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4.금학산 산행기
금학산 산행기
*산행일자:2013. 5. 4일(토)
*소재지 :강원 철원
*산높이 :금학산947m, 보개봉752m, 고대산832m
*산행코스:철원여고-상투바위-금학산-대소라치
-보개봉-고대산-대광봉-제2코스-신탄리역
*산행시간:11시26분-20시20분(9시간4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 6명
제가 강원도의 여러 시 군 중에서 철원을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것은 원래 철원이 제가 태어난 경기도 땅이었는데 조선조 세종 16년인 1434년에 강원도로 이관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철원은 경기도 땅과 맞붙어 있으며, 제 고향 경기도 파주와 마찬가지로 휴전선이 지나고 있어 한국전쟁의 역사적 상흔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곳입니다. 경기도와 맞붙어 있기는 춘천시도 마찬가지이지만 도청이 들어앉은 강원도의 대표도시여서 철원만큼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후백제와 더불어 통일신라를 삼분했던 궁예가 그가 세운 새 나라 '마진'의 도읍지를 서력905년에 송악에서 이곳 철원으로 옮긴 것은 그가 도참설을 믿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나름대로 지리적 이점도 꼼꼼히 따져보았을 것입니다. 철원은 강원도에도 이런 평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드넓은 평원인데다, 북위38도선의 바로 위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철원군청이 홈페이지에 적어놓은 대로 한반도의 심장부로 불릴만한 곳입니다. 궁예가 이곳 철원으로 천도한 후 더욱 세력을 크게 떨쳐 삼한 땅의 절반을 차지한 때도 있었으니 그가 망한 것은 철원에로의 천도 때문이 아니고 그의 포악성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11시26분 철원 동송의 철원여고 앞을 출발했습니다. 제가 탄 버스가 정류장마다 다 멈추는 완행 버스여서 동서울터미널에서 동송까지 무려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철원여고 앞에서 일행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금학정으로 옮겨 하루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정자 오른 쪽으로 난 길로 조금 올라 다다른 능선에서 왼쪽으로 옮겨 바로 옆 임도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이 매우 가팔라 천천히 걸어 오르면서 동쪽 아래 동송시내와 철원벌을 조망했습니다. 저 아래 동송이 철원군청이 신철원으로 이전하기까지 군청소재지였기에 오래된 철원여고가 동송에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13시30분 산 중턱의 매바위에서 점심식사를 끝냈습니다. 철원여고 출발 1시간이 조금 지나 올라선 매바위 옆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을 들었습니다.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조금 덥기는 했지만 동문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느라 반시간 남짓한 점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습니다. 이름 그대로 매의 부리를 닮아서인지 매섭고 날카롭게 보이는 매바위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정상을 향해 남진했습니다. 위험해 보이는 바위 길은 데크 계단이 설치돼 한 걱정 놓았습니다. 얼마간 더 걸어 벙커를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감돌아 등 뒤에 땀이 식는 듯 했습니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봄이 늦게 찾아와서인지 진달래꽃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고 야생화들도 이제야 제철을 만난 듯 제 꽃 색을 내었습니다.
14시57분 해발947m의 금학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벙커 위 능선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바꾸어 조금 더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인 넓은 공터의 헬기장이 나타났습니다. 사방을 휘둘러보니 궁예가 도읍지로 정한 동쪽의 철원벌 너머로는 이렇다 할 산줄기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서쪽 건너편으로 고대산에서 지장산을 잇는 커다란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산행대장을 맡은 회장이 대다수의 대원들이 원하는 대로 산행계획을 고대산과의 연계산행으로 계획을 바꾸어 갈 길이 바빠졌습니다. 헬기장에서 3-4분 거리의 정상봉을 후딱 다녀온 후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을 내려갔습니다. 군부대 훈련장으로 쓰였을 것 같은 넓은 안부가 대소라치 고개로 대전차장애물을 지나 오른 쪽 아래로 나있는 비포장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이번 산행의 출발지인 철원여고에 이르는 것으로 지도에 나와 있습니다.
