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종주기 19
*정맥구간:둔병재-장불재-광일목장위 삼거리
*산행일자:2007. 11. 12일
*소재지 :광주/전남화순
*산높이 :무등산1,187m, 안양산853m
*산행코스:둔병재-안양산-장불재-서석대-장불재-규봉암
-광일목장위 삼거리-꼬막재-원효사버스정류장
*산행시간:11시54분-18시(6시간6분)
*동행 :이규성 교수
지난 5월 고등학교 반 친구와 백운산을 같이 오른 지 반 년 만에 또 다시 무등산을 함께 올랐습니다. 두 산 모두 호남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전남광양의 백운산은 호남정맥의 출발점이자 종점이고 광주의 무등산은 이 정맥 중간지점의 산이어서 두 번 산행 모두 호남정맥종주에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산행이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반 이상을 안내산악회의 도움으로 마쳤지만, 정맥만은 저 혼자서 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2004년 5월에 한북정맥에 첫 발을 들였습니다. 그 후 여기 무등산에 오르기까지 각 정맥마다 몇 구간은 고마운 이들과 산행을 같이해 이 세상의 훈훈함을 맛보았습니다. 한북 4구간, 한남 1구간, 금북 1구간, 한남금북 2구간과 금남정맥 1구간을 지인들과 같이 했고 호남정맥은 이 친구와 2구간을 같이 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구간이 거의 다인 정맥 길을 하루 종일 같이 걸어주는 고마운 이들이 제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습니다.
“나홀로 산행”을 막는 주적은 고독과 공포입니다.
하루 종일 말없이 혼자서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외로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밀려오는 외로움을 혼자서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산이 아니고 집이라 해도 그 긴 시간을 혼자서 아무 말도 안하고 보내야 한다면 얼마가지 않아 실어증환자가 될 것입니다. 고독을 이기는 길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종주 길에 오르면 사람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하기에 저는 수많은 산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애씁니다. 그래서 잠시 멈춰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고 또 사진을 찍습니다. 때로는 저 혼자서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보고 소리 내어 감탄사를 발하곤 합니다. 나무들도, 바위도, 구름도, 새들도 모두가 산 식구들이고 이제는 제 벗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훤한 대낮이라도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노라면 공포감이 엄습해 올 때가 많습니다. 멧돼지도 무섭고 살모사도 소름끼칩니다. 한번 공포감에 빠져들면 살랑거리는 바람소리도,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랍니다. 산에 들어 있는 시간만이라도 산식구가 되어 저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고자 애쓸 때 공포감도 같이 사라집니다. 라디오를 크게 켜놓고 혼자서 산행하는 분들을 드물게 만나는데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라디오 소리는 사람들에게는 화음인 줄 모르지만 산식구들에는 소음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왜 혼자서 산행을 하느냐고 누가 물어온다면 바로 이 고독과 공포 때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고독과 공포를 이기고 나면 제가 비로소 산식구가 될 수 있어 산행의 깊숙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산행할 때 느끼는 이것들은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자극이 되고 또 이를 극복해나가면서 세상사는 지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과 공포 속에 긴 시간 산행을 해보아야 곁을 같이 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줄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오전 11시56분 둔병재를 출발해 안양산으로 향했습니다.
아침6시30분에 강남을 출발한 고속버스가 기흥을 지나가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예정보다 반시간이 늦은 10시 반에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11시20분경에 화순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해 국밥을 사 든 후, 택시 한 대를 잡아 1만원을 들여 둔병재로 옮겼습니다. 출렁다리에서 수만리 쪽으로 3-4분간 찻길을 따라가다 오른 쪽의 표지기가 많이 매달린 들머리로 올라섰습니다. 경사가 가파르고 길을 덮은 낙엽들로 길이 미끄러워 산 오름이 생각보다 더뎠습니다. 혹시나 해서 헤드랜턴을 준비해오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해 떨어지기 전에 마쳐야 무등산 곳곳을 제대로 카메라에 옮겨 담을 수 있고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는데 둔병재 출발이 50분가량 늦은데다 낙엽 길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산행시작 27분 만에 능선삼거리에 다다라 안양산 휴양림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만났습니다.
13시6분 해발853m의 안양산을 올랐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안양산으로 오르는 길은 낙엽 길이 아니어서 한결 힘이 덜 들었습니다. 로프가 쳐진 완만한 경사 길을 지나 마지막 20분은 억새밭 길을 올랐습니다. 작년 9월에 이 길을 지날 때에는 푸르름을 잃지 않은 억새들이 이번에는 모두가 누렇게 변해 있었습니다. 헬기장이 들어선 넓은 공터의 안양산 정상은 어느 방향으로도 시야가 탁 트인 최고의 전망지여서 북쪽의 무등산, 서쪽의 만연산과 동쪽의 동복호가 아주 가깝게 보였고 남동쪽 멀리로 모후산도 잘 보였습니다. 정상에서 내려서 왼쪽 아래 수만리로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를 조금 지나 무명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동안 화사했던 봄날을 찾아 헤매는 철쭉 꽃 몇 송이를 보았습니다. 안양산 출발 40분이 지나 936봉의 암봉 위에 올라서자 칼로 자른 듯 네모반듯한 입석대 바위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 왔습니다. 안양산 정상에 조금 못 미쳐서 만난 억새들이 936봉에서 장불재에 이르는 광활한 고원을 꽉 채워 한가을 황금색 논 뜰을 보는 듯 했습니다.
