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5대강둘레산줄기 환종주기/섬진강 둘레산줄기

8.봉화산권 환주기

시인마뇽 2010. 9. 10. 07:32

 

 

 

환주기40:백두대간1구간(영취산-중재)

*산행일시:2008. 10. 8일/ 11시13분-17시53분(6시간40분)

*소재지  :전북장수/경남함양

 

*산높이  :백운산1,278m, 영취산1,090m

 

*산행코스:무령고개-영취산-백운산-중재-중기마을-운정리버스정류장

 

 

 

 

 

 처음부터 섬진강을 에워싼 산줄기들을 전부 걸어볼 계획은 아니었다. 작년5월 광양의 망덕산에 오른 것은

 

백두대간의 영취산까지 이어지는 호남기맥, 호남정맥과 금남호남정맥을 종주할 뜻에서였지, 강 건너 하동

 

땅의 두우산으로 돌아내려가 섬진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山)울타리를 전부 밟아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지 못했다. 망덕산에서 영취산에 이르는 섬진강의 서쪽과 북쪽 울타리 산줄기는 도상거리가 491Km가 다된

 

다. 이 먼 길을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종주하는 것만도 엄청 벅찬 일이어서 여기에다 동쪽 울타리를 덧

 

붙여 섬진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울타리를 끝까지 걸어보겠다는 아이디어가 떠 오를리 만무했다. 당시 우선

 

적인 목표가 오로지 호남기맥, 호남정맥 및 금남호남정맥을 완주하는 것이어서 망덕산에 올라 주님께 빈

 

것은 영취산까지 무탈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사 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내가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호남정맥 종주를 마치고나서였다. 광양의 외망포구에서 약430km를 걸

 

어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갈리는 삼정맥분기점인 조약봉에 다다르자 내친 김에 하동의 두우산까지 걸어보겠

 

다는 욕심이 동했다. 호남정맥을 무사히 종주했다는 자신감이 섬진강산줄기의 완벽한 환주를 꿈꾸게 했고, 이

 

때부터 생각은 진화를 거듭해 어제 다시 영취산을 오르도록 만들었다. 내가 감히 생각의 진화를 들먹이는 것

 

은 내 발걸음이 하동의 두우산에서 끝나지 않고 섬진강의 물줄기도 마저 밟아보겠다는 쪽으로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강을 둘러싼 산줄기와 이 강의 본류인 물줄기를 같이 걸어본다는 것은 나로서는 새로운 도

 

전이고 설렘이다. 가능하면 올 안으로 섬진강의 산줄기환주를 마치고 내년 중 강줄기 따라 걷기에 나설 생각

 

이다. 산줄기에서 전설을 만났듯이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섬진강이 품고 있는 문화의 속살을 만나볼 수 있으

 

리라 기대되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오전11시13분 무령고개를 출발했다. 새벽같이 산본 집을 나서 전주로 향했다. 강남터미널에서 아침6시10분에

 

출발하는 고속버스가 8시50분경 전주에 도착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9시5분발 장계행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이

 

넉넉했다. 장계에서 2만원에 택시를 대절해 주촌마을의 논개생가지를 반시간 가량 둘러본 후 무령고개로 올라

 

갔다. 에코브리지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무령고개에서 하차하여 왼쪽 숲길로 들어서자 가파른 나무계단 길이

 

십 수분 간  이어졌다. 기온이 푹 떨어져서인지 새소리가 나지 않아 한 낮의 영취산 오름길이 조용했다. 무령

 

고개 출발 34분 만에 올라선 해발 1,076m의 영취산에서 반시간 가까이 쉬면서 사방을 조망했다. 무령고개 건

 

너편의 장안산은 보이지 않았으나 북서쪽의 팔공산과 북동쪽의 황석산은 흐릿하게나마 윤곽이 잡혔다. 

 

 

 

 

 

 

12시3분 영취산을 출발해 섬진강의 동쪽 울타리산줄기 종주를 시작했다. 무령고개에서 오른 부부 두 분은 백

 

운산으로 출발했고 나도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높이 정좌한 백운산으로 향했다. 길을 막는 산죽들이

 

말끔하게 베어져 바로 아래 선바위고개로 내려서는 길이 편안했다. 이 고개에서 올라선 무명봉에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모처럼 백두대간 종주 객들이 사람대접을 받는다 싶어 흐뭇했다. 몇 년 전 백두대간을 종

 

주할 때 설악산과 오대산의 통행이 금지된 구간을 몰래 지나면서 대간종주 산객들을 범죄인으로 모는 현행 제

 

도는 분명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백운산 구간에는 서부지방산림청이 곳곳에 백두대간을 안내하

 

는 표지목을 세워놓았고 이렇게 산마루에 의자까지 설치해주어 고마워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싸리 밭에 다

 

다르자 3년 전 한 여름에 역방향으로 이곳을 지나면서 더위와 싸웠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됐다. 새빨간 단풍잎

 

을 앞세운 가을이 이 산에 내려앉기 시작해 먼 산자락에서도 단풍색이 역력했다. 영취산 출발 1시간 남짓 지나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자 영취산-육시령-할미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길이 한 눈에 잡혔고

 

그 오른 쪽에 자리한 거망산과 황석산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13시50분 해발1,278m의 백운산에 다다랐다. 전망바위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반시간 가량 꾸준하게 올라 다다

 

른 곳이 경남함양과 전북장수를 경계 짓는 백운산(白雲山)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동명이산(同名異山)

 

을 들라면 단연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백운산이 첫째로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소개된 것도 9개이다. 한 여름

 

이라면 어렵지 않게 흰 구름과 함께 노닐 수 있는 이 산이 정말 보배로운 것은 흰 구름이 시야를 가리지만 않

 

는다면 장대한 지리산의 산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여서다. 반야봉에서 반야용선을 타고 구름

 

바다를 헤쳐가면 천상의 왕국인 천왕봉에 다다를 것이고 그 곳에서 방향을 틀어 여기 백운산까지 올 수만 있

 

다면 내가 서있는 이 봉우리가 바로 극락정토라고 꿈을 꾸다가 얼굴을 때리는 소슬바람에 깜짝 놀라 이토로

 

돌아왔다. 헬기장 옆의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들은 후 14시13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중재로 향했

 

다. 바로 아래 암봉을 우회해 내려가는 짧은 길이 매우 가팔랐는데 이 길을 지나자 서쪽으로 이어지는 대간 길

 

은 완만했다. 얼마 후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다음 날 오를 월경산을 조망했다.

