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I.지역 명산/지역명산 탐방기

A-41.앵자봉 산행기

시인마뇽 2008. 10. 21. 19:43

                                    앵자봉 


            *산행일자:2008. 10. 17일(금)

            *소재지  :경기 광주

            *산높이  :앵자봉667m, 소리봉615m

            *산행코스:천진암주차장-소리봉-박석고개-앵자봉-양자산갈림길

                      -455봉-천진암주차장

            *산행시간:10시56분-16시20분(5시간24분)

            *동행    :서울사대 동기 4명 (이상훈, 오순문, 원영환, 우명길)

 



  대학동기들과 여러 명이 함께 산행하기는 정말 오랜만의 일입니다.

1971년4월 졸업여행 길에 설악산을 오른 후 처음 일이니 무려 37년만입니다. 그동안 덕유산을 비롯해 몇 산을 함께 오른 이상훈 교수가 이번 산행을 주선했고 앵자봉을 세 번째 오르는 제가 길안내를 맡았습니다. 졸업 후에 죽어라고 일한 덕분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부도 웬만큼 쌓았고 명성도 얻어 이제는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는 것이 잘 어울릴 정도가 됐습니다. 산에 미쳐 골프를 일찌감치 포기한 저로서는 이들과 함께 운동할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 교수가 이번에 어렵게 산행을 주선해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이번 산행의 목적지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자생적 발상지인 천진암이 들어선 앵자봉입니다. 이 교수 차로 천진암 입구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산행이 천진암 입구를 출발해 천진암을 가운데 놓고 그 둘레 산줄기를 빙 돌아 다시 천진암 입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산행이어서 천진암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아침 10시 경에 수서역을 출발해 천진암에 도착하기까지 50분가량 걸렸습니다. 길은 시골 길인데 포장이 잘 되어 남한산성과 퇴촌을 지나 천진암까지 신나게 달렸습니다.


  이 길을 1779년 이전에 냈다면 권철신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여기 천진암으로 천주교를 강학하러오기가 한결 쉬웠을 것입니다. 인류문명의 교류 길을 실크로드(silk road)로 부르듯이 천주교가 퍼져나간 길을 저는 헤븐 로드(heaven road)로 부르고자 합니다. 천진암이 천주교의 자생지라는 이야기는 로마에서 동방으로 뻗어나간 헤븐 로드가 북경에서 끝났고 이곳까지 이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길이 나있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은 그 길이 무엇이든 고난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분들이 고난의 길을 걸은 것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처음 걸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황 베드로도 새벽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은 예수님이 걷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잘 알고 있어 그 길을 따르기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새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춘 사람들이 많습니다. 형제들과 같이 천주학의 길을 걷다가 포기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다산 정약용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도 잠시 길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합니다. 천진암까지 헤븐로드를 낸 것은 로마교황청이 아니고 바로 천진암터에 묻힌 이벽, 권철신, 이승훈, 권일신과 정약종 등의 성현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의 순교덕분에 천진암 가는 길이 편해진 것입니다.


    오전10시56분 천진암 주차장을 출발해 소리봉으로 향했습니다.

주차장을 출발한지 얼마 안지나 다다른 숭실대 실습림 앞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묘지 위 능선에서 조금 더 올라가 오른 쪽 아래 강동고교수련원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르자 오름길이 급해졌습니다. 인천사는 한 친구의 숨소리가 가쁘게 들려 산행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때마침 새빨갛게 불타오르기 시작한 단풍들을 완상하며 천천히 올랐습니다. 하늘은 쾌청했고 공기가 선선해 산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지난 7월 올랐을 때 보다 한낮의 기온은 끽해야 7-8도 차이가 날 뿐인데 온도차 이상으로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그 때보다 낮이 훨씬 짧아져 땅덩어리가 열 받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12시10분 해발615m의 소리봉을 올랐습니다.

