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6.기다림에 감사하며

시인마뇽 2012. 5. 2. 23:26

                                                  기다림에 감사하며

 

 

 

 

  32년만에 네 번째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어제 새벽 성삼재를 출발해 천왕봉에 오른 후 오후에 중

 

산리로 하산했습니다. 지리산의 고스락인 천왕봉에서 벽소령을 거쳐 노고단에 이르는 25km의 주능선 길은

 

백두대간의 첫 길이자 마지막 길입니다. 성삼재에서 시작해 백두대간을 따라 올라 정상에 이른 후 중산리로

 

하산하기까지 꼬박 16시간이 걸렸습니다.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가는 중 무릎에 통증이 와 하산 길이 많

 

이힘들었지만 32년 만에 또 다시 지리산을 종주한다는 기쁨으로 꾹 참고 견뎌냈습니다.

 

 

 

 

 

  1972년 여름 세 번째로 지리산을 종주한 후 32년을 기다린 것은 그 이듬해 봄 디스크 수술을 받아서였습니

 

다. 그 후 종주산행은 꿈도 꾸지 못하고 노고단만 몇 번 올랐을 뿐입니다. 6년전 부터 꾸준히 산을 오른 결과

 

지구력과 주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어 두 달 전 세석산장에서 하루를 묵는 것으로 하고 지리산 종주에 나섰습

 

니다. 때마침 한반도 남단에 상륙한 태풍이 지리산에 비를 쏟아 부어 연하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가까운

 

음정으로 퇴각해야 했습니다. 기상악화로 비록 기대했던 종주에는 실패했지만, 조금만 몸을 다진다면 무박

 

산행으로 종주를 마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읽은 것이 나름 수확이었습니다. 그간 한북정맥을 종주하며 몸

 

을 단련해 다시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해냈습니다.

 

 

 

 

 

 

  지리산 종주에 처음 나선 것은 1970년6월의 일입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지리산의

 

주능선을 종주하겠다고 집을 나선 저는 경남 마천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백무동을 거쳐 천왕봉을 오른

 

후 노고단에 이르러 주능선 종주를 마치고 구레화엄사로 하산했습니다. 산 속에서 이틀을 야영해야 했기에

 

짐무게가 적지 않아 산행 길이 더뎠습니다. 어두워진 후에도 계속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잃어 벽소령으로 이

 

어지는 군사용 도로변에서 비박도 했습니다.

 

 

 

 

 

  그때 만난 지리산은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로웠습니다. 제석당에 한 여름에도 오싹함을 느낄 만큼 차디찬

 

샘물이 있어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지리산의 정수리에서 산자락들에 호령하는 암벽의

 

천왕봉은 더할 수 없이 의젓하고 단호해 보였습니다. 천왕봉에 올라서서 운무가 살짝 가린 산자락들을 바라

 

보며 제우스신을 찾아보았습니다. 아직도 풀지 못한 한이 남아 죽어서도 눕지 못하고 몸을 곧추세운 장터목

 

의 고사목에 눈길이 갔습니다. 지리산이 세석에 넓은 평전을 숨겨둔 것은 왜일까 궁금했습니다. 어느 선비의

 

소원대로 살아생전 자식들로부터 받지못한 절을 이 산을 오르내리는 산 꾼들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선비샘

 

바로 위에 묘 자리를 쓸 수 있도록 허용한 지리산에서 인간적인 친근감이 느껴졌고, 인간적인 지리산이 벽소

 

령에 주둔하는 우리 장병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최고의 캠프사이트인 연하천과 멀지 않

 

은 군사도로에서 밤을 지새우며 지리산의 밤 친구인 밤하늘의 별들을 헤어보았습니다. 지리산의 낮 친구인

 

 야생화들이 천국을 이룬 노고단에서 주능선종주를 마치며 흐뭇해했습니다.

 

 

 

 

 

  서른두 해만에 만나 본 지리산의 주능선은 옛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근엄하면서도 모든 것을 어우르는 지

 

체 높은 산이고, 인자하면서도 준엄하게 꾸짖는 속이 깊은 산이며, 몸을 맡겨 살아가는 생명들을 모두 받아

 

들이는 가슴 넓은 산이 지리산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긴 시간 고통을 잘 참아준 두 다리가 고마웠습니다. 간간히 저를 붙잡아 쉬어 가게 한 야생화들도 고마웠습

 

니다. 진정 제가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지리산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어디 다른 곳으

 

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저를 기다려준 지리산 말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끝낸 후 지리산을 다시 찾아 다섯

 

번 째 종주산행에 나설 뜻을 고하는 것으로 지리산에 올리는 감사인사를 가름하고자 합니다.

 

 

 

 

 

                                                         2004년 8월 1일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