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화명소 탐방기2(전적지)
강화명소 탐방기2(전적지)
*탐방일자:2014년10월27일(월)
*탐방지 :인천시강화군소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및 삼랑성
*동행 :군포중앙도서관 역사인문학교실 이근우선생님 및 회원
우리 역사에 강화도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의 고종임금이 당시 실세인 무신 최이의 강권에 못 이겨 2백년 도읍지인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부터입니다. 북쪽으로 수도 개경이, 서쪽으로 한강 입구의 문수산성이 자리한 강화도로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은 손돌목의 급류로 강화해협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바다 쪽으로 험한 교동도와 석모도가 전초기지 구실을 톡톡히 하는 강화도는 과연 천혜의 요새로 전혀 손색이 없는 섬이어서 고려가 천도를 한 것입니다.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가기까지 38년간을 고려의 수도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고려조가 몽골에 항복한 후 삼별초가 이 섬에 남아 얼마간 항전을 이어간 것도 모두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라는 지리적 강점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강화도로 피신하는데 성공했다면 쉽사리 청나라에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청나라는 몽골과는 달리 한양으로 쳐내려오기 전에 귀순한 명의 장수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여러 척의 배를 건조했을 뿐만 아니라, 강화도에서의 해전에도 충분히 대비를 했습니다. 병자호란 때 백성들이 겪은 고초가 고려의 민초들이 몽골로부터 겪은 그것보다 그나마 덜했던 것은 더 이상 강화도가 임금의 안전한 피난처가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백두산을 머리로 하고 제주도를 방석으로 삼는 형세의 지형을 갖고 있다 합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심장부는 수도 서울입니다. 서울이 우리 몸의 심장부라면 강화도는 간(肝)에 해당되는 한반도의 요충지입니다. 이런 강화도가 또 다시 본격적인 전장(戰場)이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입니다. 1866년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1871년 미국이 신미양요를, 그리고 1875년 일본이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를 침공했습니다.
이근우 선생님이 이끌어가는 군포중앙도서관의 역사인문학교실은 매주 월요일 오후에 두 시간씩 역사는 물론 문화와 예술분야에 관한 강좌를 열고, 틈틈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탐방프로그램도 가동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탄탄한 인문학교실입니다. 이번에 역사인문학교실에서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와 삼랑성 등 강화도의 전적지를 탐방지로 선정한 것은 이들 네 곳에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및 운양호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고자 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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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지진(草芝鎭)
회원 분들과 함께 대형버스에 올라 군포의 산본시내를 출발한 것은 아침 9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강(鹽河江)의 남쪽에 놓인 강화초지대교를 건너 첫 번째 탐방에 나선 곳은 강화군 길상면의 해안동로에 자리한 초지진(草芝鎭)입니다.
사적 제225호로 지정된 초지진은 조선조 효종7년인 1656년에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요새입니다. 요새를 구축한 다음 해 조선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안산의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기어 진(鎭)으로 승격된 초지진은 배3척과 첨사 이하의 군관11명, 사병98명과 돈군(墩軍) 18명 등이 배속되고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 등 세 곳의 돈대(墩臺)를 거느렸다 합니다. 가장 높은 평지에 축조된 돈대를 설치한 곳은 주로 적들이 침입하기 쉬운 요충지로, 돈대는 성곽에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와 총, 그리고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좌석을 거의 다 채운 탐방객 들 중에서 선생님을 빼고는 제가 유일한 홍일점이었는데 저희를 맞아 해설을 맡아주신 분도 여성분이었습니다. 각 분야에서 이미 우리사회가 여성상위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초지진을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앞을 흐르는 염하강의 빠른 물결입니다. 염하강은 지도상에 강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는 김포와 강화사이에 놓인 폭이 좁은 강화해협을 칭하는 것으로 유속이 초속3.5m에 이른다 합니다. 유속이 초속6.5m에 이르는 진도의 울돌목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염하강의 유속도 엄청 빠른 것이어서 이 강의 물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배로 건너기가 쉽지 않았기에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에서 무려 38년 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격적인 초지진 탐방은 오전11시가 조금 넘어 시작됐습니다. 아직도 외부성벽과 소나무에 포탄 흔적이 남아 있어 1871년 미국의 로저스가 아세아함대를 이끌고 와 강화도를 침공한 신미양요 때 조선과 미국 양국 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견고해 보이는 눈앞의 초지진은 1973년에 복원된 것이지만, 성벽 안에 전시된 대포 하나는 신미양요 때 사용된 실물이라 합니다.