 

 

 

 

 

15시27분 중고개재를 지났다. 이번 환주는 총 산행거리가 9Km 정도로 짧은데다 하산 길이 길어서인지 힘든

 

줄도 모르겠고 산행속도도 생각보다 빨랐다. 전망바위를 지나 만난 표지목의 중재0.9Km라는 표시는 지나놓

 

고 보니 중고개재를 잘 못 적은 것이 분명했다. 고도가 800m대로 낮아지자 경사가 급한 길은 끝났고 비교적

 

평탄한 내림 길이어서 걷기에 편했다. 백운산에서 2.9Km를 내려가 중고개재에 다다르자 전에 보지 못한 민박

 

집 광고물들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 30-40m 가량 올라가 긴 나무의지에 걸터앉아 편안하게 쉬는 동안

 

소쩍새가  소쩍소쩍 울며 산속의 적막을 깼다. 20-30m 높이의 올망졸망한 봉우리 몇 개가 연이어 나타나 거의

 

다 내려와서 숨을 헐떡여야 했다.

 

 

 

 

 

  16시14분 안부사거리인 중재로 내려서서 40번째 구간산행을 마쳤다. 중재로 내려가는 길에 자꾸 섬진강 쪽

 

인 오른 쪽으로 눈이 간 것은 이번산행이 섬진강 산줄기를 환주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중재에서 오른 쪽으

 

로 내려가면 무령고개에서 번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산행 내내 오른 쪽 아래를 내

 

려다보아서였다. 중고개재에서 중재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길은 편안했지만 작은 봉우리들을 연이어

 

오르내려야 했고 모처럼 시간도 넉넉해 천천히 걸으면서 백운산의 가을정취에 흠뻑 빠져보았다. 아직은 가을

 

의 절정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어 만산홍엽의 백운산을 볼 날도 그

 

리 멀지 않겠다 싶었다. 20여분만 내려가면 다다르는 중기마을에서 함양 가는 버스가 19시에나 있어 넘쳐흐르

 

는 시간을 죽이고자 긴 의자에 등을 눕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과연 가을 하

 

늘이었다. 땀이 식자 이내 등이 써늘해져 오래 누워있지 못하고 일어나야 했다. 중재에서 20분 남짓 쉰 후 왼

 

쪽 중기마을로 하산했다. 동네가 가까워서인지 까치들 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역시 새우는 소리는 작은 새

 

가 듣기 좋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했다.

 

 

 

 

 

17시36분 중재출발 1시간 만에 운산마을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전부 마쳤다. 중기마을로 내려가서 한 할아버

 

지에 여쭸더니 여기서는 저녁 7시가 넘어야 함양버스가 있고 30분 간 더 걸어 내려가 저 아래 운산마을로 가면

 

 6시차가 있다고 자세하게 말씀을 해주셔서 고마웠다.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애써 재배한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밭가에 개집을 설치한 것을 보고 얌체도둑들이 이 시골까지 활동무대를 넓히기까지 경찰은 뭘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발치로 지나는 저를 보고 여기저기 개들이 짖어대는 것으로 보아 한 밤에 도둑의 접근을 막

 

는데 크게 쓰일 것 같았다. 전형적인 다락 논 사이로 난 길을 지나며 해발1,200m가 넘는 백운산이라면 이정도

 

의 논 뜰에 물을 대는 것은 일도 아니어 다행이다 했다.

 

 

 

 

 

운산마을에 도착해 구멍가게에 들러 가게주인 할머니로부터 맥주 한 캔을 사들었다. 74세인 할머니가 이 마을

 

에 사시게 된 것은 남편 분인 할아버지가 여기 고향으로 내려가 살자고 해 20여 년 전에 서울에서 내려오신 후

 

라는데 얼마 후 남편 분이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서 가게를 꾸려가며 사셨다 하신다. 나를 보자 반가워하시

 

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느라 바쁘셨다. 하도 심심해 소싯적 노래솜씨를 자랑도 할 겸 일주일에 세

 

번 함양에 나가 노래를 배우신다며 카세트를 틀어놓고 가수 나훈아의 노래를 따라 부르셨다. 찻길까지 따라

 

나오셔서 배웅 나오시는 것을 보고 나이 들수록 쌓여가는 외로움을 어떻게 이겨내는가가 참으로 중요함을 배

 

웠다. 먼 곳을 동경하며 혼자서 집을 나서곤 하는 나로서는 혼자서 지내는데 익숙해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더

 

라도 그리움을 병으로 앓지는 않을 듯싶은데 사람 앞일을 누가 장담하랴 싶어지자 걱정되기도 했다. 역시 사

 

람들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나보다. 방송에서 사랑타령의 노래와 드라마가 끊이지 않은 것도 사람들이 빵 말

 

고도 사랑을 먹고 살기 때문인가 보다. 언제고 할머니께서 읍내에서 익힌 솜씨로 작은 독창회를 여신다면 만

 

사 제쳐놓고 달려 가볼 생각이다. 어느 젊은 가수가 십 수 년을 산골에서 혼자 사시며 삭히고 삭힌 할머니만큼

 

가슴속에 박혀 있는 그리움을 토해 낼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환주기41:백두대간 2구간(중재-사치재)

 

*산행일시:2008. 10. 9일/ 6시55분-18시3분(11시간8분)

 

*소재지  :전북장수 및 남원/ 경남 함양

 

*산높이  :봉화산920m, 월경산982m

 

*산행코스:중기마을-중재-월경산-광대치-봉화산-복성이재-사치재-사치마을

 

 

 

 

호남정맥 종주 길에 자주 보았던 꼬막껍질을 이번 종주 길에서 다시 보았다. 복성이재에서 만나본 꼬막껍질이

 

더할 수 없이 반가웠던 것은 이 고개를 지나는 산줄기가 백두대간이었기 때문이다. 섬진강의 서쪽 울타리인

 

호남정맥과 북쪽 울타리인 금남호남정맥에서 만나본 꼬막껍질을 대간 길에서 다시 보았다는 것은 바로 동쪽

 

울타리산줄기에서도 꼬막껍질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꼬막껍질은 섬진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산줄기가 강줄기와 다른 것은 문화의 존재여부다. 나는 문화란 사람들이 살면서 남기는 흔적이라 생각한다.

