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산
*산행일자:2010. 2. 16일(목)
*소재지 :경기포천/연천
*산높이 :종자산643m
*산행코스:해뜨는 마을-종자바위-종자산-고원지대-사기막고개
-향로봉-사거리안부 헬기장-큰골지장계곡-중리저수지주차장
*산행시간:9시24분-15시58분(6시간34분)
*동행 :송백산악회 회원
정상 남동편에 자리한 굴바위에서 3대 독자의 부부가 백일기도를 올린 뒤 아들을 낳았다하여 씨앗산으로도 불린다는 종자산(種子山)을 오르내리며 제가 이산의 산신령께 하루 빨리 손자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은,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이 산이 진정 씨앗을 잉태하는 종자산이라면 자식을 원하는 어미 애비는 물론 손자를 기다리는 할아비 할미의 간절한 소원도 들어줄 것이라 굳게 믿어서였습니다. 이 산의 산신령이 꼭 손자 녀석이 아니고 손자 딸이라 해도 감지덕지할 저의 간절함을 헤아린다면 설사 백일기도를 다 채우지 못해도 그동안 수많은 산들을 오르내린 저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소원을 꼭 들어줄 것 같았습니다.
자식을 낳아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본능이기에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들이 자식을 원하고 나이 들어 손자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종족의 보존은 진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화란 “생물이 오랜 동안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종류의 것으로 되어가는 일”로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Darwin)이 그의 역저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을 주창한 이래 다윈의 진화론은 기독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그 세를 얻어 이제는 정론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최근 저는 피터 J. 리처슨과 로버트 보이드가 함께 지은 “유전자만이 아니다(Not by genes alone:How culture transformed human evolution)”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주 내용은 인간의 진화경로를 바꾸게 한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고 문화도 한 몫 했다는 것입니다. 남부에 사는 미국인들이 왜 북부의 미국사람들보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상대방에 훨씬 더 공격적인가를 연구한 저자들은 그들이 살아온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담아서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달하는 일을 유전자만이 아니고 문화도 같이 해낸다는 것입니다.
문화를 구성하는 콘텐츠에는 전설도 들어있습니다.
과학을 중시하고 합리를 추구하는 서양인들은 굴속에 들어가 손을 잇게 해달라고 100일 기도를 하는 우리나라사람들을 살아온 문화가 달라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한반도에 조선을 연 단군의 건국신화를 어렸을 때부터 배워 알고 있는 저희들에는 종자산의 전설이 그다지 새로울 바 없는 아주 귀에 익은 것입니다. 이런 유(類)의 전설이 문화 속에 녹아 우리 몸속에 벌써부터 자리 잡아왔기에 제가 종자산을 오르며 손자를 빨리 보게 해달라고 산신령께 빌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아침9시24분 한탄강을 막 건너 “해 뜨는 마을”앞에서 종자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전날 밤 처갓집에서 처남들 및 동서들과 함께 마신 술이 과해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산본에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상일동 육교 앞에서 송백산악회 버스에 오른 지 2시간이 채 안되어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87번 지방도로변의 “해뜨는 마을”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정표 앞에서 시멘트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이내 계곡 길로 들어섰습니다. 눈길이 미끄러워 얼마 가지 못해 아이젠을 꺼내 차느라 이번에도 후미로 쳐졌습니다. 송백산악회의 산행프로그램에는 종자산-향로봉-삼형제봉-화인봉-지장산-잘루맥이고개-관인봉을 차례로 거쳐 중리저수지 위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코스가 잡혀 있지만, 각자 능력에 따라 중간에 적당한 곳에서 산행을 접고 오른쪽 아래 큰골지장계곡의 큰 길로 하산해도 좋다고 해서 참여한 것이기에 이번에는 죽자 살자 풀코스를 뛸 마음을 아예 먹지 않았고, 그래서 동행한 하이맛 친구에도 저를 신경 쓰지 말고 능력껏 내달리라고 일러주었습니다.