15시8분 무등산 주봉인 천황봉을 바로 앞에 둔 서석대에 올랐습니다.
936봉에서 백마능선 안부로 내려서 키를 넘는 억새들이 골바람에 출렁이며 춤을 추는 은빛 군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노라니 이 자연의 진짜 춤꾼들은 바로 억새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하나 남은 암봉을 오른 쪽으로 에돌아 936봉 출발 반시간이 다되어 다다른 장불재는 사통팔달의 드넓은 고개 마루여서 이길 저 길로 올라온 산객들이 쉬어 가는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여기 장불재는 사람들만 모여드는 광장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최신식 방송통신탑과 석기시대의 커더란 고인돌(?)이 마주 서 있어 스스럼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의 광장이기도 했습니다. 장불재를 출발해 서석대를 다녀오는 데 대략 한 시간이 걸린 것은 입석대와 서석대가 옷자락을 잡아서였습니다. 7천만 년 전부터 이 자리에서 무등산을 지켜온 저 바위들이 저희들에 하고 싶은 얘기들이 꽤 많은 듯 했습니다. 주상절리의 곧추선 암벽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이십 수년 전 반문명적 폭거로 자식들을 잃고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이 고을 어머니들의 한스런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보라는 듯 했습니다. 통곡의 세월은 흘러가버렸고 무등산 하늘은 쾌청하고 냉랭해 그 쌀쌀맞기가 저 아래 광주호의 차디찬 물과 닮아 보였습니다. 장불재로 되돌아와 규봉암으로 향했습니다.
16시52분 광일목장으로 내려서는 억새밭 능선삼거리에서 구간종주를 마쳤습니다.
장불재에서 무등산의 남쪽 사면에 낸 허리 길로 우회하며 이제껏 걸어 오른 부드러운 억새밭 길과는 전혀 다른 너덜겅의 바위 길을 지났습니다. 인도의 지봉스님이 법력으로 바위들을 괴어놓았다는 지봉너덜은 장불재와 규봉암 중간지대에 있는 암괴류(Block stream)로 마치 돌무더기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규봉을 바로 뒤에 둔 규봉암도 볼만 했습니다. 관음전과 삼성각, 그리고 법고누각이 들어앉은 작은 암자지만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6각형의 세로기둥인 주상절리(Culumnar joint)가 늠름해 보이는 규봉이 에워싸고 있고 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동백호가 가깝게 있어 풍광이 이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규봉암을 지나 이내 너덜 길은 끝났고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져 최대한 속도를 높여 내달렸습니다. 반시간이 조금 지나 광일목장 후면부의 삼거리에 다다랐는데 직진 길은 목장 길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삼거리에서 5-6분을 더 걸어 무등산 정상에서 북봉을 거쳐 북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능선이 꼬막재로 에도는 허리 길과 만나는 즈음에서 억새밭으로 내려서는 삼거리를 만났는데 이 길이 정맥 길임은 다음 날 확인했습니다.
18시 원효사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모두 끝냈습니다.
광일목장 위 억새밭도 억새의 크기와 밭 넓이가 장불재에 못지않았습니다. 억새밭 길이 끝나는 묘지에서 돌계단과 목제계단을 차례로 지나 공원관리사무소가 3.4Km 남은 꼬막재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약수터를 거쳐 능선쉼터를 지나자 석양의 붉은 햇살을 받은 단풍나무들이 더욱 붉게 불타고 있었습니다. 편백나무 숲 지대를 지나 공원관리 사무소에 다다르기 직전에 해가 넘어가 어렵지 않게 하산했습니다. 곧 이어 1187번 시내버스에 올라 광천터미널에서 하차했습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간단히 든 후 함께 산행한 친구는 서울로 올라갔고 저는 하루를 더 묵어 다음 날 정맥종주를 준비했습니다.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무등산의 산 오름은 군부대가 들어있어 정상을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대신에 산허리를 에도는 허리길이 길게 나있어 산책길처럼 편안했습니다. 이런 편안한 길이라면 혼자 나서도 고독과 공포를 느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혼자 걷는 것 보다 오랜 친구와 같이 걸은 이 길이 훨씬 편안하고 푸근했기에 친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친구 덕분에 산식구들을 하루 잊고 종주산행을 했습니다만, 바로 이어서 하는 다음 구간 산행에는 다시 이 들을 불러내고자 합니다. 무등산이 워낙 후덕해 다음 구간의 말산들도 날카롭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되지만 그래도 이들과 벗해야 덜 외롭고 덜 무섭기에 다시 이들을 불러내어 같이 산행할 뜻입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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