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5대강둘레산줄기 환종주기/섬진강 둘레산줄기

5.내장산권 환주기(22-28)

시인마뇽 2010. 9. 10. 08:14

 

 

환주기22:호남정맥 20구간(입석리고개-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

 

*산행일시:2008. 3. 13일/ 7시16분-15시4분(7시간48분)

 

*소재지  :전남 담양/곡성

 

*산높이  :만덕산575m, 연산505m, 무이산305m, 수양산593m

 

*산행코스:입석리고개-만덕산-과치재-무이산-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수련원 앞

 

 

 

시작이 반아라는데 이번에는 정말 반을 해냈다. 작년 5월 전남 광양의 외망에서 호남기맥에 발을 들인 후 백운

 

산에서 시작되는 호남정맥의 중간지점을 지나기까지 모두 22번을 출산했다. 웬만한 종주꾼들은 이 정도 횟수

 

라면 이미 완주를 했을 터인데  걸음이 워낙 느려 구간을 짧게 잡는 통에 이제야 겨우 호남정맥의 반을 마쳤

 

다. 물론 중간지점이 광양의 백운산과 전주의 조약봉까지의 호남정맥에 전북 장수의 영취산에 이르는 금남호

 

남정맥의 거리를 합한 것의 반이 되는 지점이기에 호남정맥 종주는 앞으로 15회 정도 더 출산하면 끝낼 수 있

 

을 것 같고 이에 4회를 더하면 금남호남정맥 종주도 같이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한다면 망덕산-백운

 

산의 호남기맥, 백운산-조약봉의 호남정맥 그리고 조약봉-영취산의 금남호남정맥을 모두 이은 산줄기의 중간

 

지점은 벌써 지났다함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백운산에서 도상거리로 231Km를 걸어 다다른 북위35도12분

 

57.3초와 동경127도4분5.9초의 지점에 세워 놓은 “호남정맥 중간지점”의 스텐리스 안내판 앞에 서자 이제는

 

다했다 싶어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여기 중간지점 통과에 의미를 부여한 종주 꾼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비실

 

이부부님, 강성원우유의 종주꾼님, 대정산악회 회원님, 배창랑과 그의 일행님들을 위시한 수많은 분들이 여기

 

에 표지기를 걸어놓아 중간지점 통과를 자축했다.

 

 

 

 

 

힘든 일일 수록 반을 마치고나면 어떻게 해서든 나머지 반을 마저 해 완결을 보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나만

 

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마라토너들이 일단 반환점을 돌고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완주하려고 하듯이 나도 반

 

을 마치기 전에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일단 반을 끝내고 나서 그만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어떤 일이든 우선 성공적으로 반을 마치겠다는 1차 목표를 세우고 추진해왔다. 내용이 난해하고 두꺼운

 

책들을 독파하는 일도 내게는 쉽지 않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매주 책 한권은 읽어 텅 빈 머릿속을 채워 온 나는

 

종종 두껍고 난해한 책을 사 완독에 도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이 책의 반을 읽기까지 접었다 펴기를 수도 없

 

이 하지만 설사 내용이 제대로 이해가 안 되더라도 반을 읽기까지는 꾹 참고 읽어나간다. 일단 반을 넘기면 이

 

미 읽어온 쪽수와 남은 분량의 쪽수를 비교해가며 이제는 거의 다 읽었으니 힘내라고 내 스스로를 독려한다.

 

어떤 때는 정독을 해서 책의 내용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다 읽어치우는데 목표를 두기에 내 독서습관

 

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남에게 권할 만큼 자랑스러운 읽기습관이 절대로 못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좋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곰처럼 읽어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시작이 반이다”라는 금

 

언보다 “반을 해야 다 할 수 있다”는 한마디를 더 신뢰하는 편이다. 이러한 내게 이번에 호남정맥의 중간지점

 

을 지난 것은 충분히 자축할 만한 일이어서 이렇게 그 기쁨을 산행기에 담아본다. 

 

 

 

 

 

아침7시16분 입석리고개를 출발했다. 담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6시 반에 담양정류장에서 33번 군내버

 

스를 탔다. 30분 걸려 다다른 대덕의 아침거리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입석리고개까지 5천원을 들여 택시로

 

이동했다. 입석리고개에서 느티나무 거목들 옆으로 난 넓은 길을 2-3분 따라가다가 왼쪽 묘지로 들어서 산 오

 

름을 시작해 반시간 가까이 치켜 오르는 중 며늘아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일단 들머리에 들어서면 하산해서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바테리 소모를 막고자 전화를 꺼놓는데 이번에는 전날 밤 받지 못한 며늘아기의 전화

 

내용이 궁금해 계속 켜 놓아 산행 중에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이달부터 대학병원에

 

서 방사선 전문의로 일하기 시작한 며늘아기가 직계존속인 내가 병원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음을 알

 

려주고자 전화를 걸어와 고마웠다. 병원신세를 지지 않고자 매주 이틀은 산을 올라서인지 아직은 내 몸 어디

 

에도 아픈 구석이 나타나지 않아 건강에 관한 한 아들 며느리에 큰소리 칠 수 있지만 누구도 사람 앞일을 다

 

알지 못하는 바라 며늘아기의 보살핌에 마음이 놓였다. 능선 갈림길에서 12분을 더 걸어올라 7시56분에 해발

 

593m의 수양산을 올랐지만 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전망이 신통치 못했다.

 

 

 

 

 

8시36분 호남정맥 중간지점을 통과했다. 수양산에서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 호남정맥에 복귀했다. 담양읍내에

 

는 이른 아침 문을 여는 밥집이 없어 전날 밤 준비한 떡과 바나나로 아침요기를 한 후 8시20분에 갈림길에서

 

일어나 북동쪽 아래 임도로 내려섰다. 차들이 다닐만한 넓은 임도를 건너 둔덕에 올라선 다음 오른 쪽으로 꺾

 

어 얼마간 걸어 스텐리스 표지봉이 세워진 중간지점에 다다랐다. 배낭을 표지봉 옆에 내려놓고 기념사진을 찍

 

은 후 오른 쪽 아래 임도와 나란한 방향으로  직진하여 다시 임도를 만났다. 임도를 건너 직진해 오르다 좌 사

 

면이 벌목지인 능선 길을 따라 걸어 윗부분이 잘려나가고 밑동만 남은 소나무들이 삼각점을 빙 둘러싸고 있는

 

450.9m봉에 도착한 시각이 8시56분이었다.

 

 

 

 

 

먼저 호남정맥의 중간지점을 지난 많은 분들의 표지기를 보자 앞서 이 정맥에 길을 낸 많은 분들이 새삼 고마

 

웠다. 길은 소통의 통로다. 먼저 용감하고 호기심이 많은 분들이 길을 내면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소통을 한

 

다. 뒤이어 이 길을 통해 문물이 유통되고 문화가 소통된다. 사유림이라 하여 철조망을 쳐놓고 길을 막는 것은

 

바로 모든 소통을 막는 것이기에 함부로 자행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여암 신경준 선생께서 길은 그 길을 걷

 

는 사람이 주인라고 갈파한 것도 땅은 임자가 따로 있어도 땅위에 낸 길의 임자는 땅주인이 아니고 그 길을 트

 

고 닦으며 걷는 사람들이 주인임을 강조한 것으로 이리하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소통이 막혀 우리가 몸담고 있

 

는 사회가 썩어문드러지게 될 것을 염려해서였을 것이다. 소통의 길은 끝이 없기에 기실 반도 중간지점이 있

 

을 수 없다만, 무한히 계속되는 세월을 잘게 토막 내 달력을 만들면 언제 한 해의 반이 지남을 알 수 있듯이,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도 지도를 만들어 선을 그으면 양끝지점의 중간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있기에 이처럼

 

감격하며 호남정맥 중간지점을 지날 수 있다는 생각이어서 고산 김정호선생에도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

 

고자 한다.

 

 

 

 

 

9시50분 해발 575m의 만덕산을 올랐다. 450.9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진행하다 다시 임도를 건너 직진해 석성

 

의 잔해가 보이는 무명봉에 올랐다. 이봉우리에서 왼쪽 안부로 내려서자 운암리길이 왼쪽 아래로 갈렸다. 직

 

진해 얼마큼 올라 신선바위를 지났고 조금 후 전망바위에 다다라 왼쪽 아래 운암리 마을 전경을 사진으로 담

 

아 왔다. 좌 사면이 급전직하 절벽인 능선 길을 걸어올라 “만덕산할미봉”의 표지석이 세워진 정상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여 전망이 일품이다. 이번 산행 중에 지나야 할 호남고속도로가 좌우로 뻗어나가고 지나온 능선

 

길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이 아찔해 보였다. 다시 “문재고개입구/정상할머니바위/등산로입구”의 이정표가 세

 

워진 삼거리로 돌아가 억새밭을 지난 후 능선 따라 북동쪽으로 하산하다가 가파른 길을 걸어 500m봉에 올랐

 

다.

 

 

 

 

 

11시 정각 방아재를 지났다. 500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난 급경사 길을 걸어 내려가 만난 임도길이 방아재인 것

 

같아 빨리 내려왔다 했는데 지도를 꺼내보고 방아재는 앞에 보이는 390m봉을 넘어야 다다를 수 있는 아스팔

 

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 마루임을 알았다. 임도길 고개 마루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내려가 왼쪽 위 묘지로

 

올라섰다가 길이 끊겨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을 내며 40-50m를 왼쪽으로 이동해 다시 정맥 길로 들어서느라 초

 

입에서부터 진이 빠져 390m봉을 오르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큼직한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역암의 큰 바위를

 

지나 묘지가 들어선 390m봉에 오르는 동안 전망 좋은 곳에서 숨을 돌리며 오른 쪽 아래 저수지를 카메라에 옮

 

겨 담았다. 방아재에서 포장도로를 건너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빠져나오자 더위가 느껴졌다. 방아재에서

 

연봉에 오르기까지 40분간이 힘들었던 것은 방아재에서 쉬지를 못한데다 연봉 못 미쳐 460m봉에 오르는 길의

 

 경사가 아주 급해서였다. 고사목 지대와 묘지를 지나 460m봉에 오르고 나서는 밋밋한 능선 길이어서 연산까

 

지 가는데 힘든 줄 몰랐다. 11시39분에 나무줄기에 “연산”이라 쓰인 표지기를 매놓은 해발505m의 펑퍼짐한

 

연산 정상에 올라서서 두 다리를 쭉 펴고 14분간 편히 쉬었다.

 

 

 

 

 

12시56분 N-C 오일 주유소가 들어선 과치재에 도착했다. 연산에서 과치재로 내려서는데 딱 1시간이 걸렸다.

 

11시53분 연산에서 얼마간 내려선 후부터는 한동안 편한 길이 이어졌다. 연산 출발 12분 후에 다다른 거암이

 

독특했던 것은 철의 산화물이 잔뜩 들어있는 시뻘건 바위를 기반암으로 해 그 위에 자갈들이 알알이 박힌 역

 

암(礫岩)이 마치 사람이 들어 올린 것처럼 똑바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 바위들을 지나 조금 올라섰다가 노간

 

주나무들이 보이는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선 봉우리가 340m봉으로 뒤를 돌아보자 힘들게 지

 

나온 길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괘일산과 무이산이 보이는 전망바위를 지나 급하게 내려가다 밤나무 밭에

 

다다랐다. 가을철이었다면 밤을 줍느라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밤나무 밭을 지나자 호남고속도로에 면한 절개

 

면이 나타났다. 절개면 상단에서 오른 쪽으로 배수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이 배수로를 따라 호남고속도로를 지

 

하로 통과했다. 허리를 잔뜩 구불이고 배낭을 질질 끌며 통과하는 배수로의 심리적 길이는 실제 길이의 몇 십

 

배가 넘는 듯 지루했다. 고속도로를 밑으로 통과해 N-C 오일 주유소가 들어선 구도로의 고개 마루인 과치재

 

에 도착했다.

