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55.서울한양도성 순방기(장충체육관-숭례문-돈의문-숙정문-흥인지문-장충체육관)

시인마뇽 2013. 2. 4. 10:06

                                                          서울한양도성 순방기1

 

 

                                 *탐방일자:2012. 11. 25일(일)

                                 *탐방코스:장충체육관-국립극장-남산팔각정-안중근광장-숭례문

                                                -돈의문터-홍난파가옥-인왕산-창의문

                                 *동행 :총13명

                                      -대구참사랑산악회 권재형, 임상택, 기경환 등 9명

                                      -서울 성봉현, 범솥말, 이규성, 우명길 등 4명

 

 

 

   얼마 전 산우들과 함께 사진으로만 보아온 서울의 성곽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대구의 참사랑산악회원 9명과 서울의 산우 4명 등 모두 13명이 성곽순방길에 나선 것은 매년 가을 함께 하는 정기산행을 가름한 것입니다. 이번에 마치지 못하고 남은 길은 언제고 날 잡아 마저 돌아볼 생각입니다.

 

 

  2011년 7월28일자 정부 고시에 의거 '서울성곽'이 '서울한양도성'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성곽 길을 순방하고 나서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이 도성이 사적 제10호로 지정된 것이 1963년의 일이니, 장장 48년간 '서울성곽'으로 불려오다 작년에야 비로소 '서울한양도성'으로 제 이름을 찾은 것입니다. 100년 살기가 지난한 사람들도 이름이 잘못 정해졌다 싶으면 법원의 판결을 받아 중간에 이름을 바꾸는데, 우리나라 역사가 지워지지 않는 한 보수를 거듭하며 영속할 도성의 이름을 반세기 가깝게 '서울성곽'으로 불러왔다는 이유로 그냥 놔둘 수는 없는 것이어서, 문화재청에서 결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서울성곽’이라는 이름 속에는 서울에 있는 성곽이라는 지리적 의미만 있지 역사적 의의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성곽이 무슨 목적으로 언제 축성된 것인지를 일러주는 어떤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울한양도성'이라면 '서울성곽'과는 다릅니다. 이 성곽이 쌓여진 것은 한양이 수도였던 조선조 때이고,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도성으로 축조된 것임을 이름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조 태조 때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도성이 바로 서울한양도성인데 우리는 작년까지 서울성곽이라 부른 것입니다. 관계당국은 하루 빨리 성곽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서울성곽 길’이라는 이름의 안내판을 ‘서울한양도성 길’로 바꿔달아야 할 것입니다.

 

 

 

1)서울한양도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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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서울한양도성’의 옛 이름은 ‘한양도성(漢陽都城)입니다. 한양도성이란 조선조 때 축성된 성곽으로 북악,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아 도읍지 한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도성(都城)입니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이라는 이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양(漢陽)’입니다. 한양은 조선조 수도의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입니다.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뒤늦게 한강유역에 진출한 신라의 진흥왕이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운 것이 6세기의 일이고, 이곳을 처음으로 한양이라 부른 것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입니다. 고려 때는 양주나 남경으로 불렸습니다. 충렬왕은 이곳에 한양부를 두었고, 문종 때 남경으로 승격되었으며, 숙종은 이곳을 새 도읍지로 삼고자 대대적으로 궁궐공사를 벌였습니다. 그 뒤 고려의 여러 임금들이 이곳에 있는 이궁에 와서 거처하였다고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한국사 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가 된 것은 개경에서 천도한 태조3년인 1394년 10월의 일입니다. 서울시가 조선조 태조 임금이 개경을 출발해 한양에 도착한 10월28일을 서울시민의 날로 정한 것이나,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 서울이 600년 넘게 수도로 그 역할을 해온 점을 감안해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관습헌법에 위배된다고 위헌결정을 내린 것 모두 서울의 역사성을 고려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이 갖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왕궁이 있는 도읍지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도성(都城)’이라는 것입니다. 성곽은 기 기능에 따라 도성(都城), 장성(長城), 산성(山城), 읍성(邑城), 옹성(甕城)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서울성곽’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이 성이 어떤 성인지 쉽게 가늠되지 않습니다. 도성(都城)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축성된 것은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조선전에 “한이 위만을 침공했을 때 왕검에 이르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라는 기록에 의해 평양성의 존재가 확인됩니다. 삼국은 제 마다 수도에 도성을 쌓았고 왕건이 북방의 개척과 여진에 대한 방비가 급해 도성을 쌓지 못한 고려도 현종20년인 1029년에 개경에 도성을 축성합니다. 조선왕조의 도성인 한양도성은 태조5년인 1396년에 축성공사를 시작해 1년만인 1397년에 완공합니다. 한양도성을 쌓는데 98일 동안 연인원 194,470명이 동원되었다고 반영환 님은 그의 저서 “한국의 성곽”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도성축성이야말로 국가적인 대사업이어서 궁궐을 지을 때 동원된 경기도와 충청도를 빼고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와 평안도전 지역에서 장정을 징발해 쌓았습니다.

