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마뇽 2007. 1. 3. 15:53
                                                     A-18.비학산(2)


                                    *산행일자:2006. 7. 16일

                                    *소재지  :경기 파주

                                    *산높이  :450미터

                                    *산행코스:초리골입구-395봉-비학산-장군바위

                                                    -근린공원절개면상단-승잠원-초리골입구

                                    *산행시간:11시35분-18시(6시간25분)

                                    *동행       :청파 윤도균님


  뻥 뚫린 하늘에서 거침없이 쏟아 붓는 장대비도 고향산을 오르겠다는 선배분과 제 뜻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의 산하”사이트를 통해 인사를 드린 고향선배이신 청파님과 함께 하는 첫 번째 산행이라서 아침부터 가슴이 설렜지만 하도 비가 줄기차게 내려 과연 오를 수 있을 까 걱정도 됐습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10시에 의정부북부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의정부에서 금촌행 버스를 집어탄 후 반시간이 더 지나  법원리 초입의 초리골입구에서 내려 비학산 산행을 준비했습니다. 제 고향인 파주시의 법원리  초리골을 에워싸고 있는 해발 450미터의 나지막하고 아담한 비학산은 1968년 1.21사태 때 북에서 남파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서울로 가는 중 이 산속에서 숨었다가 땔감을 구하고자 나무하러 올라간 현지 주민에 발각되어 신고된 무장공비의 침투루트였습니다. 두 해전 파주시에서 산림욕장으로 개발하여 새롭게 선보였는데 휴전선과 가까워서인지 아직은 찾는 산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 자연그대로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한적해 산행하기에 좋았습니다.

 

  아침11시31분 56번도로 상의 초리골안내석이 세워진 삼거리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전통혼례 예식장인 승잠원을 거쳐 초계탕 옆 목교위로 계곡을 건너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한손에는 스틱을, 또 한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팔각정으로 올라서기까지 15분간 산 오름이 급했습니다. 팔각정에서 북동쪽으로 난 나무계단 길로 내려서야 할 것을 짙게 깔린 안개와 퍼붓는 비로 판단을 잘못하여 남동쪽으로 난 희미한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표지리본을 확인하며 반 이상을 내려갔다가 산 밑으로 시꺼먼 흙탕물이 급하게 내닫는 계곡이 내려다보여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하고 팔각정으로 원위치한 시각이 12시56분이었으니  어림잡아 40분가량은 알바를 한 셈입니다.  알바 끝에 다시 찾아 오른 팔각정에서 선배분께서 준비해온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팔각정에서 북동쪽으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안부로 내려섰다가 무명봉에 오르는 길에 무장공비숙영지가 1.2키로 남았음을 안내하는 표지목을 보았습니다.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기습할 목적으로 남파된 무장공비들이 능선에서 숨어 잤을 리가 없었기에 틀림없이 산 중턱 어디인가 그들의 비트가 남아 있을 터인데 이 길을 지난겨울에 이어 이 길을 두 번째 지나면서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월동용 땔감으로는 볏짚과 가까운 산에서 해대는 나무가 전부였던 1960년대여서 나무하러 산에 간 현지주민이 발견하고 제 때에 신고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10년 후에만 내려왔어도 이미 연탄이 보급된 터라  나무하러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또 지금처럼 등산인구가 많지 않아 산속에서 발각되어 신고 될 리가 거의 없었기에 말입니다.


   13시59분 은굴을 지났습니다.

남파간첩의 은신처로 사용되지 않도록 입구를 폐쇄한 이 굴이 지난세기 초에는 은광의 갱도였음을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전혀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은굴에서 내려서 제1하산로가 나있는 안부를 지나자 길섶의 우거진 풀들과 잡목들이 얼굴을 스쳤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395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왼쪽으로 꺾어 십 수분을 걸어 완벽하게 비를 가릴 수 있는 대피소에 다다랐습니다. 한 겨울에도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바람막이 비닐커튼을 해 놓았고 안에다 커다란 식탁과 의자를 두 세트 설치해 놓아 편히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김밥과 절편, 그리고 과일 몇 개가 차려진 점심상의 전부였지만 고향 산에서 고향선배님과 함께한 소찬은 시내 유명음식점에 들러 먹는 성찬보다 몇 배 더 맛있었습니다. 대피소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 넓은 임도로 내려섰다가 140미터가량 고도를 높이고자 치받이 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15시25분 길지 않은  암릉 길을 지나 평평한 봉우리의 비학산에 올라섰습니다.

