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마뇽 2007. 1. 3. 16:53
                                                        D-3.깃대봉

          

                                   *산행일자:2006. 10. 1일

                                   *소재지  :전북장수/경남함양

                                   *산높이  :깃대봉1,019미터/영취산1, 076미터

                                   *산행코스:무령고개-영취산-민령-깃대봉-육십령

                                   *산행시간:10시30분-15시15분(4시간45분)

                                   *동행      :송백산악회

 

 

  깃대봉이어서 깃대가 꽂혀있는 것인지 아니면 깃대가 세워져 있어 깃대봉으로 불리는 지는 확실히 몰라도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이만한 높이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기는 이봉우리가 처음입니다. 무릇 산이란 뭐니 뭐니 해도 그 높이가 산의 모든 것을 대표하기에 산 높이는 낮아도 바다 한 가운데 자리를 잘 잡은 덕에 명산 100산의 반열에 들은 홍도의 깃대봉 뿐만 아니라 경기도 가평의, 충북 괴산의, 전남순천의, 그리고 경남 마산의  깃대봉 모두가 여기 이 깃대봉을 우러러보는 것은 한반도 남단에서 깃발이 펄럭이는 깃대봉 중에는 이 봉우리가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이 높은 봉우리가 깃발을 휘날리며 기리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가안위가 위태롭다는 노병들의 나라걱정이 이슈화된 요즈음 이 깃대봉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서쪽에 생가가, 동쪽에 무덤이 자리한 조선의 여인 논개의 충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여인의 비극적 삶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대로 살아야했던 논개의 일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지지리도 못난 조선남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1574년 영취산 북쪽의 주촌마을에서 태어난 지 열세해 되던 해 논개는 부친 주달문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못난 남자를 만나는데 그가 숙부인 주달무입니다. 주색잡기에 빠진 주달무는 논개를 장수토호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먹습니다. 논개 모녀의 저항으로 일이 뒤틀리자 장수현감에게 소를 올리는 못난 짓을 또다시 저지릅니다. 다행히 현명한 현감을 만나 논개모녀는 무죄로 방면되나 오갈 데가 없는 이들은 현감부인의 병수발을 들게 됩니다. 끝내 부인이 살아남지 못하고 목숨을 거두자 현감은 논개를 부인으로 맞아들입니다. 이 분이 바로 몇 년 후 임란 때 경상우병사가 된 최경희 양반입니다. 진주성싸움에서 성을 뺏긴 최경희는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여 다른 장수들과 함께 남강의 촉석루에서 강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합니다. 장수가 죽어야 할 곳은 전쟁터이지 풍광이 뛰어난 곳에 세워진 정자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장에서 죽을 수 없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아 백의종군해야지 자기 혼자도 아니고 여러 장수들과 동반 자살을 했다는 것은 스스로 장군이기를 포기한 못난이 짓입니다. 보십시오. 남편 최경희의 죽음을 접한 논개는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그녀는 가짜로 기생원부에 적을 올려 왜장 게다니무라 로꾸스께에 접근 합니다. 혹시나 깍지 낀 손가락이 풀릴까보아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남편이 자살한 그 장소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그녀의 주도면밀함을 보노라면 경상우수사 최경희 장군의 못난 행동과 너무나도 대조된다는 생각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충절은 같아도 지략이 다르면 이렇게 결과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후손들이 경상우수사 최경희는 기억하지 못해도 논개의 충절은 오늘도 노래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못난이 짓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아비를 일편단심으로 섬기고 나라를 지키고자 몸을 던진 논개는 분명 양처이자 충절의 여인임에 틀림없어 문주의 영광일터인데 주씨 문중의 남자들은 왜군들의 보복이 두려워 장수지역 의병들이 남강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논개의 시신을 거두어주기를 거절합니다. 주씨 문중에 버림 받은 논개의 시신은 결국 대간을 넘어 타관 땅인 깃대봉 동쪽 기슭인 함양의 서상에 묻힙니다. 그리고 그 후 382년이 지나 1975년에 묘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충절의 여인 이야기는 끝납니다.


  만해 한용운 님은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라는 시에서 시인으로 논개의 애인 되었다고 이렇게 읊었습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수주 변영로선생도 그의 시 “논개”를 통해 그녀의 충절을 찬양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중략....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사람은 시인들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녀의 생가와 묘지를 가르는 대간 길을 밟는 산님들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대간에서 태어나서 대간에서 묻혔다하여 대간의 여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깃대봉을 오르는 모든 산님들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죽음으로 이 나라를 지켜낸 논개가 대간과 대간꾼들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 같아 그녀의 일생을 간략히 되돌아보았습니다.


