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주기35:금남호남정맥 1구간(3정맥분기점조약봉-450봉)
*산행일시:2008. 6. 30일/ 7시14분-19시2분(11시간48분)
*소재지 :전북 진안
*산높이 :부귀산806m
*산행코스:모래재-3정맥분기점조약봉-오룡고개-부귀산 -450봉-진안읍사무소-26번국도
섬진강의 산(山)울타리 환주는 북쪽 울타리인 금남호남정맥으로 이어졌다. 작년 5월 광양의 망덕산에서 시작
한 섬진강의 산(山)울타리 환주산행은 그간 총34회를 출산해 3정맥분기점인 조약봉까지 진출함으로써 이 강
의 서쪽 울타리인 호남기맥과 호남정맥을 모두 모두 마쳤다. 한 주 쉰 후 어제 조약봉을 올라 북쪽 울타리인
금남호남정맥에 첫발을 들였다. 백두대간 영취산까지의 북쪽 울타리 환주를 마친 후 백두대간을 따라 동쪽 울
타리를 탈 계획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을 타고가다 남쪽으로 꺾어 하동의 두우산을 오름으로써 광
양의 망덕산에서 시작한 섬진강 산(山)울타리 환주산행이 끝나게 되는데 웬만하면 올 안에 매듭짓고자 한다.
금남호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3정맥분기점인 조약봉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다. 도상거리가 63Km밖에 안 되는 가장 짧은 정맥이지만 섬진강과 금강을 가르는 산(山)울타리이자 호남정맥
과 금남정맥을 백두대간에 이어주는 교량으로 장안산, 팔공산과 성수산 등 천m를 넘는 고산이 포진해 있고
진안의 명물 마이산이 자리 잡고 있다. 장장 225Km를 흘러 광양만 앞바다로 합류하는 섬진강이 바로 금남호
남정맥의 팔공산 북쪽에 자리한 1,080m봉의 서쪽 아래 계곡에서 발원된다.
어제는 금남호남정맥에 단단히 신고식을 치렀다. 산행 초반 정맥에서 벗어난 조약치를 올라 헤매느라 2시간
가까이 까먹었고 산행 막판에는 부귀산에서 강정골재로 내려가는 중 알바를 해 강정골재에 닿지 못하고 진안
읍사무소로 하산했다. 진안에서 전주까지 버스로 이동하며 금남호남정맥이 가장 짧은 정맥이라고 방심해서는
이번처럼 알바를 면할 수 없다는 산신령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아침7시14분 모래재를 출발했다. 전날 밤 야간열차를 타고 전주로 미리 내려가 역 근처 찜질방에서 2시간 남
짓 눈을 붙였다.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기린아파트 앞 정류장으로 옮겨 6시20분경에 모래재 행 첫 버스에 올
랐다.
7시43분 3정맥분기점인 조약봉에서 금남호남환주산행을 시작했다. 모래재에서 조약봉을 올라 무사산행을 비
는 기도를 올린 후 금남호남정맥을 총괄하는 산신령께도 똑 같은 내용의 염원을 고했다. 조약봉에서 북동쪽
안부로 내려섰다 비알 길을 올라 8시5분에 산불감시초소건물이 쓰러진 채 버려져 있는 해발620m의 조약치에
다다랐다. 모래재를 출발할 때부터 뿌리기 시작한 비가 조약치에서도 여전히 내려 시야도 흐렸고 내려가는 길
도 희미했다. 표지기를 따라 내려가다 이상해 방향을 체크해보니 동쪽이어서 되돌아가다 표지기가 보여 이 길
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뒤돌아 얼마를 내려가다 표지기를 만나 안심하고 더 내려가자 공사장의 소
음이 크게 들렸다. 진행방향이 계속 동쪽으로 이어져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알고 조약치로 다시 올라가 지도를
꺼내 놓고 나침반을 정치한 후 마루금을 찾았다. 남쪽방향으로 미루금이 지나는 고봉이 보여 그 봉우리로 이
어지는 길을 찾고자 몇 곳을 내려 가보았으나 전혀 사람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아 다시 조약치로 되올라갔다.
아무리 찾아도 길이 나타나지 않아 망연자실해 있다가 먼저 분의 산행기를 자세히 읽어보고 이 분은 조약치를
오르지 않고 중간에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갔음을 알았다. 조약봉에서 내려선 안부에서 올라온 길로 7-8분
을 되 내려가 삼거리를 만나 오른 쪽으로 진행하다 조약봉에서 올라오는 길이어서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왔다.
9시46분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정맥 길을 이어갔다. 생각지도 않은 알바로 1시간50분가량 까먹은 데다
제우스신이 구름만 조금 끼게 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굵은 비를 뿌려 마음이 급해졌다. 조약치에서 잘 못 인도
한 A시리얼넘버(“A210과 같이 번호가 연이은 표지기로 정맥종주 표지기가 아님)의 표지기가 이 길에도 계속
걸려있어 밉살스러웠다. 몇 개의 봉우리를 넘었는데 지도에 나와 있는 641봉의 산불감시초소가 나타나지 않아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진행방향이 맞고 정맥종주표지기가 많이 걸려있어 그대로 내달렸다. 그새 내린 비로 구
두도 양말도 질펀하게 젖었지만 한 여름에는 쨍쨍 햇볕이 내리 쬘 때보다 비오는 날이 훨씬 나 1시간 넘게 쉬
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최고의 전망지인 630m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해 그대로 내려가려다 암봉을 오르기를
정말 잘한 것은 또 한 번의 알바를 면했기 때문이다. 바위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였고 마침 비도 그쳐 태양
이 잠시 얼굴을 내보이기도 했다. 마루금도 아닌 데를 쓸데없이 올라 고생한 조약치가 한 눈에 잡혔고, 왼쪽
아래 마을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가 햇살의 도움을 받아 산속의 정적을 깼다. 이 암봉에서 6-7분을 쉰 후
11시3분에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12시6분 오룡고개에 내려섰다. 630m봉 암봉에서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한
참을 내려가 안부를 지났다. 안부에서 올라서 개활지 위 능선을 걸어 630m봉 출발 50분 후에 묘지를 처음 만
났는데 연이어 묘지 몇 곳을 더 지났다. 주홍색지붕이 눈에 확 띄는 개활지인 잡목숲길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
선지 얼마 안 되어 망태버섯이 떼로 보여 잠시 멈춰 서서 근접촬영을 했다. 산행을 서두르느라 지도상에 나와
있는 665m봉과 580m봉을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내달렸는데 그리 힘든 길은 아니었다. 12시6분에 오룡고개로
내려섰다. 13시를 넘어 오룡고개에 도착하면 앞으로 1시간 거리인 가정고개를 빼놓고는 적당한 탈출로가 없어
이번 산행을 이 고개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쉬지 않고 부귀산으로 향했다. 26번
국도를 건너 풀을 잡고 절개면을 올라 왼쪽으로 3-4분을 옮긴 다음 오른 쪽 위 봉우리를 향해 올랐는데 표지기
가 보이지 않아 길 찾기에 애를 먹었다. 철조망을 두 번 넘어 20분 만에 벗어났던 제 길로 돌아와 무탈하게
450m봉을 올랐다. 450m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걸어 다다른 돌무더기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갔다가 480m봉을 넘어서자 왼쪽 아래로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개활지를 지나 오른 또 다른 480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갔다. 13시7분에 내려선 깊숙한 십자안부가 가정고개로 26번 국도에서 시
멘트 길이 이어져 있는 가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오른 쪽 아래로 나있어 이 길로 탈출이 가능하지만, 이런 속
도라면 해지기전에 목적지인 강절골재까지 무난하게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 산행을 계속했다. 가정재에서 5-
6분을 걸어 올라선 540m봉에서 점심을 들면서 원기를 회복한 후 13시26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15시16분 650m봉을 올라 10분여 쉬면서 부귀산 등정에 대비했다. 가정재 위봉우리에서 점심을 든 후 남동쪽
으로 내달렸다. 어찌 잘 못해 또 다시 알바라도 하게 되면 더 이상 여유시간이 없어 낭패다 싶어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능선 길에서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최대한 속도를 냈다. 600m봉으로 남동진했다가 북동진해
590m봉을 오른 쪽으로 우회한 시각이 14시3분으로 지도상에 나와 있는 1시간을 처음으로 20분가량 단축했다.
590m봉을 우회해 내려선 안부가 질마재인 것 같은데 표지물을 확인하지 못하고 650m봉을 향했다. 질마재를
지난 지 반시간이 다되어 620m봉(?)에 올라서기까지 오른 쪽으로 마이산이 보였지만 지도에 나와 있는 헬기
장은 보지 못했다. 620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진행하는 중 오른 쪽 아래에 자리한 정곡지 저수지가 보였
다. 오룡고개로 내려서기 얼마 전에 땅바닥에 자리한 노란 망태버섯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참나무 줄기에 기생
한 반투명의 동부묵 색깔을 띤 버섯을 만나 카메라에 담아왔다. 15시 정각에 올라선 봉우리가 650m봉이다 했
는데 조금 내려가다 비슷한 높이의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 650m봉에 이르렀지만 이미 거쳐 왔을 우무실재를
확인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다. 다른 분들 산행기에는 가정재, 질마재와 우무실재 등의 이미 지나온 안부에
서 모두 표지물을 본 것으로 적혀 있지만 나는 서둘러 내달려서인지 단 한 곳에서도 보지 못했다. 지도상의
650m봉에 오르자 3000산을 목표로 해 1257번째로 오른다는 한 분은 표고를 655m로 표기하고 봉우리 이름을
복호봉(伏虎峰)으로 적어놓은 표지기를 걸어놓았다. 이곳에서 참외를 까먹으며 쉬었다.