수많은 표지리봉 들이 나무 가지에 걸려있지 않았다면 이렇다하게 표지될만한 것이 없어 과연 이 봉우리가 비학산 정상인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정자도 세우고 나무계단도 놓고 표지목도 곳곳에 세워놓는 등 나름대로 길을 다듬느라 애쓴 파주시청에서 이곳에 정상석이나 표지목을 세워놓았다면 금상첨화였을 터인데 화룡점정의 마지막 노력이 빠져 아쉬웠습니다. 정상에 올랐어도 운무로 시야가 차단돼 제가 다닌 초등학교 뒷산인 해발 293미터의 금병산이나 집 떠날 때 이어서 오르고자 했던 해발 496미터의 파평산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커 환풍구가 정상석을 대신한 비학산을 출발해 다시 대피소 삼거리로 돌아왔습니다.


  15시56분 지난겨울 저 혼자서 이 산을 찾았을 때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쳤던 장군바위를 들렀습니다. 나무로 만든 전망대를 받쳐주는 암괴가 장군바위일 듯싶은데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초리골이 한눈에 잡히는 최고의 전망처인 장군바위도 제우스신의 심통을 당해내지는 못해 그 주위가 내리는 비로 희뿌옇지만 사진사로서 손색이 전혀 없는 선배분의 손놀림은 연신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바빴습니다. 다시 능선 길로 들어서 편안한 길을 걷다가 왼쪽으로 확 꺾어 매바위로 향했습니다.


  제2하산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하산하지 않고 매바위를 보기로 하고 직진을 했습니다.

0.4키로를 훨씬 지나서도 매바위를 보지 못해 이 바위도 무장공비은신처처럼 능선에서 한참을 비껴 서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철을 만난 버섯들의 향연이 볼만했지만 버섯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제가 그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묘사한다는 것이 능력 밖의 일이고 주제 넘는 일이기에 선배분의 잘 찍은 사진으로 가름하기로 했습니다.


  빗줄기는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그치지 않고 내렸습니다.

이 비가 며칠은 더 내린다 하니 수해가 클 것 같아 걱정되었습니다. 산에 미쳐 이 비에 산 오르기를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저희 모두 시골서 컸기에 농지가 유실되지 않을까 또 다 자란 농작물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습니다. 옛날처럼 민둥산이 아니어서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 것은 치산보다는 치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년 전 박대통령의 주도로 산림녹화사업을 벌린 것이 결실을 맺어 온 산이 푸르르고 그래서 우리의 산들이 웬만한 큰비도 모두 담아낼 거대한 저수지로서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기에 치산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무분별한 난개발로 물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야기되는 치수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장마철 집중호우나 태풍의 피해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치산치수가 한 나라의 최대 경영목표는 아니라 해도 해마다 반복되는 수해를 막는 길은 치산치수가 요체이기에 그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16시58분 묘지를 지났습니다.

저희들의 남진은 저녁 5시가 넘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4시간 반이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이 코스를 5시간 넘게 걸었어도 능선 길은 계속되었습니다. 팔각정에서 알바를 한데다 파평산 산행을 다음으로 미룬 터라 서두르지 않고 선배분과 이런 저런 살아왔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산행시간이 길어졌지만 더 할 수 없이 마음 편하고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빗줄기가 약해지고 산자락을 가득 메운 운무가 자리를 옮겨 잠시나마 산 아래 초리골 마을 전경이 잘 보였습니다.


  17시38분 근린공원바로위의 절개면 상단에 다다랐습니다.

