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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전(殊異傳)

시인마뇽 2013. 1. 10. 17:55

 *아래 글은 방송대의 손종흠교수님 블로그에서 퍼온 것입니다.                                                     

 

 

 

                                                      수이전(殊異傳) 

 

I.수이전

   현재 전하지 않으며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郡玉〉·〈삼국유사 三國遺事〉·〈태평통재 太平通載〉 등에 〈수이전〉에서 뽑은 몇 개의 작품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통일신라 후기 때 지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지은이로는 박인량(朴寅亮)·최치원(崔致遠)·김척명(金陟明) 등이 거론되고 있다.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아도전 阿道傳〉에서는 몇 개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박인량이 〈수이전〉을 지었다고 했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에는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원광서학 圓光西學〉에서는 김척명이라는 사람이 항간에 떠도는 말로 원광법사의 전을 잘못 보관해 놓았는데, 그 폐단이 〈해동고승전〉으로 이어졌다면서 〈수이전〉의 작자를 김척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설은 없지만 작품 중에 〈최치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자가 최치원일 리는 없으며, 박인량이 문장에 능했고 〈고금록 古今錄〉이라는 은밀한 역사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수이전〉은 박인량이 지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신라 때 최치원이 〈수이전〉을 지었는데, 그당시에는 〈신라수이전〉이나 〈고본(古本)수이전〉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 박인량이 이를 개작하면서 〈수이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다.

  지금 전하고 있는 〈수이전〉의 작품은 아래의 표와 같다. 〈수이전〉에는 귀신과 만나 사랑을 나누거나, 도술을 부리는 등의 기이한 이야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속에도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지향과 백성들이 유명한 인물보다도 높게 평가되고 있는 것, 그리고 신분간의 차이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삶의 모습 등 당시 사회의 모습들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수이전〉은 비록 단편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서 신라의 설화를 이해할 수 있으며 후대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원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하므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II.수록작품

1.아도전

  스님의 아버지는 위나라 사람 굴마요,

 

어머니는 고도령인데 고구려 사람이다.

 

굴마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하고 위나라로 돌아갔다.

 

고도령은 그 때문에 아이를 가졌다.

 

스님이 태어나서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상한 인상이 나타나므로 어머니는 말하기를,

  “너는 중이 되어야 한다.”

했다.

 

스님은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그날로 머리를 깎아 중이 되고

 

16세에 위나라로 들어가 아버지 굴마를 뵈옵고

 

드디어 현창화상에게로 가서 수업하다가 19세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와 뵈었다.

 

그때 어머니가 타일렀다.

  “이 나라는 불교가 흥왕할 기운이 익지 않아 불법을 행하기 어려우니 저 신라로 가라.

 

거기에도 지금은 불교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없으나

 

이후 30개월 만 되면 불교를 보호하는 밝은 임금이 등극하여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또 그 나라 서울에는 절을 세울 만한 곳이 일곱이 있으니,

 

첫째는 금교의 천경림,

 

둘째는 삼천기,

 

셋째는 용궁의 남쪽,

 

넷째는 용궁의 북쪽,

 

다섯째는 신유림,

 

여섯째는 사천니,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이곳들은 불법이 멸하지 않는 전생부터의 절터이다.

 

너는 마땅히 그 땅으로 가서 처음으로 현묘한 불교의 취지를 전하고

 

부처의 시조가 되는 것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하냐?”

  스님은 이 어머니의 명을 받들고

 

국경을 넘어 신라의 왕성 서쪽 마을(지금의 엄장사 자리)에 와서 살았다.

 

그때가 미추왕 2년 계미였다.

  스님이 불교를 믿기를 청하니 전에는 보지 못하던 바이라 하고

 

괴상하게 여겨 죽이려는 자가 나타나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스님은 속림의 모례의 집에 가서 숨으니 지금의 선주이다.

 

해를 피하여 도망가서 있기 3년 만에 성국궁주가 병이 들었다.

