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미사치-송치재-노고치
*산행일자:2007. 6. 26일
*소재지 :전남 순천
*산높이 :갓거리봉688m, 농암산410m, 바랑산619m, 문유산688m
*산행코스:심원마을-미사치-갓거리봉-마당재-죽정치-농암산
-송치재-바랑산-문유산-노고치
*산행시간:7시00분-19시32분(구간종주:11시간55분, 총시간:12시간32분)
*동행 :나홀로
이제 밤차를 타고 기차 여행을 하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열차 안에서 잠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새기가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럭저럭 두 시간 가까이 눈을 붙일 수 있게 됐으니 말입니다. 호남정맥 종주 차 마지막 열차로 밤을 달려 이른 새벽 순천 역에 도착한 것이 이번이 세 번째로, 횟수가 더해질수록 열차 안에서 눈 붙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제 몸이 잘 적응해나가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몸 동아리에 무한히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 몸의 어느 일부라도 고장이 난다면 매주 산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그리되면 그렇지 않아도 고민스러운 체중이 지금보다 더 불어나 무릎을 짓누르고 산행을 삼갈 상황으로 내닫게 되어 악순환의 늪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혼자서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데도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정맥의 산줄기를 웬만큼 밟고 나면 남아 있는 마루금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미 종주를 마친 5개 정맥들은 당일로 다녀올 만큼 집에서 멀지 않아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중간 정도 진행하면 지도와 산행기만으로도 갈 길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호남정맥은 같지 않았습니다. 밤에 출발해 그 이튿날 아침에야 산행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어떤 작은 실수라도 산행 중에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이 제 머리를 짓누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호남정맥도 종주횟수가 더해지자 길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번에는 미사치-노고치 구간을 12시간 넘게 걸으면서 단 한번도 알바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호남정맥이 5번째 이 산줄기를 찾아 오르는 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분명한 징표여서 기뻤습니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 다다르기까지 순조롭게 정맥종주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밤차를 타고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어야하고 또 호남정맥이 혼자 오르는 저를 내치지 않아야 하는데 어제 산행에서 그런 조짐을 본 것 같아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침7시 심원마을에서 하루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자정 3분전에 천안 역을 출발하는 전라선 열차에 몸을 실고 잠을 청해봤습니다만, 건너편 자리의 남자 한분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서대전을 지나 남원에 이르기 까지 두 시간 가까이 눈을 붙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순천 역에 도착했고 6시10분 경 순천 역에서 53번 버스에 올라 심원마을로 향했습니다. 이름그대로 깊고도 먼 산골의 심원마을에 도착해 시골여름의 건강한 아침을 만나보았습니다. 아스팔트 찻길을 따라 오르다가 황전터널 공사장에서 오른 쪽의 산길로 들어선 후 대나무 숲을 지나 지난번에 하산한 미사치고개 마루에 다다랐습니다.
7시37분 미사치고개에서 정맥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구간의 끝 지점인 노고치까지 1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아 구름이 잔뜩 끼고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에 초반부터 진땀 뺄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갓거리봉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시멘트계단 길이 끝나자 경사가 급해졌고 전날 내린 비로 흙길이 미끄러워 산 오름이 생각보다 더뎠습니다. 풀숲을 지나는 동안 바지가랑이가 젖어들고 아주 드물게 거미줄도 만나 어느새 여름 한 가운데 서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긴 옷에 감춰진 팔다리가 풀숲의 가시들에 여러 번 긁혀 집에 돌아와서도 가려움증과 싸워야 하는 여름산행이 벌써 시작됐습니다. 반시간을 걸어 전망바위에 올라섰어도 산자락에 안개가 자욱해 제대로 조망되지 못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8시50분 해발688m의 갓거리봉에 올라섰습니다.
두 곳의 전망바위를 지나 올라선 650봉에서 십 수분을 걸어 708봉에 이르기까지 안개가 자욱하고 숲이 우거져 전설의 고향 같은 스산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딱 벌어진 참나무가 서있는 708봉에서 갓거리봉으로 가는 길은 땅바닥에 낙엽이 쌓여 미끄럽지 않았고 높이 차가 별로 안 나는 구릉만 몇 개 오르내려 걷기가 편했습니다.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갓거리봉에는 순천시에서 세운 화강암의 표지석이 심원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왼쪽 아래가 암벽 면인 바위 상단에 걸터앉아 잠시 쉬노라니 솔가지에 다닥다닥 달려 있는 연초록의 솔방울이 눈을 끌었는데 마치 풋과일처럼 생생했습니다. 휴식을 끝내고 갓거리봉을 출발해 조금 후 밧줄을 잡고 바위를 내려선 후 풀숲이 우거진 공터를 지났습니다. 헬기장에 내려앉은 호랑나비와 어울려 날개 짓을 해대는 노란 나비가 무척 커보였습니다. 온 산을 하얗게 밝혔던 산딸나무 꽃들이 가지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화사함 뒤에 감춰진 발가벗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쓰레했습니다.
