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명소 탐방기2(김유정문학촌)
*탐방일자:2016. 3. 17일(목)
*탐방지 :강원 춘천시 소재 김유정문학촌
*동행 :나홀로
해학의 페이소스(pathos)를 어느 누구보다 잘 보여준 작가를 들라면 저는 단연 김유정을 꼽고자 합니다. 소작농인 동생이 농사지은 벼를 남몰래 베어내다가 주위로부터 받는 오해를 풀고자 남몰래 망을 보는 망나니 형에게 들키는 내용의 소설 “만무방”은 김유정만이 그려낼 수 있는 해학입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하도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다가 설명할 수 없는 딱함에 이내 가슴이 멍해집니다.
김유정은 1908년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1937년 30세의 나이로 지병인 폐결핵으로 요절한 비운의 작가입니다. 삼천석지기 지주를 아버지로 둔 김유정의 어린 생활은 유복했지만 10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고 난 후 맏형의 유산탕진으로 내내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난치병인 폐결핵에 걸린 데다 사랑에도 실패해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한 김유정은 한 때 금병의숙을 열어 후학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1933년 소설 <산골나그네>로 첫 선을 뵌 김유정은 1935년 <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후 1937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30여 편의 소설을 써냈습니다. 김유정에게는 금병산 아래 자리 잡은 여기 실레마을이 창작의 산실이었으니, <봄봄>, <만무방>, <노다지>, <금따는 콩밭> 등 10편의 소설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난 작품입니다.
몇 년 전 저는 방송대 국문과를 다니면서 김유정의 단편소설 <만무방>을 읽었습니다. 이 작품 전반에 흐르는 해학이 가슴에 와 닿아 <봄 봄>등 다른 작품을 읽고 나자 역시 김유정이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의 많은 작품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실레마을을 한 번 다녀오겠다고 별러오다가 어제야 비로소 실천에 옮겼습니다. 마침 대학원 수업이 오후 1시에 끝나 춘천에서 산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짬을 내 들렀습니다.
김유정문학촌으로 꾸며진 실레마을은 경춘선의 김유정역에서 4백m 밖에 안 떨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지금의 김유정역 일대를 이르는 실레마을은 떡시루를 의미하는 강원도의 방언의 ‘실레’에서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당연히 마을의 형태는 시루모양을 했었을 터인데 지금의 김유정문학촌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이 일대를 철로가 지나 마을의 원형이 옛날 그대로 보존되지 않아서입니다. 실레마을에 조성된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역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다다르게 됩니다. 포장도로를 경계로 한편에 김유정생가와 박물관이, 건너편에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선 김유정문학촌은 너무도 깔끔해 빈곤했던 옛날 실레마을을 제대로 살려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문학마을에 접어들어 ‘낭만누리’ 등 큰 길 오른 쪽의 한옥들을 둘러보았습니다. 평일이어서인지 이 마을 찾는 탐방객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아 조금은 어수선했습니다. 초가의 토담집과 기와집이 혼재해 있는 이 마을을 한 번 획 둘러보고 건너편의 김유정 생가로 이동했습니다.
샛노란 동백꽃에 눈인사를 하고 김유정 생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김유정 조카분의 증언을 토대로 재현했다는 김유정 생가는 그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실레마을 일대와 다른 곳에도 전답을 갖고 있어 삼천석지기로 소문난 김유정 부친이 기거하기에 턱없이 좁다 싶었던 것은 그 많은 곡식을 보관할 공간이 잘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생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꽤 여럿 있었고 마루도 넓었습니다. 그럼에도 답답하리만큼 좁다 싶었던 것은 이 집이 ‘ㅁ’ 자 모양의 똬리 집이어서 그러했습니다. 조부 김익찬이 지은 김유정 생가가 똬리집이고 기와 대신 초가를 얹은 것은 집 내부를 보이지 않게 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부가 춘천의병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앞마당 한 쪽에 나 있는 봉당의 굴뚝이 집안의 해충을 없애기 위해서라는데 이 굴뚝으로 집이 더욱 좁게 느껴졌습니다. 생가는 좁아보였지만 생가 터(?)는 좁지 않아 김유정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연못과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김유정은 사후 시신은 불태워지고 뼈는 강물에 뿌려져 묘지가 없다합니다. 이런 이유로 매년 3월29일 기일이 되면 여기 김유정동상 앞에 모여 제를 올리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생가 터 안에 자리한 김유정 기념전시관입니다. 재정적으로 여유롭기는 춘천시가 평창군에 비할 바가 아닐 터인데 여기 춘천의 김유정기념관이 평창의 이효석기념관보다 훨씬 작았고 전시물도 빈약했습니다. 이는 김유정의 창작기간이 이효석보다 매우 짧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유정이 나이 어려 사별한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국악계의 최고 명창이었던 박녹주를 열렬히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해설사로부터 들었습니다. 뒤이어 당대의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 박봉자에도 구애를 했는데 모두 실패해 김유정은 장가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해야 했습니다.
김유정이 우리 문학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의 농민사랑과 특유의 해학이 제대로 평가받아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동일은 그의 저서 “한국문학통사”에서 김유정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고 농민의 마음속에 들어가 농민을 계몽, 계급투쟁이나 선동을 하지 않고 농민자신의 말로써 글을 쓴 작가라 했습니다. 그의 소설은 관념이 제거된 실제 상황이어서 모든 것이 살아있는데다 풍자와 해학을 의식 각성의 방법으로 삼아 해결책을 찾았다고 평했습니다. 권영민은 그의 “현대문학사”에서 김유정의 소설은 어둡고 삭막한 농민들의 삶을 때로는 회화적으로 때로는 해학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농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의 저변을 질박하게 펼쳐놓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 분 모두 김유정의 해학을 높이 산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간 반 가량 문학촌을 둘러본 후 열차로 상경하면서 조만간 금병산을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의 금병산 등산이 이 산을 오르내리며 소설의 얼개를 짰을 김유정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인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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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남짓 후 금병산을 오르내리면서 “만무방”, “봄 봄” 등의 배경이 된 몇 곳들을 걸었습니다. 김유정이 죽고 나서 당시의 마을은 사라지고 벌판은 변했어도 산은 거의 그대로입니다. 문학촌에서 만나본 김유정과의 대화를 가로막은 것이 그간의 세월이었다면,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김유정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을 붙들어 맨 금병산 덕분입니다. 당시 이 산 길을 걸었을 김유정 선생께 해학의 참 뜻을 일깨워줘 고맙다고 인사를 올릴 수 있었던 것 또한 금병산 덕분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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