10시5분 의자가 놓여 있는 바위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산행이 유난히 더딘 것은 눈 덮인 바위 길과 깎아지른 절벽이 빚어낸 협곡의 비경 때문이었습니다. 산행시작30분 만에 병풍폭포?) 앞에 다다라 얼음 덮인 폭포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철 계단과 밧줄의 도움으로 까탈스러운 바위 길을 올랐습니다. 철 계단을 오르면 종자산에 얽힌 전설이 잉태된 야외음악당을 닮았다는 굴바위가 나타난다 하는데 눈이 덮여 위험한 가파른 바위 길을 안전하게 오르는 데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전설의 고향인 이 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커다란 암벽 아래 놓인 벤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하얀 눈이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운 주위의 산천을 조망했습니다. 남쪽 한탄강 너머 있는 보장산이 아주 점잖게 보였고 철원 동송으로 이어지는 87번차도 변의 넓은(?) 뜰을 보자 궁예가 이 평야를 믿고 철원을 태봉의 도읍지로 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자바위 위의 작은 소나무가 흰 눈과 대비되어서인지 독야청청함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병풍폭포에서 시작된 가파른 바위길이 벤치에서 끝난 것이 아니어서 620봉에 이르기까지 몇 곳의 바위 길을 더 지났습니다. 한탄강이 다른 강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땅이 푹 꺼진 것처럼 보이는 협곡에 있는데 암릉 길 왼쪽으로 보이는 깎아지른 바위들이 절벽을 이루어 빚어낸 거대한 협곡은 한탄강 협곡보다 더 크고 깊어보였습니다.
10시53분 해발643m의 종자산을 올랐습니다.
620봉에서 오른쪽 능선을 타고 종자산으로 옮기는 중 후미를 보는 동년배의 한 분을 만나 내내 산행을 같이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제가 3년 간 교편을 잡았고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광주가 이 분의 고향이어서 오래된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종자산 등정을 축하라도 하려는 듯 매 한 마리가 서서히 상공을 선회하며 사진모델이 되어주어 이 새의 여유로운 날개 짓을 사진 찍는데 성공했습니다. 정상석이 서 있는 종자산의 고스락에 올라 북쪽으로 보이는 여러 봉들을 둘러보며 잠시 쉬는 동안 뒤쳐진 부부 한 팀이 여기 정상을 올랐다가 저희보다 먼저 출발해, 저희 둘이 맨 후미가 됐습니다. 정상에서 해발고도가 610m인 암봉에 이르기까지 동쪽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내려다보기에는 아찔했지만 암벽에 자리한 소나무와 어우러진 풍경이 참으로 비경이었습니다. 아찔한 능선 길에서 뒤돌아보자 병풍폭포에서 620봉으로 올라온 바위길이 한 눈에 잡혔는데 저런 위험한 길을 어떻게 올랐나 싶을 정도로 가팔라보였습니다. “종자산 정상0.99Km/중리저수지2.33Km”의 이정표를 지나 철조망을 넘어 벤치가 설치된 590봉에 올라선 시각이 11시54분으로 정상출발 1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12시52분 사기막고개로 내려섰습니다.
590봉에 올라서기 전에 설치된 철조망과 같은 종류ㅇ의 철조망을 이 봉우리에서 10분을 채 못 내려가 또 다시 만났는데 이에다 견고한 토치카까지 설치되어 이 산이 휴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방의 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철조망을 넘어 몇 분 더 진행해 고원지대를 지났습니다. 억새와 싸리나무가 넓은 늪지를 가득 메운 초원지대에서 진양하씨 묘지로 내려서는 길은 편안했습니다. 비석과 상석이 잘 갖춰진 돈 들인 묘지에서 점심을 든 후 낮은 봉우리를 넘어 내려선 넓은 안부가 사기막고개로 오른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중리저수지 위 주차장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입니다. 모래적재용으로 쓰일 것 같은 시멘트블록의 간이 건물이 세워진 사기막고개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도 종자산 길 못지않은 된비알 길이었습니다. 가파른 비알 길을 천천히 오르면서 저희 둘이 화제로 떠 올린 분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였습니다. 서강학파의 태두로 박정희대통령을 잘 보필해 이 나라 경제를 반석위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분으로 평가해온 저였기에 이분이 국무총리로 재직 중 광주의 향리마을을 방문했을 때 포니를 끌고 가 이분을 호위하고자 고개에서 기다린 경찰이 전혀 눈치를 못 챘다는 일화를 동행한 분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런 분이라면 능히 당신과 함께 일하는부하 직원들의 부패를 막고자 단신으로 월남한 이북출신 인물들을 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14시39분 헬기장이 들어선 사거리안부에 도착했습니다.