미국의 로저스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그중 450명의 육전대(陸戰隊)를 초지진에 상륙시켜 보루를 넘을 때 미군은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과 처절한 육박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초지진을 점령한 후 광성진을 쳐들어가 관아건물을 불태웁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은 240여명의 조선군과 함께 전사합니다. 조선 군사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항쟁하는 모습을 보고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해 강화도에서 자진 철수합니다.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군대는 다섯 해 전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군대와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미군은 그들의 조선 행을 미리 알렸고 민간인에게는 약탈행위를 자행하지 않았으며 방화파괴를 한 것은 군사시설에 한정했다고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 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광성보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스스로 물러났고, 포로를 곱게 돌려보낸 것은 병인양요 때와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점입니다. 프랑스군이 미국군과는 달리 잔인했던 것은 조선에서 프랑스의 신부가 처형된 종교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초지진을 둘러보며 돈대가 참으로 깔끔하다 했는데 지금의 초지진은 이미 무너져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는 것을 1973년에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2. 덕진진(德津鎭)
두 번째 탐방지인 덕진진은 초지진과 광성보 사이에 자리한 진(鎭)으로 고려시대부터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였습니다. 조선조 현종7년인 1666년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수영의 해군주둔지를 여기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5년인 1679년 용두돈대와 덕진돈대, 그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두어 덕진진은 강화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진보(鎭堡)였습니다.
초지진에서 버스로 몇 분간 북쪽으로 이동해 견고해 보이는 덕진진의 성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성문인 공조루(控朝樓)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는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으로, 아직 세월의 때가 끼기에는 일러서인지 외관이 깔끔했습니다. 성문 안을 들어서자 덕진진이 앞서 둘러본 초지진보다 규모가 훨씬 큰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남장포대, 덕진돈대와 덕진진 경고비를 차례로 찾아갔습니다. 남장포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강화8포대의 하나로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반달모양의 요새로 축조되었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덕진진이 미국에 점령되고 성조기가 올려 집니다. 비록 미국이 덕진진의 전투에 승리해 한반도 최초로 여기에서 성조기가 펄럭일 수 있었지만, 조선군의 저항을 높이 평가한 미국은 조선과의 수교가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스스로 물러납니다. 당시에 사용된 포대를 실물크기로 재현 설치해 그때 전투의 치열함을 다소나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덕진돈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2개의 돈대 중의 하나로 광성보와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덕진돈대 또한 남장포대와 함께 신미양요 때 미국의 함대와 이틀에 거쳐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남장포대와 덕진돈대를 둘러보면서 여기 덕진진에서 조선군이 미국군을 맞아 치열하게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1864년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삼정의 문란으로 철저히 부패한 조선을 그 나름 개혁을 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원군 집정 한해 전만 해도 진주에서 민란이 크게 일어났었습니다.
바다 가까이에 건립된 경고비에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의 “海門防水他國船愼勿過”이라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가 건립된 것이 고종4년인 1867년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난 다음 해의 일입니다. 대원군은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그 다음해 이 비를 세워 쇄국의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으나, 포탄을 맞아 상처를 남긴 이 비와 같이 그의 쇄국정책은 고종이 친정 후 일본과의 강화수호체약 체결해 그 명이 다하게 됩니다.