 

 

 

 

 

연산을 조금 지나 만난 메주 형상의 바위들이 다시 생각났다.  지구의 외핵은 그 안의 내핵이나 밖의 맨틀 또

 

는 지각과는 달리 액체로 되어 있는데 용융된 철(Fe)과 마그네슘(Mg)의 혼합물이 주성분이다. 지구가 자성을

 

띄고 있는 것도 외핵 속에 녹아 있는 철 성분 때문이다. 역암은 바다로 굴러들어온 자갈에 진흙이나 모래가 채

 

워져 굳어진 퇴적암이다. 철은 지하 2,900Km-5,100Km 깊이의 외핵에 녹아 있고 역암은 바닷가에 퇴적되어

 

만들어진 바위인데 출신지가 전혀 다른 두 바위가 어떤 연유로 여기 호남정맥의 산줄기에서 만나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했다. 필시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시뻘건 바위는 화산활동 때 분출되어 식은 것이겠고 역암은

 

지각변동 시 바다가 융기해 만들어진 것일 텐데  이 두 가지 역경을 모두 견뎌내고 오늘까지 제 모습을 견지해

 

온 우리의 호남정맥이 참으로 장하다 싶었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줄기가 합쳐진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부

 

르며 금슬 좋은 부부에 비유하는 데, 시간과 공간을 전혀 달리하는 두 바위가 이렇게 만난 것은 연리암(連理

 

岩)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금슬 좋기는 연리지만큼만 해도 연리암(?) 바위의 수명이 연리지 나무에 비할 바

 

가 아니기에 연리암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14시29분 무이산 바로 아래 안부의 성림청소년수련원 분기점에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과치재에서 240m봉에

 

이르는 오름길은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았지만 햇빛을 가릴 수 없어 조금은 더웠고 길도 지루했다. 먼저 오른

 

한 분이 여기쯤을 지날 때 멧돼지들이 집단으로 꿀꿀거리는 소리를 들어 긴장했었다는 산행기를 본 터라 과치

 

재에서도 쉬지 못한 몸을 이끌고 단숨에 240m봉을 오르느라 많이 지쳤고 배도 고파 이 봉우리에서 짐을 풀고

 

점심을 들었다. 240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섰다가 260m봉으로 진행하는 동안 누군가가 정성들여 만들어 걸어

 

놓은 이제껏 접하지 못한 색다른 표지물을 보았다. 초록색 1개와 노란색 1개 그리고 붉은 색 2개의 바람개비를

 

한 줄로 엮어 걸어놓은 색색의 표지물로 모양도 아름답고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260m봉을 넘어 해발

 

304m의 무이산을 오르는 길이 마지막으로 급했다. 14시18분에 한 소나무에 “무이산”표지기가 걸려 있는 무이

 

산을 올라 잠시 호흡을 고른 후 이내 오른 쪽 아래로 성림청소년수련원으로 길이 갈리는 안부로 내려서 이번

 

종주산행을 끝냈다.

 

 

 

 

 

일단 서흥고개까지 진출할 것인가 문제로 한참을 고심하다 여기 안부에서 멈춘 것은 귀경시간이 너무 늦고 비

 

가 내릴 것 같아서였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그동안 정이 흠뻑 들은 전남 땅을 이번까지 걷고 전북 땅은 다음번

 

에 발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5-6분을 걸어 다다른 성림청소년수련원에 도착한 시각이

 

15시4분으로 여기에서 하루산행을 접고 택시를 불러 옥과로 이동했다.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광주행버스가

 

광천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40분이 걸렸다. 다음번에 광주에서 옥과를 거쳐 성림청소년수림원으로 가서

 

정맥종주를 이어가기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쉬워 수련원갈림길에서 구간을 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정말 반을 해냈다. 이제 남은 반은 천천히 걷고 찬찬히 여기저기를 들여다보며 마치고자

 

한다. 오는 7월에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호남정맥종주를 마무리 지은 후 나머지 반을 마저 해낸 기쁨을 올릴

 

생각에서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환주기23:호남정맥 21구간(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방축리금과동산)

 

*산행일시:2008. 3. 25일/ 10시38분-18시38분(8시간)

 

*소재지  :전남담양/곡성/순창

 

*산높이  :괘일산446m, 서암산456m, 봉황산236m, 고지산315m

 

*산행코스: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서흥고개-서암산-봉황산-88고속도로-방축리금과동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그 말씀은 어떤 품사(品詞)였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 품사는 아마도  

 

사  물을 가리키는 명사(名詞)였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정하는 것은 아기들이 맨 먼저 익히는 단어들이 “찌

 

찌” “맘마” “아빠” 등의 명사가 아닐까 해서다. 물론 품사니 명사니 하는 것들 모두 먼 훗날 글이 생기고 나서

 

이름 붙여진 것이지만 굳이 말한다면 태초의 말씀은 명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명사처럼 바쁜 품사도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 생기고 사라지는 사물들에 일일이 이름을 지어 구별해야하

 

니 잠시도 마음 편히 쉴 새 없는 품사가 명사일 것이다. 우리말이 다른 나라 말보다 뛰어난 점은 의성어와 의

 

태어 등 부사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갈고 닦은 것만으로도 소리시늉이나 짓시늉을 표현하기에 별반 모

 

자람이 없을 것 같아 새로 생길 부사는 그리 많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명사는 전혀 다르다. 수많은 신물질과

 

 신상품 그리고 광속으로 변화하는 세태를 나타내는 새로운 명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번 호남정맥 종주 중에 높은 산의 형체를 그대로 빼닮은 구름을 보았다. 산행 중에 골짜기를 뒤덮어 마치 바

 

다처럼 보이는 운해(雲海)는 가끔 보았지만 산 모양을 그대로 갖춘 구름을 만나 카메라에 담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저런 모양의 구름은 당연히 운해(雲海)에 대비되는 운산(雲山)으로 부르겠지 한 내 생각이 틀렸음

 

을 안 것은 집에 돌아와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였다. 운산(雲山)이란 “구름이 낀 높고 아득한 산”으로 구름

 

이 아니고 산을 일컫는 말로 적혀 있었다. “운산(雲山)”이 아니라면 “산운(山雲)”인가보다 했는데 이 또한 “산

 

에 끼어 있는 구름”으로 뜻풀이가 되어있어 난감했다. 내가 이번에 카메라에 담아온 높은 산 모양의 구름은 어

 

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열고나서 이 땅에서 줄곧 존재

 

해온 것인데 형상만 만드시고 이제껏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셨다면 과연 태초에 어떤 말씀이 있었는지 잘 이해

 

되지 않았다. 그 많은 명사들 중에 고산의 모양을 하고 있는 구름을 나타내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함은 우리의

 

언어가 그리 완벽하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기에 노자께서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그 본성을 잃게 된다고

 

“명가명 비가명(名可名 非可名)”을 말씀하신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과연 옳은 말씀이다 싶었다.

 

 

 

 

 

이번에 만나 본 구름 산은 장관이었다. 저 정도 높이라면 이제까지 내가 오른 산들 중 가장 높은 해발4,095m

 

의 키나바루산보다 훨씬 높고 산줄기의 위세 또한 설악산의 서북주능을 뛰어넘어 보였다. 몸은 비록 2-3백m

 

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호남정맥 길을 걷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알프스의 연봉들보다 훨씬 높은 구름 산을 오

 

르내리고 있다 싶어 가슴이 두근댔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뜬금없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

 

라는 선현들의 옛 말씀이 생각난 것은 내 말솜씨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석양이 비추는 구름 산의 황홀함을 제

 

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였다. 선현들의 말씀인 즉 불완전한 언어로 백번 듣는 것보다 두 눈으로 직접 사물을 있

 

는 그대로 한 번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뜻 일진데 이는 우리 언어의 한계를 바로 지적하신 것이다. 그래서 솜

 

씨는 정말 보잘 것 없지만 사진만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감히 사진 한 컷을 글과 함께

 

올릴 마음을 먹었다.

 

 

 

 

 

아침10시38분 괘일산 못 미쳐 사거리 안부인 성림청소년 수련원 갈림길을 출발했다. 전남 곡성의 옥과에서 택

 

시를 타고 가 수련원 입구 삼거리에서 하차했다. 왼쪽으로 난 임도 길을 10분 동안 걷다가 오른 쪽 산소위로

 

올라가 곧바로 갈림길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밟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만난 더 넓은 사거리

 

에서 직진해 괘일산 암봉 바로 밑까지 올랐다. 이곳에서 거암을 왼쪽으로 에돌다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

 

꾸어 고도를 높여갔다. 우측사면이 암벽인 능선 길 오른쪽에 시꺼멓게 불탄 흔적이 보였는데 길 왼쪽 나무들

 

은 멀쩡한 것으로 보아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방화선의 역할도 같이 했음이 분명했다. 봄의 화신답게 생강나무

 

와 진달래가 꽃을 활짝 피워 이들을 보는 나도 가슴을 활짝 열고 봄을 맞이했다.

 

 

 

 

 

11시28분 해발446m의 괘일산을 올랐다. 삼각점도 표지석도 없는 암반에다 뿌리박은 한 나무에 표지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면 다른 암봉들과 높이 차가 크게 나지 않아 이 암봉이 괘일산 정상이라 알아채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수련원과 그 옆의 저수지가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내려서 3개의 봉우리를 연이어

 

길이 아기자기하고 오를 만하다는 내용을 읽고 나서 아예 릿지화를 신고 왔는데 바위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벼워 암릉길 산행이 한껏 즐거웠다. 마지막 암봉에서 건너편 회색바위의 설산과 조금 전

 

로프를 잡고 올라섰던 지나온 암봉 들을 카메라에 담은 후 왼쪽으로 내려가 편안한 솔밭 길을 걸었다.

 

 

 

 

 

12시17분 전라북도로 첫 발을 들이는 설산갈림길에 도착했다. 마지막 암봉에서 솔밭 길로 내려가 15분가량 걸

 

었더니 바로 위에 꽤 넓은 공터가 자리 잡은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 건너 5-6분을 올라 다다른 능선삼거리가

 

전남담양과 곡성 및 전북 순창의 3개 군이 만나는 접점으로 오른 쪽으로 곡성의 명산인 설산을 오르는 길이 나

 

있었다. 동악산의 해오름에 버금가는 이 산의 해넘이가 장관이어서 곡성팔경의 첫 번째가 “동악조일(動樂朝

 

日)이고 두 번째가 "설산낙조(雪山洛照)"라 하는데 1Km밖에 안 떨어진 설산을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고나

 

자 많이 아쉬웠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다가 나보다 더 연배로 보이는 몇 분들을 만났다. 아침8시경 방

 

축리를 출발했다는 이분들도 나처럼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분들로 서로들 갈 길이 멀어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송전탑을 지나고 길 왼쪽에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친 임도를 한참 걸어 오른 쪽 바로 아래

 

마을이 보이는 오거리안부로 내려섰다.

 

 

 

 

 

13시59분 해발 456m의 서암산에 올라가 점심을 들었다. 오거리 안부에서 낮은 봉우리를 오르내려 베어낸 나

 

무들이 길을 가로막은 능선을 따라 한 참 동안 걷는 중 어느새 줄기가 새파래진 명감나무가 가시를 세워 집적

 

대기 시작했다. 고개 마루 왼쪽만 시멘트포장 길인 서흥고개에 다다른 시각이 13시14분으로 시장기가 느껴졌

 

다. 언제 이런 연초록 꽃송이를 보았던가 싶은 오리나무가 팔을 크게 벌리고 나를 반기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내려선 임도에서 직진하여 조금 오르자 길 오른쪽으로 파란 지붕의 조촐한 건물이 한 채 보였다. 서암산

 

허리를 왼쪽으로 가로지르며 너덜 길을 지나 올라선 능선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정상에 오르자 “독도법#8”이

 

라는 팻말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들면서 14분을 쉰 후 똑바로 내려갔다 다시 오른 봉우리에

 

산불감시초소가 서있었다.

 

 

 

 

 

15시34분 일목고개에 도착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지 않고 똑바로 진행한 것이 이번 알

 

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이는 초소를 지키는 누군가가 안에서 자고 있어 입산금지기간에 산을 올랐다는 죄의

 

식에 나도 모르게 들키지 않으려고 지도를 보지 않고 재빨리 지나쳤던 것이다. 초소에서 3-4분을 내려가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 쪽 큰 길로 내려가다가 길이 아닌 것 같아 이내 올라서 다시 왼쪽 길로 내려서자 이내 넓은

 

묘지가 나타났다. 양지바른 곳의 샛노란 개나리와 진적색의 동백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꽤 오래 걸었어도 표지기가 안보여 불안해하던 중 흐릿한 종주표지기가 하나 보여 맞는 길이다 했는

 

데, 그 후로는 다시 한 번도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들었다 싶어 먼저 오른 한 분의 산행기를 꺼내 읽었다. 길

 

을 잘 못 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은 잘도 들어맞아 이제 다시 초소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얼마 남지 않

 

은 지방도로 내려서서 일목고개를 찾아갈 것인 가를 결정해야 했다. 반시간 가까이 되올라가다가는 지쳐서 목

 

적지인 방축리까지 나아갈 기운이 소진될 것 같아 그냥 차도로 내려섰다. 지도를 보니 차도를 따라 왼쪽으로

 

쭉 가면 일목고개에 다다를 것 같아 부지런히 내달렸다. 낮은 고개를 하나 넘어 만난 담양/금과 양쪽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왼쪽 담양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일목고개에 올라서자 표지기가 다시 보였다. 이번 알바로

 

반시간 이상은 늦어진 셈이어서 서둘러 오른 쪽의 봉황산으로 향했지만 대나무 밭을 지나 다다른 묘지에서 10

 

분가량 쉬면서 알바로 지친 몸을 추슬렀다.