16시38분 해발806m의부귀산 정상에 올라섰다. 복호봉에서 13분을 쉰 후 오른쪽으로 내려갔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 표고 590m까지 내려섰으니 부귀산 정상까지는 해발고도가 200m이상 차이가 나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
든 산 오름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오전에 2시간가량 비를 맞고 계속 걸었더니 젖은 사타구니가 팬티에 조금
씩 쓸려 드디어 까져버렸다. 발걸음을 뗄 적마다 사타구니가 쓰라려 어기적거리며 걷느라 엄청 불편하고 시
간이 더 걸렸다. 가파른 오름 길은 힘들었지만 수피가 희멀건 서어나무들이 반가웠고 마이산에서 실컷 볼 역
암을 미리 보는 재미도 오붓했다. 한참을 올라 만난 갈림길에서 넓게 난 길로 직진해 조금 올라가자 수직바위
에 걸려있는 가느다란 로프가 보였다. 이 로프를 잡고 올라선 바위의 고도가 770m로 고도계에 나와 있어 30-
40m만 고도를 높이면 된다했는데 계속 바위를 올라야 해 직등을 포기하고 다시 로프를 잡고 내려가 갈림길로
원 위치했다. 부귀산 정상을 안전하게 오른 쪽으로 우회해 굵은 로프를 잡고 올라선 정상 바로 밑의 바위에서
조망한 전망이 정말 빼어났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애의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삶이 외줄을 타고 묘
기를 뽐내는 곡예사보다 더 아슬아슬해 보였다. 아주 먼발치로 완주의 만덕산이 흐릿하게 보였고 진안 읍내와
마이산은 훨씬 선명했다. 마이산 너머 해발고도가 천m를 넘을 것 같은 고봉들이 금남호남정맥의 연봉일 것이
다. 몇 분을 더 올라 묘지 바로 위에 삼각점이 세워진 부귀산 정상에 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쉬지 않고 바로 뛰
어 내려가면 저녁7시29분에 전주를 출발하는 기차를 탈 수 있겠다 싶었지만 사타구니가 까져 별 수 없이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비가 온 뒤끝이라서 하늘은 쾌청했고 흰 구름이 높이 걸려있어 하늘 풍경이 여유로웠다.
18시15분 450m봉 앞 묘지에 다다랐다. 부귀산 정상에서 20분 넘게 푹 쉰 후 17시 정각에 일어나 하산을 시작
했다. 7분가량 동진해 만난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안천주교방향으로 내려갔다. 산양산삼을 재배하는
곳으로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진 철조망울타리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능선삼거
리에서 오른 쪽의 천주교공원 행 길로 들어섰다. 얼마 후 굵은 로프로 줄을 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 이번에
는 장뇌산삼재배지 옆을 지났다. 산양산삼과 장뇌산삼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으나 인삼산지로 이름 난 금
산과 인접해 있는 여기 진안에서도 인삼밭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산등성에다 산양산삼(또는 장뇌산삼)을 재배
하는 것을 진안군 지자체가 발 벗고 나서 지원하는 것 같았다. 하산을 시작한지 50분이 채 안지나 앞이 탁 트
인 개활지 초입의 묘지를 지났다. 인삼밭으로 개간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것으로 보이는 개활지를 바라보며
잡목가시 숲 때문에 고생 좀 할 것이라 각오를 했지만, 벌목한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잡목들이 무릎을 넘지 않
아 별 어려움 없이 개활지를 지났다. 450m봉 앞 묘지에서 어느새 전면으로 바짝 다가선 마이산을 사진 찍었
다. 먼발치서 마이산을 바라보았을 때는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 정답게 마주보고 있다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
설수록 토라져 등을 맞대고 뒤돌아 앉은 것으로 보였다.
19시2분 진안읍사무소 앞 26번 차도에서 첫 구간 종주산행을 마쳤다. 450m봉 묘지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진
행해야했는데 그냥 직진하는 바람에 목적지인 강정골재로 내려서지 못하고 진안읍사무소 앞으로 내려갔다.
450m봉 묘지에서 3-4분가량 직진해 긴 나무의자가 세워져 있는 "부귀산3.6Km/자주공원1.4Km"의 능선삼거
리에 도착했다. 직진해 부지런히 내려가자 산 중턱에 주홍색의 KBS송신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 이르
기까지 꽤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표지기를 보지 못해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지만 확실한 정맥지점
까지 원위치할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그대로 하산했다. 여러 기의 봉분이 안치된 묘지에서 옷을 갈아입
은 후 아래로 내려선 곳이 한전 건물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 진안읍사무소를 지났고 이내 26번국도 앞에 서자
길 건너로 하천이 나있어 강정골재가 아님을 최종 확인했다. 곧이어 도착한 전주행 직행버스에 올랐다. 20분
만 당겼어도 7시29분 전주역 발 기차를 탈 수 있었을 것을 그리하지 못해 8시30분에 전주를 출발하는 강남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사타구니가 쓰라리고 가시나무들에 찔린 팔다리가 근질대 눈을 붙일 수 없었다.
긴 시간 알바를 하고도 해떨어지기 전에 첫 구간 종주를 무사히 마쳐 기뻤다. 필리핀 속담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을 하면 변명이 보인다 했다. 초반 알바는 약속을 깨고 비를 뿌린 제우스신의
심술 때문이라고 강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판에 길을 벗어난 것은 어디에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실수였다.
변명이 보이지 않아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산줄기 따라 걷기가 하기 싫은 일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일
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벗어난 길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방법도 보일 것이다. 비록 긴 시간 알바로 고생은
했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환주기36:금남호남정맥 2구간(450봉-옥산동고개)
*산행일시:2008. 7. 16일/ 10시23분-18시53분(8시간30분)
*소재지 :전북 진안
*산높이 :마이산685m
*산행코스:진안읍사무소-450봉-강정골재-마이산-30번국도-가름내재-옥산동고개-사옥마을
전북 진안은 해발4백m가 넘는 고원지대다. 이 진안고원에 우뚝 솟은 마이산은 세계에서 유일한 부부봉으로
알려져 있다. 해발685m의 수마이봉과 이보다 14m가 낮은 암마이봉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부부봉에 가까
이 다가가면 벌집 같은 큰 구멍들이 꽤 많이 보인다. 온 몸에서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이 구멍들을
바라보노라면 이들 부부가 살아온 삶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마이산은 중생대 백악기말 진안분지의 퇴적암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면서 차별 침식을 받
아 형성된 산으로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 등 계절에 따라 달리
불리기도 한다. 계절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그 이름이 달리 불렸으니 삼국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조 초기에는 속금산으로 불렸다가 3대 임금인 태종 때부터 부부봉의 두 바위가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불렸다. 영남육괴와 옥천조산대사이에 생긴 단층선을 두고 2개의 지각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사다리꼴 형태로 지반이 꺼져 내린 후, 이곳에 만들어진 호수에 퇴적층이 두껍게
쌓여 형성된 것이 마이산의 일생이 시작된 진안분지라고 이우평님이 지은 “한국지형산책”에 적혀있다. 진안분
지는 지하 깊은 곳에서 굳은 역암층이 약4천만년 동안 지각이 양쪽으로 물러났다가 밀려들어오는 침강과 융기
를 8회 이상 반복하면서 400m이상 솟아올라 만들어졌다. 마이산의 천연콘크리트 역암은 진안분지에 생성된
퇴적암층이 지각변동을 겪으며 융기하여 지표면에 노출된 것이다. 마이산의 역암층을 구성하는 자갈의 크기
는 최대 1m나 된다고 한다. 역암이 지표에 노출되어 풍화와 침식을 받으면 역 주위의 점토나 모래가 풍화되어
자갈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차별침식으로 만들어진 풍화혈을 타포니(tafoni)라 하는데 마이
산의 타포니는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지금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감내하며 몇 천만년이나 말없이 제 자리를 지켜온 마이산의 일생은 가히 감동적
이다. 마이산의 일생에 나보다 훨씬 앞서 감동한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이 바로 부부봉에서 떨어져나간 돌들을
모두 모아 돌탑을 쌓아 올린 이갑용 처사님이다. 이분은 1885년에 입산하여 도를 닦다 1957년 98세로 영면하
시기까지 무려 30년간 120개의 돌탑을 쌓으셨다. 전국8도에서 가져온 몇 개의 돌들이 탑 쌓는데 들어간 천지
탑을 빼고는 다른 모든 탑들이 모암에서 떨어져 나간 돌들을 주워 쌓아 놓은 것이기에 이 탑들은 암수 두 마이
봉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모암에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아주 멀
리 사라진 것이 아니고 바로 아래 탑사 주위에 또는 풍화혈 안에 돌탑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이들 부부봉의 아
픔도 많이 덜어졌을 것이다. 이렇듯 훌륭한 처사님을 만나 영생을 누릴 부부봉이 한편 부럽기도 했다.