 

 문화가 강줄기를 따라 발전한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이고, 산줄기를 따라

 

문화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그 정반대 이유에서다. 어느 한 산을 정해 점의 산행을 하노라면 비록 강줄기와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스님들이 모여 사는 절이 있어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살지 않은 산줄기

 

를 이어가는 선의 산행에서는 좀처럼 문화를 만나 볼 수 없다. 그나마 예외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곳은 이쪽

 

저 쪽 사람 들이 넘나드는 고개 마루다.

 

 

 

 

내가 꼬막껍질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동물들이 남긴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호남

 

정맥종주 길에 능선에 떨어진 꼬막껍질을 몇 번 보고 혹시나 이 산줄기가 꼬막이 많이 자생하는 바다가 융기

 

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주로 묘지에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먹고 껍질을 버려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영취산에 올라서며 이제껏 보아온 꼬막껍질이 섬진강산줄기를 꿰뚫는 유일한 문화의 흔적일 수 있다

 

는데 생각이 미치자 동쪽 울타리인 대간 길에서도 이 꼬막껍질을 반드시 만나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복성

 

이재에서 꼬막껍질을 만나 보자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싶어 기뻤다. 백두대간과 7개 정맥을 종주하면서 사

 

람들이 남긴 흔적이 전 산줄기를 꿰는 그래서 산줄기에서 문화를 만나보기는 이번 섬진강산줄기가 처음이어

 

서 더욱 그러했다. 어째서 꼬막껍질이 섬진강산줄기에 산재해 있는 가를 규명하는 일은 산줄기와 강줄기를 모

 

두 돌고 난 후로 미뤄둘 뜻이다.

 

 

 

 

6시55분 중기마을을 출발했다. 함양 읍내에서 하루 밤을 묵은 후 아침 6시20분에 중기마을로 향하는 첫 버스

 

에 올라탔다. 밤을 주우러 나섰다는 아주머니 몇 분들도 중간에 다 내려 버스 종점까지 타고 간 손님은 나 혼

 

자였다. 중기마을에서 하차해 중재로 오르는 길에 밭을 지키는 누렁이 개 한 마리를 만났다. 나를 보고도 짖지

 

않고 눈만 껌벅거리는 녀석을 보고 순둥이 개의 인사는 저런 것이다 싶어 나도 눈을 껌벅이며 반가움을 표한

 

후 바짝 다가가서 사진을 찍었다. 아침이슬로 바지 단이 다 젖으리라 걱정했는데 가을 한 복판의 풀잎에는 여

 

름 내내 맺혔던 이슬이 보이지 않았다.

 

 

 

 

7시28분 해발650m의 중재고개마루에 올라 섬진강산줄기 환주를 시작했다. 안부사거리인 중재에서 왼쪽으로

 

올라서서 고도를 높여갔다. 3년 전 9월에는 동이 트기 직전에 헤드랜턴을 켜고 이 길을 오르면서 혹시라도 야

 

행성동물인 멧돼지와 맞부닥뜨리는 것은 아닌가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이번에도 잣나무 숲을 벗어날 즈음

 

아래 산자락에서 멧돼지(?)의 포효소리가 들려와 움찔했다. 지난번에 쉬었다 간 묘지 봉우리를 지나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오른 쪽으로 우회해 월경산 분기점에 다다랐다. 지난 번 백두대간 종주 시에는 안개가

 

짙게 깔려 이 갈림길을 언제 지났는지 모르고 지나 마루금에서 서쪽 위로 조금 벗어나 있는 월경산을 오르지

 

못했다.

 

 

 

 

 

8시39분 해발 982m의 월경산을 올랐다. “중치1.9Km/광대치1.3Km"의 표지판이 땅바닥에 놓인 분기점에서 서

 

쪽 위로 8-9분을 걸어 월경산을 들렀다. 싸리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삼각점을 빼고는 정상을 알리는 표지

 

물이 하나도 없어 얼른 삼각점만 사진 찍고 곧바로 대간 길로 복귀했다. 분기점에서 서쪽으로 진행 중 이내 만

 

난 약초시범단지의 철망울타리를 따라 내려가다가 몇 분 후 오른 쪽으로 꺾어 사거리안부인 광대치로 내려섰

 

다. 3년 전 짙은 안개로 들르지 못한 월경산과 위치를 몰랐던 광대치를 이번에는 확실히 확인하고 사진까지 찍

 

었다. "봉화산4.7Km/중치3.2Km"의 표지목이 세워진 광대치에서 조금 올라가 만난 바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사과를 까먹었다. 광대치 출발 40분이 조금 못되어 "봉화산0.8Km/광대치3.8Km"의 표지목이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섰는데 해발고도가 940m(?) 가량 되는 이봉우리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연봉들 거의다가 비슷한 높이

 

여서 지도상의 944m봉이 어느 봉우리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10시35분 동쪽사면을 깎아지른 암벽이 받쳐주는 전망바위를 지났다. 해발900m가 넘는 연봉들을 모두 지나 다

 

다른 봉화산2.5km 전방 지점에서 몇 분을 더 걸어 전망바위에 다다랐다. 3년 전 이곳에서 쉬어갈 때 이 바위

 

를 지탱하는 몸통바위가 운무를 뚫고 잠시 모습을 드러내어 순간을 놓칠세라 얼른 셔터를 누른 기억이 났다.

 

 왼쪽 아래 골짜기와 들판이 한 눈에 잡힐 정도로 전망은 좋았지만 안개와 숨바꼭질하던 3년 전에 비해 신비감

 

은 많이 떨어졌다. 전망바위를 지나자 억새 숲이 선보인다 했는데 본격적인 억새밭은 잘 다듬어진 묘지 봉우

 

리에서 시작됐다. 깔끔한 묘지가 들어선 봉우리에서 남서쪽으로 15분가량 걸어 차들이 다닌 흔적이 역력한 임

 

도로 내려서기까지 코앞의 억새밭과 저만치 앞에 솟은 봉화산을 카메라에 옮겨 담느라 손놀림이 바빴다.

