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선생 유적지탐방기
*탐방일자:2012. 11. 16-17일(금-토)/12. 8일(토)
*탐방지 :
-1차(11. 16-17일):경남하동악양면평사리 최참판댁
전남구례광의면 천은사
경남통영시 박경리공원 및 박경리기념관
-2차(12. 8일) :강원원주시 토지문화관 및 박경리문학공원
*동행 :방송대 프라임칼리지 수강생
한국방송대 부설 프라임칼리지에서 마련한 “쉼을 준비하다-문학기행”은 4년 전 작고하신 박경리선생의 소설 ‘토지’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입니다. 이 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제가 박경리문학을 공부하는데 더 이상의 맞춤프로그램이 없겠다 싶어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선생께서 워낙 우리 문학계의 거목이셔서 이번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수한다 해도 선생의 문학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헤아리기 어렵지만, ‘토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교수 분들이 맡아 이끌어주는 것이기에 이 프로그램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습니다.
“쉼을 준비하다-문학기행”의 프로그램은 9시간의 영상강의와 세 곳의 문학기행으로 구성됐습니다. 경기지역대학에서 이틀 동안 실시된 6시간의 영상강의는 방송대의 이승윤교수님이 맡아주었습니다. “박경리의 삶과 문학”, “‘토지’의 다양한 판본”과 “‘토지’창작의 막전 막후” 등의 제목으로 실시된 영상강의를 통해 문학기행에 도움 될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두 번으로 나누어 다녀온 문학기행은 이승윤교수님의 주도 하에 ‘토지’를 함께 연구하신 다른 대학교수 몇 분들도 같이 해주었습니다. ‘토지’의 주요무대인 하동의 평사리와 인근의 천은사를, 그리고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통영의 미륵산 묘지를 이틀에 걸쳐 탐방했습니다. 다시 하루를 잡아 ‘토지’의 산실인 원주를 찾아간 것은 ‘토지문화관’과 연세대캐퍼스내 ‘박경리문학비’, 그리고 ‘박경리문학의 집’을 차례로 둘러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경기지역대학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3시간의 영상강의를 통해 이승윤교수님이 이번 프로그램을 총정리 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인으로 평가받는 소설가 박경리선생은 1926년 경남통영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선생은 그 이듬해 결혼해 딸과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6.25전쟁 중에 남편과 사별하셨고, 김동리선생을 만나 문학지도를 받았으며, 1955년 현대문학에 두 번 추천을 받아 실은 ‘계산’과 ‘흑흑백백’으로 등단하셨습니다. 1956년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의 사건을 소재로 자전적 소설인 ‘불신시대’를 내놓았고, 이 작품으로 1957년 제3회 ‘현대문학’신인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65년 시장과 전장을 발표해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을 수상하신 선생은 1969년 9월에 대하소설 ‘토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서울 정릉집을 떠나 원주시로 이사해 토지4부와 5부를 집필하셨으며, 1994년 8월 집필 26년 만에 대하소설 ‘토지’를 탈고하셨습니다. '토지'탈고 후에도 시집 ‘우리들의 시간’을, 수필집 ‘생명의 아픔’을 내놓았고 마지막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3회 연재 후 중단하셨습니다. 2008년 5월5일 지병인 폐암으로 영면하신 선생의 유해는 고향 땅 통영의 미륵산기슭에 안장되었습니다.