 

그러나 그 병이 끝내 낫지를 않아 사방에 사신을 보내어 이 병을 고칠 사람을 구했다.

 

스님은 거기에 응모해서 대궐로 들어가 그 병을 고쳐 놓았다.

 

이에 왕은 매우 기뻐 그 바라는 바를 물었다. 스님은 청하기를,

  “다만 천경림에 절을 창건하게 된다면 제 소원은 만족합니다.”

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때 세상은 질박하고 백성들은 완고하므로

 

호화로운 건물을 지을 수가 없어 초가집으로 절을 삼았다.

 

그후 7년만에야 비로소 중이 되려는 자가 나타나 와서 그 스님에게 불법을 받았다.

 

모록의 누이 사시라는 여자도 스님에게 귀의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리고 삼천기에다 절을 세워 영흥사라 하고 거기에서 거주했다.

  미추왕이 붕어하신 뒤를 이은 왕이 부처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장차 폐하려 하므로

 

스님은 속림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문을 닫아 걸고 시멸했다.

 

그러므로 불교가 신라에는 행하여지지 않았다.

 

그 후 200년 만에야 원종이 과연 불교를 일으키니 모두 스님의 어머니 고도령이 말한 바대로였다.

 

미추왕으로부터 법흥왕까지는 대체로 11대 왕이었다.

 

 

 

2.원광법사전

  원광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왕경의 사람이었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을 배우던 중,

 

나이 30에 한가한 곳에서 수도하려 하여 삼기산에 독거하였다.

 

그 후 4년에 한 중이 와서 그 근처에 따로 절을 짓고 있은 지 2년이 되었는데,

 

그 위인이 강맹하여 주술을 좋아 닦았다.

 

법사가 밤에 독좌하여 송경할새,

 

홀연히 한 귀신이 그 이름을 부르며,

  “잘도 한다,

 

잘도 한다,

 

그대의 수행이야말로.

 

대개 수행하는 자는 많지만 법과 같이 하는 자는 드물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곧장 주술을 닦으나

 

얻는 바는 없을 것이고 그 훤성이 남의 정념을 방해한다.

 

또 그 처소가 나의 다니는 길을 방해하므로,

 

지나다닐 때마다 매양 미운 마음이 날 정도이다.

 

법사는 나를 위하여 그에게 말하여 다른 데로 옮아가게 하라.

 

만일 오래 머무른다면 아마 내가 죄업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고 하였다.

  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에 신어를 들으니 중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겠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재앙이 있으리라.”

하였다. 중이 대답하되

  “수행이 도저한 이도 마귀에게 홀리는가,

 

법사가 어찌 호귀의 말을 근심하는가?”

하였다. 그 날 밤에 신이 또 와서 이르기를,

  “앞서 내가 말한 데 대하여 중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더냐?”

  법사가 신의 노기를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아직 말하지 못하였으나 만일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아니하리요?”

하였다. 신이 가로되,

  “내가 이미 모두 들었다. 법사는 어째서 보태 말을 하느냐,

 

다만 잠자코 내가 하는 바를 보라.”

하고 가더니, 밤중에 진뢰같은 소리가 났었다.

 

그 이튿날 가보니 산이 무너져 중의 살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한 와서 말하되,

  “법사가 보니 어떠하냐?”

  대답하되,

  “보고 매우 놀랬다.”

하였다. 신이 가로되,

  “내 나이 3,000년에 가깝고 신술이 가장 장하다.

 

이만 일은 적은 것이니 어찌 놀랄 거리가 되랴.

 

또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도 통달치 못함이 없다.

 

지금 생각건대 법사가 이곳에 있어,

 

비록 자신에게 이로운 행실은 있겠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으니,

 

현재에 이름을 높이 들어내지 않으면 미래의 승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어찌 불법을 중국에서 배워와서 이 나라의 혼미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느냐?“

하였다. 대답하되,

  “중국에 도를 배우고자함은 본지 소원이나,

 

해륙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자연 통하지 못할 뿐이라.”