산 아래로 법원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1970년대 초 서울 시내 동숭동에서 법원리로 다방을 옮긴 한 아가씨가 서머세트 모옴의 역작 “인간의 멍에”에 나오는 밀드레드와 꼭 닮았다며 이곳 법원리까지 쫓아와 만나고 간 30대에 요절한 한 친구의 열정이 지금도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절개면 상단에서 내림 길을 찾지 못해 제3하산로로 내려서는 갈림길로 되돌아왔습니다. 내림 길은 150미터로 짧았고 이내 오름길에 지나간 승잠원에 도착해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8시 정각 초리골 안내석이 서있는 56번 도로까지 걸어 나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32번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되나가 부대고기를 들면서 반주를 곁들였습니다. 산행 중 사진을 찍지 않으셨다면 저의 완보로는 도저히 잰 걸음을 따라잡지 못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으시고 또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선배 분을 마냥 부러워하며 구로역에서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남파공비가 발을 들였던 파주 땅의 비학산을 오르내리고 나서 집에 돌아와 국가와 민족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들고 올림픽 개막식장에 입장하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은 지금에 와서 당연 민족이 국가보다 우선한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는 분들이 꽤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정말 민족이 국가보다 더 지상의 가치인가는 한번 따져볼 일입니다.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다른 국가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같은 노선을 추구해야한다는 데는 저는 생각을 같이하지 않습니다. 민족이 최우선이라는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는 모 대학의 교수처럼 6.25 때 대한민국이 패망해 조선민주공화국으로 통일되었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될 것입니다만, 과연 그러했겠습니까? 김일성 정권이 한반도 전역을 지배했어도 한반도 남단에 지금과 같은 국부를 이루어 우리국민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남북의 통계가 그러하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굶어 죽는 것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최대의 죄악입니다. 동족의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백성들이 굶어죽도록 방치한 북한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공조해야하는 가는 분명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누구이든 또 어떤 민족이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시장경제를 따른 다면 우리들의 친구이자 우방입니다. 설사 같은 민족이라 해도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일당독재로 국민을 괴롭힌다면 그리고 호시탐탐 이 나라를 전복하고자  도전해온다면 그 나라는 적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소원이 통일이라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리 민족통일이 중요하다해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감악산과 파평산을 잇는 다음 산행을 기대하며 첫 번째 고향 산 탐방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아래 사진은 청파 윤도균 님이 찍을 것을 전재했습니다.

들머리 구간을 가는길에 만난 승잠원

초릿골이라는 음식점 마당을 들어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머리 구간이 나타나지요

어제부터 내리 비로 인하여 계곡물은 황톳물이되어 거세게 흐르고 있네요

통나무다리를 건너서...

암산 정상을 향하여

너덜 구간도 지나며 힘겹게 치고 오르는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드디어 팔각정이 나타나고 ...

처음만난 고향 후배 비엠떠블유님

김신조 언덕 오름길

은굴따라 목 계단길

은굴

비학산으로 가는길목 구간을 �아서 ...

제법 험준한 암릉길도 있었어요 비가 오는날이라 아주 조심조심 암릉구간을 넘어 가지요

이곳이 비학산 정상이지요 .

장군바위 방향으로...

어디가 장군바위라는것인지...?

잠시 조망도 되네요

다시 매 바위 방향으로...

매바위 등산로를 따라 가보지만

매바위 등산로 방향으로 ...

그러나 역시 또 어디를 가도 매 바위는 보이지 않고 헛걸음질만 하였지요

근린공원 방향으로 가지요

묘소도 지나고 ...

산행길 내내 이름모를 버섯들이 얼마나 즐비하게 많던지요

아무리 �아 보아도 매바위는 없었어요

근린공원능선에서 바라본 법원리 시가 모습

근린공원 방향으로

하늘동산 근린공원

드디어 우리들이 입산할때 보았던 초릿골이라는 음식점이 저 멀리 보이네요


                             

 

                                                  A-18.비학산(1)


                                     *산행일자:2005. 12. 10일

                                     *소재지  :경기 파주

                                     *산높이  :비학산 450미터

                                     *산행코스:두루뫼박물관-은굴-대피소-장군봉-매바위등산로

                                                     -2코스하산로-두루뫼박물관

                                     *산행시간:14시40분-17시12분(2시간30분)

                                     *동행      :나홀로

 

  1968년 1월 21일 저는 입학시험을 치르느라 서울의 한 대학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간 배우고 익힌 실력을 단 한 톨도 남김없이 짜내느라 진을 뺐던 그 날은 바로 북한의 김일성정권이 남파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코자 자하문을 넘다가 우리 군경에 의해 저지된 1.21사건이 일어난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제 운명을 결정할 대입시험을 보느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집에 돌아와 라디오 뉴스를 듣고서야 실로 엄청난 사건이 수도서울의 청와대 코앞에서 터졌음을 알았습니다.


