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III.다른 분들 글/다른 분들 글

이상훈 교수의 "운길산산행기"

시인마뇽 2009. 6. 3. 08:52

운길산 산행기

 

산행일자: 2007년 10월 19일 (금)

동행자: 우명길

날씨: 비오다가 갬

산행기 쓴 날자: 2008년 8월 19일

 

최근에 서울 전철 중에 중앙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앙선은 용산에서 출발하여 청량리, 덕소를 거쳐 팔당, 양수리를 경유하여 최종적으로는 양평까지 확장 중이라고 한다. 완공되면 용문산도 서울에서 전철타고 갈 수 있을 것이라니 기대가 된다. 덕소는 예전에는 신앙촌이라고 해서 이제는 사이비종교로 인정하는 박장로교(박태선 장로)의 카스테라 빵공장이 있던 곳으로 기억되는 작은 촌읍이다. 그 후에 언젠가 원진레이욘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에서 발생하는 이황화탄소라는 독성 대기오염 물질 때문에 매스콤을 탔다. 환경단체의 격심한 반대에 부딛혀 회사측에서는 공장을 폐쇄하고 생산시설은 중국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잠간 생각해 보자. 똑같은 시설이 중국으로 옮겨 갔다면, 이것은 지구차원에서 볼 때에는 환경문제의 해결이라고 볼 수 없다. 단지 오염원의 이동에 불과할 뿐이며 피해는 중국사람들이 당할 것이다.

 

운길산은 산보다는 중턱에 있는 수종사라는 절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수종사는 조선시대 세조가 종기를 치료하려고 자주 들렸던 절이며 다산 정약용이 자주 올랐던 절로 알려져 있다. 사오년 전 어느 날 춘천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내어 수종사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평일이었는데 차를 몰아 경사가 험하며 비포장인 비탈길을 올라가 일주문 바로 앞에 주차해 두고 100m 정도만 걸어서 올라갔다. 수종사 대웅전 옆 넓은 마당에 작은 찻집이 있었는데, 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동쪽으로 난 넓은 유리창을 통해 팔당호를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일품이었다. 그때에 찻값은 무료였지만 단지 원하면 시주를 할 수 있는 시주통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경치에 반한 나는 아낌없이 찻값 몇 천원을 통에 넣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산행에 동행하는 친구는 내가 1968년에 전주에서 올라와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만났으니 햇수로 따져 보면 무려 39년 전에 만난 셈이다. 친구는 경기도 파주군 어느 시골 출신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서대문구 홍은동에 살고 있었다. 아마 대학 2학년 때에 한 3개월 정도 친구는 우리집에서 하숙을 했었고, 같이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닌 기억이 있다. 그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한다고 정치적으로 소란했었다. 열혈청년이었던 친구와 나는 학교에서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다가 같이 붙잡혀 동대문 경찰서로 실려갔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어서, 우리는 간단한 조서를 작성하고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뚝섬으로 이동하여 즉결재판소에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벌금낼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자마자 내가 다니던 대학의 학생처장이 오셔서 벌금을 대납해주어 즉시 풀려났던 기억이 새롭다.

 

덕소역에서 10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중앙선과 3호선이 만나는 옥수역에서 갈아타는데 시간이 걸렸다. 중앙선을 타기 위해 연결육교를 지나가는 중간에 등산용 김밥과 떡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김밥 2개와 떡 2개를 사느라고 또 시간을 소비했다. 결국 나는 30분이나 지각을 하여 11시에 덕소역에 도착하였다. 친구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이 휴대폰으로 중간에 늦겠다고 연락을 했지만 조금 미안하였다. 덕소역에서 내리니 잔뜩 흐리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쩐지 출발이 신통치 않다. 일기예보로는 경기도 일대가 ‘갬’이었는데 비가 쏟아지니 다른 사람들도 우산을 준비한 사람이 많지 않다.