 

 

 

 

 

17시16분 해발315m의 고지산을 올랐다. 일목고개 출발 35분에 해발 236m의 봉황산을 올라선 다음 인삼밭과

 

다소곳하게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백목련 등 몇 가지 나무들을 기르고 있는 묘목 밭을 지나 88고속도로변에

 

다다랐다. 갓길을 따라 2-3분을 내려가 시멘트중앙분리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88고속도로를 건너 복숭아밭으

 

로 들어섰다가 능선으로 올라섰다. 한참을 걸어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겁이 덜컥 났지만 얼마 후 다시 표지

 

기가 보여 안심하고 내달려 고지산 정상에 오르자 삼각점이 보였다. 조금 내려가다 왼쪽으로 확 꺾어 한참을

 

남진해 다시 88고속도로를 만난 것이 17시46분이었다. 고속도로 밑으로 난 수로가 보이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조금 가다 고속도로로 올라서 10여 분 간 순창방향으로 갓길을 따라 걸었다.

 

 

 

 

18시41분 방축리 금과동산에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88고속도로를 건너 수문(?) 위 표지기가 보이는 넓은 길로

 

들어섰는데 길은 이내 희미해져 길을 잃을 뻔했다. 낮은 봉우리에서 직진하다 왼쪽 아래 임도로 들어서 다시

 

88고속도로를 만났다. 길 건너 표지기가 보이는 왼쪽 담양 쪽으로 조금 내려가 고속도로를 건넌 후 다시 절개

 

면 위 산길로 붙었다. 절개면을 올라서자 편안한 임도 길이 나타났고 얼마 동안 이 길을 걸으며 서편 해넘이의

 

산 모양을 하고 있는 구름 산이었다. 그간 한 여름에는 이 같은 구름 산을 몇 번 보았지만 이른 봄에 저토록 드

 

높은 구름 산을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사진 몇 커트를 찍었다. 방축리가 가까워 밭가 큰 길을 한껏 느

 

긋하게 걸으며 장엄한 낙조를 보고나자 하루 피로가 사르르 사라져 온 몸이 개운했다.

 

 

 

 

 

파출소를 지나 도착한 금과정류장에서 2-3분을 가다려 순창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순창에 내려 맥주 한 캔을

 

사들며 찜질방을 물었으나 이 도시에는 없고 담양으로 나가야 있다고 해 다시 광주행 버스를 타고 담양으로

 

가 하룻밤을 묵었다.

 

 

 

 

 

변화무쌍한 구름 놀이는 언제보아도 매혹적이다. 은은하면서도 잔잔한 새털구름이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면, 당장이라도 큰비를 내릴 것 같은 적란운의 먹구름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산자락에 걸친 구

 

름바다는 태고의 비밀을 바다 속에 묻어둔 양 한껏 신비해보이고, 산줄기 위로 펼쳐진 구름 산은 나를 구름 위

 

로 들어 올려 몽환적인 구름 산길로 안내할 것 같았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구름모양을 일일이 이름붙이기

 

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 산행에서 만나본 구름 산은 누구라도 나서서 걸 맞는 이름을 붙여주면 정말 고맙겠

 

다. “명가명 비가명(名可名 非可名)”이라는 노자의 말씀도 옳은 말씀이지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의 “언어

 

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씀도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저 구름 산이 끝내 이름을 얻지 못한다면 존재의 집을 짓

 

지 못하는 것이기에 머지않아 형상도 없어지고 이미지도 사라질 것이다. 구름에 대한 대접이 이래서야 어찌

 

구름의 신 제우스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겠으며 그 분노가 부르는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나서서

 

구름 산에 붙여줄 적절한 이름을 찾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제우스신이 화내는 일이 없도록 해 산행

 

중 평화를 얻고자 위함이다. 

 

 

 

 

 

 

 

 

 

 

 

 

 

환주기24:호남정맥 22구간(방축리금과동산-오정자재)

 

*산행일자:2008. 3. 26일/ 6시48분-16시18분(9시간30분)

 

*소재지  :전남 담양/ 전북 순창

 

*산높이  :광덕산564m, 산성산598m, 강천산584m

 

*산행코스:방축리금과동산-덕진봉-광덕산-시루봉-산성산-강천산 -522봉-오정자재

 

 

 

 

 

두주 전만 해도 썰렁하기 그지없던 호남정맥 산길에 물밀듯이 봄이 밀려왔다. 섭씨 100도 미만의 온도에서는

 

표면에서 증발만 일어나다가 100도가 되어야 속에서도 요동치며 펄펄 끓는 물처럼 봄도 내부적으로 쌓아온 에

 

너지가 일정수준을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나보다. 지난번에는 산행 중에 어떤 종류의 꽃도 만나보지 못

 

했는데 이번에는 생강나무의 노랑꽃을 필두로 연분홍의 진달래, 진분홍의 매화, 하얀 색의 목련과 매화, 진적

 

색의 동백과 노란 수꽃의 오리나무 등 이런 저런 나무 꽃들을 꽤 많이 만났다. 호남정맥 산길에 꽃을 피운 것

 

은 나무뿐만 아니었다. 조금은 철이 이른 듯 연약하고 여려 보이는 연파란 색의 제비꽃과 노란 양지꽃이 살그

 

머니 봄을 열었다.

 

 

 

 

 

올 봄에는 그냥 지나치나보다 했던 꽃샘추위가 산위에 봄꽃이 웬만큼 피었다 싶어서인지 한 순간 호남정맥을

 

급습해 깜짝 쇼를 부렸다. 산성산 최고봉에서 잠시 쉬며 목을 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꺼먼 먹구름이 끼

 

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금방 캄캄해지고 곧이어 함박눈이 쏟아졌다. 얼마 못 걸어 배낭과 겉옷이 눈에 젖어 잠

 

시 멈춰 서서 우의를 꺼내 입고 산행을 계속했는데 퍼붓는 함박눈이 안경을 가려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한 시간만 계속해 퍼붓는다면 눈 속에 새 길을 내며 산행을 해야 할 것 같아 처음에는

 

겁이 더럭 났다. 아이젠을 빼 놓고는 웬만큼 눈이 와도 견뎌낼 만큼 겨울산행 준비물을 챙겨온 터라 크게 걱정

 

은 되지 않았지만 폭설로 산행이 늦어지면 목적한 오정자재까지는 포기하고 중간에서 강천사로 하산하는 것

 

이 불가피할 것 같았다. 눈을 맞고 15분 남짓 걸어 내려가 북문에 도착하자 언제 그리했느냐는 듯이 눈발은 뚝

 

 그쳤고 햇빛이 다시 났다.

 

 

 

 

 

물려주고 물러남이 가장 뚜렷한 계절의 변화에도 이런 생 쇼가 벌어지는데 10년간 계속되어온 권력의 전이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번 대선에서 패한 세력들은 입법권마저 내줄 수는 없다고 이번 총선에 전

 

력투구할 것이고, 승리한 쪽에서는 입법권이 뒷받침되지 않는 권력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 생각하여 과반수 의

 

석확보를 위해 사투를 벌일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두 세력 간의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가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겠지만, 선거법이라는 공정한 게임의 룰을 정해 한판 붙는 것이기에 그리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두 세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얼굴색을 바꾸고 그들 간의 힘겨루기를 국회라는 점잖은 장으로 옮겨

 

갈 것이다. 동토의 왕국 북한 땅에서는 선거라는 공정한 게임이 존재하지 않아 지난 60년간 이렇다 할 봄꽃을

 

피우지 못했기에 북녘 땅에는 저처럼 봄꽃을 찾아 산줄기를 종주하는 산 꾼들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옛

 

시인 이상화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명시가 북한 땅에서는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고자 자유롭게 정맥길 종주에 나설 수

 

있는 이 나라가 정말 자랑스럽고 이 산하가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산객이 분명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

 

다.  

 

 

 

 

  

아침6시48분 방축리 금과동산을 출발했다. 하룻밤을 묵은 담양에서 여기 순창의 금과까지 버스로 2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종주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금과에서 내려 담양 쪽으

 

로 5-6분을 되걸어가 담양의 금성면과 순창의 금과면을 경계 짓는 금과동산에 다다르자 오른 쪽 마을로 들어

 

가는 시멘트길 옆에 표지기가 걸려 있었다. 마루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 산줄기를

 

따르고자 했으나 이내 길이 사라져 도저히 마루금을 온전하게 이어갈 수 없었다. 풀숲 길의 산줄기는 논밭개

 

간으로 바로 끊겼고 다시 이어진 산줄기도 분명치 못해 난감해하다가 둔덕에 원두막 같은 것이 눈에 잡혔다.

 

먼저 지나간 한분의 산행기에 나오는 세심정이 저 곳이겠다 싶어 이미 끊겨 사라진 산줄기를 이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넓은 농로로 들어서 둔덕으로 올라서기까지 몇 번이고 논둑을 왔다갔다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연됐

 

다.

 

 

 

 

7시55분 해발 370m의 덕진봉을 올랐다. 둔덕 위의 정자는 과연 세심정이어서 이제는 길을 찾았다 싶어 마음

 

이 놓였다. 붉은 꽃과 하얀 꽃이 소담스러워 보이는 매화꽃이 나를 반겨 냉랭한 아침공기도 삽상하게 느껴졌

 

다. 철망을 넘고 갈아놓은 밭의 왼쪽 가를 지나 표지기가 걸린 산길로 들어서자 묘지가 나타나 잠시 숨을 돌렸

 

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만난 사거리에서 직진해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합류하기까지 3-4분 동안

 

길이 희미해 애를 먹었다. 큰길로 들어선 후로는 표지기가 많이 걸려 있어 덕진봉에 오르는데 아무런 어려움

 

이 없었다. 금과동산에서 마을을 통과해 세심정 앞을 지나는 큰길로 계속 오르면 될 것을 잇지도 못한 마루금

 

을 고집하다 반시간은 늦어졌다. 담양에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음식점이 없어 준비해온 김밥으로 조반을 대

 

신하느라 돌탑이 세워진 덕진봉에서 14분을 쉬었다. 오른쪽 사거리안부로 내려섰다가 뫼봉에 오르는 길에 생

 

강나무와 오리나무(?)의 연두색 봄 색깔에 매료되어 잠시 발걸음을 멈춰서기도 했다. 전망이 일품인 해발

 

332m의 뫼봉에 다다른 시각은 8시35분으로, 곧바로 내려섰다가 이내 그리 높지 않은 전망 좋은 봉우리에 올

 

라 북서쪽의 광덕산과 산성산을 잇는 산줄기를 한껏 조망했다. 전망 봉에서 급경사 길로 내려서자 편안한 능

 

선길이 몇 분간 이어졌는데 이 동안 힘을 비축해 된비알 길을 쉬지 않고 걸어 350m봉에 올라선 시각이 정각 9

 

시였다. 

 

 

 

 

 

10시11분 해발564m의 광덕산에 올라섰다. 커다란 돌로 축대를 쌓은 묘지 바로 위에 간벌한 소나무 가지가 나

 

뒹구는 350m봉에 오르자 눈에 익은 표지기들이 한꺼번에 걸려 있어 반가웠다. 오른 쪽으로 급하게 내려섰다

 

가 삼각점이 서있는 262.9m봉을 넘어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사거리안부로 내려서자 오른 쪽으로 광덕산을

 

휘감아 도는 꽤 넓은 비포장차도가 보였고 왼쪽으로 예림복지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해발고도 200m대

 

의 안부에서 광덕산을 오르는 길이 이번 산행 최고의 깔딱 길이었다. 비포장차도를 3번을 건너 흉물스런 절개

 

면 앞에 서기까지 진이 좀 빠졌는데 정작 된 고비는 여기부터였다. 절개면을 올라서서 광덕산 정상에 오르기

 

까지 반시간 동안 수직으로 고도를 200m넘게 높이느라 진땀을 뺐다. 절개면을 비스듬히 오르다가 경사가 40-

 

50도는 됨직한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다다른 암봉 밑에서 거암을 에돌아 능선에 올라서니 헬기장방향에서 올

 

라오는 주홍색 철제계단이 바로 아래 놓여있었다. 왼쪽아래 예림복지원과 문암제 저수지를 조망한 후 오른쪽

 

암릉 길을 잠시 로프를 잡고 올라 광덕산 정상에 올라서자 2년 전에 걸었던 산성산-강천산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와 비를 쪼록 맞고 한 산행이 새롭게 기억났다. 사방이 시원하게 탁 트인 광덕산에서 15분간 푹 쉰 후 앞

 

서 본 주홍색 철제계단으로 되돌아가 헬기장으로 내려섰다. 헬기장에서 오른 쪽 길은 선녀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었고 정맥 길은 맞은 편 봉우리를 오르는 똑바른 길이었다. 헬기장을 출발해서 그 45분 후인 11시22분에

 

시루봉아래 철 계단에 다다르기까지 봉우리를 몇 개 넘는 동안 노란 꽃을 활짝 피운 생강나무도 만나보았고,

 

또 몇 곳의 전망바위에서 시루봉과 왼쪽아래 시골 논 정경을 카메라에 실기도 했다. 

