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오대천 따라 걷기

오대천 따라 걷기3 (간평교-청심대-막동계곡입구)

시인마뇽 2023. 3. 26. 17:43

탐방구간: 간평교-청심대-막동계곡입구

탐방일자: 2023. 3. 3()

탐방코스: 간평교-오대교-신기교-수향보건소-막동터널 앞-막동계곡입구

탐방시간: 910-175(7시간55)

동행       : 나 홀로

 

 

  이번에 강원도 평창의 오대천을 따라 걸으며 만난 조선의 기녀는 청심(淸心)입니다. 청심은 조선 초기 강릉의 관기로 절개를 지키고자 오대천에 몸을 날려 죽음을 택한 절의의 기녀(妓女)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기녀는 당대 여성 중에서 자유롭게 문학(文學)을 생산하고 향유한 유일한 계층이었습니다. 기녀가 문학작품을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남성들의 사회적 활동을 돕기 위한 예속적 존재여서 가능했습니다. 기녀들은 사대부와 맞상대할 수 있는 자질과 소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어느 여성층보다 지적수준이 높아 한시나 시조를 창작할 수 있었고, 또 가무에도 능했습니다.

 

  기녀들이 창작한 시조는 애정시조(愛情時調)가 주였습니다. 기녀들의 시조는 사대부들이 지은 연군시조(戀君時調), 애국시조(愛國時調), 세태시조(世態時調), 기행시조(紀行時調)와 달랐고, 중간층 지식인들 가운데서 특히 시조를 전문적으로 즐기며 창작한 가객들의 취락시조(醉樂時調)와도 차별화되었습니다. 이는 기녀들이 정서적으로 척박한 시조의 토양에 소담스런 서정의 꽃을 피워냄으로써 시조가 내재하고 있는 서정시로서의 가능성을 최대한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리는 놀라운 시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면서, 기녀시조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옛 시조는 삭막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고 언급한 손종흠 교수의 저서 고전시가론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기녀가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시조나 한시를 잘 지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황진이는 시조로 명성을 떨쳤지만, 논개는 충절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오대천을 따라 걸으며 만난 기녀 청심(淸心)은 시조 한수 전해지지 않지만, 절개를 지켰기에 후세의 사람들이 오대천 변의 나지막한 구릉에 청심대(淸心臺)라는 누정을 지어 그녀를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첫날밤 머리를 얹어준 강릉부사 박양수(朴梁需)는 관기 청심을 부실로 삼습니다. 1418년 발령을 받고 한양으로 향하는 박양수를 따라 온 청심은 진부면 마평역에서 박양수와 이별하고 청심대 암벽에 올라 그 아래 오대천의 맑은 소()에 몸을 던집니다. 기녀의 신분으로는 박양수를 지아비로 모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는 청심은 그에 대한 절개를 지키고자 스스로 오대천에 투신한 것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기녀 청심의 절개를 기리고자 1927년 청심대를 세웠고, 1986년에 중건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청심대를 올라 청심을 절의를 기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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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5월에 오대산 서대사의 우퉁수에서 시작한 오대천 따라 걷기는 진부의 간평교에서 발이 묶인 채 9개월을 그냥 보냈습니다. 간평교에서 오대천의 끝점인 한강과의 합수점까지는 그 거리가 35Km 가량 되어 한 번에 걷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두 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로 하고, 이번에는 평창군 진부면의 간평교에서 청심대를 거쳐 막동계곡입구까지 걸었습니다.

 

  오전 910분 북쪽 먼발치로 오대산이 보이는 간평교를 출발했습니다. 아침71분에 서울역을 출발한 ktx가 진부역에 도착한 시각은 846분이었습니다. 진부역에서 이번 탐방의 출발지인 간평교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간평교를 출발한지 5-6분 후 도착한 월정삼거리를 막 지나 오른 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걸어 월정천 위에 놓인 신다우교를 건넌 다음 영동고속도로 아래 토끼굴을 빠져나갔습니다.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빙판길을 따라 걷다가 만난 또 다른 토끼굴로 영동고소도로를 지나 월정천의 좌안 길로 들어섰는데, 그새 햇살이 퍼지고 냉기가 가셔 걷기에 좋았습니다. 이내 월정천과 오대천의 합수점에 이르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대천교를 밑으로 지나자 왼쪽으로 넓은 밭이 펼쳐졌습니다. 밭의 지력을 보강하고자(?) 쌓아 놓은 객토들은 마치 공동묘지의 봉분처럼 봉긋했습니다. 모래가 많아 배수가 잘되는 이런 밭에서 잘 자라는 작물은 당근이나 땅콩이 아닌가 싶은데, 진부 벌의 주 작물은 당근으로 알고 있습니다.