 

 

 

 

 

11시32분 해발 920m의 봉화산을 올랐다. 임도 건너 올라선 억새밭에 초대된 손님이 나 혼자여서 봉화산에 이

 

르기까지 20분 가까이 마냥 호젓한 억새밭 길을 천천히 걸었다. 고개를 삐쭉 내밀며 나를 반기는 억새들이 소

 

슬바람에 흥이 겨워 일제히 어깨춤을 추는 모습이 군무(群舞)의 아름다움을 한껏 내보여주어 모처럼 내가 산

 

식구로 대접받는 듯했다. 무인산불감시초소에서 조금 떨어진 봉화산 정상에 오르자 북쪽 멀리 자리한 장수덕

 

유산과 남덕유산이 희미하게나마 일망무제로 보였다. 정상에서 사방을 휘둘러본 후 그늘진 곳으로 옮겨 점심

 

을 들었다.

 

 

 

 

 

13시46분 복성이재에 도착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12시8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간 서쪽으로 진행하다 다

 

리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갔다. 풀숲 길을 지나고 보리수나무 숲도 지났다. 기대했던 보리수 열매

 

는 거의 보이지 않아 한 두 그루에서 겨우 몇 개를 따먹었는데 그 맛은 여전히 새큼했다. 3년 전 대간을 종주할

 

때 조금은 지겹게 느껴졌던 솔밭길이 시작됐다. 중간에 끊긴 곳이 꽤 여러 곳이긴 하지만 정령치 앞 봉우리인

 

고리봉까지 이어지는 솔밭 길을 지루하게 느꼈던 것은 늙은 소나무의 수피가 비를 맞아 시꺼먼 색을 띠어 산

 

 전체가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다. 묘지봉 위에서 철쭉 숲길을 따라 걸어 로프를 잡고 치재에 내려선 시각이 13

 

시12분이었다. 잡목들이 좌우 양쪽의 길을 덮어 마치 터널처럼 보이는 안부사거리 치재에서 철쭉 숲길로 똑바

 

로 올라 무명봉에 올랐다. 철조망을 따라 내려가다 솔밭 길을 지나 복성이재에 다다랐다.

 

 

 

 

 

15시29분 781m봉에서 잠시 쉬었다. 복성이재에서 차도를 막 건너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호남정맥 종주 길에

 

자주 보았던 꼬막껍질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10분도 더 못 걸어 길을 잃고 10분 가까이 헤매다가 지도와 나침

 

반의 도움으로 간신히 제 길을 찾았다. 한 낮의 기온이 섭씨 25도에 달한다는 이상고온에 길 찾느라 진이 빠져

 

아막성터가 보이는 능선에서 20분여 쉬면서 빵을 들어 요기를 했다. 아주 짧은 거리의 너덜겅을 올라 만나 본

 

 아막성이 견고해보였다. 둘레가 633m에 이르는 아막성을 백제가 여기에 쌓은 것으로 보아 이 산이 신라와의

 

 접경지대였던 것 같다. 아막성 위 묘지봉에서 철쭉 밭을 지나며 철을 모르고 피어난 철쭉 꽃 한 송이를 보았

 

다. 묘지봉에서  781m봉에 이르기까지 반시간이 걸렸다.

 

 

 

 

 

17시48분 88고속도로가 지나는 사치재로 내려섰다. 781m봉에서 10분을 쉰 후 소나무 숲과 철쭉 숲을 지나 헬

 

기장에 다다랐다. 바로 위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안부삼거리에 이르는 길도 솔밭 길이었다. 묘지를

 

지나 조금 올라섰다가 풀숲 길의 임도가 지나는 안부사거리로 다시 내려선 시각이 16시38분으로 머지않아 어

 

둠이 밀려올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3년 전 9월에 이 구간을 뛸 때보다 날씨가 좋아 산행속도가

 

빠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인 일인지 오히려 조금씩 더뎌지는 것 같았다. 안부사거리에서 15분가량 가파른 비

 

알 길을 올라 다다른 능선 삼거리에서 5분가량 쉬면서 숨을 돌린 후 왼쪽으로 내려갔다 700m봉(?)에 올라서

 

자 지리산휴게소가 보여 그렇다면 사치재가 멀지 않겠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왼쪽으로 내려갔다가 풀숲이 우

 

거진 길을 지나 헬기장에 이르기까지 낮은 봉우리 몇 개를 지났다. 헬기장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급했

 

고 죽은 소나무들이 즐비했다. 시꺼먼 소나무 밭을 지나 사치재에 내려선 시각이 17시48분으로 아직 해가 지

 

지 않아 오른 쪽 사치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가 수월했다.

 

 

 

 

 

18시3분 장수군 번암면의 사치마을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끝냈다. 88고속도로가 지나는 사치재에서 오른 쪽

 

아래 사치마을로 내려가는 길에서 다음 날 오를 고남산이 분명하게 보였다. 사치마을 마을회관 앞에서 19시에

 

남원으로 돌아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리는 중 이 동네 할아버지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군에 가셨다는 할아버지는 마침 파주 문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셨다며 고향이 파주인 나를 반

 

겼다. 젊은이들이 다 나가 애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며 이제 시골마을은 죽은 마을이라고 걱정하시는 할아

 

버지의 얼굴에서 전날 운산리마을의 할머니처럼 사람을 그리워하는 기색이 역력함을 읽었다. 1시간을 다 기다

 

려 남원행 막차에 오르는 내게 할아버지께서 조심해서 산행하라는 인사말씀을 주셨다.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반가워하면서 짐승들이 남긴 흔적으로 볼 때는 머리발이 서는 것은 문화냐 아니냐의 차

 

이 때문이다. 문화란 익숙한 것이고 야생이나 야만은 생소하기 때문이다. 종주산행의 횟수가 더해지면 더해질

 

수록 나도 산의 한 식구가 된 양 다른 산 식구들과 익숙해졌다. 산에 사는 생물들과 친해진다 해서 문화로 발

 

전할 수 없는 것은 문화는 인류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산 속의 묘지에 올라 아무리 많은 꼬막껍질

 

을 남겨놓았어도 이로써 산식구들과 교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도 함께 어우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

 

는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에서 꼬막껍질을 화두로 삼아 보았다.