 

 

 

 

 

12시16분 산성산 최고봉인 해발 598m의 연대봉에 다다랐다. 철 계단을 올라 바로 밑에서 치올려본 시루봉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엄청 큰 바위여서 오르기가 쉽지 않겠다했는데 밑으로 에돌아 산성 능선에 올라서자 길이

 

나있어 오를 만했다. 산성산의 첫 봉우리인 해발515m의 시루봉에 오르자 덕진봉에서 밟아온 마루금이 확연히

 

드러났다. 왼쪽 아래로 금성산성의 망루가 보이는 동문을 지나 산성 길 위에 곧추선 해발585m의 운대봉을 오

 

른 것은 시루봉 출발 23분 후였다. 삼각점이 세워진 산성 길에서 조금 더 올라 이 산 최고봉에 올랐는데 정상

 

석이나 삼각점 등 정상을 알려줄 만한 어떤 표지물도 없어 갈라진 목제 표지판이 놓여있었던 두 해전에 이 봉

 

우리를 오르지 않았다면 과연 상봉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루봉에서 싸락눈이 한두 번 떨어지

 

다가 말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연대봉을 뜨자마자 함박눈이 쏟아져 잠시 긴장했다. 북문에 다다르자 눈발이

 

그쳤고 하늘이 열려 서쪽의 추월산과 그 아래 그림 같은 담양호가 그 전모를 드러내 다음 산행이 기대됐다. 서

 

쪽 아래로 산성이 이어지는 북문에서 점심을 들은 후 12시54분에 자리를 떴다.

 

 

 

 

 

 

14시12분 해발 584m의 강천산을 올랐다. 북문에서 강천산으로 가는 길은 한 번 밟은 길이라 쉬지 않고 쏜살같

 

이 내달렸다. 490m봉 두 봉을 왼쪽으로 연이어 에돌아 내달리는 중 산 중턱 길에서 식사를 하시는 노인 두 분

 

을 만나 인사를 드렸는데 이 분들이 이번 산행에서 만난 분들 전부였다. 480m봉을 에돌아 안부로 내려섰다가

 

형제봉 삼거리로 올라서는 중 속 털만 샛노란 새를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몇 번을 시도했지만 계속 자리를 옮

 

기며 날아다니는 통에 단 한 커트도 찍지 못했다. 형제봉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강천산으로 오르는 길은

 

넓고 편했다. 정맥에서 길이 갈리는 왕자봉삼거리에서 동쪽으로 200m를 옮겨 강천산을 오르자 오전에 올랐던

 

광덕산이 계곡 건너 남쪽으로 아주 가깝게 보였다. 광덕산에서 계곡을 끼고 시계방향으로 “ㄷ”자를 그리며 강

 

천산에 올라서기까지 4시간 가깝게 걸어온 산줄기를 빙 한번 휘둘러보면서 10분을 쉰 후 왕자봉삼거리로 되돌

 

아가 정맥종주를 이어갔다.

 

 

 

 

 

15시29분 522m봉에 올랐다. 되돌아온 삼거리에서 3-4분 거리인 병풍바위 갈림길까지는 잘 닦인 공원길이었

 

고, 그 다음부터는 전혀 손이 가지 않은 정맥 길이어서 길 찾기에 신경이 쓰였다. 520m봉을 가볍게 넘어 급하

 

게 내려가 오른 쪽으로 외양제 저수지가 보이고 왼쪽으로 임도 길이 흐릿한 사거리 안부에 도착했다. 안부에

 

서 삼각점이 세워진 522m봉에 올라서는 길이 된비알 길이어서 고됐다. 직등 길을 힘들게 올라 다 왔다 했는데

 

522m봉은 그 뒤에 서 있었다. 전망 좋은 봉우리의 북쪽 사면이 까까 비탈 암벽 길이어서 가는 줄을 잡고 에돌

 

아 조심해서 내려섰다. 안부에서 다시 올라가 522m봉에 올라서 삼각점은 확인했지만 전망은 앞서 올라선 봉

 

우리보다 훨씬 못했다. 앞으로 1시간 남짓이면 오정자재에 충분히 닿을 것이고, 16시40분에 순창을 출발하는

 

정읍 행 버스가 이 고개를 지나는 시각이 대략 17시 경이어서 시간은 충분하겠다 싶어 남은 커피를 마시며 10

 

분을 쉬었다.

 

 

 

 

 

16시18분 오정자재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다. 522m봉에서 내려서 오정자재로 향하는 중 오른 쪽으로 송

 

전탑이 보여 혹시나 길이 아닌 가해서 들러 확인하느라 7-8분을 까먹었다. 정맥 길은 그 아래 보이는 송전탑을

 

지나 곧바로 왼쪽으로 꺾여 밤나무 농원으로 이어졌다. 농원에서 능선 길에 출입을 금하는 경고판 2개와 철선

 

을 쳐 놓아 내림 길이 엄청 불편했다. 오정자재에 내려서기까지 수없이 이리저리 철선을 넘나들며 짜증을 냈

 

던 것은 길은 어느 길이든 그 공공성 때문에 여암 신경준 선생의 말씀처럼 걷는 사람이 임자가 되어야하는데

 

이 산길에서는 막는 사람이 임자노릇을 하고 있어서였다. 생각보다 일찍 오정자재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79세의 연노하신 할아버지 한 분과 같이 버스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말씀을 나뉘면서 저 나이

 

가 되어서도 할아버지처럼 정정하려면 이제껏 해온 산행을 쉬지 않고 이어가야 할 것 같았다. 17시5분경 버스

 

에 올라 다음 산행의 목적지인 천치재를 지나는데 10분 남짓 걸렸다. 순창 땅 복흥을 지나고 내장산의 추령을

 

넘어 정읍에 도착한 것이 18시10분경이었으니 순창 출발 시간 반이 지난 셈이다. 19시발 강남행 고속버스에

 

올라 다음 산행을 머리에 그리는 동안 눈이 지그시 감겼다.

 

 

 

 

두 주후의 다음 산행에서는 더 분명한 봄을 만날 것이다. 그 때쯤이면 겨울은 완전히 사라지고 봄이 이 땅을

 

확실하게 점할 것이다. 중간에 작은 곡절은 있어도 때가 되면 저절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에서 우리는 이 자연

 

의 로고스를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 된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도 이와 같아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개인의 생로

 

병사와 국가의 흥망성쇠가 변화의 근간이라면 몹쓸 망나니들이 지배하는 국가가 빨리 무너지는 것이 인간세

 

상의 로고스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환주기25:호남정맥 23구간(오정자재-밀재)

 

*산행일시:2008. 4. 25일/ 7시22분-19시18분(11시간56분)

 

*소재지  :전남 담양/전북 순창

 

*산높이  :추월산731m, 치재산591m, 용추봉508m

 

*산행코스:오정자재-용추봉-치재산-천치재-7110.1봉-추월산-밀재

 

 

 

호남정맥 종주 길에 산등성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을 뵈었다. 이 분께 인사를 드리고 몇 말씀을 나누면

 

서 길옆에 철선으로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은 손수 재배하는 고사리를 지켜내기 위해서이고, 고사리 밭에 고사

 

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지난 밤 서리가 내려 미리 낙엽을 덮어 놓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고사리와 서리가 충돌하는 것은 우선은 이미지다. 고사리의 주 이미지는 아기들의 고사리 손에서 읽혀지는 연

 

약함이다. 고사리는 독특하게 씹히는 맛과 연약함 덕분에 산나물로 대접받고 사랑받는다. 고사리도 때가 되어

 

줄기가 질겨지면 연약함이 사라져 저작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어 산나물에서 퇴출된다. 서리가 풍기는 이미

 

지는 단연 서슬 퍼런 냉랭함이다. 어른들의 추상같은 불호령에 오금을 제대로 피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겪었

 

을 터인데 여기서 추상(秋霜)은 가을의 찬 서리를 뜻한다. 이렇듯 고사리와 서리는 서로 상징하는 이미지가 다

 

르다. 고사리가 서리와 대립하는 것은 이미지만이 아니다. 호남정맥 종주 중에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을 보았다.

 

 

 

 

전북 순창과 전남담양을 어우르는 오정자재 고개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을 따라 오르는 길에 고사

 

리 밭을 지났다. 산등성에다 고사리를 재배하는 한 할아버지께서 지난밤 올해 마지막 서리가 밤새 내려 냉해

 

를 입을까봐 미리 낙엽을 덮어놓았다고 말씀하셨다. 고사리와 서리는 서로 이미지만 충돌하는 것이 아니고 삶

 

의 문제를 갖고도 대립하고 있음을 알았다. 고사리와 서리의 음운은 마치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들리지만 소리

 

와는 달리 실제는 이토록 다르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고사리와 서리의 충돌을 막아 준 것은 고사리 밭의 주인이신 할아버지였다. 며칠 전만 해도 한 낮의 기온이 섭

 

씨 25도를 오르내려 초여름 날씨를 방불했는데 별안간 수은주가 급강하하는 것을 지켜본 할아버지께서 이런

 

날씨라면 서리가 내리리라 예상하고 고사리 밭에다 낙엽을 덮어주어 냉해로부터 고사리를 구해 낸 것이다. 할

 

아버지의 또 다른 표현은 노인(老人)이다. 노인이 대접받은 것은 단순히 먼저 늙어서가 아니고 오랜 경험을 바

 

탕으로 쌓아온 지혜 때문이다. 일본어나 중국어에는 노인이란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연세든 노

 

인들로부터 젊은이들의 순발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이나 중국도 우리나라와 다름없을 진데 이분들이

 

현인(賢人)으로 대접받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온고지신을 중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날의 역사를 부끄

 

럽다고 지워버릴 뜻이 아니라면 역사로부터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이 나라 산

 

업화의 원동력이었던 노인 분들로부터 각 분야에서 고사리를 지켜내는 지혜를 배우는 것 또한 필요하다. 

 

 

 

 

천치재에서 종주를 끝낸다면 더 할 수 없이 편안한 산행을 추월산을 넘어 밀재까지 진출하기로 욕심을 내자

 

내 걸음으로 12시간은 족히 걸릴 만큼 산행거리가 늘어나 요전처럼 당일새벽 산본 집을 나서서 될 일이 아니

 

었다. 전날 낮에 미리 내려와 화순의 운주사를 탐방하고 광주 내방동의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은 후 아침5시50

 

분에 광천터미널을 출발하는 순창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한 시간 후 순창에서 내려 확인해본 즉 오정자재를

 

지나는 정읍 행 첫 버스가 8시20분에 출발한다기에 포기하고 택시로 오정자재까지 이동했다.

 

 

 

 

아침7시22분 오정자재를 출발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하늘이 쾌청해 산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운행시간

 

단축에 욕심을 냈다. 오정자재고개에서 오른 쪽으로 들어가 왼쪽의 고사리 밭과 오른 쪽의 밤나무 밭 사이로

 

난 산길을 걸어 오르는 중 고사리 밭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 한분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송전탑이 서있는 310

 

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밤나무 밭가에 쳐놓은 철책 선을 따라 북쪽으로 내달리다가 전망바위에 잠시 머무르

 

며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추월산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마루금 왼쪽으로 나무들을 베어낸 방화선을 지나

 

480봉의 어깨에 자리한 한 암봉에 다다른 시각이 8시44분이었다.

 

 

 

 

 

9시58분 해발508m의 용추봉을 올랐다. 암봉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날 등의 암릉 길을 걸어 480m봉

 

의 암봉에 다다르기까지 20분 가까이 서로 뚜렷하게 대비되는 진달래와 연달래를 보았다. 빨그스름한 진달래

 

꽃은 거의 다 지고 가지 끝에 한 두 송이 남아 있는데, 철쭉꽃 연달래는 연분홍 꽃을 활짝 피어 이 산에서는 신

 

록의 5월이 오기 전에 진달래의 자리물림이 끝날 것으로 보였다. 480m봉에서 조금 내려가 평평한 길을 걷다

 

가 삼각점을 만났는데 경사가 하도 완만해 삼각점 봉이 508.4m봉인지는 모르고 지났습니다. 나지막한 봉우리

 

를 넘어 산죽 길로 내려가 임도에 다다르자 “連理枝- 朴OO*李OO 湖南正脈 從走”라는 표지기가 걸려있어 오

 

지의 호남정맥에서도 곁을 같이하는 그들 부부가 참으로 부러웠다.  산죽 가지가 얼굴을 때리는 길을 올라 봉

 

우리 하나를 넘은 다음 가파른 된비알 길을 올라 헬기장이 들어선 용추봉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여 시원했다.

 

왼쪽으로 추월산과 산성산이 보이고 오른 쪽 바로 아래로 밤재를 넘나드는 차들이 보여 빨치산의 전북도당 사

 

령부가 있었던 회문산이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 산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용추봉에서 20분 남짓 쉰

 

후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밋밋한 능선 길을 걷다가 깊숙한 안부로 내려섰다. 다시 치켜 올라 8부 능선쯤에서

 

아래로 내려섰다가 10시46분에 구 헬기장에 도착했다.