 

다행이 우리는 우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등산 출발점으로 들어가는 마을버스는 배차시간이 너무 길다고 해서 택시를 탔다. 택시는 좁은 길을 이리 저리로 꼬불꼬불 돌고 돌아 운길산 쪽으로 다가갔다. 당시는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명박과 이회창 정동영의 3파전으로 압축되고 있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학군단 10기 동기생이라는 문국현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문국현 후보의 정책이 좋아서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중이었다. 문국현의 열렬지지자였던 나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나름대로 선거운동을 할 요량으로 택시기사에게 문국현 후보 이야기를 슬쩍 꺼내 보았다. 택시기사야말로 국민 여론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는데, 기사 아저씨의 하는 말은 “문국현이요? 정책은 좋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이번에는 안 될 거에요”라고 정책 평가와 예상 결과까지를 너무 쉽게 알려 준다. 나는 저으기 실망하면서도 택시기사의 예측을 인정하기 싫었다. 우리는 도곡3리 새재골가든 앞에서 내렸는데, 택시비는 4100원이 나왔다.

 

11시30분에 산불감시초소라고 쓰인 큰 간판 앞에서 배낭을 둘러매고 우비를 걸치고 걷기를 시작했다. 그전에는 등산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다녔었는데, 얼마전에 친구가 지팡이를 2개 사용하면 훨씬 편하다고 해서 2개를 사용해 보니 정말로 편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평지를 걸을 때에 대비하여 올라갈 때는 3배의 하중이 무릎에 전달되며, 내려갈 때는 7배의 하중이 무릎에 전달된다고 한다. 지팡이 2개를 제대로 이용하면 다리에 실리는 체중의 30% 정도를 팔로 분산시켜 준다고 하니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팡이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들어 등산할수록 지팡이는 필수장비라고 볼 수 있다.

 

몇 채의 시골집을 지나자 바로 산길로 들어섰다. 이름을 아는 또는 이름을 모르는 가을꽃이 여기 저기에 피어 있었는데, 주종은 국화이었다. 국화는 가장 늦게까지 피는 꽃으로서 대표적인 가을꽃이다. 꽃집에서 화분에 키우는 국화는 원예종으로서 꽃잎도 크고 색깔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산야에 피는 야생화로서 국화는 대개는 들국화라고 부르는 쑥부쟁이가 제일 많고, 구절초, 익모초, 개미취, 벌개미취 등이 모두 국화과이다. 가을은 국화의 계절인 셈이다. 국화는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씩씩하게 피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는 그 기상을 높이 평가하여 4군자에 국화를 포함시켰다.

 

조금 올라가자 금새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비가 개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먹구름은 물러가고 서쪽에서부터 푸른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등산하면서 비가 오면 고생이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오늘 산행은 안심해도 되겠다. 우비를 접어서 다시 배낭에 넣고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노인문제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지루하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노인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이 들어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니라는 이야기. 그러므로 괜히 주위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적당히 살다가 쾍 쓰러져 하룻 만에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라는 데에는 둘이서 공감을 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가 처음으로 내린 것이 아니다. 옛사람이 말하는 오복(五福)은 서경(書經)에 나오는데 壽(수), 福(복), 康寧(강녕), 攸好德(유호덕), 考終命(고종명)이다. 다섯 번째인 고종명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나는 이미 밝혔지만 문국현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친구는 50명 사원을 거느린 중소기업의 사장을 몇 년 하다가 그만 부도가 나서 빈털터리가 되었다. 작기는 하지만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좀더 근사하게 표현하면 실물경제의 체험이 있는 친구는 이명박 후보를 절대 지지하였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야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나는 사실 환경공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로서 실물경제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비판하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다. 흔한 말로 종교와 정치는 친구 간에 화제에 올리지 말라고 했다. 괜히 더 논쟁을 해 보았자 결론이 나지 않고 잘못하면 싸움난다는 것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정치 이야기는 조금 꺼내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에 친구는 주로 등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가 얼마 전에 남도 지방에 혼자서 1박2일 산행을 갔다가 빗길에 길을 잃고 그만 날씨가 어두워졌는데, 사격장 부근으로 잘못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사격장에서 야간사격 훈련이 있었는지 밤새 총소리가 나서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이튿날 날이 밝은 후에 산을 내려와 알고 보니 밤새 나던 총소리는 진짜 총이 아니고 마을사람이 멧돼지를 쫒기 위해 터트린 일명 공갈탄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방위로 병역을 마쳐서 총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인과응보”라고 나름대로 그럴듯한 결론을 내었다.

