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명산100산 탐방기

93.운문산 산행기

시인마뇽 2009. 12. 28. 10:49

                                                운문산

 

 

 

                            *산행일자:2009. 12. 18일(금)

                            *소재지 :경남밀양/경북청송

                            *산높이 :1,188m

                            *산행코스:석골폭포-석골사-선녀폭포-상원암-운문산정상

                                           -아랫재-삼양리버스정류장

                            *산행시간:7시36분-14시20분(6시간46분)

                            *동행 :나홀로

 

 

 

 

 

  운문산을 오르는 길에 상원암이 가까운 곳에서 여러 기의 돌탑들을 보았습니다.

산에서 돌탑을 만나보기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절 안에 안치된 탑들은 부처님의 유골이나 유품들을 공양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대다수라면 이렇게 산 길 옆이나 산마루에 세워진 돌탑들은 무병장수를 비는 중생들의 소박한 염원을 담아 세워졌을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저 돌탑들이 인간의 오만이 하늘까지 닿을뻔 했던 바벨탑과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며 탑을 쌓아가는 노아의 자손들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자, 우리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며 성읍과 탑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고 구약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산에다 쌓은 돌탑들은 중생들의 소박한 염원을 담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바벨탑에 비해 그 규모가 엄청 작아 하느님의 노여움을 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돌탑들은 주위의 산들과 잘 어울려 산신령께서도 이 탑들을 허물어버리고자 심술을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두려워 더 이상 바벨탑 쌓기를 멈춘 사람들이 요즈음은 산허리를 잘라내고 호화묘지를 만드는 등 산신령을 허투루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신령은 하느님처럼 대노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절대 오산입니다.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고 벌을 주지 않는 그런 자비롭기만 한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가 이제껏 산에 사는 산식구들과 진정어린 대화를 나누고자 애써온 것도 그리하는 것이 제가 오르는 산의 주인인 산신령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해서였습니다. 멀쩡한 산을 파헤치는 오만을 버리고 시산제를 지내는 겸허한 마음으로 가슴 속에 돌탑을 쌓아 갈 때  산신령께서도 저희들의 산 사랑을 내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침7시41분 석골폭포 앞에서 운문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고교동기 이규성 교수가 새벽같이 일어나 끓인 라면을 든 후 울산의 친구 집을 나섰습니다. 밀양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를 타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석골사로 향했는데 공사로 옆에다 새로 낸 진입로를 바로 찾지 못해 밀양 쪽으로 한참 더 가다 석골사 갈림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북쪽의 원서천을 따라 낸 좁다란 시골 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해 석골사를 십수m 앞에 둔 석골폭포 앞에서 저를 내려주고 출근한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석골폭포를 사진 찍느라 잠시 장갑을 벗은 동안 금세 손끝이 아릴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져 가리개로 얼굴을 감싼 후 진흥왕 때 지었다는 바로 위 석골사를 둘러보았습니다. 해발1,200m가 다되는 고산에 자리한 사찰이 이렇게 초라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이 절의 극락전 툇돌 위에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있어 이 절이 세속의 시계바늘을 한참 뒤로 되돌려놓은 듯 했습니다. 억산 갈림길을 지나 상원암 계곡 왼쪽 위로 난 길을 따라 동쪽으로 진행하다가 팔풍재 갈림길을 막 지나 상운암계곡과 대비골 계곡이 만나는 합수점을 만났습니다. 햇살이 퍼지지 않고 혹한의 냉랭한 공기가 골짜기를 메워서인지 물소리가 크게 나는 오른 쪽 아래 상운암계곡도 쌀쌀맞게만 보였습니다.

 

 

 

  9시4분 이름 모르는 폭포 앞에 다다랐습니다.

합수점에서 상운암 계곡을 따라 오르다 만난 범골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른 후 조금 더 동진해 떡밭재로 갈리는 삼거리를 막 지나 마른 계곡을 건넜습니다. 계곡을 건너 왼쪽 위 능선 길로 올라가다가 저도 모르게 왼쪽의 큰 바위 쪽으로 향한 것이 15분 넘는 알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거암 바로 아래 비를 가릴 만한 곳에 무속 신들을 모시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느라 갖다 놓았을 치성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이 바위 조금 위로 제법 물이 많이 흐르는 아담한 폭포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폭포가 지도에 나와 있는 선녀폭포려니 생각하고 사진 찍은 후 노란 표지기가 걸려 있는 바위를 조심해서 올랐는데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고 가파른 바위들이 앞을 가로 막아 당혹스러웠습니다. 억지로 오르면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스님들이 다니시는 상원암행 등산로가 이토록 위험한 바위 길일 리가 없다 싶어 일단 멈춰 서서 개념도를 꺼내 보았습니다. 상원암 가는 등산로는 이 폭포에서 조금 벗어나 북쪽으로 나 있어 이 바위 길은 정식 등산로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 힘들게 바위를 내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제 판단이 옳았다며 마음을 놓은 것은 몇 십m 돌아가서 상원암으로 올라가는 정식 등산로를 다시 만난 후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지도를 다시 보니 다녀온 폭포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고, 이곳에서 한참 더 올라가서 돌탑 오른 쪽에 보이는 폭포가 선녀폭포로 적혀 있었습니다.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 소나무 쉼터(?)에서 숨을 고른 후 오른 쪽 길로 내려가 계곡을 건넜는데 노란 표지기가 안내하는 폭포 위 계곡으로 계속 오르면 이곳에서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10시28분 상운암을 0.8Km 남겨 놓은 돌탑지대를 지났습니다.