 

 

 

 

11시25분 해발591m의 치재산을 올랐다. 구 헬기장을 출발해 6-7분 후 내려선 안부사거리에서 직진해 임도를

 

따라 올랐다. 치재산을 화원을 만들어가는 봄꽃은 양지꽃 및 바람꽃의 풀꽃과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과 철쭉꽃

 

등 나무 꽃이었다. 치재산 정상은 용추봉에 비해 비좁고 전망이 트이지 않아 조금은 답답했지만 호남정맥 종

 

주 길에 자주 보아온 꼬막껍질이 이 봉우리에서도 눈에 띄어 반가웠다. 정상에서 오른 쪽으로 가파르게 내려

 

갔다가 봉우리 하나를 넘어 임도사거리에 닿아 직진한 후 꾸준히 올라 헬기장에 다다르자 고개를 떨 군 할미

 

꽃 몇 송이가 보였다.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내려갔다 다시 오른 무명봉에서 490m봉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편

 

안한 산길을 걸었다. 12시반경에 마지막 10여m를 올라 다다른 490m봉에서 가파른 길로 내려섰다.

 

 

13시45분 29번 도로가 지나는 천치재를 지났다. 490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묘지를 지나 바로 아래

 

차가 다니는 넓은 임도로 내려선 것까지는 순조로운 산행이었다. 여기에서 오른 쪽으로 임도 따라 내려가면

 

될 것을 표지기가 보이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 것이 이번 종주산행에서 치른 유일한 알바의 시작이었다. 몇

 

분 후 산불감시초소 앞에 더 이상 차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임도 길에 차단 목을 설치해 놓았고 하얀 색의 승용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초소 앞 임도사거리의 왼쪽으로 여러 개의 표지기가 보여 490m봉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길은 벗어난 길이고 이제야 비로소 제 길을 찾았다 싶어 안도했다. 오른 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한참을 진행해

 

임도 길을 벗어났는데도 표지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뒤늦게 이 길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3

 

시가 가까워져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점심을 든 후 먼저 분들의 산행기를 읽고 나서야 이 분들도 나와 똑 같

 

이 알바를 했음을 알았다. 초소에서 오른 쪽으로 난 임도는 영산강의 발원지인 가마골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천치재는 처음 내려선 임도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점심시간을 빼더라도 반시간 가까이 알바를 한

 

셈으로 다시 원 위치해 임도 따라 내려가다 축사 딸린 가옥(?) 뒤로 난 산길로 들어서 천치재로 내려섰다. 아

 

주머니 한 분에게서 오른 쪽 아래로 200-300m 가량 내려가야 가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맥주 한 캔 사들겠

 

다는 소박한 꿈을 접고 차도를 건너 추월산으로 들어섰다. 추월산은 작년 4월 한 번 오른 데다 전남의 도립공

 

원이어서 알바를 할 염려는 덜었지만 한 번 들어서면 중간에 탈출할 만한 곳이 적당치 않아 5시간이 넘겨 걸리

 

는 밀재까지 진출해야 해 힘이 달리지 않을까 부담되기도 했다. 연초록의 깔끔한 둥굴레가 떼 지어 있는 산길

 

을 지나 385.6m봉을 넘어 임도사거리인 큰부래기재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후 직진해 산길로 다시 들어섰

 

다. 얼마 후 가파른 길을 지나 송전탑 옆의 510봉에 오른 것은 천치재 출발 1시간이 거의 다 된 14시30분이었

 

다.

 

 

 

 

 

16시32분 삼각점이 서 있는 해발710.1m의 깃대봉에 올랐다. 510m봉에서 산죽지대를 지나 봉우리 하나를 넘

 

어 다다른 500m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얼마동안 내려가자 꽤 넓은 밭과 공터가 나타났다. 길도 넓고 경사도

 

완만해 내림 길이 모처럼 편안했는데 눈앞에 우뚝 솟은 깃대봉을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마음이 편

 

하지 않았다. 15시40분에 오른 쪽 아래로 시멘트 길이 이어지는 안부 삼거리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710.1m

 

봉으로 올라서는 길이 이번 산행 중 최고의 깔딱 길이었다. 직등 길을 20분 가까이 올라 암릉 길에 걸쳐 있는

 

로프를 보자 작년 4월 자그마한 저수지인 견양제를 지나 이 길을 오를 때 고생한 기억이 생생하게 났다. 직등

 

길을 오르느라 몸은 고됐지만 곧추선 암벽과 연초록의 나뭇잎들, 그리고 활짝 핀 철쭉꽃들을 두루두루 보느라

 

두 눈만은 즐거웠다. 작년 4월보다 후덥지근한 더위가 좀 누그러졌고 골바람도 살살 불어와 생각보다 직등 길

 

을 오르는 것이 힘이 덜 들었다. 커다란 암봉을 우회해 올라선 능선에서 남쪽으로 진행해 깃대봉에 올라서자

 

왼쪽으로 조금 비켜 서 있는 깎아지른 추월암과  그 아래 담양호의 빼어난 자태가 한눈에 들어와 역시 추월산

 

이다 했다.

 

 

 

 

 

18시24분 해발 731m의 추월산 정상에 올라섰다. 깊숙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봉우리로 오르며 되돌아본

 

710.1m봉은 절애의 암벽이 받쳐주는 웅장한 암봉이었다. 왼쪽 아래로 견양동마을과 복리암마을이 갈리는 안

 

부삼거리를 차례로 지난 후 진달래가 활짝 핀 해발726m의 수리봉에 도착하자 시꺼먼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

 

고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곧바로 하늘재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남진하면서 틈틈이 왼쪽 아

 

래 담양호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추월산이 명산 100산의 반열에 든 데는 절애의 암벽 추월암과 그 아래 초

 

록색 물빛을 띄고 있는 담양호 덕분이다. 월계리 갈림길을 지나 추월산 정상에 오르자 해지기 전에 목적지인

 

 밀재에 충분히 다다를 것 같아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정상에서 추월암으로 가는 길은 동쪽으로 이어졌고 정

 

맥 길은 반대방향인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19시18분 담양-정읍 노선버스가 넘어 다니는 밀재에 도착해 장장 12시간의 종주산행을 마쳤다. 정상에서 서쪽

 

으로 내려섰다가 올라선 봉우리에서 밀재로 가는 길은 거의다가 완만한 내림 길로 뛰다시피 걸으면서도 어둠

 

에 조금씩 화사함을 잃어가는 철쭉꽃을 그냥 지나치기가 안쓰러워 근접촬영을 했다. 밀재로 내려서자 이번 종

 

주산행이 조금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치재까지는 그리 힘든 줄 몰랐는데 몇 개의 고봉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추월산을 오르는 데 진이 많이 빠졌고 산행 내내 해지기 전에 밀재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더

 

힘들었다. 밀재에 다다르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나마 남아 있는 기운도 온 몸에서 사르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복흥 택시를 불러 기사 분으로부터 정읍 가는 마지막 버스가 저녁 6시35분에 이미 복흥을 지났음을 확

 

인하고 나서 추령으로 직행했다.

 

 

 

 

추령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손님이 거의 없는 여기 모텔의 잠자리가 정읍의 찜질방보다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아 다시 택시를 불러 정읍으로 옮기느라 이번 구간의 종주산행에 모두 4만원의 택시비가 들었다. 혼자서 대

 

중교통을 이용해 원거리 정맥종주를 떠나는 나 같은 사람에게 현지의 교통정보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과다한

 

택시비 때문이다. 나름대로 인터넷을 통해 필요정보를 챙기는데도 정보부족으로 이번처럼 생비용을 날릴 때

 

가 더러 있다. 밀재에서 복흥 택시 대신 맞은편의 금성택시를 불러 담양으로 나갔다면 2만원은 줄일 수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고 나서 유용한 정보는 바로 돈이 됨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장장 12시간을 걸어 오정자재-천치재-밀재의 긴 구간 종주를 무탈하게 마쳤다. 힘은 들었지만 아직도 20대에

 

버금갈 에너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뿌듯했다. 정맥종주에 필요한 에너지는 단순히 오랜 시간 걸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전에 계획하고 정맥종주를 실행하고 끝난 후 산행기로 남기는 과정 하나하

 

나가 새로운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에 말이다. 어떤 계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그 형태만 변화할 뿐 총량은 변화

 

가 없다는 것이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도 변화가 없기에 쓸 데 없는 일에 에

 

너지를 함부로 쓰지 않고 정맥종주에 모아준다면 앞으로도 몇 십 년이고 계속해 산줄기를 이어갈 수 있을 것

 

이다.

 

 

 

 

 

 

 

 

 

 

 

 

 

환주기26:호남정맥 24구간(밀재-곡두재)

 

*산행일자:2008. 4. 26일/ 9시36분-17시26분(7시간50분)

 

*소재지  :전북순창/전남담양 및 장성

 

*산높이  :생화산526m, 대각산528m

 

*산행코스:밀재-생화산-도장봉-대각산-감상굴재-곡두재-월성리삼거리

 

 

 

늦가을에서 초봄까지는 산행 중에 맞는 비가 반가울 리 없겠지만 한낮의 기온이 섭씨25도까지 치솟는 요즈음

 

에 내리는 비라면 단비임에 틀림없다. 24절기의 하나인 곡우(穀雨)가 4월20일 경에 잡혀있는 것도 이 때 내리

 

는 비가 농사에 큰 도움이 되는 단비이기 때문이다. 산불예방을 위한 입산금지 조치로 3월 중순부터는 어느 산

 

을 오를 수 있을까 고심하는 산객들이 많을 것이다. 국립공원은 대부분의 산행코스가 닫혀있으며 그나마 열린

 

길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흙먼지가 풀풀 날기 일쑤다. 4월에 접어들면 햇살은 따가워지는데

 

 나무들이 해를 가리지 못해 산행 중에 느끼는 열기가 초여름에 못지않다. 해마다 이맘때면 산행사정이 이러

 

하기에 많은 산객들이 농민들 못지않게 봄비를 갈망하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 이제는 지식정보사회로 바뀌었어도 단비에 대한 갈증은 여전한 것 같다. 지

 

식이나 정보에 대한 욕구에 못지않게 시대를 뛰어넘어 단비를 갈망하는 것은 물에 대한 변함없는 갈증 때문이

 

다. 우리 몸의 60-70%가 물이고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의 71%가 바다라는 사실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밀접

 

하게 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물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것은 물의 순

 

환시스템이다. 이 순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물의 순환은 멈출 것이고 그리되면 인류는 필요한 물

 

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바다로 흘러내려간 물이 다시 육지로 순환되지 않는

 

다면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져 고도가 낮은 대륙이 침수될 것이고 물이 부족한 육지의 나무들은 광합성을 할

 

수 없어 산소량이 엄청 줄어들 것이다. 이 모두가 대륙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에는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 분

 

명하다. 바닷물이 제때에 적정량의 비로 바뀌어 대륙에 내려주어야 물의 순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된다. 가뭄

 

과 홍수는 모두 물의 순환시스템의 이상에서 오는 것이다. 물의 순환이 이토록 중요하다면 순환시스템이 제대

 

로 작동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다. 치산치수가 중요한 것은 물의 선순환을 가능케 해서다. 치산

 

치수의 요체를 물의 순환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해 가뭄과 홍수를 예방하는데 두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제 하루 호남정맥을 종주하며 봄비를 만나 기뻐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신록의 5월을 준비하는 온 산의 산

 

식구들 모두가 오전 중에 내린 단비를 한껏 반가워했다. 풀잎과 나뭇잎 및 풀꽃과 나무꽃등 산에다 뿌리를 내

 

리고 있는 식물들 모두가 기뻐했고 공중을 날며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는 산새들도 비가 그치자 환호성

 

을 내질렀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답답해하던 산식구들이 활기를 띠자 온 산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소리

 

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옛날에 어르신들이 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고 비가 오신다고 이르신 본뜻을 충분히 혜

 

량할 수 있었다.

 

 

 

 

12시간의 긴 산행을 마치고 정읍으로 나가 한 찜질방에서 묵으며 모처럼 푹 자고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

 

을 했더니 온 몸이 개운해 추령의 모텔에서 묵지 않고 여기 찜질방으로 옮기기를 참 잘했다 싶었다. 아침7시

 

반경에 찜질방을 나서 시내버스로 정읍역으로 나갔다. 저녁6시32분발 새마을호를 예매한 후 5-6분 거리의 버

 

스터미널로 옮겨 아침을 들었다. 조금은 후져 보이는 음식점의 주인할머니가 차려준 백반을 5천원에 사들었는

 

데 깔끔한 반찬을 꽤 여러 가지 내놓아 조반상이 풍성하고 맛났다. 8시40분에 정읍을 출발하는 순창행 첫 버스

 

로 복흥으로 가서 택시를 타고 전날 내려선 밀재로 이동했다. 