 

 

 

 

 

 

 

 

환주기42:백두대간 3구간(사치재-여원재)

 

*산행일시:2008. 10. 10일/ 7시-13시55분(6시간55분)

 

*소재지  :전북남원/장수

 

*산높이  :고남산847m

 

*산행코스:사치마을-사치재-유치-매요마을-고남산-여원재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한 사흘간의 섬진강 산줄기 환주산행을 남원시의 여원재에서 마쳤다. 버스를 타

 

고 시내로 옮긴 다음 택시를 타고 남원역으로 갔다. 남원 시내를 벗어나 외곽에 넓게 자리 잡은 남원역사는 구

 

역사의 전통 한옥 양식을 그대로 따라지어 처음 보는 데도 눈에 많이 익었다. 대학시절 지리산을 오를 때는 야

 

간열차를 타고 남원역으로 내려와 역사에서 얼마간 눈을 붙였다가 이른 아침에 마천행 버스를 타곤 했었는데

 

역사를 외곽으로 옮긴 다음 옛날의 저처럼 기차타고 내려와 지리산으로 향하는 손님들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

 

이 버스기사분과 택시기사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기차이용고객이 역이 멀어 고속버스를 대신 이용한다면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이기에 별반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유력전자회사의 공장유치를 정읍에 뺏겨 발전기회를

 

놓쳤다는 택시기사의 지적은 맞겠다 싶었다.

 

 

그렇다 해도 외지인의 한가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남원시만은 우리 고유의 것으로 도시가치를 훨씬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닌 우리 고유의 소리가 바로 판소리다. 위로는 임

금과 아래로는 천민까지 모두 즐긴 대표적인 대중음악인 판소리는 양반들이 즐기는 아악이나 창부 또는 서민

들이 즐겨 부르는 타령을 모두 어울렀다. 1860년대에 들어 판소리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

뉘는데 동쪽의 동편제는 빠르고 웅장하며 서쪽의 서편제는 애잔하다고들 한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물리치

고 지켜낸 운봉은 판소리동편제의 발생지여서 판소리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 로미오와 주리엣을 필적할 이

몽룡과 성춘향의 러브스토리가 살아있는 곳이 남원이고 흥부와 놀부가 태어나서 큰 곳이 또한 남원이다. 우리 고유의 이야기와 소리가 만나 예술로 승화한

것이 판소리이기에 판소리와 연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남원시의 도시가치를 상당 수준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새로 지은 남원역사는 제 몫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영 못마땅한 것은 역사 안의 대합실 안

 

과 밖에 설치된 TV다. 유명MC들의 판에 박은 이야기들을 이 역사에서 또 들어야하는 고객을 조금이라도 배

 

려한다면 2대의 TV 세트를 한 대는 줄이고 판소리를 들려주는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조용히 앉

 

아 쉬거나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우리나라처럼 다중이 모여드는 공공장소

 

에서 TV가 주인행세를 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TV를 못 보아서 애를 태우는 것은 아닐진대

 

공공장소 어디에서나 TV가 설치되어 조용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뺏어가는 것은 또 하나의 소음공해다. 우리

 

의 이야기와 소리를 탄생시킨 남원에서만이라도 TV의 소음공해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영취산을 출발해 사치재에서 예정했던 이틀간의 산행을 잘 마치고도 하루를 더 잡아 여원재까지 가보겠다고

 

생각을 바꾼 것은, 오는 11월1일 모교인 경동고교 총동창회가 주관하는 산행이 정령치-성삼재 코스로 예정되

 

어 있는데 이번에 여원재까지 진출하면 하루 전날 내려와 여원재-정령치 구간을 마치고 그날 정령치로 합류하

 

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였다. 남원시내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5시50분에 남원을 출발하는 사치마

 

을 행 첫 버스에 올랐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에 여원재를 넘는 길은 꼬부랑 고개 길에 길고 높았다. 3년

 

전에 와 본 봉대마을을 들렀다가 사치마을에 도착한 것은 7시가 다 되어서였다. 

 

 

 

 

 

아침 7시 정각에 사치마을을 출발했다. 전날 저녁 이 곳에서 뵈었던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조심해서 산행하라

 

고 말씀해주셔서 고마웠다. 추수를 막 끝낸 다락 논바닥에서 아침요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새들이 내가 지

 

나자 놀라서 산으로 날아갔다. 그 위 밭가에 세워둔 허수아비들은 새들에게 미안해하는 나를 보고 어쩌면 새

 

들이 사람들을 그리도 잘 알아보고 도망치나 해서 많이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이제 추수가 끝나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터이니 그동안 적으로 알고 쫓아내려했던 허수아비들도 새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다가

 

올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시18분 사치재에 올라 섬진강의 울타리산줄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차들이 뜸한 88고속도로를 건너 산길로

 

올라선지 10분이 채 못 되어 사치재라는 표지목을 보았고 표고가 500m로 표기되어 있어 고도계를 보정했다.

 

왼쪽으로 향하다가 오른 쪽으로 휘어지는 잡목풀숲 길을 지나 봉우리하나를 넘자 왼쪽 바로 아래로 동네가 들

 

어선 안부사거리가 나타났다. 안부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며칠 전에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해 대간 종주에

 

나섰다는 젊은이 두 명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야영장비 때문인지 짐이 보통이 아니어서 역시 젊은

 

이다 했다. 600m봉을 올라 오른 쪽 아래 88고속도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걸으면서 아기들의 울음소리만 난다

 

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사치마을을 조망했다. 편안한 솔밭 길을 지나 유치삼거리에 도착한 시각은 8시30분이

 

었다. 

 

 

 

 

 

8시47분 매요마을을 빠져나가 “고남산4.4Km/사치재3.2Km”의 표지목을 지났다. 뻥 뚫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세례로 물에 빠진 생쥐모양으로 지났던 매요마을을 3년 후 다시 와 이 마을에 서운해 했던 이제까지의 내 생

 

각을 바꾸게 해준 분들은 이 동네 아주머니들이었다. 비를 쪼르륵 맞으며 마을회관을 지날 때 마침 이 곳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여러분들이 작은 동네잔치를 벌인 듯 여흥을 즐기고 계셨는데 이분들 모두 길을 묻는 내가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말씀해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다. 모르는 사람에도 잠깐 앉아 뭐라도 좀 들며 쉬었다

 

가라고 권하는 것이 시골인심인데 묻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안하는 것은 영 아니다 한 것이 세 해 전의 일이

 

다. 이번에는 동네 안에서 길을 찾느라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아주머니 두 분이 다가와 묻지도 않

 

은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본시 이런 것이 시골인심이고 이런 인심에 고마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유치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아스팔트길을 따라가다가 삼거리에서 오른 쪽 시멘트 길로 접어들었다. 폐허가 된

 

매요마을 분교를 지나 오른 쪽으로 조금 꺾어 동네 안을 지났다.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우거진 매요마을을 빠

 

져 나가 조금 후 고남산4.4Km의 표지목을 만났다. 표지목을 지나 산길로 들어서자 길 위에서 반짝 반짝 빛나

 

는 운모들이 많이 보여 이번 하루산행이 무탈하게 잘 끝날 것 같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다가 해발고도

 

530m 대의 야트막한 구릉에 다다른 시각이 9시10분으로 이곳에서 사과를 까먹으며 18분을 쉬었다.

