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2.팔일봉 산행기(1-2)
팔일봉(2)
*산행일자:2015. 3. 29일(일)
*소재지 :경기파주/양주
*산높이 :팔일봉463m
*산행코스:소사고개-팔일봉-송추C.C 정문-말구리고개
-동주골 선산-창만4리 사창마을
*산행시간:10시53분-16시47분(5시간54분)
*동행 :나홀로
육지에서 서로 떨어져 자리한 두 개의 산봉우리가 딱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짐을 우리 선현들은 진작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성호 이익선생께서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거대한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칭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반도의 산을 크게 1대간 9정맥으로 대별해 족보 식으로 정리해 놓은 ‘산경표’에 실린 어떤 두 봉우리도 예외 없이 한줄기로 이어지는 것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확인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산본의 수리산에서 파주의 선산까지도 한 줄기로 이어짐은 물론입니다. 수리산에서 한남정맥과 한남금북정맥을 차례로 따라가면 백두대간의 속리산에 닿게 됩니다. 속리산에서 북한 땅 분수령까지는 백두대간이, 분수령에서 한강봉/챌봉 중간의 감악지맥분기점까지는 한북정맥이 이어줍니다. 이 분기점에서 소사고개를 거쳐 한북감악팔일단맥의 분기점까지 2시간 가량 걸립니다. 이 분기점에서 팔일단맥을 따라 넉넉잡고 4시간가량 걸으면 부모님과 집사람이 묻힌 선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산줄기들을 모두 이은 총거리가 약 1,100Km 가량 되는 것은 한강을 빙 돌아서인데, 이중 진부령- 분수령-대성산 구간은 북한 땅을 지나야 하기에 아직 밟지 못했습니다.
어제 제가 소사고개에서 선산까지 산줄기를 타고가 성묘를 한 것도 두 산봉우리가 한줄기로 이어져 가능했습니다.
10시53분 소사고개를 출발했습니다. 구파발역에서 소사고개를 넘어 의정부로 가는 15-1번 버스를 기다리다 출발지가 구파발역에서 삼송역으로 바뀐 것을 안 것은 15-1번 버스가 삼송역을 출발하는 10시10분이 지난 한참 뒤였습니다. 별 수 없이 2만원을 내고 택시로 이동했기에 11시가 되기 전에 소사고개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정자에서 산행채비를 마친 후 들어선 산길이 팔일봉을 밑으로 도는 둘레 길이어서 곧바로 오른 쪽 위로 치고 올라가 능선 길로 올라섰습니다. 서쪽으로 진행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산 오름을 계속하는 동안 오른 쪽 산비탈에 자리해 하얀 숲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들과 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규모가 조금 큰 암자다 싶었던 왼쪽 산기슭의 작은 절이 다시 보니 어디에 내놓아도 빠질 것이 조금도 없는 어엿한 규모의 사찰로 변해 있었습니다.
12시1분 해발463m의 팔일봉에 올라섰습니다. 한북감악지맥이 오른쪽 옆으로 갈리는 팔일단맥 분기점에 이르자 신경수님의 ‘팔일단맥’표지기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6년전 이 길로 선산을 찾아갈 때 제 나름 ‘팔일단맥’으로 명명하고 한북감악팔일지맥 종주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남한 땅 산줄기를 누구보다 많이 오르내린 신경수님이 이 줄기를 팔일단맥이라 쓴 표지기를 보자 당시 제가 산줄기 이름을 엉터리로 지은 것이 아님이 확인되어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오름길 한 가운데 종전에 없던 수로가 새로 생겨 걸어 올라가기에 영 불편했습니다. 팔일봉에 올라 심호흡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2-3분 거리의 팔일단맥으로 복귀했습니다.
13시30분 송추C.C 정문을 지났습니다. 팔일봉에서 복귀한 팔일단맥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해 감사교육원으로 가는 길 안내판이 세워진 409m봉에 도착했습니다. 북동쪽으로 뻗어나가는 건너편의 감악지맥은 두 번 다 한겨울에 종주해 눈길을 걷느라 몰랐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나무가 별로 없는 산허리에 군사도로가 달랑 나 있어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409m봉에서 감사교육원 갈림길까지는 비교적 평평한 길이어서 마음 편히 걸었습니다. 갈림길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조금 내려갔다가 370m봉을 오른쪽으로 에돌고 나서 잠시 멈춰 진행방향을 점검한 것은 길이 익숙지 않아서였는데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놓고 본 즉 맞다 싶어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송추C.C로 내려가다 만난 부부의 이야기인 즉 올해는 너무 가물어 칡뿌리도 성하기가 예년만 훨씬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한 것은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팔일단맥 능선 길에서 서울근교 청계산에서나 볼 수 있는 흙먼지가 펄펄 나서였습니다. 송추C.C 정문 앞 아스팔트길을 지나 건너편 시멘트 길의 군사도로로 들어섰습니다. 10분 남짓 걸어 군사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산속 길로 들어가 점심을 들었습니다.
