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서원(臨皐書院) 탐방기
*탐방일자:2011. 12 . 23일(금)
*탐방지 :경북영천소재 임고서원
*동행 :나홀로
낙동정맥 종주길에 대구의 동쪽에 위치한 영천(永川)시를 들렀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형승(形勝)이 ‘청계석벽(淸溪石璧)’, ‘이수삼산(二水三山)’과 ‘형세웅반(形勢雄盤)’으로 묘사된 영천(永川)이 시에서 발간한 관광안내 팸플릿에는 “충효의 상징 포은 정몽주선생의 고향이자 신성장 동력 영천경마공원, 질 좋은 한약재, 맛있는 과일,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빛을 즐길 수 있는 청정의 도시”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때 인구가 10만 명이 넘던 것이 5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로 시세(市勢)가 약해진 영천시로서는 빼어난 형승에 마냥 머무를 수만은 없어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고자 신성장 동력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흘 전 이리재에서 종주산행을 마치고 영천시로 들어가는 중 임고에서 고옥 여러 채를 보았습니다. 기사분에 여쭤 정몽주 선생을 모시는 임고서원임을 확인하고 이번 낙동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 들렀습니다. 서울서 멀지 않은 용인의 모현에 선생의 묘지가 있어 그 쪽 분이려니 했는데 알고 보니 선생께서 태어나신 곳은 여기 영천의 임고였습니다.
임고 서원은 조선 조 명종8년 1553년에 포은 정몽주 선생을 배향고자 창건된 서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보다 10년 늦게 세워졌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는 등 시련을 겪은 이 서원은 장현광(張顯光)과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나 1965년 복원되면서 정몽주선생만 모시고 있다 합니다.
영천시내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반시간도 못되어 임고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한 겨울의 냉랭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아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따사롭던 햇살이 현저하게 그 위력을 잃어 어디서도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성역화 공사로 서원 앞을 헤집어 놓아 어수선한데다 날씨마저 매섭게 추워 을씨년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서원 앞뜰의 엄청 큰 고목은 나뭇잎이 다 떨어져 무슨 나무인지 몰랐는데 자료를 안내판을 보고나서 수령이 5백년 넘은 은행나무임을 알았습니다. 임고서원의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이 왼쪽 동 앞에 세워져 있어 안내문을 읽어보고 바깥 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일자건물 바로 뒤 가파른 계단이 놓였고 그 위 안쪽 문 안으로 사원 같은 건물이 보였지만 두 건물 모두 현판이 없어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서원의 별채로 보이는 왼쪽 동에서 오른 쪽으로 옮겨 처음 만난 것은 임고서원사적비였습니다. 바로 뒤 2층 누각의 영광루(永光樓) 아래가 이 서원의 정문인 경앙문(景仰門)이었습니다. 굳게 문이 닫혀 있어 왼쪽으로 돌아가 신도비부터 보았습니다. 임고서원(臨皐書院) 현판이 걸려 있는 흥문당(興文堂)이 강학당으로, 선생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앉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였습니다. 흥문당 양옆으로 서생들이 묵는 서재 함육재(涵育齋)와 동재 수성재(修省齋)가 자리한 것은 어느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배치였습니다. 강학당 뒤 유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포은 정몽주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이 서원의 사당 표충사가 있어 선생의 영정을 볼 수 있겠다 기대했는데,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어 간신히 사진만 찍어 왔습니다.
서원 오른 쪽 계현재(啓賢齋)는 선생의 부친을 모시는 재사(齋舍)입니다. 공사 중인 수로 건너 박물관(?)과 이 계현재는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신축건물들이어서 보기에도 큼직하고 깔끔했습니다. 성역화공사의 일환으로 개성의 선죽교가 이곳에 복원하기 위해 넓은 수로(水路)와 깔끔한 다리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수로를 건너 바위 위에 세워놓은 정자를 찾아 올랐습니다. 정자를 받쳐주는 바위가 독특해 보이는 것은 꽤 큰 몸집의 곧추선 퇴적암에서 잘 발달된 층리 때문입니다. 바로 아래 얼음이 얼어 있어 하천인지 연못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박물관(?) 건물을 둘러보는 것으로 임고서원 둘러보기를 마쳤습니다. 성역화공사가 끝나 서원과 계현재, 그리고 박물관과 정자가 한 울타리 안에 들어있게 되면 충분히 거닐어 볼 만할 것입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임고서원을 전부 둘러보았기에 느긋하게 포은 정몽주 선생을 찾아 뵐 수 있었습니다. 여말 이성계와 팽팽하게 대치해 계실때라면 감히 선생을 만나뵐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선생께서도 역사의 뒤안길로 몸을 숨긴지가 7백년이 넘은 터라 잠깐 짬을 내어 역사의 주역으로서 그 당시를 증언할 만 하겠다 싶어 찾아 뵌 것입니다.
