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56.제주명소 탐방기2(사라오름/외돌개)

시인마뇽 2013. 3. 25. 18:24

                                                     제주명소 탐방기2

 

                                         *탐방일자:2013. 2. 17-18일

                                         *탐방지   :사라오름(17일)/외돌개(18일)

                                         *동행      :경동고24회 동문

 

 

  제주도는 한반도에 부속된 도서 중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우리 헌법 3조는 우리나라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제주도가 당연히 우리 땅인 것을 대한민국의 헌법3조가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북쪽의 북한 땅도, 부속도서인 동쪽 끝 독도도 모두 우리 땅입니다. 바다를 건너 날라 갔는데도 공항에서 여권이나 비자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제주도가 우리 땅이기 때문입니다. 9년 전 금강산을 갔을 때 통행증은 내보여주었지만 입국사증인 비자제시를 요구받지는 않은 것도 남북한은 언제고 하나로 뭉쳐야 할 나라이지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주도가 우리 역사에 나타난 것은 한반도로 편입되기 훨씬 전인 4세기 중엽의 일입니다. 왜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왕은 탐라국으로 보이는 침미다례를 정벌하여 백제에 하사하였고, 백제에서는 이 보답으로 나라의 보배인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냈다 합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이 시기를 백제 근초고왕 때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이 역사서가 8세기에 풍미하였던 일본이 율령국가적사관에 따라 과대, 왜곡, 윤색, 괴탄, 신이의 이야기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며, 대륙에 약탈근거지를 마련하려고 침략을 일삼아온 왜국이 힘들여 정복한 침미다례를 백제에 떼어주었다면 어떤 이유로든 관리가 힘들어 잠시 위임한 것일 뿐이라고 그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그 후 백제는 476년에 탐라국의 조공을 받고 대단히 기뻐해 사신에 벼슬을 내린 적이 있었고, 498년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고 지금의 광주에 이르렀을 때 사신이 와 중단한 적이 있을 정도로 탐라국과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제주도에 얽힌 설화는 제주도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현전하는 “삼을나전승(三乙那傳承)”의 삼을나(三乙那)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梁乙那) 및 부을나(夫乙那)를 이르는 것입니다. 서대석/박종성 두 교수는 삼을나의 고을나(高乙那)는 고구려에서, 그리고 부을나(夫乙那)는 백제에서 유래된 것이며 양을나(梁乙那)만이 제주 본래의 토착적인 성씨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표식일 것이라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상세한 자료들을 그들의 공저인 “구비문학의 세계”에 실어놓았습니다.

 

 

 

  제주도가 한반도에 그 부속도서로 완전 복속된 것은 고려 때의 일입니다. 한반도의 고려에 조공을 받쳐온 탐라국이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에 이르러서야 탐라군으로 개칭되어 고려의 한 군으로 편입됩니다. 탐라의 역사와 설화를 모두 녹여 담아 낸 결정판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한 헌법3조입니다.

 

 

  제주도의 중심부는 해발1915m의 한라산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 겨울에 제주도를 찾는 목적 중의 하나는  남한 땅 최고봉인 한라산을 올라 정상의 설경을 카메라에 담고싶어서일 것입니다. 한반도 남단의 산들에서 설경의 황홀함을 볼 수 없는 것은 위도가 낮은데다 산 높이가 천m를 넘지 못해 설사 눈이 내린다 해도 오래 남아 있지 못해서인데, 유독 한라산만은 그 높이가 2천m가 다 되어 한 겨울에도 정상부근의 눈이 녹지 않고 설경을 빚어냅니다.

 

 

 

  경동고 24회 동문들의 산모임인 동산회에서 매달 한 번씩 정기산행을 해 온 것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동안 주로 서울근교산을 올랐던 이 모임에서 2월의 산행지로 한라산을 택한 것은 이 산의 설경을 보고 싶어 하는 동문들의 여망을 헤아린 조치입니다. 5년 넘게 한 번도 정기산행에 참여하지 않은 제가 한라산을 같이 오르기로 한 것은 그동안 꿈꾸어온 한라산의 설경을 이번에는 제대로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아쉽게도 한라산의 정상을 오르지를 못했습니다. 제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설산의 한라산을 오른다는 꿈에 들떠 가슴이 뛰었는데, 들머리인 성판악에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 정상 행을 포기했습니다. 대신에 산중턱의 사라오름을 올랐고 다음 날 3시간가량 외돌개를 지나는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이틀 모두 지분지분 내리는 눈괴 비로 탐방 길이 편하지 못했지만, 걸은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아 견딜 만했습니다.

 

 

 

1.사라오름:

1)탐방일:2013년 2월 17일(일)

2)동행   :이기후, 박부준 동문

 

   한라산은 오름의 집합으로, 대표적인 부분집합이 백록담을 품고 있는 정상입니다. 오름이란 ‘오르다’의 명사형으로 독립된 산 또는 봉우리를 이르는 제주도 방언입니다. 이 오름은 한라산 산록에 붙어 있는 새끼화산으로 기생화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라산의 오름 중에는 정상의 백록담처럼 분화구가 있는 큰 오름도 여러 곳 있습니다. 한라산 산줄기에 산재된 오름이 모두 360개가 넘는다 하니 한라산은 과연 오름의 집합이라 불릴 만합니다.