 

  1026분 오대교를 지났습니다. 호명교를 건넌 후 오대천변을 따라 걸어 진부역과 가까운 오대교에 이르자 건물 외벽의 색상이 적 · · 황색인 자그마한 호명초교가 눈에 띄었습니다. 2011년 호명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매년 연주회 및 행사에 참여해온 것으로 알려진 이 학교는규모가 작아 아담해보였습니다. 오대천의 좌안길을 따라 걷느라 이번에는 하천 건너 진부 시가지를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진부의 오대천변에 물막이가 설치된 것은 매년 겨울 평창송어축제가 이곳에서 열려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송정교를 지나 하진부교에 이르자 경사진 눈썰매장 슬로프(?)가 보였습니다. 평창송어축제 때는 성황을 이루었을 텐데 축제가 끝난 후 텅 빈 모습을 보자 모든 뒤안길은 저처럼 초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변의 데크 길을 지나 언덕에 이르자 쉼터가 있어 가져간 햄버그를 꺼내들며 십분 여 쉬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언덕에서 내려가 우수한약재유통센터를 지나면서 이 센터가 우수 한약재유통센터' 인지 아니면 우수한 약재유통센터인지가 궁금했습니다.

 

  1155분 평창꽃순이 김치공장을 지났습니다. ‘우수한약재유통센터를 지나 한강홍수통제소에서 설치한 수위관측소에 이르렀습니다. 관측소 안내문에는 관측소의 위치, 경도, 위도, 하구로부터 거리, 수위영점표고 등이 적혀 있는데, 수위영점표고의 정확한 뜻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쌍면리의 송정교와 삼성아스콘을 차례로 거쳐 진부시험지를 막 지나자 머리 위로 서울-강릉 간의 고속전철이 보였습니다. 고속전철을 아래로 지나 삼거리에 이르자 3층 건물의 평창꽃순이김치공장이 제 눈을 끈 것은 김국환이 부른 꽃순이를 아시나요라는 노래가 생각나서였습니다. 내 곁을 떠난 내 사랑 꽃순이를 찾는다는 내용의 노래 가사처럼 이 공장이 잘 되려면 꽃순이를 찾는 마음으로 고객을 찾아 나서야할 것입니다. 간평교를 출발해 오대천의 좌안 길을 따라 걷는 것은 신기교에서 끝났습니다. 신기교를 건너 다다른 신기교차로에서 왼쪽 제방길로 내려가 오대천의 우안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312분 청심대에 올랐습니다. 신기교를 건너 시작된 오대천 우안의 제방길은 길지 않았습니다. 깔끔해 보이는 알리아 팬션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다다른 외거문교 앞에서 좌안길은 끝났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오대천 우안의 차도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 진행하자 청심대가 가까이 보여 반가웠습니다. 청심대는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한 번 들른 바 있어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외거교 출발 10여분 후 도착한 청심대 주차장에서 데크 길을 따라 걸어 누정 청심대에 올라서자 북쪽으로 방금 전에 걸어온 길이 잘 보였습니다. 바로 아래로 오대천의 소()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강릉관기 청심이 부사 박양수와의 절개를 지키고자 투신자살한 곳이 여기 어디쯤인 것 같습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뾰족바위를 아기를 못 낳은 조선의 여성들이 즐겨 찾았던 것은 이 바위를 돌면서 치성을 들이면 잉태가 된다는 소문이 나서라고 합니다. 청심대의 풍광이 워낙 빼어나 청심의 애달픈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어도 단원 김홍도는 청심대를 그림으로 남기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청심대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오대천로를 따라 걸어 바우가든에 이르자 차도 가에 녹다 남은 잔설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바우가든을 지나 59번 국도가 머리 위로 지나는 지점에 이르자 바로 앞에 큰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세월교가 보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오대천과 헤어져 오른 쪽 언덕으로 이어지는 오대천로를 따라 걸어 마평교차로에 이르렀습니다. 마평교차로를 지나 다시 오대천을 만난 곳은 수향보건진료소를 조금 지나서로, 세월교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감입곡류의 오대천이 빚어낸 절경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1523분 수항리 버스회차지점을 지났습니다. 수항리보건지소를 지나서도 오대천로는 시계반대방향으로 완만하게 휘어 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두타산 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 독가교차로에 이르기까지 응달진 곳에는 오대천가에 간간히 얼음장이 보였습니다. 독가교차로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간 것은 수항터널을 피해 구도로를 따라 걷기 위해서였습니다. 버스회차지점인 증평정류장에서 잠시 쉬며 커피를 마신 후 얼마간 오대천을 따라 걸어가자 위험한 낙석지역이어서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과 차단물이 길이 막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도로 이용 시 연락을 바란다는 글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은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면 그냥 출입을 금지하면 될 것을 굳이 전화번호를 적어 놓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차단물을 넘어 진행하면서 은근히 가슴을 졸인 것은 혹시라도 낙석이 발생하는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길이 좁아 피하는 것이 불가능 하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낙석위험지역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12분에 불과했고, 낙석의 조짐이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 졸이며 바라보아서인지 오대천의 풍광은 냉랭하고 고고해 보였습니다. 민가와 가까이 있는 수향교를 건너 막동3교차로에 이른 시각은 1559분이었습니다.