 

 

  한양도성의 총 길이는 약 18Km입니다. 이 성을 처음 쌓을 때는 높고 험한 곳은 석성을, 평지에는 토성을 쌓았는데 토성이 석성보다 2배가 길었다고 합니다. 도성 안으로 인왕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니 이 성곽은 청계천에 물을 대는 둘레산줄기에 쌓은 셈입니다. 우리나라 성들은 초기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부근에 테를 두른 듯이 쌓은 테뫼형이 많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골짜기를 둘러싸도록 쌓은 포곡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선조의수도인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서울한양도성은 14세기 말에 쌓은 것이어서 포곡형으로 축성된 것 같습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낸 문은 동서남북의 4대문과 사이사이의 작은 소문 등 모두 8개였습니다. 유교의 오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地信)을 본 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으로 이름 붙였고, 북대문만 ‘엄숙히 다스린다’는 의미의 숙정문(肅靖門)으로 지었는데 이 속에 ‘智’자를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합니다. 하나 빠진 ‘信’자는 보신각(普信閣)을 지어 가름했으며 흥인지문의 ‘之’자는 지대가 낮음을 보충하려는 뜻에서 한 자 더 끼워 넣었습니다.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과 서북의 창의문(彰義門)을 이릅니다.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이용된 숙정문을 제외한 7개의 문에는 누각이 지어졌으며, 흥인지문만은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았습니다. 8개의 문을 북쪽의 숙정문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따라가면 혜화문-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소덕문-돈의문-창의문을 거쳐 다시 숙정문으로 이어져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2)장충체육관-남산-숭례문(崇禮門)

 

  리모델링 공사로 어수선한 장충체육관을 지나 성곽 앞에 다다랐습니다. 대구팀과 서울팀이 모두 모여 ‘서울성곽길(Fortress Trail)'의 안내판이 세워진 꽤 높은 성벽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본격적인 ‘서울한양도성’의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신라 호텔 동쪽 위 성곽의 바깥 길을 따라 오르다 석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선조가 한양도성을 쌓은 것은 도성 안의 한양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최악의 경우 도성 밖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왕이 머무르는 도성 안은 기필코 방어해야했기에 성내 출입이 엄청 까다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성안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제한되었을 테고 그들은 대개가 고관대작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1965년에 입학한 경동고등학교는 성 밖인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했습니다. 성안은 종로구와 중구인데, 이 두 구에 살고 있는 학생은 60명이 넘는 제 반에서 딱 두 명이었습니다. 서울의 공립남자고등학교 중 다섯 째 가는 학교가 그런 정도였으니, 1960년대 중반까지도 보통사람들이 성안에 들어가 살기는 정말 어려웠나 봅니다.