10시40분 잔 자갈이 고르게 깔린 비포장도로의 죽정치로 내려섰습니다.
헬기장에서 마당재로 내려서는 길 가까이에는 주홍 꽃의 산나리와 보라색이 곱디고운 엉겅퀴가 이 산속의 여름 꽃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내려서는 길도 편했고 재잘대는 산새들의 노래 소리도 듣기에 좋았습니다. 갓거리봉 출발 43분 후에 다다른 마당재는 잡목이 무성한 십자안부로 형형색색의 표지기가 많이 걸려 있어 성황당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마당재에서 철쭉나무가 터널을 만든 시원한 길을 걸어 무명봉에 오르고 구릉 몇 개를 더 오르내려 풀숲 속에 삼각점이 매설된 해발508m의 갈매봉에 올랐습니다. 갈매봉에서 죽정치로 내려서면서 방향을 점검한 결과 지도에는 남서방향으로 나와 있는데 저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 깜짝 놀라 멈춰 섰습니다. 여차하면 갈매봉으로 다시 오를 생각으로 여기저기를 살펴본 결과 저의 북진 길은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확 꺾여 지도에 나와 있는 남서방향으로 진행됨을 확인했습니다. 죽정치의 넓은 고개 길을 건너자마자 나무 밑에서 준비해간 어묵을 꺼내 먹으며 16분을 쉰 후 농암산으로 향했습니다. 가파른 오름길이 거의 끝나는 능선 길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제 길로 들어섰습니다. 비교적 평평한 길을 걸어 11시21분에 477봉에 도착해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12시17분 해발410m의 농암산을 올랐습니다.
477봉에서 잠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선 376봉에서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조금 걸어오르자 거의 평지 같은 밋밋한 숲 속 길이 계속되어 임도가 나오는 장자굴재를 지났어도 안부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길 왼쪽이 벌목지인 임도를 따라 잠시 오른쪽으로 진행하다가 숲길로 들어서 농암산으로 올랐습니다. 웬만큼 오르자 봉분의 떼가 떨어져 나가 흙이 그대로 드러난 커다란 묘지가 보였습니다. 477봉 출발 50분 후에 올라선 농암산에는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스텐 안내판이 표지석을 가름했고 삼각점이 서있어 위치확인이 쉬웠습니다. 580봉으로 향하는 능선 길에 우뚝 서 있는 불그스름한 큰 바위는 한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나있어 눈이 갔는데 화강암이 아니어서 궁금했습니다. 550봉에서 570봉으로 난 능선 길이 편안해 빠른 속도로 옮기는 중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배낭만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있어 섬뜩했습니다. 농암산 출발 1시간 만에 오른 쪽으로 병풍산이 갈리는 돌기둥이 세워진 봉우리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14시3분 한국전쟁 때 소련군이 넘어 온 것으로 잘 못 알려져 한 때 쏘련재로 불렸다는 송치재에 내려섰습니다. 병풍산 갈림길에서 왼쪽의 가파른 길로 내려섰습니다. 얼마 후 임도 길에서 만난 흑염소 3마리가 소나무 밑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 흑염소들은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저 과객일 뿐 이 산에서 풀을 뜯어먹고 사는 자신들이 이 산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싶었습니다. 주황색 지붕의 건물을 지나 오래된 아스팔트길로 내려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산길로 들어서고 다시 나와 아스팔트길을 걷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 오른쪽으로 산돌수양관 교회건물이 들어서 있는 17번 국도의 고개 마루 송치재에 다다랐습니다. 순수한 우리말인 솔재라고 부르면 더 정감 있을 송치재에서 샌드위치로 꺼내 먹으며 20분 넘게 푹 쉬었습니다.
15시39분 해발619m의 바랑산을 올랐습니다.
송치재에서 밧줄을 쳐놓은 된비알 길을 걸어 벙커와 묘지가 있는 구릉에 올라서기까지 20분 동안 비지땀을 흘렸는데 구릉에서 내려서서 벌목지인 안부를 지나는 동안에도 머리위로 햇빛이 내리쬐어 숨이 막히는 듯했습니다. 송치재 출발 1시간 후에 지난 너럭바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모처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제일 힘들었던 곳은 이곳에서 바랑산까지 오름 길이었습니다. 경사가 그리 급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동안 많이 지친데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루금에서 조금 떨어진 바랑산의 정수리에 올라서자 정작 산 오름에 걸린 시간은 반시간 남짓한데 한 시간이 훨씬 더 걸린 것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텅 빈 산불감시초소와 벗해 왔을 표지석이 정상에 세워진 바랑산에서 남서쪽으로 막힘없이 펼쳐지는 전망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아직도 4시간을 더 걸어야 노고치에 이르겠기에 여기서 마냥 쉬어갈 형편이 안됐습니다. 왼쪽 길로 얼마만큼 내려선 후로는 이번 산행에서 가장 편안한 평지 같은 길이 펼쳐졌습니다. 바랑산 출발 35분 후에 월내-노고치를 잇는 넓은 자갈길로 내려서 다시 쉬었습니다.