오전10시23분 진안읍사무소를 출발해 지난번에 잘 못 하산한 450봉으로 향했다. 괜히 꾸물대다가 25분정도 산
본 집을 늦게 나서는 바람에 강남에서 첫차를 놓치고 40분 늦은 아침6시10분 발 전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첫
차 보다 55분 늦은 8시55분에 전주에 도착해 3백m 떨어진 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 한참을 기다리다 9시40분에
야 진안 가는 직행버스에 올랐으니 25분 늦게 집을 출발한 것이 몇 번 버스를 갈아타면서 종국에는 시간차가 1
시간 반으로 늘어났다. 모든 일이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잠시 게으름부리다 왕창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기가 쉽
지 않을 것 같았다. 한전 옆 산길로 들어가 지난번에 옷을 갈아입느라 쉬었던 묘지에 올랐다. 묘지에서 450m
봉으로 올라서는 길을 찾지 못해 7-8분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풀숲에 가려진 길을 용케 찾아 본격적인 산
오름을 시작했다. KBS TV 진안중계소를 지나 개활지 능선에 올라서자 450m봉이 가깝게 보였다.
11시5분 450m봉 앞 묘지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금남호남정맥 길을 이어갔다. 진안중계소를 지나 오른 개
활지능선에서 직진해 왼쪽 아래로 천주공원 길이 갈리는 쉼터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후 3-4분을 더 걸어
450m봉 앞 묘지에 다다랐다. 지난번에 무심코 지나친 이 봉우리에서 남쪽 길로 하산했어야 했는데 동쪽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목적지인 강정골재로 내려서지 못하고 진안읍사무소 앞으로 잘 못 내려가 이번에 다시 오른
것이다. 묘지에 다다르자 강정골재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표지기가 붙어 있어 길 찾기가 쉬웠다. 왼쪽 사면이
벌목지여서 키를 살짝 넘는 잡목과 가시나무들이 능선 길을 덮고 있어 때맞춰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10분 남
짓 잡목숲길을 헤쳐 나가는 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450m봉 출발 25분이 지나 다다른 시멘트고개
길에서 개사육장 바로 옆을 지나 버섯재배용 참나무들이 가지런히 세워진 능선으로 올라섰다. 주홍색의 시멘
트정자를 지나 얼마간 직진하자 강정골재 절개지 상단이 나타나 왼쪽으로 내려갔다.
11시50분 강정골재 앞 차도를 건넜다. 절개지 상단에서 왼쪽 아래 크리스탈모텔 입구로 내려가 차들이 뜸하게
지나가는 때를 기다려 중앙분리대를 넘었다. 오른 쪽 고개 마루로 가다가 왼쪽의 낮은 시멘트벽을 올라선 다
음 오른 쪽 절개면 상단으로 이어지는 배수로를 따라 올라갔다. 절개면 상단에서 왼쪽으로 꺾어 4-5분가량 마
루금을 이어가다가 나지막한 첫 번째 봉우리에서 짐을 내려놓고 17분을 쉬면서 등의 땀을 식혔다. 무턱대고
서두르다가 된 알바라도 하게 되면 목적지인 옥산동고개까지 진출하지 못할 것 같아 갈림길마다 꼼꼼히 표지
기를 체크하고 산행기도 다시 보느라 비교적 평탄한 길인데도 산행이 더뎠다. 오른 쪽 사면이 간벌지인 능선
길을 지나며 지난번에 오른 부귀산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어렸을 때 시골 어머니께서 선산에서 많이 캐 오신
청도라지 꽃 한 송이를 사진 찍기도 했다.
13시20분 꼭대기가 제법 넓은 암봉인 525m봉에 다다랐다. 임도를 가로 질러 오른 쪽 사면이 벌목지인 땡볕의
능선 길을 걸어 숲길로 들어선 후 한참을 올라 490m봉에 올라섰다. 해발고도가 450m-490m 사이의 능선 길을
걸어 525m봉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는 능선삼거리에 도착했다. 10m가량 떨어진 너럭바위의 암봉인
525m봉에 오르자 시야가 확 트여 전망이 일품인데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사방을 둘러보며 카메라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최고의 볼거리는 코앞으로 다가선 마이산의 두 암봉이었지만 남서쪽의 광대봉으로 뻗어나가
는 산줄기와 비룡대 팔각정도 눈길을 끌었다. 그늘로 옮겨 점심을 들은 후 다시 암봉으로 돌아가 모처럼 거풍
을 즐겼다. 호남정맥을 종주 중인 서 상경님의 한 산행기에 따르면 옛날 분들도 산에 오르면 머리를 풀고 바람
에 빗질하는 즐풍을 한 후 바지를 벗어 거풍을 즐겼다 하는데 저 역시 한 여름에는 호젓한 정맥 길을 혼자서
종주할 때 바람이 잘 통하는 쉼터에서 바지를 내리고 사타구니의 땀을 식히곤 한다.
14시55분 탑사 아래 상가 앞 넓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525m봉에서 30분을 쉰 후 13시50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암봉을 왼쪽으로 에돌아 맞은편의 봉우리에 올라서자 방금 지나온 525봉m이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애의 암
벽이어서 양 옆으로 날개만 달아준다면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성황당 돌탑이 세워진 안부사거
리에서 폐타이어 계단을 올라 제2쉼터에 도착해 잠시 쉰 후 왼쪽으로 꺾어 내려갔다. 곧바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다시 폐타이어 길을 올라 넓은 헬기장이 들어선 해발540m의 봉두봉에 다다른 시각은 525m봉 출발
40분 후인 14시30분이었는데, 이 봉우리의 삼각점은 헬기장 바로 아래 갈림길에 세워져 있었다. 갈림길에서
10분 여 내려가 만난 안부에서 출입금지 경고판이 앞을 가로막아 암마이봉으로 오르는 마루금을 이어가지 못
하고 오른 쪽으로 에돌아 탑사아래 넓은 공터로 내려섰다.
본격적인 마이산 탐방은 여기부터였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탑사 대웅전으로 올
라갔다. 이갑용 처사께서 쌓아놓은 탑들은 몇 번을 보아도 신비로웠다. 이 분이 공들여 쌓은 수많은 탑을 보고
예술이란 자연에 손을 대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고 자연에 정성들인 손길을 더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다른 데서 반듯한 돌들을 가져와 탑을 쌓은 것이 아니고 마이산의 두 모암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을 모
아 쌓은 것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커다란 자갈이 떨어져 나가 움푹 파진 암마이봉의 타포니 안에 탑을
쌓은 이갑용처사의 역사(力事)는 부처님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
고서야 깎아지른 암벽에 자리한 움푹 파진 곳을 무슨 수로 기어 올라가 탑을 쌓았겠느냐 싶어서다. 대웅전 뒤
에 정교하게 쌓아놓은 천지탑이 이 처사의 예술적 생명을 무한대로 늘려놓으리라 생각하면서 숫마이봉의 은
수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마이봉의 탑사에 비하면 숫마이봉의 은수사는 뭔가 모르게 초라했다. 대적광전과
숫미이봉을 카메라에 담은 후 정맥으로 복귀하는 길을 찾았다. 조선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이 절에 와 기도를
드리는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크게 자라 돌배가 줄줄이 열린 청실배나무를 지나 시꺼먼 비닐 거적을 덮어
씌운 간이 창고 위 산속으로 들어섰다. 표지기를 따라올라 다다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묘지에 오르자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정맥 길로 올라서기가 쉽지 않았고 모기들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15시50분 숫마이봉 동쪽의 정맥 길로 올라섰다. 묘지에서 곧바로 올라선 해발 540m의 능선이 바로 정맥 길이
었으니 암마이봉 앞 출입금지판에서 정맥 길을 벗어난 지 1시간7분만에 복귀한 셈이다. 왼쪽 바로 옆에 높이
솟은 숫마이봉을 뒤로 하고 오른 쪽으로 내려가 30번 국도로 향했다. 3-4분을 내려가 만난 묘지에서는 끈질기
게 따라붙었던 모기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에 잠자리와 매미들이 이 산의 주인행세를 했다. 왼쪽 사면을
벌목하느라 올라왔을 불도자의 바퀴자국이 선명한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왼
쪽 사면에 낙엽송과 적송만 남겨두고 나머지 일반 소나무들은 모두 베어낸 것은 재선충 때문이라 생각하자 안
타깝고 두려웠다. 15분을 더 걸어 다다른 440m봉에서 7-8분을 쉰 후 또 다시 오른 쪽으로 꺾어 3-4분을 내려
가 십자안부에 닿았다.
16시41분 30번국도 앞 고개 마루로 내려섰다. 십자안부에서 다시 올라 나지막한 봉우리 몇 개를 넘어 왼쪽으
로 꺾어 내려갔다. 콩밭을 지나 30번 국도에 내려서기까지 나뭇잎에 가려 지나온 마이산의 두 암봉이 거의 보
이지 않았다. 국도를 건너 묘지 위를 지나 직등 길을 오르느라 흐르는 땀이 불러들인 모기들이 신이 나서 윙윙
거리며 얼굴을 맴돌았다. 455m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490m봉에 이르기까지 잡목풀숲 길을 지나는 35분 동
안 나뭇가지와 산딸기 가시들이 얼굴을 수없이 때리고 찔렀다. 하늘로 승천하려다 여신이 꾸물대는 통에 사람
들에 들켜 그대로 굳어버린 산신부부가 서로 등을 돌린 것은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 화를 내고 싸웠기 때문
이라는데 오른 쪽 간벌지 너머로 다시 모습을 보인 마이산의 부부 봉이 이제는 화해를 한 듯 정겹게 보였다.
부부봉은 왼쪽 아래로 파란 지붕의 민가가 보였고 오른 쪽 멀리로 30번 차도가 보였다.