 

 

 

 

 

10시7분 임도가 지나는 안부사거리를 지났다. 맑은 하늘에 짙은 구름이 들이기 시작해 20분 가까운 휴식시간

 

이 끝날 때쯤 해서 한기가 느껴졌다. 솔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은 510-530m대의 낮은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며

 

평탄하게 이어져 종주산행이 편안했다. 20분을 걸어 만난 삼각점이 들어선 봉우리가 573.2m봉으로 평평한 능

 

선 길이어서 봉우리로 보이지 않았다. 500m대의 안부에 내려서자  마침 스쳐 부는 골바람에 반하는 방향으로

 

팔랑거리는 노랑나비가 많이 힘들어보였다. 다시 낮은 봉우리를 넘어 다다른 안부사거리가 지도상의 통안재

 

같은데 표지물이 없어 확인하지 못했다. 모처럼 고바위 길을 걸어올라 670m대의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왼쪽

 

군사도로로 내려섰다. 참나무 나목 몇 그루와 그 밑의 시멘트 길을 덮은 낙엽들에 찌푸린 하늘이 더해져 고남

 

산이 스산했다.

 

 

 

 

 

11시28분 해발 846m의 고남산을 올랐다. 시멘트길을 따라 오르다가 산속으로 들어가 바짝 고도를 높인 후 다

 

시 시멘트길을 만나기를 세 번이나 하고나서 KT중계소 정문 앞에 이르기까지 20분이 조금 못 걸렸는데 마지

 

막 산길은 경사가 가파른 계단 길이어서 힘들었다. 한번 지난 곳인데도 길을 못 찾아 십 수분을 허비했다. 빠

 

끔히 열린 쪽문으로 중계소 안으로 들어갔다가 길이 없어 다시 내려와 한참동안 지도를 보며 고민했다. 오른

 

쪽 아래로 조금 내려가 찾은 제 길은 왼쪽 산길로 들어가는 길로 표지기가 걸려있었다. 중계소를 오른 쪽으로

 

 에돌며 풀숲 길을 지나 고남산의 표지석이 서 있는 헬기장에 이르러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 고남산 정상에 올

 

라섰다. 고려 말 이성계장군이 저 아래 넓게 자리한 운봉 벌의 곡식을 탐하는 왜구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그의

 

 조선건국의 꿈도 무위로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저 벌이 이성계장군의 양명을 도왔다 싶었다. 표지목

 

과 삼각점이 서 있는 비좁은 정상에서 사진 몇 커트를 찍은 후 이내 여원재로 향했다. 

 

 

 

 

 

12시47분 전주이씨 묘 앞에서 점심을 들었다. 고남산 정상에서 여원재까지는 그 거리가 5.4Km로 사치재에서

 

정상까지 7.6Km보다는 짧은 거리지만 단숨에 내달릴 만 한 것은 아니다. 정상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며 바라다 본 오른 쪽의 병풍 같은 암벽 띠는 그 아래위로 막 들기 시작한 단풍이 받쳐주어 참으로 볼만

 

했다.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암릉 길을 지나 해발고도가 620m대로 떨어지자 길이 잠시 편안해졌다. 다시 풀

 

숲 길을 지나 잘 다듬어진 묘지로 내려선 후부터는 이번 사흘간의 환주산행에서 가장 평탄하고 편안한 솔밭

 

길이 꽤 길게 전개됐다. 다시 서쪽으로 진행하며 540m대까지 내려갔다가 600m대의 봉우리에 올라 왼쪽으로

 

진행해 3년 전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점심을 들었던 전주이씨 묘소 앞에 다다랐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이 조

 

만간 비를 몰고 올 것이라는 내 생각이 딱 들어맞아 묘소 앞에서 점심을 드는 동안 비를 만났다. 서둘러 식사

 

를 마치고 비 채비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15시55분 해발480m의 여원재로 내려가 종주산행을 마쳤다. 전주이씨 묘에서 얼마간 걸어 만난 삼거리에서 밭

 

떼기 위쪽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벗어난 마루금으로 복귀했다. 평평한 길을 걷다가 가파른 비알 길을 걸어 올

 

라선 봉우리가 562m봉으로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5-6분을 진행했다. 느낌이 이상해 지도를 꺼내보

 

았더니 정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어 다시 원위치 하노라 10여분을 까먹었다. 562m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동

 

쪽으로 진행하다 얼마 후 오른 쪽으로 내려가 시멘트길 안부를 지났다. 여원재 0.4km 전방에서 마루금을 이어

 

가기가 고약했던 것은 마루금이 평평한 밭과 묘지를 지나서였다. 빗발이 굵어지고 길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먼저 지난 분들이 걸어놓은 표지기 덕분에 간신히 알바를 모면했다. 묘지와 밭, 그리고 솔밭을 여러 번 지나

 

여원재로 내려서서 길 건너 장승을 사진을 찍은 후 왼쪽 아래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여원재에서 남원시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가 20분에 한 대씩 있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탔다. 시

 

내에서 택시를 타고 외곽의 남원역으로 이동했다. 역전 광장이 꽤 넓어 웬만한 야외행사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역사 안에서 기차를 기다려야 했는데 50분여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두 대

 

의 TV가 뿜어내는 소음공세를 피할 수 없었다. 몸에 해롭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담배는 못 피게 하면서 사

 

람들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바보상자 TV를 곳곳에 설치하여 계속 켜대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흘

 

연속 산줄기를 타면서 깨끗이 닦아 낸 눈과 귀를 다시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 대만이라도 아예

 

꺼버려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남원의 자랑인 국악을 들려주는 것이 좋겠다 싶은 데 그리하

 

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따져 묻고 싶었다.

