분 해발897m의 신무산에 올랐습니다.
자고개를 가로 질러 산길로 들어서자 다시 길이 나빠졌습니다. 와룡리휴양림 갈림길에서 시작된 산길 양변의 풀 깎기 작업이 이 고개에서 끝이나 수분치에 이르기까지 여느 호남정맥의 산길처럼 풀숲이 우거져 이 구간을 통과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자고개에서 풀숲 길을 지나 오른 무명봉에서 점심을 드느라 이번 산행 처음으로 20분을 쉬었습니다. 다시 12분을 더 걸어 올라선 밋밋한 730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진행하다가 과수원 울타리로 보이는 철조망을 만났습니다. 이 울타리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신무산에 오르자 여기가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봉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말끔한 하늘이 몰라보게 높아졌습니다. 주위에서 가장 높은 장안산이 가늠되지 않는 데 먼발치의 팔공산이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이미 한 번 올랐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입니다. 신무산에서 수분재로 내려가는 길에 자주색으로 치장한 화려한 풀꽃들을 몇 종 만나 잠시 멈춰 서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16시15분 수분재 휴게소에서 맥주를 사들며 한참 동안 쉬었습니다.
신무산에서 수분재로 내려서는 길이 헛갈린 것은 몇 번이고 가로지른 임도길 때문이었습니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이동해 오른 무명봉에서 신무산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서 풀들이 많이 나있는 임도 길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임도를 건너 산길을 내려가다 만난 노인 분이 이 풀숲 길을 어떻게 내려가느냐고 말씀해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임도를 건너 다다른 시멘트 길에서 오른 쪽으로 올라가 능선 길을 이어가느라 다시 풀숲 길로 들어섰습니다. 양철지붕의 폐건물 앞에서 길이 나있지 않는 능선 길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왼쪽 시멘트 길로 내려가 동네 안으로 들어섰더니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물이 많이 보였습니다. 과수원을 지나 만난 19번 도로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올라가 해발 560m의 수분재에 다다랐습니다. 모든 고개는 물을 양쪽으로 가르는 수분(水分)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이 고개를 고집 쓰고 수분재로 부르는 것은 이 고개를 가운데 두고 섬진강과 금강의 양대 강이 갈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금남호남정맥 상의 모든 고개를 수분재로 불러야 마땅한데도 유독 이고개만 그리 부르는 것은 금강의 물뿌랭이인 뜬봉샘이 가까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자고개에서 수분재에 이르는데 예상시간보다 40분이 더 걸려 앞으로 3시간50분이 소요되는 밀목치까지 가야나 말아야하나 고민됐습니다. 분명 산행 중에 해가 떨어지고 이내 사방이 깜깜해질 터인데 처음 오르는 산길을 헤드랜턴 하나 믿고 강행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만, 정 안되면 작년 가을처럼 산길에서 가만히 앉아 밤을 새울지라도 일단 떠나보자고 마음을 다부져먹고 16시30분에 출발했습니다.
18시54분 해발1,015m의 사두봉에 올랐습니다.
수분재의 주유소 옆 임도로 들어서서 조금 오르자 왼쪽 농가의 개들이 저를 보고 한껏 목청을 높였습니다. 짓는 개는 물지 않는 다는 이야기가 참인지 잘 모르지만 매어 있는 개는 물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기에 우선 개가 풀려 있나 여부를 먼저 확인한 후 그 옆을 지나가곤 합니다만 풀린 개를 만나는 만부득이한 경우에는 스틱을 휘두르며 돌진해 개에게 겁을 준 후 지나기도 합니다. 임도를 지나 왼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길을 만났습니다만, 다시 임도로 들어서 단풍나무 조림지를 지났습니다. 오름 길이 분명하지 않아 왼쪽으로 난 풀숲 길의 임도를 지나자 표지기가 보였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 길을 찾았다 싶어 표지기가 보이는 오른쪽 숲속 길로 들어선 후 단숨에 690에 올라 시간을 체크해보니 17시 정각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길도 다시 좋아졌고 오르내림도 아주 심한 편은 아니어서 죽어라하고 내달렸습니다. 터널 위 당재 고개를 7분 후에 지났고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안부사거리인 바구니봉재를 지난 것은 50분 후였습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올만한 더 할 수 없이 편안한 길을 정신없이 내달리느라 어둠이 산자락에 내려앉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882봉에 올라 얼마고 쉰 후에야 능선 길에 깔려있는 어둠이 감지됐습니다. 882봉에서 정동 쪽으로 반시간 남짓 걸어 봉수대라고 쓰인 나무토막 표지물을 막 지나 스테인리스 봉과 삼각점이 서있는 사두봉에 올라섰습니다만 시간에 쫓겨 곧바로 밀목치로 향했습니다.
19시40분 밀목치로 내려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사두봉을 지나서 저녁 7시에 헤드랜턴을 꺼내 찼습니다. 아직은 랜턴 불이 환하게 비칠 정도로 깜깜하지는 않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밀목치에 내려설 생각으로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습니다. 950봉과 940봉을 거쳐 880봉의 활공장에 도착하는데 32분밖에 안 걸려 50분 걸린다는 산행시간을 무려 18분이나 단축했습니다. 해가 진지 얼마 안 되어 서녘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남아 있었고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 사방이 탁 트인 활공장은 그다지 깜깜하지 않았습니다. 활공장에서 내려선 숲속 산길은 칠흑 같은 밤이어서 헤드랜턴이 없었다면 산길을 이어가기가 엄청 힘들었을 것입니다. 안내산악회를 따라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야간 산행을 할 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이번에 혼자서 하산하면서 제 랜턴이 너무 좁게 비추어 많이 불편함을 알았습니다. 깜깜한 숲속 길로 내려가다가 길이 분명한 것 같지 않아 능선 길을 버리고 시멘트 길로 내려갔습니다. 덕산리 마을 초입에서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먼저 이 길을 지난 한분의 산행기에서 큰 개는 매여 있으나 조금 적은 개 두 마리가 풀려있다는 글을 읽은 터라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개들이 언제 덤벼들지 몰라 개장 앞을 지나기가 주저됐는데 깜깜한 밤에 개가 두 눈에서 빛을 발하는 시퍼런 광채를 보자 섬뜩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큰 소리로 주인에 개를 붙잡아 달라고 사정을 한 후 이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덕산리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장수읍내로 나가 저녁을 든 후 다음 날 마지막 구간 종주를 위해 인근 모텔에다 잠자리를 잡았습니다.
후백제가 쌓아올린 합미성은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쌓아올린 신뢰의 성은 말할 수 없이 취약했고 취약한 이 성을 견훤과 그 아들들이 발 벗고 나서서 무너뜨렸습니다. 대한민국이 60년간 쌓아온 국방의 성은 이제 어느 나라보다 견고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쌓아온 신뢰의 성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 이번 광우병파동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고의적 왜곡시도가 국민들에 먹혀든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근본적인 이유가 정치적지도자들의 신뢰상실에 있습니다. 뭇 사람들로부터 산이 신뢰받는 가장 큰 이유는 넓은 가슴으로 산을 찾는 모든 이들을 감싸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하나를 더한다면 산의 질서를 깨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예외 없이 벌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신뢰의 성을 높이 쌓기 위해서 최고의 스승으로 모셔야 할 분은 아무래도 산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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