17시37분 가름내재로 내려섰다. 490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묘지를 지난 후 고추밭 바로 아래 아스팔트 차
도가 지나는 가름내재에 당도해 일단 쉬면서 더 이상 산행할 것인가 를 생각했다. 택시를 불러 진안으로 바로
갈까하다가 기왕 택시를 부를 바엔 한 시간 정도 더 가서 옥산동고개에서 마치는 것이 다음 산행을 수월하게
할 것 같아 다시 짐을 챙겼다. 일단 끝내자고 마음먹었다가 생각을 바꾸어 다시 하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바
로 위 능선에 올라서기까지 표지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지도를 보고 맨 오른 쪽에 난 공사용 길로 들어섰다.
공사용 길은 8부 능선에서 끝났고 나머지 길을 그냥 똑바로 올라 능선 길로 올라섰다.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
어 몇 걸음을 옮기자 노란 표지기가 보였다.
18시44분 옥산동고개마루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끝냈다. 가름내재에서 올라선 능선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5분
간 오른 봉이 535m봉이다. 왼쪽으로 내려가 안부를 지나자 별안간 숲 속이 깜깜해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뿌리
기 시작했다. 산행 중 내내 무덥고 후덥지근해 한 번은 소나기가 쏟아질 것이라 예상했었고 그동안 참아준 것
만도 고맙다는 생각에서 그냥 비를 맞고 걸었는데 몇 분 후 비가 그쳐 다행이었다. 535m봉에서 22분을 걸어
옥산동고개마루에 도착했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왼쪽으로 좁은 농로길이, 오른 쪽으로 트랙터가 다닐만한
넓은 농로길이 나 있었다. 오른 쪽으로 10분을 내려가 18시55분에 사옥마을 첫 집 앞마당에 도착, 하루 산행을
모두 마쳤다.
4-5분을 기다렸다가 저녁 7시에 출발하는 진안 행 군내버스에 올랐다. 1시간 전에 지났던 가름내재를 넘어 진
안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인근 식당에서 순대 국을 사 든 후 전주행 직행버스에 오르자 돌
아앉은 부부봉이 생각났다. 당신들의 더 큰 고통은 살점이 떨어져나가 생긴 것이 아니고 아직도 화해하지 못
하고 토라져 사는 데서 비롯되었기에 누구라도 빨리 손을 내밀고 서운함을 털어버리라고 고언을 전하고자 한
다.
환주기37:금남호남정맥 3구간(옥산동고개-서구이치)
*산행일자:2008. 7. 31일/ 9시50분-19시42분(9시간52분)
*소재지 :전북 진안/장수
*산높이 :성수산1,059m, 시루봉1,110m, 삿갓봉1,114m
*산행코스:사옥마을-옥산동고개-성수산-삿갓봉-오계치-1070봉-서구이치
도시의 아파트들은 그 수명이 다하기 전에 철거하고 다시 짓는 것이 다반사다. 지은 지가 오래된 서울
시내 아파트들이 더 이상 손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헐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부를 늘
릴 목적으로 재건축을 하는 것이기에 붕괴위험이 다분한 아파트의 재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서
울시장을 성토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결사투쟁을 외치면서도 그 위험하다는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가
는 주민들이 거의 없는 것이다.
오직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해 쓸 만 한 집을 헐어내고 다시 짓는 것이라면 그 새로 짓는 집이 어떠하든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편히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스위트 홈(sweet home)과는 별반 관
계가 없을 것이다. 정붙이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가격으로 표시되는 교환가치가 아니고 만족으로
나타나는 사용가치다. 그렇지 않다면 작은 집에 살거나 시골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만족해 행복감
을 전혀 느낄 수 없어야하는데 실제는 그 반대 경우도 꽤 많다. 세상 살면서 자기만족지수인 사용가치
에는 눈감으면서 매사를 교환가치만 쫓아다닌다면 자기 삶에 만족하기는 힘들 것이다. 교환가치를 쫓
는다는 것은 상한선이 없는 무한 욕망을 쫓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금남호남정맥 종주 길에 슬레이트 지붕의 한 폐옥을 보았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어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시골의 폐옥을 바라보다가 어쩌면 우리네 삶의 여정도 저와 같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폐옥
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도시의 집들은 사서 헐어버리더라도 땅은 남는 것이기에
땅 보고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교환가치가 남는데 산골 벽촌의 슬레이트 지붕 집이라면 사겠다는 사
람이 있을 턱이 없어 폐옥으로 남게 되고 당연 교환가치도 사라진다. 아무리 누추해도 누구라도 살고
있으면 사용가치는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해 교환가치조차 사라진 폐옥을 바라보다가 내 삶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될 텐데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젊어 한창 때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 교환가
치를 한껏 높였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일터에서 물러나면 그들의 교환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사람됨이
어떠한가를 가늠하는 내재적 가치만 남게 된다. 멀쩡했던 집도 사람들이 떠나면 폐옥이 되듯이 잘나가
던 이들도 사람들이 모두 곁을 떠나버리면 폐인이 된다. 이다음 병들고 늙어 더 이상 교환가치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친구와 자식들이 얼마나 자주 찾아와 시간을 같이하는 가는 전적으로 그동
안 그가 함양해온 내재적 가치에 달려 있기에 더 늙기 전에 잠시 자기 삶을 성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
다.
아침5시30분 강남을 출발하는 전주행 첫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첫 차 치고는 빈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휴가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옮겨 25분을 기다렸다
가 9시30분에 사옥리가는 군내버스에 올랐다. 시골 길을 달려 회차 지점인 사옥리에 다다르기까지 약
20분 동안 브랜드가치에 관심이 깊다는 버스기사분이 사옥리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익산군과 이리시
를 통합할 때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익산시로 통합시의 명칭을 정했듯이, 몇 해 전 사인리와 옥산리를
통합할 때 침을 잘 놓기로 호남 땅 전역에 이름난 노인 한 분이 사셨던 사인리로 통합마을의 이름을 정
했어야 했는데, 옥산리주민들의 반대로 사옥리로 정했다며 이 바람에 이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이 분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오전9시50분 사옥리 마을을 출발했다. 트랙터가 지날 만한 넓은 길을 따라 옥산동고개로 오르는 중
을씨년스러운 폐옥을 지났다. 마을출발 9분 후인 9시58분에 마루금이 지나는 옥산동고개에 다다라 오
른 쪽 임도로 들어섰다. 임도 따라 묘지 2곳을 지나자 넓은 길이 끝나고 숲 속 오솔 길이 시작됐다. 산
허리에 난 오름 길은 능선삼거리에 올라서기까지 계속 가팔랐다. 고도 550m 대의 능선삼거리에서 오
른 쪽으로 계속 올라 산행시작 40분 만에 헬기장에 다다랐다. 삼각점이 세워진 해발고도 709.8m의 헬
기장에서 고도계를 보정한 후 잠시 숨을 돌렸다. 모처럼 하늘에서 조개구름을 보자 몇 주 째 계속되는
주말오보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기상청이 생각났다. 기상청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국지성호
우이기에 한 여름의 산악기상예보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 같다. 올라가 앉으면 엄청 푹신할 것 같은
조개구름이 어느 한 순간 시꺼먼 먹구름으로 변한다 싶다가 이내 천둥번개로 온 산이 요동치고 억수같
이 퍼붓는 비로 모든 길이 수로로 바뀌는 등 산상의 평화를 한 순간에 깨뜨리는 국지성호우가 기상청
을 골탕 먹이는 일이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것 같다.
11시40분 890봉에 올랐다. 헬기장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완만한 길을 따라 얼마간 진행하다가 가
파른 길로 올라선 770m대의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갔다가 표지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명의
삼각봉에 올랐다. 섭씨30도를 넘는다는 기상청의 예보대로 날씨는 후덥지근했지만 그늘진 능선 길에
서는 아직은 지열이 느껴지지 않아 참을 만 했다. 고도 770m대의 봉우리를 두 개 더 넘어 조금 내려갔
다가 바위 길을 올라 890봉에 도착했다. 12분간 쉬면서 복숭아를 꺼내 든 후 왼쪽으로 내려가 키를 넘
는 산죽사이로 난 길을 따라 10분 가까이 걸었다. 다시 가파른 비알 길을 따라 990m대의 공터가 좁은
무명봉으로 오르는 중 운모를 만났다.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라는 서양격언은 운모를 보더라도
맞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고기비늘 같은 얇은 박막이 몇 겹 겹쳐진 운모는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 쉽게 몸을 드러내지만, 7개 정맥을 종주하며 한북정맥의 복주산 구간과 금남호남정맥의 이곳에
서만 만나본 정도여서 그리 흔한 광물은 아닌 듯하다.
13시 정각 해발1,059m의 성수산을 올랐다. 990m대의 무명봉에서 조금씩 고도를 낮추어 900m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쪽으로 휘돌며 올라가 헬기장을 지났는데 어느새 훌쩍 커버린 노랑꽃의 마타리
와 소담스런 원추리꽃이 눈길을 끌었다. 깨진 독 조각 몇 개가 눈에 띄는 헬기장에서 10분을 더 걸어
삼각점과 표지봉이 서있는 성수산에 이르렀다. 잠시 멈춰 뭉게구름과 조개구름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목덜미를 내리쬐는 여름태양이 만만하지 않아 3-4분을 더 걸어 내려가 그늘진 곳에다 자리 잡고 점심
을 들었다. 성수산에서 15분 남짓 걸어 풀숲이 우거진 개활지로 들어섰다. 멀리서는 반듯한 초원처럼
보이는 개활지에서 쨍쨍 내리쬐는 땡볕을 피하지 못하고 키를 넘는 풀 숲길을 하나하나 헤치고 지나면
서 정맥종주 최대의 적은 개활지의 잡목풀숲길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중간에 헬기장을 만났고 넓
은 풀밭에 잔뜩 들어선 쑥부쟁이가 원추리와 마타리 등을 불러내어 산상의 화원을 만들지 않았다면 더
욱 괴로웠을 이 길을 지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개활지에서 올라선 910m봉에서 참나무를 솎아내
듯 베어낸 간벌지를 지나 7-8분을 내려가자 또 다시 개활지가 나타나 났다. 고통스러운 풀숲 길을 지
나 해발 750m대의 신광치에 내려선 시각은 14시28분으로 예상보다 10분이 더 걸렸다. 큰 길을 건너
고랭지채소밭 한 가운데 쉼터로 오르는 중 아주 작은 도랑을 건넌 것은 내가 내려선 큰 길이 신광치 고
개마루에서 약간 왼쪽으로 벗어났기 때문이다. 감자밭을 가로지나 시꺼먼 비닐하우스 옆의 큰 나무 그
늘아래 설치해 놓은 쉼터의 평상에 앉아 10분 넘게 편안히 쉬었다.
