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수원명소 탐방기1(수원화성)
수원명소 탐방기1(수원화성)
*탐방일자:2015. 4. 21일(화)
*탐방지 :경기 수원소재 수원화성
*탐방코스:장안문-화서문-서장대-팔달문-창룡문-동장대-장안문
*동행 :나홀로
제가 서울 다음으로 자주 들르는 도시는 경기 도청이 들어앉은 수원(水原)입니다. 젊어 한 때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1년 가까이 교편을 잡은 일이 있어 낯설지 않은 이 도시를 요즘도 자주 들르는 것은 열차로 여행길에 오를 때 주로 수원역에서 출발해서입니다.
이 도시의 지명으로 ‘수원(水原)’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의 원종12년인 1271년입니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이 지역의 땅 주인은 백제-고구려-신라의 순으로 바뀝니다. 고구려가 이 땅을 점했던 475년에는 이 지역의 지명은 ‘매홀(買忽)’입니다. 그 후 여러 번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 ‘수원(水原)’으로 불리는 것은 ‘매홀(買忽)’의 본래 뜻이 ‘물 고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본 집에서 멀지 않은 수원(水原)을 탐방 목적으로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작년 여름 중국의 서안성벽을 다녀온 후 꼭 한 번 가보겠다고 별러온 ‘수원화성(水原華城)’을 이번에 비로소 찾아가 한 바퀴 빙 둘러보았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제 나름 느낀 소감은 수원화성은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 성이라면 중국이 자랑하는 서안성벽보다 빼어나면 빼어났지 빠질 것이 별로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조선조 22대 정조 임금께서 엄청 공을 들인 회심의 역작입니다. 일찍부터 수원에 거대한 성을 쌓으려는 계획을 세운 정조는 1792년 초여름 정약용을 조용히 불러 축성계획을 밝히고 배다리를 놓을 때처럼 좋은 방책을 강구하라며 관련도서를 내려줍니다. 정약용이 바친 기중가(起重架)의 설계도면을 살펴본 정조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어느 정도 축성의 기본골격을 구상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수원에 성을 쌓는 역사가 시작된 것은 1794년 2월이라고 재야사학자 이이화 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착공 2년7개월만인 1796년 9월 성곽둘레가 5.7Km이고 그 높이가 4-6m 정도 되는 수원화성이 완공됩니다. 수원문화재단에서 펴낸 관광안내전단이 이 성의 특징을 잘 요약했다 싶어 여기에 옮겨 실습니다. 안내 전단은 수원화성을 “실학자 유형원의 이론을 따라 정약용이 설계하였고, 석재와 벽돌을 병용, 화살과 창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가졌다.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축조해 건축사상 독보적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기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것입니다.
수원화성을 둘러보고 지난달 순방을 마친 한양도성에 비해 참으로 정교하고 견고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성에는 대문이 4, 장대 2, 포루 10, 봉돈 1, 치 10, 공심돈 2, 수문 2, 암문 4, 각루 4, 노대 2, 그리고 적대가 2곳이 있습니다. 한양도성에 치가 설치된 곳이 북악산의 한 곳인 것만 보아도 수원화성 축성 시 도성방어에 얼마나 정교하게 신경을 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축성에 사용된 돌덩이는 187,600개이고 벽돌은 695,000장이라 합니다.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쌓은 한양도성에 비해 석재와 벽돌을 썩어 쓰면서 돌의 규격을 맞추어 축조한 수원화성이 더욱 견고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정조임금의 축성노력은 수원화성의 완공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공사의 내력과 축조기술 등을 담은 책을 간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홍원섭이 몇 년 고생 끝에 임금께서 돌아가신지 1년 뒤인 1801년에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훼손된 수원화성의 복원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화성성역의궤” 덕분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성곽을 한 바퀴 온전하게 도는데 3시간가량 걸린다는 것을 확인하고 오후 시간만으로도 충분하겠다 싶어 13시가 조금 못되어 산본 집을 출발했습니다. 40분 후에 도착한 장안문에서 탐방을 시작한 것이 13시30분이고, 다시 장안문으로 돌아와 탐방을 끝낸 것이 17시20분입니다.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3시간50분이 걸려 홈페이지의 소요시간보다 50분이 더 걸린 것은 저 나름대로 꼼꼼히 돌아보아서입니다.