 

12시10분까지 30분 동안을 천천히 이야기하며 걸었는데 능선이 나오고 안내판이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갑산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예봉산, 가운데로 가면 운길산과 수종사가 나온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안내판을 찍었다. 예전에 비하여 사진찍기가 매우 쉬워졌다. 별로 비싸지 않은 디카를 이용하면 한번 산행에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컴퓨터 화면을 통하여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같으면 사진을 찍어서 현상.인화를 해야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파일로 저장할 수도 있고 잘 찍은 사진만 골라서 현상하면 된다. 디카가 없으면 핸카(핸드폰 카메라)로 찍으면 된다. 내가 가진 핸드폰의 카메라는 100만 화소인데 가까이에서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온다. 사진찍기가 매우 편리하고 값싸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진찍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우리는 가운데 길로 접어들었다. 15분쯤 평탄한 산길을 가니 왼쪽에 정자 하나가 나오고 오른쪽에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에서 샘물을 맛보니 물맛이 매우 좋았다. 물만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산에는 나무가 가득하고, 무성한 잎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시원했다. 친구는 몇 년 전에 부인과 직장을 잃은 후에 요즘에는 산에 푹 빠져 사는 산악인이다. 친구는 청중은 단 한명이었지만 성의를 다해 산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로서는 모처럼 좋은 선생님을 만난 셈이다.

 

사전을 찾아 보면 산(mountain)은 “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훨씬 높이 솟은 부분”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서 훨씬 높다는 기준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해발 300m 이상을 산이라고 한다. 산은 지질시대 전반기에 생겼는데, 신생대 3기까지 이미 현재의 산들이 만들어졌다. 산보다 고도가 낮으면 구릉(hill)이라고 하는데, 구릉은 신생대3기 말부터 만들어졌다고 한다. 등산이란 산에 오르는 것을 말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BC323년에 한니발 장군이 힌두쿠시 산맥을 횡단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출신으로서 당나라의 장군이었던 고선지가 힌두쿠시 산맥의 탄구령(해발 4700m)을 AD747년에 횡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쪼모랑마(영어명 Everest))인데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세르파인 텐징 노르가이가 최초로 등정하였다. 우리나라의 산악인 고상돈은 1977년에 쪼모랑마를 등정하였다.

 

나는 친구로부터 산과 강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산과 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이라고 설명을 한다. 이 말은 산이 곧 분수령으로서 산줄기는 물을 가르는 능선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물은 하천이나 강을 말한다. 친구는 흥미로운 예를 들었다. 관악산에서 바라보면 한강 너머에 북한산이 보인다. 그런데 관악산에서 출발하여 물을 건너지 않고 산 능선만을 따라서 북한산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한다. 즉 관악산에서 광교산을 거쳐 속리산까지 내려갔다가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와 북한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을 선으로 연결하면 1100km가 된다고 한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의 장군봉으로부터 지리산의 천왕봉을 잇는 우리나라의 등뼈를 이루는 능선인데, 이중환이 쓴 택리지(1751년)에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부터 배운 바에 의하면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등으로 인접한 산의 집합이 산맥이다. 그러나 산맥 외에 산경이라는 관점이 있다고 한다. 산맥이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이후에 도입한 관점이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산들을 설명하는 산경표(山經表)라는 체계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처음 듣는 용어라서 매우 흥미로웠다.

 

산경표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인 신경준이 1770년에 만든 책으로서 눈에 보이는 산줄기를 산자분수령이라는 원칙에 따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정리하여 달리 말하면 산의 족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조선 말의 평민 출신 지도편집자로서 전국을 3번이나 순회한 후 산줄기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산경표를 따랐다고 한다. 일반인이 익숙한 산맥 개념은 구한말에 일본학자가 도입한 개념으로서 1900년부터 총 14개월간 지질조사를 실시한 후 땅속의 지하자원을 중심으로 산줄기를 분류했는데, 산자분수령의 원칙을 따르지 않아서 산맥은 물을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전국에는 모두 14개의 산맥이 그려진다. 조정래의 유명한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는 산경표의 기준을 따르면 위치로 볼 때에 호남정맥이어야 맞다고 한다.