15시55분 해발1,110m의 시루봉에 다다랐다. 평상에서 일어나 배추밭 사이로 난 정맥 길을 이어가기
시작한 것은 14시45분이다. 해발고도 700-800m대의 산자락을 일구어 만든 고랭지 채소밭에는 배추,
무우, 감자와 고추가 자라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르신들께서 재배한 이것들과 참외를 인근 기지촌에
내다팔아 나를 대학에 보냈을 만큼 1960-70년대에는 채소재배가 수지맞는 농사였는데 여기 고랭지채
소재배도 그때처럼 돈벌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채소밭을 지나 다시 풀밭으로 들어섰지만 성수산에
서 산광치로 내려갈 때처럼 풀숲도 우거지지 않았고 거리도 짧았다.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진다 했는
데 해발 900m대의 봉우리를 넘자마자 빗줄기가 굵어져 얼마 못가 비옷을 꺼내 입었다. 1,000m가 넘는
암봉을 또 하나 넘어 가파르게 올라선 능선삼거리에서 10분을 쉬었다. 시루봉은 왼쪽으로 10여m 떨어
진 헬기장으로 이렇다 할 표지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16시5분에 헬기장을 지나 홍두괘치로 내려
서는 길이 비교적 완만하고 비도 그쳐 속도를 냈다. 오른 쪽으로 백운계곡 길이 갈리는 홍두괘치에 내
려선 시각이 16시31분으로 시루봉 출발 25분이 걸렸다.
17시35분 해발1,114m의 삿갓봉에 올라섰다. 홍두괘치에서 1080m봉의 암봉에 오르기까지 50분 동안
이 힘들었다. 930m봉을 두 번 넘고도 높이가 1,000m를 훨씬 넘는 봉우리 2개를 더 넘어 1080m봉에
올라섰다. 희멀건 비위 2개가 들어앉은 1080m봉에 올라서자 남쪽 멀리로 팔공산이 보였다. 이제껏 소
나기를 내리고 남은 안개구름이 동쪽 아래 산자락에 걸려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했다. 반갑게
도 한 동안 잊고 지냈던 꼬막껍질을 1080m봉에서 다시 만나 호남정맥을 발을 들이며 맺어온 꼬막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갔다. 건너 편 삿갓봉은 1080m봉에서 한참동안 내려갔다가 가파른 비알 길을 따라
다시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이번 산행 최고봉이다. 1080m봉을 출발해 삿갓봉에 오르기까지 내내 어
디서 종주산행을 마칠 것인가로 고심했다. 성수산에서 산광치를 거쳐 시루봉에 올라서기까지 개활지
의 풀숲 길을 지나느라 예상보다 50분가량 늦어져 서구이치까지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해 오계재
에서 와룡산자연휴양림으로 하산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퍼붓던 비도 그치고 운행속도가 예상보다 빨
라 애당초 계획한대로 서구이치까지 진출해도 그리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표지판이 걸려있
는 삿갓봉에 오르자 팔공산이 더욱 가깝게 보여 쉬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일단 서구이치까지 진출하기
로 하고 바로 오계치 길로 내려섰다.
19시42분 해발850m의 서구이치 고개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다. 삿갓봉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오
계치안부가 생각보다 깊었다. 삿갓봉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옮겨 아래로 내려가다 가파른 바위 길을
로프를 잡고 내려섰다. 마음만 급했지 내림 길의 경사가 가팔라 생각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다. 30분 만
에 왼쪽 와룡자연휴양림 길과 오른 쪽 백운면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 오계치에 내려서자마자 풀밭에
벌렁 누워 엉덩이 흙을 풀에 비벼 털어낸 후 바로 일어섰다. 서쪽하늘이 불그스레하게 변하기 시작했
지만 그 색상이 너무 옅어 낙조의 장엄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장수군 당국에서 오계치부터 길섶의 풀
들을 베어내고 폭 2m가량의 넓은 길을 내 고마웠다. 왼쪽 아래로 와룡자연휴양림 길이 갈리는 능선삼
거리에서 몇 분을 더 걸어 1070m봉에 올라선 시각이 18시56분으로 시루봉 출발 2시간50분 만에 처음
으로 쉬면서 스타킹을 벗어 물기를 짜냈다. 오계치에서 서구이치까지는 3년 전에 반대방향으로 한 번
지난 길이고 길도 넓게 잘 나있는데다 시원한 골바람도 간간히 불어와 최대로 산행속도를 높였다. 남
쪽으로 내달리다 몇 분 안 지나 로프 길을 올라서 바로 위 나무의자에 앉아 숨을 돌린 후 산악마라톤을
하듯이 들입다 내달렸다. 숲속을 지날 때는 야행성동물인 멧돼지가 행동개시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
스러울 정도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하늘이 열린 길은 아직은 어둡지 않아 서구이치를 넘는 꼬불
꼬불한 742번 도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고라니 한 마리가 거친 내 숨소리에 놀라 능선 아래 숲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밀려오는 어둠에 쫓겨 한가하게 고라니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지만 잠시 멈춰 서서 사진모델이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고마워할 텐데 아쉬워하면서도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1070m봉에서 1시간 걸리는 완만한 능선 길을 40분 만에 끝내고 눈에 익은 서구이치
터널 앞으로 내려서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장수택시를 부르고자 휴대폰을 켰으나 터지지 않아 난감했다. 무진장 3개 군지역이 무진장 촌이라지
만 아스팔트 포장도로 고개 마루가 난청지역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당혹감은 더했다. 택시가 올라
오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숨 좀 돌리자 했는데 택시를 부를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이 고개에서 꾸물댈
여유가 없었다. 차도를 따라 왼쪽 아래 장수방향으로 내려가며 수시로 휴대폰을 체크했으나 여전히 안
테나가 서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약이 다 달아 막상 필요할 때 못 걸을 것 같아 휴대폰을 꺼버리고 부
지런히 내려갔다. 땅거미가 지고 사방이 캄캄해지자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20분 가까이 내려가다 지
나가는 차를 잡아 사정을 설명하고 동승을 요청하자 흔쾌히 태워주어 장수시내 초입 삼거리까지 편하
게 내려갔다. 이차를 만나지 못했다면 꼬박 8Km를 걸어 내려왔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내게 자리를 내준 젊은 부부가 고마웠다.
10분 여 걸어 장수터미널에 도착, 저녁8시35분 전주 행 막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올라가 산본 집으
로 돌아가기는 너무 늦은 것 같아 전주의 한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시 장수로 가 서구이치-팔
공산-밀목치 구간을 종주하고자 했으나 소낙비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몇 시간을 걸었더니 사타구
니가 쓸려 쓰라린 것이 낫지를 않아 종주산행을 포기했다. 8시 정각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로 바꿔
타 군산을 거쳐 천안역에 도착해 40년 만에 처음으로 장항-천안 전 구간을 지나본 덕분에 금강하구 풍
경을 카메라에 담아 올 수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그 집이 어떤 집이든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모두 갖고 있다면 존재의 집인 언어도 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기 나라 언어의 제반 가치
를 높이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이 할 일이지만 그 중에서도 소설가와 시인들의 역할이 가장 클 것이
다. 내가 옥산동-서구이치 구간을 종주하는 날 우리 말과 글을 갈고 닦는데 남달리 애쓰신 소설가 이
청준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나는 1972년 선생의 단편소설 “조율사”를 처음 접한 후 선생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꽤 여러 권을 읽었다. 1974년 신동아에 연재된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나서 소록도를 꼭 찾
아보겠다고 별러오다가 작년 여름 호남정맥 종주 차 짬을 내어 소록도를 들렀다. 옆자리에 앉은 나환
자 한 분이 기쁜 얼굴을 하고 손가락이 없어진 두 몽당손으로 성가집 책갈피를 넘기는 것을 보고 “우리
들의 천국”이 바로 이 곳임을 느꼈다. 선생께서 70세로 영면하시기까지 오로지 글쓰기에 전력해온 덕
에 우리 말글이 풍성해졌고 그래서 우리 “존재의 집”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고 생각하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경박한 네티즌들이나 정치꾼들이 우리말과 글을 황폐화시켜 폐옥으로 만드는 것을 육필로
막아준 선생의 명복을 빈다.