1.장안문-화서문-서장대
장안문(長安門)을 문안으로 걸어 들어가 2층의 문루에 올라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장안문은 4대문의 하나로 수원화성을 출입하는 북쪽의 관문입니다. 남쪽 관문인 팔달문과 마찬가지로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 2층에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장안문이 옹골차게 보이는 것은 한양도성의 4대문에 없는 옹성이 따로 있어서일 것입니다. 2층 문루에 올라서자 이 성곽을 찾은 초등학생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장안문을 출발해 화서문에 이르기까지 평지 위에 쌓은 성곽 길이 이어졌습니다. 5백 미터가 채 안될 것 같은 성곽 길을 여장 바로 밑에 내어 성 안의 민가들이 2-3미터 아래로 내려다 보였습니다. 이 짧은 거리의 성곽에 설치된 방어시설은 북서적대, 북서포루, 북포루와 서북공심돈 등 네 곳이나 됐습니다. 적대란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설치한 시설물입니다. 반은 외부로, 반은 성 안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적대는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성곽보다 높게 축조되었습니다. 장안문과 거의 붙어 있어 자칫 장안문의 한 부분으로 잘못 알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한 여기 북서적대 외에도 장안문 동쪽 바로 옆에 북동적대 한 곳이 더 있습니다. 포루(砲樓)란 포를 설치한 누(樓)를 이르는 것으로 수원화성의 포루는 벽돌과 돌을 이용하여 치성위에 설치한 포루와, 벽돌만 갖고 만든 3층 포루로 나뉘는데, 북서포루는 벽돌로 축조된 포루이고 북포루는 치성위에 쌓은 포루입니다. 치성(雉城)위에 쌓은 북포루는 군사들의 대기 장소이자 휴식장소로도 쓰였다 합니다. 수원화성에 포진된 포루는 각각 5개소씩 모두 10개소가 있습니다. 공심돈(空心墩)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로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이 있습니다.
네 곳의 방어시설을 모두 지나 다다른 화서문(華西門)은 서쪽의 관문입니다. 앞서 장안문에서 봤던 반원형의 옹성이 없고 대문이 들어설 곳에 차도가 나있어서인지 왠지 작고 어설퍼보였습니다. 화서문이 4대문의 한 곳임을 알려준 것은 옛 군복을 입고 관광객을 맞는 분이었습니다.
화서문에서 시작된 오름 길은 팔달산 산마루에 자리한 서장대(西將臺)까지 이어졌습니다. 화서문과 거의 붙어 있는 서북각루와 서일치, 서포루, 서이치를 차례로 지나 서장대에 오르는 동안 라일락의 진한 꽃향기 덕분에 모처럼 봄 내음을 물씬 맡았습니다. 각루(角樓)란 군사적 요새지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입니다. 수원화성에는 여기 서북각루 외에도 세 곳에 각루가 더 있습니다. 치(雉)는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구조물을 이릅니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감시하고 또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치는 치성으로도 불리는데 규모를 크게 하면 옹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성에 설치된 치는 여기 서일치와 서이치를 포함해 모두 10곳입니다. 서일치와 서이치 사이에 자리한 이곳의 서포루는 치성위에 쌓은 포루로 앞서 들러본 북포루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른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군사지휘본부로 사방100리가 한 눈에 보인다 합니다. 먼발치서 팔달산을 바라보노라면 이 산의 상징처럼 듬직한 건축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바로 화성장대로도 불리는 서장대입니다. 서장대에 오르자 서쪽의 한남서봉지맥, 북쪽의 한남정맥, 동쪽의 한남쌍령지맥 등 수원을 둘러싸고 있는 낯익은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서노대는 자칫 서장대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서장대 남쪽으로 몇 발짝 떨어져 있는 노대(弩臺)는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로 산 정상에 설치하는데, 이 성에는 성안에 설치된 여기 서노대 외에 치성위에 벽돌을 쌓아 노대를 만든 동북노대가 더 있습니다.
