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생창리마을회관-김화교-도창검문소
탐방일자: 2025.4. 20일(일)
탐방코스: 생창리마을회관-학사교차로-김화교-장수대교-남천대교-도창검문소
탐방시간: 11시44분-17시17분(5시간33분)
동행 : 나 홀로
이번에 탐방한 화강(花江)은 북한의 김화군 금성면 수리봉에서 발원하여 남한의 철원군 근동면과 김화읍을 거쳐 도창리에서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으로, 한탄천의 제1지류입니다. 평균수심이 1m 내외로 깊지 않고 하폭 또한 50-150m로 그다지 넓지 않은 이 강의 길이는 자료마다 달라 철원군청 홈피는 23.5Km로, 디지털철원문화대전은 유로연장 기준 39.7Km로, 평화의 길 안내판에는 43.6Km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도를 보고 어림짐작한 바로는 철원군청 홈피에 실린 23.5Km가 가장 근사합니다.
화강은 DMZ 인근에 있어서 청정한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희귀 철새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이 강에 토종 민물고기인 참갈겨니 · 돌고기 등 20여 종의 담수어류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유역에는 고라니 · 두더지 · 멧돼지 등 20종의 포유류와 쇠기러기 · 참새 · 멧비둘기 등 90종의 조류도 관찰된다고 합니다. 특히 묵납자루 · 열목어 · 삵 · 담비 · 독수리 등의 멸종위기 종과 잿빛개구리매 · 원앙 등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거나 도래해 생태적으로 가치가 뛰어난 곳이라고 디지털철원문화대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김화읍민의 화강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 하천의 이름을 남대천(南大川)에서 화강(花江)으로 바꾼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개명의 가장 큰 이유가 남대천이라는 하천이 여러 곳에 있어 고유명사인 이곳 하천의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경북 울진군의 남대천, 강원도 양양군의 남대천과 전북 무주군의 남대천 등 제가 직접 가본 남대천만도 세 곳이나 되니 철원군민들이 남대천을 아무리 잘 관리해도 다른 지역의 남대천으로 오해할 여지가 크리라 걱정하는 것이 기우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김화읍장 이의현을 비롯한 주민들이 『김화읍지』 등 옛 문헌에서 원래 이름인 ‘화강(花江)’을 발견하고 복원 운동을 진행하면서 2009년 ‘화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디지털철원문화대전은 화강이라는 이름이 김화의 별호(別號)로서 조선 세종 조에 김화현에 지어진 객사(客舍) 화강관(花江館)에도 쓰였고, 조선 시대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린 「화강백전(花江栢田)」과 『여지도(輿地圖)』 김화현 편에도 화강 명칭이 사용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강의 천변에 세워진 하천 안내판에 ‘화강 강원도’가 분명하게 기재된 것으로 보아 이 하천의 법정 하천명이 남대천에서 화강으로 바뀐 것은 분명합니다.
화강 역시 한탄강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발원해 발원지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군부대에서 남한 땅의 화강 중 최상류 지점으로 민통선 안에 자리한 용양늪을 제한적이나마 개방하고, 철원dmz생태평화공원방문자센터의 안내원이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준 것입니다. 안내원과 함께 1시간 반가량 용양늪을 둘러본 후 생창리에 자리한 방문자센터로 돌아가 화강 따라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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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의 상류는 천변길이 강 건너 좌안의 제방 위에 나 있어 천변길을 걸으려면 암정교를 건너야 하는데 민통선 안에 있는 이 다리를 건너지 못해 김화읍까지는 차도를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11시44분 생창리마을회관을 출발했습니다. 일반국도 43번 도로를 따라 걷는 일이 생각보다 신경이 덜 쓰인 것은 휴일이어서인지 차량들이 별로 많지 않아서였습니다. 10분을 채 못 걸어 다다른 도로변 정자에서 준비해 간 떡으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십수분 편히 쉬었습니다. 정자 왼쪽 아래 화강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강 건너쪽으로 1/4 가량이 끊겨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화강과 나란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43번 도로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자 차도는 화강과 멀어져 오른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도로를 따라 올라가 양옆으로 방호벽이 쳐진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가자 활짝 핀 개나리꽃과 벚꽃이 저를 반겼습니다. 제가 걷고 있는 철원 땅이 제가 살고 있는 경기도의 군포 지역보다 위도가 높아 꽃이 늦게 피는 것 같습니다.전날 내린 비로 논에 물이 가득 찬 것을 보자 올 농사도 대풍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시22분 학사교차로에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넘어 마을에 이르자 외관이 깔끔하고 멋들어진 학사3리마을회관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직도 준공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마을회관은 작년12월에 준공돤 새 건물이었습니다. 학사교차로를 막 지나 김화읍사무소에 이르자 정자가 보여 잠시 쉬면서 카카오 맵으로 갈 길을 확인했습니다. 1945년 인구가 9만2천명을 상회했던 김화군의 군청소재지 김화읍이 지금은 많이 쇠락해 시가지가 조용하지만, 그 당시는 제법 시끌벅적했을 것입니다. 학포교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내려가자 화강은 각흘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하천의 물을 받아 세를 불린 후 오른쪽으로 확 꺾어 김화교 쪽으로 내달았습니다. 힘차게 흐르는 강을 홀로 따라 걸으면서 2019년11월 평화누리길을 종주할 때 문산중학교 동창들과 강 건너 데크 길을 함께 걸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14시17분 (구)김화교를 건넜습니다. 6년 전에 그냥 지나친 김화교를 이번에 굳이 건너간 것은 다리 위의 조형물이 눈을 끌어서였습니다. 