하니, 신이 중국에 가서 행할 계교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법사가 그 말대로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물면서 삼장에 널리 통하고 겸하여 유술을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에 법사가 돌아올 행장을 차리어 중국 조빙사를 따라 귀국하였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코자,

 

전에 거주하던 삼기산사에 갔더니 밤중에 신이 또 와서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

  “해륙의 도정을 어떻게 갔다 왔느냐?”

하거늘, 대답하되,

  “신의 홍은을 입어 평안히 도착하였소이다.”

  신이 말하되,

  “나도 또한 신에게 계를 준다.”

하고, 생생상제의 약을 맺었다. 또 법사가 청하되,

  “신의 진용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신이 말하되,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할진대 내일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라.”

하였다. 법사가 이튿날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접하여 있었다.

 

그 날 밤에 신이 또한 와서 이르기를,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느냐?”

  대답하되,

  “이미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더이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속칭 비장산이라고 하였다. 또 신이 이르되,

  “비록 이 몸이 있다 하여도 무상한 해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내가 머지않아 이 몸을 그 고개에 버릴터이니 법사는 와서 길이 가는 혼을 보내 달라.”

하였다. 기약한 날을 기다려 가보니 칠빛 같이 검은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어

 

헐떡이고 숨을 쉬지 못하다가 곧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오매 본조의 군신이 존경하여

 

스승을 삼으니 법사가 항상 대승경전을 강하였다.

 

이때에 고려 백제가 매양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매우 근심하여 수(마땅히 당으로 해야 할 것이다)에 청병을 하고자 하여

 

법사에게 청하여 걸병표를 짓게 하였다.

 

황제가 그 표를 보고 30만병으로 고려를 친정하였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에 겸통하였음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다.

 

향년 84세로 입적하니 명활성 서쪽에 장사지냈다.

 

 

 

3.탈해

  용성국 왕비는 큰 알을 낳았다.

 

이를 괴이히 여겨 작은 궤짝에다 그 알을 넣고

 

노비와 칠보와 문첩도 배에다 실어 바다에 띄워버렸다.

 

그랬더니 그것이 떠내려와 아진포에 이르렀다.

 

아진포의 촌장 아진 등이 그 궤짝을 열고 알을 꺼내는데

 

갑자기 까치가 날아와 그 알을 쪼아 깨닌 한 사내아이가 나타나며 자칭 탈해라 했다.

 

그 마을에 사는 노파에게 맡겨져 어머니를 삼고

 

서사를 배우는데 지리까지도 통하며 체모도 웅걸하였다.

 

그가 토함산에 올라가 서울의 지세를 살펴보니

 

신월성의 터가 살 만한데 이미 호공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호공은 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와 사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탈해는 이 신월성 터를 빼앗고자 밤에 몰래

 

호공의 집 후원으로 들어가 대장질하는 기구를 파묻어 놓았다.

 

그리고 그 후에 조정에 고발하기를,

  “저는 대대로 이어받은 직업으로 대장장이 일을 합니다.

 

한동안 이웃 고을에 갔다가 와보니 이 호공이란 사람이 우리집을 빼앗아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이 집을 찾아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그 호공의 집을 뒤져 뒤안을 파고 보니

 

과연 대장질하는 기구가 있었다.

  왕은 탈해가 실지로 계림 사람이 아니 줄 알면서도

 

그의 비범함을 특히 장히 여겨

 

그 집을 빼앗아 주고 도리어 맏공주를 주어 사위를 삼았다.

 

용성국은 왜국 동북 2천리에 있다.

 

<보개>

  보개는 우금방에 사는 여인이다.

 

그 여인의 아들은 이름이 장춘인데 장사를 하러

 

바다를 건너가 1년이 지나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개는 민장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7일간 기도를 하였더니

 

아들 장춘이 와서 그의 어머니의 손을 잡으므로 깜짝 놀라 기뻐서 울었다.