 

친구는 인터넷 상에서는 잘 알려진 산행기 작가이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친구는 고등학교 때에 문예반에 들어가서 글쓰기를 익혔다. 친구는 이미 대학 2학년 때에 지리산 종주등반을 혼자서 하고 산행기를 썻을 정도로 일찍부터 산을 좋아하였다. 시간이 많은 요즘에는 1주일에 두 번 산에 간다고 한다. 주중에는 수도권 내의 산에서 한나절 산행을 하고, 주말에는 1박2일로 좀 먼 곳에 있는 산에 간다고 한다. 친구는 산에 갔다 오면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 산행기를 써서 인터넷에 있는 “한국의 산하”라는 산행기 카페에 글을 올린다. 요즘에는 매번 한 1000명 정도가 접속하여 친구의 산행기를 클릭하여 읽어 본다고 한다. 친구는 2년 전 아들 결혼식 때에 그동안 쓴 산행기를 모아서 책을 만들어 하객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친구는 명실 공히 산행기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2400개의 산이 있다고 한다. 친구가 지금까지 오른 산은 430개인데, 유명한 산악인 김정길씨는 거의 2000개의 산을 등산하였다고 알려져 있단다. 그리고 산악인 신경수씨는 우리나라의 대간과 정맥, 지맥, 분맥, 단맥까지를 모두 다닐 계획이라고 한다. 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능선으로만 연결된 선이고, 정맥은 대간에서 출발하여 해안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지맥은 정맥에서 출발하는 작은 능선이고, 분맥은 지맥에서 출발하는 능선이고, 단맥은 지맥에서 출발하는 더 짧은 능선을 말한다고 한다. 나는 뒤늦게 등산에 재미를 붙였는데, 앞으로 목표를 어떻게 정하고 산을 오르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산림청에서 지정한 명산 100개를 목표로 삼아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해 보라고 조언한다.

 

산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쾌한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걷는 산길은 힘들지 않았다. 요즘에 등산인구가 크게 늘기는 했어도 도시 근교의 산에만 사람이 몰릴 뿐, 조금만 멀리 가면 등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특히 주중에는 산행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산을 왜 오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힐러리 경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싱거운 대답처럼 들리지만 진실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유사 이래 철학자와 종교가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여러 가지 그럴듯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인생에는 심오한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훌쩍 흘러 나도 지천명을 넘겨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람이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가장 좋은 대답은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 아닐까? 그보다 더 좋은 대답은 없는 것 같다.

 

12시 30분까지 천천히 걸어서 갈림길이 있는 고개에 도착했는데, 운길산과 예봉산이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왼쪽이 운길산, 오른쪽이 예봉산이었다. 갈라지는 지점에서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방향이 틀리면 도착점은 엉뚱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림길이 있는 고개를 등산 용어로는 안부라고 부른단다. 친구는 등산할 때에 축척 1:50000 지도를 가지고 다니는데, 안부에서는 지도를 꺼내어 방향과 고도를 반드시 확인한단다. 우리는 왼쪽 길로 들어서서 운길산으로 향하였다.

 

등산길은 경사가 심한 8부 능선쯤에 있었는데, 길 양쪽으로는 온통 참나무가 가득했다. 정확히 말하면 참나무는 없다. 참나무는 종의 이름이 아니고 참나무과라고 종 위의 과의 이름이다. 참나무과에는 도토리 열매를 맺는 여러 가지 나무, 즉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의 6종이 포함된다. 떡갈나무는 참나무 중에서 가장 잎이 넓은 나무이다. 떡을 싸서 먹을 정도로 잎이 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졸참나무는 반대로 잎이 가장 작은 참나무이다. 식물 이름에서 ‘졸’이란 작다는 뜻을 가진 접두어이다. 참나무는 태울 때에 연기가 안 나서 땔감으로도 좋고, 도토리는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므로,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유익한 나무이다. 그래서 ‘참’이라는 접두어가 붙었나 보다.

