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북한산 산행기(1-4)
북한산(4)
(의상능선)
*산행일자:2010. 10. 24일(일)
*소재지 :서울/경기고양
*산높이 :문수봉727m, 의상봉536m
*산행코스:이북5도청-향로봉-비봉-문수봉-의상봉-3번도로 노적봉입구
*산행시간:10시1분-16시51분(6시간50분)
*동행 :대구 참사랑산악회원 및 서울 성봉현, 조부근, 범솥말, 이규성님
어제는 대구 참사랑산악회원들과 함께 북한산을 올랐습니다. 북한산은 서울을 대표하는 산으로 2002년 산림청에서 선정한 명산100산의 한산입니다. 인근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은 고려조 성종 때부터 조선조까지 삼각산으로 불렸다 합니다. 이산의 주봉인 백운대와 록 클라이머(rock climber)의 도장인 인수봉, 그리고 그 남쪽의 만경대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삼각산으로 불린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삼각산의 뜻풀이를 전혀 다르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한국땅이름학회 이사인 이홍환님은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 며 삼각산은 서울 산을 이름 하는 것이라고 한 카페에 글을 올렸습니다.
오전 10시1분 이북오도청을 출발했습니다. 탐방센터 앞 공터에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 후 본격적인 오름길
에 들어섰습니다. 오도청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이번이 처음인데다 걸음이 느려 후미에 섰습니다. 오름
길은 산객들로 붐볐습니다. 축대만 보이는 공터를 지나 진관사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
른 후 왼쪽의 향로봉으로 향했습니다. 여섯 해전 봄 대학친구와 함께 우이동을 출발해 백운대를 오른 다음
따라 산행하다가 이 고개를 지난 적이 있는데 그때는 곧바로 진관사로 하산하는 바람에 눈앞의 향로봉을 들르
지 못했습니다.
11시18분 해발525m의 향로봉을 올랐습니다. 이 산의 주봉인 백운대가 한 눈에 잡히는 향로봉은 이번 능선 종주의 시발점으로 이 봉우리에서 탕춘대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터널을 만나게 되는데 저희들은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동쪽능선을 탔습니다. 향로봉바위 틈바구니에 뿌리내린 코스모스 한 그루가 연붉은 꽃을 딱 한 송이만 피워 가을의 애잔함이 더했습니다.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비봉을 왼 쪽으로 에돌아 사모봉으로 향했습니다. 순수비는 국립박물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가비를 세웠습니다만, 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확보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는 역사적 사실이기에 많은 산객들이 비봉 꼭대기를 올라 가비를 사진 찍어가는 것입니다. 오른 쪽으로 남산과 안산이 훤히 보이는 능선을 걸어 헬기장 옆자리에 정좌한 사모암을 11시55분에 지났습니다. 기반암에 얹혀 진 거암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사모암의 살갗이 참으로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3시 정각에 해발715m의 문수봉에 이르렀습니다. 사모암을 왼쪽으로 우회해 동진하는 길이 문수봉으로 가는 길입니다. 저처럼 걸음이 느린 대구 팀의 여성 산객 몇 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천천히 산행해 시간은 걸렸지만 힘든 줄 몰랐습니다. 문수봉 앞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은 북한산성의 정수동암문으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는 암릉 길은 문수봉으로 오르는 길인데 이번 합동산행의 대장인 성봉현님이 권하는 대로 문수봉으로 향했습니다. 6년 전에는 위험할 것 같아 이 봉우리를 우회했는데 그 후 곳곳에 철제가드를 세워놓아 암릉 길이 가팔라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문수봉 오른 쪽 봉우리의 삼각점을 사진 찍은 후 왼쪽으로 뻗어나간 의상능선에 발을 들였습니다. 몇 분 후 북한산성의 정수동암문에 도착했는데 점심식사를 하면서 저희 후미팀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선두팀원들이 보이지 않아 곧바로 나한봉을 올랐습니다. 나한봉에서 오른 쪽 길을 버리고 똑바로 내려가 안부 오른쪽 아래 널찍한 숲 속 공간에다 자리 잡은 선두팀을 만났습니다. 함께 점심을 들면서 절정에 이른 단풍을 완상하며 가을을 찬하다가 13시52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의상능선을 따라 나 있는 북한산성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적의 침략을 막고자 산에 쌓은 성곽에는 포곡형(包谷形)과 테뫼형이 있습니다. 포곡형산성은 산 능선을 따라 골짜기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그 길이가 수 Km에 달하는데 반해, 산봉우리를 가운데 두고 빙 돌아 산허리에 쌓은 테뫼형 산성의 대다수는 그 길이가 수 백m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번에 대구 팀과 같이 따라 걸은 북한산성은 남한산성과 더불어 한성을 지키고자 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백제가 토성으로 축성한 것을 조선조 숙종이 석성으로 개축한 것입니다. 성곽의 길이가 몇 Km씩 되는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일은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해야하는 엄청난 역사입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백성들로부터 심하게 원성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임금의 자리마저 뺏길 수 있기에 어떤 임금도 개축에 쉽게 나서지 못했습니다. 