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강화버스터미널- 북문- 갑곶동문(제1코스, 18Km)
탐방일자: 2022. 3. 27일(월)
탐방코스: 강화버스터미널- 동문-용흥궁-고려궁지-강화향교-북문
- 연미정-6.25참전용사기념공원-갑곶돈대
탐방시간: 10시5분-16시45분(6시간40분)
동행 : 문산중학교15회 박찬, 황규직, 황홍기, 우명길동문
1965년에 경기도파주시의 문산중학교를 졸업한 15회동문 3명과 함께 강화도 땅에 들어섰습니다. 이번에 강화나들길을 같이 걸은 동문은 지난번 평화누리길을 동행한 황규직, 황홍기 동문과 공릉천의 마지막 구간을 함께 걸은 박찬 동문입니다.
강화나들길은 강화도의 명소를 두루 둘러보도록 조성된 명품 길로 모두 20구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의 전장은 총350Km로 매 구간의 길이는 15-20km가량 됩니다. 몇 해 전에 70세를 훌쩍 넘긴 저희가 혹서기와 혹한기에 탐방을 이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앞으로 월1회 탐방에 나서되 7-8월과 1-2월은 쉬어갈 뜻입니다.
강화나들길은 이 길의 부제가 말해주듯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가 있는 도보여행”을 위해 조성된 길입니다. 이 길을 완주하면 강화도의 해안 길의 여러 돈대를 둘러보게 되고, 교동도, 석모도, 주문도와 불음도 등 섬들도 안으로 들어가 걸을 수 있습니다. 강화도 본섬 안에 자리한 양오저수지, 내가저수지, 국화저수지, 길정저수지도 들르고 지석묘와 고인돌 등을 찾아가 선사시대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마니산, 혈구산, 고려산 등 강화의 명산들이 탐방코스에서 제외된 것인데, 이는 나이든 노인 분들이 걷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이다 싶어 어쩔 수 없이 그리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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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걸은 「강화나들길 제1코스」 는 강화버스터미널을 출발하여 강화읍내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지막한 산길과 들판 길을 걸어 연미정의 주변 풍광을 둘러본 후, 염화강을 따라 걸어 갑곶돈대에 도착하는 것으로 짜여 있습니다. 제1코스의 전장은 18Km로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을 다 포함해도 7시간이면 충분해 해지기 훨씬 전에 탐방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침8시30분경 5호선이 지나는 송정역에서 모여 강화도행 300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생각보다 김포 시내를 빨리 통과해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버스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9시50분으로, 1시간10분가량 걸린 셈입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 강화도 전도가 나오는 지도와 강화나들길 안내전단을 받아 제1코스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오전10시10분 강화터미널을 출발했습니다. 풍물시장 앞에서 차도를 건너 플러스마트 왼쪽 길을 따라 걸으며 만난 사람은 이건창, 정제두 등 강화를 빛낸 역사적 인물들입니다. 강화우체국 앞 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 나지막한 구릉을 넘자 강화산성의 동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강화산성(江華山城)은 고려가 몽골에 항전하고자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해 쌓은 산성입니다. 1232년(고종19년) 강화로 천도한 고려는 1234년에 강화산성을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 내성과 외성을 먼저 쌓은 다음 1250년 내성을 지키기 위해 중성을 축조했습니다. 모두 토성으로 축조된 이 성들은 모두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몽골에 의해 헐렸습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고, 수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 강화산성은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중성에는 망한루(望漢樓)의 동문, 첨화루(瞻華樓)의 서문, 안파루(晏波樓)의 남문과 진송루(鎭松樓)의 북문 등 큰 문이 4개가 있고, 비밀통로인 암문 4개 및 수문 2개가 남아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고,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며 남북 쪽 산자락은 복원되었습니다.
이번에 들른 강화산성의 동문은 복원한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외관이 깔끔했습니다. 강도동문(江都東門)의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은 열려 있어 지날 수 있지만 2층의 누각 망한루(望漢樓)로 오르는 길을 쇠줄로 막아놓아 깃발이 펄럭이는 성곽 위로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성문 양쪽으로 짧은 성곽이 이어지는 동문을 출발해 지근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용흥궁, 성공회강화성당과 고려궁지를 휘 둘러보았습니다.