환주기38:금남호남정맥 4구간(서구이치-밀목치)
*산행일자:2008. 8. 20일/ 11시4분-19시40분(8시간36분)
*소재지 :전북 장수/진안
*산높이 :팔공산1,151m, 신무산897m, 사두봉1,015m
*산행코스:서구이치-팔공산-자고개-신무산-수분재-사두봉-밀목치
종주산행 중 전북 장수의 팔공산 능선 길에서 견고해 보이는 자그마한 성을 보았다. 성안에 군량미를
보관했다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 불리는 이 성은 후백제때 축성된 석성이다. 성 둘레가 300m밖에 안
되는 작은 성이지만 안쪽으로 4.5m를, 바깥쪽으로 1.5m 쌓아 올린 이 성은 아주 다부져보였다. 이 성
을 쌓아올린 후백제는 건국 34년 만에 멸망했지만 후백제가 쌓아올린 이 성은 아직도 견고하게 남아
있다. 이 튼튼한 합미성이 후백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외침이 아니라 견훤과 그 아들간의 내분 때문
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기935년 후백제에서는 권력에의 집착이 견훤과 아들들을 등지게 만들었다면, 2008년 대한민국에서
는 잃어버린 권력에의 향수가 광우병파동을 증폭시켜 한반도 남쪽을 요동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서투른 대미협상과 국민설득에 실패한 정부의 잘못은 백 번 질책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
다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국민들이 광우병에 걸린다고 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명명백백하게 의도
된 왜곡이다. 2백만 명이 넘는 재미교포들이 매일 쇠고기를 먹어도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도 없
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전적적으로 광우병에 더 걸리기 쉽다고 한 것도 그러한 왜곡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고의적 왜곡에 국민들이 쉽게 넘어간 것은 특별히 과학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과학이 우리나라
보다 훨씬 발달한 미국의 다음 사례는 어느 누구도 고의적 왜곡에 속아 넘어가기 쉬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한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캠페인을 벌였다 한다. 무색무취한 “일산화이수소”가 심각한 수
화현상을 일으키고, 소변이 자주 마려운 증상을 일으키며, 땀이 많이 나게 하고, 구토를 일으키며, 또
기체 상태에서는 심각한 화상을 입히는 데다 이 화학물질이 말기 암 환자의 종양에서도 발견됐고 땅을
침식시키는 산성비의 주요 요소라며 50명의 학생들에 이 화학물질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해달라고
캠페인을 벌였다 한다. 캠페인 결과는 놀랍게도 43명이 흔쾌히 서명했고 6명은 결정을 보류했으며 서
명에 반대한 사람은 단 한명으로 그 물질이 바로 산소 1원자와 수소 2원자가 결합해 만들어진 물이라
며 서명하지 않았다 한다. 이 학생이 물을 "일산화이수소"로 왜곡하지 않고 그냥 물이라 했다면 어느
누구도 물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화학자 제임스 콜만 교수
가 지은 “Naturally Dangerous" 책에 실린 것으로 이 책은 광우병파동이 있기 훨씬 전인 2001년에 발
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번역판이 “내츄럴리 데인저러스”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시판 중
에 있다. 세계의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도 이런 정도이니 우리나라에서 광우병파동이 일어난 것을
가지고 국제적 망신이라며 자괴할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고의적으로 왜곡을 주도하느냐다. 미국의 사례처럼 한 고등학생이 캠페인을 벌이는 정도
라면 그 피해는 제한적이지만 파워풀한 집단이 왜곡을 주도한다면 피해가 전 국민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외침을 막고자 아무리 성벽을 튼튼히 쌓는다 해도 잘못된 정보로 국민들이
분열된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과연 온전하게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되어 합미성을 바라
보는 소감을 몇 자 적어보았다.
아침6시10분 강남터미널에서 전주 행 일반고속버스에 승차했다. 9시5분에 전주를 출발한 버스가 시간
반을 더 달려 장수에 도착한 시각이 10시45분경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서구이치
로 옮겼다. 다음날로 예정된 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구간산행을 어둡기 전에 끝내기 위해 이번에 무리
를 해서라도 밀목치까지 진행코자 산행을 서둘렀다.
오전11시4분 서구이치를 출발했다. 고개 마루에서 장수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이정표가 있는 데서 오
른 쪽으로 꺾어 들머리로 들어섰다. 10분 남짓 걸어올라 다다른 능선삼거리에 서 왼쪽으로 꺾어 팔공
산으로 향했다. 군 당국에서 길가 잡목들을 깨끗하게 정리해놓아 생각보다 산행이 빨랐고 이런 길이
계속된다면 밀목치에 해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즈음 며칠 동안 연이어서
비가 내린 덕에 땅이 데워지지 않아 햇살은 따가웠어도 지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산행시작 반시
간이 조금 지나 표지기가 많이 달리고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무명봉에 오르자 올 여름 마
지막으로 열리는 산상음악회에 참가해 한껏 목청을 높이고 있는 새들과 매미들의 노래 소리가 엄청 크
게 들려왔다. 무명봉에서 짧은 바위 길을 지나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지난 번 어둠에
쫓겨 뛰다시피 달려온 능선 길과 오른 쪽 아래 장수읍내 전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12시20분 해발1,151m의 팔공산을 올랐다. 서구이치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오름 길의 경사가 대체로
완만했고 길도 널찍하게 잘 나있었다. 전망바위에서 조금 내려섰다가 완만한 산 오름을 이어가 하늘이
훤하게 열린 헬기장에 올랐다. 입추는 벌써 지났지만 아직도 여름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태양
이 머리 위에 남중해 햇살이 여간 따갑지 않았다. 사방이 탁 트인 헬기장에서 서둘러 사진 몇 방을 찍
은 후 지척의 팔공산으로 옮겼다. 정상을 통신시설에 내놓은 여기 팔공산의 높이가 대구의 팔공산보다
40여m밖에 낮지 않은데도 이 산의 산행기가 한국의 산하 등 주요 사이트에 거의 올라오지 않는 것은
접근이 불편한 오지의 산이어서 금남호남정맥 종주 꾼을 제외하고는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중한 태양에 등 떠밀려 이내 팔공산을 출발했다. 정상아래 쳐 놓은 울타리를 따라 왼
쪽으로 에돌며 합미성으로 향했다. 정상에서 반시간 가까이 내려가 만난 필덕리/대성리 갈림길의 삼
거리에서 오른 쪽 풀 숲길로 들어섰다. 방금 전 하산 길에 만난 뱀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은근
히 걱정될 정도로 잡초와 잡목들이 무성한 길을 이번에 처음 걷는 것도 아닌데 앞서 한 두 시간 편안한
길을 걸어서인지 산딸기나무에 찔려가며 1013봉에 오르는 일이 꽤나 짜증스러웠다. 13시를 조금 지나
1013m봉에 오르자 덜렁 돌탑 한 기만 세워져있을 뿐 공간도 비좁고 아무런 표지물이 없어 이 봉우리
가 금남호남정맥 길이 아니라면 나라도 굳이 풀숲 길을 헤쳐 가며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13시58분 커다란 바위돌이 대성고원을 알리는 자고개에 내려섰다. 1013m봉에서 급한 길을 내려가다
가 잡초들이 무성한 묘지를 지나 희미한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자 이내 거무스레한 너럭바위가
가로막아 여기에서 길이 끊긴 것이 아닌 가해 잠시 긴장됐다. 새까만 나비들이 앉아 쉬는 너럭바위를
조심해서 내려가 길을 이어가다 “자고개2.0Km/팔공산정상3.0Km"의 이정표가 세워진 안부에 다다랐
는데 2년 전 과천시산악연맹회원들과 함께 팔공산을 오를 때 들머리로 삼았던 대성리로 내려가는 길
이 오른쪽 아래로 나 있었다. 1013m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좋은 길과 다시 만나는 안부사거리를 출
발해 합미성을 거쳐 자고개에 이르기까지 2Km의 내림 길이 그리 가파르지 않고 길도 넓어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5시13분 해발897m의 신무산에 올랐다. 자고개를 가로 질러 산길로 들어서자 다시 길이 나빠졌다. 와
룡리휴양림 갈림길에서 시작된 산길 양변의 풀 깎기 작업이 이 고개에서 끝이나 수분치에 이르기까지
여느 호남정맥의 산길처럼 풀숲이 우거져 이 구간을 통과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자고개
에서 풀숲 길을 지나 오른 무명봉에서 점심을 드느라 이번 산행 처음으로 20분을 쉬었다. 다시 12분을
더 걸어 올라선 밋밋한 730m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진행하다가 과수원 울타리로 보이는 철조망을
만났다. 이 울타리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신무산에 오르자 정상을 알리는 표지봉이 세워져 있었다.
말끔한 하늘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주위에서 가장 높은 장안산이 가늠되지 않는 데 먼발치의 팔공산이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이미 한 번 올랐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신무산에서 수분재로 내려가는
길에 자주색으로 치장한 화려한 풀꽃들을 만나 잠시 멈춰 서서 인사를 건넸다.