제가 박경리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2년10월 창간된 월간지 ‘문학사상’에서였습니다. 이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토지’2부가 제가 읽은 선생의 첫 작품인데 당시로는 최인훈 선생이나 이청준 선생의 작품에 천착했던 때여서 '토지'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25살의 열혈청년시절에 토지를 처음 접한 제가 다시 토지를 읽게 된 것은 그 24년 후인 1996년의 일입니다. 그 때는 토지"의 문학적가치가 널리 알려진데다 저 또한 어느새 지천명을 한 해 앞둔 49세가 되어 이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먼저 읽은 대학동창에게서 몇 권씩 빌려와 석 달 만에 다 읽었고 나남출판사의 토지21권을 구입해 다시 읽었습니다. 장편소설 몇 권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장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大河小說) ‘토지’는 구한말로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이 나라 민중들이 토지를 중심으로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생각했나를 리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26년이라는 긴 세월을 4만장 분량의 "토지"의 원고를 쓰는데 바치신 선생의 노고가 결실되어 ‘토지’가 한국문학이 낳은 최고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된 것입니다. 이는 선생은 물론 이 나라 현대문학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의 "토지"는 그 후 드라마로 방영되었고 청소년용 "토지"가 따로 출간될 만큼 "토지"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8년 선생께서 작고하신 후 저는 소설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가을에 온 여인’과 수필집 ‘생명의 아픔’ 및 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위 소설들을 읽고 느낀 점은 이 소설들의 내용이 조금씩 변형되어 대하소설 ‘토지’에 알게 모르게 녹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모든 문학 활동은 토지를 결실하는데 토양이 된 것입니다.
1)평사리 최참판댁 :2012. 11. 16일(금)
아침8시20분 경 방송대경기지역대학을 출발한 버스는 하동의 평사리로 향했습니다. 덕유산 휴게소에서 승차하신 이승윤교수께서 이번 문학기행의 의의를 설명하고 기행노트를 배포했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일생과 대표작 ‘토지’에 대해 강의를 하신 후 이번 기행에 참여한 몇 회원들이 참여소감을 피력하는 순서가 뒤이었습니다. 저도 간단히 토지를 읽은 소감과 이번 기행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오른 쪽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저 강을 에워싸 물을 대주는 전장630km의 섬진강둘레산줄기를 환주했던 지난날을 떠올렸습니다. 악양면사무소앞에서 하차해 점심을 들은 후 평사리로 옮겨 본격적인 문학기행에 들어갔습니다. 2009년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김해의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을 종주할 때부터 토지의 배경지인 평사리를 둘러보겠다고 꿈꾸어오다가 이번 문학기행으로 비로소 그 꿈을 이루게 돼 가슴 벅찼습니다.
박경리 선생께서도 ‘토지’의 배경지인 평사리를 집필을 끝낸 후 다녀가셨다 하니 최참판댁은 실재가 아닌 상상 속에 존재한 것인데 ‘토지’가 인기를 크게 얻자 하동군에서 재현해낸 것입니다. 맨 위쪽에 평사리문학관을, 바로 그 아래에 최참판 댁을, 그리고 그 아래 왼쪽에 토지마을 장터를, 오른 쪽에 소설 속의 용이네. 관수네, 이평이네 집들을 배치했는데, 어디까지나 중심은 최참판댁이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바지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초입에 늘어선 가게와 그 위 초가집들을 지나 다다른 최참판댁 입구에서 평사리 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최참판댁은 맨 아래 솟을 대문과 맨 위쪽 사당을 포함해 모두 10채의 가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 중심에는 윤씨부인이 기거한 안채가 들어섰고, 그 주위로 문간채, 별당, 뒷채, 중문채, 행랑채, 솟을 대문, 사랑채와 초당이 배열된 최참판댁의 집터는 생각보다 좁아 보였습니다.
안채 앞에서 이승윤교수님의 안내를 잠깐 들은 후 최참판댁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둘러보았습니다.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메주와 수수가 눈을 끌었고 평사리문학관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숲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대광실만은 못해도 꽤 큰 규모의 한옥인 최참판댁이 닫힌 공간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은 이 집을 배경으로 한 소설의 초반부 내용이 밝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 아래 펼쳐진 평사리 벌이 민초들이 일하는 열린 공간이라면 최참판댁은 양반들의 위선과 음모를 키우는 음지 같았습니다. 평사리문학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농업전통문화전시관을 둘러본 후 섬진강을 앞에 둔 꽤 넓은 평사리 벌을 카메라에 옮겨 담는 것으로 평사리 탐방을 마쳤습니다.