용흥궁은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조선 제25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터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1900년에 지은 성공회강화성당은 한옥의 성당으로 전체적인 건물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잘 드러내 건축사 연구에 크게 도움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고려궁지는 1232년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가 개경에서 천도해 세운 궁궐로 외규장각이 있었던 곳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 등만 남았습니다.
고려궁지에서 강화향교로 가는 길에 수령이 7백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사진찍었습니다. 높이가 25m, 둘레가 7.5m나 되는 이 거목의 수령은 1988년을 기준해 688년이라고 합니다. 고려후기인 1294년에 자라기 시작해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부침을 지켜보았을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1차 대전 중 33세에 전사한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Joyce Kilmer, 1886-1918)가 그의 시 「나무」에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가 짓지만/나무를 만드는 건 하느님 뿐(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But only God can make a tree)"이라고 읊은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11시29분 강화향교를 들렀습니다. 고려궁지에서 1Km 가량 떨어진 강화향교는 강화여고 옆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강화향교유림회관을 지나 다가선 강화향교는 문이 닫혀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고려 인종5년(1127)에 세워진 이 향교는 조선영조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현재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 동재와 서재 등의 부속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국립지방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조선시대의 향교는 조정으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제사와 교육기능을 담당해왔으나, 1894년의 갑오개혁 이후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제사기능만 남게 되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옆 오음 약수터에서 약수 한 모금을 마신 후 산길로 들어서 북문으로 향했습니다.
12시48분 강화산성 북문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오음약수터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강화산성의 토성 위로 나 있어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은 이른 봄이어서 그다지 덥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들른 북문은 본래 누각이 없었으나 정조7년(1783)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鎭松樓)로 명명했습니다. 북문은 평지에 들어선 동문과 달리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어 더욱 산성다워 보였습니다. 북문 앞 벤치에 앉아 각자 준비한 점심을 꺼내 같이 들면서 60년이 지난 중학생 때의 추억을 화두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이번에 동행한 동창들과 강화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때는 강화와 김포를 연결하는 연육교가 놓이기 전이어서 저희를 태운 관광버스가 배에 실려 염화강을 건넌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의 강화도수학여행은 각자 기억하는 부분들이 서로 달랐지만, 이번에 만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동안 잊고 지낸 부분을 기억으로나마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의 강화도 수학여행이 태양에 바래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어 신화가 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겠지만, 살아생전 추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싶습니다.
북문에서 오른 쪽 성곽으로 올라가 북장대지(北將臺址)에 다다랐습니다. 내성(內城)으로 축조된 전장 7.1Km의 강화산성에는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가 북장대, 남장대와 서장대 등 세 곳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 남장대만 2010년에 복원되었고, 여기 북장대는 터만 남아 있었습니다. 북장대지를 조금 지나 성곽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 길로 내려가 마을을 지나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오읍약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황색의 뾰족탑이 돋보이는 대산침례교회를 지나 다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이어지는 산길은 야산에 낸 평탄한 길로 걷기에 참 좋았습니다. 해온마을 표지석을 지나 동행한 황규직 군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창원황씨 묘지였습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벽화속의 어린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울타리의 탱자나무 가시에 물이 오른 것을 보자 과연 봄이다 싶었습니다.
14시44분 연미정(燕尾亭)에 올라섰습니다. 북문에서 6.5Km를 걸어 도착한 연미정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누정으로 돈대 앞 물길이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이름 붙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황형(黃衡, 1459-1520) 장군에게 내려준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으로 숙종 때 강화도에 진보(鎭堡)와 돈대(墩臺)를 설치할 때 월곶진(月串鎭)을 두었다고 합니다. 입구 안내판의 연미정 사진이야기에는 5백년 넘게 자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연미정을 감싸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그 중 한 그루는 2019년의 태풍 링링에 의해 부러져 밑동만 남아 있었습니다. 연미정에 오르자 한강물이 천리를 넘게 돌아 안기는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북한 땅이 제 고향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조망한 북한 땅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은 것은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아 울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5개의 진(鎭), 7개의 보(堡)와 53개의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돈대란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 · 방어 시설을 이릅니다. 연미정 가까이에 설치한 돈대는 월곶돈대(月串墩臺)이고, 월곶돈대 가까이에 자리한 문루는 강화외성의 조해루(潮海樓)입니다. 강화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도록 고려가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쌓은 성으로, 조해루, 복파루, 진해루, 참경루, 공조루와 안해루 등 6개의 문루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지켜본 낙조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마냥 해가 지기를 기다릴 수 없어 남쪽의 갑곶돈대로 향했습니다. 왼쪽 염화강변에 쳐진 이중의 철조망은 갑곶돈대까지 이어져 강화도가 북한과 멀지 않은 최전방 지역임을 일러 주었습니다.