철원군은 2010년부터 ‘Forever River’ 로 명명한 예술작품을 설치해왔다고 합니다. ‘강의 노래’, ‘강으로의 초대’, ‘어부의 노래’ 등으로 불리는 조형물은 주민 및 관광객들에게 휴식과 사색은 물론 물과 예술, 빛의 향연을 통한 예술문화공간을 제공하고, 다리 위에 그려진 트릭아트는 사진 촬영을 하면 마치 다리가 구멍 난 것처럼 보이면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고 강원도민일보가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제가 건넌 (구)김화교에 설치된 조형물이 쉬리 물고기와 다슬기를 형상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리를 건너 강가로 내려가 전날 내린 비로 탁해진 화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지켜보았습니다. 6년 전에 건넜던 징검다리는 강물에 잠겼거나 젖어 있어 건널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 강변을 따라 걷다가 화강 좌안의 제방으로 올라가자 강줄기는 물론 저 멀리 광덕산의 천문대도 잘 보였습니다.
15시35분 장수대교를 건넜습니다. 6년 전 이 길을 걸을 때는 저 아래 화강의 강물이 냉랭하게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강물이 불고 탁해져서인지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김화교에서 장수대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보(洑)를 설치한 것은 그만큼 화강 양안의 들판이 넓어 농업용수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곳곳에 전망대 겸 쉼터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쉬어 가기에 좋았습니다. 제방길의 가로수가 칙칙한 느티나무로 4월 하순인데도 꽃은 고사하고 싹도 나지 않았습니다. 청양초등학교와 청양3리수변공원을 막 지나 장수대교를 건넜습니다. 카카오맵에는 화강 우안에는 둑길이 나있지 않아 차도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했는데, 장수대교를 건너자 왼쪽 아래로 잔디가 흙을 덮은 둑길이 보여 그 길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휴일이어서인지 차를 끌고 와 낚시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도 여럿 보였습니다.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여기 화강처럼 그리 크지 않은 강에서 흔하지 않은 하중도를 보아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회강 우안의 제방길이 끝나는 곳에서 차도를 따라 얼마간 걸어 남대천교에 다다른 것은 16시10분이었습니다.
17시17분 도창검문소에서 화강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남대천교에서 이번 탐방의 끝점인 도창검문소까지 거리는 약3Km로 1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어 도창리정류장에서 17시40분에 와수리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안심됐습니다. 남대천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동송산업공장 뒤쪽의 화강 우안 제방길로 들어섰습니다. 동송산업공장을 막 지난 강물은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 정북쪽의 한탄강 합류점을 향해 흐르고, 저도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더디게 하는 것은 군이 설치한 대전차장애물이었습니다. 강변을 따라 걷는 것이 463번도로를 따라 가는 것보다 조금 멀지만 오랜만에 저녁나절의 한가한 강변 풍경을 볼 수 있겠다 싶어 주저하지 않고 강변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일요일인데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둑길은 한산했습니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치면 낭패다 싶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수시로 시간을 점검했습니다. 도창리마을에 거의 다가서 82세의 현지 주민분을 만나 검문소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검문소를 지나서는 민통선 지역이어서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물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도창검문소를 찾아가 초병에게서 통과할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도창리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가 17시40분에 출발하는 와수리행시내버스에 승차함으로써 한탄강의 제1지류인 화강 따라 걷기를 깔끔하게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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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을 따라 걸으면서 좋았던 것은 ‘화강 시가 있는 산책길’을 걸으면서 좋은 시를 감상한 것입니다. 강변의 표지판에 실린 시들은 거의 다가 이미 작고한 유명 시인들의 작품이어서 젊은이들에게는 고루하고 시대에 뒤져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뒤늦게 국문학을 전공한 저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옛 시인들의 서정시가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에 시선이 멈춘 것은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이 시를 감상한 기억이 있어서입니다.
<떠나가는 배>
나두야 간다 ,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시인(詩人) 박용철(朴龍徹, 1904-1938)은 동경에서 유학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습니다. 김영랑과 함께 시 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하고, 순문예지 『문학』을 창간하는 등 열심히 문학활동을 하다가 1938년 34살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 시 「떠나가는 배」는 젊은이가 암울한 일제 식민지 현실을 눈물로만 보낼 수 없다는 강변(强辯)을 담은 것으로 고향과 정든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서글픈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양승준 · 양승국은 공저 『한국현대시 500선』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70대 후반에 접어든 저 역시 언제고 정든 사람들을 두고 떠날 것이기에 차분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