팔달산은 그 높이가 해발 143미터로 낮은 산이지만 수원시내 한 복판에 자리해 많은 시민들이 산책삼아 이 산을 즐겨 오릅니다. 이 산은 제가 수원시내 한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인 1978년 어느 토요일 오후 학생들과 함께 휴지를 주우러 처음 올라본 일이 있습니다. 37년 만에 다시 오르면서 30대 초반의 열정어린 교사였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2.서장대-서남각루-팔달문
서장대에서 멀지 않은 “효원의 종”에 이르기 전 서암문과 서포루를 들러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암문(暗門)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했다 합니다. 이 성의 암문은 모두 네 곳으로 그 중의 한 곳인 여기 서암문을 통해 잠시 바깥을 나갔다 들어왔습니다. 여기 서포루(西砲樓)는 앞서본 서포루와 이름은 같으나 그 구조가 다릅니다. 벽돌만 갖고 만든 3층 포루로 지대 위에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어놓은 혈석을 전면 2개, 좌우로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을 구분한 것이라고 관광안내전단에 실려 있습니다. 앞서 본 북서포루와 한 가지인 셈입니다.
수원이 효원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효심이 지극한 정조임금 덕분일 것입니다. 1978년 화홍문화제 때 처음(?) 시현된 정조임금의 능행차 행사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여 팔달로를 걸은 적이 있습니다. 수원시에서 팔달산 정상부에 ‘효원의 종(鐘)“을 설치한 것도 수원이 효원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효원의 종”은 부모님, 가족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며 3번 타종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는데 국가가 빠진 것은 유감입니다.
“효원의 종‘에서 서남각루(西南角樓)에 이르기 위해서는 서남치와 서남암문을 경유해야 합니다. 서남치는 수원화성의 10개 치중의 하나로 앞서 보아온 서이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만, 서남암문은 이 암문에 붙여 남쪽으로 장방형의 성곽을 쌓아 이어놓은 것이 독특했습니다. 제 걸음으로 폭이 12보, 길이가 280보 정도인 장방형의 부속성곽에도 서남일치와 서남이치의 치를 두 개 두었고 남쪽 끝에 일명 화양루로 불리는 서남각루를 세웠습니다. 관광안내전단에 따르면 각루(角樓)란 군사적 요새지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으로 이 성에는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었습니다. 다시 서남암문으로 돌아가 성곽 길을 따라 동쪽 아래 팔달문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서남암문을 출발해 남포루, 홍난파기념탑과 남치를 거쳐 팔달문으로 내려서는 계단 길이 제법 가팔랐습니다. 이번에 지난 남포루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3층 포루로 앞서 보아온 북서포루와 그 구조가 같습니다. 남포루에서 조금 내려가 홍난파기념탑을 사진 찍어 왔습니다. 한양도성순방때는 생가를 지났었는데 여기 수원화성에서는 ‘고향의 봄’을 새겨 넣은 기념비를 보았습니다. 수원이 배출한 음악가 홍난파가 생전에 그가 벌인 친일행각으로 뭇매를 맞는 것을 보노라면 그의 음악적 공로가 파묻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화성열차가 다니는 산 중턱의 차도를 따라 잠시 성 밖으로 나가 가져간 떡을 꺼내 먹은 후 다시 들어와 성곽 탐방을 이어갔습니다.