폭포 위 계곡을 건넌 후로는 오름 길이 계곡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가로로 로프가 쳐진 바위 길을 지나 전망바위(?)에 이른 후에야 햇살이 와 닿은 것은 그동안 깊숙한 골짜기를 따라 걸어서였습니다. 한 여름에는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을 좁은 폭의 너덜겅을 지나고 나서 얼마 후 나무계단 길을 오르면서 이번 산행의 깔딱 길이 바로 이 계단 길이다 싶었습니다. 진안의 마이산에 쌓아 놓은 그것들보다 크기가 훨씬 작아 올망졸망해 보이는 돌탑지대에 이르자 돌탑의 형상도 중생들이 소원하는 가지 수만큼 꽤나 다양하다 했습니다. 오른 쪽 옆으로 얼음 덮인 높다란 폭포가 보였는데 지도상으로는 이 폭포가 선녀폭포인 것 같습니다만 가까이 가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돌탑지대에 세워놓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왼쪽으로 꺾어 올라 상원암으로 향했습니다.

 

 

 

 

  11시40분 해발1,188m의 운문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돌탑지대를 출발해 너덜 길과 산죽 길을 지나 상원암에 다다른 시각이 11시5분으로 태양이 정남쪽으로 거의 다 접근해 햇살이 따사로웠습니다. 이 산 초입의 석골사가 전날 들른 천성산의 내원사에 비해 많이 초라하듯이 상원암 암자 또한 그 규모가 천성산의 원효암에 훨씬 못 미쳐 이 암자에서 삭풍을 이겨내며 겨울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양철지붕의 허름한 관음전 앞의 넓은 공터가 6.25 때 소실되기 전에는 이 암자가 천진보탑으로 이름난 정진 터였음을 일러 주는 듯 했습니다. 상운암에서 왼쪽의 산죽 길로 산허리를 돌아 청도 쪽의 운문사에서 올라오는 능선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눈이 살짝 덮인 능선 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자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일품이었습니다. 서쪽 방향으로 우뚝 솟은 거봉이 6년 전 봄에 오른 가지산이고 24번국도 건너 남동쪽에 불룩한 봉우리는 그 이듬해 가을에 오른 능동산이어서 두 산 모두 눈에 익었습니다. 이번에 오른 상운암계곡을 가운데 두고 정상에서 남서쪽과 북서쪽으로 뻗어나가는 두 산줄기도 중간 중간에 거암들이 자리해 나름대로 수려해 보였습니다.

 

 

 

  11시50분 정상을 출발해 남명리 길로 내려섰습니다.

아침에 이 산에 들 때는 청도 쪽의 운문사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응달진 길을 오래 걸어 몸이 으스스한데다 떡밭재로 내려가는 능선 길에 눈이 살짝 덮였고 떡밭재에서 운문사로 내려가는 천문지곡 계곡길이 해가 들지 않는 북사면에 나 있어 적지 아니 춥겠다 싶어 이번에는 욕심 내지 않고 아랫재로 내려가 남명초교로 하산하는 짧지만 양지바른 코스로 바꾸었습니다. 십자안부 아랫재는 운무산과 가지산 사이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고개마루로 이 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엄청 가팔랐지만 암릉 길이 아니어서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 암봉을 오른 쪽으로 돌아 내려가 뒤돌아보자 곧추선 거암이 맞은편의 가지산과 맞서 한 판 겨룰 자세를 하고 있어 참으로 늠름해 보였습니다.