숙종임금이 청주의 상당산성과 여기 북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석성으로 다시 쌓은 남한산성에 외성인 봉암성을 붙여 석성으로 쌓은 것은, 조선 5백년사에서 영조 다음으로 오래 집권하면서 당시 유생들로부터 추앙받는 우암 송시열 등 대신들과의 힘겨루기에서 결국에는 승리해 왕권을 굳건히 다져 놓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숙종임금이 드라마에서처럼 장희빈의 농단에 놀아나는 유약한 임금이라면 주요 산성들을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하는 일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최근 인기리에 끝난 TV드라마 “동이”에서처럼 숙종임금이 깨 방정이나 떨었다면 북한산성은 지금도 거의 다 허물어진 토성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15시42분 해발536m의 의상봉에 올라섰습니다. 해발고도 500m대의 고만고만한 봉우리 증취봉과 용혈봉의 두 봉우리를 넘어 용취봉에 오르자 만산홍엽의 가을 산에 북동쪽에 자리한 백운대와 그 오른 쪽의 만경대 그리고 그 앞쪽의 펑퍼짐한 노적봉이 이루고 있는 기하학적 구도미가 더해진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역시 북한산이다 했습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의상봉에 올라서자 정북 쪽의 원효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습니다. 남북으로 자리한 의상봉과 원효봉 간 지척의 거리만큼 의상과 원효 두 대사도 함께 당나라로 원행 길에 나설 만큼 가까운 사이지만, 한 분은 이 땅에 그냥 머무르고 다른 한 분은 당으로 유학을 떠날 만큼 두 분의 생각은 깊숙한 백운동계곡을 사이에 둔 것만큼 합치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원효봉-백운대-문수봉-의상봉을 한 줄로 엮어 놓은 것은 북한산성이 한 일입니다. 북한산성에 둘러싸인 골짜기의 단풍이 불타는 듯해 설악산에 버금갈 만 했습니다. 의상봉에서 정 동쪽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절 노적사를 초라하게 만든 것은 바로 위 암봉인 노적봉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절과 멀지 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청동(?) 불상도 한 몫 단단히 했으리라 생각되는 것은 그 엄청난 규모 때문입니다. 사패산에 외곽순환도로가 지난다하여 극렬하게 반대한 불교계에서 산속 깊숙이 저토록 커다란 불상을 모시는 것이 과연 환경친화적인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16시51분 3번 도로가 지나는 북한산성입구에서 하루산행을 마쳤습니다. 의상봉에서 산성입구로 내려가는 암릉 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쇠줄을 걸어놓아 안전하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걸어보는 암릉 길이어서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백운대에서 향로봉에 이르는 이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잡히는 의상능선 길은 이번에 처음 밟았는데 암릉 길을 오르내리기가 아슬아슬하고 좌우가 탁 트여 조망이 빼어나 역시 명불허전이다 했습니다. 의상능선이 거의 끝나는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만난 큰길을 따라 몇 분 을 걸어 탐방센터 앞에 이르렀고 수분 후 이번 산행의 끝점인 3번 도로상의 북한산성입구에 다다라 대구 팀과의 우정산행을 마쳤습니다.
우정산행의 뒤풀이는 인근 식당에서 가졌습니다. 그간 바뀐 대구 참사랑산악회의 회장단 소개가 있었고 이번에 처음 같이 산행한 새내기분들과의 상견례가 뒤이었습니다. 매년 봄가을 같이 하는 우정산행은 이번이 8번째입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두터워지는 우정을 이번에도 짙게 느꼈습니다.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함께 북한산을 오른 대구 참사랑산악회원님들과 이번 산행을 준비하고 진행하신 서울분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 봄 대구 쪽 산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산행사진>
- 산강
- 2010.10.25 22:46
- 자주 가는 산행길 사진으로 보니 너무 반갑습니다.
코스모스? 맞나요? 사진 너무 멋집니다.
의상능선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주봉들이 환상입니다.
멋진 풍광 제가 직접 다녀온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시인마뇽
- 2010.10.27 23:20
- 집이 산본이라서 강 건너 북한산은 좀처럼 가지지 않습니다. 오랫만에 오른 북한산의 단풍이 절정이어서 풍광을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松琳 통나무
- 2010.10.26 16:42
- 결혼식다음날에도 산행을 하셨네요..멀리 대구서 북한산을 오르고자 오신분들도
대단하는 말씀을 드릴수 밖에 없네요..좋은 산우를 두심을 축하드림니다.
- 시인마뇽
- 2010.10.27 23:20
- 홀가분한 마음으로 올랏습니다. 고맙습니다.
북한산 (1)
*산행일자:2007. 10. 6일
*산행코스:솔고개-상장능선-육모정고개-효자비계곡
-숨은벽 출발점-해골바위-효자비마을
*동행 :경동OB산악회 이규성, 유한준 동문
북한산(3)
(숨은벽)
*산행일자:2008. 9. 27일(일)
*소재지 :경기양주/서울
*산높이 :숨은벽750m(?)
*산행코스:효자비-해골바위-숨은벽-호랑이굴샘터-효자비
*산행시간:8시45분-17시15분
(총 8시간30분/ 암벽등반2시간24분)
*동행 :Top성봉현대장, 범솥말님, 시인마뇽, Last조부근님
작년부터 별러온 숨은벽을 드디어 올랐습니다.
단순한 암릉 길이 아니고 경사가 엄청 급한 슬라브 길이어서 암벽등반에 능한 전문적인 록 클라이머가 앞장서서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쉽사리 도전할 수 없는 숨은벽을 제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등산학교를 졸업하고 젊어서부터 꾸준히 암벽을 등반해온 성봉현 대장 덕분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올 봄 대구의 비슬산을 같이 오른 범솥말님과 조부근님이 함께 밀어주어 생각보다 한결 수월하게 올랐습니다. 이번 산행에서도 산을 오른다는 것은 고마움을 쌓아가는 것임을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북한산의 대표봉인 백운대와 인수봉이 북사면에 숨겨놓은 암봉이 숨은벽입니다.
