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마뇽 2014. 6. 22. 00:39

추읍산

 

 

 

                                       *산행일자:2014. 6. 6일(금)

                                       *소재지 :경기양평

                                       *산높이 :추읍산583m

                                       *산행코스:원덕역-1코스들머리-묘지-추읍산-샘터

                                                      -2코스날머리-원덕역

                                       *산행시간:10시40분-16시55분(6시간5분)

                                       *동행 :경동고24회/29회 7명

                                       (김종화부부, 이기후, 김주홍, 조현, 우명길, 29회정병기)

 

 

 

  이번 추읍산 산행으로 양평 일대의 이름 난 산들은 거의 다 오른 것 같습니다. 양평에서 내로라하는 하는 산들은 모두 다 한강기맥과 이 기맥에서 분기한 몇 몇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양평의 최고봉인 용문산과 주위 명산들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3년의 일입니다. 그해 용문산을 비롯해 유명산, 소구니산, 중미산, 어비산, 백운봉, 함왕봉, 도일봉, 중원산, 천사산, 봉미산, 대부산과 청계산 등 13개 봉우리를 올랐고, 2004년에 통방산과 삼태봉, 2005년에 소리산, 2006년에 보리산, 장락산과 왕터산, 그리고 2013년에 옥산과 단월산을 올랐으며 이번에 마지막으로 추읍산을 올라가 이제껏 제가 오른 양평의 산들은 모두 24개봉에 이릅니다.

 

 

 

  경기도의 명산들이 거의 다가 여기 양평군과 가평군, 그리고 포천군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이 3개 군을 장대한 산줄기가 지나가서입니다. 가평과 포천은 북한강 이북의 지역이어서 한북정맥과 그 지맥들이, 남한강과 북한강 사이에 자리한 양평은 한강기맥과 이에서 분기한 산줄기들이 지나고 있습니다. 경기도 제3의 고봉인 용문산을 일궈낸 양평군(楊平郡)의 지명은 구한말인 1908년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근군(楊根)의 최초명칭은 고구려 때의 항양군(恒陽郡)으로 신라시대에 빈양(貧陽)으로 바뀌었었다가 고려 공민왕 5년에 이르러 양근군(楊根郡)으로 개칭되었으며, 지평(砥平)은 고구려 시대에 지현현(砥峴縣)이었던 것이 신라 때 지평(砥平)으로 고쳐 불렸습니다. 이 지역 지명의 변천이 두 지역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신라로 복속된 땅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양평하면 떠오르는 것은 ‘지평리전투’입니다. 우리 민족의 최대비극인 한국전쟁이 청정지역 양평을 비껴가지 않아, 양평의 한 축을 맡았던 지평 또한 혹독하게 전쟁을 치러내야 했습니다. 온창일 박사는 그의 저서 “한민족전쟁사”에 지평리전투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1951년 2월 횡성전투에서 한국군을 공격하여 동부전선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공산군은 원주에 대한 압력을 가하면서 지평리를 점령하여 전과를 확대하려 했던 데서 지평리전투는 시작됩니다. 지평리를 점령하려는 공산군의 기도는 이 지역을 고수하려는 유엔군의 의지에 맞부딪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됩니다. 지평리전투가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산군이나 유엔군 모두 지평리의 전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였습니다. 지평리는 서울-양평-횡성을 잇는 도로와 여주 -지평리-홍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교차점으로 철로 중앙선의 한 지점이어서 공산군은 여기를 점령하여 미 10군단의 후방과 9군단의 우측방을 위협하여 유엔군의 공세를 좌절시키려했고, 유엔군은 이곳을 고수하여 서부전선에서 저항하는 공산군의 측방을 위협하고 이를 포위할 수 있는 요충을 확보하여 차후 공세를 취하려 했습니다. 2월13일-16일 나흘 간 치른 지평리전투에서 미23연대 전투단은 중공군 5천여명을 사살해 승리로 이끌었는데, 미군의 피해는 사망52명, 부상259명, 실종42명으로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지평리전투가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술적 승리로 유엔군의 사기와 전의를 고양시킨 전투로 기록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10시40분 원덕역을 출발했습니다. 원덕역에서 하차해 대합실로 내려가자 전혀 생각지 못한 김종화동문 부부가 보여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전날 김주홍동문과 통화하다 이번 산행계획을 전해 듣고 이리로 달려온 이들 부부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원덕역을 출발해 파릇한 모들이 가지런히 자라는 논 뜰을 지나 신내천을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두래마을에서 하천을 따라 동쪽으로 40-50m가량 옮겨 ‘추읍산등산안내도’가 세워진 들머리에 도착해 합동사진을 찍은 후 11시가 다되어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땅에서 후끈거리는 지열을 내뿜지 않는데다 오름 길이 그늘져 그다지 더운 줄 몰랐습니다. 척추협착증 증세로 달 반 넘게 쉰 두 다리에 혹시라도 무리가 가서 다시 도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최대한 보폭을 작게 하고 아주 천천히 남동쪽으로 나 있는 능선을 따라 올랐습니다.