16시15분 수분재 휴게소에서 한참 동안 쉬었다. 신무산에서 수분재로 내려서는 길이 헛갈린 것은 여
러 번 가로지른 임도 때문이었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오른 무명봉에서 신무산을 사진 찍은 후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서 풀들이 많이 나있는 임도를 여러 번 만났다. 임도를 건너 산길을 내려가다 만
난 노인 분이 이 풀숲 길을 어떻게 내려가느냐고 말씀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았다. 몇
번 임도를 건너 다다른 시멘트 길에서 오른 쪽으로 올라가 능선 길을 이어가느라 다시 숲길로 들어섰
다. 양철지붕의 폐건물 앞에서 길이 나있지 않는 능선 길을 이어가지 못하고 왼쪽 시멘트 길로 내려가
동네 안으로 들어섰더니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물이 보였다. 과수원을 지
나 19번 도로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올라가 해발 560m의 수분재에 다다랐다. 모든 고개는 물을 가르
는 수분(水分)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이 고개를 특별히 수분재로 부르는 것은 이 고개를 가운데 두고
섬진강과 금강의 양대 강이 갈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금남호남정맥 상의 모든 고개를 수분재
로 불러야 마땅한데도 유독 이고개만 그리 부르는 것은 금강의 물뿌랭이인 뜬봉샘이 있기 때문일 것이
다. 자고개에서 수분재에 이르는데 40분이 더 걸려 앞으로 3시간50분이 소요되는 밀목치까지 가야나
말아야하나 고민됐다. 분명 산행 중에 해가 떨어지고 이내 사방이 깜깜해질 터인데 처음 오르는 산길
을 헤드랜턴 하나 믿고 강행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지만, 정 안되면 작년 가
을처럼 산길에서 가만히 앉아 밤을 새울지라도 일단 떠나자고 마음 다져먹고 16시30분에 출발했다.
18시54분 해발1,015m의 사두봉에 올랐다. 수분재의 주유소 옆 임도로 오르자 왼쪽 농가의 개들이 저
를 보고 한껏 목청을 높였다. 매어 있는 개는 물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기에 우선 개가 풀려 있나 여부
를 먼저 확인한 후 그 옆을 지나곤 한다. 풀린 개를 만나는 만부득이한 경우에는 스틱을 휘두르며 돌진
해 개에게 겁을 준 후 지나기도 한다. 임도를 지나 왼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길을 만났고, 다시
임도로 들어서 단풍나무 조림지를 지났다. 오름 길이 분명하지 않아 왼쪽으로 난 풀숲 길의 임도를 지
나자 표지기가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제 길을 찾았다 싶어 표지기가 보이는 오른쪽 숲속 길로 들어선
후 단숨에 690m봉에 올라 시간을 체크해보니 17시 정각이었다. 여기서부터 길도 다시 좋아졌고 오르
내림도 아주 심한 편은 아니어서 죽어라하고 내달렸다. 터널 위 당재 고개를 7분 후에 지났고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안부사거리인 바구니봉재를 지난 것은 50분 후였다. 콧노래가 절로 나올만한 더 할 수
없이 편안한 길을 정신없이 내달리느라 어둠이 산자락에 내려앉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882m봉에 올
라 얼마고 쉰 후에야 능선 길에 깔려있는 어둠이 감지됐다. 882m봉에서 정동 쪽으로 반시간 남짓 걸어
봉수대라고 쓰인 나무토막 표지물을 막 지나 스테인리스 봉과 삼각점이 서있는 사두봉에 올랐지만 시
간에 쫓겨 곧바로 밀목치로 향했다.
19시40분 밀목치로 내려가 하루 산행을 마쳤다. 사두봉을 지나서 저녁 7시에 헤드랜턴을 꺼내 찼습니
다. 아직은 랜턴 불이 환하게 비칠 정도로 깜깜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밀목치에 내려설 생각으로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950m봉과 940m봉을 거쳐 880m봉의 활공장에 도착하는데 32분밖에 안 걸
려 50분 걸린다는 산행시간을 무려 18분이나 단축했다. 해가 진지 얼마 안 되어 서녘 하늘에는 붉은 노
을이 남아 있었고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 사방이 탁 트인 활공장은 그다지 깜깜하지 않았다. 활공장에
서 내려선 숲속 산길은 칠흑 같은 밤이어서 헤드랜턴이 없었다면 산길을 이어가기가 엄청 힘들었을 것
이다. 안내산악회를 따라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야간 산행을 할 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이번에 혼자서
하산하면서 내 랜턴이 너무 좁게 비추어 많이 불편함을 알았다. 깜깜한 숲속 길로 내려가다가 길이 분
명한 것 같지 않아 능선 길을 버리고 시멘트 길로 내려갔다. 덕산리 마을 초입에서 개들이 시끄럽게 짖
어대 한참을 머뭇거렸다. 먼저 이 길을 지난 한분의 산행기에서 큰 개는 매여 있으나 조금 적은 개 두
마리가 풀려있다는 글을 읽은 터라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개들이 언제 덤벼들지 몰라 개
장 앞을 지나기가 주저됐는데 깜깜한 밤에 개가 두 눈에서 빛을 발하는 시퍼런 광채를 보자 섬뜩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큰 소리로 주인에 개를 붙잡아 달라고 사정을 한 후 이 마을을 지나갔다. 덕산리 정
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장수읍내로 나가 저녁을 든 후 다음 날 마지막 구간 종주를 위해 인근 모텔에다
잠자리를 잡았다.
후백제가 쌓아올린 합미성은 견고했다. 그러나 견훤이 쌓아올린 신뢰의 성은 말할 수 없이 취약했고
취약한 이 성을 견훤과 그 아들들이 발 벗고 나서서 무너뜨렸다. 대한민국이 60년간 쌓아온 국방의 성
은 이제 어느 나라보다 견고하다. 그러나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쌓아온 신뢰의 성은 그러하지 못하
다는 것이 이번 광우병파동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의적인 왜곡시도가 국민들에 먹혀든 것도 따
지고 보면 그 근본적인 이유가 정치적지도자들의 신뢰상실에 있다. 뭇 사람들로부터 산이 신뢰받는 가
장 큰 이유는 넓은 가슴으로 산을 찾는 모든 이들을 감싸준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하나를 더한다면 산
의 질서를 깨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예외 없이 벌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신뢰의
성을 높이 쌓기 위해서 최고의 스승으로 모셔야 할 분은 아무래도 산이 되어야 할 것 같다.
환주기39:금남호남정맥 5구간(밀목치-영취산)
*산행일자:2008. 8. 21일/ 8시53분-17시30분(8시간37분)
*소재지 :전북 장수
*산높이 :백운산948m, 장안산1,237m, 영취산1,076m
*산행코스:밀목치-백운산-장안산-무령고개-영취산-무령고개-주촌논개생가
이번산행으로 작년5월에 시작한 섬진강서쪽과 북쪽 울타리를 이어가는 산줄기환주를 모두 마쳤다. 광
양 외망의 망덕산에서 시작해 도상거리가 491Km인 호남기맥-호남정맥-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를 연
이어서 다 밟기까지 총39회를 출산했으며 그 중 37회는 혼자서, 나머지 두 번은 고교동창 이규성교수
와 같이했다. 처음에는 9정맥 종주의 일환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낙동정맥과 낙남정맥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생각을 바꾸어 섬진강 동쪽 울타리 산줄기를 마저 종주하고자 한다. 영취산에서 다시 시작해
대간을 따라 남하하다가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으로 들어설 계획이다. 남동쪽으로 뻗어나가는
낙남정맥을 따라 걷다가 하동의 돌고지재를 조금 더 가 오른 쪽으로 틀어 망덕산 강 건너 편에 자리한
하동의 두우산을 올라 섬진강 울타리산줄기 환주를 마칠 계획이다.
섬진강 산(山)울타리 환주가 앙꼬 없는 찐빵이 되지 않으려면 이 강의 강줄기 따라 걷기가 필수적이다.
전설은 산골짜기에서도 생기지만, 문화는 강줄기를 따라 생성되기 때문이다. 섬진강은 진안의 팔공산
북쪽에 자리한 1,180봉의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남하동과 전남광양의 경계에서 남해로 흘러들어
가는 강으로 그 길이가 225Km이고 유역넓이는 4,489제곱Km라 한다. 산(山)울타리 환주가 끝나면 이
강에 흘러들어가는 지류를 다 다녀볼 수는 없지만 본류만이라도 걸어 이강의 속살을 만나보고자 한
다. 현재는 어떤 식으로 강줄기를 종주해야 하는지 전혀 개념이 잡히지 않지만 앞으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강줄기 종주는 내년 일이니 미리 걱정할 것은 아니다. 섬진강 탐방이 성공적으로 끝나
면 낙동강도 같은 방법으로 도전해볼 생각이다. 낙동정맥-백두대간-낙남정맥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의
산(山)울타리 환주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몇 년간 가슴이 벅찰 수 있다.
장수읍내에서 일박한 후 8시30분발 덕산리 행 버스로 밀목치까지 이동했다. 아침7시40분이면 출근하
는 사람들로 북적댈 시가지가 너무 한가롭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려 있어야 할 김밥집이 굳
게 닫혀 있어 꼼짝없이 아침을 굶고 긴 시간 산행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전날 밤 몇 군데를 찾아다
닌 끝에 7시 반에 문을 연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음식점이 이렇게 닫혀 있는데 다른 데야 오죽하랴 싶
어 먹기 싫은 빵이라도 사들어야겠다고 슈퍼마켓을 찾는 중 마침 문을 연 후진 음식점이 하나 보였다.
웬 떡이냐 싶어 얼른 들어가 백반을 시켰더니 맛깔스런 반찬들이 푸짐하게 나와 밥그릇과 반찬그릇을
샅샅이 비웠다.
오전 8시53분 덕산리 앞 밀목치를 출발했다. 지난 밤 시끄럽게 짖어댄 개들도 자기 집 앞을 얼쩡대는
사람들에나 겁을 주지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대는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견공들도 나서야 할
때와 사려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전날 밤에는 이 동네를 지나 정류장에서 얼마간 머물
렀을 때도 계속 짖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분별력은 낮 동안에만 작동되는 것 같았다. 742번 차도를 건
너 발받침이 놓여 진 시멘트 턱을 올라 밭가 길로 들어섰습니다. 7-8분후 묘지 위에서 제 길을 찾기 까
지 잠시 풀숲 길을 지났을 뿐 왼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넓게 난 제 길과 합류한 후로는 나머지 길 전부
가 장수군이 정성들여 다듬어 놓은 비단길이어서 하루 산행이 편안했다. 산행시작 40분이 채 못 되어
풀숲에 삼각점이 박혀있는 950m봉에 이르기까지 가파른 나무계단 길을 오르느라 숨이 좀 가빴다.