그래서 서울 쪽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 양주 쪽에서는 두 고봉 사이를 헤집고 들어앉은 숨은벽의 전모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앞자리의 산줄기나 봉우리에 가려서 볼 수 없는 산이 숨은벽 만이 아니라는 것은 대간시인 이 성부님의 백두대간 종주집이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암봉이 숨은벽으로 불리는 진짜 이유는 북한산의 북사면에 몸을 숨겨서가 아니고 다른 봉우리보다 사람들이 덜 찾아 숨어있듯이 조용하고 한가해서일 것입니다. 숨은벽을 오르는 것이 전문클라이머들에는 인수봉이나 선인봉에 비해 너무 싱거운 암벽코스이고, 저처럼 평범한 산객들에는 좀처럼 오를 수 없는 위험한 암벽 길이어서 양쪽 모두 이 길을 피해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릿지산행 애호가들만이 이 코스를 즐겨 올랐기에 숨은벽이 이제껏 은둔과 신비의 명성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공포의 암벽을 보다 수월하게 올라보고자 고교후배가 챙겨준 암벽화를 싸가지고 갔습니다. 엄습하는 공포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암벽등반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어서 바위에 착착 들러붙는다는 신병기(?)인 암벽화의 덕을 보고자 가지고 갔는데 맨발로 신어도 발걸음을 때놓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볼이 너무 좁아 암벽화 신기를 포기하고 그냥 릿지화를 신고 올랐습니다. 성능이 강화된 신병기는 암벽화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졸업 후 삼십 수 년 만에 처음 해보는 암벽등반이어서인지 하강기와 또 슬링을 대체한 확보기(하네스)도 제게는 새로웠습니다. 바위를 한창 배울 때 연습코스에서 잠시 사용했던 철심 박은 군부대자일에 비해 이번에 사용한 10.5mm의 45m자일은 발목 위를 잘라내고 신었던 미군 워커와 이번에 신지 못한 암벽화만큼이나 성능과 무게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이번에 동원된 신병기들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산행대장이 앞장서 이끌어주어 우려했던 공포감은 문제없이 극�될 것 같았습니다.
아침8시45분 효자비마을을 출발했습니다.
불광역에서 성봉현님과 범솥말님을 만나 의정부행 시내버스에 오른 후 반시간 가까이 지나 효자비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의정부에서 미리 와서 대기 중인 조부근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숨은벽으로 향했습니다. 효자비를 막지나 오른 쪽으로 가다가 바로 되돌아와 왼쪽의 밤골능선으로 올랐습니다. 산행시작 50분 만에 올라선 무명봉에서 첫 쉼을 가지면서 성봉현 대장으로부터 하네스 사용법과 8자매듭 짓는 법을 익혔습니다. 몇 년 전 어부인을 모시고 맨손으로 숨은벽을 올랐다는 범솥말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어느 정도 불안감이 가시기도 했습니다. 잠시 후 안부로 내려서자 염초봉으로 오르는 직진 길은 로프가 쳐져있어 가로 막혔고 2.0Km 남은 백운대 길이 왼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10시31분 해골바위 아래에서 슬라브 길을 오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똑바로 몸을 세우고 걸어 오르라는 산행대장의 가르침은 분명 금과옥조의 지침일터인데, 자꾸 몸이 앞으로 숙여져 엉거주춤 두 손으로 바위를 잡고 오르는 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는 참으로 한심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30여 년 전에 인수봉을 문제없이 오른 실력은 다 어디가고 이렇게 엉기는 근본 이유은 그 때는 극복했던 추락에의 두려움이 되살아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숨은벽의 본 코스에서는 선등자의 확보를 받을 것이고 그리하면 공포감이 사라져 올라갈 수 있겠지 하며 애써 자위했습니다. 해골바위를 지나 한참동안 쉬면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북쪽으로 노고산을 지나는 한북정맥이 동서로 내달렸고 서쪽으로는 염초봉 너머로 한강이 조망됐습니다. 동쪽으로는 인수봉 아래 설교벽 너머로 도봉산의 오봉과 자운봉 등 암봉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좋은 경관을 둘러보는 것이 마냥 마음 편하지 못했던 것은 눈앞의 숨은벽 능선을 오를 일이 남아 있어서였습니다.
11시36분 숨은벽 암벽등반이 시작됐습니다.