2)구례 천은사:2012. 11. 16일(금)
구례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성삼재로 올라가는 길에 지나는 절이 악명 높은 천은사(泉隱寺)입니다. 천은사가 악명 높은 것은 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도를 통행만 하는데도 길을 막고 통행세를 물어서라는데 이 천은사를 직접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산꾼들에 악명 높은 천은사가 ‘토지’의 초반부에 나오는 그 절임을 안 것은 여기 천은사에 와서입니다.
구례터미널에서 하루에 5번을 시내버스가 왕복할 정도로 내방객이 많은 이 절은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더불어 지리산의 3대사찰 중의 하나라 합니다. 주차장에서 하차해 ‘地異山泉隱寺’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천은사 경내로 들어갔습니다. 본격적인 천은사탐방은 천은지 저수지 위쪽의 2층 누각 수홍루 바로 아래 무지개다리를 건너 시작됐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인 서력828년에 덕운스님이 개창한 감로사가 나중에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합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甘露寺)라 칭했다는데, 이 절의 홈페이지는 1679년 단유선사가 이 절을 중창할 때 샘가에 자주 나타난 구렁이를 죽였는데 그 후로 샘이 나오지 않고 숨었다하여 천은사(泉隱寺)로 고쳐 불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절이 최참판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청상과부인 며느리 윤씨부인이 찾아와 머무르는 동안 동학의 영웅 김개주로부터 겁탈을 당하여 아들 김환을 낳은 데서 비롯됩니다. 그래서인지 늦은 가을 저녁 시간에 찾은 이 절을 둘러보고 느낀 것은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고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음습함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절은 평사리의 음침한 최참판댁을빼어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화엄사가 대찰이듯이 그 말사인 감은사도 결코 작은 절이 아니었습니다. 대웅전 대신 들어선 극락보전의 ‘아미타 후불탱화’는 세로360cm, 가로 277cm 크기의 삼베바탕에 짙은 녹색과 적색으로 채색된 불화로 그 구도와 기법이 훌륭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보물로 지정됐다 합니다. 이 절의 보물은 이 것 외에도 둘이 더 있으니, 괘불과 나옹화상 원불불감이 그것들입니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그 윗 편에 관음전, 팔상전, 웅진전 등이, 양 옆으로 명월료와 명부전이, 그리고 아래쪽으로 보제루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넉넉지 않아 부지런히 경내 전각들을 두루 살펴본 후 왼쪽으로 빠져 나가 천은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역시 물은 세정의 기능을 갖고 있나 봅니다. 저녁 햇살을 받은 물결의 잔잔한 파동을 보노라니 마음이 평온해지고 겁탈의 장소로 쓰인 천은사의 어두운 면이 싹 씻겨나간 것 같았습니다. 일몰을 지켜보는 천은지를 사진 찍은 후 주차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리산의 가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천은사는 부끄러운 ‘토지’의 역사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단풍으로 가을치장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며칠 후면 겨울에 자리를 내줄 가을을 여기 천은사에서 사진 찍어두는 것으로 가을전송 세레머니를 마쳤습니다.
..............................................................................................................................................
통영 시내로 옮겨 투숙할 통영시청소년수련관에서 저녁 식사를 끝내고 강당에 다시 모였습니다. 이번 문학기행에 동참한 다른 대학의 교수 한 분이 영상자료를 통해 ‘토지’의 드라마와 소설이 어떻게 다른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문학이라는 큰 우산을 같이 받쳐 들고 있는 드라마와 소설이 이리도 다를 수 있나 싶었고 그래서 그 둘이 문학 장르가 같지 않음이 이해됐습니다.
3)통영시 박경리공원 및 박경리기념관 :2012. 11. 17일(토)
통영시청소년수련관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미륵산 자락의 박경리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재작년 2월에 이 공원을 찾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박경리기념관이 공원입구 차도 옆에 세워져 있어 이곳부터 먼저 둘러보았습니다.
