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66.구석기 유적지 탐방기1(공주석장리)

시인마뇽 2015. 8. 10. 10:21

                                                                   구석기유적지 탐방기1(공주 석장리)

 

 

                                                 *탐방일자:2015. 7. 28()

                                                 *탐방지 :충남공주 소재 석장리 유적지 및 박물관

                                                 *동행 :1)연세대 조경철교수 인솔

                                                              2)군포중앙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프로그램 참여회원

 

 

 

 

  제가 살고 있는 군포시는 여러모로 자랑할 만한 도시입니다. 도시규모는 작지만 시민들을 위해 마련한 각종 프로그램이 알차고 다양한데다 수리산과 반월호수가 있어 주변경관도 수려합니다. 군포시가 특별히 자랑할 만 것은 책 읽는 도시로 자리매김 한 것입니다. 인구 29만의 도시에 공공도서관이 7개나 되고 각 도서관이 준비한 유익한 교육프로그램들이 꽤 많습니다

 

 

 

   군포시 중앙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프로그램을 개설해 공주와 부여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희망자를 선착순으로 뽑는다는 공고를 인터넷에 올린 것을 보고 재빨리 참가신청을 했습니다. 원래는 지난 달 하순경에 탐방하도록 일정이 잡혔는데 생각지 않은 메르스의 발병으로 한 달이 늦어져 이제야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아침9시경 중앙도서관을 출발해 탐방길에 오르자 오랜만에 수학여행을 떠나는 듯 가슴이 뛰었습니다. 공주시내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금강 변에 위치한 석장리 유적지에 도착하자 주변경관이 눈에 많이 익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제가 모 회사의 충호남영업부장으로 3년 가까이 일하면서 이 강변을 숱하게 지나서였습니다. 당시는 이미 발굴 작업이 끝난 때여서 이곳이 유적지인 것을 알기만 했다면 오가는 길에 짬을 내 들렀을 터인데 이번에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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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에서 공주로 흐르는 금강의 북쪽 변에 위치한 석장리유적지는 꽤 넓어보였습니다. 유적지 동쪽 끝머리에 세워진 정자에 걸터앉아 연세대 조경철교수님의 자세한 설명을 잘 들었습니다.

 

 

 

   1963년 미국의 대학원생 Albert Mhor 부부가 홍수로 인해 무너진 금강변의 지층에서 뗀석기를 발견하고 서울대를 찾아가 같이 발굴할 것을 요청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구석기기가 존재 않는다며 거절당합니다. 그 다음 연세대를 찾아가 당시 역사학을 가르친 손보기교수를 만난 덕분에 발굴 작업에 들어갑니다. 연세대 발굴팀은 1964-1992년의 28년 동안 12차례 발굴작업을 진행해 한국구석기의 존재를 입증하는 개가를 올립니다. 그리고 정자 아래 세워진 자그마한 돌비석을 세워 그들의 개가를 기념하고 있다는 것이 교수분의 설명요지였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가장 감명깊게 본 책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고 말씀해 의외였는데, 이 책에서 강조된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 여기 석장리유적발굴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가 끄떡여졌습니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최후빙하가 끝나는 1만 년 전까지의 수 백 만년에 걸친 시기를 이릅니다. 1만 년 전에 시작된 신석기시대와 대별되는 것은 그 석기모양이 간석기 직전단계의 뗀석기라는 것, 농업/목축 이전의 사냥과 채집단계라는 것, 주거양식도 정착단계의 움집이 아닌 동굴, 바위그늘, 막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민무늬토기,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의 신석기시대 토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금강 변 유적지를 일별한 후 앞마당에 구석기시대의 주거지인 막집(?)을 재현해 놓은 석장리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담한 규모의 박물관의 상설전시관은 테마별로 5개 전시실로 나뉘어 꾸며졌고, 그 테마는 구석기 인류의 진화(1전시)’, ‘인간,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다(2전시)’, ‘구석기인들의 생활모습(3전시)’, ‘석장리구석기 발굴의 시작과 의의(4전시)’, ‘어린이를 위한 구석기 전시(5전시)’등이었습니다. 전시실 규모는 여기 석장리박물관이 전곡리 박물관보다 작지만 유물의 발굴은 석장리가 먼저여서 나름 역사적의의가 있는 박물관이라 하겠습니다. 다섯 전시실을 둘러보며 구석기시대냐 아니냐를 가름하는데  지표가 되는 주먹도끼를 똑똑히 보아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존재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이 의미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더해 특별전시실에서 또따벨 사람, 60만년의 여정이라는 테마로 전시된 프랑스의 구석기시대 유물을 만나본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구석기용어의 한글화에 기여한 파른 손보기(孫寶基)교수의 업적을 기리는 파른손보기기념관이 바로 옆에 있어 들렀습니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석장리유물발굴을 주도적으로 진행해 당시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부정했던 한국의 구석기존재를 확인시킨 것은 선생의 학문적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구석기시대부터 내일을 위해 힘써 연모를 만들고, 내일이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왔다. 바로 이점이 짐승의 영장이 된 주요 이유일 것이다.”

 

   저는 선생의 이 말씀에서 구석기시대를 연구대상으로 삼아야하는 당위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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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 주요 구석기유적지는 외국인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울대에서 주도적으로 발굴한 전곡리유적지도 여기 석장리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발견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학계에서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곡리 유적이 주한미군인 Greg Bowen에 의해 발견된 것은 1978120일의 일이니 여기 석장리유물보다 15년이 늦은 셈입니다. 공군하사관인 Greg Bowen이 인디애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었기에 그가 사귀던 한국여성과 함께 한탄강 유원지의 강변을 산책하다가 지면에 노출된 토기편과 숯이 된 목재를 보고 그 일대를 조사해 주먹도끼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먹도끼를 찾아낸 Greg Bowen은 궁리 끝에 프랑스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소아 보르드교수에 편지를 보내 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합니다. Greg Bowen은 서울대를 찾아가 고고학자 김원룡교수를 만나고 전곡리유적은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에 들어갑니다. 주먹도끼라 불리는 석기의 유무가 구석기시대 문화권설정의 지표가 된다고 한 미국의 모비우스의 주장이 1944년 발표된 후 주먹도끼가 발견된 일이 없는 인도이동의 지역은 구석기시대 문화권에서 제외됐다가 전곡리유적의 발견으로 구석기문화권이 새롭게 추가됩니다.

 

 

 

   우리나라 대학을 대표하는 사학의 연세대와 국립의 서울대가 구석기유적발굴에 한 몫씩 해 고고학 발전에 기여한 것은 두 명문대학이 나름 이름값을 한 좋은 사례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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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유적의 나이에 관해  이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석장리박물관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석장리유적은 전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형성된 문화층으로  맨 아래층의 외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 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은 그의 저서 한국사이야기에서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유적의 나이는 70만년이고 여기 석장리유적은 28만 년 전의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은 연대측정값으로 따져 동굴의 경우 상원검모루 동굴이 60-40만 년 전, 단양금굴아래층이 70만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데(露天) 유적지의 경우, 한탄강가의 연천군전곡리와 공주시석장리는 28만 년 전으로 나타난다.”

 

   서울대의 김원룡교수를 도와 전곡리유적지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이선복교수는 아직까지 한반도에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통해 그 나이를 10만년 단위로 셈할 수 있는 유적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고고학이야기에 적고 있습니다. 다만 5만년 전내지 7, 8만 년 전에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고 15천 년 전 무렵이면 전국 각지 어디에도 사람이 살았음은 분명하니 10만 년 전 또는 그 이전의 유물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이설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학계가 건강하다는 징표같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