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방아실입구삼거리-김정선생묘소-원마산정류장
*탐방일자: 2022. 9. 14일(월)
*탐방코스: 방아실입구삼거리-김정선생묘소-비룡교차로--대청호자연수변공원-원마산정류장
*탐방시간: 10시2분-17시37분(7시간35분)
*동행 : 나 홀로
이번 금강을 탐방하는 길에 만난 역사적 인물은 대전시 동구 회남로117의 묘역에 모셔진 조선전기의 문신인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1)선생입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보다 네 살 어리지만, 8년 앞서 관직에 진출해 훗날 형조판서를 역임한 선생은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으며,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현량과 설치를 적극 주장했습니다. 또 선생은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미신을 타파했고, 향약을 실시했으며, 정국공신의 위훈삭제를 추진한 것으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선생은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극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옹호로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1521년에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된 선생은 1545년 복관된 후 1646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기에, 이처럼 넓은 묘역에 모셔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했던 선생의 일생을 일별하노라면 국왕이 다스리는 왕정의 조선 시대에 사대부들이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사림들의 개혁 추진이 권력을 잡고 있는 훈구대신들에는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개혁이 부담스러워진 임금은 훈구파의 상소를 음해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여 개혁세력인 사림파들을 축출한 것은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왕정이 폐지되고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린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권력을 획득한 정치세력은 하나 같이 개혁을 추진하곤 했습니다.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전가의 보도여야 할 개혁이라는 소중한 검을 조자룡이 헌 칼 쓰듯이 휘두른 것을 너무 자주 보아와 이제는 개혁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날 정도입니다. 조광조와 김정 두 선생이 주도한 개혁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지지부진해져 국왕이 신물을 낸 때문에 실패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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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탐방은 금강 본류의 물 흐름을 따라 걷고자 지난번 탐방의 끝점인 회남정류장 대신 그 남쪽의 방아실입구삼거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지형도에서 확인한 금강의 본류는 지난번에 건넌 회남대교 북쪽 매산리 앞에서 휘돌아 남쪽으로 흘러가다 대전시 내탑동 부근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흐릅니다. 대청댐전망대 앞에 이르러 남쪽으로 또 한 번 방향을 바꾼 금강의 본류는 바로 아래 대청댐에서 한숨을 돌린 후 신탄진을 거쳐 서해로 내닫습니다. 이렇듯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강줄기를 온전히 따라 걷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웬만하면 그리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대로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는 이 강의 본류를 따라 걷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9월 한 중간의 따가운 햇볕이 목덜미를 내리쬐는 이번 탐방 길에 차도를 따라 걸으면서도 더운 줄 몰랐던 것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때때로 불어주고 가로수들이 그늘을 만들어준 곳이 여기저기 많이 있어서였습니다.
오전 10시3분 방아실입구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대전역에서 63번 시내버스를 타고 회남 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오른 쪽으로 항곡리 길이 갈리는 방아실입구에서 하차했습니다. 탐방채비를 마친 후 곧바로 삼거리를 출발, 517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행해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1904년 나라에서 효자로 널리 알려진 이곳 사성동의 육진태(陸鎭泰)에게 내렸다는 ‘육진태 정려(陸鎭泰旌閭)’를 지나자 차도 오른 쪽에 인도로 조성된 데크 길이 시작됐습니다. 마음 편히 이 길을 따라 걷다 모래재정류장을 지나 다다른 전망대에서 잠시 멈춰 골짜기 골짜기를 가득 채운 대청호의 호안(湖岸)을 사진 찍었습니다.
11시30분 구절골정류장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지나온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청호를 보다 가까운 곳에서 조망하고자 구절골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대전광역시상수도사업본부 대청호수질관리소를 찾아갔습니다. 공무 외 출입이 금지된 이 건물은 문이 잠겨 들어가 보지 못하고 20-30m 떨어진 길가 정자를 들러 샌드위치를 꺼내 든 후 자리를 옮겨 전망대에서 보았던 레이크 뷰와 팡시온 카페 건물을 바짝 다가가 사진을 찍고나서 대청호 건너편에 길쭉하게 돌출된 ‘전망 좋은 곳’(?)을 조망했습니다. 대청호의 빼어난 풍광을 뒤로하고 정류장 앞 삼거리로 돌아가 바로 옆 ‘송 카페’를 지나 517번도로를 따라 남진했습니다.