16시50분 해발752m의 보개봉에 올랐습니다. 금학산과 보개봉사이 한 가운데의 넓은 안부를 가로질러 산길로 들어선 후부터 가파른 오름길이 시작됐습니다. 200m가량 고도를 높여야 이를 수 있는 보개봉을 오르는 일이 이번 산행의 마지막 오름길이라 생각하고 비축해놓은 에너지를 모두 동원해 올랐습니다. 이미 금학산 정상에 오르려 된비알 길을 경험해서인지 대소라치-보장봉의 오름 길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헬기장 갈림길’의 표지목이 세워진 보개봉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고대산을 향해 내닫는 저희를 잠시 멈춰 세운 것은 얼레지꽃이었습니다. 떼 지어 꽃을 피운 얼레지들이 치마를 들어 올리고 바람 앞에 하느작거리는 모습이 마치 홍학의 군무를 빼어 닮은 듯 했습니다.
18시12분 해발832m의 고대산에 올랐습니다. 보개봉에서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2.4Km 거리의 능선 길은 오르내림이 크지 않아 마음 편히 걸었습니다. 고대산을 430m 남겨둔 헬기장은 돌들이 나뒹구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용도가 폐기된 듯 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자 어둠이 감지되기 시작해 떼 지어 피어 있는 노랑꽃의 야생화를 보고도 후딱 사진 한 장 찍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산성이라 하기에는 키가 너무 낮은 돌무더기를 지나 고대산 정상에 올라서자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습니다. 넓은 정상은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고자 젊은 산객들이 형형색색의 텐트를 쳐놓아 활기가 넘쳐흘렀습니다. 해넘이가 얼마 남지 않아 모두가 하산하고 바람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적막한 정상에 야영객들이 모여든 것은 군부대가 철수한 후 시멘트바닥을 데크로 교체하고 나서일 것인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20시22분 신탄리역에서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고대산 정상에서 서쪽 능선을 따라가 다다른 810m봉에 정자가 서 있어 남은 과일 꺼내 마저 들었습니다. 정자에서 신탄리로 내려가는 빠른 길은 칼바위를 지나는 B코스로, 몇 번 지난 길이지만 암릉길이어서 어둡기 전에 통과하고자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서녘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고도 초조하지 않은 것은 여럿이 같이 해서인데, 저 혼자였다면 캄캄하기 전에 산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중간에 쉬지 않고 들입다 내달렸을 것입니다. 랜턴을 밝힌 지 20여분 후 산을 빠져 나왔고 시멘트 길로 들어서자 사방은 이내 칠흑같이 깜깜해졌습니다. 큰 길을 따라 내려가 신탄리역에 도착하자 기차가 10분 전에 떠나 50분을 기다려야 해, 20분여 기다렸다가 연천과 전곡을 지나는 버스에 올라 동두천역으로 나갔습니다.
철원은 한국전쟁으로 다시 찾은 수복지구입니다. 해방 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라졌을 때 철원은 38도선 바로 위에 있어 북한 땅으로 들어갔었습니다. 북한이라고 강원도의 다른 데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드넓은 곡창지대를 선선히 내주었을 리는 만무했을 터이니 이 땅을 되찾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을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952년 우리 국군이 중공군과 맞서 혈전을 치른 바로 백마고지전투입니다. 백마고지는 철원 북쪽에 위치한 해발395m의 산봉우리입니다. 우리 국군 제9사단은 10여 일 동안 12차례의 쟁탈전과 주인이 7번이나 바뀌는 혈전을 치른 끝에 중공군을 격퇴하고 이 고지를 차지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8천 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됐으며, 우리 국군도 500명이 전사했습니다. 철원 땅이 소중한 것은 이래서입니다.
이번에 오른 금학산과 고대산 모두 백마고지의 혈전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더 멀리로는 패장 궁예의 비참한 모습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또 한 때 철원 땅을 지배한 북한의 ‘수령 동지’들이 얼마나 북한 주민들을 못살게 굴어왔는가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백마고지를 확보해 철원을 수복시킨 우리 국군장병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오늘의 번영이 증명해줍니다. 이 두 산이 제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대한민국은 목숨 걸고 지킬 만한 나라이다’가 아니겠는 가 생각하면서 산행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