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공주금강교-공주보-대학2리정류장)
탐방일자: 2022. 12. 11일(일)
탐방코스: 공주종합터미널-공주금강교-공주보-하얀성 모텔 -운암리자전거쉼터
-놋점나루 - 대학리자전거쉼터-대학2리버스정류장
탐방시간: 8시58분-15시38분(6시간40분)
동행 : 나 홀로
이번 금강 탐방길에 백제의 옛 수도 공주시내를 1시간 반 남짓 걸었습니다. 공주시를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금강은 금강교를 지나 ,고마나루에 이르러서야 왼쪽으로 꺾여 남서쪽의 공주보에 이르는데, 이번에는 이 구간을 금강을 따라 걷는 대신 공주 시가지로 걸어갔습니다. 공주보에 도착해 금강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깨달은 것은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금강 덕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뽑았습니다. 산이 가까이 있어야 땔감을 구해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고, 물 또한 가까이 있어야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땅도 대개가 강가의 충적평야에 자리하고 있어 거의 모든 마을은 강가나 냇가에 위치했습니다. 마을이 형성되는데 긴요한 것이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물이듯이, 마을이 발전해 도시로 커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세 가지 또한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물입니다.
도시의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식량과 물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 아닌가 합니다. 부족한 에너지와 식량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 쓸 수 있지만, 물만은 그렇지 못해서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필요한 에너지의 거의 다가 인근의 산에서 자란 나무들을 베어다 땔감으로 활용해 얻었습니다. 저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겨울 방학 내내 아버지나 형을 따라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오곤 했습니다. 나무가 구공탄으로, 구공탄이 석유나 천연가스로 바뀐 것은 생활수준의 향상과 궤를 같이 해왔습니다. 살만 해지자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연료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해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를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지을 땅은 좁은데 인구는 계속 늘어나 하루 세 끼 끼니를 이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던 우리나라 국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경제발전으로 소득이 늘어나 다른 나라에서 필요한 식량을 들여오고 나서입니다. 우리나라가 천혜의 복 받은 나라이다 싶은 것은 물만은 자급자족할 수 있어서입니다. 식량과 에너지가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에서 물조차 모자랐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아프리카처럼 빈곤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강 가의 하남위례성을 빼앗긴 백제가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으로 천도 한 것은 서력475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63년 후인 서력538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기까지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금강이 흘러서였습니다. 고구려에 밀려 남하하는 백제가 한강을 대체할만한 강을 찾다가 터 잡은 강이 금강이었으리라는 것은 한강과 금강 사이에 이렇다 할 강이 없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천도한 새 도읍지가 금강 변의 공주였고, 또 다시 옮겨간 도읍지도 같은 금강변의 부여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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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역을 아침6시31분에 출발한 무궁화호가 조치원역에 다다른 시각이 7시28분이고, 8시 정각에 조지원버스터미널을 출발한 시외버스가 공주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이 8시56분이니 둘 다 1시간이 채 안 걸렸습니다. 공주터미널에서 하차해 지난번에 25차 금강탐방을 마친 금강교로 이동하는 길에 도로원표를 만나 서울까지의 거리가 140Km임을 확인했습니다. 서울의 도로원표가 세워진 광화문에서 북쪽으로 20Km 이상 떨어진 하남의 위례성을 출발해 400리 남짓한 거리의 웅진성으로 천도한 백제의 문주왕이 겪었을 고통이 대단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됐습니다.
오전9시18분 공주시의 금강교에서 26차 금강탐방을 시작했습니다. 1932년 도청을 대전으로 양보한 대가로 건설한 금강교는 공주읍과 장기면을 연결하는 철교였지만, 여타 철교와는 달리 기차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한수 이남에서 가장 길었던 이 다리가 수난을 겪은 것은 한강과 마찬가지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동년 7월12일 미군의 31연대는 이 다리를 폭파해 7월14일까지 북한군 제4사단의 남하를 저지했습니다. 이때 파괴된 이 다리가 다시 개통된 것은 1956년의 일입니다. 다리를 건너 지나간 곳은 여덟 달 전 손자와 함께 왔던 공산성입니다. 이 성에서 직진해 다다른 중동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나지막한 고개를 넘기까지 구 시가지를 걷는 동안 백제의 정취를 느꼈습니다. 고개를 넘은 후 금성여고와 공주의료원을 차례로 지나 공주보에 다다른 시각은 10시35분이었으니 1시간 반 가량 공주시내를 걸은 셈입니다.
10시51분 공주보를 출발했습니다. 공주보에 도착해 공도교를 반쯤 걸어 북쪽의 고마 나루를 조망한 후 다리 아래로 내려가 공주보를 살펴보았습니다.