  어제는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향하는 중 잠시 숨어 있다 현지 주민에게 발견되어 신고된 초리골을 찾았습니다. 나지막한 산들이 “ㄷ”자 모양으로  삥 둘러싼 초리골은 경기 파주의 법원리에 인접한 곳으로 해발 450미터의 비학산을 최고봉으로 해서 2-3백미터대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연이어 있는데다 파주시에서 작년에 산림욕장으로 조성해 놓아 아직도 때 묻지 않고 숨어 있는 산을 조용히 걷고 싶은 산객들에는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지난 달 우연히 “한국의 산하”에서 비학산 산행기를 읽고 나서 이제껏 이토록 좋은 고향 산을 모르고 지나왔나 싶어 부끄러우면서도 또 한편 놀랐습니다. 어제 마침 초등학교 동창회가 저녁 5시 불광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어 초리골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모임에 들르는 것으로 일정을 잡고 오전 11시 조금 지나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오후 1시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법원리를 막 벗어나 초리골 입구를 지난 것은 오후2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초리골입구에서 북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전통혼례를 치르도록 설비된 우리고유의 결혼 터 승잠원을 조금 지나 초계장에 다다랐습니다. 이곳에서 오른 쪽 들머리인 목교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게 되는데 해지기 전에 모든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시간을 단축하고자 20분 가까이 안으로 더 들어가 두루뫼 박물관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초리골 입구에서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산속에 푹 파묻혀 있는 초리골 여기저기에 갓 지은 듯한 팬션 들이 눈에 띄었고 북사면의 음지에 쌓여있는 흰눈이 매서운 삭풍과 쇠 소리가 날 듯한 추위를 전해줄 듯 냉랭하게 보였습니다. 강 위수/김 애영님 부부가 1998년에 세운 이 박물관은 삼국시대의 토기와 물레 등 2,500여점이 전시된 민속생활사 전문박물관으로 다음에 시간을 내어 꼭 한번 관람하기로 하고, 바로 박물관 왼쪽의 제법 넓은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14시40분 두루뫼박물관에서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넓은 산길은 골짜기 초입에서 이내 끝나고 더 이상 길이 나있지 않아 별 수 없이 산등성을 향해 똑바로 치켜 올랐습니다. 두 곳의 산소를 지나서 능선 길에 올라서기까지 20분 남짓하게 흰눈도 밟았고 잡목도 헤쳐 가며 산을 오르느라 땀깨나 흘렸습니다. 초계장 안내판에 두루뫼박물관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분명 표시되어 있었는데 짖어대는 개들을 피하느라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올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쉬지 않고 바로 왼쪽으로 난 능선 길을 따라 산행을 계속했습니다.


  15시41분 은굴을 지났습니다.

제 고향 파주에 광산이, 그것도 은광이 있었다는 얘기를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바로 이 은굴이 1900년대 초기 은을 채굴했다 1960년대에 폐광한 은광의 출입구였다 합니다. 두루뫼 박물관에서 치고 올라선 능선에서 이곳 은굴에 닿기까지 두 곳의 봉우리와 안부를 지났습니다. 첫 봉우리에서 내려선 안부는 왼쪽으로 하산하는 1코스하산로가 갈리는 분기점이었고 이 곳에 세워진 표지목이 대피소까지 3키로 남았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두 번째 오른 봉우리에 이곳이 무장공비침투루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고 다시 안부로 내려서자 왼쪽으로 0.7키로 내려서면 초리골에 닿는 갈림길이 나있었습니다. 김 신조 일당이 숨어 있었던 비트가 능선 길에서 벗어나 산 밑으로 0.14키로 떨어져 있어 들르지를 못하고 그냥 지나쳐 아쉬웠습니다. 초리골 연봉들을 자연휴양림으로 다듬어 놓은 파주시에서 봉우리마다 나무의자를 설치해 산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고 경사진 길에는 나무계단과 로프를 매어 놓고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놓아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16시8분 삼각점이 세워진 395봉에 올라섰습니다.