 

 

 

 

 

 

 

 

 

 

 

환주기43:백두대간 4구간(여원재-정령치)

 

*산행일시:2009. 10. 9일/ 9시50분-17시17분(7시간27분)

 

*소재지  :전북 남원

 

*산높이  :고리봉1,305m, 수정봉804m

 

*산행코스:여원재-수정봉-고기리-고리봉-정령치-고기리저수지위 도로

 

 

지난 달 안내산악회를 따라 음정-연하천-뱀사골-반선 코스의 지리산을 다녀왔다. 힘들기는 했지만 작년 가을

 

에 멈춘 섬진강산줄기환주산행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겨 그 후 내내 가슴 설렜다. 2년 전 전남

 

광양의 섬진강 하구인 외망에서 망덕산을 올라 호남정맥에 첫발을 들였을 때는 이 강에 물을 대는 산줄기가

 

호남정맥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읍으로 올라와 옥정호를 지날  때 즈음해서 내가 걷고 있는 호남정

 

맥이 섬진강의 서쪽 울타리라는 개념이 잡혔고 그래서 이 강의 북쪽 울타리를 밟고자 금남호남정맥도 마저 종

 

주했다. 작년 10월 영취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여원재까지 진행한 것도 이강의 동쪽 울타리 산줄기를 따라가

 

하동의 두우산에서 강 건너 망덕산을 사진 찍은 후 강 하구로 내려가 섬진강을 에워싸고 있는 산(山)울타리 환

 

주를 마치겠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서였다. 불행히도 1년 전 춘천의 용화산을 오르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허

 

리뼈 5대를 분질러 먹는 바람에 수술을 받고 몸을 만드느라 그간 종주산행을 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몸

 

상태가 많이 좋아져 두 주전에 지리산을 다녀왔는데 별다른 후유증이 없어 이번에 용기 백배해 꼭 1년 만에 여

 

원재를 다시 찾은 것이다.

 

 

 

 

  서울 강남에서 아침6시발 남원 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논 뜰을 가득 채운 누런 벼들을 얼

 

핏 보아도 올 벼농사는 풍년이 틀림없어 보였다. 재고과다 및 풍작으로 가격하락이 불가피해 추수를 하는 것

 

이 오히려 손해라며 다 익은 벼들을 걷어 들이지 않고 트랙터로 갈아엎는 뉴스를 보고, 아무리 사정이 긴박하

 

고 딱하다 해도 농심이 저리 모질어서는 안 되며 계속 저러다가는 천벌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어린

 

시절 밥알 한 톨을 흘린다고 군밤을 맞아야 했고 무슨 날이 되어야 별식으로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내게는 쌀

 

은 단순한 주곡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피땀이 어린 소중한 것이기에 어떤 이유로든 벼를 논에다 그냥

 

갈아엎는 것을  내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3시간 반이 조금 못 걸려 도착한 남원 터미널에서 10분가량

 

걸어 운봉가는 버스를 타고 여원재로 갔다.

 

 

 

 

오전9시50분 해발470m의 여원재 고개를 출발해 섬진강 산줄기 환주산행을 이어갔다. 여기 여원재는 여말 이

 

성계장군이 왜구를 무찌른 곳이고 동학혁명 때는 남원서부평야의 농민군과 동부고원지대의 민보군및 수성군

 

이 격전을 벌인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고개다. 4년 전 대간종주 차 이 고개를 지났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민박집

 

광고물이 다수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그간 백두대간종주꾼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여원재에서 채 반시간

 

을 못 걸어 오른 쪽으로 주지사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라 왼쪽 나무 게단 길로 올라섰다. 완만한 경사 길

 

을 걸어 오르는 중 절에서 들려오는 굿 소리가 귀에 익다 싶은 것은 어려서 시골 무당집에서 굿하는 광경을 꽤

 

여러 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나 이때나 굿이 미신이라는 내 생각은 바뀐 것이 없으나 달라진 것은 그때

 

는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 여겼던 것을 지금은 우리의 전통문화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무명봉에 올라 뒤돌아

 

보자 고남산의 통신중계탑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11시4분 700m봉(?)에 올랐다. 마이크의 성능을 빌어 볼륨이 한껏 높아진 굿 소리는 주지사를 비껴간 지 한참

 

후 650m봉(?)을 지나서야 들리지 않았다. 650m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시꺼먼 솔밭을 지나는 완만한 오름 길

 

을 계속 걸어 올랐다. 돌계단 길을 올라 다다른 700m봉(?)에는 표지기가 꽤 많이 걸렸고 궁둥이를 겨우 붙

 

일 만한 크기의 시멘트 블록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서쪽으로 남원시가 한눈에 잡히는 이 봉우리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른 후 가파른 돌계단 길을 조심해서 내려갔다. 청솔모의 찍찍 우는 소리는 그 모습만큼이나 귀에 거슬

 

렸다. 얼마만큼 내려와 뒤돌아보자 방금 내려선 700m봉이 참으로 잘생긴 암봉이다 싶었다. 저 아래 논 뜰의

 

넘실대는 황금빛 벼들과 여기 산위의 소슬한 바람소리가 아직은 들지 않은 단풍보다 먼저 달려와 가을 소식을

 

 전해주었다. 

 

 

 

 

 

12시15분 해발805m의 수정봉에 올라섰다. 700m봉에서 한참을 내려가 해발고도가 545m인 입망치에 다다른

 

시각은 11시29분이었다. 운봉읍 엄계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 짓는 십자안부 입망치에서 수정봉으로 오르

 

는 길이 고바위 길이었다. 개활지에서는 북쪽 멀리로 꼭 1년 전에 밟은 장안산과 영취산 및 백운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헬기장으로 쓰였음직한 공터를 지나자 오름 새가 다소 꺾여 가빠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 산 중턱

 

에 수정을 캐는 암벽이 있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수정봉에 오르자 만복대가 가까이 보였고 그 왼쪽으로 고리

 

봉과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이봉우리를 지켜온 큰 소나무들이 4년 만에

 

다시 찾아 오른 나를 반기는 듯 했다. 고리봉-세걸산-바래봉을 잇는 건너편 산줄기와 이번에 제가 이어온 대

 

간 길 사이에 자리한 황금빛 벼들이 넘실대는 벌판은 낮은 구릉이 군데군데 박혀 있어 광활해보이지는 않았지

 

만, 여말의 이성계장군이 목숨 걸고 황산의 전투에서 왜구를 격퇴해 이 벌을 지켜낸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었

 

다. 만약에 이성계 장군이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면 고려의 충성스런 장수로 기록되었을지는 몰라도

 

조선을 개국한 태조로서 왕릉에 묻히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자, 여원재 고개에서 비몽사몽 중인 이성계 앞

 

에 나타나 왜구를 격파할 비책을 전해주었다는 전설상의 노파 한분이 과연 누구였는지 새삼 궁금했다. 나지막

 

한 봉우리를 몇 개 더 오르내린 대간 길은 얼마간 더 남쪽으로 이어졌다.