 

 

 

 

아침9시36분 밀재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에 발을 들였다. 전남담양과 전북정읍을 잇는 897번 도로

 

가 이 고개로 났지만 넘나드는 차량들이 그리 많지 않은 듯 차도가 한산했습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우의

 

용 자켓을 꺼내 입고 산행을 했더니 얼마 되지 않아 땀이 나기 시작했다. 산행시작 반시간 만에 삼각점이 박혀

 

있는 520.1m봉에 올랐는데 안개로 시야가 막혀 하루 전에 지나온 추월산 산줄기가 조망되지 않았다. 10분을

 

쉰 후 서쪽으로 확 꺾어 10여분 동안 급경사 길을 조심해서 내려가자 평탄한 능선 길이 이어졌다. 이 산을 통

 

째로 전세 낸 듯 마음껏 재잘거리는 새들과 벗하며 편안한 능선 길을 걸어 참나무가 뿌리박은 초라한 묘지가

 

들어선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랐다. 

 

 

 

 

 

11시28분 꽤 넓은 터에 상석도 없이 달랑 6기의 묘지만 들어선 묘역 앞에 다다랐다. 참나무 묘지 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가다가 여러 기의 묘지가 들어선 곳에 다다라 왼쪽으로 난 넓은 임도를 따라 내려갔다.  중간에

 

왼 쪽 풀숲으로 들어가 곧바로 오른 쪽으로 꺾어 안부로 내려갔다가 다시 묘지가 들어선 봉우리에 올랐다. 이

 

정표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묘지가 들어선 것으로 보아 호남정맥 능선 길이 길지임에 틀림없나보다. 오른

 

쪽으로 풀숲길이 갈리는 안부에서 또 다른 6기 묘역에 다다라 북서쪽으로 진행하는 동안 해가 잠깐 들어 모처

 

럼의 단비가 이렇게 그치나 싶어 많이 아쉬웠다. 얼마 후 느티나무 거목이 들어선 안부에 다다라 사진을 찍었

 

다. 앞서 지나온 안부에서는 한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뻗어난 물푸레나무를 보고 나무도 대가족이 따로 있나

 

보다 했는데, 훨씬 더 큰 느티나무를 보자 이 나무는 대가족의 세대주를 뛰어넘어 씨족사회의 족장처럼 보였

 

다.

 

 

 

 

 

12시13분 해발 526m의 생화산을 올랐다. 느티나무 안부에서 5-6분을 걸어 은행나무를 심어놓은 다른 안부에

 

도착했다. 오른 쪽 바로 아래로 시멘트길이 나있는 아랫마을이 금방동이 틀림없다면 밀재에서 금방동 갈림길

 

까지 2시간이 걸린 셈인데, 이 시간은 “실전호남정맥 종주산행”이라는 책자에 나와 있는 시간보다 반시간이

 

늦은 것으로 이 속도로는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곡두재에서 종주를 마치고 월성리로 내려가 17시35분에 정읍

 

행 버스를 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초조했다. 야트막한 산마루를 넘어 다다른 대나무밭 안부에서 생화산을 오

 

르는 25분간의 산 오름이 가팔라 생각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정맥 길에서 4-5분을 더 걸어 생화산에 올랐다

 

가 바로 되내려와 10분여 쉬면서 숨을 골랐다. 편안한 쉼을 끝내고 서쪽으로 내려가 도장봉으로 향하는 중 나

 

보다 연세가 더 들어 보이는 한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는데 나와는 반대방향으로 호남정맥을 종주 중인 이

 

분은 10시 반에 곡두재를 출발했다 하신다. 내 걸음으로 4시간은 조금 넘겨 걸릴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를 단 2

 

시간에 주파한 이 분의 빠른 주력에 놀라 벌어진 입이 도장봉에서 만난 이분의 일행들로부터 한참 뒤쳐져 오

 

는 분들도 많이 있음을 전해 듣고 나서야 다물어졌다. 

 

 

 

 

 

13시46분 강두재에 도착했다. 생화산에서 얼마만큼 내려선 후로는 오르내림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 산악마라

 

톤을 하듯이 뛰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왼쪽으로 좁은 길이 갈리는 분덕재에 다다른 후 연초록 새 잎으로 갈

 

아입은 낙엽송림과 둥굴레군락지를 거쳐 13시 정각에 해발 459m의 도장봉에 도착했다. 무주공산 산악회의 두

 

분이 비좁은 도장봉에서 점심을 들면서 사과를 권해와 고맙게 받아먹은 후 오른 쪽으로 7-8분을 내달려 수령

 

300세의 느티나무가 서있는 비포장 길에 닿았다. 왼쪽 멀리로 장성호가 보이고 오른 쪽 바로 아래 어은리 마을

 

이 자리한 느티나무 안부에서 임도를 따라 1-2분을 걷다가 오른 쪽 산길로 올라서서 솔밭 길을 걸으며 후미로

 

쳐진 무주공산 산악회원들을 여러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오른 쪽 아래로 시멘트길이 보이는 밭 위의 사거

 

리 임도를 지나 나무들을 베어낸 벌거숭이 봉우리에 올라가 방향을 잡느라 잠시 머뭇거리다 오른 쪽으로 난

 

넓은 묘지진입로(?)를 따라 내려가 강두재의 시멘트 길로 들어섰다. 전답사이로 난 시멘트농로 길을 지나 송

 

전탑 옆 묘지에서 점심을 들며 시간을 체크해보니 생화산에서 강두재까지 예상보다 반시간이상 빠른 1시간33

 

분이 걸렸다. 마음 편히 점심을 든 후 까다로운 묘지 길과 밭길을 지나 오른쪽 아래로 시멘트 길이 이어지는

 

고개를 가로질러 대각산으로 향했다.

 

 

 

 

 

15시16분 49번 도로가 지나는 감상굴재에 이르렀다. 시멘트 길의 고개 마루를 건너 짧은 시간동안 완만한 능

 

선 길을 걸어 오르는 중 봄비를 머금고 있는 파르스름한 현호색 꽃을 사진 찍었다. 대각산이 가까워지자 오름

 

길이 가팔라졌다.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다다른 능선 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진행하다가 잠시 암릉 길을 걸

 

었다.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올라선 해발528m의 대각산에 삼각점이 서있었고 빙 둘러 팥배나무(?)들이 하

 

얗게 꽃을 피워 비좁은 정상이 환해 보였다. 정상을 출발해 밋밋한 봉우리를 넘어 다다른 또 다른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급강하했다. 묘지를 지나 내려선 넓은 임도에서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왔다가다 하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임도를 따라 걷다 밭을 지나서 신화회관이 자리한 감상굴재로 내려선 후 이 고개가 전남장성

 

의 북하면과 전북순창의 복흥면을 가르는 경계선상에 있음을 알았다. 49번 차도를 건너 북하면의 강선마을로

 

들어서자 273년이 되었다는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마을 정자가 들어 앉아 있어 한 여름이라면 이곳에서 쉬면

 

서 식수를 보충해도 좋겠다 싶었다. 시멘트 길 농로를 거쳐 마지막 가옥을 지나 다다른 고개마루에서 시멘트

 

길과 벗어나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임도 길로 올라서 20분 가까이 쉬었다.

 

 

 

 

 

16시51분 곡두재에서 종주산행을 마친 후 월성리 정류장으로 향했다. 감상굴재에서 곡두재에 이르는 능선 길

 

에는 430m봉이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그다지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서인지 힘들지 않았다. 20분 가까운 편

 

안한 쉼을 끝내고 임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진행하다가 시멘트 길의 안부사거리에 다다랐다. 왼쪽으로 10여m

 

를 옮겨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다. 묘지를 지나고 소나무 밭길을 가파르게 올라 430m봉에 이르렀다. 얼마 지

 

나지 않아 다다른 두 번째 430m봉에서 북서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마지막 407m봉을 넘어 사거리안부로 내려

 

서자 오른 쪽으로 넓은 임도가 갈리는데 이곳이 곡두재인 줄 모르고 직진했다. 지형도를 보고서야 곡두재를

 

차가 다닐만한 비포장차도가 지나는 고개로 잘 못 알고 그럴 만한 곳을 찾아 그대로 진행하다가 인삼밭이 나

 

오고 가파른 고봉이 가까워져 곡두재를 그냥 지나쳤음을 직감했다. 오던 길로 5분간 되돌아가 곡두재에 이르

 

러 임도로 내려서서 여기 곡두재에서 추령까지 입산이 금지된 길이니 무단출입하지 말라는 경고 글이 적혀 있

 

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17시26분 월성리 삼거리 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접었다. 곡두재에서 월성리가는 길도 아침에 택시기사

 

분이 얘기한 15분 거리가 아니었다. 중간에 옷을 갈아입느라 10분 넘게 지체됐지만 그 시간을 빼도 25분은 족

 

히 걸렸다. 곡두재에서 내려서자 먼발치 농로에 세워진 무언가가 보였는데 처음에는 초소인가 했다가 조금 가

 

까워지자 허수아비로 보이더니 근접거리로 다가가서야 오토바이임을 알았다. 그 옆으로 지나 오토바이를 확

 

인했으니까 망정이지 먼 길로 돌아갔다면 이 산행기에 초소나 허수아비를 보았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생각하

 

자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예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실감했다. 바람에 찰랑거리는 못자리의 흙탕물

 

이 정겹게 느껴졌다.  월성리로 나가 구암사입구의 산중 음식점 앞에서 10분 가까이 기다렸다가 정읍행 버스

 

에 올랐다.

 

 

 

 

 

자연 로고스의 근본은 순환에 있다는 생각이다. 물 뿐만 아니라 대기도 제대로 순환해야하고 모든 생명체도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시스템의 산물일 것이다. 바위도 풍화과정을 겪으며 흙으로 변화하고

 

흙도 압력을 받아 바위로 바뀐다. 하늘의 별도 일생이 있다. 46억년 전에 생성된 태양도 50여억년이 지나면 그

 

존재가 끝나가고  그 자리에 언젠가는 새로운 별이 탄생할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질서의 근본

 

은 순환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흐르는 시간과 벗하며 산줄기를 종주하는 것도 생명의 순환과정의 하나라면

 

호남정맥 종주산행도 자연의 로고스에 잘 순응하는 것이다 싶어 계속 이어갈 뜻이다. 

 

 

 

 

 

 

 

 

 

 

 

 

 

환주기27:호남정맥 25구간(곡두재-유군치)

 

*산행일자:2008. 5. 4일/ 9시15분-18시5분(8시간50분)

 

*소재지  :전남순창및 정읍/전남장성

 

*산높이  :백암산741m, 내장산764m

 

*산행코스:월성리삼거리-곡두재-백암산-소둥근재-내장산-유군치-내장사

 

 

 

 

입하(入夏)를 며칠 앞두고 내리는 봄비는 곡우(穀雨)임에 틀림없기에 웬만하면 고맙고 반가운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끝까지 걷고자 했다. 처음 4-5분간은 지난주에 밀재-곡두재를 종주하며 만났던 봄비 정도려니 생각해

 

땀도 식힐 겸 오히려 잘됐다 했는데 이런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내 바람이 거칠어지고 굵은 빗방울이 후

 

드득 뿌리기 시작하자 곡우려니 했던 이번 비가 이참에 아예 일찌감치 여름을 불러들이자고 작정하고 내리는

 

소낙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빗줄기가 조금 더 굵고 강하속도가 조금만 빨랐다면 여름비와 다를 바

 

없다 싶었던 것은 이 비가 불러들인 천둥소리였다. 처음에는 구름 위를 비행하는 여객기 소리인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인지 식별이 잘 안됐는데 소리가 더 커지고 더 잦아지자 천둥소리가 틀림없다는 판단이 섰

 

고 그 후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산행 중 이런 비를 한두 번 만난 것도 아니기에 이내 평정을 되찾아 한

 

참 동안 산행한 후 얼마간 고심 끝에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추령을 30-40분 남겨두고 유군치에서 내장사로 내

 

려섰다. 내가 유군치에서 내장사로 하산한 것은 꼭 굵은 빗줄기를 동반한 천둥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장

 

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연봉들 중 신선이 노닐다 갔을 신선봉만은 헬기장이 들어설 정도로 넓은 공터가 있

 

어 이 산의 주봉으로 자리 매김할 만한 편안한 봉우리지만, 그 밖의 고봉들은 오르내리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나름대로 성깔이 사나운 암봉들이 대다수이다. 이런 봉우리들을 몇 개 오르고 나자 뾰족 봉우리를 오르내리느

 

라 날이 선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생각이 생겨 아늑하고 포근한 내장사로 하산했다.