또 하나의 치인 남치를 지나 내려선 팔달문(八達文)은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오며 가며 숱하게 여러 번 보아온 문이어서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어 자세히 내부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구조는 장안문과 같다 합니다. 팔달문에서 수원화성의 서쪽 반 순방을 마치고 나머지 동쪽 반을 탐방하고자 시장을 지나 남수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3.팔달문-창룡문-동장대
수원화성 중에 유일하게 성이 끊긴 곳이 팔달문에서 남수문까지이나 그 거리가 매우 짧아 한양도성처럼 길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시장을 통과하자 하천 앞 차도가 보였습니다. 왼쪽으로 꺾어 조금 올라가 이내 남수문(南水門)에 도착했습니다. 한양도성을 청계천이 가로질러 흐르듯이 수원화성은 광교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수원천이 한 가운데로 흐릅니다. 이 수원천을 가로질러 남쪽에 세운 수문이 남수문으로 3년 전에 이 수문을 복원하기까지는 북수문이 유일한 수문이었을 것입니다.
남수문에서 장안문에 이르는 동쪽의 성곽은 평지에 쌓은 것으로 햇볕을 피할 수 없어 한 여름에 성곽 길을 걷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공사 중인 동남각루를 지나 만난 첫 번째 방어시설 동삼치는 수원화성의 동쪽을 지키는 치성으로 이 외에도 동이치와 동일치, 그리고 북동치가 더 있습니다. 봉돈을 얼마 앞둔 동이포루는 치성위에 설치한 누로 서일치와 서이치 사이의 서포루와 같은 포루로 익히 보아본 바입니다.
참으로 견고해 보인 것은 비상사태를 알리는 봉돈(烽墩)입니다. 산행 중에 보아온 봉화대를 성곽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봉돈은 성벽일부를 돌출시켜 벽돌을 쌓고 그 위에 5개의 화두를 쌓았으며 성벽에 총안(銃眼)을 두어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문이 닫혀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나 밖에서 보이는 화두(火頭)가 매우 견고해 보였습니다. 봉돈과 창룡문사이에 동이치, 동이포루, 동일치, 동일포루의 순서로 치성과 포루를 번갈아 설치해 동쪽 성곽이 평지의 성이기는 해도 물 샐 틈 없는 방어가 가능해 보였습니다.
4대문의 하나인 창룡문(蒼龍門)은 수원화성의 동쪽 관문입니다. 짧은 성을 밖으로 붙여 쌓아 밖으로 나가는 길이 굽이지도록 한 것이 한양도성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창룡문을 빠져나가 올려다 본 수원화성은 다시 보아도 견고하고 그 외관이 미려했습니다. 창룡문과 서장대 사이에는 쇠뇌를 쏘는 동북노대와 적정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든 동북공심돈이 차례로 설치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의 노대와 공심돈은 각각 두 곳씩으로 나머지 하나인 서노대와 서북공심돈은 서쪽 성곽을 돌 때 이미 지났습니다.
평지에 세운 동장대(東將臺)는 산 위에 세운 서장대보다 크고 그 앞이 넓었습니다. 당상 한구석에서 아주머니 몇 분들이 환담을 나누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일정도로 꽤 커 보이는 동장대의 다른 이름이 연무대인 것은 그 아래 넓은 뜰이 군사훈련장으로 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상업시설인 국궁체험장이 들어서 있어 그 맥을 이어가는 듯 했습니다.
동장대가 규모가 커 시원시원해 보인다면 주변 환경과 잘 어울려 한껏 멋을 낸 건축물은 단연 동북각루와 화홍문이라 하겠습니다. 동장대와 장안문을 이어주는 북쪽 성곽에 동암문, 동북포루, 북암문이 포진해 있고 그 뒤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도 불리는 동북각루(東北角樓)와 수원천을 가로질러 세운 화홍문(華虹門)이 잇고 있습니다.