오름 길은 여전히 가파른 편이었는데도 주고받는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화제를 선점한 오교수가 던진 화두는 15세기 초 콜럼버스보다 반세기 앞서 바다 길을 연 명나라의 삼보대감 정화(鄭和)였습니다. 쇄국정책으로 쇠잔해가는 명국을 중흥시키고자 바다에 눈을 돌린 성조임금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7차에 걸친 하서양(下西洋)사업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바다에 실크로드를 연 정화나 히말라야 14봉을 완등한 우리나라의 산악인 박영석, 엄흥길, 한왕용 제씨를 보더라도 개척정신은 서양인들이 독점한 것이 아니다 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소리봉에 올라 짐을 내려놓고 얼마동안 쉬면서 가을을 맞았습니다. 쏜살같이 달려와야 할 소슬바람은 한 여름을 방불 하는 더위에 밀려 멈칫거렸지만, 단풍은 이에 아랑곳 않고 부지런히 뛰어 와 이 산을 적황색으로 변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실크로드 전문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정수일 교수는 그의 저서 “실크로드학”에서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의 범칭”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이트 호펜이 처음 쓴 실크로드는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과 서부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뜻했습니다. 이 교역로를 통해 주로 수출된 물품이 비단이어서 실크로드라 불렀는데 그 후 실크로드는 계속 확장되어 이제는 전통적인 오아시스로(oasis road)외에 유라시아지역의 북방지대를 지나는 초원로(step road)와 지중해에서 홍해, 아라비아해, 인도양을 지나 중국남해에 이르는 남해로(southern sea road)의 3대 통로로 분류됩니다. 삼보대감으로 불리는 정화(鄭和)가 명 황제 성조의 명을 받들어 1405년부터 28년 동안 7차에 걸쳐 하서양(下西洋)을 떠난 통로가 남해로였습니다. 정화의 하서양은 콜럼버스보다 반세기 앞섰고 그 규모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습니다.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3척의 경범선에 기함의 적재량이 250톤이고 선원이 모두 90명이 전부였는데 정화의 제1,3,4,7차 출해 시에는 매번 200여척의 대소 선박에 승선인원이 27,000명에 이르렀고 적재량이 1,500톤이고 길이가 138m, 너비가 56m인 보선이 20-30척씩 출동했다 합니다. (이 부분 정수일 님이 지은 ‘실크로드학“에서 많이 따왔습니다.)  


   13시가 조금 넘어 점심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소리봉에서 앵자봉으로 가는 길은 북동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송전탑을 따라 넓게 낸 길을 걸어 왼쪽 아래로 청소년수련원 길이 갈리는 박석고개에 다다랐는데 그 쪽 길이 막혀 있어 소리봉으로 빙 돌아 앵자봉을 올라야 했습니다. 박석고개에서 오름 길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공터가 있는 봉우리에서 짐을 풀고 점심을 들었습니다. 남정네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차린 점심상이 아무려면 아주머니들이 같이 와 차린 상만 하겠느냐 만서도 산상의 소찬이 산 아래 성찬보다 젓가락이 더 자주 가 모두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들었습니다. 그러느라 점심시간이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14시20분 해발668m의 앵자봉에 올라섰습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어 내려가는 백두대간이 속리산을 지납니다. 속리산에서 서쪽으로 가지 친 산줄기가 안성의 칠장산까지 이어져서 다시 남과 북으로 갈립니다. 이중 북쪽 산줄기는 강화도 맞은편의 김포에서 한강으로 침잠하면서 끝나는데 한강의 남쪽 울타리 산줄기라 해서 한남정맥으로 불립니다. 이 정맥이 용인 땅을 지나며 일군 문수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양수리의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바로 저희들이 오른 앵자봉을 지나 한남앵자지맥으로 불립니다. 앵자봉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이 봉우리를 지나는 한남앵자지맥 때문이 아니고 서쪽 아래에 100년 성당이 들어서는 천진암 덕분입니다. 앵자봉 동편에 있는 여주의 주어사(走魚寺)도 이 봉우리 서편에 자리한 광주 땅 천진암과 마찬가지로 권철신과 그를 따르는 유학자들이 같이 모여 천주학을 공부한 곳인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천진암과 대비됐습니다. 앵자봉에 올라 북동쪽으로 4Km 가량 떨어진 양자산을 조망한 후 다른 분의 도움으로 일행 네 명의 얼굴을 사진 한판에 담았습니다.