공주보는 공주시우성면과 웅진동 사이에 위치한 전장 280m의 다기능보로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8월에 준공되었습니다. 이 보 오른 쪽에 소수력발전소가 있고, 주변 일대에는 생태공원과 자전거도로가 조성되어 있어, 이 보를 강물이 가득 채웠다면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이 보 위에 설치된 길이가 425m에 폭이11.5m인 공도교는 갱위강국(更爲强國)으로 백제의 부활을 꿈꾼 무령왕을 기리기 위해 봉황의 머리와 여의주 형상을 적용해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그 아래 공주보가 상시로 열려 있어 물이 별로 없어서인지 댕그라니 서 있는 모습이 조금은 허전해 보였습니다.
공주보를 출발해 부여 쪽으로 흐르는 금강변의 자전거길을 따라 남서진 했습니다. 파크공원을 막 지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내든 후 651번 도로로 올라가 강변을 따라 낸 전장 824m의 긴 다리 효자교를 건넜습니다. 웅진대교 아래 공사 중인 철교(?)는 도강훈련을 위해 임시로 놓는 가교 같아 보였는데 실제로 그러한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주위에 떼 지어 모여 있는 겨울철새 청둥오리들의 비상을 보면서 벌써 겨울이 다가왔음을 감지했습니다. 자전거 길은 절벽의 금강을 왼쪽으로 에도는 651번도로 가로 나 있어, 이 길을 따라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개 너머 금강을 다시 만난 것은 카페 '강가에서'에 다다라서였습니다. 검상동에 자리한 카페 강가에서를 막 지나 '하얀성' 모텔에 이르자 오른 쪽 아래로 자전거길이 이어졌습니다.
12시11분 하얀성 모텔 건너 금강변의 자전거전용도로로 들어섰습니다. 자전거 길은 금강 좌안의 제방 가까이에 나있고, 강물은 금강 우안 가까이로 흐르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갈대와 버드나무 등 수생식물들이 가로막고 있어 강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위치로 보아 18년 전 겨울에 올랐던 천안의 광덕산(699m)인 것 같은데 과연 그 산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자전거 길을 따라 20여분을 걸어 만난 오른 쪽 샛길로 내려가 강가로 다가갔습니다. 제가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거의 매번 하는 세레머니는 강물로 두 손을 닦는 것인데, 이번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공주보 인근의 금강은 보가 열려 있어 물 흐름이 강 같지 않았는데 금강 하구로 진행할수록 강물이 불어나 넓어진 수로를 보고나자 비로소 금강이 강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싶었습니다. 북서쪽으로 흐르는 금강이 고마나루에서 휘어 남서쪽으로 거의 직선으로 흘러 저 멀리까지 강이 보였습니다. 직선에 가까운 자전거길을 따라 걷다가 위치를 확인하려 651번 도로로 올라섰는데 북쪽 가까이로 만수리의 SK주유소가 보였습니다.
13시48분 운암리자전거 쉼터를 지났습니다. 651번 도로에서 다시 내려가 자전거길을 이어갔습니다. 이내 이인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용성천의 하구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 20분 가량 걸어가자 오론 쪽 아래 금강을 유영하는 청둥오리 여러 마리가 보였습니다. 어렸을 때 고향 앞 개천에서 겨울이면 볼 수 있었던 청둥오리는 시베리아에서 날아 온 겨울 철새였습니다. 이런 철새가 요즘은 시베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터 잡고 사는 텃새로 바뀌었다니 새들에게도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 건너 가까이 보이는 산은 청양의 칠갑산(해발560m)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이 산도 16년 전 겨울에 혼자서 오른 적이 있습니다. 부여군 경계지점을 10Km 가량 남겨 놓은 운암리1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따끈한 커피를 꺼내 마셔 온기를 되찾았습니다. 조금 서두르면 해지기전에 부여의 청강서원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자동유량관측소의 측정자료를 전송하기 위해 땅속에 케이블을 설치했음을 알리는 환경부장관 명의의 주의 안내판을 보고 한 나라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이런 강가에 설치한 케이블관리에도 신경을 써야하는구나 했습니다.