  잠실벌의 휴일 아침은 생기가 넘쳐흘러 좋습니다.

부지런히 반가운 분들과 인사를 나눈 후 버스에 올라 가을 나들이를 시작했습니다. 잠실 출발 3시간이 넘어서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무령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영취산에서 뻗어나가는 금남호남정맥의 첫 번째 안부인 무령고개는 바로 아래 식수도 있고 화장실도 깨끗할 뿐 아니라 그늘이 좋아 한 여름에도 쉬어갈 만한 곳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쏜살같이 들머리로 들어서야해 그냥 지나치기가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아침10시30분 무령고개를 출발했습니다.

가파른 절개면과 된비알의 비탈길을 올라 해발 1,078미터의 영취산 정상에 다다르기까지 20분이 걸렸습니다. 작년 8월 땡볕 더위에 대간 종주 차 저 혼자서 중재-영취산-육십령을 하루에 뛰었는데 영취산에서 깃대봉을 거쳐 육십령으로 내려서는데 꼬박 6시간이 걸렸기에 무령고개에서 육십령까지 5시간 안에 마치겠다는 산악회의 운행계획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됐습니다.  영취산에 올라서자 고도가 1,200미터가 넘는 두 고봉 백운산과 장안산이 한눈에 잡혔습니다.


  12시10분 경 두 번째 전망바위에서 안부로 내려서 숲 속에서 점심을 들기까지 편안한 산행을 즐겼습니다. 작년에는 땡볕에 남사면이 절벽인 암릉길을 걷기가 고역이었는데 이번에는 황금빛 벼들이 넘실대는 서상 쪽 들판이 평화롭게 보였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작년보다 이산 저산 많이 보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백운산-영취산의 대간 길이, 서쪽으로는 영취산-장안산의 정맥길이, 그리고  동쪽으로 황석산-거망산 산줄기가 뿜어내기 시작한 가을빛깔이 발걸음을 더디게 했습니다. 하늘이 높아져 다른 때보다 훨씬 멀리 보였지만 아쉽게도 논개의 죽음을 받아들인 진주남강은 가시권 밖에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과 함께 맛있게 점심을 들고 나서 민령으로 향했습니다.

대간 길에서 가장 튼실한 산죽 숲을 지났습니다. 키를 넘는 산죽의 푸르름은 논개의 화신인 듯 싶었습니다. 북바위에서 내려다 본 대곡호가 아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민령보다는 민재로 불러야 제 맛이 난다는 어느 대원분의 지적대로 민령고개는 밋밋했습니다. 민령에서 깃대봉으로 향하는 오름길이 지난 여름에는 마의 길이었는데 그때의 풀숲길이 억새 길이어서 사진찍기에 바빴습니다. 죽은 영혼을 불러내어서라도 대간의 여인 논개와 사진을 같이 찍을 수 있다면 애인을 자처한 만해선생이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겠다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4시10분 해발1,019미터의 깃대봉을 올랐습니다.

장수덕유와 남덕유 사이의 안부가 꽤 깊게 보였고 그 앞에 자리한 합미봉의 암봉들이 의젓해 보였습니다.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청마 유치환 선생의 “깃발”을 떠 올렸습니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줄을 안 그는.



논개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저기 저 깃발을 처음에 단 이가 누구인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샘터에서 목을 축였습니다. 육십령으로 내려서는 하산 길도 편안했습니다. 작년 8월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이번 산행으로 다 사라졌습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분들과의 산행에다 가을날씨의 쾌적함이 더해져 산행속도도 저절로 빨라졌습니다.


  15시15분 육십령에 도착해 하루산행을 마쳤습니다.

영취산에서 육십령까지는 지난해보다 1시간35분이 단축된 4시간 25분이 걸려 산악회에서 정해준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육십령은 장장 59회의 출산으로 대간 길을 모두 밟은 두 부부 분들의 졸업식장이 되었습니다. 산적들이 두려워 육십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해서 불리는 육십령에서 육십명이 훨씬 넘는 송백님들이 이 분들의 완주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송백 님과 더불어 대간의 여인 “논개”도 이분들의 종주를 축하했을 것입니다. 저도 축하드립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