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38.울산 반구대암각화 탐방기

시인마뇽 2011. 9. 13. 06:35

                                                        울산 반구대암각화 탐방기

 

                                        *탐방일자:2011. 7. 14일(목)

                                        *탐방지   :울산시울주군언양읍대곡리소재 반구대암각화

                                        *동행      :울산대 이규성교수

 

 

 

 

  이 땅의 국문학도라면 누구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원시시대에는 지금처럼 예술이 분화된 것이 아니고 노래와 춤 및 이야기들이 한데 어울린 종합예술의 형태를 띠었을 것이고, 노래는 그 당시의 문학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송대 국문과에 몸담고 있는 저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과연 최초의 노래는 언제 생겼고 누가 불렀으며 어떤 노래였는지 두루두루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얼마고 풀어줄 수 있는 것이 암각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마음에서 바위 등 그들이 성스럽게 여긴 곳에 그려놓은 그림을 일컫습니다. 암각화가 소중한 것은 매장문화재 연구를 통해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선사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종교 관념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어 선사시대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유래했고 그 이동경로가 어떠했는지 밝히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70년의 일입니다. 이해 12월에 불교유적 조사차 울산에 내려간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반고사지(盤皐寺址)를 찾고자 반구대 마을을 방문한 것이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때 마을주민 최경환씨의 안내로 천전리 각석을 발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암각화가 국내최초로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최초로 발견된 천전리 각석에는 상부에 사슴 등 여러 동물 모양과 기하무늬가, 그리고 하부에 신라시대의 명문과 동물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1년 후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가 발견되었고 경남함안에서도 발견되는 등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발견된 곳은 모두 20곳에 이릅니다.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는 1971년12월25일 문명대, 김정배, 이융조교수 등이 한 해전에 동국대박물관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천전리 각석을 방문하였다가 마을주민 최경환, 손진봉씨의 도움을 받아 사연댐 상류지역의 바위면을 조사하는 중에 발견되었다 합니다. 문화재청은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인 반구대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을 반구대 암각화라 이름 짓고 국보 제285호로 지정해 보전중입니다. 반구대암각화의 제작연대는 그 중심이 약7,000년전-3,500년전으로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합니다.

 

 

  고교동창인 울산대 이교수가 포항의 내연산을 함께 오를 것을 제의해와 내연산도 내연산이려니와 가는 길에 울산대곡리반구대를 들러 암각화를 보겠다는 욕심에서 얼른 그리하자고 답했습니다. 며칠 후 KTX로 내려가 울산역에서 대기 중인 친구 차로 옮겨 탔습니다. 35번 국도를 따라 포항으로 가다가 언양에서 얼마 올라가지 않아 대곡리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계곡가로 난 차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  대곡리반구대 암각화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저수지 한 가운데 자리한 버드나무와 갈대 등 수생식물들이 빚어낸 정경이 조금은 색달라 보였습니다. 저수지 왼쪽 변에 난 흙길을 걸어 전망대에 이르자 반구대암각화를 설명하는 커다란 안내판과 물 건너 암각화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된 전망대에 다다랐습니다.

 

 

 

  저수지 건너편에 곧추 선 암벽인 반구대는 하반신이 물에 잠겨 아쉽게도 그 전모를 볼 수 없었습니다. 수면 위의 반구대는 그 섬세한 바위 결이 망원경에 잡혔지만 물에 잠긴 반구대는 수면의 출렁거리는 물결만 보였습니다. 문제는 보고자 한 반구대의 암벽화가 물에 잠겨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이교수가 방문했을 때는 물이 빠져 수면 위에 드러난 암각화를 보았다는데 그간 내린 비로 물이 잔뜩 불어 이번에는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수중촬영이 허용된다면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큰 아들에 부탁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그리할 수 있는 것은 훗날의 일이고 당장은 별 도리가 없어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인근의 울산암각화박물관을 들렀지만 그조차도 저녁6시가 막 넘어 문을 닫은 후라서 헛걸음만 했습니다.

