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I.지역 명산/지역명산 탐방기

E-12. 영암산 산행기

시인마뇽 2016. 4. 30. 12:31

                                                            영암산 산행기

 

                                                     *산행일자:2016. 4. 24()

                                                     *소재지 :경북 구미/성주

                                                     *산높이 :영암산782m, 선석산742m

                                                     *산행코스:월명성모의집-영암산-선석산-송노골마을

                                                     *산행시간:1030-1650(6시간20)

                                                     *동행 :12(대구팀 임상택, 권재형,박영홍부부, 차수근부부,

                                                  박상훈부부, 서울팀 이규성, 범솥말, 성봉현, 우명길)



     봄꽃의 상징인 진달래꽃이 그새 많이 져 봄도 이제 물러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봄에 진달래꽃을 처음 본 것은 지난 3월 중순 목포에서 영산기맥을 종주할 때입니다. 남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무슨 죄라도 되는 양 한껏 다소곳했던 진달래꽃이 한 달이 조금 더 지나자 서둘러 연초록 나뭇잎에 자리를 넘겨주어 사뿐히 지려 밟을 만큼의 꽃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애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번에 대구 참사랑산악회원들과 함께 영암산을 오르며 나보기가 역겨워 떠난 것은 님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님이 사뿐히 즈려밟았을 진달래 꽃도 우리 산을 함께 떠나는 것을 보고 저 나름 소회가 없을 수 없어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진달래꽃을 볼 적마다 소월 김정식선생의 '진달래꽃'을 연상하는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소월선생의 '진달래꽃'이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태어나서 읽어본 시다운 시가 저처럼 '진달래 꽃'이 처음인 사람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진달래는 소월선생의 시보다 훨씬 먼저 존재해왔고 그 후 계속해서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왔는데도 소월선생의 시를 읽고 나서야 마치 처음 보는 듯 반가워하는 것은 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일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그 힘이 지나쳐 이제는 소월선생의 시를 빼놓고 진달래 꽃을 완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선조들이 모두 진달래를 애절한 눈으로 보아온 것만도 아닙니다. 조선 후기 영남지방의 부녀자들이 즐겨 읊은 화전가(花煎歌)는 그들이 화전놀이를 가서 부른 가사(歌辭)인데,  진달래는 화전을 만드는데 쓰인 식재료였습니다. 진달래꽃이 참으로 자규의 화신이라고만 믿었다면 그 어찌 한 맺힌 꽃으로 여흥을 즐기는데 소용되는 술을 빚고자 했겠습니까? 이렇듯 진달래를 보는 시각이 다양했는데도 소월 선생이 진달래를 노래한 후로는 진달래가 한의 상징으로 갇혀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소월선생께서 우리 민족의 한을 담은 서정시를 많이 짓고 또 그 시들이 널리 애송되어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1030분 월명성모의 집을 출발하였습니다. 아침 720분에 수원역을 출발해 937분에 도착한 왜관역에서 마중 나온 대구 참사랑 산악회의 임상택 권재형 두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들 차로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월명성모의집으로 이동해 대구 팀 세 쌍의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월명성모의집을 배경으로 해 서울팀과 대구팀 합동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들머리로 들어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가을 입원해 쓸개를 잘라 낸 후 반 년 넘게 나지막한 산만 골라 올라서인지 얼마 걷지 않아 뒷다리가 댕겼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된비알 길을 올라  해발500m대의 능선에 이르자 경사가 완만해 걷기에 좋았습니다. 연초록 나뭇잎이 더할 수 없이 싱그러운 산길을 오르며 진달래꽃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는데 그새 돋아난 여러 잎들에 자리를 물려주어 연분홍의 화사함이 많이 바래보였습니다.

 

   1144600m대 능선에 올랐습니다. 산행시작 50분이 지나 다다른 해발500m대의 능선에서 잠시 쉬면서 무릎보호대를 꺼내 찼습니다. 두 달 전부터 계단을 오르면 무릎에 통증이 느껴져 지난 주 병원을 찾아갔었습니다. 의사선생의 말씀인즉 이제 연골이 많이 달아 더 이상 산에 다니는 것은 무리이니 평지 길을 걷거나 수영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 중입니다. 아직은 봄이 산 밑에서 머물러 해발고도가 600m에 가까워지자 나뭇가지에 별반 새잎이 나지 않아 산록보다 많이 칙칙했습니다. 해발600m대의 무명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1216분에 해발784m의 북봉에 올라서기까지 반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왼쪽 아래로 보손지 길이 갈리는 이 산의 상봉인 북봉이 2m 낮은 남쪽의 746m봉에 왜 주봉 자리를 넘겨주었는지 그 까닭을 잘은 모르지만 산 또한 세속과 다르지 않아 장남 격의 상봉이 주봉에 붙여주는 산 이름을 독차지할 수는 없었나봅니다


 

   1235분 해발782m의 영암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북봉에서 정상으로 가는 남쪽 능선은 거리는 짧았지만 로프를 잡고 통과하는 암릉 길이어서 진행이 빠르지 못했습니다. 동행한 한 분이 스틱을 받아주어 가파른 바위 길을 로프를 잡고 내려가는 일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능선 길에서 오른 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꽤 큰 채석장이 조금은 흉물스러워 보였습니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합동사진을 찍은 후 사방을 휘 둘러보았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너 정북 쪽에 자리한 우람한 산은 많이 본 산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여말선초의 대유학자 길재 선생이 산자락에 머물렀던 금오산이었습니다. 정상석에 새겨진 산 유래를 읽어보니 영암산은 한자로 玲巖山으로 표기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산을 산 모양을 따서 방울산이라 불러왔기 때문이다 싶었습니다.