빨래판 길로 불리는 첫 번째 피치가 꽤 가파르고 멀게 보였습니다. 몇 분들이 산행기에 올려놓은 60m는 아니더라도, 45m 자일이 다 들은 것으로 보아 그 거리가 35m-40m 정도는 충분히 될 것으로 짐작됐습니다. 이 피치의 심리적 거리는 이보다 훨씬 커 첫 피치가 끝나는 지점의 확보점이 새까맣게 높이 보였습니다. 북한산국립공원에서 나온 젊은이 둘이서 안전장비를 점검하고 안전산행을 위해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탑을 선 성봉현 대장은 물 찬 제비같이 후다닥 걸어 올라가 확보를 마치고 OK사인을 보내왔습니다. 그 뒤를 이은 범솥말님은 이미 이 코스를 맨손으로 한 번 올라서인지 등반 모습이 참으로 여유롭고 안정되어 보였는데 확보점 바로 밑에서도 똑바로 선채로 올라가자 공원직원도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바위에 올라선 저의 과제는 어떻게 해서든 확보점까지 올라가는 것이기에 자세를 갖고 논할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앞의 두 분들처럼 선채로 걸어가지 못하고 두 손으로 바위를 잡고 한발 한 발 옮겨 놓자 그래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볼트가 박혀있어 안전감이 더해져서인지 공포감이 사라졌고 별 무리 없이 확보점에 다다랐습니다. 라스트를 본 조부근님은 바로 제 뒤를 이어 올라와 첫 번째 피치를 모두 다 무사히 해냈습니다. 두 번째 피치는 크랙을 오르다 오른쪽 슬라브로 올라서는 길로 코스가 짧아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장이 가장 신경써온 길은 마지막 3피치의 거의 끝 지점으로 바닥이 반들반들해 슬립 먹기가 십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적당한 곳에 볼트가 박혀있고 홀드가 파져 있어 한 걱정 놓았다 합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이 구간을 정석대로 올랐고 저 혼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딱 두 걸음 자일을 잡고 올랐습니다. 마지막 바위를 잡고 돌아 전 구간을 마친 시각이 14시경으로 암벽장비를 갖추고 바위 길을 오른 시간은 대략 2시간 반 정도였습니다. 대장의 세심한 배려로 2-3m 높이의 수직바위를 자일을 잡고 하강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일을 사려 넣는 대장은 전 대원이 무사히 오른데 대해 뿌듯해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4시30분 숨은벽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확보 줄이 없어지자 처음에는 허전했고 별 것 아닌 바위 길을 지나기가 걱정됐습니다만, 이내 해소됐습니다. 3피치 확보점에서 수직방위를 내려서서 숨은벽 정상에 올라서기까지 좌우로 포진한 암벽들이 비경이었습니다. 저도 해냈다는 뿌듯함에 내친 김에 고향선배 청파 윤도균 님이 오르신 인수봉도 도전해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만, 막상 누가 하자고 권해오더라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강연습 때 저를 도와준 한 분을 숨은벽 정상에서 다시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마일3040산악회의 산행대장이신 이 분은 암벽등반으로 120Kg 넘는 체중을 84Kg로 줄였다는데 저도 80Kg를 맴도는 몸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 강도가 약한 종주산행을 지양하고 이분처럼 암벽등반에 본격적으로 나서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북쪽 멀리로 개성을 감싸고 있는 송악산이 흐릿하게 보여 다른 분들에 안내했습니다. 제 고향이 개성에서 가까운 파주라서 송악산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제 눈에는 잘 보인 것입니다. 결국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아는 것입니다. 배불리 점심을 들고 난 후 백운대 등정은 다음으로 미루고 밤골로 내려가기로 뜻을 모아 하산 길에 들어섰습니다.
15시36분 호랑이굴(?) 샘터를 지났습니다.
숨은벽 정상에서 오른 쪽 아래로 내려가 다다른 안부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갔습니다. 이 안부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우이동으로 가게 되고 직진해 오르면 호랑이굴을 지나 백운대에 오르게 되는데 저희들은 오른 쪽으로 꺾어 계곡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범솥말님과 조부근님은 바쁜 일로 서둘러 내려갔고 성봉현 님과 둘이서 천천히 걸어 내려갔습니다. 호랑이 굴 샘터에 잠시 머무르며 목을 축인 후 한참을 내려가 삼거리를 만났고 왼쪽으로 꺾어 조금 더 가자 안부가 나타났습니다. “백운대2.0Km”의 이정표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아침에 지났던 안부로 이곳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밤골능선 길로 들어섰습니다.
17시15분 효자비마을로 회귀했습니다.
안부에서 효자비마을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여느 산책로보다 넓고 편안했습니다. 몇 번을 돌아서서 숨은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것은 언제 다시 저 암벽을 다시 기어오르랴 싶어서였습니다. 지난 일요일 한북정맥 종주 길에 앞에 보이는 노고산을 오를 때는 땡볕 더위로 엄청 고생을 했는데 꼭 한 주가 지난 이번 숨은벽등반에는 날씨가 선선해 바위를 움켜잡고 올랐어도 더운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저녁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능선 길이 마냥 평화로웠고 그 길을 걷는 저희들도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뒤풀이는 조촐하고 짧았습니다.
연신내의 허름한 생맥주 집에 들러 골뱅이를 안주삼아 생맥주 몇 잔씩 비웠습니다. 둘이서 같이 하산하면서 나누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도 이어갔습니다. 제가 농 삼아 즐겨 쓰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담배는 고체라서 끊을 수 있지만 술은 액체라서 끊을 수 없다고 강변해온 제가 이제 고백하건대 진정 술을 딱 끊지 않는 이유는 술 몇 잔으로 가슴을 열어 보일 수 있는 분들을 모두 끊고 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숨어있는 숨은벽도 제게 가슴을 열어보였습니다. 저도 숨은벽에, 그리고 숨은벽을 같이 오른 분들에 마음을 열어보이고자 합니다.
이번 산행을 준비하고 숨은벽 등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성봉현 대장님에 진심으로 감사말씀 올립니다. 옆에서 또 뒤에서 밀어주고 용기를 불어준 범솥말님과 조부근님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2시간 반 동안 저희들을 내치지 않고 가슴을 열고 받아준 숨은벽에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산행사진>
북한산(3)
(숨은벽)
*산행일자:2008. 9. 27일(일)
*산행코스:효자비-295봉-숨은벽-호랑이굴 샘-효자비
*동행 :Top 성봉현대장, 범솥말님, 시인마뇽, Last조부근님
1)시인마뇽 촬영
2)조부근님 촬영
3)성봉현님 촬영
북한산(2)
*산행일자:2007. 10. 12일
*소재지 :서울시/경기 고양
*산높이 :백운대837m
*산행코스:솔고개-상장봉-육모정고개-영봉-하루재-백운대
-하루재-우이동버스정류장
*산행시간:11시25분-18시30분(7시간5분)
*나홀로
어제는 3년 반 만에 북한산의 백운대를 다시 올랐습니다.
