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52.울산개운포 탐방기

시인마뇽 2013. 1. 18. 20:03

                                                      울산개운포 탐방기

 

 

                                         *탐방일자:2012. 8. 4일

                                         *탐방지   :울산광역시 개운포소재 처용암

                                         *동행      :나홀로

 

 

  방송대 국문과의 한 스터디그룹에서 한문에 박학한 선생 한 분을 모시고 1년 반가량 삼국유사 원문을 해석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국문과를 졸업하기 전에 삼국유사를 반드시 세 번 이상 읽으라는 교수님 한 분의 말씀을 듣고 나서 2학년부터 방학 때마다 한 번 씩 빼놓지 않고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차츰 삼국유사의 진가를 알게 되자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적지를 들러보겠다는 욕심이 동했습니다. 삼국유사는 그 제목과는 달리 고구려와 백제에 관한 것은 별로 없고 신라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삼국유사의 유적지는 경상도에 몰려 있습니다. 방송대에 입학하고 나서 제가 이어간 산줄기가 경상남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낙남정맥과 동해안과 나란한 방향으로 경상남북도를 남북으로 꿰뚫는 낙동정맥이어서 이때가 기회다 싶어 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인근의 삼국유사 유적지를 들르곤 했습니다. 이번에 신라의 향가 처용가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울산의 개운포 탐방도 낙동정맥의 한 구간 종주하고 경주의 주상절리를 들렀다가 찾아온 것입니다.

 

 

 

  처용암이 위치한 개운포는 외황강이 동해와 만나는 포구입니다. 신라의 헌강왕이 경주에서 이 강을 따라 개운포로 행차했다는 것은 여기 개운포가 신라의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교통로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토록 유서 깊은 개운포가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견인해온 산업도시 울산에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지만, 막상 가보니 바뀌어도 너무 철저히 바뀌어 포구로서의 정취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외황강 하류의 포구 북쪽에 조선시대 축성한 개운포성(城)마저 다시 쌓아놓지 않았다면 조선을 발판삼아 신라로 거슬러 돌아가는 역사탐방은 꿈도 꾸지 못했을 뻔 했습니다.

 

 

 

  울산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타서 개운포로 향했습니다. 석유화학산업단지내 한 회사에서 생산직으로 30년 넘게 근무했었다는 택시기사분이 옛날의 개운포 포구(浦口)모습을 들려주면서 가보면 엄청 실망할 것이라 했는데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남쪽의 온산국가산업단지와 북쪽의 울산석유산업단지 사이를 헤집고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의 외항강이 많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1981년 등단한 곽재구 시인은 10년 전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라는 책을 내 순천만등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포구 24개소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개운포가 빠진 것은 그 때는 이미 개운포는 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아니고 각종 공장이 들어선 산업단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포구의 도시 삼천포에서 성장한 시인 박재상님이 1955년에 등단해 바로 우리나라 포구에 대해 소개 글을 썼다면 유서 깊고 아름다웠을 여기 개운포를 빼놓을 리 없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개운포에 도착해 먼저 포구 북쪽에 쌓은 개운포성을 들렀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성은 조선 전기 134년 동안(1459-1592)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의 영성(營城)이 있던 수군의 성터로 비슷한 시기에 수군만호의 진성(鎭城)도 여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석성인 내성과 토성인 외성으로 이루어진 이성의 내성은 서울의 북한산성처럼 골짜기를 감싸고 쌓은 포곡식성입니다만, 그 둘레가 1.3km 정도 밖에 안 되어 전장 8km의 북한산성에는 비할 수 없이 작습니다. 돌로 다시 쌓은 개운포성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넘나들 만큼 높지 않았고 그 길이도 아주 짧아 성곽복원의 의미를 오로지 이 터가 성터였음을 알려주는 데 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조선소가 울산에 세워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은 여기 개운포에 효종 7년인 1656년부터 구한말까지 250년 넘게 군함을 만들고 정박시킨 선소(船所)가 있었다는 기록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와 강 한가운데에 동서방향으로 놓은 좁은 폭의 컨베이어(?)가 한 눈에 잡히는 개운포성에서 동쪽으로 조금 자리를 옮겼습니다.

 

 

 

 

  포구 북쪽의 울산시남구 황성동 세족마을 앞에 이르자 하구 강물에 반쯤 몸을 담근 처용암(處容巖)이 바로 앞에 보였습니다. 강가에 세운 처용암비에 한문으로 새겨 넣은 처용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서 아주 먼 옛날 신라를 향해 역사탐방 길로 들어섰습니다. 개운포와 함께 처용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바, 이 책 ‘권(卷)제1 기이(紀異)제1’편의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가 그것입니다.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로 놀러갔다가 돌아오려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대 낮에 별안간 구름과 안개가 덮여 길을 잃습니다. 일관의 말을 듣고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에 명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집니다. 용은 기뻐해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춤추고 연주를 하고나서 아들 처용(處容)을 왕에 딸려 서라벌로 보냅니다. 왕은 아내로 미녀를 주고 급간의 직책을 내리는데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 역신들이 사람으로 변해 몰래 그 집에 와 자고 가곤 합니다. 그 유명한 처용가가 바로 처용의 현장목격담인데 이 노래를 들은 역신은 처용의 대범함에 무릎 꿇고 빌면서 처용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합니다. 왕은 돌아와 영취산에 절을 세우고 망해사로 이름을 짓습니다.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란 이름도 이렇게 얻어집니다.

 

 

  역신이 듣고 감탄한 처용가는 영문학자였던 양주동님이 과감히 도전해 해석해내지 못했다면 별 뜻 없는 한문자의 조합으로 묻힐 뻔 했습니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동경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脚鳥伊四是良羅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本矣吾下始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인 처용암(處容巖)에 대한 안내판에는 세죽마을 바로 앞의 바위섬에서 처용이 나타나 처용암으로 명명되고 그로인해 섬 서쪽의 마을이름도 처용리로 불린다면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랑설화와 관계있는 유서 깊은 바위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인일인지 삼국유사의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에는 처용암(處容巖)이란 말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울산시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처용암(處容巖)을 기념물로 정했을 리 없고 보면, 아마도 처용암과 관련해 전해져 내려온 다른 설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용암이 강 한가운데 있기를 망정이지 강가 야산에 위치해 있었다면 산업단지로 개발할 때 벌써 헐려나갔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울산시에서 아무리 정성들여 ‘처용문화제’를 개최한다 해도 우리의 처용은 거대한 산업단지와 다리의 교각만 보이는 개운포를 다시 찾지 않을 것입니다. 헌강왕의 망해사 창건을 동해의 용왕이 지금도 감읍해하기에 처용암이 멀쩡하게 보존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에는 영축산의 망해사를 찾아가볼 뜻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