 

 

 

  이번 탐방은 무위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울산반구대암각화에 관한 모든 것들을 그냥 묻어두는 것이 잘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물은 아니지만 안내판의 커다란 사진을 보았고, 안내문의 자료들만으로도 반구대암각화의 문화사적 의의를 새기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아 여기에 옮겨놓습니다.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바다와 육지동물, 사냥과 포경장면 등 동물의 생태적 특성과 당시의 생활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동물은 고래, 거북, 물고기, 가마우지 등이 있으며 육자동물로 사슴, 멧돼지, 화랑이, 표범, 여우, 늑대, 너구리 등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에 표현된 배와 작살, 투구를 이용하여 고래사냥을 하는 장면은 과거 고래를 잡고 이를 숭배한 뛰어난 해양어로문화가 울산만에 존재해 있음을 보여준다. 암각화의 제작연대는 울산과 동남해안 일대의 패총유적에서 출토된 동물유체분석결과와 울산만 고(古)환경 연구 등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그림은 청동기시대로 여겨지는 것도 있다.”

 

  반구대암각화를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 조형예술입니다. 조형예술 뒤에 숨어 있는 노래를 찾아내는 일은 국문학에서 할입니다. 바위에 그려진 바와 같이 당시 선조들이 고래나 다른 짐승을 잡으러 나갈 때 그냥 집을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목적한 일을 무사히 성공리에 끝낼 수 있도록 하늘에 빌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보내는 사람들은 기대와 이별의 정을 춤과 노래로 표현했을 것이고, 배를 타러나가는 사람들은 뱃노래라도 불렀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내용 있는 가사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일정한 후렴을 따라 부르는 형식의 노래였을 것이고 이런 노동요가 노래문학의 시초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방송대의 교재 "국문학개론"에  나와 있습니다.  고기를 잡고 나서는 하늘에 고마워하는 노래를 불렀으리라는 것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비록 암각화에 노래의 가사나 악보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미 그려진 그림만으로도 다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리일 것입니다. 가사가 전해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는 고조선 대의 공무도하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림으로보아 노래를 불렀을 것은 분명한데 가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역사가 기록되기 전의 선사시대의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구대암각화처럼 수많은 동물과 종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그린 암각화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합니다. 선사시대를 살아간 우리선조들의 삶이 투영된 노래의 원형을 뽑아낼 수 있는 울산반구대암각화는 길이 보존되어야 마땅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반구대가 물에 잠겨 암각화가 손상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울산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 절벽에 290여점의 암각화가 산재해 있습니다. 울산시민에 식수를 공급하는 사연댐건설로 태화강의 지천인 대곡천의 수위가 올라가고 반구대의 아랫부분이 물에 잠겨 암각화가 빠른 속도로 훼손되어 2015년이면 암각화가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와 있습니다. 40년 전 반구대암각화를 직접 발견한 문명대교수는 사연댐의 수위를 50m이하로 낮추어 물길이 암각화에 닿지 못하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는 일은 식수공급량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이어서 울산시 단독으로는 결정하기 힘든 일이어서 중앙정부와 협의해 해결책을 수립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대책이 나와 실천에 옮겨지기를 희망합니다.

 

 

 

  1970년대 유신시대에 포크송 가수 송창식님이 불러 유명해진 “고래사냥”을 저는 지금도 즐겨 부릅니다. 울산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것처럼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이 고래 잡으러 떠날 때 불렀던 노래의 가사와 곡조가 어떠했는가를 “고래사냥”에서 유추해 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몸에 고래를 잡으러 동해바다로 나가는 선사시대 선조들의 피가 전해지기에 송창식님의 “고래사냥”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해 따라불렀다는 생각입니다.

 

 

                                                       고래사냥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우리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언제라도 포경을 금하는 조치가 풀리면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동해바다로 “고래사냥”에 나서볼 뜻입니다.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말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