14시50분 말구리고개 마루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름 모르는 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제 주위를 돌아 봄이 온 것이 틀림없는데 활짝 핀 진달래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264.2m봉은 주위의 어느 봉우리보다 높아 제 고향마을에서도 올려다 보입니다. 이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기파른 길을 따라가면 왼쪽 아래로 소령원길이 갈리는 말구리고개로 내려섭니다. 말구리고개에 거의 다 이르러 여기저기 만개한 진달래를 보고 봄이 온 것이 완연하구나 했습니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도 여기 진달래와 별반 다르지 않을진대 약산이 널리 알려진 것은 소월 김정식 선생의 “진달래” 시 덕분일 것이고 그나마 이 고개를 이름을 일지 않은 것은 조선조 영조임금이 이 고개로 행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조의 생모 최숙빈의 묘소인 이 아래 소령원을 성묘 차 오셨다가 여기 말구리고개에 오르셨다 합니다. 이 고개에서 북쪽 먼발치로 바람에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쓸쓸해 보인다는 풍락산(風落山)을 가리키며 산세가 금(金)으로 병풍을 친 것 같으니 금병산(金屛山)으로 이름을 고치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혹시나 이 고개에서 금병산이 다른 작은 산봉우리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되어 북쪽을 유심히 바라본 즉 금병산은 뚜렷하게 잘 보였습니다. 백두대간 종주기를 가름한 이성부 시인의 시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에서 큰 산은 지리산을 지칭합니다. 지리산 정도의 거산이라면 큰 수레를 막아선 장자의 사마귀처럼 주변의 작은 산들이 한 번 가려볼까 하는 오기를 발동할 수 도 있겠지만, 해발300m도 안 되는 낮은 금병산을 가려보겠다고 나설 작은 산봉우리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에 생각이 미치자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며 혼자 웃었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저를 거인으로 잘못알고 앞길을 막는 작고도 귀찮은 사마귀는 어렸을 때 겪은 가난을 빼고는 달리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인생 굴곡은 오로지 제 능력부족이거나 준비부족 때문이었지 큰 산을 가리는 작은 산처럼 환경이 장애물이 된 적은 없었던 것만 보아도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16시47분 파주시 광탄면의 창만4리 형님 집에 도착했습니다. 말구리고개에서 된비알길로 헬기장이 들어선 봉우리에 올라 맞은 편의 박달산을 조감한 후 이내 자리를 떠 동주골 선산쪽으로 북진했습니다. 산기슭에 자리한 군부대 사격장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얼마간 진행하다 선영 위 능선에 이르러 오른 쪽 산 중턱으로 내려가 묘지 앞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번에 팔일단맥을 타보자고 마음먹은 것은 이 산에 먼저 자리 잡은 집사람을 만나보고 모처럼 차분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습니다. 먼저 조상님들 묘를 찾아 절을 올린 후 집사람 묘 앞에 이르자 40-50m가량 떨어진 아래 녘에서 여러 마리 개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집사람 묘앞에서 절을 한 후 봉분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즈음해 세 마리의 큰 개들이 저를 보고 짖다가 그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마리면 가져간 스틱으로 일전을 치러볼만한데 세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들면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묘지에서 철수하여 능선으로 되올라갔습니다. 눈치 없이 아무데서나 짖어대고 덤비는 녀석들의 무례함은 과연 개새끼소리를 들어도 싸지만, 그보다도 개를 풀어놓아 성묘를 망친 개 주인의 무례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혹시라도 개 주인이 이런 산속에 누가 찾아오랴 싶어 개를 풀어놓은 것이라고 변명하고자 한다면, “대학(大學)”에 나오는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반드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故君子必愼其獨也)”의 신독(愼獨)을 곱씹어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되올라선 능선을 따라 20분가량 서진하다가 오른 쪽으로 내려가 창만4리 사창동의 형님 집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밭으러 일하러 나가신 형님과 형수님을 기다려 인사를 드린 후, 금촌가는 버스에 올라 산본 집으로 향했습니다.