 

   1355분 점심식사를 끝내고 오후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영암산 정상에 도착해 이제 암릉 길이 끝났다 한 것은 지도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였습니다. 북봉에서 정상봉사이의 바위 길은 서곡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은 정상에서 안부로 이어지는 급경사 암릉 길을 지나고 나서입니다. 로프대신 계단이 놓여 있어 별 탈 없이 내려가기는 했지만 계단사이의 간격이 매우 짧고 급경사여서 자칫 방심하다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아주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꽤 높은 계단을 다 내려가서 수 분 후 만난 암릉을 오른 쪽 밑으로 우회해 내려가 안부 바로 전에서 미리 와 기다리는 일행들과 합류했습니다. 넓은 평상에 차린 점심상은 나 홀로 산행 때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찬이어서 중간에 되삭임을 하며 한껏 배를 불렸습니다. 누구라도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가족을 뜻하는 食口라는 단어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구분들과 산행을 같이하며 식사를 함께 한 것도 어언 햇수로는 십년 째이고 횟수로는 스무 번이나 되어 이제는 한 食口가 된 기분입니다.

 

   158분 해발742m의 선석산에 올랐습니다. 달콤한 점심 휴식을 끝내고 산행을 재개한지 얼마 후 왼쪽 아래로 보손지 길이 갈리는 안부삼거리를 지났습니다. 몇 분 후 오른 쪽 아래로 세종대왕왕자태실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하는 중 언뜻 태실이 유적지로 받들여지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살아생전 으리으리한 궁궐에서 살고 죽어서도 넓디넓은 무덤에 묻힌 것으로도 모자라 왕자의 태까지 모셔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왕정체제라 하더라도 넉넉지 못한 나라 살림에 좀 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하는 말입니다.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고 두 곳의 표지목을 지나 도착한 선석산 정상에도 영암산과 거의 같은 크기의 정상석이 세워진 것을 보고 2.7Km밖에 안 되는 거리의 두 봉우리가 별개의 산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1650분 송노골마을에 도착해 대구팀과의 친교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대구 팀에서 준비한 산행프로그램에는 선석산에서 자리를 옮겨 비룡산을 오른 후 두만지저수지로 내려가는 것이었으나, 걸음이 느린 제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선석산에서 두만지 위 송노골마을로 바로 하산했습니다. 선석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이 경사가 급한 비알 길이었으나 그런 길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비알 길이 끝나고 평탄한 길에 접어들면서 동행한 대구팀의 박영홍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 자식들에 기대지 않고 말년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도록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공감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다다른 능선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하다 제 길이 아님을 알고 다시 돌아오느라 20분 가까이 까먹었습니다. 능선사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내려가 묘지에 이르렀습니다. 염소를 기르는 민가를 지나 송노골마을로 들어선 후  시멘트 길을 따라 몇 분을 더 내려가대기 중인 차에 올라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아담한 규모의 두만지저수지에서 원래 코스대로 비룡산을 오른 몇 분들을 태워 왜관의 음식점으로 이동하는 중 신유장군 노래비를 보았습니다. 유명가수를 기리는 노래비가 여기 왜 있나 하다가 신유가 장군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이분이 어떤 전공을 올렸는지 궁금해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았습니다.


   신유(申濡, 1619-1680)는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한 무신입니다. 효종 때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있으면서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나선정벌에 참여했습니다. 조총군 200여명을 인솔하고 정벌에 나선 신유장군은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의 지휘관 스테파노프(Stepanov)이하 270여명을 전멸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합니다. 장군의 전공을 진작 알았다면 신유장군유적지를 둘러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왜관의 한 유명 복집에서 뒤풀이를 마친 후 왜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는 가을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19시43분발 서울행 열차에 오르고나자 후의를 베플어준 대구분들이 고맙고 또 고마워 헤어지기가 아쉬웠습니다.

 

   소월선생께서 진달래꽃과 같은 애틋한 서정시만 남긴 것은 아닙니다. 아래 시는 제목만 보아도 선생의 여느 시와 다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시 중에서 시대적 배경에 관한 인식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고 평가해온 이 시를 두고 자유기고가 나은진은 뿌리 뽑힌 방랑의 삶을 희망의 삶으로 바꾼 시라고 평했습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나가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함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 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는

 

 

   진달래꽃이라 하여 마냥 애잔한 감정으로만 노래할 수는 없습니다. 내년 봄에 다시 만날 진달래꽃을 위해 위 시처럼 희망의 삶을 노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다져나고자 합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