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금강 따라걷기

금강 따라 걷기19(교동정류장-부소담악-항골정류장)

시인마뇽 2022. 6. 17. 01:34

*탐방구간 : 교동정류장-부소담악-항골정류장

*탐방일자 : 2022. 6. 11()

*탐방코스 : 교동정류장-서화천생태습지-옥천 이지당-환평리갈림길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

                   -부소담악-보현사입구-이평리정류장-공곡정-항골정류장

*탐방시간 : 1112-1858(7시간46)

*동행         : 나 홀로

 

 

 

  아기들이 맨 먼저 말하는 단어들이 찌찌” “맘마등인 것으로 보아 태초의 첫 말씀도 명사(名詞)였을 것 같습니다. 명사가 잠시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 생기고 사라지는 사물들에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명사가 바쁘면 바쁠수록 사람들이 배우고 익혀야할 명사는 계속 늘어납니다. 제가 요즘도 책을 보며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는 명사의 수를 늘려가고자 애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명사가 늘어났다고 해서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지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14년 전 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3-4m 높이의 고산의 형체를 그대로 빼닮은 구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제 블로그에 구름이 빚어낸 산을 지칭하는 적합한 명사를 찾아내지 못한데 따른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산행 중에 골짜기를 뒤덮어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운해(雲海)는 가끔 보았지만, 산 모양을 그대로 갖춘 구름을 만나 카메라에 담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런 모양의 구름은 당연히 운해(雲海)에 대비되는 운산(雲山)으로 부르겠지 한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안 것은 집에 돌아와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였습니다. 운산(雲山)이란 구름이 낀 높고 아득한 산으로 구름이 아니고 산을 일컫는 말로 적혀 있었습니다. 운산(雲山)이 아니라면 산운(山雲)인가보다 했는데 이 또한 산에 끼어 있는 구름으로 뜻풀이가 되어있어 난감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카메라에 담아온 높은 산 모양의 구름은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리고 나서 줄곧 존재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형상만 만드시고 이제껏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셨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금강 탐방 길에 들른 옥천의 추소정 주위의 부소담악은 과연 듣던 대로 절경이었습니다. 제가 이 절경을 마음 편하게 완상(玩賞)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름이 부소담악(芙沼潭岳)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부소담악이란 충북옥천군군북면추소리의 부소무늬마을 앞 대청호에 쇠꼬리 모양으로 7m가량 가늘게 뻗어나간 나지막한 산줄기를 받치고 있는 물가의 바위들을 이르는 것으로, 이 바위들은 일정한 폭으로 끊이지 않고 횡렬로 이어져 그 모습이 마치 병풍을 쳐 놓은 것과 같다하여 병풍방위로도 불립니다. 누군가가 이 승경(勝景)부소담악(芙沼潭岳)'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덕분에 제가 따로 적합한 명사를 찾아야 하는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수려한 풍광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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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육영수여사의 생가로 향했습니다. 옥천 땅의 금강을 따라 걷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그동안 미뤄왔던 옥천구읍의 명소를 먼저 들렀습니다. 옥천이 낳은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둘러본 후 인근의 옥천향교를 찾아갔습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 경내를 휘 둘러보고 나서 시인 정지용선생의 생가로 향했습니다. 탐방객들이 단체로 찾아와 부산한 생가와 바로 옆의 문학관을 돌아보면서 정지용 시인의 고절한 삶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정지용문학관에서 이번 금강탐방의 출발지인 교동정류소까지는 걸어서 갔습니다. 중간에 버스를 타고 몇 번 지났던 교동저수지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교동정류장에 다다르자 길 건너 바바라무인텔의 흑과 백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깔끔한 외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112분 교동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정류장에서 서화천 천변의 이지당(二至堂)으로 가는 길은 왼쪽으로 이어졌습니다. 몇 분 걷지 않아 만난 삼거리에서 직진길을 버리고 왼쪽의 부소담악길로 들어섰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37번 도로를 토끼굴로 통과하자 남중한 태양이 목덜미를 내리쬐어 초여름의 열기가 감지됐습니다. 정자가 서있는 보오리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 서대산(?) 쪽에서 발원해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서화천에 이르렀습니다. 이 하천을 거슬러 용목리 쪽으로 진행하면서 서화천의 천변에 설치된 수질오염상시감시 옥천측정소와 상류 쪽인 용목리 앞 서화천 천변에 약47천평 규모의 꽤 넓은 생태습지를 보았습니다. 서화천생태습지는 옥천하수공공처리장의 방류수와 초기 강우 유출수를 침강지에 모아 48시간을 체류토록 한 후, 깊은 습지와 얕은 습지를 거쳐 서화천으로 들여보내는 역할을 맡고 있어 대청호의 수질개선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1247분 이지당(二止堂)을 둘러보았습니다. 서화천생태습지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다리 건너로 누정(樓亭) 이지당(二止堂)이 보였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오른 쪽으로 조금 걸어가 이지당에 이르자 뒤로는 야산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서화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지당은 임진왜란 때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되찾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이자 대학자인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을 기리고자 사후 60년이 지나 조선후기의 문신인 김만균(金萬均, 1631- ?)이 건립했다고 합니다. 조선 예학의 태두로 받들어지는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증손인 김만균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스승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행실이 밝으면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뜻하는 高山仰止 景行行止의 현판을 직접 써주었습니다. 이지당의 건물은 본체 좌우에 익랑(翼廊)을 연결해 모양을 하고 있어 이채로웠습니다.