 

  왼쪽 아래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데크 길을 지나고 타워호텔도 지나 국립극장 앞 건널목을 건넜습니다. 중간에 끊긴 성곽은 국립극장을 지나 남산 길로 올라서자 다시 나타나 성곽의 옛 모습이 보였습니다. 말이 좋아 도성 순방이지 기실은 성곽 터 순방이라 불러야 옳을 정도로 끊긴 곳이 많고 그나마 이어진 곳도 새로 개축한 것이 거의 다인 성곽 길에서 역사의 때가 지워지지 않은 고색창연한 옛 성을 다시 본다는 것은 과거와의 대화 이상으로 기쁘고 감회어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입동이 지나고 소설을 맞았는데도 이 가을은 남산을 떠날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산의 나무들이 빚어낸 만산홍엽의 화사함에 감탄하면서 남산 길을 걷는 시민들이 꽤 많아 보였습니다. 1965년 서울로 유학을  와 경동고교에 입학한 3월의  마지막 일요일 하루를 잡아 걸어서 서울 시내 남산과 고궁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처음 오른 남산이 엄청 높은 산으로 알았던 것은 이 산에 올라와보니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고, 또 남산보다 더 높은 산을 걸어 오른 것은 그 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남산에 오르자 그 때보다 볼거리가 훨씬 많았습니다.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의 봉수대 5개중 하나를 복원한 것은 1993년의 일입니다. 남산타워에 방송 송출용 전파탑을 세운 것은 1969년의 일이고, 해발243m의 남산보다 조금 낮은 237m 높이의 남산타워를 일반인에 공개한 것이 1980년입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도 제가 남산에 처음 오른 지 꼭 10년만인 1975년에 세워졌고, 야외음악당 자리에 백범광장을 조성한 것은 1968년의 일입니다. 이런 남산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본 것은 무너져버린 도성이 아니고 소나무로 철갑을 두른 듯한 남산이었습니다.

 

  백범광장에 세워진 백범 김구선생 동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깔끔하게 단장한 새 성곽을 따라 숭례문으로 내려갔습니다.

 

 

 

3)숭례문(崇禮門)-정릉공원-돈의문터

 

  길은 짧은데 이야기꺼리가 엄청 많은 구간이 숭례문-정동공원-돈의문터 길입니다. 성곽은 모두 없어졌고 고층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선 이 구간에 숨통을 터주는 정동공원 일대는 조선의 근대화가 뿌리내린 곳이어서 한양도성의 옛 이야기를 잠시 뒷전으로 제쳐둬도 괜찮은 구간입니다.

 

 

  남대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숭례문은 국보1호로 지정된 한양도성의 정문입니다. 2008년 2월 토지보상 문제로 불만에 가득 찬 한 노인이 불을 질러 누각이 전소된 숭례문은 가리개로 안을 가리고 복원공사를 하고 있어 옛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세종로를 바라보며 왕궁인 경복궁이 숭례문에서 아주 가까워 다른 문에서보다 이 문에서 검문검색이 훨씬 더 철저했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인들 불만세력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조선조 5백년 동안 숭례문이 단 한 번도 백성들의 방화로 소실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보다 관리가 잘 된 덕분일 것입니다.

 

 

  숭례문(崇禮門)과 돈의문(敦義門)의 두 대문 사이에 자리한 소문은 서소문으로 불리는 소의문(昭義門)입니다. 원래 이름이 소덕문(昭德門)인 소의문은 용산과 마포, 그리고 서강으로 통하는 문으로 성내의 장례행렬도 이 문을 지났다 합니다. 도로공사를 핑계로 일제가 이 문을 헐어버린 지 100년이 다 되가는데 언제 다시 복원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작정하고 나선 도성을 순방하는 길이 아니면 그냥 지나쳤을 서소문 앞길을 건너 나지막한 고갯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고등학교인 배재 고등학교 터에 강동의 고덕으로 이사간 배제고등학교를 대신해 같은 재단의 배재대학교가 새로 들어섰습니다.  역사로나 명성으로나 배재고등학교에 비할 바가 못 되는 현대식 건물의 배제대학교가 사학의 발상지인 배재학당 터에 들어선 것이 그리 어울려 보이지않아서인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여고인 이화여고가 고개 너머 이화학당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오랜만에 걸으면서 조선조의 고종임금께서 정궁인 경복궁을 지척에 놔두고 좁디좁은 덕수궁으로 왕궁을 옮긴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일본인들에 왕비를 잃은 고종임금이기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고, 끝내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덕수궁에 새로 왕궁을 차린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5.16 때 군사쿠테타를 진압해야할 총리가 혜화동의 수녀원으로 피신한 것을 가지고 장면총리를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국의 왕이 안위 때문에 백성들이 피땀 흘려 지은 정궁을 내버리고 이궁으로 옮긴 것은 일시적인 피신이 아니고서는 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어떤 위협을 당하더라도 정궁에서 집무하겠다고 매섭게 결기를 세우지 않는 왕을 어느 백성이 믿고 따를까 싶어서였습니다.