견공들의 소란으로 끊어진 대화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 덕분에 모두들 잘 있고 7월에 태어날 소중한 생명체도 큰 며느리가 잘 키우고 있음을 알려주고자 한 것과 가끔은 이곳으로 달려와 단 한 시간이라도 느긋하게 함께 머무르며 저 혼자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나마 쉼 없이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리해야 다음에 저 세상에서 만나서도 살아생전 때처럼 같이 수다를 같이 떨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산행사진>

- 범솥말
- 2015.04.0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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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과 이어지는 팔일단맥에 3분이 계신가봅니다.
잠들어계신 분들도 선배님의 방문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저는 전에 감악지맥하면서 사면으로 지나가야 할 것을 길을 잘못알고 헬기장 지나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26일뵙겠습니다.',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E93j&articleno=11770307&_bloghome_menu=recenttext&totalcnt=992#">신고
소령원과 이어지는 팔일단맥에 3분이 계신가봅니다.
잠들어계신 분들도 선배님의 방문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저는 전에 감악지맥하면서 사면으로 지나가야 할 것을 길을 잘못알고 헬기장 지나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26일뵙겠습니다.
26일 꼭 가야할 결혼식이 있어 산행은 같이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후에 대구로 내려가서 저녁자리는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자리에서 뵙겟습니다. 안산, 즐산하시기 바랍니다.
팔일봉(1)
*산행일자:2009. 4. 4일(토)
*소재지 :경기파주/양주
*산높이 :팔일봉464m
*산행코스:소사고개-팔일봉-송추CC정문-말구리고개-소령원-말구리고개
-창만4리 선산묘지-90.2봉-창만3리 문산천
*산행시간:8시20분-16시(7시간40분)
*동행 :나홀로
먼 길로 돌아 선영을 찾았습니다.
지난 가을 추락사고로 허리수술을 받은 후 다섯 달 넘게 재활에 힘써 이제는 7-8시간 산행을 해도 괜찮을 만큼 건강이 회복됐음을 돌아가신 분들에 고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지하에서 걱정하실 부모님과 집사람에 많이 쾌차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편한 길을 놔두고 일부러 팔일봉을 경유하는 14Km 가량의 산길을 오르내리며 고향 땅 선산을 찾아갔습니다. 배낭을 메고 먼 길을 걸어 성묘하러 온 저를 보고 모두들 안심하셨을 것입니다.
성묘란 고향을 찾아가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의 발로이기도 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잘 지켜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돌아간 곳은 대개가 그 분들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땅의 선산이기에 성묘를 통해 후손들의 귀소욕구가 저절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어 묻힌 곳이 바로 제가 태어나서 자란 파주 광탄의 고향 땅 선산이기에 한 해에 서너 차례는 성묘하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요즈음 들어 귀소의식이 약해진 것은 삶의 무대가 고향 땅에서 전 세계로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처럼 고향을 자주 찾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죽어서는 고향땅으로 돌아가 선산에 묻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의 귀소의식이 유별나서입니다. 그래서 이규태님은 그의 저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객사(客死)할 놈”을 최고의 욕이라 했습니다. 저 역시 담배를 끊기 전에 “식후불연(食後不燃)이면 우연득병(偶然得病)하여 졸지객사(猝地客死)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흡연을 강변했던 것도 기실 객사의 불효를 잘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조상들의 유별난 귀소의식을 잘 전해주는 의마총(義馬塚)이 제 고향 파주 광탄에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만주를 무대로 해 신흥세력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후금을 협공하고자 명나라는 조선조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임란 때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전공을 세운 충의공 이유길은 1619년 같이 참전한 김응하 장군과 더불어 전사했는데 죽기 며칠 전 그는 한삼을 찢어 “오월오일에 죽다(五月五日死)”라는 글자를 써서 애마의 갈기에 매어뒀습니다. 이 말이 전진(戰陳)을 빠져나와 충의공의 고향을 찾아갔으며 가족들은 한삼유필(汗衫遺筆)로 허총인 말무덤을 만들어주었다 합니다. 이 말무덤이 바로 광탄면 발랑리에서 발견된 의마총입니다. 충의공 이유길은 그의 몸뚱어리 대신 한삼을 보내어 죽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간 것으로 저는 이제껏 이보다 더 치열한 귀소의식의 사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 이규태님의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아침8시20분 39번 도로가 지나는 소사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송추유스호텔을 거쳐 소사고개를 넘어가는 의정부행 15-1번의 첫 버스가 아침7시30분에 구파발을 출발하는데 다음 버스는 10시10분에나 있어 첫 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서둘렀습니다. 98번도로와 39번도로가 합류하는 기산저수지 바로 위 소사고개에는 도로 양면에 방호벽을 설치해 놓아 고개 마루에 조금 못 미쳐서 하차했습니다. 도로 건너 정자에서 산행 준비를 마친 후 방호벽 바로 옆으로 난 산길로 들어서 북쪽의 팔일봉으로 향했습니다. 소사고개에서 팔일봉까지는 재작년 겨울 한북감악지맥 종주 차 한 번 걸었던 길인데다 경사도 그리 심한 편이 아니어서 보호대를 차고 올랐어도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소사고개 바로 위 산불감시초소를 지나자 우측사면에 희멀건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훤해 보였습니다. 왼쪽 아래로 사찰 육지장사가 보이는 능선 길을 조금 더 지나 한북감악지맥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른 시각이 8시56분이었습니다.