 

이를 본 절 안의 여러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장춘은 말하기를,

  "바다에서 큰 바람을 만나 배와 노가 모두 부서지고 함께 탔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나는 간신히 하나의 널빤지를 붙잡아 타고 오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랬더니 오나라 사람들은 나를 가두어 종으로 삼고 들에 나가 밭을 매게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중이 와서

 

'네 고국을 기억하느냐?'

 

하므로 나는 곧 무릎을 꿇고

 

'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님 생각이 망극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이 그렇게 너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나를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딸라가다가 한 깊은 도랑을 만났습니다.

 

그 중이 나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때에 어렴풋이 꿈결 같은데

 

갑자기 신라의 말소리가 들리고 곡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래서 잘 살펴보니 나는 꿈결인가 여겼으나 실로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절의 중이 이렇게 자세히 들은 것을 모두 조정에 보고하니

 

국가에서는 그 영험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재물과 전지를 보살이 있는 곳에 바쳤다.

 

천보 을유 4월 8일 신시에 오나라를 떠나 술시에 민장사에 도착한 것이다.

 

 

 

4.심화요탑

  지귀는 신라의 활리역 사람이다.

 

선덕여왕의 미모를 사모하여 근심하며 울고 지내다가 모양이 파리해졌다.

 

여오아잉 불공을 드리려고 절로 행차하실 때 그 소식을 듣고 불렀다.

 

그는 절로 가 탑 아래에서 왕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 버렸다.

 

왕은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얹어 두고 궁으로 돌아갔다.

 

후에 잠을 깨자 지귀는 간절히 번민하더니 이윽과 마음의 불이 일어나

 

그 탑을 뱅뱅 돌다가 불귀신으로 변했다.

 

왕은 술사에게 명하여 주문을 짓게 하였다. 곧,

 

“지귀의 마음 속의 불이

몸을 태워 불귀신이 되었구나

창해 밖으로 띄워 보내어

보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으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때 풍속에 이 주문을 문 위 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

 

<수삽석남>

  신라 최항은 자를 석남이라 했다.

 

그가 사랑하는 첩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아

 

  만나지 못하더니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8일 후에 최항의 혼이 첩의 집에 갔는데,

 

첩은 최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항이 머리에 꽂은 석남가지를 나누어 첩에게 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살도록 허락하여 왔다.”

고 하기에 첩은 항을 따라 그의 집까지 갔다.

 

그런데 최항은 담을 넘어 들어간 뒤로 새벽이 되어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그 집 사람이 그녀가 온 까닭을 물으매 그녀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 항이 죽은 지 이미 8일이 지났으며 오늘이 장사날이다.”

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석남가지를 나누어 머리에 꽂았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

하였다. 이에 관을 열고 보니 정말 항의 머리에 석남가지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옷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첩이 죽으려 하자,

 

항이 다시 살아나서 백년해로하였다.

 

 

 

5.영오 세오

  동해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이고 아내는 세오라 하였다.

 

하루는 영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다.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함)가 나타나더니

 

영오를 등에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를 싣고 마치 영오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니 그녀로 귀비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가 없어졌다. 일관이 왕께 아뢰길,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영오는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욱기야라 한다.

 

 

 

  6.최치원

  최치원은 자가 고운으로 12살에 서쪽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다.

 

건부 갑오년에 학사 배찬이 주관한 시험에서

 

단번에 괴과에 합격해 률수현위를 제수받았다.

 

일찍이 현 남쪽에 있는 초현관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관 앞의 언덕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어 쌍녀분이라 일컬었는데

 

고금의 명현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치원이 무덤 앞에 있는 석문에다 시를 썼다.

 

어느 집 두 처자 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 번이나 봄을 원망했나.

그 모습 시냇가 달에 부질없이 남아있으나

이름을 무덤앞 먼지에게 묻기 어려워라.

고운 그대들 그윽한 꿈에서 만날 수 있다면

긴긴 밤 나그네 위로함이 무슨 허물이 되리오.

