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주기29:호남정맥 27구간(개운치-구절재)
*산행일시:2008. 5. 22일/ 8시47분-16시25분(7시간38분)
*소재지 :전북 정읍/순창
*산높이 :고당산641m, 소장봉428m
*산행코스:개운치-고당산-476봉-사적골재-소장봉-구절재
5월의 산에 신록이 더해지면서 산식구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호남정맥 종주 중 유군치-개운치 구간에서 멧
돼지를 만났는데 개운치-구절재 구간에서 또 다시 보아, 산 속에서 이틀 연속해서 멧돼지를 만나보기는 이번
산행이 처음이다.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의 “뻐꾹”노래 경연도 들을 만했다. 머리 위를 날며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좀처럼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딱새(?)를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했으나 재빠른 몸놀림을 따라
잡지 못해 헛손질만 계속 했다. 동물들은 앞으로 다가가면 어느새 알아채고 숲속으로 몸을 숨겨 심중의 말 한
마디를 전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제자리를 지키는 식물들은 사진 찍기와 묵언의 대화가 가능해 동물들보다 훨
씬 가깝게 지내왔다. 산딸나무, 때죽나무와 찔레가 탐스런 하얀 꽃을, 그리고 층층나무와 국수나무가 수더분
한 흰 꽃을 피워 철쭉꽃이 사라진 5월 하순의 산속을 환하게 했고, 나무 꽃들에 밀리기는 해도 이달 들어 산괴
불주머니, 은방울꽃, 엉겅퀴, 고들빼기, 둥굴레 및 이름을 모르는 풀꽃들이 새롭게 산 속에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반갑기는 해도 걱정되는 꽃나무는 찔레꽃이다. 청미래 및 산딸기와 더불어 종주 꾼을 위협하는 이 나무의 가
시에 얼마를 더 찔려야 올 한해 산행을 끝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해발고도가 높은 백두대간 길이라
면 혹시 몰라도 고도가 낮은 정맥이나 지맥 길의 한 여름 철 복병은 단연 이들이 숨겨둔 가시다. 긴 옷을 입어
도 사정없이 찔러대는 가시에 온전할 리 없어 한두 번 풀숲 길을 뚫고 지나가노라면 여기 저기 긁힌 팔다리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그 부분이 가려워 며칠간 고생한다. 사정이 이러한 즉 아무리 꽃이 소담스럽다 해도 이 시
대의 소리꾼인 장사익님처럼 찔레꽃을 보고 사랑노래를 읊조릴 마음이 일지 않는 것이다. 하얀 꽃 찔레꽃이,
또 순박한 찔레꽃이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워 밤새워 노래하고 춤추고 울었다는 장사익님의 애절한 노래
가락이 심금을 울리면 울릴수록 겉보기와는 달리 속에다 가시를 숨겨놓은 찔레꽃의 냉혹함에 분노한다.
그래도 찔레꽃은 5월의 산식구이다. 막무가내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오는 내게 숨겨놓은 가시로 자기영역을 방
어하는 찔레 등 가시나무들을 냉혹하다고 몰아치는 것은 옳지 않다. 분명 이 산의 주인은 산식구들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멧돼지가 나타나 경고사인을 보내는 것도 나의 무례를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똑 같이 가시를 품고 있는 장미에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면서 산속에서 자기영역을 지키는 가시에 좀 찔렸다
해서 찔레꽃을 탓하는 것은 형평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처사다. 논리가 그러한 즉 이제부터라도 찔레꽃을 미워
하는 마음을 거두고 장사익님의 “찔레꽃” 노래나 한 번 목청 높여 불러보고자 한다.
아침8시47분 개운치고개를 출발했다. 아침 일찍 정읍사공원(井邑詞公園)을 둘러본 후 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
아침8시10분발 쌍치경유 순창행 버스에 올랐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개운치에서 하차해 산행채비를 한 후 검
은 지붕의 외딴 집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 대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고당산으로 이어지는 치받이 길을 오르
는 중 활짝 핀 하얀 찔레꽃을 보고 마음이 환해진 것은 잠깐이고 이내 여름 내내 가시에 찔릴 일이 걱정됐다.