장방형의 네모반듯한 박경리기념관은 그 외관이 단순하고 날렵해 보였습니다. 약1,350평의 부지에 연건평이 400평 남짓한 2층의 양옥건물 위층에 유품을 전시해 놓아 둘러보았습니다. 전시된 유물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선생께서 마지막으로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근원이라면 생명의 하나인 인간도 자연입니다. 그러니 자연과 자연이 합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섭리입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어요.”
제가 특별히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선생의 생명존중 사상 때문입니다. 작가를 직업으로 하면서도 제대로 된 글은 쓰지 않고 SNS를 통해 증오를 쏟아내는 엉터리 작가들에 꼭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어서 옮겨놓았습니다.
박경리기념관에서 산길로 조금 올라가 박경리공원에 안치된 선생의 묘지 앞에서 멈췄습니다. 선생께 큰 절을 올린 후 뒤돌아 아래를 내려다보자 한산만 앞바다가 한 눈에 잡혔습니다. 28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신 ‘토지’의 산실 원주에서 고향 땅 통영으로 돌아와 미륵산 기슭에 묻히신 것도 한산만 앞바다를 내려다보시고 싶어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날 밤에 내린 비로 드러난 황토가 촉촉이 젖어 있었고 봉분의 누런 잔디도 잔뜩 물기를 머금어 당장이라도 푸르러질 것 같았습니다. 묘역의 시비(詩碑)에 적힌 선생의 생명예찬 글을 가슴 에 안고 박경리공원을 떠났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찼습니다.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
박경리선생이 어렸을 때 지나다녔을 해저터널을 들렀습니다. 통영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귀경길에 올라 첫 번 째 문학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2.두 번째 문학기행
1)원주 토지문화관 :2012. 12. 8일(토)
이틀 전에 내린 큰 눈으로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두 번째 문학기행이 연기될 수도 있겠다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걱정으로 주말나들이를 나서지 않아 영동고속도로는 여느 주 토요일보다 소통이 원활했습니다. 수원의 경기지역대학을 출발한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원주시 매지리에 자리한 토지문화관에 도착해 두 번째 문학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문학기행은 방송대의 이승윤, 가톨릭대의 조윤아 두 교수님이 함께 해 도움을 주셨습니다.
오부산 기슭에 자리한 토지문화관은 본관인 문화관이 중심에 자리 잡고 그 좌우에 창작집필 전용 건물이 따로 떨어져 세워졌습니다. 숙박시설로 지어진 3층의 뒤채 건물과 회랑으로 연결된 본관격의 문화관 건물 1층은 중앙의 복도를 경계로 대회의실과 유품전시실이 배치되었고, 직원분의 안내로 유품전시실부터 둘러보았습니다. 두 해전 한 여름에 방송대국문과 동아리인 현운재 식구들과 함께 들른 토지문화관을 이번에는 그간 내린 눈으로 온 천지가 새하얀 한 겨울에 찾아와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전시실에 진열된 여러 유품들 중에서 제 눈을 끈 것은 두 해전 여름에 다녀갔을 때와 똑 같이 "SINGER"재봉틀과 진주 촉석루에서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같이 찍은 흑백사진이었습니다. 선생보다 8년 앞서 태어나신 제 어머님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느라 밤늦도록 재봉틀을 돌리신 날이 부지기수였습니다. "SINGER"대신 "IDEAL"재봉틀을 쓰신 어머니께서는 어깨너머로 간신히 한글을 익히신 정도여서 글 쓰는 일이야 대학을 졸업하고 당대의 실력 있는 문인으로부터 문학수업을 사사받은 선생과 비할 바가 절대로 못 되지만, 재봉질만은 선생 못지않았으리라 생각하자 위대하신 선생께 견줄만한 것을 단 하나라도 가지신 어머니가 자랑스럽습니다. 진주 남강의 촉석루로 소풍간 선생과 동료 여학생들을 선망의 눈으로 올려다보는 빨래터의 아낙들의 모습은 다시 봐도 그 당시를 증언하는 최고의 사회풍속도여서 또 다시 그 사진을 사진 찍어왔습니다.