백운대에 올라서서 둘러본 북한산은 웅대하고 늠름해 수도서울을 지켜내기에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진산임에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몇 년 전 헌법적 효력을 갖는 관습법의 도움을 받아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로 재확인된 것은 오랜 세월 북녘의 삭풍을 온 몸으로 막아 온 북한산에 힘입은 바 컸을 것입니다. 북으로 북한산과 남으로 한강이 없었다면 서기1,392년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께서 불과 3년 만에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강의 풍부한 수량과 그 유역의 곡창지대가 아무리 탐이 나더라도 북한산이 버티고 서있지 않았다면 북쪽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바람을 막아낼 수 없었기에 무리해서 천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매몰찬 삭풍으로부터 역사를 온전히 지켜내고자 일찍이 백제는 이 산의 암릉 길에다 토성을 쌓았고, 조선조 숙종임금은 다시 석성으로 고쳐 쌓았던 것입니다.
북한산의 대표봉은 주봉인 백운대와 그 양쪽의 인수봉과 만경대일 것입니다.
이 세봉우리를 밑에서 똑바로 올려다보노라면 기하학적 구도미가 빼어나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백제 때에는 서울의 일대를 한산으로 불렀고 북한산은 부아악 또는 부악산으로 불렀다 합니다. 고려 성종 때에 이르러 이 산을 삼각산으로 부른 것을 20세기 들어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이 북한산으로 고쳐 불렀으니 이제는 다시 제 이름을 찾아 불러야 옳다는 것이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개명하자는 분들의 논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분들과 의견을 달리합니다. “삼각산”은 이 산의 뾰족한 형세를 잘 표현할지는 몰라도 웬만한 산들은 산봉우리 거의다가 삼각봉으로 되어 있어 고유명사보다는 산봉우리를 통칭하는 보통명사로 생각되기 쉽다는 것이 제가 이견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 삼각산의 이름으로는 주위의 많은 산들을 감싸서 거느리는 이 산의 넉넉함을 드러낼 수 없을 뿐더러 한강 북쪽에 위치해 수도 서울을 지켜내고자 애써 온 이 산의 유구한 역사를 표현하기에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이미 익숙해졌고 또 이 산의 위용과 역사를 더 잘 담아내는 북한산의 이름을 일본사람들이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삼각산으로 개명하는 것이 반드시 잘하는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소수의견으로나마 남기고자 합니다.
아침11시25분 솔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엿새 전 고교동문들과 함께 오른 상장능선을 다시 찾은 것은 그날 육모정고개에서 하산하느라 오르지 못한 백운대에 올라서고 싶었으며, 한 후배를 따라 오른 상장3봉의 그리 어렵지 않은 슬라브 길을 저 혼자 해보고도 싶어서였습니다. 산본 집에서 솔고개까지 전철과 버스로 도합 2시간10분정도 걸렸습니다. 구파발-의정부 간 지방도로가 지나는 솔고개에서 하차하여 동쪽 마을로 들어선지 4분 만에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의 왼쪽 길을 따라 폐타이어로 교통호를 만든 일명 폐타이어봉에 올라서자 비로소 상장능선 길이 열렸고 정면으로 인수봉에서 흘러내린 설교벽 능선과 한 가운데 키를 낮춘 숨은벽 능선, 그리고 그 오른 쪽의 원효능선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12시30분 삼각점이 서 있는 상장1봉에 올랐습니다.
폐타이어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잠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치받이 길을 숨 가쁘게 올랐습니다. 상장1봉에서 바라다본 오봉이 깔끔해 보였습니다. 37년 전 한창 록 크라이밍을 배울 때 고교선배들의 도움으로 다섯 봉우리를 모두 오르내린 후로는 이제껏 한 번도 다녀오지 못해 그저 바라다만 보는 오봉이 되었는데 이날따라 쾌청한 하늘의 도움으로 더 할 수 없이 산뜻해 보였습니다. 상장1봉 바로 앞에 버티고 선 상장능선의 주봉인 해발543m의 상장2봉은 오른 쪽 밑으로 우회했습니다. 이번 산행의 난코스는 제게는 3봉이었습니다. 지난주에 한번 올라보지 못했다면 혼자서 오를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새가슴으로 3봉을 오르자고 마음먹은 것은 지난주 함께 올랐던 학습효과 덕분입니다만, 그래도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습니다. 상장2봉을 바로 밑 바위 길로 우회하는 것도, 슬라브 길을 지나 3봉에 오르는 것도, 또 3봉에서 슬라브 길을 따라 내려서는 것 모두를 해내고 나자 오는 11월 리지산행에 능숙한 몇 분들과 함께 숨은벽 코스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13시31분 우이령으로 갈리는 봉우리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상장3봉에서 숨죽이고 내려서 왕관봉으로 불리는 상장4봉을 오른 쪽 아래로 에돌아 다시 능선 길로 올라서자 몇 분들이 모여 앉아 점심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분들 외에는 육모정고개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 상장능선 길이 북한산의 다른 코스보다 참으로 한적하다 싶었습니다. 곧이어 삼각점이 세워진 상장5봉에 도착한 시각은 13시11분이었습니다. 상장2,3,4봉은 모두 암봉이지만 상장5봉은 상장1봉과 같이 육봉인 데다 삼각점도 세워져 있어 마치 상장1봉을 다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소나무 능선 길을 따라 20분을 걸어 벙커 위에 자리한 상장7봉에 다다랐습니다. 아직도 출입이 금지된 이 봉우리에서 왼쪽 아래의 우이령까지 이어지는 능선 길을 3년 전 한북정맥을 종주할 때 밟지 못해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난 능선 길을 따라가다 그동안 인수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만경대와 백운대를 보았는데 이 산의 주봉인 백운대는 상당부분 인수봉에 가려 정상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만 보였습니다. 봉우리가 뾰족해 성깔 사나워 보이는 상장9봉의 북사면에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해 잠시 멈춰서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이 봉우리를 한참 오른 쪽 밑으로 길게 반원을 그리며 우회하는 중 3년 전에 만났던 까마귀들이 크게 소리를 내며 반겼습니다. 그 때는 꽤 여러 마리가 제 머리 바로 위를 선회해 내심 위협을 느꼈는데, 그동안 산 아래에서 환송하는 까치들보다 산 위에서 환영하는 까마귀들과 더 친해져서인지 까마귀 우는 소리가 반갑게 들렸습니다.