씨는 쾌청했고 바람도 살살 불어와 제반 컨디션이 다 만점인데 배가 살살 아파와 가파른 비알 길을 웬만큼
오른 후 잠시 쉬며 속을 달래야 했다. 내장산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곡두재부터 개운치까지 종주 길을 안내하
는 표지기가 잘 보이지 않은 것이 혹시라도 공원 측에서 제거했기 때문이라면 드물게 세워놓은 공원의 이정표
보다 갈림길마다 매달아 놓은 표지기가 훨씬 더 결정적으로 길안내를 해주는 것을 간과한 단견의 소치라는 생
각이 들었다. 실제로 추령봉 이후로는 이렇다하게 공원의 표지물이 보이지 않았는데 개운치까지는 종주꾼들
의 표지기도 거의 걸려있지 않아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길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개운치에서 계속해
가파른 길을 올라 묘지에 다다르자 한동안 보이지 않던 낯익은 표지기가 다시 나타나 엄청 반가웠다.
10시 정각 해발 641m의 고당산을 올랐다. 반가운 표지기가 매달려 있는 묘지를 지나 그 15분 후 헬기장에 다
다르기까지 검은등까마귀의 “홀딱벗고”노래 소리가 계속 들렸다. 층층나무의 하얀 꽃들이 활짝 핀 헬기장에서
멀리 떨어졌을 것으로 생각한 고당산이 불과 5분 거리였음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실전호남정맥 종주기”에 실
린 지도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일명 칠보산으로도 불린다는 고당산 정상 한 복판에 묘지가 들어서 있었고 삼
각점은 한 귀퉁이에 서있었다. 땡볕에 밀려 고당산 정상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북동쪽으로 난 산죽 길과
바위 길을 따라 내려가 다다른 안부에서 528m봉으로 올라선 다음 오른쪽으로 꺾어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오른쪽 사면이 나무들을 모두 베어낸 벌목지여서 6월만 되어도 땡볕과 풀숲으로 이 길을 지나기가 엄청 고생
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 색의 고들빼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묘지를 지나 시멘트 길로 내려섰다. 왼쪽
아래로 시멘트길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그냥 흙길인 굴재 고개 마루에서 직진해 복분자 밭 왼쪽 가로 이어
지는 정맥 길을 따라 걸었다. 밭가 길을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가 15분간 푹 쉰 후 11시5분에 정맥종주를 이어갔다.
12시12분 삼각점이 서있는 476m봉에 올라섰다. 숲길에서 긴 시간 편히 쉬어서인지 524봉으로 오르는 비알길
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울고 있는 삼색의 딱새(?)가 언뜻 보여 카메라를 꺼내들고 한
참을 기다렸으나 두 번 다시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지나온 호남정맥 종주 길에서 가장 광활한 둥굴
레군락지를 지나 올라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올라 우뚝 선 524m봉을 왼쪽으로 우회한 후 김해김씨 쌍묘를
지나 553m봉에 올라섰다. 나뭇가지에 “553m봉”으로 표시된 표지기가 걸려있는 553m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왼쪽사면이 천 길 낭떠러지인 벼랑 끝 오른 쪽의 정맥 길을 따라 경사 길을 얼마만큼 내려가자 길이 평탄해
졌고 여러 그루의 국수나무들이 수더분한 흰 꽃을 활짝 피웠다. 좁은 봉우리에 삼각점만 달랑 서있는 476m봉
에서 조금 내려가 준비해간 쑥떡을 들면서 십 수분 간 쉬었다. 476m봉에서 조금 내려선 후 죽은 소나무들과
그 아래를 꽉 메운 산죽들이 생과 사의 색깔이 어떻게 다른 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완만한 능선 길을 걸어 다
다른 한 봉우리에서 백두대간을 함께 종주한 천자봉님 표지기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서 별 생각 없이 그 쪽 길
로 내려갔다. 이내 별안간 길이 희미해져 가던 길을 멈춰서고 지도를 꺼내 방향을 확인했더니 남쪽으로 진행
하고 있어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하고 원위치 했다. 잘 못 내려선 남쪽 길이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길 같았
고 그렇다면 원위치한 봉우리는 또 다른 476m봉으로 이봉우리에서 왼쪽의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타
고 십자안부로 내려섰다.