 

우리나라 숲에서 대표적인 나무는 참나무와 소나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나무는 국가에서 보호했기 때문에 많아졌지 자연생태계에서는 참나무가 극상이라고 한다. 극상이란 인간이 간섭하지 않고 숲을 자연 상태로 내버려 두었을 때에 최종적으로 가장 많이 남아서 주종을 이루는 나무를 말한다.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나라 숲에서는 참나무가 극상이라고 우리가 대학시절에 같이 강의를 들을 바 있는 김준민 교수가 주장했다고 한다. 내가 그전에 젊은 생태학자에게서 들었을 때에는 서어나무가 극상이라고 했는데, 생태학 분야에도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가 보다.

 

8부능선 길은 참나무 숲 사이로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중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김밥 2줄과 7개가 들어있는 찰떡파이 한 상자가 점심메뉴였다. 산에서 먹는 김밥은 맛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찰떡파이는 홀수였기 때문에 누군가 4개를 먹어야 했다. 나는 제조회사에 대해서 불평을 했다. “아니, 찰떡파이의 갯수를 짝수로 맞추어야지, 친구 사이에 싸움나게 왜 홀수인 거야!” 결국 친구가 양보를 해서 삐적 말라 몸무게가 덜 나가는 내가 4개를 먹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서 힘을 내어 올라가니 정상이 보이는 지점에서부터 바위길이 나타났다. 바위길을 갈 때에는 지팡이가 큰 도움이 된다. 바위길을 올라갈 때는 조심스러워서 아무래도 속도가 떨어졌다. 이제는 산 아래로 경치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저기 아래로 한강이 보였다. 바위길을 지나 정상에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14시 35분에 드디어 오늘 산행의 목적지인 운길산((雲吉山)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있는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높이 610.2 미터.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서 멈춘다고 하여 운길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화천.춘천을 거쳐 약 371km를 흘러 내려온 북한강물과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영월.충주를 거쳐 흘러 내려온 남한강물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수가 모두 수려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덕소와 구리시가 보이고, 서울이 그 너머에 희미하게 보였다. 동쪽으로는 팔당댐과 북한강이 내려다 보였다. 내려다보는 경치가 빼어났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보기 위하여 산에 간다고 해도 좋은 답변이 될 것 같았다. 정상에서 사진을 한장 찍고 수종사 쪽으로 안내판을 따라 내려왔다.

 

20분쯤 내려오니 옆쪽으로 조그만 봉우리가 있는데, 친구는 그곳에 들렸다 가자고 한다. 운길산 정상은 매우 좁았는데, 거기는 그런대로 공간이 확보된 봉우리였다. 커다란 고사목 한 그루가 정상에 있었다. 사진찍기에 좋은 고사목이었다. 친구에게 봉우리 이름을 물어보니 무명봉이라고 대답한다. 무명봉이라면 이름없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그럴 듯한 이름을 하나 붙여주면 좋을 것 같았다.

 