14시6분 육모정 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상장9봉을 우회해 능선에 올라섰다가 다시 한 봉을 에돈 후 송전탑을 막 지나 왼쪽으로 우이동으로 내려서는 길이 갈리는 십자안부 육모정고개로 내려섰는데 오른 쪽 사기막골로 이어지는 길은 철조망으로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문을 쓴 한 산악인의 추모비 바로 옆에서 점심을 든 후 고개를 출발해 영봉으로 향했습니다.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선 첫 봉우리에서 쉬고 있는 한 부부에 인사를 건넨 후 직진하여 헬기장에 다다르자 건너편 불암산과 수락산이 잘 보였고 그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민 천마산은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르다 죽은 소나무가 살아있는 활엽수 가운데 듬성듬성 서 있는 고사목 지대를 지났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에도 내치지 않고 땅을 내준 이 산에 자리가 비좁다고 투정하지 않는 것은 나무의 내세관이 혹시 윤회설을 따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를 함께하며 옛 이야기를 나누는 듯 서로 스스럼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15시19분 하루재로 내려섰습니다.
돌계단을 꾸준히 올라 다다른 영봉에서 바라다 본 인수봉은 과연 크라이머들의 도장이었습니다. 바위에 바짝 붙어 암벽을 오르는 크라이머들에게는 인수봉은 냉엄한 도전의 현장이자, 한번 안기어 체온을 느껴보고 싶은 어머니의 안 가슴이기도 합니다. 영봉에서 하루봉으로 내려가는 능선 길은 산을 끔찍하게 사랑하다 먼저 간 산사람들의 안식처입니다. 이 길을 지나며 1951년 난다데비 봉을 오르다 실종된 프랑스의 원정대장 로제 듀프라의 유작 시 “그 어느 날”의 몇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사자의 피켈을 꽂아 둔 묘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죽은 자의 피켈이 치욕 속으로 죽어가도록 친구들이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나의 친구
그대에게
나의 피켈을 집어주게
피켈이 치욕 속으로 죽어 가기를 나는 바라지 않나니
어느 날 아름다운 페이스 가지고 가서
조그만 케룬을 쌓고
거기에 피켈을 꽃아 주게
------------------”
16시30분 해발837m의 백운대에 올라섰습니다.
하루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인수봉대피소로 내려서는 길에 단풍이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인수봉 대피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꽤 가팔랐습니다. 돌계단 길을 올라 37년 전 밤에 자주 묵었던 백운대탐방소에 다다라 우물물을 길어 한 모금 마셨습니다. 얼마 후 북한산성의 위문에 도착해 오른 쪽 위로 올라가 백운대에 올라서기까지 한동안 긴장을 풀지 못했습니다.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나이에 반비례하는 용기를 되살리는 길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백운대에 올라서자 조망이 압권이었습니다. 중후한 인상의 인수봉을 빼놓고는 눈에 보이는 다른 봉우리들은 거의다가 깎아지른 암봉이었고 각 봉우리에서 뻗어 나간 암릉 길도 모두가 날카로운 칼날능선이어서 온후한 산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만경봉 북사면을 수놓은 붉은 단풍이 절경이었고 몇 시간 전에 밟은 상장능선 길이 참으로 깔끔해 보였습니다. 김포 벌을 흐르는 한강의 물줄기가 흐릿하게 보였고 근교의 내놓으라 하는 명산들도 한눈에 잡혔습니다. 등 뒤의 땀이 식자 저녁시간의 냉랭한 바람이 부담스러워 정상을 출발했습니다.
18시30분 우이동 버스정류장에서 하루산행을 접었습니다.
하산 길도 그리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위문으로 내려서 인수봉대피소로 내려가는 길에 산악훈련을 나온 소방대원들을 만났습니다. 제 바로 앞에서 돌계단 길을 뛰어 내려가다가 발을 잘 못 내밀어 두 번을 구룬 젊은 대원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조심하는 데는 나이가 따로 없음을 느꼈습니다. 인수봉대피소에서 커피 한잔을 사든 후 하루재를 넘어 도선사 길로 내려서는 동안 어둠이 서서히 산자락을 에워쌌습니다. 도선사 탐방소에서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다가서는 땅거미를 보고 마음이 급해서가 아닌 가 했습니다. 우이동에 도착해 맥주 한 캔으로 목을 축인 후 버스에 올라 북한산산행을 마쳤습니다.
북한산의 옛 이름인 삼각산이 백운대와 그 좌우봉인 인수봉과 만경대의 세봉우리의 형세를 본 따서 지은 이름이 아니라는 이론도 있습니다. 한 카페에 실린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님의 글에 따르면 삼각산은 “서울산”을 한자로 나타낸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 고하니 '서울'의 본딧말이 '셔불'(세불)이다. 그러니까 '삼각'(三角)의 '삼'(三)은'세'(서)이고, '각'(角)은 '불'(뿔)로 곧 '서불→서울'이 된다.”