외로운 여관에서 운우를 즐긴다면

함께 낙천신을 이어 부르리.

 

  쓰기를 마치고 관으로 돌아왔다.

 

이 때 달이 밝고 바람이 맑아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거닐다 홀연 한 여자를 보았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그 여인은 손에 붉은 주머니를 쥐고 앞으로 와서 말하였다.

  “팔낭자와 구낭자가 수재께 말을 전하랍니다.

 

아침에 특별히 어려운 걸음 하시고 거기다 좋은 글까지 주셨으니,

 

각각 화답하여 받들어 바친다 하셨습니다.”

  치원이 돌아보고 놀라며 어떤 낭자인지 재차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아침에 덤불을 헤치고 돌을 쓸어내어

 

시를 쓰신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

  공이 그제서야 깨닫고 첫 번째 주머니를 보니,

 

이는 팔낭자가 수재에게 화답한 시였다.

 

그 시에.

 

죽은 넋 이별의 한이 외로운 무덤에 부쳤어도

예쁜 뺨 고운 눈썹엔 오히려 봄이 어렸구나.

학 타고 삼도가는 길 찾기 어려워

봉황비녀 헛되이 구천의 먼지로 떨어졌네.

살아있을 당시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하였는데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품도다.

몹시 부끄럽게도 시의 글귀가 제 마음 알아주시니

한번 고개 늘여 기다리고 한편으론 마음 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두 번째 주머니를 보니 바로 구낭자의 것이었다. 그 시에

 

왕래하는 이 그 누가 길가의 무덤 돌아보리

난새거울과 원앙이불엔 먼지만 일어나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고]

꽃 폈다 지니 세상은 봄이로구나.

늘 진녀처럼 세상을 버리기 원해

임희의 사랑 배우지 않았도다.

양왕을 모시고 운우를 나누려 하나

이런 저런 걱정에 마음 상하네.

 

라고 하였다. 또 뒤 폭에

 

이름을 숨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외로운 혼백이 세속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본심을 말하려 하니

잠시 가까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이런 꽃다운 시를 보고 자못 회색이 만면하여

 

그녀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이라 하였다.

 

그는 기뻐서 희롱하니 취금이 성을 내고 하는 말이,

  “수재께서는 답서를 써주셔야 합당한데

 

공연히 사람만 괴롭히려 드십니다.”

하였다. 최치원은 곧 시를 지어 취금에게 주었다.

 

우연히 미친 시를 고분에 쓴 것이

어찌 선녀가 속세 일을 묻는 기회가 될 줄을 알았나이까?

취금도 오히려 구슬꽃 같은 아름다움을 띠었으니

붉은 소매는 응당 옥 같은 나무에 깃든 봄을 품었으리로다.

문득 이름을 숨겨 속세의 나그네를 속이고

교묘히 문자를 지어 시인을 괴롭히도다.

애타게 오직 모시고 환소하기를 바라오며

천 번 만 번 영험 있고 신비롭기를 비나이다.

 

하고, 끝 폭에다 이어 쓰기를,

 

청조가 뜻밖의 까닭을 알려주니

잠시나마 생각하느라고 두 줄의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 밤 만약에 그대 선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분명히 나의 남은 목숨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취금이 이 시를 가지고 돌아가는데,

 

빠르기가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았다.

  치원은 홀로 서서 애닯이 읊조리는데 한참이 되어도 오는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짧은 노래를 읋어 그것을 마치는데 갑자기 향기가 스치며

 

조금 있다가 두 영인이 가지런히 다가오는데 분명히 한 쌍의 구슬이요,

 

두 송이 상서로운 연꽃이었다. 치원이 놀라 기쁘기가 꿈결같아 절을 하면서,

  “이 최치원은 섬나라의 한미한 선비요,

 

속세의 말단 관리로,

 

선녀의 짝이 외람되이 풍류를 돌보아줄 줄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갑자기 희롱하는 말이 있더니 문득 꽃다운 발자취를 나타내어 주십니다그려.”