 

 

 

 

 

13시48분 고기리 고기교 앞에 도착했다. 수정봉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 길은 나지막한 봉우리를 몇 곳 지

 

나 13시52분에 다다른 묘지 앞에서 왼쪽으로 확 꺾여 그 아래 노치샘으로 이어졌다. 짐을 잔뜩 지고 혼자서 대

 

간 종주를 나선 한 젊은이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4년 전 회사를 정리하느라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다

 

져 잡고자 혼자서 힘들게 이 길을 걸었던 일이 생각났다. 묘지 위에서 점심을 든 후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

 

자 잘 가꾼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보였다. 산신제당이 세워진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 만난 노치샘에서 물 한

 

모금을 떠 마셨다. 돌담 길 가재마을을 빠져나와 60번 도로가 지나는 삼거리의 덕치정류장에 이르렀다. 고기

 

리마을까지 2-3Km 가량 대간 길을 겸하고 있는 60번 도로의 해발고도는 570m-600m 수준으로 고지대임에 틀

 

림없는 데도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송학모텔과 또 하나의 모텔을 지나 다다른 고기교 앞에서 왼쪽 산

 

으로 붙어 고리봉을 오르는 가파른 길로 들어섰다. 초반 나무계단 길의 경사가 엄청 급해 고리봉까지 수직으

 

로 700m남짓 고도를 높이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예고해주는 듯했다. 고리봉들머리에서 0.5Km지점

 

의 묘지를 지나 1Km 지점에 이르는데 45분이 다 걸렸으니 3Km거리의 고리봉에 올라서는 데는 2시간이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평일인데도 이봉우리를 올랐다가 고기리로 내려가는 분들을 여러분 만났다.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면 힘들수록 산을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지난 세기말에 치룬 IMF 환난 이후 등산인구가 급격히 늘

 

어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살아보겠다고 의지를 다지는데 산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싶고 또 적

 

은 돈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몇 시간 씩 즐길만한 곳으로 산이 최고라고 뽑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다. 

 

 

 

 

 

16시3분 해발1.305m의 고리봉에 올라섰다. 고남산에서 시작된 소나무 벨트가 고리봉의 800m 대 능선에서 멈

 

췄다. 이 산의 소나무는 훤칠하고 말쑥한 편이어서 보기에 좋았지만  고남산과 수정봉의 소나무들은 줄기가

 

시꺼멓게 변한 나무들이 많고 제대로 간벌을 하지 않아 능선 길이 어둡게 느껴졌다. 해발고도가 900m 대로 올

 

라서자 불그스레한 단풍이 정상에서 뛰어내려와 반겼다. 능선 길의 거리가 3km이고 수직고도가 0.7Km이면

 

사인(sine)값이 0.23정도여서 경사각의 크기가 15도 미만으로 별 것 아닐 것 같은 데도 숨이 차오르는 것은 실

 

제 능선 길이 비스듬하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오르락내리락 해 빗면 거리는 이보다 훨씬 짧고

 

그래서 경사각의 크기가 30도가 다 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하얀 로프를 쳐놓은 마지막 비알 길을

 

올라 고리봉에 올라서자 비로소 지리산이 그 전모를 드러내보였다. 동쪽 끝머리에 정좌한 천왕봉이 동부 지리

 

산의 주봉을 겸하고 있다면 그 반대편인 서부지리산의 주봉은 단연 반야봉이다. 반야봉의 의젓한 자태에 주눅

 

이 들어 오래 눈길을 주지 못하고 정령치로 하산했다.

 

 

 

 

16시30분 해발1,172m의 정령치로 내려섰다. 한 1년 간 주력이 많이 떨어졌을 것으로 판단해 집 떠날 때는 여

 

원재-수정봉-고기리의 짧은 구간을 산행코스로 잡았는데 생각보다 주력이 떨어지지 않아 오후 2시가 조금 못

 

된 이른 시간에 고기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산행을 마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어서 고리봉을 하루 앞당겨

 

오르고 정령치로 하산했다. 하산 길에 만난 돌탑에는 누군가가 갖다 놓은 지 얼마 안 되는 하얀 국화꽃송이가

 

놓여 있었다. 저녁 시간의 정령치는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써늘해 윈드자켓을 꺼내 입었다. 휴게소에 맥주 한

 

캔을 사든 후 고기리마을로 내려갔다. 노선버스가 다니지 않는 정령치를 일반차량도 거의 넘나들지 않아 꼬불

 

꼬불한 차도를 따라 걷는 재미가 오붓했다.  

 

 

 

 

 

17시17분 꼬부랑길 걷기를 멈추고 택시를 탔다. 홀로 걷는 내가 딱하게 보였던지 서울택시기사분이 차를 멈추

 

고 나를 태웠다. 몇 번의 사양 끝에 올라탄 이 택시의 기사 분은 나보다 8년 연배로 바람을 쐬고자 내려와 지리

 

산 일대를 드라이브하셨다 한다. 60대 초반까지는 열심히 산을 오르셨다는 이분의 배려로 남원시내까지 편하

 

게 나올 수 있어 고마웠다. 그새를 못 참아 남원고속터미널로 달려 내려오신 사모님과 해후하는 택시기사분이

 

부럽기도 했다. 이처럼 생각지도 않게 고마운 분과 반가운 분을 만나게 되어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종주

 

산행을 하는 것이 그다지 외롭지 않다. 

 

 

 

 

 

  시내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에너지를 충전해 정령치-만복대-노고단 구간을 이어서 종주할 생각이다.

 

이틀 연속 산행을 해보고 나서 몸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본 후 올해 안으로 환주산행을 마칠 지 아니면 내년으로

 

미룰지 결정할 뜻이다. 강에 물을 대는 산은 강의 어머니요 울타리를 쳐 이 강물 저 강물이 섞이지 않도록 하

 

는 산은 강의 아버지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섬진강 산줄기 환주를 마치고 나면 다음 여정으로 섬진강의 강줄

 

기를 따라 걷기도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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