 

 

  고종이 경복궁에서 자리를 옮긴 러시아공사관 터도 들렀습니다. 러시아도 미국도 국력이 쇠잔할 대로 쇠잔한 조선을 일본의 강점기도로부터 막아줄 수는 없었고 그리 할 뜻도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제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해, 북한의 핵실험에 놀라 고종임금처럼 수도서울을 버리고 세종시로 청와대를 옮겨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단 한 채 남은 러시아 공사관 앞이 정동공원으로 조성되어 그곳에서 점심을 들은 후 돈의문(敦義門) 터로 옮겼습니다.

 

 

4)돈의문(敦義門)터-인왕산-창의문(彰義門)

                      (위 사진은 돈의문 옛 사진으로 범솥말님 홈페이지에서 옮겨놓은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신촌 쪽으로 향하는 길의 첫 번째 고갯마루에 자리했던 돈의문 역시 소의문이 헐린 다음 해인 1915년에 전차궤도복선화로 헐려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원래 사직동-독립문 사이에 세워진 돈의문이 세종15년인 1422년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다는데 설사 그 때 옮기지 않았더라도 도로확장을 구실 삼아 소의문을 헐어버린 일제가 그냥 놔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해방 후 백범 김구선생이 머물렀던 경교장이 돈의문터 바로 옆 강북삼성병원 안에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경교장을 사진 찍고 나서 북쪽으로 난 아스팔트길을 따라 올라 홍난파선생의 생가 앞에 이르렀습니다. 홍난파 선생에 대한 해설을 맡은 제가 깜박 잊고 준비를 해가지 않아 다른 분들에 미안했습니다. 1898년에 수원에서 태어난 선생은 해방을 못 맞고 1941년에 작고하시기까지 ‘고향의 봄’,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등 우리 귀에 익은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 동안의 일부 행적으로 친일파로 비난받고 있지만 그 당시 수많은 조선인의 심금을 울린 선생은 음악인이자 문인이기도 해서 단편소설집 ‘처녀의 혼’, ‘폭풍우가 지난 후’와 ‘향일초’ 등을 내기도 했습니다. 빨간 벽돌의 2층집 양옥인 홍난파생가에서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은 골목길이었습니다.

 

  동행한 한 친구가 스틱을 정동공원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걸음이 잰 성봉현님이 다시 돌아가 스틱을 찾아오는 동안 ‘권율도원수 집터’ 앞에서 얼마간 쉬었습니다. 떡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떡 사시오”하고 외치는 육십 줄의 한 아주머니에게서 떡을 사 먹으면서 이런 고지대 동네이니까 향수어린 풍속이 아직 남아 있다 했습니다.

 

  ‘권율도원수 집터’에서 떠올린 분은 서애 유성룡선생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한해 전에 좌의정에 올라 이조판서를 겸무한 선생은 선조임금께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합니다. 당시 종6품의 정읍현감 이순신을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위관급을 장성급으로 승진시키자는 것이어서 사간원 대신들이 관직과 작위의 남용이라며 들고일어나 반대했습니다. 이때 권율과 이순신이 임용되지 못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임진왜란이 조선의 패전으로 끝났을 것을, 인재를 알아보는 유성룡의 빼어난 눈과 선조임금의 과감한 결단이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끄는데 큰 몫을 한 것입니다.