 

 

 

  2월17일은 아침부터 바빴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택시를 타고 평촌으로 가서 김포공항 가는 버스에 오른 시각이 오전5시35분이었습니다. 40분을 달려 도착한 김포공항에서 일행을 기다렸다가 저가 항공 제이에어라인에 탑승해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을 날랐습니다. 캐쥬얼한 유니폼이 경쾌해 보이는 젊은 승무원들의 손님맞이 또한 격의 없는 성심에서 우러나온 색다른 것이어서 보기에도 신선했습니다. 제주공항에서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성판악까지는 산악회에서 준비한 렌트카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오전 10시 성판악을 출발했습니다. 안전사고를 위한 예방조치로 진달래대피소에서 정오를 넘기지 않은 등산객에 한해 정상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산악회장 이규성교수 등 주력이 좋은 4-5명의 동문들은 정상에 오를 뜻으로 앞장서 내달렸고,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한 이기후/박부준 두 명의 친구들은 일찌감치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저와 함께 중간의 사라오름을 다녀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 천천히 올랐습니다. 하얀 눈이 설국을 이루고 있을 정상에 올라선다는 가슴 벅차는 환희를 포기하고 새끼화산인 오름으로 목적지를 수정한다는 것은 ‘포기도 결단이다’라는 자각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성판악에서 사라오름 분기점까지는 경사가 완만한 길이어서 산 오름이 별반 힘들지 않았습니다. 시간 반을 걸어 다다른 속밭대피소에서 김밥을 꺼내 든 후 20분가량 눈길을 걸어 올라 진달래 대피소를 얼마 앞 둔 사라오름 분기점에 이르렀습니다. 2006년 가을에 왔을 때만 해도 사라오름이 개방되지 않아 몰래 숨어들어갔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분기점에 정식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분기점에서 사라오름까지 거리는 0.6Km로, 하얀 눈덩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꽤 큰 구상나무(?) 숲사이로 데크 길이 나 있어 오름 길이 한결 편했습니다.

 

 

 

  사라오름의 산정호수에 도착하자 안개가 잔뜩 끼어 가시거리가 4-5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둘레가 250m가량 되는 산정호수는 이곳에 오름을 만든 기생화산의 분화구로, 그동안 내린 눈이 호수의 얼음판을 덮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라면 이 호수가 엄청 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은 얼음이 얼어 실제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데다, 태고의 음향을 전해주는 바람소리가 짙은 안개와 더불어 한껏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서 그러했습니다. 산정호수를 왼쪽 데크 길로 돌아 전망대에 오르자 고산 특유의 칼바람이 엄청 드세게 불어 간신히 사진 몇 장만 찍고 산정호수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사라오름에서 기대했던 한라산 정상을 조망하지 못했습니다.

 

 

 

  사라오름에서 성판악으로 되돌아가는 하산 길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오름 길의 눈이 비로 바뀌어 주룩주룩 내렸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넘게 성판악에서 정상을 올라간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함께 숙소인 한림읍내 캔싱턴리조트로 옮겼습니다. 30여명의 동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녁을 함께 들며 한라산 정상을 오른 동문들을 축하했습니다.

 

 

  한라산의 오름은 제주도가 만들어지던 전 과정에서 일어난 수백차례의 분화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거인 설문대할망이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틈새로 한 줌씩 떨어진 흙덩이들이 오늘의 오름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른 사라오름은 치마틈새가 꽤 컸었던지 분화구의 둘레가 250m정도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한라산이 오름의 집합일진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부분집합인 오름들을 부지런히 올라 1969년에 처음 오른 한라산 등정의 전체 집합을 완성해볼 생각입니다.

 

 

 

2.외돌개:

1)탐방일:2013년 2월 18일(월)

2)동행   :이규성, 권종진, 장용진, 남상태 부부, 이기후 동문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대다수의 동문들이 제주도의 명승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들이 저마다 달라 7-8명씩 조를 짜 렌트카 몇 대에 분승했는데, 제가 속한 조는 모두 7명으로 서귀포의 외돌개에서 시작되는 올레길 7코스를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날씨가 전날 사라오름을 오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눈 대신 비가 오라가락 내렸습니다. 12시가 조금 넘어 외골개 공원에 도착해 정류장에 차를 주차 시킨 후 올레길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소나무 길을 지나 다다른 해안가 단애에 이르자 하체를 바닷물에 담근 채 홀로 서있는 기둥바위 외돌개가 내려다보였습니다. 뭍과 떨어져 바다 한 가운데 외롭게 서 있다 하여 외돌개라 불린다는 데 뭍과 떨어진 거리는 십 수 미터밖에 되지 않아 외돌개의 외로움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저 앞의 문섬에 비할 바가 못 될 터인데도 명승지로 이름을 드높인 것은 주변의 빼어난 풍광이 받쳐주어서일 것입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둘러본바, 외돌개 너머의 구름다리와 문섬, 그리고 광활하게 펼쳐지는 바다도 장관이었고, 외돌개 안쪽의 푹 들어간 해안가 단구의 절애도 일품이어서 과연 명불허전이다 했습니다.

