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부여명소 탐방기2(무량사)
부여명소탐방기 2(무량사)
탐방일자:2018. 3. 29일(목)
탐방지 :충남부여소재고찰 무량사
동행 :서울사대 김종화, 이상훈, 우명길 동문
조선이 낳은 최고의 소설가를 들라면 즉답이 쉽지 않겠지만 최초의 소설가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김시습이라고 답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조선시대 문인 중 한문소설을 써 필명을 날린 김시습, 허균, 김만중과 박지원 중 누가 더 빼어난 소설가냐를 묻는 것이지만, 두 번째 질문은 네 사람 중 누가 가장 먼저 태어났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조선 시대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고, 교산 허균(許筠, 1569-1618)은 소설 『홍길동』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구운몽』으로,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5-1805)은 『허생전』으로 유명해진 문인들입니다. 이들 모두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인물들이어서 누가 더 나냐고 우열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만, 조선 시대의 효시가 되는 소설을 누가 썼는가를 따지는 일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으로, 그 답은 물론 김시습입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조선 시대 최초의 소설이어서 작품성은 후대의 유명소설보다 떨어질 수 있지만, 조선에 소설을 선보인 문학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충남 부여의 무량사(無量寺)를 찾아 간 것은 김시습이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을 받고 말년을 보내다 입적한 절이 바로 무량사였기 때문입니다. 매월당 김시습의 삶은 그리 간단치 않았습니다. 5세신동으로 불린 조선의 천재 김시습이 가시밭길을 걸은 것은 조카 단종을 보위에서 끌어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의 부름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생육신의 길을 택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기인으로 살아온 김시습이 말년을 보내고 입적한 곳이 무량사여서 벌써부터 탐방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무량사(無量寺)는 해발675m의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천년고찰입니다. 법일국사가 이 절을 창건한 것은 신라의 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839-857년) 때의 일이지만, 현존하는 가람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조선의 16대 국왕인 인조(仁祖, 재위1623-1649) 때 진묵선사가 중수한 것으로 건축 된지 4백년이 채 안 됩니다.
무량사 탐방에 동행한 두 친구는 1968년 서울사대 화학과를 같이 입학해 반세기 동안 우정을 쌓아온 대학동기들입니다. 어느 절이든 창건된 후 천년 넘게 버텨내어 오늘에 이른 것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듯이, 어떤 친구든 만난 후 50년이나 우정이 이어가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천년고찰 무량사를 50년 지기들과 함께 둘러본 후 이 절에 터를 내준 만수산를 함께 올랐습니다.
대천시내에서 이곳 무량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이번 무량사 탐방은 ‘萬壽山無量寺’의 일주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천왕문 앞 오른 편에 세워진 당간지주를 사진 찍고 천왕문을 통과해 절 안으로 들어서자 극락전의 2층 건물과 그 앞마당의 5층 석탑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해 하다가 집에 돌아와 알아냈습니다. 심경호교수가 그의 저서 『김시습 평전』에 “무량사는 부여군외산면 만수리 표고570m의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 마곡사의 말사이지만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라고 써놓은 글을 읽고서야, 그 어디가 바로 1990년대 모회사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할 때 찾아갔던 공주의 마곡사라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창건은 마곡사가 무량사보다 두 세기 먼저이지만, 중건은 마곡사가 말사인 무량사보다 얼마 뒤인 165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마곡사를 중건할 때 말사인 무량사의 2층 불전과 5층석탑을 본 따서 지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량사의 중심건물은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2층 불전의 극락전입니다. 외관은 2층이지만, 아미타불을 모신 안은 아래 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트여 있어 밖에서 보는 바와 같지 않았습니다. 양 옆의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진 극락전이 아미타전으로도 불리는 것은 극락전의 주불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이 아미타기도 제일도량이 된 것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져서인 것 같은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앞마당에 ‘부처님 오신날’의 연등을 걸어놓아 고색창연한 극락전도 화사해 보였습니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극락전 앞마당의 5층석탑과 석등이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보물로 지정된 데는 그 역사성과 조형미가 평가받아서일 것입니다. 5층석탑은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이 잘 조화되어, 그리고 석등은 선이나 비례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옆에서 이들의 아름다움을 지켜봤을 뿌리가 드러난 거대한 고목의 느티나무(?)가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당 한 구석에 자리한 범종각의 동종이 163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극락전이 중건된 것도 이때쯤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이 동종은 보물이 아니고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까닭이 무엇인지는 저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영정전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극락전 오른쪽의 명부전과 왼쪽의 우화궁을 잠깐 둘러보았습니다. 홑치마 맞배지붕의 명정전은 그 규모가 극락전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왜소했습니다. 불상 위 천정에 꽤 많은 명패(?)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명패에 이름이 적혀 있는 분들은 아마도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입니다. 한옥의 우화궁이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명문가의 별채 같다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이 건물이 불전이 아닌데다 외관이 참으로 깔끔해서였습니다.