14시7분 사적골재를 지났다. 십자안부에서 비알 길을 오르는 중 별안간 왼쪽 숲속에서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
가 들려 왔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커다란 산토끼인가 했는데 내가 오르는 흙길 등산로에 큰 발자국이 분명하
게 나있는 것으로 보아 작은 멧돼지가 틀림없다. 이틀 연속 이 산의 맹주인 멧돼지를 만났는데도 서로가 서로
를 경계하느라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이 산의 한 식구로써 다른 식구들과 교분을 쌓아
가기가 정말로 지난하다는 반증 같아서 씁쓰레했다. 안부에서 올라선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진행하며 저
아래 멧돼지가 이 능선으로 올라와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편안한 능선 길을 걷다가 올라
선 묘지봉에서 급경사 길을 내려가 만난 시멘트 길을 따라 1-2분을 걷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섰다. 잠시 후 다
시 만난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확 꺾이는 커브 길에서 직진해 숲길로 들어섰다 바로 아래 동
네까지 한 번 내려 가보자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시멘트 길로 나와 조금 내려가자 길 왼쪽 위로 석탄사로 보이는
절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커브 길로 돌아와 지도를 꺼내 펴놓고 갈 길을 체크해보니 하마터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 된 고생을 할 뻔 했다. 방금 전 내려가 본 길이 북쪽에 자리한 소장봉으로 오르는 제 길이었고 커
브 길에서 들어섰던 길은 동쪽 멀리 감투봉으로 이어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다시 뒤돌아가 주홍색 지붕의
한 민가 앞에 전신주가 서 있는 사적골재에 다다르자 호남정맥 표지기가 걸려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적골재 오른 쪽 아래에 자리한 사적골제가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14시44분 368m봉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전신주 앞에서 시멘트 길을 벗어나 묘지가 들어선 북쪽의 풀밭 길로
올라서자 이런저런 가시들이 마구 찔러대 올 여름 종주산행이 무탈치 않음을 일러주었다. 호남정맥도 이 산줄
기를 종주하는 산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 이름난 산이 아니면 곳곳에 풀 숲길이 있어 산행 중 가시에 찔리는 것
은 다반사다. 올해는 5월 들어 내장산 국립공원을 지나는 통에 가시 길을 피해갈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꼼짝
없이 만나면 찔릴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있다. 힘들게 오른 428m봉에는 소장봉이라는 이름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눈에 익은 표지기만 여러 개 걸려있었다. 엉덩이를 붙여 쉬어갈 만한 공터도 없는데다 죽
은 나무줄기들만 어지럽게 널려있어 어수선한 428m봉을 바로 떠 거대한 뿌리가 통째로 뽑힌 거목을 지나 삼
각점이 서있는 368m봉에 도착했다.