 

  이지당 한편에서 햄버그로 요기를 한 후 오후 탐방에 나섰습니다.  부소담악을 향해 진행하자마자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을 따라 걷는 중 길가의 밭 가운데 날개가 엄청 붉은 새가 바람이 부는 대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여 괴이하다 했는데 다가가서 보니 새를 쫓는 허수아비였습니다.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 다다른 산 중턱의 환평리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부소담악으로 이어지는 차도로 올라섰습니다. 길가의 가로수들이 곳곳에 그늘을 만들어주어 한낮인데도 걸을 만 했습니다. 정일사와 의성교육농장을 차례로 지나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  정문 앞에 도착한 시각은 141분으로, 잠시 쉬어 목을 축였습니다.

 

  1551분 추소정에 올라 부소담악을 조망했습니다.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 정문을 출발해 환평약초체험마을 체험관에 이르자 누구누구의 외손녀 누구의 서울의대 수석입학을 축하한다며 환평리 주민일동이 걸어놓은 현수막이 보였습니다. 이 벽지마을에서 서울의대 수석입학자를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보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인데, 더욱 놀란 것은 친자식도 아닌 외손녀의 합격까지 축하해주는 마을분들의 훈훈한 마음이었습니다. 좋은기도동산을 지나 기와지붕의 2층 양옥인 기와레스토랑(?)에 다다랐습니다.  이 건물 오른 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 부소담악의 병풍바위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얼마 후 추소정에 이르러 7m가량의 길쭉한 모습의 부소담악을 온전히 담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해 일부만 사진 찍고나자 기와레스토랑에서 사진 찍기를 참 잘했다 싶었습니다. 단층의 옛날 추소정과 2층의 새로 지은 추소정을 모두 둘러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우암 송시열이 소금강이라고 예찬했다는 추소팔경의 한 곳인 부소담악의 승경을 노래한 시()를 담은 편액이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추소정이 조선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누정이 아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부소담악 둘레길을 둘러본 후 황룡사주차장 앞에 이르자 소낙비가 드세게 내려 우비를 꺼내 입고 금강탐방길을 이어갔습니다.

