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마뇽 2015. 9. 12. 11:04

                                                                금당산 산행기

 

 

                                                        *산행일자:2015. 9. 10()

                                                        *산 높이  :금당산1,176m, 거문산1,178m

                                                        *소재지   :강원 평창

                                                        *산행코스:법장사-임도-거문산-금당산-임도-재산재

                                                        *산행시간:937-1515(5시간38)

                                                        *동행      :서울사대 김종화, 이상훈, 최돈형 동문

 

 

     벌써부터 별러온 금당산을 대학동문들과 같이 거문산과 연계해 올랐습니다. 200210월 과천시산악연맹회원들과 함께 오른 두 산을 이번에 다시 다녀온 것은 산행기를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껏 제가 오른 국내의 산들은 다 합해 661산입니다. 이 중 산행기를 쓰지 못한 10개산은 모두 본격적으로 산행기를 쓰기 시작한 2003년 이전에 오른 산들입니다. 재작년 여름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을 다시 오른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고 정선의 노추산도 조만간 다시 올라 산행기를 남길 뜻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원균장군을 압도하는 여러 가지 중 매우 중요한 하나가 기록이라는 아들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난중일기를 읽고 나서 재삼 확인했습니다.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매번 기록으로 남긴다는 그 자체가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기에 기록을 통해 잘못된 일을 고쳐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장군의 애국심과 애민정신은 난중일기를 써내려가면서 더욱 강화됐을 것이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저 또한 산행기를 쓰면서 산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유명 산을 골라 그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점 산행을 주로 할 때는 산행기를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2004년 한북정맥을 필두로 대간이나 정맥 등 주요 산줄기를 따라 종주하는 선 산행으로 바꾼 이후 새로 오른 산들의 산행기를 거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정맥이나 지맥 등의 산줄기는 오지를 지나 산행 중에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이런 산줄기를 혼자 걸으려면 나무, 바위, , 산짐승, 구름, 바람 등의 산 식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지 못하면 우선 지루할 수 있고 또 겁을 먹어 작은 소리에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산행기를 쓰면서 생각해낸 것이 어떻게 해서든 산식구들과 묵언의 대화라도 나눠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깊은 산속을 혼자 걸어도 두렵지 않은 것은 산식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입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멧돼지를 보고도 화들짝 놀라지 않는 것은 저 나름 묵언의 대화를 나눠보겠다는 노력이 얼마간 결실을 맺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또 하나 산행기를 써야 하는 이유는 오른 산이 100산을 넘자 제 기억이 한계에 이르러 그 산이 그 산 같고 자주 착각을 해서입니다. 애써 땀 흘리며 오른 산을 이렇게 망각 속에 내버려두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은 2003년의 일로, 이때부터 정성들여 산행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다녀온 산이라 해도 기억에만 의지해 다른 분들을 안내한다면 길을 잘 못 들기 십상입니다. 제가 지난 8년간 고교동창들을 100대 명산으로 산행안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산행기를 작성한 덕분입니다

 

 

 

 

    오전 937분 법장사를 출발했습니다. 평창의 면온 IC에서 멀지 않은 이상훈동문 집에서 아침을 든 후 봉평으로 나가 점심 용 김밥을 사들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법장사로 가는 길에 서울대 평창캠퍼스를 둘러보았습니다. 법장사까지 차를 태워준 고동준 동문은 평창의 명소를 둘러보고자 하산했고 최돈형, 이상훈, 김종화 동문 등 저희 넷은 거문산을 오르고자 침목계단 길로 올라섰습니다. 이내 "거문산1.7 Km/고대동1.3Km"의 표지목을 지나 얼마간 서쪽으로 오르자 너덜들이 보여 이번 산행 길에 바위 길을 만나겠다 싶었습니다. 수목이 우거진 그늘 길을 따라 올라 거문산정상0.4Km/법장사0.6KM"라고 거리표시가 잘못된 이정목 앞에 이르렀습니다. 편한 자리를 찾아 10분여 첫 쉼을 가진 후 비알 길을 따라 걸어 임도로 올라섰습니다. 마지막 이틀의 여름 태양도 그 세가 다한 듯 오름 길이 그다지 덥지 않은데다 날씨도 쾌청해 산행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117분 해발1,175m의 거문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임도 건너편의 철제계단을 올라 다시 들어선 산길은 얼마간 된비알 길로 이어져 밧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가파른 길이 끝나고 경사가 완만한 길을 올라 표지목이 세워진 능선 삼거리에 이르자 저희보다 먼저 오른 제천 분들이 쉬고 있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몇 걸음 떨어져 자리한 거문산 정상에 올랐으나  삼각점이나 정상석 어느 하나도 없어 고봉이 즐비한 강원도에서는 천m가 넘는 산도 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했습니다. 거문산에서 북쪽의 금당산으로 이어지는 2.1Km 의 능선 길이 고도 차가 별로 나지 않는 평탄한 길이어서 이제 힘든 길은 끝났다 싶었습니다. 투구꽃 등 몇 종류의 야생화가 눈을 끄는 능선 길을 걸어 다다른 전망 바위에서 먼발치의 태기산을 사진 찍은 후 점심을 같이 들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이번에 동행한 동문 셋이 사범대를 졸업하고 모두 자연과학을 전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추억의 공유분이 적지 않을 텐데 저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모두가 교육개발원을 거쳐 가 이야기 거리가 더욱 풍성했습니다