  우리나라 산봉우리는 섬에 있는 것들을 빼놓고는 어느 봉우리든 백두산의 장군봉으로 이어집니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를 확대 발전시킨 박성태 님이 그의 역저 신산경표에다 한반도의 산봉우리를 족보 식으로 담을 수 있는 것도 바로 모든 두 봉우리는 한 줄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개념을 확대해 에베레스트까지 한 줄기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지구과학을 전공한 원 선생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와 당혹스러웠습니다. 산이 만들어진 조산시기가 같지 않은데 어떻게 끊어지지 않고 한 줄기로 연결될 수 있느냐는 것과 운동권사람들이 사물놀이를 활성화시켰듯이 산경표 역시 이들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전파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산경표를 발굴해 전파한 분은 서지학자 이우형님이고 그것을 가지고 몸소 산줄기를 밟아 일일이 확인한 사람들은 산 꾼들이어서 운동권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은 명명백백한 일이지만, 지구상의 모든 조산운동이 일시에 일어나지 않았는데 산경표 이론이 타당하냐에 대해서는 한반도는 확실함을 분명하게 천명했지만 에베레스트까지 한 줄기로 이어갈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 불안한데도 아무런 검증 없이 마구 산행기를 써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이 친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15시34분 천진암으로 길이 갈리는 455봉에 다다랐습니다.

앵자봉에서 북서쪽으로 20분가량 걸어 헬기장을 지났습니다. 이내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갈리는 양자산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꺾어 한남앵자지맥 산줄기를 이어갔습니다. 이 갈림길에서 천진암까지는 처음 걷는 길이어서 혹시라도 길을 잘 못 들까 신경이 쓰였습니다. 성현 묘로 내려가는 길을 지나 몇 개의 봉우리를 연속해서 오르내렸지만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 힘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한번 쉰 후 455봉 바로 밑에서 해협산으로 내달리는 한남앵자지맥과 헤어지고 왼쪽으로 꺾어 천진암으로 하산하기 시작했습니다.


  16시20분 천진암 주차장으로 돌아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천진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했습니다. 천진암1.2Km 전방의 표지목을 지나서 왼쪽 아래로 철조망 옆길로 걸어 내려가 10분 후에 총무처장관 묘 앞에 다다랐습니다. 5-6분을 더 내려가 물이 조금 흐르는 계곡을 건너 낙엽송 숲 속으로 난 고즈넉한 산길을 걸었습니다. 가삼만 걸쳤다면 멈춰 서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어도 좋을만한 명상의 숲속을 빠져나가 천진암 주차장으로 내려섰습니다.


  천주교를 배교한 다산 정약용의 시화전이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성지 천진암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주님의 자비로움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천진암 안내책자 한 권을 받아들고 차에 올랐습니다. 이번 산행이 성지순례 길이 아니어서 성현들의 묘를 찾을 계제는 아니었기에 12년 전 집사람과 함께 찾은 그 때를 회상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당시 저는 카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집사람을 태우고 성지로 운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100년성당 터를 둘러본 후 성현들이 묻힌 묘지를 참배했습니다. 묘지에서 앵자봉으로 오르는 길은 계곡이 끝나는 곳부터 엄청 가팔라 힘들었습니다. 집사람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신앙심을 깊게 했을 것이고 저는 집사람과의 사랑을 돈독히 했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집사람을 보낸 후 세례를 받고 나서였으니 한참 늦은 셈입니다.


  귀가 길에 남한산성의 전통찻집을 들렀습니다.

우리 세 사람들은 맥주로 목을 축였지만 이 집으로 안내한 친구는 술 대신 차를 들어 이집 주인에 예의를 다했습니다. 사주팔자도 같이 본다는 여주인의 인생행로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이는 것은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 것처럼 역술가들도 자기 수를 제어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사주팔자는 고사하고 장난으로도 점 한 번 보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지나온 행적을 확인하는 것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견하는 것도 모두 다 제 일이기에 제 인생을 전혀 모르는 남에게 물어본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정화가 항해한 남해로의 실크로드는 가보지 못했어도 이벽, 권철신, 정약종, 권일신과 이승훈등 순교자가 낸 천진암으로 가는 헤븐 로드는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천주교강학 세미나에 지칠 즈음 원기를 회복하고자 올랐을지도 모르는 앵자봉을 같이 올랐습니다. 모두가 다른 분들이 먼저 낸 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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