세월은 두 양요가 할퀴고 간 전장(戰場) 덕진진에서도 시 한수를 꽃피웠으니, 화남 고재형의 칠언절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德鎭三月柳如絲 삼월의 덕진은 수양버들 늘어졌고
白首漁翁勸碧后 흰 머리 난 늙은 어부는 술잔을 권하네
鎭舘緣何多變革 덕진 진관은 어인 연유로 그리 많이 변했는가
滿江水色何前時 강 가득한 물빛은 예전과 똑 같은데
화남 고재형(1846-1916)은 강화에서 태어나 묻힌 선비로 1906년 강화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남기셨습니다. 이 한시도 심도기행에 실린 시입니다. 20대에 양요를 겪고 그 30 여년 후 덕진진을 찾은 화남에게는 덕진진의 변화가 예사롭지만은 않았을 것인데 이미 환갑을 맞은지라 차분히 관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덕진진 탐방을 마치고 광성보 근처로 옮겨 점심을 들었습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일행 분들보다 먼저 일어나 광성보로 향했습니다.
3.광성보(廣城堡)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비코자 강화로 천도해서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입니다. 조선조 광해군 때 헐어진 곳을 다시 쌓았고 1658년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했으며, 1679년 숙종 때 석성으로 고쳐 쌓고, 화도돈대, 오두돈대 및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광성보에 소속시켰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여기 광성보에서 미국군과 맞서 싸웠던 것은 이처럼 대비를 해왔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성문인 안해루(按海樓)를 지나 왼쪽의 광성돈대를 먼저 찾았습니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딸린 원형의 돈대로 돈 안에 대포, 소포와 불랑기 등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기에서 처음 보는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연속 사격이 가능한 화승포입니다. 광성돈대 또한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1977년에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광성돈대를 둘러본 후 오른 쪽 솔밭을 지나 손돌목 돈대를 찾아갔습니다. 구릉 꼭대기에 동그랗게 쌓아 강화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광성돈대는 1679년 화도돈대 및 오두돈대와 같이 쌓은 돈대로 언뜻 보아도 견고해 보였습니다.
제가 손돌목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전해지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청의 전신인 후금이 쳐들어오자 조선임금은 강화도로 피신을 갑니다. 임금을 모시고 염하를 건너는 어부는 손돌이었는데 물결이 거세지자 임금은 손돌을 의심해 죽여 버립니다. 임금은 죽음을 앞둔 손돌이 띄운 바가지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 무사히 염하를 건넙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임금은 손돌의 장사를 후히 지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백성들이 임금과 조정의 어리석음과 무능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손돌목돈대를 둘러본 후 용두돈대로 옮기는 길에 신미순의총과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를 들렀습니다.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국의 해군과의 격전 중에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53인의 전사자 중 당시 중군인 어재연과 동생 어재순 형제를 뺀 나머지 51명을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신미양요 때 전사한 조선군은 240여명에 이르는데 이들 가운데는 신미순의총에 안장된 장졸을 제외한 무명용사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들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가 바로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튀어난 자연암반 위에 설치된 돈대입니다. 용머리 부분의 한 가운데 강화전적지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용두돈대를 돌아보고 서둘러 광성보주차장으로 돌아갔으나 일행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안해루 성문 안으로 들어가 미쳐 못 본 곳들을 더 둘러본 후 버스에 올라 삼랑성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4.삼랑성(三郞城)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산성입니다. 포곡식(?) 산성인 삼랑성은 정확한 축성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현종1년인 1660년 이 성안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정족산 사고를 지었으며, 영조15년인 1739년 이 성을 중수할 때 문루인 종해루를 남문에 건립했습니다.
신미양요 때 미국군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데 진무중군 어재연의 항전이 주효했다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은 천총 양헌수의 정족산성 반격 덕분입니다. 1866년 프랑스는 자국 신부 9명을 처형한 조선에 책임을 묻고자 조선을 침공합니다. 프랑스의 로즈제독은 군함7척에 해군 600여명을 데리고 지부를 출발해 강화도 갑곶에 닻을 내립니다. 강화부를 지키던 조선군이 대항을 포기하고 달아나버려 프랑스군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강화부를 점령해 마구잡이로 약탈합니다. 2011년 영구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온 외규장각도 이때 약탈된 것입니다. 뒤늦게 문수산성에 진을 친 조선군은 프랑스군의 위세에 눌려 염화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조선군이 도망가 버려 텅 빈 산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을 지릅니다.