13시9분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1)선생의 묘소를 둘러보았습니다. 비금마을을 거쳐 불탑과 입불이 전시된 길가 소공원(?)을 지나자 오른쪽 산자락에 꽤 넓게 자리한 김정선생묘소가 눈을 끌었습니다. 시간이 넉넉지 못하다는 이유로 옥천 땅의 금강을 따라 걸으면서 조선의 이름 난 문신인 송시열선생과 조헌선생의 유적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되어, 이번에는 큰맘 먹고 길옆 산자락에 조성된 김정 선생의 묘역을 둘러보았습니다. 선생의 묘와 세 부인의 묘가 함께 들어선 묘역은 한 눈에 보아도 세도가의 묘소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선생의 묘 옆에 특이하게 글씨가 쓰여 있지 않은 백비(白碑)가 세워진 것은 사사된 죄인의 신분으로는 비문을 써 기록으로 남길 수 없어서라 합니다. 묘소와 함께 재실로 쓰이는 산해당(山海堂), 선생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는 사당 충암선생별묘(冲菴先生別廟), 부인 은진송씨의 정려각인 은진송씨열녀정려각(恩津宋氏旌閭閣) 등을 두루 둘러본 후, 금강 따라 걷기를 이어가다 신상교를 건너 비룡교차로에 이른 시각은 14시8분이었습니다.
14시38분 주산동전망대에 도착했습니다. 비룡교차로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대청로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금성마을 정류장이 보였습니다. 이 정류장에서 10분을 더 걸어 도착한 주산동전망대에서 정자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10분 여 쉬었습니다. 전망대에서 양짓말입구까지는 약 40분 동안 차도를 벗어나 호반 길을 걸었습니다. 이 길은 대청호오백리길의 4구간인 ‘호반낭만길’의 일부로 오른쪽으로 대청호를 끼고 호숫가를 따라 걷는 길이어서 넓은 대청호를 조망하면서 물결이 찰랑이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습니다. 길 아래 정박된 작은 배를 보자, 전북장수의 발원지를 출발해 여기에 이르기까지 21번이나 금강 탐방에 나섰지만 배를 한 번도 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배를 탔다면 중간에 길이 나있지 않은 몇 곳도 배를 타고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큰 비가 내리면 물에 잠길 법한 곳이 몇 군데 있어 사전에 일기예보를 점검하는 것은 필수이겠다 싶습니다. 호반가를 지나고 돌다리도 건너 차도를 만난 곳은 양짓말 입구로, 여기서부터 대청호자연수변공원까지는 차도를 따라 북진했습니다.
16시22분 대청호자연수변공원을 거닐었습니다. 양짓말입구 삼거리를 지나 길 옆 데크길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은행 알을 보았습니다. 24년 전 파주의 감악산에서 가지고 간 은행의 껍질을 집사람과 함께 악취를 맡아가며 벗겼던 일이 불현 듯 생각난 것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뜬 집사람과는 감악산 산행이 마지막 산행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최대 105만톤을 취수할 수 있는 대전취수원 상수탑을 지나 대청호자연수변공원 앞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왼쪽으로 220m 떨어진 동명초교를 찾아가 교문을 사진 찍고 나서 대청호오백리길 탐방지원센터를 들러 안내 팜플렛을 몇 종 받아왔습니다. 동명초교 길 건너 저지대에 조성된 대청호자연수변공원을 돌아보며 이 공원이 동명초교생들에 자연학습의 현장으로 활용되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수변공원 앞 삼거리에서 왼쪽 호반 길로 들어선 것은 호수 건너 맞은쪽에서 눈여겨 본 ‘전망 좋은 곳’을 들러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차도에서 길쭉하게 동쪽으로 대청호를 파고 들어간 돌출부분의 끝자리에 위치한 ‘전망 좋은 곳은 삼면이 막힘이 없어 멀리까지 시원스레 보였습니다. 몇 분 먼저 도착한 중년 부부가 의자에 앉아 대청호를 바라보며 다짐한 것은 이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17시37분 원마산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전망 좋은 곳’에서 1.2Km를 걸어 나와 차도로 돌아가자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이 감지된다 싶어 발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영화 ‘슬픈 연가’ 촬영장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그대로 직진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지나친 길 건너 ‘호수가에서 cafe'에 불이 들어오고, 라이트를 켠 차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호숫가 차도를 따라 걷다 잠시 멈춰 서서 오전에 들렀던 팡시온 카페 등과 그 뒤로 높이 보이는금적산(?)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5-6분을 더 걸어 이번 탐방의 끝점인 원마산 정류장에 도착해 다음 구간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것으로써 21번째 금강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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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둘러본 김정선생의 묘역은 엄청 넓어 보였습니다. 묘역의 크기만 본다면 김정선생을 무고하게 신사무옥에 연루된 역신으로 사사된 인물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생이 사사되고 나서 영의정으로 추서되는 반전이 없었다면 선생의 묘소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살아서도 출사(出仕)와 유배를 반복한 선생께서 죽어서도 만고 역신에서 영의정으로 반전되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왕이나 권세를 잡은 소수 층의 뜻대로 통치되었을 뿐 법과 정의에 의해 다스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훨씬 살기 좋은 것은 문자 그대로 북한이 조선의 못된 점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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