그렇다면 서울의 다른 옛 이름인 한산의 북쪽에 자리한 산을 북한산으로 부른다고 해서 별 문제가 있겠는가 싶었습니다. 논쟁의 초점이 어느 이름이 이 산을 잘 표현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일본사람들이 강점기에 지었다는데 모아 진다면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개명이야 말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은 과연 사람들의 이러한 논쟁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안했을 것입니다. 산 아래 사람들이 아무리 짓고 까불고 한다 해서 산이 바뀔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 생각하자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개명한다하여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저의 속 좁음이 새삼 부끄러웠습니다. 어디 한 산이라도 산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지어 가져본 적이 있었답니까? 공연히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이지 산이야 자기 이름이 어찌 불리든 전혀 괘념치 않고 이제껏 자기 자리를 잘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할 것입니다. 어느 스님의 법언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입니다.
<산행사진>
북한산 (1)
*산행일자: 2004. 4. 11일
*소재지 : 서울/ 경기 고양
*산 높이 : 837미터
*산행코스: 우이동-백운대-대동문-비봉- 진관사
*산행시간: 8시-16시3분(8시간3분)
*동행: 서울사대 이상훈 동문
70년대 초 대학시절 한때는 록 크라이밍에 마음을 뺏겨 북한산의 인수봉을 오르고자 토요일 밤이면 백운산장 인근에서 야영을 했었는데, 그 후로는 한수이남의 용인과 과천에서 살다보니 강북에 위치한 근교의 명산을 찾는데 인색해왔습니다.
오늘은 대학동문인 수원대의 이상훈 교수와 북한산을 찾았습니다.
우이동에서 시작하여 백운대를 오른 다음 비봉까지 주능선을 타고 전진, 진관사로 하산하여 8 시간만에 길고 긴 북한산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산의 명성이 그 산에 오르는 등산객의 인원수에 비례한다면 북한산이 국내 최고의 명산으로 입증되었을 오늘은 지난 달 관악산을 오를 때 인파에 밀려 고생하던 생각이 나 일찍부터 서둘러 아침 8시에 우이동의 백운교에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백운교에서 계곡을 따라 왼쪽 길로 10분여 올라 도선사 길을 찾았으나 못 찾고 다시 되돌아와 오른쪽으로 난 아스팔트길을 오르느라 20분 가량 지체되어 8시40분에야 들머리인 우이동 매표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매표소를 조금 지나 잠시 숨을 고른 후 하루재에 올라서니 크라이머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은 인수봉의 말끔한 자태가 저희들을 반기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밤에 이곳에서 야영을 한 듯 싶습니다. 인수봉은 록 크라이머들에는 최고의 도장이어서 늦게 오르면 부지런한 크라이머들에 코스를 선점당해 마냥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깔딱고개 길은 출입이 금지되어 옛 추억을 반추할 수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 대신 오른 하루재 길이 경사가 완만하여 편안했습니다.
10시 2분 북한산 최고봉인 해발 837미터의 백운대를 올랐습니다.
날씨가 맑아 멀리까지 보였고 기온이 올라가 얼마동안 정상에 머물러도 춥지 않아 좋았습니다. 북동쪽으로 선명하게 보인 제 고향의 고령산과 바로 맞은 편의 인수봉, 그리고 도봉산의 몇 봉들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저희들의 모습도 같이 담았습니다.
여기 백운대에서 시작하여 비봉을 조금 지나 진관사로 하산하는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주능선이 오늘 밟을 주 코스이고, 그 중 위문에서 청수 동암문까지 산길은 산성을 끼고 도는 산행이어서 느낌이 색다를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10시7분 백운대를 출발하여 종주등반 길에 나섰습니다.
총 길이 12.7키로의 북한산성의 첫 째 성문인 위문에서 오른 쪽으로 틀어 약 20분간에 걸쳐 백운대, 인수봉과 함께 삼각봉을 이루고 있는 만경봉을 트래파스, 만경봉과 노적봉의 중간지점인 안부에 도착하여 10시 42분 배낭을 풀었습니다.
오늘 이교수의 강의주제는 차이의 확인입니다.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그 차이가 식별되는데 생강나무는 산수유보다 줄기가 훨씬 매끄럽고 꽃송이가 조금 작아 보이며 잎에서 생강냄새가 난다는 점입니다. 집에 돌아와 야생화도감을 확인해보니 열매는 확실히 차이가 났습니다. 어렸을 때에 시골에서 동백나무라 불리는 나무의 열매를 짜내 얻어진 기름을 시골의 여인네들이 머릿기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그 나무가 생강나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인식하고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준다면 설사 그들이 나무라해도 불러주는 이의 세심한 배려에 퍽 이나 고마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세계와는 달리 인간사에서는 차이가 갈등의 단초가 되기 쉽습니다.
차이를 코드가 다른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리고 그 코드가 이 사회를 지배한다면, 차이는 분명 갈등을 잉태할 것입니다. 작금의 이 사회가 증폭시키는 대립과 갈등이 기실은 차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기에 차이의 지나친 강조가 우려되는 것입니다.
도선사길과 만나는 용암문을 조금 지나 만난 용암사지에서 길어 올린 샘물로 1리터들이 물병을 가득 채우고 포근한 흙길을 계속해 걸었습니다. 그 옛날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다는 동장문을 지나, 진달래능선과 만나는 대동문에 도착하니 4.19탑에서 올라온 등산객들로 주위가 붐볐기에 쉬지않고 내 다라 정릉계곡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에 위치한 보국문에 도착했는데, 이곳 또한 오르내리는 인파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곽 길에서 벗어나 비교적 조용한 산길로 접어들자 시장기가 느껴졌습니다.
12시 10분 호젓한 길옆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들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그미를 보낸 지 4년이 지난 저의 재혼을 궁금해하는 그에게 이제 재혼은 열정적인 사랑의 결실이 아니고 서로간 조건의 냉철한 결합이기에 쉽지 않음을 얘기했습니다.