과연 거목이다 한 것은 이 나무의 키가 커서가 아니고 커다란 바윗돌을 움켜잡고 쓰러진 거대한 뿌리 때문이
다. 나무를 똑바로 세워 올곧게 자라게 하고 나뭇잎에 물을 공급해 필요한 영양분을 광합성을 통해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하고자, 바위를 뚫고 내려가 땅 속 깊이 수도관을 박은 뿌리의 실체를 보고나자 비록 강풍에 못
이겨 뿌리를 뽑힌 채 누워있어도 이 거대한 뿌리는 신이 만든 나무를 위해 역시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 시
인 김수영님이 이 땅에 박은 뿌리도 거대했다. “거대한 뿌리”에서 “제 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내
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이라고 읊은
김수영님은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가 심야에는 여자가 사라
지고 남자가 오입하러 나선다고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로 비하한 이 땅에 주저하지 않고 거대한 뿌리를 내
렸기에 이 땅의 더러운 역사도 더러운 진창도 진정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내린 뿌리가 워낙 거대해
유명을 달리한지 40년이 지났어도 후배문인들이 그의 거대한 뿌리를 뽑아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는데
여기 호남정맥에 거대한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쓰러져 속 뿌리가 드러난 것을 보자 한 시인의 의지가 태풍보
다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6시25분 정읍시 산내면과 칠보면을 경계 짓는 구절재로 내려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368m봉에서 오른 쪽으로
경사 길을 내려가다 얼마 후 송전탑을 지났다. 곧 이어 도착한 안부에서 360m봉에 이르는 길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어서 편했다. 360m봉에서 동쪽으로 진행해 320m봉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방향을 남동쪽으로 확 틀어 진
행하다가 340m봉으로 올라섰다. 340m봉에서 구절재로 내려서는 길에 봉분 아래 부분에 빨간 벽돌과 큰 화강
암 돌을 묘곽을 만들어놓고 한글로 비문을 써놓은 묘지 두 곳을 지났다. 무명봉을 마지막으로 넘어 송전탑을
지나 구절재로 내려서자 돌을 깎아 세운 장승 2개가 서 있었다.
구절재에서 택시를 불러 칠보시내로 내려가는 중 오른 쪽으로 15년 전에 한번 둘러보았던 발전소가 보였다.
이 발전소는 산 너머 섬진강 물을 터널을 뚫어 동진강으로 끌어가는 수로에 34,800kW의 용량을 갖도록 시설
된 칠보수력발전소로 물이 떨어지는 낙차폭이 151.7m나 된다고 한다. 호남정맥에 터널을 뚫어 섬진강의 물을
산 너머 동진강으로 보내고 발전까지 하고 있으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고래의
산자분수 원리가 무색해진 셈이다. 칠봉에서 대략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정읍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40
분 남짓 걸려 정읍역에 도착, 18시32분 발 수원행 새마을 열차에 몸을 실어 이틀간의 호남정맥 종주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이달 들어 새로 선보인 산식구들이 모두 온순하지는 않다. 이틀 연속 만난 멧돼지도 그렇고 찔레나무들도 그
렇다. 그래도 그들은 호남정맥을 지키는 산식구들이다. 나처럼 지나가버리는 과객이 아니다. 과객이 주인행세
만 안한다면 과객을 해하는 산식구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산은 공존의 장이 될 수 있다. 과객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주인행세만 안 한다면 말이다.
환주기30:호남정맥 28구간(구절재-초당골)
*산행일시:2008. 5. 30일/ 8시23분-19시3분(10시간40분)
*소재지 :전북 정읍
*산높이 :왕자산444m, 성옥산389m, 묵방산538m
*산행코스:구절재-왕자산-방성골-성옥산-가는정이-묵방산-초당골
대간과 정맥 길에 자리한 수많은 묘지들을 지나면서 제초제를 뿌려 묘지를 관리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
았다. 대간 길을 걸으며 해발 1,353m의 두타산 정수리에 안장한 묘지도 보았고, 금북정맥을 종주하면서 한쪽
편에만 묘지를 쓰는 다른 곳과는 달리 능선 길 좌우에 안치한 태안반도 산길의 묘지들도 보았다. 구절재-초당
골 구간의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중 능선 길 바로 아래 묘지에 제초제를 뿌리다 잠시 쉬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을 뵈었다. 이 분께서 이 약을 뿌리면 잔디는 그대로 살고 다른 풀들은 말라 죽어 묘지 관리가 수월하다는
말씀을 했다. 헐벗은 우리산림이 박대통령의 조림사업에 힘입어 몰라보게 울창해지자 후손들이 선조의 묘지
를 찾지 못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종종 일어나나보다. 그러기에 내가 아는 한 선배분의 어르신께서는 당신 가문