15시40분 651번 도로 상의 대학2리버스정류장에서 공주시내로 가는 210번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26차 금강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운암리 쉼터에서 10분 가까이 걸어 이름 모르는 작은 하천의 하구에 이르자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어수선 했습니다. 작은 다리를 건너 강 건너를 바라보자 정면으로 어천리의 임장교가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서 있는 공사장의 이 하구가 놋점나루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군산에서 부강까지는 금강을 오르내리는 상선과 어선이 많았다는데 철로가 개통되고 금강하구에 댐을 건설하고 나서 금강은 수운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큰 배는 사라졌지만 나룻배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운행되어 나루터는 아직도 금강 강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눈여겨본 놋점나루도 그런 나루 중의 한 곳입니다. 공주시 이인면의 운암리에 자리한 놋점나루는 공주와 부여를 잇는 백제큰길 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근처 운암리의 놋점마을에 사기를 굽던 사기소가 있었고 놋그릇을 만들던 유기점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놋점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면 임장교가 서 있는 공주시우성면의 어천리를 거쳐 청양군목면으로 갈 수 있습니다만, 나룻배가 운행되고 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운암리2쉼터를 지나 공주시탄천면에 들어선 시각은 14시55분이었습니다. 왼쪽으로 대학1리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딱 벌어진 버드나무들이 몇 그루 들어선 자전거보관대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바닥을 덮은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여름 날 무성했던 잎들을 모두 떨쳐내고 댕그라니 나목으로 남아 제 몫을 다한 버드나무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대학리쉼터를 지나 몇 분을 더 걸어가자 머리 위로 651번도로 상의 대학2리버스정류장이 보였습니다. 부여의 청강서원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후다닥 정류장으로 올라가 공주시내로 들어가는 21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제가 탄 버스가 유하리마을을 거쳐 탄천을 지나자 15년전 금남정맥 종주 때 이 곳을 들러 시내를 걸었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아래 글은 그때 올린 금남정맥 종주기에서 따온 글이어서, 이 글에 묘사된 탄천의 시가지 모습이 15년이 지난 오늘의 탄천과 다를 수도 있다 싶었습니다.
“산들이 낮고 서해가 가까워 내륙 깊숙한 곳의 심산유곡보다 해지는 시각이 아무래도 조금은 늦어졌을 것이기에 진고개에 다다랐어도 아직은 어둡지 않았습니다. 도로변 집 아주머니로부터 여기서는 버스가 없고 20분여 걸어 나가야 탄천에서 부여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나서 서둘러 탄천으로 향했습니다. 완전히 어두워서 도착한 탄천 시내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대부분의 가로변 상가들도 불이 꺼져있어 불경기의 여파가 시골의 면소재지까지 얼어붙게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탄천에서 부여로 나갈 것이 아니라 바로 공주로 가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타야 시간과 비용이 모두 절감되는 것을 사전에 체크하지 못해 부여로 갔다가 다시 공주로 가서 돌아가느라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인을 지나 공주시내로 가는 길에 우금치에서 하차해 1984년 동학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였던 우금치전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아래 우금티전적 알림터를 들러 9분짜리 영화를 감상한 후 고맙게도 안내책자와 소설책을 챙겨준 직원 분께 감사인사를 드린 후 공주버스터미널로 이동했습니다. 18시20분에 공주터미널을 출발하는 오산행 버스에 올라 두 시간 가량 달려 경기도의 오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오산시외버스터미널은 전철역과 같이 쓰는 공용터미널이어서 바로 그자리에서 1호선 전철로 환승해 산본 집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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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가 백제의 도읍지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동학농민혁명 때 전투가 있었던 전적지가 우금치 외에도 여러 곳이 있다는 것은 이제껏 몰랐습니다.
공주시에서 발간한 안내책자 『공주 동학농민혁명 이야기』에 따르면 1892년10월에는 동학교도 1천여 명이 공주의 충청감영에 집결해 교조신원을 청하는 진정소를 제출했으며, 1894년 7월에는 이인역에 모여 집회를 했고, 8월에는 임기준이 지휘하는 동학도 1만여 명이 정안면의 궁원에 모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집회들은 10월의 이인전투로 이어졌습니다.
1894년10월23일 이인전투로 시작된 일본군과의 전투는 10월24일-25일 양일간의 효포전투, 10월24일의 대교 전투, 10월25일의 옥녀봉전투, 11월8일의 이인전투가 있었고, 우금티 전투가 있었던 11월9일-11일 사이에도 송장배미산자락전투와 오실마을산자락전투가 있었습니다. 여러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1월 9일의 우금티 전투로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오전10시부터 오후 2-3시경까지 40-50차례 일본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무력의 열세로 끝내 패해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500여명에 불과했다고 안내전단 「우금티 전적」은 적고 있습니다.
이렇듯 동학혁명이 활발했던 공주가 배출한 인물 중에 조선 말기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조병갑이 들어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병갑과 그 집안은 공주의 신풍면 평소리에서 살았고, 이 마을에 조병갑의 묘도 함께 있다고 안내책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 고부부사 조병갑의 부패와 학정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고부 봉기의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갔다가 얼마 후 대한제국의 판사로 복귀해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조병갑을 역사는 두고두고 단죄하리라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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