우화궁 왼쪽 위 영정각으로 자리를 옮겨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 절을 찾아온 속뜻은 김시습의 초상을 보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사진촬영이 불허될 만큼 보존에 신경 써서인지 김시습의 얼굴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영정각 바로 앞의 안내판에 소개된 “김시습 초상”은 이러했습니다.
“김시습 초상”은 좌안7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밀화영의 끈이 달린 평량자형의 입을 쓰고 담홍색 포를 입고 있으며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과 의복은 옅은 살구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색상의 미묘하고 절제된 조화로 묘사되고 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은 ”찌푸린 눈섶에 우수띈 얼굴이라“고 묘사했던 서유영(1801-1874)의 배관기와 상통하는데, 눈의 총기가 생생하다.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라는 인물사적 가치위에 조선시대 이복초상화의 가작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법명은 설잠(雪岑)으로 이 절에서 입적했습니다.
영신각 옆의 산신각을 둘러본 후 일주문으로 내려가다 중간에 오른 쪽으로 나있는 등산로로 들어섬으로써 무량사 탐방을 마쳤습니다. 이 절 밖에 세워진 김시습의 부도를 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습니다. 절에 들어갈 때는 나올 때 보려고 들르지 않았고, 절을 떠날 때는 일주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만수산으로 바로 올라가는 바람에 그냥 지나쳤습니다.
내친 김에 여기서 매월당 김시습의 삶과 철학을 간략하게나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매월당의 삶속에는 다음 네 가지의 처절하다고 할 수 있는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과정이 있었다고 박태상 등이 지은 『국문학개론』 은 적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어머니를 잃은 후의 고독과 애상감으로 상징되는 ‘고아의식’이고, 둘째는 불의에 대한 저항과 방외적인 삶이며, 셋째는 자유분방한 사고와 기행이고, 넷째는 유, 불, 선의 변증법적 인식 등입니다.
김시습의 세계관은 일기탁약론, 정기이산설과 원이무물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일기탁약론(一氣槖籥論)이란 천지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기가 풀무질을 할 따름이라는 이론으로,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신(神)이나 해로움을 주는 귀(鬼) 모두가 기(氣)의 작용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김시습이 주장한 정기이산설(精氣已散說)은 간략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정신과 기운이 흩어지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뚱이는 땅으로 내려가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원이무물론(圓而無物論)이란 하늘을 그 형태가 둥글되 물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이릅니다. 기(氣)의 작용으로 일월성신의 움직임, 추위와 더위, 주야의 바뀜이 일어난다는 주기론적 입장에서 정립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김시습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이유를 기가 끊임없이 회전하고 건행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김시습의 삶과 세계관이 잘 반영된 소설이 다름 아닌 『금오신화(金鰲新話)』입니다. 제가 『금오신화』를 처음 접한 것은 2010년 방송대국문과에 입학해 가입한 한 스터디 모임에서입니다. 『금오신화』에 실려 있는 다섯 작품 「이생규장전」, 「만복사저포기」,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과 「용궁부연록」 모두를 원문으로 공부한 덕분에 지금 다시 원문을 보아도 그때 학습한 기억이 남아 있어 생경하지 않습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갖는 소설사적 위상은 박태상 등의 『국문학개론』에 다음 5가지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소설이라는 소설 장르를 개척한 공적, 전기소설의 새로운 소설을 구축한 업적, 사회현실을 우회적으로 묘사하여 사실성을 강화시킨 공로, 「전등신화」와 「태평광기」 등의 중국문학을 수입하여 독창적이고 새로운 문학을 창조해낸 점, 그리고 역사 속에서 숨쉬고 있는 생명력을 지니는 텍스트를 창조해낸 점 등 5가지입니다. 그중 논쟁 중에 있는 최초의 소설이냐는 별도로 한다면 나머지는 충분히 수긍할 만 합니다.
저는 한 마디로 매월당 김시습을 자유인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유, 불, 선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글을 쓴 방외문인이었습니다. 그저 그런 사대부로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저항문인으로, 혁명적 사상가로, 휴머니스트로 살다 간 인물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당대로는 보기 드물게 여기 저기를 주유한 뛰어난 여행가였습니댜. 이런 까닭에 그를 제 블로그에 초대하여 소개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