 

 

 

  때마침 비가 멈췄고, 기둥의 높이가 20m에 달하는 외돌개의 고고한 모습이 한눈에 잡혔습니다. 15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바꿔놓았을 때 외돌개가 형성된 것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싶었는지 제주시는 시청홈페이지에 관련 설화를 덧붙였습니다. 외돌개의 별칭이 할망바위인 것은 한 할머니가 고기잡이를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바위가 되었기 때문이며, 바위 끝에 사람의 머리처럼 초목들이 자라고 있고, 그 왼편으로 할머니의 이마와 깊고 슬픈 눈망울과 콧등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고, 쩍 벌어진 입모양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찾아 부르는 모습 그대로라는 점 등이 그 증거라 했습니다.

 

 

 

  민담 수준을 넘지 못하는 위 할망바위 이야기만으로 외돌개의 신비로움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어 최영장군 같은 역사적 인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살아생전에는 조선의 태조로 등극하는 이성계에 밀린 최영 장군은전설의 세계에서만은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습니다.  고려 말 목호(牧胡)의 난을 토벌하고 제주도를 평정한 것은 장군 나름의 기지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최후의 격전장인 범섬을 앞에 둔 외돌개를 장대한 장수로 치장해 놓은 것이 주효해 문섬에 진을 친 목호의 장병들이 외돌개 바위를 대장군이 진을 치고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입니다.

 

 

  길섶에 듬성듬성 샛노란 꽃을 피운 유채화가 한라산 정상에 봄소식을 실어 나를 즈음이면 내륙의 산들도 봄을 맞아 진달래를 꽃 피우리라 생각하자 때 맞춰 울려 퍼질 봄의 교향악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데크계단을 따라 내려선 돔배낭길에서 제가 들은 교향악은 포효하는 파도소리였습니다. 단구와 해안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주상절리가 잘려나가 생긴 바위덩어리들이었습니다. 이 바위들을 디딤돌로 삼아 해안가를 따라 낸 길이 돔배낭길이어서, 수많은 건너뛰기를 마친 후에야 이 길을 완전히 통과해 대륜동 해안올레길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온 뒤끝이라 이 길이 미끄러워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고 서귀포여고 앞을 지나는 마을길로 돌아 갔다면 육각형 바위기둥의 주상절리를 보지 못해 두고두고 아쉬워할 뻔 했습니다. 해안가에서 곧추선 주상절리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가슴이 뛰었는데, 여기보다 더 장대한 주상절리가 8코스(?)에 따로 있다고 해 이 코스를 탐방하는 그날을 위해 최고의 감탄사는 가슴 속에 남겨두었습니다.

 

 

 

  주상절리란 용암이 식어 만들어진 것으로 대개가 육각기둥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용암이 지표로 분출하여 빠르게 냉각될 때 아래로는 지표면과, 위로는 공기가 접촉하여 냉각되므로 대체로 수직방향으로 절리가 발달되어 있는데 여기 돔배낭길의 주상절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길을 지나면서 단구의 바위기둥들이 주상절리라고 바로 알아 챈 것은 작년 여름 경주 월성리 바닷가에서 육각기둥의 주상절리 덩어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여기 주상절리는 곧추선 입상이고 월성리는 부채꼴 모양으로 누워 있는 와상이라는 것뿐입니다. 주상절리가 해안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광주의 무등산을 받쳐주는 입석대는 대표적인 입상의 주상절리입니다. 이렇듯 산과 바다를 하나로 꿰어주는 주상절리 속에 숨어 있는 코드를 해독할 수 있다면 신라와 백제, 그리고 탐라국의 은밀한 관계도 밝혀낼 수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녁 6시20분에 제주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고자 올레길 7코스 탐방은 돔배낭길이 끝나는 대륜동 해안올레길 입구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외돌개공원으로 돌아가 주차시킨 렌트 카에 올랐습니다. 캔싱턴리조트에서 외돌개공원으로, 그리고 외돌개공원에서 제주공항까지 렌트카를 운전해준 남상태 동문의 노고 덕분에 올레길탐방이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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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김포 간의 상공을 날면서 설문대할망을 떠올렸습니다. 한라산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한 발은 제주도 앞바다의 관탈섬에, 다른 발은 마라도에 얹고 빨래를 했다는 거인 설문대할망이 치마틈새로 흙을 흘리지 않았다면 이번 사라오름 탐방은 애당초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하자 이 할망이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설화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이 할망을 깨워 비행기에 실고가 뭍 구경을 시켜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제가 탄 염가 항공사의 비행기로는 턱도 없고 제주도를 통째로 실을 만한 큰 배를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겠다 싶어 할망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할 날이 멀지 않은 제주도가 앞으로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해도 설문대할망의 깊은 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입니다. 할망의 숙면이 바로 제주도의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탐방사진>

 

1)2월17일:사라오름   

 

 

 

 

 

 

 

 

 

 

 

 

 

 

 

 

 

 

 

 

2)2월18일:외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