북암문을 빠져 나가 공원으로 조성된 연못을 둘러보며 둔덕 높은 곳에 세운 방화수류정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때 마침 진적색의 철쭉 꽃이 만개해 명승지를 찾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조임금께서 환생해 이곳을 다시 찾아오신다면 모처럼 용안을 활짝 피실 것 같았습니다. 하천위에 세운 화홍문이 빼어난 것은 5개의 수문이 무지개모양의 홍예문이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그 아래 흐르는 수원천이 엄청 더러워 차라리 사진으로 보는 것이 나을 껄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원천을 정화해 깨끗한 물이 흐르도록 하는 것은 꼭 수원화성을 위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서울의 청계천에서 확인 됐듯이 깨끗한 하천이 도시 한 가운데를 관통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입니다.
수원천을 건너 북동포루와 북동치, 그리고 북동적대를 차례로 들렀습니다. 회사원으로 보이는 30대 후반의 한 젊은이가 외국인을 안내하는 것을 보고 외국손님을 모시고 짧은 영어로 시내관광을 안내하느라 진땀을 뺐던 제 젊은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 가까이 설치한 적대로 서쪽에 설치한 북서적대와 함께 장안문과 그 옹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시설입니다. 4대문 중 유일하게 장안문에만 적대를 설치한 것은 왜일까 궁금했습니다.
4시간 가까이 걸어 출발지인 장안문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다시 한 번 장안문을 돌아본 후 아래로 내려가 수원화성 탐방을 마무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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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여러모로 서울한양도성과 대비됩니다. 그 첫째는 성곽의 길이로 한양도성이 18.6Km이고 수원화성은 5.7Km에 불과합니다. 제가 과연 정조가 수원으로 천도를 계획했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 것은 4백년 뒤에 세우고자 한 수도를 한양의 30%선으로 줄이고자 했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서입니다. 둘째 성곽축조에 사용된 재료입니다. 한양도성은 큰 돌로 쌓았는데 수원화성은 큰 돌과 벽돌이 모두 쓰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를 돌아본 후 1780년 "열하일기"를 남겼는데 그 책에서 연암은 벽돌의 장점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 십수년후에 축성된 수원화성에 벽돌이 쓰인 것이 혹시나 정조임금이 이 책을 읽은 때문이 아닌가 싶다가도, 열하일기가 정조가 추진한 문체반정의 빌미를 준 책이어서 그랬을 리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습니다. 셋째 방어시설의 차이입니다. 수원화성의 방어시설은 그 종류와 수가 한양도성보다 훨신 많습니다. 한양도성은 인왕산, 북악산, 낙산과 남산의 능선을 따라 쌓아 거의 산성에 가깝습니다. 팔달산을 끼고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쌓은 수원화성은 그 중간쯤인 평산성(平山城)이어서 산성이라 부를만한 한양도성에 비해 여러 종류의 필요한 방어시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무멋보다 큰 차이는 서울한양도성은 인부들을 강제로 동원해 축성했는데 수원화성은 필요인원을 자원모집해 썼고 그들에 품삯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정약용이 새로 만든 기중가(起重架) 덕분에 4만냥을 절감했는데도 수원화성 축성에 돈이 873,520냥이 소요되었고 곡식이 13,300석이 들었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필요경비를 조달하는데 백성들이나 관아에서 염출하지 않고 금위청과 어영청의 상번군을 10년간 정지한 재원과 지방의 예비비로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축성에 일반 백성이나 승군을 동원하지 않고 인부와 장인을 자원 모집해 썼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노임을 주고 부렸기 때문이라 합니다. 정조임금의 백성사랑이 어떠했는가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위 글 작성에 이이화님의 "한국사이야기"와 수원문화재단에서 펴낸 "수원화성 화성행궁" 관광안내전단에서
상당부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탐방사진>
1)장안문-화서문-서장대
2)서장대-서남각루-팔달문
3)팔달문-창룡문-동장대
4)동장대-화홍문-장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