의 묘지를 찾아 오르는 길을 손수 지도로 펴내셨다 한다. 어쨌거나 깊은 산속의 선영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아서
인지 오랫동안 방치된 봉분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묘지들을 꽤 많이 보았다. 이런 묘지에 진작 제초제를
뿌렸다면 나무가 묘지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초제를 뿌려야 묘지가 관리된다면 이제 묘지문화를 확 바꿀 때가 됐다고 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은
그 시체를 남기지 말아야 이 지구가 온전하게 살아남는다. 자연에서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이 역할을 훌륭하
게 해내기에 모든 생명체는 삶의 흔적인 시체처리가 전혀 문제 안 되는데, 유독 먹이사슬의 맨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은 어떤 식으로든 삶의 흔적을 영원토록 남기려고 욕심을 부려 문제가 된다. 후손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무가 자라나는 묘지가 오히려 낫다 싶은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죽은 자의 흔적이 지워지고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잘 모셔진 분묘다. 산 속에 다 자란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진입로를 크게 낸데다 묘 자리를 넓게 잡은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 묘비와 상석 등의 석조물이 즐비하게 들어서다. 선조들의 흔적을 영원히 남기기 위한 후손들의 극진한
효심을 어떤 이유로든 나무라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당국의 이장명령을 받은 후손들이 묘비 등의
석조물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묘지만 파 옮겨간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온 듯 다녀가라는 우
리 산의 하소연에 두 귀를 막고 산에다 크게 터를 잡아 육신을 묻는 묘지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살아생전 먹이
사슬 맨 위 자리를 군림하며 생태계를 위협해온 욕심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은 죽어서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리든 나무 곁에 묻어 두든 해서 살아생전 자기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일이다.
아침8시22분 구절재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정읍터미널에서 아침 6시30분에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칠보까지 가는데 반시간 밖에 안 걸려 칠보에서 8시1분발 산내 버스를 타기까지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화강
암으로 만든 두 장승들이 서있는 구절재 고개 마루에서 하차하여 차도 건너 임도로 들어섰다. 묘지를 막 지나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서 가파른 산행이 이어졌다. 능선에 올라 오른쪽으로 꺾어 이어지는 정맥 길을 오르는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잎에 맺힌 이슬에 구두와 바지자락이 모두 젖었고 남방도 같이 젖어 한기가 느껴
졌다. 산행시작 45분 만에 도착한 420m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수 분간 급하게 내려갔다 오른 쪽 사면이 벌
목지인 능선 길을 걸어 오르는 중 뒤따라 산을 오르는 아랫마을에 산다는 젊은이 한 분을 만났다. 뒤에서 부
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멧돼지가 아닐까 해 스틱으로 돌을 쳐 쇠 소리를 내고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는데 엉뚱
하게도 뒤따라오던 젊은이가 내가 낸 소리에 놀랐다하니 정말 미안했다.
산줄기를 종주하며 한쪽 면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낸 개활지 위 능선을 종종 지나는데 이런 길을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만나는 것은 키가 낮은 나무들과 청미래 등이 만든 잡목풀숲이다. 한 여름에 정맥종주가 고행인 것
은 대간 길에서는 거의 없는 이런 잡목풀숲 길을 자주 만나서인데, 이슬이 마르기 전에 이런 길을 만나면 우중
에 산행한 것처럼 옷이 다 젖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가시에 찔리며 나뭇가지에 얻어맞고 여기 저기 긁혀 한
바탕 전쟁을 치르게 된다. 4년 전의 산행기를 읽어보면 그동안 호남정맥을 종주한 많은 분들이 길을 잘 내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간 길처럼 길이 넓게 난 것이 아니어서 나뭇가지와 가시에 긁히고 찔리는
것은 여전하다.