고려 충숙왕 때인 133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과거의 3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했습니다. 5살 아래인 삼봉 정도전과 함께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목은 이색선생의 문하생으로 공부한 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받을 만큼 유학자로서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명나라와 왜와의 외교문제를 방문외교로 잘 처리한 선생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놓고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최영장군과 맞서 외교로 문제를 풀겠다는 이성계 일파에 동조했습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뜻을 같이한 것은 고려를 개혁하지 않고는 더 이상 나라를 끌어갈 수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의 목표가 선생은 고려를 바로 잡아 끌고가겠다는 것이었고 이성계는 뒤집어 엎고 새 왕조를 열어가겠다는 것이어서 두 분의 공존은 결코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명나라를 다녀오는 세자를 마중 나간 이성계가 사냥하다 낙마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이성계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은 병상의 이성계를 만나 상황을 살피려 문병을 한 후 귀가하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3남 방원의 패거리들에 피살되었습니다. 선생이 피살된1392년 이성계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워 역성혁명을 이룩했습니다.
선생과 대척점에 서서 경쟁을 했던 또 한 분은 삼봉 정도전입니다. 선생과 같이 목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던 정도전은 시문에서는 선생에 뒤졌지만 정치적인 열정과 감각은 빼어났던 것 같습니다. 이성계를 주군으로 모시고 조선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지어내고 사병을 혁파하는 등 개혁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으나, 개혁조치에 위협을 느낀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했습니다. 포은 정몽주나 삼봉 정도전 모두 이방원에 의해 처참하게 죽지만 사후 두 사람에 대한 조선왕조의 평가는 천양지차였습니다. 포은 정몽주는 사후 13년이 지난 1405년 태종에의해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으로 추봉됐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습니다. 반면에 삼봉 정도전은 끝내 신원되지 않다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 설게도를 작성한 공을 참작해 삼봉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백성들의 심판이었으니 선생께서 피살된 개성의 선죽교에 선생의 혈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설화가 백성들에 의해 입으로 입으로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이방원이 태종 임금이 되어 선생을 신원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한 것은 선생의 충절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꼭 필요했겠지만 그에 더하여 선생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을 헤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분의 말씀마따나 선생은 호를 포은(圃隱)이라 했으나 채마밭에 숨어살 여유는 일생동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와 여진과의 전투에도 참여했고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든 고려를 개혁해 끌고가고자 이성계와 대결하느라 팽팽한 긴장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기에 한가하게 밭을 찾아 숨을 겨를이 있을 턱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시를 지으셨습니다. 조동일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문학통사"를 통해 "시짓기를 좋아해 분주하게 다니는 길에서도 보고 느낀바가 있으면 읊어서 호탕한 기백을 지닌 풍류스런 작품을 남겼다"며 선생을 호평했고, "시의 소재가 확대되고 수법이 참신해진 것"도 주목할 일이라 했습니다.
선생은 시문집(詩文集)으로 포은집(圃隱集)을 남기셨습니다. 선생의 시조 '단심가'는 너무 유명해 약하고, 대신에 일본으로 사신 가는 감회를 읊은 한시 "여우(旅寓)"을 올립니다.
旅寓 여우
平生南與北 평생 동안 남북으로 다니노라니
心事轉蹉跎 마음도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故國海西岸 고국을 서쪽 바다 기슭에 두고
孤舟天一涯 외로운 배로 하늘 한 모퉁이로 간다
梅窓春色早 매창에 봄빛이 일찍 찾아오고
板屋雨聲多 판옥에는 빗소리가 많기도 한데,
獨座消長日 홀로 앉아 긴긴 날을 보내면서
那堪苦憶家 괴롭게 집 생각하니 견디기 어렵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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