9시25분 해발464m의 팔일봉에 올라섰습니다.
갈림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제가 사는 산본의 수리산과는 달리 헬기장에 올라서기까지 만개한 진달래꽃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한강을 경계로 한 남과 북의 위도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박무로 오른 쪽 가까이에 자리한 불곡산이 윤곽만 잡힐 뿐 암벽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헬기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 교통호가 파진 봉우리에 다다랐고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십여m 옮겨 팔일봉에 오르자 감사교육원이 세운 정상표지목이 보였습니다. 정상 공터에 소나무와 참나무가 같이 들어선 팔일봉은 아직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갓진 산으로 주로 한북감악지맥 종주 객들이 짬을 내어 들러보는 봉우리입니다. 여기 팔일봉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가 파주 광탄의 문산천에 이르는 약 14Km의 산줄기를 따라 걸어야하는데 “다음”이나“네이버”는 물론 전문적인 산 사이트인 “한국의 산하” 등 어디에도 이 산줄기를 종주한 분들의 산행기가 올라와 있지 않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알바를 면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사과를 까든 후 진행방향을 잡았습니다.
고송들이 즐비한 내림 길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 머뭇거리지 않고 그 길로 내려선 것이 이번 산행을 반시간 가량 지연시킨 알바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9시37분 팔일봉을 출발해 십 수 분을 내려가다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육지장사가 그리고 오른 쪽으로 마장저수지가 표시되어 있는 표지목을 보고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한 것은 지도에 왼쪽 아래 자리한 것으로 나와 있는 마장저수지가 오른 쪽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팔일봉 정상으로 되올라가는 길이 된비알 길이어서 허리에 찬 보호대가 발을 위로 옮겨 놓을 때마다 다리에 걸려 많이 불편했습니다. 10시10분 다시 오른 팔일봉에서 한북감악지맥을 종주하는 한 분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지도를 꺼내 본 후 방금 되돌아 온 길이 맞다 했습니다. 그 분은 자리를 뜨고 다시 지도를 꺼내보니 올라야 할 409봉은 북서쪽에 있는데 제가 내려간 길은 남쪽 길이었고 다시 보아도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아예 없어 이 봉우리에서 갈리는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앞서 지나온 교통호 봉우리로 되돌아가자 409봉으로 가는 길이 이 봉우리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졌습니다. 팔일봉에서 갈리는 것으로 나와 있는 지도만 보고 진행했다가는 저처럼 길을 잘못 들기 십상이어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는 곳입니다.
11시35분 367번 도로가 지나는 송추CC정문 앞에 내려섰습니다.
출입금지 구역으로 사격 중 사고가 나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군부대 경고판이 바닥에 내 팽개쳐진 교통호 봉우리에서 북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70m가량 고도를 낮추어 안부에 이르자 왼쪽 아래로 감사교육원의 하얀 건물이 보였습니다. 안부에서 조금 올라가 10시28분에 다다른 봉우리가 “헬기장/진교관”표지판이 서있는 409봉이었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20분가량 남서쪽으로 진행해 감사교육원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기까지 능선 길이 편안했습니다.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난 송추CC 가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흐릿했습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올라선 370봉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십 분여 쉰 후 11시 18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북서쪽으로 십 수분을 내려가 송추CC 정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왼쪽 아래로 쇠장이 길이 나있고 오른 쪽으로 송추CC가 들어선 정문 앞을 지나 시멘트 군사도로로 올라갔습니다.