12시 35분 다시 산행 길에 나섰습니다.
청정한 공기와 호젓한 산길이 좋아서 산을 찾는 제게는 어느 분이 켜 놓은 라디오 소리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서울의 도심과는 달리 이곳 북한산 높은 곳에는 진달래조차 제대로 피지 않아 봄은 왔어도 봄이 아니라는 “춘래춘 불사춘”이 실감되었습니다.
세검정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대성문을 지나 대남문에 다다랐습니다.
구기계곡으로 이어지는 대남문에서 문수봉까지 오름길은 위험하다기에 우측으로 트래파스하여 13시10분 오늘 산행 중 마지막으로 들러보는 7번째 성문인 청수동암문에 도착했습니다.
삼국시대에 신라, 백제와 고구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이곳에 백제가 서기 132년 북한산성을 토성으로 축성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숙종37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합니다. 북한산성은 그 길이가 총 12.7 키로이고 13개의 성문이 있으며 성안의 넓기가 2 백만 평에 이른다고 하니 북한산성의 축성이 그 당시에는 대역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파리의 세에느강이 각종 양식으로 세워진 다리의 야외박물관이라면, 오늘 오른 북한산은 분명 성문의 집합체인데, 아직도 많은 성곽이 개축 중이어서 세월의 때가 타지 않아 박물관이라고 부르기에는 낯간지러울 듯 싶습니다.
청수동암문에서 비봉으로 옮기는 중 어느 분에 물어 길섶에 피어있는 노란 꽃의 이름이 노랑패랭이 꽃으로 답을 얻은 기쁨은 끈질기게 여러 사람들에 꽃 이름을 물어 온 이교수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꽃이 정말로 노랑패랭이꽃인가를 도감에서 확인하는 것은 제 몫입니다.
14시 20분 위험하다는 비봉을 올라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유비를 확인했습니다.
한강유역을 확보하고자 경쟁한 세 나라 중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초석을 놓은 진흥왕 덕분이라면, 그를 기리는 사업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 쪽 아래로 승가사가 자리잡았고 오늘 하루 걸어온 능선길이 시작되는 백운대가 먼발치에 서 있었습니다. 사진 몇 커트를 찍은 후 바위 길로 내려갔는데 길이 위험해 잠시나마 공포의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14시 40분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진관사로 행했습니다.
향로봉을 넘어 구기터널로 하산하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오늘 아니면 들르기가 쉽지 않을 듯 싶어 진관사로 하산했습니다. 백운대에서 비봉까지 바위길이 계속되어 발에 무리가 갔을까 걱정했는데 흙길이 나타나자 반가왔습니다. 능선 길과는 달리 산속에서 만개한 진달래꽃이 봄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진관사에 조금 못 미쳐서 계곡에서 좌정을 한 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습니다. 오랜만에 해보는 탁족 세레머니로 온몸에서 피로가 가셨습니다.
16시 3분 진관사에 도착하여 수륙대제를 봉축올리는 현장을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매년 봄 가을로 수륙대제를 올릴 목적으로 세워진 진관사에서 오늘 올리는 대제는 “삼계만령 심류고훈 위국절사 충의장졸 군경 수륙공개 일체 유주무주 애혼 고혼영가 수륙대제“ 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는 데 요약하면 육지와 바다에서 싸우다 순국한 충의장졸의 영혼을 기리는 제사가 되겠습니다.
우이동에서 진관사까지 8시간의 긴 산행 중 만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여서 오늘은 인사를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붐비는 인파를 피하고자 아침 일찍 서둘렀지만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북한산이 담고 있는 포용력덕분이라면 조금 불편하다 하여 짜증낼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만약 북한산이 견뎌 낼 수 없어 오르는 이들을 내친다면 그들은 오 갈데 없는 주말의 고아가 될 것이기에 그리하지 않는 북한산이 마냥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을 올랐습니다.
북한산은 국립공원입니다. 국립공원의 설립목적이 북한산의 보존에 있을 터인데 분명 등산객을 제한하고 다른 산에 분산 유치하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산림청이 유수의 산악단체들과 손잡고 캠페인을 벌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웬만큼 높은 산이면 고즈넉한 산길이 많습니다. 저희들이 한번 운길산과 예병산을 이어서 종주하고자 하는 것은 북한산을 쉬게하고 사람을 기다리는 호젓한 산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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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A)
(원효봉)
*산행일자:2010. 1. 10일(일)
*산행코스:효자리-시구문-원효봉-북문-보리암-북한산성 입구
*동행 :쌍용제지 옛 사우 4명(서상원, 하철수, 이성현님)
<댓글>
- 히말라야
- 2010.01.12 10:58
- 100명산을 돌고 계시다구요??
저도 무심결에 100명산을 놓고 따져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딱 30%가 미답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답니다.
산 좁 돌아다닌다고 생각 했었는데... 30%씩이나???
원인분석(?)을 해 보니 경남, 전남 지방의 덜 알려진 산이었습니다.
교통 불편, 오가느라 길에 뿌리는 시간.. 큰 특징이 없고... 등
빠른 시간 내 안전하게 100명산 달성하시기 바랍니다.
- 시인마뇽
- 2010.01.12 20:40
- 우리나라 산하를 사랑하는 데는 1대간9정맥 종주를 빼논다면 명산100산 탐방이 좋은 방법 같습니다.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고 산 높이도 비교적 고루게 나누어진 편입니다. 아무려면 지방의 명산이 설악이나 지리만 하겠냐만서도 그래도 정이 가는 것은 나름대로 그 지방의 애환을 담고 있어서입니다. 하다보니 이제 통영의 미륵산과 홍도의 깃대봉만 남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