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도 살 수 있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초이가 던진 질문이었다. 질문의 상대는 양반 집안의 딸로서 조선을 구하고자 의병활동에 뛰어든 여주인공 고애신이었다.
유진초이는 조선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주인이 부모를 죽이는 모습을 뒤로하고
조선을 탈출했다. 그 후 곡절 끝에 미군 해병대 장교가 되어 돌아왔다. 고애신이 몸을 던져 구하려는 조선이란 나라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조선은 누구의 나라인가? 노비는?”
조선은 백정이나 노비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였다. 왜 이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조선에서는 이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바로 ‘호락(湖洛)논쟁’이었다.
호락논쟁은 18세기 초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당시 주류였던 노론(老論)
내부에서 일어난 학술논쟁이었다. 호(湖)는 충청도를 의미했다. 낙(洛)은 서울을 의미했다. 중국 낙양(洛陽)의 낙과 같은 단어이다. 충청도 지역
노론과 서울 지역 노론의 학술논쟁이라 할 수 있다.
호락논쟁은 마음[未發之心]을 다루는 성리학 논쟁이지만, 국제관계나 사회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야기할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인간의 본성과 물(物, 사물 또는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성인의 마음과 범인의
마음이 같은가 다른가? 등이 그것이다.
호론은 인성과 물성, 성인과 범인을 구별했다. 그 연장선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고,
신분의 차별을 인정했다. 낙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고[人物性同論], 성인과 평범한 사람의 마음이 같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오랑캐로 경원시했던
청을 공존할 수 있는 상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범인도 성인이 될 수 있으므로 차등적 신분질서를 부인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념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론적 차이가 정치투쟁으로 비화할 소지가 있었다. 당대의 군주였던 영조와 정조는 현명하게도 논쟁과
거리를 두었다. 따라서 호락논쟁은 권력 투쟁의 구실로 작동하지는 못했다. 한편 실심, 실용, 실천을 강조하는 인사들은 호락논쟁을 외면했다.
중세적 차별론을 전복하는 발상은 담헌 홍대용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화이일야’와 ‘인물균(人物均)’ 사상을
주장했다. 화이일야론으로 ‘화(중화)’와 ‘이(오랑캐)’의 대립 틀 자체를 부인했다. 또한 하늘에서 보면 ‘사람’과 ‘물’의 구분이 없다고
주장하여, 본질적 차이로 엄별하는 것이 실은 상대적 차이에 불과하다고 파악했다.
홍대용은 충청도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낙론의 중심인 서울 근교 석실서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노론의 당론에 갇히지 않았는데, 그가 견지한 자세는 ‘공관병수(公觀?受)’였다. 공정하게
보고 아울러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분별과 배제의 논리로 공동체 이끌 수 없어
정조 사후, 안동 김씨 가문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듯이, 호론은 정치적으로 패퇴했고, 낙론은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낙론 인사들은 지위에 안주할 뿐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논쟁은 사회를 이끌 동력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분별과 배제의 논리는 여전하고 강고했다. 오히려 투쟁 국면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외세를
오랑캐로 간주하고 투쟁의 논리를 세운 위정척사파가 의병활동의 초기에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양반과 상민의 분별은 민족이란 분별로 바뀌었다.
민족은 우리에게 아직도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근대 민족의 이름으로 인류는 이미 엄청난 재앙을 겪었다. 그런 분별과 배제의 논리가 우리 사회와
지구촌의 미래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
세계주의의 추종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여 스스로의 무장을 해제하게 되고, 주체성을
강조하는 논리가 시대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는 것은 어제의 일만은 아니다. 어떻게 주체성을 견지하면서도 세계와 함께할 것인가. 이는 상대적
차이와 공존을 인정한 홍대용 사상이 답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열린 서평 모임에 참석했다. 이경구 교수의
〈조선, 철학의 왕국〉(부제: ‘호락논쟁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다. 책은 잘 읽혔다. 논쟁의 개요를 적절히 소개하면서도 논쟁에 매몰되지 않게
논쟁 안팎의 이야기를 적절히 교차시켜 준 필자의 요령이 돋보였다. 이 글은 그 독후감이라 할 수 있다.
*위 글은 다산포럼 제936호에 실린 글을 따온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