천총(千摠) 양헌수가 이원희 사령관에게 강을 건너 맞서 싸우자고 한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명령을 어긴다며 자신을 죽이려한 사령관에 양현수는 “죽을 때 죽더라도 차라리 적의 손에 죽을 터이니 군사 일부를 떼어 달라”고 간청해 포수 300명을 받습니다. 밤을 틈타 프랑스 군함의 봉쇄를 뜷고 손돌목 쪽으로 침투에 성공한 양현수는 포수들과 함께 정족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정족산성의 조선군이 549명임을 천주교도들로부터 전달받은 프랑스군은 갑곶을 출발해 정족산성을 쳐들어갑니다. 조선군을 우습게 본 프랑스의 로즈는 대포도 가져가지 않고 160여명만을 이끌고 오솔길을 따라 전등사로 올라갑니다. 후다닥 절을 점령하고 부처 앞에서 편안히 식사를 하겠다며 점심을 굶은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부상자가 속출하자 그들을 들 것에 실고 후퇴합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549명 중 포수 한 명이 죽고 몇 명이 부상을 입고, 프랑스 군은 160여 명 중 전사자 없이 32명이 부상을 입습니다. 비록 외규장각은 약탈되었지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막아내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각을 지켜냅니다. 산성 안에 순무천총 양헌수의 승전비가 세워진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한 것은 조선군이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왜 추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549명의 조선군이 대포도 가지고 오지 않은 160여명의 프랑스군과 싸워 32명을 부상시키는 피해를 입혔을 뿐인데 과연 조선군이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재야사학자 이이화 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이야기”에서 의문을 표합니다. 비록 탄환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아까운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군에 패배한 프랑스군의 사기저하를 간파한 로즈는 강화부에서 철수를 합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부에 머문 20여일 동안 무고한 백성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약탈한 보물을 잔뜩 싣고 철수를 합니다. 5년 후 신미양요 때 점잖게 물러난 미국군과 크게 대비되는 바입니다.
남쪽 성문 종해루 안으로 들어가 정족산 사고를 함께 둘러본 후 저 혼자서 곧바로 산성탐방에 나섰습니다. 그동안 전등사를 찾아온 것은 대 여섯 번 되지만 우정 산성 길을 찾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정족산 사고를 출발해서 십 수분을 걸어 오르자 성곽이 나타났습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올라 다다른 정족산 정상에 해발고도가 218m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서 있었습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강화도의 정경이 풍요로워 보인 것은 결실의 계절 가을 덕분일 것입니다. 성곽 위로 난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길을 꺾어 종해루에 도착해 성곽순방을 마쳤습니다. 성곽순방으로 저 혼자 뒤쳐진 것이 아니가 싶어 부지런히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아직도 내려오지 않은 일행들이 많아 안도했습니다.
강화도전적지 탐방을 마치고 산본으로 돌아오는 길은 곳곳에서 막혀 귀가 길이 답답했습니다. 답답하기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강화도가 시련을 겪었던 19세기 후반에는 제국들의 외침때문이었다면 요즘은 머리 위에서 핵폭탄을 만지작거리는 북한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보다 동족간의 상잔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실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도 그렇고 한국전쟁도 그렇습니다. 그저 이런 답답함이 제 세대로 끝났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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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에서 내려다 본 염하강의 물 흐름은 과연 빨랐습니다. 몽골의 강화도 침공을 막은 빠른 물 흐름도 천총 양헌수의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빨리 흐른 것은 염화강물 만이 아닙니다. 세월도 빨리 흘러 병인양요를 겪은 지 어언 150년이 다 되갑니다. 빠른 세월이 양헌수 장군의 구국의지를 함께 실어가도록 잊혀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강화도의 전적지를 둘러보고 두 양요를 여기에 되살린 것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되살리고 싶어서입니다.
<탐방사진>
1)초지진
2)덕진진
3)광성보
4)삼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