9시52분 능선삼거리를 출발했다. 잡목 숲길을 지나 오른 무명봉에서 오른 쪽으로 쪽으로 꺾어 3-4분을 걷다
가 능선삼거리에서 나를 앞질러 앞 봉을 다녀온 그 젊은이를 다시 만났다. 나는 능선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내리막길로 내려섰고 그 젊은이는 구절재로 되 내려갔다. 몇 분을 걸어 내려가 만난 안부에서 얼마간 평
탄한 길이 이어져 물기를 머금고 있는 야생화들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다시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얼마
고 내려서자 완두콩 밭이 나타났다. 4년 전에 이 길을 밟은 어느 한 분이 420m봉- 묵방산 구간에서 무려 5번
이나 알바를 한 것으로 산행기에 적혀 있어 나도 자칫 길을 잃을까보아 수시로 표지기를 점검하고 몇 번이고
지도를 꺼내 길을 확인하느라 발걸음이 자연 느렸다. 완두콩밭을 지나고 임도를 따라 내려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보리밭 위 안부사거리에 내려섰다. 밀양박씨 묘지에서 15분을 쉰 후 산 길로 들어서 가파른 봉에 올랐다.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진행해 또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서있는 아래보리밭 위 능선삼거리를 지나 왼쪽
아래 묘지에서 술을 들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 잠시 말씀을 나누는 중 묘지에도 잔디는 살리고 다른
풀을 죽이는 제초제를 뿌린다는 말씀을 들었다. 얼마 더 안가 꽤 넓은 묘지를 지나며 아닌 게 아니라 잔디는
멀쩡하고 삐쭉 솟은 넓은 잎 풀들이 말라 죽은 것을 보았다.
11시42분 해발 444m의 왕자산을 올랐다. 묘지를 지나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 산봉우리를 우회
해 진행하다가 능선삼거리에 다다랐다. 무심코 들어선 오른 쪽 길이 너무 희미해 길이 아닌데 하면서 앞으로
진행하다 풀 숲 한 가운데 자리한 묘지에 올라서자 반대방향으로 왕자봉이 보여 길을 잘못 들었음을 확인했
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오름 새가 지속되는 왼쪽 길을 걸어 왕자봉에 올라서자 삼각점과 스테인리스 명판
이 보였다. 왕자산에서 오른쪽으로 확 꺾어 급경사 길을 조심해서 내려가 안부사거리에 다다랐다. 오른 쪽 아
래로 마을이 보이는 완만한 길을 오르다 410m봉을 바로 앞에 두고 인절미로 요기를 한 후 왼쪽으로 내려섰다.
330m봉에서 다시 왼쪽으로 급하게 내려가 방성골 마을의 정자에 다다른 시각이 12시57분으로 이 정자에 걸
터앉아 7분을 쉬면서 지도를 펴보며 앞으로 이어갈 마루금을 확인했다. 은행나무 옆 소로로 올라가 능선에 올
라선 후 오른 쪽으로 얼마고 진행하자 삼각점이 보였는데 이 봉우리가 275m봉이었다. 275m봉에서 묘지와 밭
을 지나 715번 국도가 지나는 소리개재로 내려섰다.
14시4분 해발 389m의 성옥산을 올랐다. 소리개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왼쪽으로 올라가는 큰 길
로 들어섰다. 이내 묘지가 보였고 곧 이어 비닐 줄을 쳐 놓은 밭가를 지났다. 다시 만난 묘지를 지나 미로학습
을 막 마친 곳에서 내려오는 한 분을 만나 운암3거리까지 약 4시간 정도 걸릴 것이며 저녁 늦게까지 전주 가는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나자 마음이 놓였다. 된비알 길을 걸어 올라선 성옥산 어깨 능선에
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 성옥산에 올라 삼각점을 확인했으나 정작 갈 길이 보이지 않아 잠시 당황했다.
몇 걸음 물러서자 북동쪽으로 표지기가 보여 풀숲을 지나 그 방향으로 진행하자 왼쪽 사면이 벌목지인 능선길
이 훤히 보였다. 이 길을 따라 잠시 걷다가 오른쪽 급경사 길로 내려가 편안한 길을 이어갔다. 성옥산 출발 16
분 후에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급하게 내려가 안부에 다다랐다가 다시 올라 320m봉에 도착한 시각
이 14시43분이었다.