18시9분 해발 688m의 문유산을 들렀습니다.
바랑산에서 내려선 임도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5분을 쉰 것은 문유산을 오르는 마지막 힘을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16시24분에 임도를 출발해 이 악물고 직등 길을 올랐는데 13분 만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519봉을 올라섰습니다. 519봉에서 잠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천천히 다시 올라 죽은 소나무가 서있는 590봉에 다다른 시각이 17시7분이었습니다. 590봉에서 580봉으로 옮기면서 올 들어 처음으로 산딸기 몇 개를 따먹었습니다. 바랑산에서 내려와 쉬었던 자갈길의 비포장도로가 이제껏 지나온 능선 길 아래로 산허리를 휘돌아 580봉 북쪽 아래로 지나갔습니다. 580봉에서 이 도로로 내려서 10분을 쉬었습니다. 벌재-저수령 구간을 지나는 대간 길 옥녀봉의 광활한 둥굴레 군락지에 버금 갈 대규모 군락지를 지나며 산 능선을 가득 덮은 진초록의 푸르름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바랑산은 마루금에서 10m도 안 떨어졌지만 문유산은 조금 멀었습니다. 둥굴레 군락지를 지나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6-7분을 뛰다시피 빨리 걸어 문유산에 오르자 한 낮에 맹위를 떨쳤던 태양이 서쪽으로 몸을 숨기는 중이었고 그동안 숨죽였던 골바람이 되살아나 모처럼 시원했습니다. 정상석과 삼각점이 세워진 암봉의 문유산에 오르자 앞이 탁 트여 지나온 길이 잘 조망되어 이 산에 들르기를 잘 했다 싶었는데 남서쪽 아래로 시꺼멓게 불에 타 죽은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어 안타까웠습니다.
19시32분 857번 지방도가 지나는 노고치고개에서 정맥종주를 끝냈습니다.
문유산에서 삼거리로 되돌아와 660봉으로 직진했습니다. 축대를 높게 쌓은 대규모의 묘지를 지났는데 봉분의 잔디가 떨어져나가 보기에 흉했습니다. 660봉에 올라 직진 길을 버리고 오른 쪽으로 거의 90도 꺾인 내리막길로 들어섰습니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려 밀림 속을 지나는 듯 음습하고 스산해 서둘러 이 숲 속을 빠져나갔습니다. 기능성 팬티인데도 너무 오래 걸어서인지 사타구니가 쓸려 어기적거리며 걷느라 불편했습니다. 마침 비를 몰아 올 듯이 바람이 세게 불어 너럭바위에 올라가 팬티를 무릎 아래로 내리고 이 바람을 맞았습니다. 19시가 막 지나 이번 구간의 마지막 봉우리인 점터봉에 올라서자 어둡기 전에 노고치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 비로소 안심됐습니다. 얼마고 내려가서 오른 쪽 사면이 과수원으로 개발된 능선에 다다르자 가는 철사 줄이 능선을 따라 쳐져 있었습니다. 이 줄을 따라 능선 길을 걸어 임도로 내려섰습니다. 임도 옆의 농익은 산딸기들을 싫도록 따 먹으며 산딸기 가시에 긁힌 살갗을 달랬습니다. 노고치에 내려서서 대충 옷을 갈아 입고 왼쪽의 고산 정류장으로 옮겨서 20시30분에 순천행 시내버스에 올랐습니다. 순천 시내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사들어 12시간의 긴긴 종주산행을 무사히 마쳤음을 자축하고나자 사타구니가 쓸려 걷기가 불편하고 바테리가 다 떨어져 사진 찍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10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노고치-조계산-굴목재 구간을 연이어 할 것인가가 고민됐습니다. 하룻밤을 자고나서도 사타구니가 쓰라린 것이 낫지 않는다면 장시간 종주산행은 무리이기에 순천만 탐방으로 바꾸기로 마음먹고 인근 찜질방으로 옮겼습니다.
어제 하루 호남정맥이 저를 온전하게 받아들여 고마웠습니다.
미사치를 출발해 송치재에서 구간종주를 마치기는 너무 짧고, 12시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노고치까지는 무리여서 구간 끊기가 참으로 난망했습니다. 마침 요즈음이 하루해가 가장 긴 때라서 조금만 서두르면 어둡기 전에 충분히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 노고치까지 강행군했습니다. 중간에 길을 잃거나 큰 비가 쏟아져 산행이 늦어진다면 낭패다 싶어 산행 이 끝날 때까지 내내 마음을 졸였는데 호남정맥은 알바도 시키지 않았고 제우스신을 달래어 비를 뿌리지 않도록 해주었습니다. 또 문유산을 지나서는 제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모두 두 다리에 모아주어 바람을 일으키며 노고치로 내달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토록 너그러운 호남정맥이 고맙고 또 고맙기에 다시 노고치를 찾아와 끝까지 마루금을 이어갈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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