15시 30분에 수종사에 도착했다. 수종사는 크지는 않고 아담한 절이다. 그런데 수종사는 대웅전 앞 마당이 매우 좁아서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데, 마당에 목련을 심어서 마당을 더욱 비좁게 만들었다. 내가 주지스님이라면 나무를 베어내어 공간을 더 만들고 싶었다. 수종사에서는 3가지가 볼 만하다. 첫째는 북쪽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이다. 나무 옆에 작은 안내판이 있는데, 내용인즉 수령은 525살이고 나무높이는 39m이고 둘레는 7m라고 쓰여있다. 나무에 얽힌 고사로서는 세조대왕께서 수종사를 창건하시고 기념으로 식수하신 나무라고 전해온다고 쓰여있다. 둘째는 대웅전 왼쪽에 있는 오층석탑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2호라고 적혀있다. 이 탑은 차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셋째는 수종사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아래에 있는 마당에 누각이 있는데, 차를 마실 수 있는 장소로서 삼정헌(三鼎軒)이라고 현판이 걸려 있다. 삼정헌이란 시와 선과 차가 하나가 되는 집이라는 뜻이란다. 그 찻집에서는 동쪽으로 난 커다란 통유리를 통하여 팔당호수를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사진작가라면 탐낼 만한 경치이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의 모습은 일찍이 서거정이 동방의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수종사는 세조6년(1460)에 건립되었는데, 세조가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주 들렸던 절로 잘 알려져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두물머리(양수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 수종사이다. 어린 시절에서 노경에 이르기까지 틈이 나면 즐겨 찾던 곳이 수종사여서, 다산의 시에는 수종사가 자주 등장한다. “수종산은 옛날에 나의 정원으로 여겼기에, 생각만 나면 훌쩍 가서 절 문에 당도했네”(水鍾山昔作吾園 意到翩然卽寺門)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다산이 자기 집안의 정원으로 여길 만큼 가깝게 여기던 곳이 수종사였다. 1782년 봄에 22세의 젊은 다산이 수종사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春日遊水鐘寺> (봄날 수종사에서 노닐다)

 

고운 햇살 옷깃에 비추어 밝은데

옅은 그림자 먼 밭에 떠 있다.

배에서 내리니 자유로워 기분 좋고

골짜기에 들어서니 그윽하여 즐겁구나.

바위 풀 교묘하게 단장하였고

산 버섯 둥글게 불끈 솟아나왔네.

아스라한 강변에 어촌이 보이고

위태로운 산머리엔 절간이 붙어있다.

생각이 맑아지니 사물이 경쾌하게 여겨지고

몸이 높아지니 신선이 멀지 않구나.

안타까움은 뜻 맞은 길손이 없어

현묘한 도 찾는 토론 못함이로다.

 

麗景明衣袖 輕陰汎遠田

舍舟欣散漫 入谷愛幽娟

巖卉施妝巧 山茸發怒專

漁村生逈渚 僧院寄危巓

慮澹須輕物 身高未遠仙

惜無同志客 談討溯微玄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해지는 두물머리가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절, 경치는 아름답고 마음은 즐겁기만 했는데, 오직 현묘한 도를 논할만한 스님이 없었던 것이 서운하다 했으니 구도(求道)의 자세로 살아가던 젊은 날의 다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수종사였건만 세월은 흘러 노인이 된 다산은 더 이상 산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다산이 70살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이며 39세이던 해거도위(海居都尉) 홍현주(洪顯周)가 친구들과 함께 그를 찾아와 운길산의 수종사에 오르자고 했을 때 다산은 함께 가지 못하는 늙은이의 서러움을 노래했다. 시의 제목은 “임금의 사위께서 수종사로 놀러가자 했으나 내가 늙어서 따라가지 못함(都尉將游水鍾寺 余老不能從)”이다.

 

수종산의 저녁 빛은 찡그린 얼굴 모습

눈꽃 핀 나무와 얼음 샘이 초조하게 사람 기다리네.

고갯마루에 까마귀 날자 그때야 말채찍 가다듬고

역사(驛舍)에 닭 울자 벌써 수레바퀴 기름치네.

북쪽 산굽이 일천 자락을 붙잡고 올라

동쪽 봉우리 만 가마 티끌 깨끗이 씻고 싶어라.

이러한 풍류놀이에 뒤따르기 어려워

백발의 노인 시 읊으며 바라보니 마음만 아프네.

 

水鍾山色暮如顰 雪樹氷泉悄待人

嶺路鴉翻初振策 驛亭鷄唱已膏輪

思攀北崦千回磴 淨洗東華萬斛塵

如此風流難附尾 白頭吟望黯傷神

 

정조대왕의 인정을 받아 한동안 잘 나가던 다산은 나이 40살에 천주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모함을 받아 전남 당진으로 귀양을 간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나이 57살에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비록 복권되지 않아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학문과 인품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당대의 명사들이 자주 찾아왔다. 인생과 학문을 논하고 역사와 세상을 논하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노년의 삶을 여유롭게 보내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많아 산에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읊은 시는 슬픔을 자아나게 한다.