 

 

 

   1331분 금당산에 도착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1250분에 다시 북진 길을 이어갔습니다. 조심해서 지나야하는 암릉 길이 나타났고 금당산 왼쪽으로 천애의 바위 군이 우뚝 서있어 앞서 너덜 길을 지나며 바위 길을 지나리라 한 것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길지 않은 암릉 길이 끝나고 산죽 길을 더 걸어 도착한 금당 사거리는 능선사거리로 왼쪽 아래로 백암동 길이 갈리고 오른 쪽 아래로 재산재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왼쪽으로 확 꺾어 0.4 Km 남은 금당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거문산보다 해발고도가 2m 낮은 금당산에 오르자 삼각점과 정상석이 보여 이 산은 대접을 받는다 했습니다. 시야가 탁 트여 전망이 일품인데다 이 산 서쪽 아래로 나름 이름이 나 있는 금당골 계곡이 자리해 금당산을 오르는 사람이 시야가 막혀 답답한 거문산보다 훨씬 많지 않겠나 싶은 것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생각지 못한 일개미(?)들이 떼 지어 달려드는 바람에 후다닥 동쪽 건너편의 백석산 및 잠두산, 그리고 남쪽 멀리 보이는 가리왕산(?), 북쪽으로 보이는 흥정산과 한강기맥을 사진 찍은 후 금당사거리로 되돌아갔습니다

 

 

 

   1515분 재산재 조금 못 미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금당사거리에서 10분 넘게 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 아래로 나 있는 재산리 길로 내려섰습니다. 하산 길이 경사가 급하지 않았지만 바닥이 축축해 조심해 내려갔습니다. 물봉선 등 야생화들이 만개한 하산 길에서도 여름 한 때 매미들과 더불어 산상음악회를 열었을 산새들의 재잘거림을 듣지 못했습니다. 혼자 산을 오를 때면 눈으로 풍광을 즐기고 귀로 새소리를 들으며 코로 수목들이 내뿜는 향취를 맡고 입으로 코와 더불어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살갗으로 바람을 맞는 등 온 몸의 감각기관을 총 가동하느라 힘든 줄 모르는데 이번에는 새 소리대신 동문들과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귀를 즐겁게 했습니다. 물소리가 졸졸 나는 임도로 내려서서 오른 쪽으로 몇 분 걸어가다 왼쪽으로 갈라진 임도를 따라 내려갔습니다. 아직 결구가 덜된 배추밭을 지나고 서울대평창캐퍼스의 북쪽 울타리 옆길을 지나자 이번 산행의 끝점인 재산재가 바로 앞에 보였습니다. 재산재에서 저희를 기다린 고동준 동문이 저희 쪽으로 차를 몰고 와 재산재 턱밑에서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하산 길에 한 동문이 맞은 편의 백적산-잠두산-백석산을 잇는 깔끔한 산줄기를 보고 한 번 그 줄기를 종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70세를 몇 해 앞 둔 이 나이에 저런 동심이 남아 있음이 부러워 내년 봄 쯤 제가 길안내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 또한 저런 산줄기를 보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미지의 산줄기를 보면 가슴이 뛰는 먼 곳에의 동경1대간9정맥을 종주토록 만든 추동력의 원천입니다. 제가 가장 빠르게 가슴이 뛴 것은 20년 전이었고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다 싶은데 이 친구는 뒤늦게 발동이 걸린 것 같아 이런 것이 노익장이다 했습니다. 60세부터 장년에 접어든다는또 다른 동문의 이야기가 참임을 이 친구에게서 확인한 셈입니다.

 

 

 

   금당산을 처음 오른 지 13년 만에 산행기를 매듭지면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끈질긴 기록정신이 결실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5백년사를 기록한 우리의 보배입니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25472년간(1392-1863)의 조선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총1,893888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글자 수가 무려 6,400만자로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에 실린 1,600만자보다 네 배나 많다하니 유네스코가 조선왕조실록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록을 중시하는 우리선조들의 DNA가 제게도 얼마간 전해져 지금까지 제 블로그에 올린 산행기가 600여편  됩니다. 다녀온 산을   빼놓지 않고 산행기를 쓴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닙니다. 산행 중 멈춰 서서 기록을 하는 것이 동행들에 폐를 끼치는 일이어서 9개 정맥을 저 혼자 종주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기록한 것을 토대로 산행기를 작성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제가 방송대학을 다니는 중 시험을 맞을 때면 산행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집근처의 수리산을 자주 오른 것은 그 시간을 벌어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왕조의 사대부들이 남긴 유산기(遊山記)는 의외로 적습니다. 한국산서회의 홍하일님은 그의 저서 조선선비 설악에 들다에서 조선의 유기가 1,500편정도 남아 있으나 그중 산수유기와 와유기를 제외한 347편을 분석한 결과 134개의 산에 유산기가 남아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정치영교수는 그의 저서 사대부 산수유람을 떠나다를 통해 조선시대를 통틀어 창작된 유산기가 약 600편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산기가 이토록 적은 것은 당시로는 등산이 오늘처럼 문화로 정착되지 못해서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산기에 정상을 오른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의 산행은 주로 유람 성격의 입산이었지 정상을 오르내리는 등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산행기로 조금이라도 조선시대의 빈 공백을 채워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꾸준하고 착실하게 산행기를 쓸 생각입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