 

 

 

  12시24분 ‘원덕역2.2Km/산림욕장0.2Km/원덕역5.2Km’ 갈림길을 지났습니다. 들머리를 출발한지 1시간가량 지나 해발280m(?)대에 이르자 맨살이 드러난 초라한 묘지가 보였습니다. 봉분의 흙이 반쯤은 깎여 내렸고 잔디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묘지주인이 궁핍하게 살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라면, 다른 묘지들도 언제고 저 묘지와 다를 바 없이 될 터인데 굳이 호화묘지를 고집할 이유가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 묘지에서 18분을 걸어올라 다다른 능선삼거리는 ‘원덕역2.2Km/산림욕장0.2Km/원덕역5.2Km’의 표지목이 세워진 3코스 갈림길로 지난 봄 24회 산모임인 동산회에서 하산코스로 잡은 길이 바로 3코스였다 합니다. 용문산을 오가면서 바라다본 추읍산이 삼각뿔처럼 뾰족해 보여 오름 길이 상당한 된비알 길이겠다 했는데 천천히 걸어올라가서인지 여느 산보다 더 가파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13시48분 해발583m의 추읍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3코스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 그늘진 곳에서 일행 7명이 빙 둘러 앉아 함께 점심을 들었습니다. 김종화 부부가 이곳 양평 땅에다 직접 재배한 상추와 밥을 넉넉히 싸 갖고 와 점심상이 푸짐한데다, 정상이 0.8Km 밖에 남지 않아 모처럼 느긋하게 점심을 들었습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 왼쪽 아래로 2코스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2-3분을 걸어 개활지인 헬기장에 이르자 비로소 목덜미에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쉼터를 지나 올라선 정상에는 표지석과 더불어 이 산의 이름이 어디서 유래됐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함께 세워져 있었습니다. 남서쪽 멀리 이포대교가 흐릿하게 보이자 최근 들어 4대강 개발 반대론자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이 왜인지 새삼 궁금했습니다. 4대강 공사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문제투성인지는 앞으로 두 서너 해 더 한발과 홍수를 다 겪고 나면 저절로 밝혀질 것이기에 그 때가야 개발이 잘된 것인지 아닌지를 사실에 근거해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문산의 산줄기를 카메라에 옮겨 담기에 적당한 곳은 추읍산과 유명산입니다. 백운봉-용문산-봉미산으로 이어지는 용문산 줄기의 북사면은 유명산이, 백운봉-용문산-도일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남사면은 추읍산이 최고의 전망처입니다. 유명산은 용문산과 한 줄기로 이어져 새끼 봉우리라 불릴 만하지만, 추읍산은 두 산 사이에 한강 제1지류인 신내천이 흘러 용문산과 직접적으로 연이 닿지 않는 것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노라니 용문산(龍門山)을 보고 읍(挹)을 한다하여 이 산을 추읍산(趨挹山)으로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그다지 허황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과장됐다 싶은 것은 양근, 지평, 여주, 이천, 양주, 광주, 장호원의 7개 읍이 보인다하여 칠읍산(七邑山)으로도 불렸다는 이야기로, 투시안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산에 가린 광주나 양주가 보일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15시20분 약수터를 지났습니다. 정상에서 2코스 갈림길로 되돌아가는 길에 헬기장 전 쉼터에서 반시간 가량 쉬면서 한가로이 시간을 낚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산행의 주목적이 저의 몸 상태점검에 있음을 모두 양해해 주어서였습니다. 2코스 갈림길에서 샘터로 하산하면서 일행들이 이번 산행에 특별히 후한 점수를 준 것은 산행코스 거의 다가 그늘져 더운 줄 모른 데다 모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산행할 수 있어서인데, 이에는 앞으로의 산행이 실버산행이기를 바라는 뜻이 숨어 있다 하겠습니다. 하산 길이 경사가 조금 가파르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샘터에 도착했습니다. 오랫동안 가물어 샘물은 떠 마실 수 없었지만 앞이 탁 트여 신내천 물줄기가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16시55분 원덕역에 도착했습니다. 장마철이라면 물이 콸콸 흘러내렸을 계곡에서 물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새들이 재잘대는 소리는 여전해 산속이 삭막하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 농가를 지나는 중 아기똥풀을 사진 찍으면서 협착증으로 달 반가량 산을 다니지 못해 야생화에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가도로 아래 등산안내판이 세워진 2코스 날머리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고른 후 바로 앞 신내천을 한참 위쪽 다리로 건너지 않고 몇 몇 돌을 징검다리 삼아 바로 건넜습니다. 2코스 날머리를 출발한지 40분가량 지나 도착한 원덕역에서 김종화 부부와 헤어지고, 청량리역으로 돌아가 이규성 동문과 저녁을 함께 하는 것으로 주읍산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양평군의 이름난 산 중에서 미처 올라가보지 못한 산을 찾아 오르는 것은 이번 산행이 마지막이다 싶습니다. 제가 이 산행기에 양평군의 지명유래와 지평리 전투를 상술한 것은 이 때문으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양평군청 홈페이지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지명의 변천을 하나하나 찾아 정리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명을 제대로 알려면 국어학은 물론 역사, 지리, 설화, 한문 등에 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명이 대대적으로 정리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후인 경덕왕 때로, 통일 전 불리던 우리 고유의 언어로 된 지명이 한자로 다시 지어졌다는 것이 통설인 것 같습니다. 경덕왕 이후에도 행정구역 변천으로 지명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요즘도 바뀌고 있습니다. 추읍산이 자리잡은 지평면(砥平面)도 2006년 지제면(砥堤面)을 개명한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혹시라도 우리나라 지명변천에 관심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도수희 교수의 “한국지명 신연구”를 한 번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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