 

  1754분 이평리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소낙비가 그쳤는데도 오락가락 비가 내려 우의를 벗지 못해 후덥지근했습니다. 보현사입구를 거쳐 향수뜰을 지나자 공사 중이어서 출입할 수 없으니 오른 쪽 아래 길로 돌아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공사로 왕복 2차선의 넓은 포장도로를 이어 걷지 못하고  오른 쪽 아래  간신히 차가 다닐만한 시멘트길로 내려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다 왼쪽으로 꺾어 비포장도로로 들어섰습니다.  향수뜰을 지난 지 반시간이 채 안되어 집 두 채가 들어선 산중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아주머니 한분께 항골마을로 가는 길을 물어 안내를 받고서 조금 올라가 공사 중인 길의 끝점에 위치한 이평리버스종점에 이르렀습니다. 정류장은 옛 그대로인데 버스길이 공사 중이어서 제가 올라온 길로 버스가 다니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858분 항골정류장에 도착해 19번째 금강탐방을 마쳤습니다. 이평리 정류장을 출발해 공곡재의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공곡정으로 명명된 정자가 서 있었습니다. 공곡재에서 항골정류장까지는 내리막길이어서 힘든 줄 모르고 걸어 내려갔습니다. 오른 쪽 아래 대청호가 나뭇잎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것은 여름철의 탐방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시간 가까이 걸어 내려가 동리에 이르자 오른 쪽 저만치로  대청호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환산로로 명명된 길을 따라 걸어 부소담악6.5Km/수생식물학습원4.5Km’의 표지목이 서 있는 항곡리항골 삼거리에 이르자 이제 다 왔다 싶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어 해가 진 후에도 걸어야하는 것이 아닌 가해서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 환향암 입구의 항골정류장에 도착해, 마침 지나가는 할머니 한분께 여쭈어 대전가는 62번 버스가 1930-40분 사이에 지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바로 옆이 옥천조산대를 설명해줄 수 있는 돌팡께공원인데 버스를 기다리느라 올라가보지 못했습니다. 1945분쯤에 도착한 62번 버스에 올라 대전역으로 이동하는데 40분이 채 안 걸렸습니다. 마침 2043분에 대전역을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있어, 그 차를 타고 수원역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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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쓸 때에 어떤 사물의 이름을 몰라 애를 먹은 적이 꽤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알만한 적합한 명사를 찾아내 적시할 수 있다면 굳이 사물의 형상이나 쓰임새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하지 못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큰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시멘트 다리를 세월교(洗越橋) 또는 잠수교(潛水橋)라고 부른다는 것은 몇 달 전에 알았습니다. 이러한 세월교는 규모가 크지 않아 대개는 다리 고유의 이름이 따로 없습니다. 그동안 몇 개의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세월교를 건넌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름 없는 다리를 장황하게 설명하느라 곤혹스러웠습니다. 얼마 전 다른 분의 글을 읽고서 그런 다리를 세월교라고 부른 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십년 묵은 체증이 내린 것처럼 후련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부소담악처럼 일정 폭으로 횡렬로 뻗어나가는 물가의 바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잘 몰라 최근까지 끙끙댔습니다. 지난 4월에 들른 군북면 석호리의 청풍정에서 바라본 강 건너 바위들이 담악이자 병풍바위라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된 것도 이번에 부소담악을 둘러보고 나서입니다. 그럼에도 꺼림직 한 것은 담악(潭岳)이라는 단어가 우리 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아서입니다. 담악이란 보통명사가 사전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담악은 부소에 붙어 고유명사로 쓰인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물가의 병풍 같은 바위들을 담악이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병풍바위로 부르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병풍바위는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이르는데, 이런 바위는 흔히 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몇 백m 이어지는 일련의 바위들을 병풍바위라 부르기가 좀 뭣한 것은 이 세상에 몇 백m 나 되는 병풍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병풍바위가 담악보다는 더 적합한 것 같지만, 병풍바위보다는 열차바위가 좀 더 적합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동서양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애쓴 미국의 심리학 교수인 리차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은 그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서 서양의 부모들은 자녀들과 대화할 때 객체의 이름과 그 속성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반면, 아시아인들은 감정이나 사회관계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많다고 했습니다.  서양아이들은 동사보다 명사를 훨씬 먼저 배워 명사를 잘 구사하고 , 아시아 아이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배워 동양사람들이 동사를 잘 활용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명사들은 영어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이 땅에 존재하는 사물에 알맞은 우리말을 찾아주거나 새로 짓는 일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