15시47분 749번 지방도가 지나는 가는정이 고개삼거리에 도착했다. 320m봉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올망졸망
한 봉우리 2개를 넘어 334m봉에 이르기까지 42분이 걸렸다. 남동쪽과 북동쪽으로 수시로 방향을 바꾸면서 봉
우리를 오르내리다 335m봉아래 안부에서 쓰러져 있는 전신주를 보았다. 오른 쪽 아래로 옥정호가 나뭇잎 사
이로 보일 듯 말 듯해 감질났지만, 옥정호 어디에선가 들여오는 트럼펫(?) 소리가 귀에 익은 곡이어서 이내 마
음이 푸근해졌다. 오전 내내 찌푸린 날씨로 좀처럼 이슬방울이 사라지지 않아 다 젖은 양말을 그냥 신고 다녔
는데 이제는 나뭇잎의 물기가 사라져 334m봉에서 5분을 쉬면서 양말을 짜낸 후 다시 신었다. 이 과정을 반복
하면 구두의 물기를 양말이 빨아들여 걷기가 훨씬 나아짐을 경험으로 익힌 것이기에 산행 종료 시까지 몇 번
을 더 짜냈다. 334m봉에서 15분을 내려가 다다른 가는정이 고개에는 음식점과 여관이 많이 보여 여차하면 옥
정호가 바로 아래 보이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도 된다. 차도를 건너 묘지에 오르자 옥정호가 한 눈에 들
어와 가던 길을 멈추고 20분 가까이 쉬면서 사진도 찍고 남은 떡을 마저 드는 등 마지막 고비인 묵방산 산 오
름에 대비했다.
17시21분 해발 538m의 묵방산에 올라섰다. 긴 쉼을 끝내고 16시12분에 묘지를 출발했다. 봉우리를 하나 넘어
내려선 안부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직진하여 올라선 나지막한 봉우리가 삼각점이 세워진 283.5m봉으로 이 봉
우리에서 시멘트 길 안부로 내려섰다. 안부마을 여우재에서 폐가 몇 집을 지나 어두침침한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서자 귀곡산장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감지되어 으스스했다. 대나무 숲을 빠져나와 꽤나 긴 된비알 길
을 오르면서 힘이 많이 빠졌다 한 것은 중간에 퍼지고 쉬지는 않았지만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기를 꽤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힘들게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 내 발목을 잡은 것은 때 이르게 선을 보인 버섯이었기에 이제
남은 마지막 산 식구는 7월 출현을 준비하고 있는 매미일 듯싶었다. 반시간 가까이 치켜 올라 묵방산 어깨 능
선에 다다른 후에도 정상에 이르는데 20분이 다 걸렸다. 정작 묵방산 정상은 정맥 길에서 100m 가량 비켜 서
있었고 200m급의 정맥 길 봉우리에도 세워진 삼각점이 보이지 않아 썰렁했다. 곧바로 정맥 길로 복귀해 북서
쪽으로 내려섰다가 쏜살같이 내달려 460m봉에 올라섰다. 양말을 벗어 짜며 10분을 쉬는 동안 햇빛이 나기 시
작해 새삼 산속이 훤하게 밝아왔다.
19시3분 초당골삼거리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무리했다. 460m봉에서 엄청 가파른 길을 조심해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350m봉은 모악산 길이 갈리는 봉우리삼거리로 정맥 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크게 틀어 이어졌다.