  하니, 두 여인은 미소만 지으면서 말이 없었다.

 

치원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꽃다운 밤에 잠시나마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다행히 얻었는데

무슨 일로 말이 없이 늦은 봄만 대하고 있나이까?

앞으로 진실부가 될 줄 알았지

원래 식부인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때 붉은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이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웃으면서 말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경멸을 당했습니다.

 

식부인은 일찍이 두 남편을 섬겼지마는

 

천첩은 아직 한 남편도 섬기지 않았나이다.”

  한다. 치원이 이 말에,

  “부인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말 속에 반드시 속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두 여인이 모두 웃었다.  치원이 곧 다시 묻기를,

  “낭자들께서는 어디 사시며 어떤 사이입니까?”

하니,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저와 제 동생은 율수현 초성향 장씨의 두 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현리를 하지 않으셨어도

 

고향에서는 제일 가는 부자이시므로

 

넉넉하기가 동산과 같고 호화롭기가 금곡과 같았습니다.

 

제 나이 18세였고 동생의 나이가 16세 때,

 

부모님께서는 시집을 보내기로 의논하시어

 

저는 소금장수에게 정혼을 하고 제 동생은 차 장수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것이 싫어서 남편감을 바꾸어 달라고 매일 조르며

 

마음에 불만만 품다가 울적함을 풀지 못하고 마침내 일찍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질고 착하신 그대께서는 제발 시기하여 혐의를 두지 마십시오.”

  치원이 이 말을 듣고,

  “말씀이 분명하신데 어찌 시기하는 생각이 있겠습니까?”

하고, 두 여인에게 묻기를,

  “무덤에 기거한 지가 이미 오래고

 

초현관에서 떨어지기가 그리 멀지 않으니

 

만약 영웅이 서로 만났다 할지라고 어떻게 아름다운 말씀을 다 발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붉은 소매를 한 여인이 말하기를,

  “여태까지 왕래하던 사람들은 모두 비루한 남자들이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그대를 만나니 빼어난 기품이 오산같아

 

넉넉히 함께 현묘한 이치를 말할 수 있겠나이다.”

하였다.

  치원이 술을 권하며 두 여자에게 말했다.

  “세속의 맛을 세상 밖의 사람에게 드릴 수 있는지요?”

  붉은 치마의 여자가 말했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좋은 술을 먹게 되었는데

 

어찌 함부로 사양하고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술을 마시고 각각 시를 지었으니 모두 맑고 빼어나 세상에 없는 구절들이었다.

 

이때 달은 낮과 같이 환하고 바람은 가을날처럼 맑았다.

 

그 언니가 곡조를 바꾸자고 하였다.

  “달로 제목을 정하고 풍으로 운을 삼지요.”

  이에 치원이 첫 연을 지었다.

 

금빛 물결 눈에 가득 먼 하늘에 떠있고

천리 떠나온 근심은 곳곳마다 한결 같구나.

 

팔랑이 읊었다.

 

수레바퀴 옛길 잃지 않고 움직이며

계수나무꽃 봄바람 기다리지 않고 피었네

 

구랑이 읊었다.

 

둥근 빛 삼경 너머 점점 밝아오는데

한번 바라보니 이별 근심에 가슴만 상하는구나.

 

치원이 읊었다.

 

하얀 빛깔 펼쳐질 때 비단 장막 열리고

홀무늬 비추는 곳 따라 구슬 창 통과하네.

 

팔랑이 읊었다.

 

인간세상과 멀리 떨어져 애가 끊어질 듯

지하의 외로운 잠에 한은 끝도 없어라.

 

구랑이 읊었다.

 

늘 부러워했네. 상아가 계교 많아

향각버리고 선궁에 갔음이여.

 

  치원이 더욱더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때 앞에 연주하는 음악이 없다면 좋은 일을 다 누렸다 할 수 없겠지요.”