 

 

 

  12시50분 아랫재로 내려섰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 거암을 오른 쪽으로 에돌 때는 햇살이 따사롭다 했는데 그 아래 암릉 길을 햇빛이 닿지 않는 북사면의 왼쪽 길로 우회할 때는 가슴팍으로 냉기가 파고들어 응달진 북사면으로 내려가는 운문사 행 코스를 고집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잘했다 싶었습니다. 정상 출발 1시간 만에 해발고도를 500m넘게 낮추어 내려선 곳이 아랫재로 곧바로 진행하면 가지산으로 오르고, 좀 멀기는 하지만 운문사로 가려면 왼쪽 심심이골로 내려가야 합니다. 남명초교길이 오른 쪽 아래로 나있는 아랫재가 교통(?)의 요지여서인지 오가는 길손들의 가슴을 데워 줄 산방(山房)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加雲山房”(가운산방)이라는 명패를 단 이 산방이 문만 걸어 잠그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요기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휴업 중이어서 제가 싸간 인절미로 점심식사를 대신했습니다. 아랫재에서 3.9Km 떨어진 남명초교로 가는 오른 쪽 길은 경사가 완만해 하산길이 거저먹기였습니다.

 

 

 

  14시20분 24번 국도가 지나는 삼양리버스정류장에서 운문산 산행을 마쳤습니다.

평평한 활엽수 숲길을 지나며 빛바랜 단풍잎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새빨갛고 해맑았던 단풍잎들이 적갈색으로 많이 변해 칙칙했습니다. 한 겨울의 모진 삭풍을 견뎌내고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단풍잎을 보고 그 모습은 비록 말라비틀어져 추해 보였어도 목숨을 지탱해내는 끈질김 하나는 단연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이란 이처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지켜낼 수 있음을 가르쳐준 단풍잎을 뒤로 하고 한참 동안 더 내려가 산속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양 옆이 모두 사과밭인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가며 따다 남은 사과를 보고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줄 알았는데 현지 주민의 이야기인즉 키가 닿지 않아 따지 못한 것이라 합니다. 남명초교를 조금 못가 24번 국도가 지나는 삼양리 정류장에서 밀양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른 지역보다 일교차가 더 커 당도가 높기로 소문난 “얼음골사과‘를 사먹었습니다.

 

 

 

  운문산 산행을 마치면서 제가 진정 아쉬워한 점은 운문사를 들르지 못한 것입니다.

운문산 북쪽 산줄기의 한 자락에 자리한 경북 청도의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가 오랫동안 기거하셨던 도량입니다. 260여명의 학승들이 4년간 경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 나라 최대의 비구니교육기관인 운문사를 탐방하고 싶었던 것은 이 나라 정신문화에 샘을 제공하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를 만나보고 싶어서였습니다. 1206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신 일연선사께서는 22세 때 승과시험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했을 만큼 총명한 분이어서 왕명을 받들어 주요한 불사를 많이 주관하셨다 합니다. 왕명에 따라 운문사로 옮긴 것이 75세 때의 일이고 79세에 인각사로 옮겨 우리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완성하셨다 하니 운문사에 계실 때 삼국유사의 대강을 잡아놓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이 보고가 유교를 국교로 내세운 조선조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조선사학회에서 활자본을 발간하기 20년 앞서 1908년 일본의 도꾜 대에 의해 처음으로 활자본이 출간되었다 하니 일연 선사께 죄송할 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삼국유사는 분명 일연선사께서 쌓아 올린 금자탑입니다.

이 땅에 유학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만 있었다면 단군신화나 향가는 물론 그 밖의 숱한 민간설화들이 모두 땅속에 묻혀 있었을 것입니다. 신화와 전설이 이 땅의 백성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작은 돌탑들이라면 삼국유사는 이 작은 돌탑들을 쌓은 백성들의 정성을 하나로 모아 쌓아 올린 다보탑이자 석가탑입니다.   유학자 김부식이 외면한 작은 돌탑에 얽힌 숱한 사연들을 일연선사는 한 줄로 엮어 옥구슬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 문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 기저가 삼국유사에 있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러기에 일연이 쌓아올린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보배인 금자탑인 것입니다. 삼국유사라는 금자탑이 바벨탑이 아닌 것은 이 탑을 쌓는데 우리 민족의 오만은 손톱만치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후년이면  낙동정맥 종주 길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운문산을 올라 운문사를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때 일연 스님께 정식으로 인사 올리고 삼국유사에 관련된 일화도 들어보고자 합니다. 일연 스님, 고맙습니다. 

 

 

                                                               <산행사진>

 

 

 

 

 

 

 

 

 

 

 

 

 

 

 

 

 

 

 

 

 

 

 

 

 

 

 

 

 

 

 

 

 

 

 

 

 

 

 

 

 

 

 

 

 

 

 

 

 

 

 

 

 

 

 

 

 

 

 

 

 

 

 

 

 

 

 

 

 

 

 

'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 > 명산100산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95.연화산 산행기  (0) 2009.12.31
94.무학산 산행기(1-2)  (0) 2009.12.30
92.천성산 산행기(1-2)  (0) 2009.12.23
91.장안산 산행기  (0) 2008.08.26
90.응봉산 산행기  (0) 2008.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