토지문화관을 탐방하며 꼭 들러야 하는 곳은 장독대입니다. 50개는 훨씬 넘을 장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만 보아도 생전에 토지문화관에 머무르며 창작활동을 하는 여러 분야의 작가들에 내주고자 저 많은 장을 담그신 선생의 후덕함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한데 이번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장독대를 배경으로 해 이승윤교수님을 모시고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바로 위 사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단구동에서 이곳으로 이사 오신 후 이 집에 머무르시면서 오부산 중턱에 내버려진 화전에서 돌을 다 주워내고 두릅나무를 심으셨고 문화관 입구의 밭에다 유기농법으로 농작물을 손수 재배하셨다 는 이야기를 두 해전 탐방 때 들었습니다. 토지문화관은 선생의 생명존중 사상을 몸소 실천에 옮기신 현장이어서 선생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2)원주 연세대 캠퍼스내 박경리문학비
학기말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학교를 찾아서인지 주말의 대학 캠퍼스에 활기가 돌았습니다. 장갑을 벗으면 금세 손가락이 시려올 정도로 차가운 공기도, 지열의 발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겹겹이 쌓인 눈도 학생들이 발산하는 젊은 열기를 막지 못했습니다.
선생께서 연세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인근 원주캠퍼스에 출강을 하고 나서인 것 같습니다. 방송대 국문과의 이상진 교수를 필두로 연세대 출신의 국문학전공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이미 출간된 ‘토지’의 숱한 오류를 바로잡아 교정본을 내게 된 것은 ‘박경리 사단(?)’의 쾌거로 받아들여질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선생의 ‘토지’를 문학은 물론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한 것을 잘 정리한다면, ‘토지’가 국민적 교과서로 자리 매김 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박경리문학비는 여느 시비와 같지 않았습니다. 한 개의 비석에 비문을 새겨 넣은 다른 시비들과 달리 땅에 박힌 여러 개의 금속원판에 한 글자씩 새겨져 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동산에 와서도 문학비를 찾아내지 못한다 합니다. 여기 문학비 앞에서 선생께 강의를 들은 연세대 학생들은 스스로가 참으로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선생의 육성으로 생명존중이야기를 직접 듣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니 말입니다.
또 하나의 시비는 연세대 출신의 민족시인 윤동주님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박경리문학비보다 훨씬 높은 언덕에 세운 윤동주시비를 둘러본 후 캠퍼스를 떠나 단구동의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3)원주 박경리문학관
선생께서 워낙 거목이시라 그 그늘도 넓었습니다. 하동의 평사리, 통영의 미륵산 기슭, 원주의 오부산 기슭과 여기 단구동에 이런 저런 이름의 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명칭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입니다. 평사리에는 ‘평사리문학관’, 통영 미륵산에는 ‘박경리기념관’, 원주 매지리에는 ‘토지 문화관’과 여기 단구동에는 ‘박경리문학의 집’으로 쓰는 것이 정확한 표기입니다. ‘박경리문학의 집’은 원주의 ‘박경리문학공원’안에 있는 작가기념관이고 통영의 ‘박경리공원’은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묘역을 일컫는 것입니다.