10시26분 860m봉의 턱밑에 자리한 안부사거리를 지났다. 950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897봉으로 이
어지는 정맥 길은 편했다. 나뭇잎사이로 파고든 햇살과 미풍이 평평한 능선 길을 보듬어주는 동안 매
미와 새들이 목청 높여 이 길을 지나는 산객을 반겼다. 사람들이 길섶의 풀들을 깎아낸 흔적이 없었다
면 신이 내린 은총의 길로 착각할 만큼 평안한 이 길을 걷는 동안 산에 오르면 집사람에 자주 들려주었
던 로미오와 주리엣 등 입에 밴 몇 곡의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897m봉에서 오른 쪽으로 진
행해 양쪽으로 하산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에 다다랐다. 오른 쪽 아래로는 6년 전에 회사직원들과 함
께 장안산을 올랐다가 하산기점으로 잡은 법년동으로 가는 길이 나 있었고 왼쪽 대리로 하산하는 길은
희미하게 보였다. 참나무 숲과 낙엽송 숲이 능선 길 양옆으로 포진한 안부사거리에서 조금 걸어 올라
가 860m봉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복숭아를 들면서 푹 쉬었다. 이번산행은 광양 외망의 망운산에서부
터 백두대간의 영취산에 이르는 호남기맥-호남정맥-금남호남정맥의 마지막 종주산행인데다 구간도
짧아 서두르지 않고 모처럼 느긋하게 산행했다.
11시30분 해발948m의 백운산을 올랐다. 860m봉에서 일어나 정북 쪽으로 진행하는 중 길가 숲속에서
새들이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후다닥 날라 갔다. 아마도 일가족이 모여 뭔가를 숙의하고 있는데
눈치 없이 그 옆을 지났나보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째서 저 녀석들은 나를 산식구로 끼워주지
않나 하는 섭섭함이다. 봉우리하나를 왼쪽으로 우회해 “장안산정상4.6Km/밀목재4.6km"의 이정표가
세워진 안부에 도착했다. 안부에서 계단 길을 걸어 올라선 백운산 정상에는 달랑 삼각점 하나만 박혀
있을 뿐 백운산을 알리는 표지물이 하나도 없어 하늘을 떠도는 흰 구름이 이 봉우리를 찾아 머물다 가
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았다. 평안한 길은 계속 이어지는 중에 간간히 나타나는 나무계단 길이 이
길이 들판 길이 아니고 산길임을 일깨워줬다. 백운산에서 25분을 걸어 다다른 955m봉에서 십 수분을
쉬는 동안 날파리까지 끼어든 산상음악회를 참관했는데 당연 주인공은 새들과 매미였다.
13시6분 왼쪽으로 장안리지서골이 갈리는 990m봉에 올랐다. 955m봉에서 나무계단을 밟으며 내려가
는 중 정맥을 종주하는 분들을 만났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저 분들도 내색은 안했지만 이번산행으
로 정맥종주를 마감하는 내가 한없이 부러웠을 것이다. 이 분들의 장도가 무탈하기를 비는 인사말을
전한 후 몇 걸음을 옮기자 벌의 공격을 받아 사투를 벌이는 매미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도 저
매미와 같이 다른 종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죽어가는 일이 다반사라면 내가 감히 혼자서 정맥종주에 나
서지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어느 종이 감히 덤벼들겠나 싶어 어
깨가 으쓱해졌다가 그래서 서로 자기네들이 최고라며 같은 종끼리 대규모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
닌가 싶어지자 대표적인 바보가 바로 사람들이다 싶었다. 깨끗하게 다듬어진 산죽 길을 지나 930m봉
에 오르는 동안 비로소 남중한 태양의 열기가 감지됐다. 930m봉을 지나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 몇 개
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13시가 조금 넘어 장안산 정상을 2.0Km남겨놓은 990m봉에 올랐다. 점심을 든
후 거풍도 즐기는 등 26분간의 휴식시간이 달콤했다.
14시19분 해발1,237m의 장안산을 올랐다. 때 맞춰 불어올라오는 골바람에 등 뒤가 서늘해 한 잠 자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떨치고 일어섰다. 40-50m 가량 내려섰다가 300m 가까이 고도를 높이느라 땀이
다시 흘렀다. 시꺼먼 로프가 늘어진 바위 길과 팔뚝 굵기의 통나무계단 길을 여러 번 지나 고도를 높여
갈수록 거암들이 자주 보여 이제껏 걸어온 평안했던 길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나무계단 길을 올라
헬기장이 들어선 장안산 정상에 올라서자 사방이 탁 트이고 골바람이 모여들었다. 동쪽건너 백두대간
길에 자리한 백운산이 이 산보다 41m 밖에 높지 않은데 엄청 높고 거한 산으로 보이는 것은 3년 전 대
간 종주 때 한번 올라 반갑기 때문일 것이다. 북동쪽의 영취산으로 뻗어나가는 정맥 길은 6년 전에 한
번 밟은 터라 먼발치로 펼쳐진 억새밭과 그 사이로 난 능선 길이 눈에 익었다. 표지석 앞에 배낭을 세
워놓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나머지 정맥 길을 이어갔다.
16시2분 해발1,076m의 영취산에 올라 금남호남정맥 종주를 마무리했다. 장안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이 가팔라 로프가 쳐져 있었다. 무령고개까지는 내림 길이지만 중간에 나지막한 봉우리를 여러 번
오르내려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그동안 몸을 숨긴 풀꽃들이 모두 나타나 저의 마지막 구간종주를
축하해주었다. 9월로 접어들면 당연히 억새가 압권을 이루겠지만 아직은 철이 일러 훤칠한 키의 노랑
꽃 마타리가 단연 돋보였다. 주황색의 동자꽃, 샛노란 달맞이꽃, 붉은 기가 살짝 도는 하얀 꽃의 송장
풀(?), 자색의 금강초롱 꽃, 자줏빛이 보일 듯 말 듯 한 흰색의 쑥부쟁이 정도가 통성명으로 이름을 확
인한 꽃들이고 이 밖에 이름을 듣지 못해 눈인사만 나눈 꽃들도 꽤 많았다. 빠질세라 허리를 굽혀 인사
를 건네 온 억새들도 고맙기는 마찬가지여서 미풍에 살랑대는 이 들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샘터갈림
길을 지나고 한참 후 왼쪽 아랫마을 괴목리로 길이 갈리는 능선 갈림길도 지나 에코브리지 공사가 거
의 끝난 무령고개에 내려서기까지 정상을 출발해 1시간10분 남짓 걸렸다. 에코브리지 위를 지나 영취
산으로 오르는 길이 희미해 잠시 애를 먹었다만, 5-6분을 걸어 무령고개 왼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계단
길을 만나고부터는 대로 길이어서 마음 편히 영취산을 올랐다. 작년 5월 외망의 망덕산에서 시작한 대
장정을 여기서 끝낸다 하니 기쁨과 서운함이 같이 했다. 주님께 감사기도를 올린 후 무령고개로 하산
했다.
17시30분 논개생가 기념관이 있는 주촌마을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다. 무령고개의 간이휴게소에
서 캔 맥주를 사들며 버스 편을 알아본 즉 장계에서 17시40분에 대곡리로 들어오는 버스가 있다. 무령
고개에서 구불구불한 차도를 따라 한 시간 가까이 걸어 논개생가가 있는 주촌마을에 도착해 산행일정
전부를 끝냈다. 한 20분 간 시간여유가 있어 주마간산으로 “의암 주 논개 생가지”를 탐방했다. 18시가
다되어 장계에서 들어온 버스에 올라 15분 거리의 장계로 향했다.
돌탑과 정상석이 세워진 영취산은 대간과 정맥이 만나는 접점이어서 이산에서 정맥종주가 시작되거
나 끝나기에 정맥을 종주하는 분들은 다른 산보다 이 산을 오르는 것이 몇 배 더 감격스러울 것이다.
내가 그러했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무릎 꿇고 무탈하게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신 주님께 감사기도
를 올렸다. 그리고 백두대간과 낙남정맥을 따라 내려가 망덕산 강 건너에 자리한 하동의 두우산에 이
르러 섬진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울타리 환주를 모두 마칠 때까지 건각을 기원하는 기도도 같이 올렸
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뜬금없이 고등학생 때 배운 노계 박인로의 시조 한 수가 생각났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가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한음 이 덕형으로부터 감을 대접받고 이를 집에 가지고 가고 싶어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소용
없음을 서러워한 박인로의 효심이 이 시조의 주제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호남기맥-호남정맥-금남호
남정맥 종주가 내게는 반중 조홍 감처럼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결실로 생각됐고, 이 소중한 완주소식을
품에 안고 가면 8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집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집사람이 아니더라도 내 종주소
식을 듣고 반중 조홍 감을 받는 것처럼 기뻐해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선 두 아들과 며느리가 그렇고
다른 정맥을 함께 종주하는 친구들이 그렇다. 내가 정맥 종주 중 도움을 받아 감사를 표해야 할 모든
분들도 같이 기뻐하실 것이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데 이렇게 동네방
네 소문낸다 해서 욕들을 일은 아닌 것 같아 안심하고 완주소식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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