송추CC로 내려가는 중 산 위를 낮게 날며 “산불조심” 안내방송을 하고 있는 산림청의 헬기를 보자 지난 10월 용화산에서 저를 구조해 살려준 119산악구조대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이때처럼 우리나라에 고마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잠시 방심하다 바위에서 떨어져 꼼짝 못하는 저를 구한 후 헬기를 불러 춘천의 병원으로 옮겨준 119산악구조대가 없었다면 저는 산속에서 하루 밤을 넘기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에 119구조시스템을 구축하고 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가동하는 이 나라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백만 명이 훨씬 넘는 백성들이 굶어죽었어도 몇 천억 원이 들어가는 미사일을 발사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가 이 사고를 당했다면 과연 적시에 구조될 수 있었을까 생각하자 제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럽고 고마웠습니다. 인민들 목숨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 그럴 돈도 없는 그 나라에서 이름 없는 한사람의 인민을 구하기 위해 헬기를 띠운다는 것은 턱도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치는 최고의 덕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등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고 이것들이 바로 최고의 덕이라면 저는 지금 최고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12시31분 십자안부인 말구리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시멘트 길이 끝나자 비포장군사도로가 폐타이어로 만든 군사시설물까지 이어졌고 284.2봉으로 추정되는 이 시설물에서 좁은 산길로 들어서 얼마고 걷자 오른 쪽 아래로 잘 지어진 송추CC의 하우스가 보였습니다. 가파른 비알 길을 걸어 군용벙커 환기구가 밖으로 나와있는 꾀꼬리봉에 오르자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삼각점이 보였습니다. 고도계와 등고선눈금으로 보아 해발고도가 330m가량 될 것 같은데 이 높이라면 금병산보다 30m는 족히 더 높은 것입니다. 수십m 서쪽의 “반환점”표지판이 서있는 봉우리로 옮겨 말구리고개로 내려서는 중 길바닥에 딱 한 송이 꽃을 피운 진달래를 만나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왼쪽의 소령원과 오른 쪽의 토란동 길이 갈리는 십자안부 말구리고개에 이르자 북쪽으로 금병산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말구리고개로 내려서자 1959년 봄 초등학교 5학년 때 저 아래 소령원으로 소풍 왔다가 이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간 일이 생각났습니다. 이번에 소령원을 들르면 꼭 반세기만의 일이어서 주저하지 않고 왼쪽 길로 내려섰습니다.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 홍살문 앞에 다다르자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 왕릉의 정숙한 분위기를 깼습니다. 엄격히 말해 소령원은 왕릉이 아닙니다. 조선조 왕족의 무덤은 능-원-묘(陵-園-墓)로 대별됩니다.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 한 했으며,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들은 원(園)이라 불렀고, 왕족 중에서도 왕세자가 아닌 대군의 무덤은 묘(墓)라고 칭했습니다. 소령원은 여기 묻힌 숙빈 최씨가 숙종임금을 모시기는 했어도 왕비가 아니었기에 원으로 불린 것입니다. 숙빈 최씨가 낳은 영조임금이 소령원을 왕릉으로 격상시키고자 무진 애를 썼으나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에 의해 폐세자로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로 불렸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영우원과 현릉원으로 격상된 후 다시 융릉(隆陵)으로 추숭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한 해 영조임금께서 생모의 유해를 모신 여기 소령원을 찾아 오르는 중 만난 한 백성에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백성이 요 아래 능골에 사는 김 아무개라고 아뢰었다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영조임금께서 조정 대신들 어느 누구도 능이라 부르지 않는 것을 일개 무지렁이 백성이 감히 능골이라 말하는 것이 너무 고마워 이 백성을 능골김씨라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잔디가 잘 가꾸어진 묘역은 다시보아도 여전히 넓고 시원했습니다. 홍살문에서 어도를 밟아 정자각에 이르자 활짝 열린 문사이로 사초지가 시원스럽게 열렸고 상단의 봉분이 왕릉만은 못해도 꽤 크게 보였습니다. 능원에 올라 봉분을 사진 찍은 후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자 동쪽으로 팔일봉(?)이 의젓하게 보였고 남쪽으로 소령원의 원찰 보광사를 품고 있는 고령산이 자리했습니다. 묘역을 둘러본 후 다시 말구리고개로 올라섰습니다. 저보다 훨씬 앞서 소령원에서 말구리고개로 올라선 분이 바로 영조임금이십니다. 이 고개에 올라서서 바라다본 봉우리가 낙엽이 떨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하여 풍락산으로 불리는 것을 금으로 병풍을 친 것 같다며 금병산으로 고쳐 부르게 한 분이 바로 영조임금이십니다. 소령원과 관련해 전해지는 두 일화 모두 영조임금 효심을 드러내는 것들이었으니 숙빈 최씨 살아생전에 등극하시지 못한 것이 영조임금으로서는 못내 아쉬웠을 것입니다. (이 부분의 일부 내용은 장영훈 님이 지은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따왔습니다.)