 

  ‘권율도원수 집터’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은 선두를 따라잡고자 서둘렀습니다. 골목길을 지나 만난 성곽은 새롭게 단장된 것이어서 한양의 도성이 아닌 서울의 성곽이다 했는데, 먼발치서 산 능선을 따라 쌓은 굽이진 성곽을 보자 도성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인왕산은 산높이가 해발 338m로 낮은 산이지만 이런 저런 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아 전설도 꽤 많이 전해지는 친근한 산이기도 합니다. 중종반정으로 폐서인이 된 단경왕후를 못 잊어 경회루를 들러 인왕산을 바라보는 중종임금께서 보다 잘 볼 수 있도록 단경왕후께서도 경회루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에 올라 치마를 걸어놓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바위가 치마바위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지는 것은 최고의 권세가인 임금의 러브스토리도 비극으로 끝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왕산에서 내려가 일행을 만난 곳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었습니다. 도성을 쌓아 한 나라의 수도를 지켜내고자 한 조선의 임금이나, 시를 지어 민족혼을 지켜내고자 한 시인 윤동주 모두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애쓴 것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시인의 언덕에서 모여 함께 내려간 곳은 창의문(彰義門)으로 남대문, 숙정문, 돈의문을 지나며 보지 못한 성문을 직접 볼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5)1차순방을 마치며 

                              (위 사진은 창의문 사진으로 법솥말님 홈페이지에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창의문(彰義門)에서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을 오르는 길은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으로 신분이 확인된 사람에 한해 출입이 허용되어, 달랑 방송대학생증만 갖고 간 저는 더 이상 일행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창의문에서 도성순방을 멈춰야 했습니다. 혜화동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머지 분들을 올려 보낸 후 차도를 따라 내려가 청와대 앞을 지났습니다. 경복궁돌담길을 지나고 창덕궁 돌담길을 거쳐 다다른 대학로의 방송대에서 도서관을 찾아가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혜화동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구 팀이 타고 온 버스를 타고 송파구청 먹자거리로 옮겨 술잔을 나누면서 저녁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내년 봄에 대구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대구 팀을 전송하는 것으로 서울한양도성 순방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이번 도성순방은 성터 순방으로 고쳐쓰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싶습니다. 이번에 들러본 4개의 성문 중 제 모습이 유지된 것은 창의문 하나였습니다. 숭례문은 내년 중에 복원공사가 끝나 그 전모를 드러내 보일 것이고, 돈의문은 복원공사계획이 잡혔다지만, 소의문은 깜깜 무소식입니다. 장충체육관-남산-숭례문 구간은 성곽이 상당부분 복원되었지만 숭례문-정동공원-돈의문터 구간은 앞으로도 복원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돈의문터-인왕산-창의문 구간은 산성이 꽤 길어 그 나마 도성다운 면모를 보여주어 다행이다 했습니다.

 

 

 

 

 

 

                                                              <순방사진>

 

 

 

 

 

 

 

 

 

 

 

 

 

 

 

 

 

 

 

 

 

 

 

 

 

 

 

 

 

 

 

 

 

 

 

 

 

 

 

 

 

 

 

 

 

*마지막 창의문 사진은 길 안내를 맡아주신 범솥말님 블로그에서 따왔습니다.