쌓인 눈이 녹아 질펀한 바위를 밧줄을 붙잡고 올라 헬기장이 들어선 향로봉정상에 올라선 것은 사기막고개 출발 50분 후인 13시44분이었습니다. 중리저수지가 잘 보이는 길을 지나 향로봉에 오르자 비로소 삼형제봉, 화인봉과 지장산 및 중리저수지에서 잘루맥이고개로 이어지는 계곡 길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의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큰골지장계곡 건너편의 관인봉이었고 바위 세 개가 곧추선 삼형제봉으로 가는 산줄기는 향로봉에서 0.61Km 떨어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북서쪽으로 이어졌습니다. 향로봉에서 20분가량 걸어 벤치가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섰고 다시 10분을 더 걸어 오른 쪽으로 궁예성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기까지 눈이 아이젠에 들러붙어 걷기에 좀 불편했습니다. 삼거리에서 0.71Km 떨어진 궁예성으로 내려가고자 오른 쪽 길로 들어섰다가 몇 걸음 못가 되돌아 온 것은 그 쪽으로 전혀 길이 나있지 않아 위험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급하게 내려가 다다른 눈 덮인 헬기장이 향로봉과 삼형제봉이 만들어 놓은 깊숙한 사거리안부로 왼쪽 임도 길은 통행이 금지되었고 저희 둘은 오른 쪽으로 꺾어 관인봉을 마주보며 진행하다 15시 정각에 잘루맥이 고개에서 내려오는 큰 길로 내려섰습니다.
15시58분 중리저수지 위 주차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사거리 안부에서 오른 쪽으로 진행해 만난 삼거리에서 다시 오른 쪽으로 꺾어 중리저수지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눈 덮인 계곡을 조심스럽게 건넌 짐승이 남긴 족적이 예뻐보이는 큰골지장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차도는 눈이 그대로 쌓였고 눈 속 길이 빙판 길이어서 이런 길을 주로 오르는 전용차량이 아니면 몰고 다니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도로변에 간이화장실을 여러 개 세운 것으로 보아 한 여름에는 심산유곡인 큰골지장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굽이진 계곡 길을 따라 내려가다 석성이 일부 남아 있는 보가산성지를 지나면서 오른 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지탱해주는 봉우리를 쳐다보았습니다. 향로봉을 조금 지나 만난 삼거리에서 궁예성으로 하산했다면 저 능선 길로 내려갔을 것이 분명한데 하는 생각이 들자 사거리안부로 하산 길을 잡은 순간의 선택이 십년감수를 막아주었다 싶었습니다. 삼형제봉을 넘어 오른 쪽의 가파른 능선 길로 내려왔다는 하이맛 친구 일행이 중리저수지를 다 와서 저희 둘을 앞섰습니다. 중리저수지 상단에 자리한 주차장에 도착해 한참동안 기다렸다가 산악회에서 준비한 김치찌개를 들고나자 아기자기한 이번 산행이 끝났다 싶어 새삼 아쉬운 감이 들었습니다.
620봉을 오르기 직전부터 함께 산행한 한 분과 함께 풀어놓은 보따리 속의 이야기가 제법 다양했던 것은 저희 둘 모두가 격변의 이 땅에서 60년이 넘는 모진 세월을 함께 이겨낸 6학년생들로 나름대로 건강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했다는 이 분이 공무원시험에 수석 합격한 아들에 전해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국가공무원으로서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깨끗하게 생활해 온 삶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유전자만이 아니다"라는 책에 실린 문화와 유전자의 공진화론이 맞는다면 전 총리분이 가까운 친척임에도 단 한 번도 인사 청탁을 하지 않은 이분의 삶속에 녹아 있는 가치와 신념이 머리 좋은 유전자와 함께 자식들에 전해졌고 뒤이을 후손들에도 전해질 것입니다. 100일 기도로 얻은 자식들이 커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 속옷까지 다 벗어버리고 발광을 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선뜻 기도를 들어준 종자산의 산신령이 오히려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이제 산신령께서도 정성들여 100일 기도를 올리는 부부에 자식들만 점지시켜 줄 것이 아니라 이렇게 태어난 자식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건강하게 커나가도록 A/S도 함께 해주어야 영험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고 아기자기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기쁨에 5시간 넘게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추가해준 종자산을 조만간 다시 찾아 하루 빨리 손자를 보게 해달라고 다시 한 번 빌어볼 생각입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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