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송학동 가야고분군
*탐방일자:2011. 1. 20일(목)
*탐방지 :경남고성군 고성읍송학동소재 고분군
*동행 :나홀로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가야를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동모산 기슭에다 성을 쌓고 발해를 세운 것이 698년의 일이고 요의 침략으로 망한 해가 926년이니 발해가 한반도 북쪽과 만주 땅을 다스린 것이 228년에 이릅니다. 이 기간은 중국의 당, 명, 청나라의 역사 모두가 3백년이 채 안 되는 것으로 보아도 결코 짧은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국토를 점한 나라였고 문화수준 또한 매우 높아 해동성국으로 불렸습니다. 이런 어엿한 우리의 나라 발해가 조선조 영조 때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를 펴낼 때까지 우리의 역사서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발해보다 656년이나 먼저 세워진 가야의 역사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서력42년에 김수로왕이 개국한 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멸망하기까지 무려 490년이나 신라의 서북쪽을 통치하고 있었는데도 마치 우리 한반도에 신라, 백제와 고구려만이 존재했던 것처럼 학교에서는 이런 가야를 빼놓고 삼국시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당이라는 외세를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신라를 한반도의 중심국가로 놓고 우리 역사를 엮어가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가야의 역사는 서력 42년 김수로왕이 한반도 남쪽의 김해에 금관가야를 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김해지방은 김수로왕이 터잡기까지는 변한 땅입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여러 소읍으로 구성된 변한 땅에서도 마한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제 각기 영역을 차지했으니 금관가야도 그 중의 하나로 변한을 대신해 이 지역의 맹주국으로 군림한다고 그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바 하늘에서 자주색 끈이 한 가닥 내려와 여섯 개의 둥근 알을 내려놓습니다. 한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나고 나머지 다섯 개의 알에서 다섯 가야의 시조가 태어납니다. 김수로왕은 멀리서 배를 타고 찾아온 허황옥을 배필로 삼아 단군 다음으로 오래 살다가 158세에 죽음을 맞습니다.
낙동강 남쪽의 옛 가야 땅을 관통하는 전장 220여 Km의 장대한 산줄기가 있습니다.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낙동강 남쪽의 하동, 진주, 고성, 함안, 마산, 창원과 김해의 산줄기를 차례로 이어가 낙동강에서 침잠하는 낙남정맥이 바로 그 것입니다. 옛 가야 여섯 나라 중 대가야와 성산가야는 경상 지역 내륙 깊숙이에 나라를 열었지만 금관가야, 아랑가야, 고령가야와 소가야 등 네 가야는 낙남정맥과 멀지 않은 곳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최강국 금관가야는 김해에 터를 잡았으며. 진주에 도읍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는 고령가야는 내륙의 상주는 물론 하동과 지리산을 다스렸고, 아랑가야는 함안지방, 소가야는 고성지방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낙남정맥 종주는 이 네 가야국을 차례로 관통하는 일이어서 우리의 역사에서 한 발치 비껴 있는 가야의 참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낙남정맥의 배치고개-봉광산-담티재에 이르는 짧은 구간 종주를 이른 시간에 끝내고 오후 시간 짬을 내어 인근 고성에 자리한 소가야의 고분군을 탐방했습니다. 고령가야가 나라를 연 진주를 지나면서도 진양호와 진주성만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았을 뿐 가야의 유적지는 한 곳도 들르지 못했습니다. 4년 전 경남창녕의 화왕산을 오를 때 가야의 고분을 먼발치서 사진 찍은 적은 있지만 고분군을 찾아가 직접 둘러보기는 이번에 탐방한 고성 송학동의 소가야고분군이 처음입니다. 소가야는 신라 유리왕 19년인 서력42년에 경남 고성군 부근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소가야를 세운 인물은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함께 구지봉에서 태어난 6동자중 막내인 김말로라고 합니다. 소가야의 유적은 여기 고성군을 비롯해 인근 사천군과 통영시에서도 발굴되었는데 이번에 탐방한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성읍 북쪽의 무기산 일대에 자리한 송학동의 소가야 고분군은 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았지만 골목길로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몇 분께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제게 길을 가리켜준 한 할머니로부터 절대로 고분을 파헤쳐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하는 말씀을 듣고 이나마 유적이 보존된 것도 할머니 같은 분이 계셔 가능했겠다 싶어 할머니께 감사하고픈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바짝 다가가 본 가야 고분군은 생각보다 훨씬 장대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기를 제대로 펴지 못했을 가야의 왕릉이 경주의 고분에 감히 비할 수 있으랴 했는데 7기 가량의 묘가 들어섰다는 송학동의 고분군은 터도 넓게 잡았고 지석묘가 들어선 밑바닥과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봉분 꼭대기까지 표고차가 30m가량 날 정도로 높아 보였습니다. 전체 고분군의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낱개의 고분은 신라의 왕릉에 미치지 못해 가야의 한계를 보는 듯 했습니다.
1999년 동아대박물관에서 발굴한 여기 고분군은 여섯 가야 중 소가야(小加倻)의 지배집단의 묘 또는 왕릉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이 고분에서 금동귀걸이, 청동제높은잔, 유리구슬과 토기류 등 천 여점의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하니 가야 왕실의 생활수준이 어떠했는가가 대략 짐작 됩니다. 송학동 고분군이 발굴 당시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3개의 독립된 둥근 봉토를 가진 고분이 겹쳐진 1호 묘가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아서였습니다. 가야하면 임나일본부를 떠올려야 했던 식민사관을 말끔히 극복하지 못해 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가장 북쪽에 자리한 돌방무덤에서 전통적 가야고분과 다른 채색고분이 발견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로 고분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잘 나있는 탐방로를 따라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며 7기의 고분을 찬찬히 다 둘러보았습니다. 경주의 천마총처럼 고분 안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겉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오백년이 훨씬 지난 가야로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옛 가야의 심화학습을 더 해볼 생각으로 바로 아래 소가야유물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화려한 건물의 겉보기와는 달리 방들이 텅 비어 있어 허탕을 쳤습니다. 내년에 개관할 예정이라는 데 그때는 낙남정맥 종주산행이 모두 끝날 것이기에 그 다음 프로그램인 낙동강둘레산줄기 환주 길에 다시 찾아볼 뜻입니다.
낙남정맥 종주를 끝내기 전에 함안과 김해의 가야고분도 찾아볼 생각입니다. 가야에 관한 몇 권의 책도 더 사볼 뜻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은 가야의 역사가 무엇인지도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낙남정맥 종주길이 바로 가야에 이르는 길임을 널리 내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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