 

 

 

 

 

 

 

 

                                                         서울한양도성 순방기2

 

 

                                         *탐방일자:2015. 3. 8일(일)

                                         *탐방코스:창의문-숙정문-혜화문-낙산-흥인지문

                                                        -광희문-장충체육관

                                         *동행 :나 홀로

 

 

 

  전장 18.6km의 한양도성을 하루에 다 돌기는 무리일 것 같아 두 번에 나누어 순방했습니다. 2012년 11월 대구의 참사랑산악회원들과 함께 장충체육관을 출발해 숭례문을 거친 후 창의문에 도착한 것이 첫 번째 순방으로 도성 길을 반가량 돌았습니다. 그후 이런 저런 사정으로 2년여 미루다가 어제야 비로소 창의문을 찾아가 남은 반을 마저 돌았습니다. 첫 번째 순방길의 끝점인 창의문에서 시작해 흥인지문을 들른 후 해질 무렵 장충체육관 앞에 도착해 한양도성 순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번 순방의 출발점은 북소문으로 불리는 창의문(彰義文)입니다. 4대문 사이에 배치한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 진 것이라 합니다. 창의문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1968년 한 해 동안 문 밖 북쪽 아래 세검정에서 살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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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의문-백악루-숙정문-홍화문

 

 

  12시30분 창의문(彰義文)을 출발했습니다. 창의문에서 말바위안내소까지는 통제구간으로 창의문안내소에서 신고서와 함께 주민등록증을 제시해 패찰을 받아야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깜박 잊고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지 않아 같이 간 일행들은 혜화문까지 진행했는데 저 혼자 여기 창의문에서 끝내야 했습니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자북정도(紫北正道)로 명명된 백악산 마루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 길로 해를 가릴 데가 없어 한 여름에 오르려면 땀 좀 흘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창의문에서 시작된 시멘트 계단 길은 이내 끝났고 목제계단 길이 이어졌습니다.

 

 

  계단 길을 오르며 주의해야 할 것은 오른 쪽 아래 청와대방향으로 사진을 찍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1978년 모 그룹사에 입사해 영락교회 맞은편의 18층 본사 건물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청와대와 한참 떨어진 이 건물도 청와대방향의 북쪽 유리창은 항상 커튼을 쳐야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진촬영은 안되지만 도성 길을 따라 청와대 바로 뒷산인 백악산 산마루를 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로 격세지감마저 느껴졌습니다. 백악산으로 오르는 길이 개방된 것은 8년 전인 2007년의 일입니다.

 

 

  제가 수도 서울에 자리한 해발 342m의 백악산을 올라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산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시멘트계단 길을 따라 해발 293m의 청운대로 내려가는 중 ‘1 . 21사태 소나무’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젊은 연인들을 보았습니다.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하고자 침투한 북한124부대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우리 군경과 벌인 총격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길 옆 ‘1.21사태소나무’에 나 있는 탄흔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파된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저보다 47년 먼저 이 산을 오른 셈입니다. 청운대에서 암문을 빠져나가 5-6m 높이의 성곽과 4-5m폭으로 쳐 놓은 철조망 사이의 성곽 밖 북쪽 길을 10분여 걸었습니다.

 

 

 