14시50분 말구리고개 출발 한 시간 만에 선영 앞에 다다랐습니다.
50년 전 이 고개를 넘을 때 약산의 연분홍 꽃들 못지않게 화사했던 진달래꽃들이 이번에는 철이 일러서인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개 마루에서 정서 방향으로 가파르게 오른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진행했습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자 철조망이 쳐진 군사도로가 나타났습니다. 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얼마간 걸어가다가 14시 반 경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 산줄기가 끝나는 문산천으로 향했습니다. 20분간 더 걸어가다 오른 쪽 아래로 내려가 참묘를 했습니다. 작년 가을 추락사고로 다친 허리가 신통치 않아 지난 구정 때에는 선산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집사람 묘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자식들과 함께 왔을 때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억지로 참았지만 이번에는 저 혼자였기에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이 눈물은 살아있는 동안 집사람 속을 썩인데 대한 참회의 눈물이고 또 추락사고로 죽을 뻔 했던 제게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도록 지하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빌었을 집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었습니다.
16시 정각 파주 광탄의 창만3리 앞 문산천으로 내려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선영에서 15분을 머무른 후 다시 능선으로 올라와 서쪽으로 이어지는 군사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사창동에서 보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의 성황당 돌무덤이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른 쪽 아래 창만4리 사창동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고향의 산줄기를 따르는 능선 길을 빼놓지 않고 걸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길이 넓고 오르내림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 MTB코스로 딱 좋다고 널리 알려진 길입니다. 소사고개에서 문산천까지 거리가 16Km 가량 된다는 것도 산행기가 아니고 MTB 라이딩 후기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나지막한 90.2봉에서 군사도로는 끝났고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문산천 앞에 다다랐습니다. 한북정맥의 한강봉에서 시작되는 문산천은 전장이 30Km에 이르는 임진강 제1지류이고 한강의 제2지류입니다. 탁해 보이는 문산천을 사진 찍고 나서 반시간 거리의 형님 댁으로 옮겨 저녁을 들은 후 산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묘로 선산가는 길을 새롭게 냈습니다.
차로 가는 길보다 제게는 이 길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귀소란 돌아가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 그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돌아가신 분들과 오랜 시간 묵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산길이 찻길보다 훨씬 좋을 것 같았습니다. 소사고개에서 곧바로 선산으로 간다면 다섯 시간이면 족할 것입니다. 앞으로 마음의 행로로도 나무랄 데 없는 새로 낸 산길을 걸어 자주 성묘 길에 오를 것 같습니다. 귀소행위란 의식에 앞선 본능의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추기:아래 글은 해남일보의 편집인이자 호남대외래교수인 김원자님이 2012년9월10일 해남일보에 올린 글 "충의공이유길"에서 따왔습니다.
"한편 '三月 四日 死'란 피 묻은 한삼자락을 갈기에 맨 이유길 장수의 말은 진중을 뛰쳐나와 주인의 뜻을 알았음인지 산과 강을 건너 3일 동안을 달려 주인이 집에 도착했고 구슬피 울다 숨을 거두었다. 가족들이 죽은 말의 갈기에 메여있던 혈삼(血衫)을 찾아냈는데, 동생 되는 별좌공(휘 復吉)이 압록강까지 가서 그 혈삼에 공의 혼을 불러 와 선산(파주 광탄면 발랑리)아래 그 혈삼을 묻어서 장사 지냈다. 시체가 없는 무덤 곧 '혈삼무덤'의 주인공이 이유길 장수이며 그 충성스런 말도 혈삼무덤 아래 묻어 주고 '말 무덤'이라 불러 오다가 '義馬塚'이라는 묘지석까지 세워 후세에 전하고 있다.(延安李氏宗報 1987년 봄 호 통권 제4호)"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