 

 

 

 

내장사를 처음 찾은 것도 20여 년 전 한 여름의 비오는 날이었고, 집식구들과 함께 왔던 두 번째에도 빗줄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도 비가 내리는 내장산의 공원길을 걸으면서 가을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늦은 봄날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한가한 이 길이 보통사람들이 걸어오고 걸어갈  삶의 길이다 싶어 누구에게라도 이 길

 

을 혼자서 비를 맞으며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도저히 내 머리로는 가을날의 새빨간 단풍 색을 끌어낼 수

 

없는 연초록 단풍나무들이 길 가에 가지런히 서 있었고, 덥수룩한 수염을 막 깎아낸 듯 잔디밭이 깔끔해 보였

 

다. 내장사로 들어가는 길에 오랜만의 봄비를 마다하지 않고 맨몸으로 흠뻑 비를 맞고 있는 연못을 보자 단 몇

 

시간을 못 참아 우의로 몸을 가린 내가 부끄러웠다. 내장사 경내로 들어서자 천년을 지켜온 그윽하고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산허리를 에워싼 구름들도 대웅전에 안치된 부처님의 눈치를 살피며 세를 더해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인지 아니면 이쯤해서 산꼭대기로 물러설 것인지 고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부처님이 오시는 길을 밝

 

히는 연등이 걸리지 않았다면 화사함이라곤 손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내장사 경내가 석가탄일이 열흘도 남

 

지 않았는데 하나도 부산하지 않았다. 공원 안의 가게들이 거의 다 문을 닫을 정도로 한 적한 공원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집 안에 붙잡아두는 일을 누구보다 잘해내는 것이 바로 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초록 단풍나무들이

 

봄비를 맞아가며 벌써부터 차분히 가을날의 단풍제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비에 묶여 누구 하나 이 나무들에 눈

 

길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한 동안 한 자리에 꼼짝 않고 멈춰 서서 이 나무들

 

을 지켜보다 카메라에 옮겨 담아왔다.

 

 

 

 

주일미사를 올리고자 아침 일찍 정읍의 성당을 찾았다. 하루 전 대전으로 내려가 고교동문들과 함께 인근의

 

도덕봉을 오른 후 호남정맥 종주를 이어가고자 정읍으로 이동해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었다. 새벽같이 서둘러

 

아침6시 미사를 올린 후 떡집과 과일가게를 들러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일전에 들렀던 조촐한 한식집에서 할

 

머니가 차려준 백반으로 배를 불린 후 8시40분에 출발하는 순창행 버스에 오르자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 한

 

분도 뒤따라 승차했다.   

 

 

 

 

 

아침9시15분 월성리 삼거리를 출발했다. 정읍출발 35분후 월성리삼거리에 도착한 버스에서 하차하여 곡두재

 

로 향했다. 동리를 지나며 흘낏 본 낡아빠진 안내벽보의 간첩식별요령이 머릿속에 남았다. 이 벽보를 붙였던

 

그 옛날만 해도 나처럼 혼자서 산줄기를 타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간첩 같다고 신고를 당했을 것이 뻔했을 텐

 

데 그동안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지난주 하산 길에 보았던 흙탕물이 가득했던 논에 그새 모내기를 마쳐 연초

 

록 벼들이 심어져 있었다. 곡두재로 올라서자 이번에는 백양사로 내려가는 길이 분명하게 보였다. 인근 복흥

 

의 택시기사 한분이 일본이 지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기를 끊어놓고자 산줄기를 잘라내고 이곳에다 백양사

 

로 넘어가는 길을 냈는데 해방 후 이 길을 메워 없애고 다시 산줄기를 이어놓았다고 전해주었다.

 

 

 

 

9시45분 곡두재를 출발해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인삼밭을 지나자 철망으로 울타리를 친 남의 집 밤나무 밭 안

 

으로 마루금이 나 있어 이어가지 못하고 별 수 없이 왼쪽 능선으로 옮기느라 물이 흐르지 않은 지곡을 건넜다.

 

지곡을 건넌 다음 된비알 길을 오르는 중 새벽3시에 추령을 출발했다는 한 종주 팀의 선두 한분을 만났다. 곡

 

두재에서 백학봉까지는 출입이 금지된 비탐방로여서 표지기도 없고 로프도 걸려 있지 않아 각자 알아서 자기

 

안전을 챙겨야했기에 제법 가파른 바위 길을 조심해서 올랐다. 길지 않은 직등의 바위 길을 오른 후 산죽 길을

 

지나서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왼쪽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자 꼭 11년 전에 집사람과 함께  거닌 백양사 경내

 

가 한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곡두재 출발 1시간 남짓 동안 된비알 길의 산 오름을 모두 끝내고 무명봉에 다다

 

라 잠시 쉬었다가 구암사와 백학봉 양쪽으로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에 도착했는데 그 시각이 11시15분이었

 

다.

 

 

 

 

 

11시56분 해발741m의 백암산을 올랐다. 구암사 삼거리로 이름 붙여진 안부사거리에서 똑 바로 7-8분을 올라

 

헬기장을 지났고 이내 722m봉에 다다르자 활짝 핀 철쭉꽃들이 봉우리를 밝혔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

 

어 이어지는 능선 길은 정식 탐방로여서 표지목도 세웠고 길도 넓고 편해 속도를 냈다. 시야가 확 트인 암릉

 

길에서 점심을 들고 있는 산객들과 인사를 나누며 북서쪽으로 진행해 엄청 큰 암봉인 도집봉을 왼쪽으로 우회

 

한 다음 10분을 가파르게 올라 백암산의 주봉인 상왕봉에 올라섰다. 내장산국립공원을 대표하는 산은 내장산

 

이고 절은 백양사라고 하더라도 이 백양사를 감싸고 있는 백암산의 최고봉인 상왕봉에 삼각점은 모르더라도

 

표지석 하나 없어 처음 얼마간은 정말 상왕봉인지 긴가민가했다. 상왕봉에서 20분 가까이 쉬고 난 후 온 길로

 

몇 걸음 되돌아가  북서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야 했을 것을 곧바로 진행해 자칫 사자봉으로 갈 뻔 했는데 추령

 

에서 출발했다는 한 부부가 순창새재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어 큰 알바를 면했다.

 

 

13시15분 소둥근재에서 점심을 들었다. 상왕봉에서 순창새재로 갈리는 길이 처음 얼마간은 급하게 내려가다

 

가 이내 길이 평탄해져 최대한 빨리 걸었다. 표지목이 세워진 두 곳을 지나고 640봉을 넘어 순창새재에 이르기

 

까지 45분이 걸렸다. 직진 길은 막혀 있고 왼쪽으로 입암산과 오른 쪽으로 까치봉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순창

 

새재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 소둥근재로 내려섰다. 소둥근재에 조금 못가서 순창 가는 버스를 같이 탔다가

 

추령에서 하차해 산줄기를 타고 백양사로 남진 중인 아주머니를 만나 반가웠다. 소둥근재에서 점심을 들면서

 

내내 의아했던 것은 종주산행에서 금기사항인 계곡을 건넌 점이다. 이는 분명 순창새재에서 걸어 내려온 길이

 

마루금이 아님을 뜻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정맥 길은 순창새재에서 비탐방로라며 막아놓은 직진 길로 들어서

 

야 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딱 점심을 들고 나서 13시25분에 소둥근재를 출발해 까치재로 향

 

했다. 가파른 길을 20분 넘게 걸어 580m봉 어깨에 올라선 후 몇 분을 더 걷자 왼쪽에서 합류하는 흐릿한 길이

 

보였는데 이 길이 혹시 순창새재에서 직진해 이어지는 정맥 길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하지 못했다. 한참을 더

 

걸어 앞 뒤 큰 바위사이에 자리한 까치봉1.1Km 전방의 안부에 도착해 시간을 점검해보니  14시 정각이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바람이 거칠게 불어 오후에 비가 내린 다는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는 것이 임

 

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15시40분 내장산의 주봉인 해발 763m의 신선봉에 올라섰다. 1.1Km 남은 까치봉을 오르기가 결코 만만치 않

 

았다. 경사도 급하고 곧바로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마음도 다급했다. 왼쪽으로 암벽이 받쳐주는 암릉 길을 걸어

 

올라 신선봉행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도착해 300m남은 까치봉을 들를까 말까로 잠시 멈칫했다. 코앞까지 와

 

서 그냥 지나치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까치봉으로 내달렸지만 암릉 길을 오르내리느라 10분이 넘겨 걸려

 

14시45분에 까치봉을 올랐다. 내장산을 일주할 생각으로 까치봉을 오른 한 분을 만났는데  이 분은 큰비를 내

 

릴 것 같은 먹구름을 보고 그대로 하산 할 뜻을 내비춰 나 혼자서 삼거리로 되돌아 왔다. 암릉길에서 만난 비

 

가 삼거리로 돌아오자 더욱 세차게 뿌려 배낭카바를 씌우고 우의를 입는 등 소나기에 대비해 중무장을 한 후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신선봉으로 내달렸다. 5년 전 가을에 지난 이 길이 기억에 남아 신선봉 조금 못가서 두

 

갈래로 갈렸다가 바로 밑에서 합쳐지는 산길이 낯설지 않았다. 헬기장이 들어선 신선봉은 신선들이 무리지어

 

쉬어가도 될 만큼 공터가 넓어 백암산의 상왕봉이나 바로 전에 들렀던 까치봉과 대비됐다. 궂은 날씨로 골짜

 

기 아래 자리한 내장사에 몰아칠 삭풍을 막아주는 내장산 북쪽 산줄기의 서래봉, 불출봉과 연자봉의 자태가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하며 삼각점이 세워진 해발 763m의 신선봉에서 바로 내려가 장군봉으로 향했다.

 

 

 

 

 

 

17시15분 유군치에서 추령 행을 포기하고 오른 쪽의 내장사 길로 내려섰다. 왼쪽 아래 금선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 안부를 지나 북측사면이 절애의 암벽인 고봉을 넘었다. 비탈길을 올라 해발 671m의 연자

 

봉에 올라서자 바로 아래로 케이블 카 승강장이 보였다. 20여 년 전 동서네 가족4명과 우리식구4명 등 모두 8

 

명이 내장산 입구에서 야영을 한 후 이튿날 아침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며 비를 흠뻑 맞은 8월의 내장산을 조망

 

한 기억들이 자연스레 되살아났다. 연자봉에서 똑바로 내려섰다가 북측사면이 절벽인 암릉 길을 걸어 장군봉

 

바로 아래 안부에 다다르자 잠시 멈칫했던 비가 다시 뿌리기 시작했다. 이 비가 불러들인 천둥은 처음에는 그

 

소리가 작아 여객기가 지나는 소리이려니 했는데 이내 빗줄기가 굵어지고 천둥소리가 커지자 장군봉을 오르

 

는 길이 더욱 가파르게 느껴졌다. 16시43분에 해발696m의 장군봉에 오르자 산행기록을 남기기가 엄청 불편할

 

만큼 비바람이 드셌다. 내장사로 표시된 길을 따라 5분을 내려가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진행해 유군치에

 

다다르기까지 반시간여 비를 맞고 나자 구두 안으로 스며든 빗물이 양말을 다 적셔 모처럼 제대로 우중산행을

 

한다 했다.

 

 

 

 

 

 

유군치에서 추령으로 직진할 것인가 아니면 왼쪽 아래 내장사로 내려설 것인가는 벌써 마음속으로 결정을 했

 

으면서도 재빨리 움직이지 못한 것은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추령까지 진출하겠

 

다고 결정한 일을 비가 좀 많이 내리고 바람이 거칠게 분다고 포기하고 내장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뭔가 모르

 

게 심약해 보이는 것 같아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러한 내적갈등을 해소한 것은 내장사로 내려갈 만한

 

새로운 명분이었다. 다음 종주산행이 추령에서 개운치까지 6시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구간이어서 유군치에서

 

 출발한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과, 내장사로 내려가 함께 걸은 공원길을 먼저 간 집사람을 떠올리며 다

 

시 걸어보고 싶다는 새로운 명분을 찾았다. 이렇게 자기합리화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음 편히 내장사 길로 내

 

려설 수 있었다. 이러한 자기합리화는 때때로 산행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갈림길에서

 

 어느 한길을 택해 한참을 갔는데도 표지기가 나타나지 않으면 일단은 멈춰 서서 이 길이 맞는가를 점검해야

 

맞다. 그럼에도 그냥 진행하는 것은 얼마만큼 고민해 택한 길인데 제 길이 아닐 리가 없고 조금만 더 가면 틀

 

림없이 표지기가 나타나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 뿐이 아니다. 설사 멈춰 서서 지도를 꺼내보고 산행기를

 

읽은 후에도 지도가 틀렸고 산행기가 잘못 기록되었다고 믿으며 그대로 진행하다가 결국은 큰 알바를 하고나

 

서야 잘못된 자기합리화로 사서 생고생을 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합리화가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위한 수단으로 쓰일 때 상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엘리엇 에런슨과 캐럴태브리스가 그들의 공저 “거짓말의 진화”에서 지적한 거짓말의 진화과정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수입한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고 믿어온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만나

 

게 되면 인지부조화를 겪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수입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사람들이 모

 

방송국의 PD수첩 프로그램을 보았다면 엄청 심한 인지부조화를 겪었을 것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이라고 확신한 어느 산 꾼이 이제껏 걸어온 길이 틀린 길이라고 알려주는 이정표를 보고나서 느끼는 당혹스

 

러움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 우리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과학적인 증거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조작된 것이

 

라며 그 증거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증거를 찾아나서는 일이다. 다시 출발지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장난으로 표지목을 돌려놓았다고 자기의 결정을 합리화하며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나도 가끔은 지도가 잘

 

못됐다거나 나침반의 바늘이 고장 났다며 건방을 떤 일이 있는데 이 모두가 잘못된 자기합리화의 결과였음을

 

실토한다. 자기합리화과정이 길면 길수록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영원히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깨닫는

 

다면 재빨리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와 유연함이 생활인의 지혜다 싶어 자기합리화에 대한 내 생각

 

을 적어보았다. 