‘박경리문학공원’도 두 해전에 다녀간 곳입니다. 그 때 둘러본 문학공원에는 눈길만 주고 2층의 양옥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삼천 여 평의 문학공원 안에 터 잡은 이 집은 1980년 서울에서 이사와 토지문화관으로 옮겨가시기까지 18년간 거처하시며 토지의 제4부와 5부를 집필하신 곳이어서 이 공원을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합니다. 7백여 평의 대지에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직접 재배하신 선생이셨기에 어느 곳보다 선생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선생께서 언제 어디서라도 생각이 떠오르면 글을 쓰실 수 있도록 집안 몇 곳에 책상과 필기도구를 마련해 놓으신 것과 주위의 고양이들이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바깥과 통하는 작은 출입구를 따로 만들어 놓으신 것은 선생의 세심한 배려가 일상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두 해전에 들르지 못한 곳은 2층 양옥 옆의 4층짜리 작가기념관입니다. 선생께서 항상 참고하셨던 이희승 선생의 국어대사전이 엄청 두꺼워 보였는데, 이희승선생께서 생존해 계셨다면 박경리선생께서 ‘토지’를 통해 선보인 수많은 신조어들을 담아낼 더 두꺼운 국어사전을 내셨을 것입니다. ‘토지’의 내용을 1부, 2부, 3부 그리고 4부와 5부를 묶어서 요약해 형상화한 것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토지’를 읽지 못한 내방객들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선생의 생명존중사상은 원주에 살고 있는 사위 김지하시인에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1990년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 자살이 번져나가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며 종북좌파를 질타한 김지하였기에 요즘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의 왼쪽을 이끌어온 평론가 백낙청에 과감하게 대립각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반려자인 따님 김영주는 토지문화관의 관장으로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여러 사업을 펴나가고 있습니다.
.................................................................................................................................................
며칠 전 저는 2004년12월에 간행된 '현대문학' 600호 기념특대호에서 박경리 선생의 에세이 한 편을 읽었습니다. ‘나의 문학수업’이라는 제목의 글은 선생께서 1960년1월에 현대문학에 게재한 것이니 전작소설 ‘시장과 전장’이 나오기 5년 전의 글입니다. 이 글에 따르면 평론가 김우종선생은 박경리선생의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그의 문학은 자기 자신을 더듬고 매만지고 하는 자화상에 가깝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관심이 언제나 대내적인 것이며 대외적인 관심보다는 대내적인 관심이 언제나 앞을 설만큼 자신의 문제가 긴급한 과제로 박두하기 때문이겠다.”
당시에 이런 평을 받은 박경리 선생이 그 후에 내놓은 ‘토지’를 놓고 어느 누구도 ‘사소설’이라 칭하지 않습니다. 선생의 ‘시장과 전장’을 같은 류의 소설로 평가 절하한 평론가 백낙청선생께서 ‘토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들은 바 없어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작가는 자기의 사상, 자기의 비판정신으로 작품을 창작한다. 남의 비판정신을 가지고는 진정한 창조가 잇을 수 없다.”며 선생은 결기를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결기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토지’를 만나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결기가 선생께서 문단을 등지고 오로지 글쓰기에만 전력투구하시게 만든 덕분에 ‘토지’를 테마로 문학기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이 치열하게 붙잡고 늘어진 것은 생명존중사상입니다. 각종 기념관도 선생의 생명존중사상을 기리는 것으로 꾸며지기를 희망합니다. 선생의 편안한 쉼을 빌며 문학기행기를 맺습니다.
*위 글에는 졸고"박경리문학공원/토지문화관을 다녀와서"와 "박경리공원 탐방기"의 일부 내용을 옮겨 적은 부분도 있습니다.
<탐방사진>
1)평사리 최참판댁
2)구례 천은사
3)통영시 박경리공원 및 박경리기념관
4)원주 토지문화관
5)원주 연세대 캠퍼스내 박경리문학비
6)원주 박경리문학관
'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 > 국내명소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6.제주명소 탐방기2(사라오름/외돌개) (0) | 2013.03.25 |
---|---|
55.서울한양도성 순방기(장충체육관-숭례문-돈의문-숙정문-흥인지문-장충체육관) (0) | 2013.02.04 |
53.예천명소 탐방기1(회룡포, 초간정, 용문사) (0) | 2013.01.21 |
52.울산개운포 탐방기 (0) | 2013.01.18 |
51.경주명소탐방기3(주상절리) (0) | 2013.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