  다시 암문을 통과해 성곽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곡장(曲墻)에 이르렀습니다. 안내문에 치(雉)란 “성곽 중 일부분을 돌출시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쏘거나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이르는 것으로 적혀 있는데 곡장(曲墻) 또한 같은 것이어서, 이곳에서는 그 뜻이 조금 다른 치(雉)와 곡장(曲墻)을 같은 뜻으로 쓴 것 같습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떡을 꺼내 요기를 한 후 직진 방향의 팔각정으로 향하는 대신에 오른 쪽으로 방향을 확 틀어 남동쪽의 촛대바위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곡장에서 촛대바위에 이르는 솔밭 길을 카메라에 옮기고자 경비원에 문의했으나 안 된다고 해 아쉬웠습니다. 촛대바위 위의 지석은 1920년 일본제국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쇠말뚝을 박은 곳이라 합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서양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화에 앞장 선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것으로도 모자라 민족정기를 끊어놓고자 쇠말뚝을 박은 것은 당시의 일본은 물질문명의 근대화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정신문화의 후진성을 그대로 노정한 후진국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촛대바위를 지나 얼마 후 내려선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의 북대문(北大門)으로 4대문 중 유일하게 산 위에다 쌓은 대문입니다. 숙청문(肅淸門)에서 이름이 바뀐 숙정문(肅靖門)문은 유교의 오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글자를 딴 다른 대문과 달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따서 지(智)를 간접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정궁 뒤에 놓여 통행에 거의 쓰이지 않았던 상징적인 숙정문의 대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으로 보기에 좋았습니다.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자 북동쪽으로 군사정권 때 요정정치의 밀실로 쓰였던 삼청각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숙정문에서 말바위안내소까지는 멀지 않았습니다. 말바위안내소에서 패찰을 건네 준 후 조금 올라가다 다시 성 밖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산본 집을 나설 때 쌀쌀하다 했는데 그새 기온이 올라 성 밖 응달길이 걷기에 더 좋았습니다. 바닥에 덮개를 깔아놓아 비가 내려도 질퍽대지 않을 성 밖 길을 한찬 동안 걸었습니다. 건너편 성북동의 부촌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성곽 아래 빈촌의 골목길을 보자 1960년대 후반 돈암동 산꼭대기 동네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옛날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보다 훨씬 못살던 때여서 비만 오면  천정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는 것이 일이이었는데,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런 빈촌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지낸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벚나무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성곽 길은 길지 않아 이내 끝났고 골목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경신고를 거쳐 성북동 주민센타에 이르렀지만 혜화문으로 가는 제 길을 찾지 못해 별 수 없이 한성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역 앞에서 대로를 건너 혜화동 쪽으로 진행하자 바로 길 건너 혜화문(惠化門)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2)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장충체육관

 

 

  길 건너 혜화문(惠化門)을 사진 찍고 나서 성밖 길을 따라 낙산으로 향했습니다. 혜화문(惠化門)은 동대문(東大門)인 흥인지문(興仁之門)과 북대문(北大門)인 숙정문(肅靖門) 사이에 위치한 동소문(東小門)으로 원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습니다. 이 문은 성종 때 새로 지은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弘化門)으로 이름 짓고 나서 중종 때에 이르러 혜화문(惠化門)으로 그 이름을 고친 것으로 1928년 도시 확장으로 헐리기까지 수유현을 거쳐 양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해왔습니다.

 

 

 

  잘 다듬어진 성 밖 길을 따라 오르다 성곽하단의 오래된 돌에 음각된 한자를 보았습니다. 이 한자는 축성을 감독한 감독관 또는 석수의 이름이 분명한데 글자가 희미해 판독하지 못했습니다. 북쪽으로 한성여대와 성신여대 건물은 잘 보였지만 그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을 제가 다닌 경동고교는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해발124m의 낙산 정상에 꾸며놓은 낙산공원에서 잠시 쉬는 중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인생을 즐기다 30대에 요절한 고교동창이 떠오른 것은 서울법대를 졸업하자마자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 친구의 집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 낙산 중턱에 자리해 여러 번 놀러간 적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낙산 정상에서 동대문에 거의 다 내려가 한양도성박물관을 들렀습니다. 조촐한 규모의 박물관은 맨 위 3층에 상설전시실만 개방되어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둘러보았습니다. 도성의 축성과 복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은 이 박물관을 먼저 보고 도성을 순방했다면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 길 건너 동대문(東大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동대문(東大門)을 다 짓고 나서 현판을 달 때 흥인문(興仁門)에 지(之)자를 하나 더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한 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이를 보충할 뜻에서였다 합니다. 1396년 건립된 이 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수리를 한 것은 불문가지의 일로  해방 후로는 1958년 문을 보수 했고 2007년에 서북옹성을 해체하고 수리했으며 작년에도 옹성을 보수했다는데도 최근 TV보도를 보면 추가로 손댈 곳이 꽤 있다 합니다. 동대문에서 오간수교를 건너 광희문으로 가는 길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도 둘러보았습니다. 야구장인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들어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압권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입니다. DDP에 대한 시비는 유선형의 독특한 건축미에 감탄한 외국인관광객이 많아지고 나서 사그라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시체를 밖으로 내가는 시구문(尸口門) 역할은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光熙門)이 맡아 했습니다. 1396년 1차 축성 때 돌이나 목재에 깔려 죽은 인부들의 시체를 이 문을 통해 내보낼 때는 성문 밖에서 수륙제를 벌여 영혼을 위로했다 합니다. 그 뒤로 사형당한 시체나 행려병자들의 시체를 이곳에 버려 풍장을 지내기 일쑤였는데 가끔 중들이 수륙제를 지내주었다고 재야사학자 이이화 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복원한 광희문을 주변을 발굴하고 시민에 개방한 것은 재작년입니다.