은굴바로 위의 봉우리에 올라서자 억새들이 밭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트였습니다. 이 억새밭을 지나 395봉에 올라서자 먼발치 남동쪽으로 양주의 불곡산 암벽들이 눈에 잡혔습니다. 북동쪽으로는 감악산이 보였고 거의 같은 방향 가까이에 비학산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냉수로 목을 축이며 잠시 쉬는 동안 해안에 어떻게 이 산을 빠져나갈까 생각하다가 초리골을 둘러싸고 있는 주 능선만 밟기로 결심하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피소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16시14분 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대피소에서 오른 쪽으로 떨어져 있는 해발 450미터의 비학산을 오르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 바로 장군바위 쪽으로 향한 것은 비학산이 주 능선에서 벗어나 있고 갔다 오는 데만 반시간 가까이 걸릴 것 같아 해지기 전에 하산이 어렵겠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얼마 후 장군바위가 등로에서 밑으로 0.1키로 떨어져 있고 매바위등산로가 2.9키로 남아 있는 해발 405미터의 장군봉을 올랐습니다. 서쪽 멀리 해넘이의 석양을 받아내고자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조강과 그 유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번 산행의 최고봉인 비학산을 주 능선에서 벗어났다고 지나쳐온 제가 똑 같은 이유로 이번 산행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장군바위도 그냥 지나쳤습니다. 서해로 내려앉는 석양이 봉우리에 올라서면 보였다가 안부로 내려서면 보이지를 않아 마음이 다급해지면서도 봉우리에 올라 설 때 마다 아직 지지 않고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석양이 고마웠습니다. 두발을 재촉해 매바위로 정신없이 내달려 올라선 325봉에서 조금 내려가다 왼쪽으로 확 꺾어 1.4키로 떨어진 매바위등산로로 질주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닥쳐올까 마음이 다급한 것은 저 혼자였을 뿐 먹이 감을 찾아 나서 양 날개를 한껏 펴고 천천히 산골짜기 위를 날고 있는 매의 움직임은 더 없이 여유로웠습니다.


  17시 정각 매바위 0.4키로 전방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2코스하산로로 내려섰습니다.

겹겹이 쌓인 낙엽을 지근지근 밟아가며 7분간 길을 걸어 해지기 전에 산속을 완전히 빠져 나오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고 땀이 식어 냉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17시12분 두루뫼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와 2시간 32분간의 아주 짧은 원점회귀산행을 전부 마쳤습니다. 애초에 늦게 출발한데다 해지기 전에 산행을 마치고자 초리골을 에워싸고 있는 연봉들만 오르내리겠다고 한터라 비학산과 장군바위를 들러보지 못했고 초입의 초계장에서 시작하지 않고 안으로 한참 들어와 두루뫼박물관에서 출발해 반쪽자리 산행이 된 것 같아 산행기를 올리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가는 길목을 알았기에 조만간 다시 한번 초리골을 찾아 비학산도 오르고 먼 원을 그리며 느긋하게 연봉들을 종주할 뜻입니다.


  그간 생포된 무장공비 김 신조 씨는 그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살고 있고, 1.21사건 이후 무장공비침투루트를 자연휴양림으로 조성하여 개방할 정도로 남북관계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 때의 긴장과 분노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어찌했던 1.21사건으로 안보의식을 새롭게 하고 국부를 쌓아나가겠다는 의식을 새롭게 한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1968년 당시만 해도 남한을 훨씬 앞질렀던 북한의 국부가 1972년을 기점으로 반전되어 이제는 국제사회의 도움 없이는 주민들이 배를 골리는 상황으로 급전직하 한 것은 더 이상 그쪽 체제로 주민들을 이끌고 갈 수 없기 때문일 터인데 그들이 이 자명한 이치를 깨닫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흘려보내야 하는지 답답함이 느껴져 무장공비침투루트를 밟은 초리골 연봉산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