 

 

18시10분 내장사에서 하루 산행을 끝냈다. 유군치에서 반시간을 걸어 내려가 공원 안 차도에 다다랐다. 왼쪽

 

으로 꺾어 내장산으로 가는 길이 참으로 고혹적이어서 잠시 집사람을 불러내 같이 걸었다. 생전에 그녀도 이

 

길을 함께 걸으며 비 맞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공원의 주인인 나무들이 비를 맞는데 객들이 우산을 받쳐 들

 

어서야 예의가 아닌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장사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 앞마당의 석탑이 비를 맞고 서있

 

었다. 이 비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세월의 때마져 씻겨 내려가서인지 너무 말끔한 석탑이 천년고찰에 어울리

 

지 않는 것  같았지만, 부처님의 온후함이야 비가 온다고 덜해지는 것이 아니기에 경내는 여전히 포근하고 아

 

늑했다. 정읍의 택시를 불러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속옷을 갈아입은 후 19시20분 발 강남 행 고속버스에 올

 

랐다. 빗줄기도 여전했고 주말의 길 막힘도 여전했다. 자정을 훨씬 넘어 강남터미널에 도착했고 새벽 1시반경

 

에 산본 집으로 돌아와 5월의 첫 원행 길을 마무리했다.

 

 

 

 

 

산길은 혼자 걸었지만 생각은 함께 했다. 빗속의 산길을 오랜 시간 혼자 걸었어도 외롭다거나 힘들지 않은 것

 

은 생각만은 함께 해서였다. 이 산의 주인들인 나무와, 그리고 새들뿐만 아니라 큰 비를 불러온 먹구름과도 묵

 

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집사람과도 생각을 함께 했다. 생각을 함께한 산 친구들이 많이 있어 5년 만에 다시 찾

 

은 내장산 종주 길이 조금도 지겹거나 힘들지 않았다. 과연 신록의 5월은 계절의 여왕다웠다. 

 

 

 

 

 

 

 

 

 

 

환주기28:호남정맥 26구간(유군치-개운치)

 

*산행일자:2008. 5. 21일/ 10시40분-17시35분(6시간55분)

 

*소재지  :전북 정읍/순창

 

*산높이  :추령봉573m, 망대봉556m

 

*산행코스:내장사입구-유군치-추령-추령봉-복룡재-여시목-두들재-망대봉-개운치

 

 

 

종주계획을 짤 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떻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산행을 마칠 수 있는 가다. 나처럼 혼자

 

서 산줄기를 종주하는 산 꾼들에는 산행비용의 상당부분이 교통비이기에 과감하게 택시이용을 줄여야 산행경

 

비를 줄일 수 있다. 통상 시골 길에서는 버스 삯보다 10배 이상 비싼데다가 시내에서 들머리까지 대개가 장거

 

리여서 택시를 탈 경우 교통비가 결코 만만치 않다.  내가 버스를 고집하는 것은 꼭 교통비절감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종주산행이 아니면 갈 일이 전혀 없는 오지를 구석구석 찾아 들르는 버스를 타야 그곳 시골 분들을 만

 

나 뵙고 이런저런 현지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다.

 

 

 

 

 

1971년 여름 나 혼자 지리산을 종주한 후 마천에서 남원 가는 버스에 오른 적이 있었다. 마침 40대의 남자 한

 

분이 자리를 같이 했는데 이 분이 내게 지리산 공비들의 암약 상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약간 취기가 돈 이

 

분께서 당신도 젊어서 공비로 암약했다며 그 때의 아지트가 칠성계곡에 있는데 다시 그 아지트를 찾아가라면

 

못 찾아 갈 정도로 칠성계곡이 오지 중의 오지라고 일러주었다. 1970년 2월 덕유산 설산산행을 마치고 무주로

 

나와 남원까지 전북여객버스로 이동했다. 앞자리에 앉은 내게 무진장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 차장은 20

 

대의 청년으로, 이 청년의 도움으로 남원의 차장숙소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택시를 타고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인연들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 웬만하면 버스를 타겠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멍청하게 꺼놓은 타임 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침 5시가 지나서 일어났다. 아침밥도 거르고 주섬주섬 짐

 

을 꾸린 후 택시를 잡아타고 금정역으로 이동해 아침5시50분 경 천안행 전철에 올라탔다. 금정역에서 1시간

 

20분 걸리는 천안역까지 가서 7시11분에  이 역을 출발하는 정읍 행 기차를 타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음 열차로 가기로 마음을 편히 먹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발차 2분전에 전철이 천안

 

역에 도착해 간신히 출발 직전의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전10시40분 내장사 일주문 지나 유군치 갈림길에서 하차했다. 정읍터미널 앞 정류장에서 171번 시내버스를

 

탔더니 마침 이 버스가 공원안 내장사까지 들어가는 차여서 15분 이상 산행을 앞당길 수 있었다. 오른쪽 시멘

 

트 길로 들어서 유군치로 오르는 길에 십 수 분간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사흘 전에 내린 비로 힘차게 흐르는 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계곡에서 벗어나 왼쪽 비알 길을 오르는 중 뒤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뒤돌아

 

보았더니 10여m 후방에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산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자 “앗”하고

 

기합을 주어 큰 소리를 보냈더니 어슬렁거리든 멧돼지가 이 소리에 놀랐던지 허겁지겁 산 아래로 내달음질쳤

 

다. 멧돼지에 등을 보이며 그냥 오를 수는 없어 메시지를 보낸 것인데 내 발신음이 너무 컸었나보다. 내가 멧

 

돼지를 보고 조금 놀란 것은 멧돼지의 출현 그 자체였지 나처럼 괴성을 질러댄 것이 아니었기에 지나놓고 보

 

니 남의 땅에 들어섰으면서 마치 주인인양 행세하며 과잉대응을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멧돼지는 산 아래로 내

 

려갔고 나는 산 위로 계속 올라 유군치에 다다랐다. 공원 안 표지목에 표기된 “유군재”와는 달리, 임진왜란 때

 

승병장 희묵대사가 순창에 진을 치고 공격해오는 왜군을 이고개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실린

 

고개 마루 안내판에는 “유군치(留軍峙)”로 적혀 있었다. 이 고개 유군치에서 절편을 꺼내먹느라 10분을 머물

 

렀다.  

 

 

 

 

 

11시24분 유군치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유군치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정맥 길을 따라 15분을 채 못 걸어

 

전망봉에 오르자 서래봉에서 시작되는 내장산의 연봉들이 시계반대방향으로 장대하게 펼쳐져 그 한 가운데

 

폭 들어가 자리한 내장사가 참으로 고즈넉해 보였다. 하늘도 쾌청하고 바람이 시원해 아직은 지열을 내뿜지

 

않는 그늘진 능선 길이 걸을 만 했다. 두 곳의 갈림길에서 모두 왼쪽 길로 들어서 진행하다 시야가 탁 트인 바

 

위 길을 지나 정오를 조금 넘어 49번국도가 지나는 추령고개로 내려섰다. 걸어서 이 고개에 이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간 차를 타고 열 번 가까이 넘나들었기에 정맥 길의 다른 고개처럼 낯설지 않았다. 차도 건너 계

 

단 길로 들어서 한참을 오르자 전망바위가 나타나 잠시 숨을 고르며 걸어온 길을 휘둘러보다가 아침에 버스로

 

지나온 북서쪽의 내장저수지에서 눈길이 머물렀다.

 

 

 

 

13시4분 해발573m의 추령봉에 올랐다. 서쪽 사면이 직벽인 추령봉은 뾰족한 모양새가 송곳 같다하여 일명 송

 

곳바위봉으로도 불리는데 정상에 오르니 표지석이나 표지목 하나 서있지 않은 그저 그런 육봉 같았다. 전망바

 

위에서 더 가서 만난 무명봉을 우회해 힘을 좀 덜고 나서 정북방향으로 산 오름을 계속해 출입금지경고판이

 

서있는 능선삼거리에 다다랐다. 오른 쪽으로 추령봉을 우회하는 길이 이어졌지만 직진해 추령봉에 올라서자

 

바로 아래 전망바위에서 볼 것은 다보고 올라오란 듯이 비좁은 정상에서는 나뭇잎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참외를 까먹으며 12분을 쉬었더니 다시 생기가 돌아와 오른쪽으로 내려섰다. 3-4분을 내려가서 만난 경

 

사가 엄청 급해 보이는 바위 길에 물기가 남아 있어 내려갈까 말까 몇 분간 고심하다 다시 추령봉으로 원 위치

 

해 출입금지판이 세워진 능선삼거리로 되돌아왔다. 보조자일도 없이 그냥 내려가다 물에 젖은 바위 길에서 미

 

끄러져 떨어지면 몸이 성할 리 없다싶어 원 위치했다. 추령봉을 오른 쪽으로 에돌아 안부로 내려섰다가 녹 슬

 

은 철망울타리를 따라 530m봉에 올라선 시각이 13시57분이었다.

 

 

 

 

 

15시 정각에 506m봉에 다다랐다. 오른 쪽으로 백방산 화살표의 표지기가 걸려있는 530m봉에서 왼쪽으로 꺾

 

어 급경사 길을 내려가 만난 안부가 복령치로, 이 고개가 옛날에 정읍과 순창을 소통시킨 이름 있는 복령치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 고개를 넘나든 흔적이 분명치 않고 키가 작은 나무들만 무성했다. 철망문을 지

 

나 10분가량 급하게 오른 후부터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어 삼각점이 세워진 434.9m봉을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쳐버리고 좌우 고개 길이 희미한 십자안부에 내려섰다. 십자안부에서 조금 올라가서는 편안한 길이 한동

 

안 계속 되어 왼쪽 바로 아래에 자리한 내장산호텔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다시 가파른 길을 올라 506m봉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와 남은 떡을 마저 들며 20분간 푹 쉬었다. 15시20분에 506m

 

봉을 출발해 왼쪽으로 급경사 길을 내려가 넓은 안부를 만났는데 여기가 여시목인 듯했다.

 

 

 

 

 

17시 정각 해발556m의 망대봉에 자리한 통신중계소 정문을 지났다. 여시목에서 올려다 본 467m봉을 오른 쪽

 

으로 우회해 평탄한 능선 길을 걷느라 언제 470m봉을 지났는지 기억이 잘 안 났지만 헬기장흔적이 남아 있는

 

공터가 470m봉인 것 같았다. 헬기장봉우리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 10여분 후 안부에 도착해 묘지를 가득 메운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을 카메라에 옮겨 실었다. 묘지를 화원으로 꾸민 야생화들을 뒤로하고 5분간 걸어 올라

 

선 414m봉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어 두들재로 내려섰다. 잠시 짐을 풀고 시멘트포장도로에 등을 눕혀 10분간

 

쉬는 동안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의 노래 소리가 경쟁적으로 들려왔다. 시멘트 차도를 따라 26분을 걸어올라

 

거대한 중계탑이 서있는 통신중계소 정문 앞을 지났다. 정문에서 7-8분 간 중계탑을 오른 쪽으로 에돌며 더러

 

는 풀숲을 뚫고 철조망 바로 밑을 지나느라 가시에 찔리기도 했다.

 

 

 

 

 

17시35분 개운치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무리했다. 망대봉 중계탑을 오른 쪽으로 우회해 마루금에 복귀한 후

 

오른 쪽으로 하산했다. 15분을 걸어 헬기장에 다다르기까지 능선 길을 천천히 걸으며 좌우 풍경을 조망했다.

 

왼쪽 아래 정읍방향의 부전제저수지와 오른 쪽 아래 쌍치 가는 시골길 차도가 모두 주변 산세와 버걱거리지

 

않아 평화롭고 안온해 보였다. 헬기장에서 15분을 더 내려가 29번 국도가 지나는 개운치에 도착했다. 몇 채의

 

집이 정읍과 순창을 경계 짓는 개운치 고개 마루에 들어 앉아 행정구역상 어느 시군에 속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외지인을 보고도 짖지 않고 눈멀거니 쳐다만 보는 흰둥이의 행동반경은 이 두 시군을 모두 어우를 것

 

같았다.

 

 

 

 

 

이번 산행처럼 대중교통이용이 용이하다면 택시 탈 일이 없다.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천안역에서 정읍행

 

차를 바로 탔고, 정읍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공원 안으로 들어가 내장사 앞까지 가는 버스에 올랐으며, 개운

 

치로 하산해 20분밖에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잡아타 정읍시내로 돌아갔다. 어떻게든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이용하고자 내 딴에는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필요정보를 얻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기에 이번처럼 차시간이 딱 맞아떨어지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

 

진다. 기왕에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종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앞으로도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택

 

시를 이용하지 않을 뜻이다. 혼자서 떠나는 종주길 나들이가 범부들과 주고받는 이야기 길이 아니라면 집에서

 

편히 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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