 

 

 

  광희문에 이어 쌓은 성곽은 아주 짧아 장충체육관까지 길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광희문교회와 장충동주민센타를 지나 장충체육관 앞에 이르자 하루해가 다해갔습니다. 해지기 직전에 장충체육관 바로 위 성곽에 도착해 한양도성 순방을 깔끔하게 마무리했습니다. 2012년 11월 한양도성순방의 출발점을 다시 찾아 사진을 찍은 후 동국대역으로 옮겨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3)2차순방을 마치며

 

  작년 5월 중국의 시안을 탐방할 때 서안성벽을 다녀왔습니다. 명나라의 서안성벽과 조선의 한양도성은 축성시기가 비슷한 도성이어서 여러 모로 비교해볼 만합니다. 1378년에 완공된 서안성벽은 그 길이가 13.7Km로, 그 20년 후인 1398년에 축성을 마친 한양도성의 18.7km에 많이 못 미칩니다.

 

 

  같은 도성이면서도 서안성벽과 한양도성이 서로 다른 점이 많아 흥미롭습니다. 첫째 축성기간입니다. 서안성벽은 8년이 걸렸는데 두 번에 걸쳐 축성한 한양도성은 단 98일 만에 완공됩니다. 둘째 성곽의 모양입니다. 서안성벽은 장방형의 평지에 쌓은 성이고 한양도성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많이 닮았습니다. 셋째 서안성벽에 있는 해자가 한양도성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곽이 들어선 지형이 달라서입니다. 넷째 서안 성벽은 성곽 위를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아 길을 넓게 냈는데, 한양도성은 그렇지 않아 성곽 위를 걸어 다닐 수 없습니다. 한양은 배산임수에 기초해 만들어진 도시이고, 서안은 드넓은 평원의 분지에 세운 도시여서 이런 차이를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정조 때 축성된 수원의 화성을 아직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순방해 한양도성과 비교해볼 참입니다. 조선의 도성축성의 변천사를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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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두번에 걸쳐 한양도성을 순방한 것은 역사와의 대화를 위해서입니다. 성곽은 허물어져 사라지고 성문도 도로확장공사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여러군데 있었지만 역사의 현장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와의 대화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아는 바가 많지 않아 제 글이 이런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 길을 저보다 먼저 순방한  서상경님의 ‘서울성곽길’ 답사기와 첫 번째 순방을 같이 한 범솥말님의 ‘서울도성문화답사 산행기’를 찾아 읽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범솥말님의 글과 사진을 많은 부분 참고했음을 밝히며 감사의 말씀을  같이 올립니다.

 

 

                                                      

 

      

                                                               <순방사진>

 

 

 

 

 

 

 

 

 

 

 

 

 

 

 

 

 

 

 

 

 

 

 

 

  • 범솥말
  • 2015.03.26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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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 반갑습니다.
    주민등록증 미소지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반씩 나누어 잘 하신 것도 같고요.
    도성순방보다 더 힘들었던 게 알고있는 역사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도성 순방을 마치셨으니 개운하시겠습니다.
    화성도 돌아보시고 조선왕릉도 계획을 짜보세요
    끊어진 곳이 몇 군데 있어 아쉬웠지만 둘러보길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당국에서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복원에 앴는 걸보면 다행이다 싶습니다. 다 먹고 살만해서일 겁니다. 등소평 덕분에 먹고살만 해진 중국도 복원에 나섰다 합니다.
    자료 많이 참고햇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