 

  175분 막동계곡입구에서 세 번째 오대천탐방을 마쳤습니다. 막동3교차로에서 59번 도로를 만나 시작된 오대천 좌안길은 갈동교에 이르기까지 계속됐습니다. 갈동교를 건너 오대천 우안길로 접어든 후 응달진 곳을 지나면서 녹다 남은 천변의 얼음장을 사진 찍었는데, 얼음장은 빛바랜 사진처럼 초라하거나 추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초겨울 서리 맞은 들국화처럼 고절해 보였습니다. 길옆에 제설자재보관창고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3월에 이르러도 천변에 얼음장이 남아 있을 만큼 평창군 일원이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막동터널 앞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이 터널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구도로로 들어섰습니다. 이 도로는 출입금지 표지가 없어 안심했는데, 이내 녹지 않고 남은 눈이 길을 덮어 온통 빙판길로 변해버렸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조심해서 걷느라 신경이 엄청 쓰인 빙판길은 그다지 길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막동터널 앞에 이르러 만난 59번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 이번 탐방의 끝점인 막동계곡 입구에 다다른 시각은 175분이었습니다. 정선행 버스를 그냥 기다리기가 무료해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가 길이 미끄러워 막동정류소로 되돌아가 하루 여정을 마쳤습니다.

 

  1730분이 조금 지나 도착한 버스를 타고 정선으로 이동했습니다. 지난여름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들렀던 북평을 거쳐 정선시내로 들어서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정선버스정류장에서 40분가량 기다렸다가 19시에 출발하는 동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세 번째 오대천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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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녀를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모시는 사대부들과 말이 통해서 그리했을 것입니다.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을 이르는 단어로 중국 당나라 때 현종이 양귀비를 해어화라고 칭한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기녀들이 알아들어야 할 사대부의 말은 구어(口語)인 말뿐만 아니라 문어(文語)인 한문을 다 포괄해서 이르는 것입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거의다가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양반 댁 규수들도 언문인 한글은 깨우쳤지만 한문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양반 부녀층이 창작한 규방문학(閨房文學)의 주가 한시(漢詩)가 아닌 가사(歌辭)였던 것도 한문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조선의 기녀들이 한시와 시조를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해야 그들이 모시는 사대부들과 말이 통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기녀 중에 뛰어난 문인이 다수 배출된 것은 이들이 언문과 한문을 모두 깨우쳐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기녀들이 노래한 애정시조 몇 수가 지금도 회자되는 까닭이 그들의 사랑 노래가 그만큼 애절해서라는 것은 다음 시조를 읽어보면 절로 알게 됩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버혀내여

춘풍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黃進伊)>

 

어이 얼어 잘이 므스일 얼어잘이

원앙침 비치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寒雨)>

 

이화우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梅窓)>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서

밤비여 새님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홍랑(洪娘)>

 

  조선의 기녀들은 당대 여성문학의 명맥을 이어간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조선인구의 반을 차지했을 조선여성들의 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큰일을 해낸 기녀들에 절개까지 요구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절개를 지키려 강물에 투신자살한 기녀가 청심만이 아니었습니다. 논개가 진주의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은 나라에 대한 충절과 최경회장군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실도 못되고 겨우 부실이 된 기녀들에게 절개를 지키라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조선의 양반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개를 강조해 기녀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면 너무 잔인한 처사가 아니었나 싶어서 몇 마디 첨언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