  이에 붉은 소매의 여자가 하녀 취금을 돌아보고서 치원에게

  “현악기가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가 사람 소리만 못하지요.

 

이 애는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

하고, 충정의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취금이 옷깃을 여미고 한 번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청아해서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세 사람은 얼큰히 취했다.

 

치원이 두 여자를 꼬여 말하였다.

  “일찍이 노충은 사냥을 갔다가 홀연 좋은 짝을 얻었고,

 

완조는 신선을 찾다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대들이 허락하신다면 좋은 연분을 맺고 싶습니다.”

  두 여자가 모두 허락하며 말하였다.

  “순이 임금이 되었을 때 두 여자가 모시었고

 

주랑이 장군이 되었을 때도 두 여자가 따랐지요.

 

옛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오늘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치원은 뜻밖의 허락에 기뻐하였다.

 

곧 정갈한 베개 셋을 늘어놓고 새 이불 하나를 펴놓았다.

 

세 사람이 한 이불 아래 누우니 그 곡진한 사연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치원이 두 여인을 희롱하면서,

  “규방 안으로 들어가 황공의 사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덤가로 와 진씨의 여종을 꼈도다.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도다.”

하니, 언니가 시를 지어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대는 어질지 못하여

응당 속되게 그 딸년과 같이 자야 했음을 알겠도다.

 

동생이 이에 꼬리를 붙여,

 

무단히 바람든 미치광이에게 시집을 가서

억지로 꾀임에 넘어가 땅속의 선녀가 욕을 당했구나.

 

하니, 치원이 대답을 시로 하되,

 

오백년 이래에 비로소 어진 이를 만나

오늘 밤 한 쌍과 동침함을 즐겼도다.

꽃다운 마음들아, 내가 미친 나그네라고 괴이히 여기지 마소.

일찍이 봄바람을 대하고 서면 적선으로 꼽혔도다.

 

  이윽고 달이 지고 닭이 울었다.

 

두 여인은 깜짝 놀라 치원에게 말했다.

  “즐거움이 극진하면 슬픔이 오고 이별이 길면 만날 날이 짧아지는 법,

 

이것은 인간 세상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다 같이 마음 아픈 일인데,

 

하물며 존몰의 길이 다르고 승침의 길이 달라

 

매양 대낮을 부끄러워하고 꽃다운 때를 헛되이 버림에랴?

 

다만 오늘 하루 저녁의 즐거움을 맛본 것이 이로부터 천년의 원한이 되고,

 

비로소 동침의 행복을 즐기다가 갑자기 이별의 기한이 없음을 한탄하나이다.”

하고, 두 여인이 각각 시를 지어 주었다.

 

별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물시계 다하니

이별의 말 하려하나 눈물이 먼저 줄줄 흐르네.

이제부턴 천년의 긴 한만 맺히고

깊은 밤의 즐거움 다시 찾을 기약 없어라.

 

다른 시에 읊었다.

 

지는 달빛 창에 비추자 붉은 뺨 차가와지고

새벽 바람에 옷깃 나부끼자 비취 눈썹 찌푸리네

그대와 이별하는 걸음걸음 애간장만 끊어지고

비 흩어지고 구름 돌아가버려 꿈에 들어가기도 어려워라.

 

  치원은 시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때, 두 여자가 치원에게 말하였다.

  “혹시라도 다른 날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신다면 황폐한 무덤을 다듬어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최치원은 무덤가로 돌아가 방랑하고 읊조리며

 

더욱 심히 감탄하다가 긴 노래를 지어 스스로 위로하였다.

 

( 시 생략)

 

  후에 최치원은 과거에 급제하고 신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노래를 읊었다.

 

부세의 영화는 꿈속의 꿈이니

백운 심처에 안신함이 좋도다.

 

  그는 곧 물러나 멀리 가서 산림과 강해로 중을 찾아 작은 집을 짓고

 

석대를 찾으며 옛글이나 뒤적이고 음풍농월하며

 

그 사이에서 소요하며 부앙하였다.