 

수종사 왼쪽 옆길로 가파른 하산길이 나 있었다. 하산길에는 지팡이 2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등산에 비해 하산은 빨랐다. 하산은 인생의 후반부라고 비유할 수 있다. 예전에야 평균수명이 40세가 채 안되었으니, 40살만 되어도 불혹이니 뭐니 하면서 후반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인생을 살려면 인생의 후반부를 잘 살아야 한다. 전반부에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하더라도 후반부가 흐려지면 일생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하산길에서 사고가 많이 나듯이, 인생의 후반부에 전반기의 명성을 유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젊은 날에 시간은 얼마나 느리게 가는가? 그러나 인생의 정점을 지나 늙어가는 시간은 얼마나 빠른가? 그렇지만 마음만 잘 먹으면 하산길은 오히려 여유가 있을 수 있다. 등산할 때에 보지 못하던 주변 풍경을 자세히 둘러 볼 수가 있다. 고은 선생의 다음과 같은 시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처음처럼”은 최근에 소주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신영복 선생의 서예 글씨이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는 인생의 초반기에 가졌던 정열과 도덕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쉬운 예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위인인가 독재자인가? 내 생각으로는 유신 전과 후로 나누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유신 전에 그는 검소하고, 서민적이고, 민주주의를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1974년 10월 유신 전에 청와대에서 그는 막걸리를 즐겼으며 반대자를 탄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 이후 1979년 10월 26일 운명의 만찬장에서 술은 시바스 리갈로 변해 있었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를 탱크를 동원하여 밀어버리자고 주장했으며, 남산의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는 국회의원, 대학교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혁명을 일으키던 당시의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하여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어 노욕(老慾)을 떨쳐 버리기가 어렵다. 나이들수록 새로운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이 세어지고, 먹을 것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여 젊은 사람들로부터 “아이고, 그저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막상 본인은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젊었을 때에 . . ”로 시작되는 회고담과 장광설은 대개의 경우 청중에게는 영양가는 하나도 없고 듣기에 괴로운 독백이 되기 쉽다. 내가 좋아하는 옛날 속담이 하나 있는데, “나이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말이다. 늙어갈수록 말수는 줄이고, 지갑을 열어서 남에게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이리라.

 

다산은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75세까지 18년을 양수리 고향집에 살면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고 숱한 토론을 전개했다. 다산의 노년기를 잘 보여주는 “밤(夜)”이라는 시가 있다.

 

어둑어둑 강가마을이 저무는데

성긴 울타리엔 개짖는 소리 걸렸네

차가운 물결에 별빛은 고르지 못하나

먼 산의 눈빛은 되려 밝아라

끼니 잇는 일에야 좋은 계책 없건만

독서 즐김에야 등잔불이 있다네

깊은 근심에 마음 졸임 그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일평생을 제대로 마칠까

 

강물 위에 별빛이 비추고 먼 산에 눈이 가득 쌓인 겨울 밤, 가난한 삶이야 크게 바꿀 아무런 계책이 없건만 등잔불이 비춰주니 책 읽는 데는 지장이 없노라는 다산의 고백이다. 노욕에 사로잡혀 걱정과 근심에 빠진 여느 노인과 달리, 어떻게 해야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제대로 마칠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다산의 모습이 돋보인다.

 

16:30분에 산 아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11시 30분부터 총 산행시간은 5시간이 걸렸다. 시골 분위기가 물씬나는 전원 주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담 안쪽으로는 대추나무 가지에서 대추가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작은 조각논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가을 분위기가 완연하였다.

 

큰 길까지 내려오자 학교가 하나 나타났다. 정문에는 연세중학교라고 간판이 있었다. 중학교 정문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니 멀리서 운길산이 보였다. 멀리서 보는 산은 아무 특징이 없다. 그저 산일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멀리서 보는 이의 인생은 특징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하고, 이름을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 그는 나에게 의미있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는 그냥 사람일 뿐이고 산은 그냥 산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운길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산이 되었다.

 

                                          

*위 글은 대학친구 이 상훈 교수가 저와 함께 운길산을 오른 후 쓴 산행기로 그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