16시45분 갑곶돈대에 다다라 강화나들길 1구간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연미정에서 갑곶돈대로 이어지는 차도는 바로 옆에 자전거도로 겸 인도가 따로 나있어, 6.5Km 가량 되는 먼 길이지만 따라 걸을 만 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넘고 강화군생활폐기물소각장을 지나, ‘강화군 6.25참전용사기념공원’에 다다랐습니다. 해안선을 지키는 초소와 초병들을 재현한 구조물과 조각을 보노라니 비문에 적힌 “우리들은 나라와 국민,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우고 물리치고 지켰노라”는 전사자들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강화대교를 밑으로 지나 다다른 진해루(鎭海樓)는 강화외성의 6개 문루 중 한 곳으로 갑곶나루를 통해 강화도와 내륙을 잇는 주된 관문 역할을 한 곳입니다.
갑곶순교성지를 지나 마지막으로 갑곶돈대(甲串墩臺)를 둘러보았습니다. 갑곶돈대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백여 명의 병력으로 상륙한 곳으로 1977년에 옛터 일부를 복원했습니다. 먼저 오른 이섭정(利涉亭)은 갑곶돈대의 맨 꼭대기에 자리한 정자로 1398년 강화부사 이성이 세웠다고 합니다. 무너진 지 오래된 이섭정을 갑곶돈대 안에다 2층의 팔각정으로 다시 지은 것은 1976년의 일입니다. 내려가는 길에 조선시대 대포 및 불량기와 소포를 보았습니다. 전시된 조선시대 대포는 홍이포로 사정거리가 700m나 되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불량기는 연속사격이 가능한 무기로 임진왜란 이후에 쓰였다고 하며, 소포는 사정거리가 300m로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춘 무기입니다. 강화전쟁박물관은 마침 휴무일인 월요일에 문을 닫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곧바로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버스터미널로 돌아가 제1코스 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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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탐방한 강화도는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멀지 않고 고려의 수도 송도에서는 더욱 가깝습니다. 강화도는 고려의 고종 임금이 몽골의 침입을 받아 1232년 개경에서 천도한 이래 무려 38년이나 고려의 수도로 기능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강화도가 비록 섬이지만 한 나라의 어엿한 수도였다는 것입니다.
고려의 한림학사 최자(崔滋, 1188-1260)는 삼도부(三都賦)를 지어,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했던 당시의 송도(松都, 개성)와 고구려의 수도 서경(西京, 평양), 옮겨간 강도(江都, 강화도) 등 세 도읍지의 역사와 문물 및 통치제도 등을 자세히 읊었습니다. 삼도부는 평양의 언변 좋은 젊은이와 송도의 말솜씨 좋은 노인이 함께 강화의 바른 말 잘하는 정의대부(正議大夫)한테 놀러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경과 송도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대부는 강도(江都)의 지리적 강점을 이렇게 풀어놓았습니다.
“안으로는 마리산(摩利山), 혈구산(血口山)이 첩첩히 도사리고 밖으로는 동진(童津;通津山), 백마산(白馬山)이 사면의 요새 되고, 출입을 단속하기엔 동편의 갑화관(岬華關)이요, 외빈을 맞고 보내기에는 북쪽의 풍포관(楓浦關)이니 두 화(華)가 문턱이요, 두 효(崤;문틀)는 지도리로 되어 있으니 참으로 천하의 오구(奧口)이다”
삼도부를 읽어보면 훗날 조선의 인조임금이 난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고자 애쓴 이유를 알만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