 

남산의 청량사, 합포현의 월영사,

 

지리산의 쌍계사․석남사․묵천석대에 모란을 심어 놓은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이런 곳이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그의 형 대덕 현준과 남악사 정현과 더불어

 

경론을 탐구하며 담담한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다가 여생을 마쳤다.

 

 

 

  7.죽통미녀

  김유신이 서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다가

 

머리 위에 비상한 기운이 감도는 나그네를 만났다.

 

그 나그네가 나무 밑에 쉬고 있기에 김유신도 쉬면서 자는 척하고 살펴보았다.

 

나그네는 행인이 없음을 확인하고 품 속에서 죽통을 꺼내 흔들자,

 

그 속에서 미녀 두명이 나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다시 통속으로 들여보낸 뒤 길을 떠났다.

 

김유신이 쫓아가 말을 하여보니 말이 온화하였다.

 

함께 동행하여 서울로 돌아와 김유신이 나그네를 남산소나무 아래에 데려와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두 미녀도 나와서 참석하였다.

 

나그네가 자기는 서해에 사는데 동해로 장가들어 부모를 뵈러 가는 길이라고 하고는

 

곧 풍운이 일어나 천지가 컴컴해지더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설화이다.

 

 

 

  8.호원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에서 15일 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를 행하였다.

 

  원성왕 때에 김현이라는 낭군이 있어서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기를 쉬지 않았다.

 

그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마음이 맞아 눈을 주었다.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정을 통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길을 가다가 서산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에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이가 누구냐?”

  처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비록 좋은 일이지만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은밀한 곳에 숨겨두어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이끌어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뒤에 세 마리 범이 으르렁거리며 들어와 사람의 말을 지어 말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깃거리에 어찌 다행이 아닐꼬.”

  늙은 할머니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이다. 무슨 미친 소리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침이 너무나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이어 악을 징계하겠노라.”

  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세 분 오라버니께서 만약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신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진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낭군은 비록 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하루 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에 들어가 심히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 사람들이 저를 어찌 할 수 없으므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쪽의 숲 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은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유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처녀가 말했다.

  “낭군은 그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며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어기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강하여 좋은 과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해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해침이 심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이 듣고 영을 내려,

  “범을 잡는 사람에게 2급의 벼슬을 주겠다.”

고 하였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이 잡겠습니다.”

  왕은 먼저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가 되어 반갑게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마음 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고는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니 곧 범이었다.

 

김현이 숲속에서 나와서,

  “지금 범을 쉽게 잡았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유는 숨기고,

 

다만 그 범이 시킨 대로 치료하니 상처는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또한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하자 서천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라 하고는

 

항상 불경을 강해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해준 은혜에 보답했다.

 

김현은 죽을 때에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에 붓으로 적어 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름을 논호림이라 했으니 지금까지도 그렇게 일컬어 온다.

 

  <선녀홍대>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의 현위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와 구낭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 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장수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이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버린다.

 

 

 

  9.선덕여왕>

  당나라 태종이 모란의 씨와 그 모란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 꽃을 보고 웃으면서 좌우 사람에게 말했다.

  “이꽃이 요염하고 탐스럽기는 하여 비록 꽃 중의 왕이라 하더라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황제가 이를 보낸 것은 어찌 짐이 여자로서

 

왕이 될 수 있는가 하고 기롱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  모란 씨를 심어 꽃이 피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

 

 

 

 10.노옹화구>

  신라 때 한 늙은이가 김유신의 집문 밖에 와 있었다.

 

그래서 김유신은 그 노인의 손을 이끌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김유신이 그 늙은이에게 말했다.

  “지금도 전과 같은 변화를 잘 하오?”

하니, 그 늙은이는 범으로 변하기도 하고,

 

닭으로 변하기도 하며,

 

매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집에 있는 개로 변하여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