이제 초당골 삼거리에 다 내려왔다 싶어 새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쓰러진 큰 나무가 길을 가로막아 앞으로 나
가가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양쪽 다 철조망에 풀숲길이어서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어
한참을 멍청히 서서 고심하다가 나무 밑으로 기어 간신히 통과했다. 3-4분을 더 내려가 아스팔트 차도로 내려
서자 옥정호를 가로 지르는 높은 다리가 보였다. 초당골의 막은댐 정류장에서 짐을 꾸려 넣는 중 전주 가는 버
스가 멈춰서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금왕일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초당골을 출발해
한 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내 딴에는 비를 피해 산행일자를 잡는다고 했는데 아침이슬에 옷과 구두가 다 젖어 우중산행과 별반 다를 바
가 없었다. 처음부터 스패치를 하고 우의를 입고 나서 산행해야 했던 것을 그리하지 않아 옷이 젖을 대로 다
젖고 팔다리도 찔릴 대로 다 찔려 산행이 많이 힘들었다. 산행 중 거의 내내 땡볕이 비치지 않아 더위를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앞으로 석 달간은 장마 비가 아니면 땡볕더위가 기승을 부려 우거진 잡
목 숲을 뚫고 산행하는 것이 보통 난제가 아닐 것이다. 먼저 오른 분들의 산행기를 읽어보면 이 분들이 앞서
당한 고통은 내가 요즈음 겪는 어려움에 비할 수 없이 컸다. 종주 길을 제대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이번 구
간을 이렇다 할 알바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4년 전에 이 길을 밟느라 베테랑 한 분이 5번씩 알바를
하는 등 먼저 오른 분들의 노고에 힘입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분들이 길을 낸 흔적이 없었다면 나 혼자
서 감히 종주 길에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길이 바로 문명이자 문화인 것은 이와 같이 길은 계속해서 내어지고
넓혀지며 진화해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렇듯 뒷사람들에 자취를 남겨도 좋은 것
은 길이지 사람들의 몸 동아리가 아닐 것이다. 대를 이어 흔적을 넘겨주는 일은 길에 맡기고 삶의 흔적을 커다
란 묘지로 남기는 풍습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환주기31:호남정맥 29구간(초당골-불재)
*산행일자:2008. 6. 7일/ 7시20분-17시13분(9시간53분)
*소재지 :전북 완주/임실
*산높이 :오봉산513m
*산행코스:초당골-오봉산-염암재-작은불재-헬기장-불재
사진에서 보아온대로 오봉산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댐 옥정호는 역시 아름다웠다. 눈으로 보아도 아름답고 렌
즈로 보아도 매혹적이었다. 댐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외안날도 섬이 무엇을 닮았나를 골똘히 생각해
도 딱 잡히는 게 없었는데 집에 돌아와 다른 분들의 산행기를 보니 붕어섬이라 했다. 내 눈에는 붕어보다 이
섬이 훨씬 올망졸망하게 잘 생겨 보였다. 옥정호에 물을 대는 울타리 산들 모두 이 호수의 성깔을 건드릴 만큼
날카로운 악산이거나 위에서 내리누를 만큼 높은 산들이 아니었다. 반신욕을 즐기듯 나지막한 울타리 산들이
산허리를 반쯤 물에 담가 보여주는 S라인도 옥정호 만큼이나 고혹적이었다.
옥정호가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은 그 아름다운 자태 때문만은 아니다. 옥정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나눔의
물터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무오류의 진리다. 이것이
산과 물을 만든 분의 뜻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진리를 철석같이 믿고 산과 물을 관리해왔다. 우리 선현들께
서도 위 명제가 참이라 믿고 산경표와 수경표를 찬한 것이다. 그런데 섬진강 상류를 막아 만든 옥정호의 물은
섬진강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호남정맥의 서쪽 너머 동진강에 물을 나눠주고 있는 댐이 바로 옥정호다.
물은 산을 바로 넘지 못하지만 땅 속으로 수로만 만들어준다면 산을 뚫고 흐를 수 있기에 섬진강의 물을 동진
강에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칠보발전소와 호남평야에 물을 대는 옥정호가 우리나라 최고의 나눔의
물터인 것이다.
나눔의 모습은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다. 완주벧엘 기도원으로 향하는 고갯길을 천천히 오르는 할머니와 할아
버지들의 두 어깨가 이분들이 살아오신 세월의 무게 때문에 축 쳐져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허리만 조금 구부정
하셨을 뿐 어깨는 하나도 처져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당신들이 모아온 것은 이미 자식들에든 누구에든 다 나
눠주고 빈 몸으로 저 고개를 오르시는 것이기에 이 분들 발걸음이 가벼울 것이다. 저 연세에 두 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고개를 오르시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으신 것이다. 반려자와 곁을 같이하며 남은 것을 서로
나눠주고 받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두 분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많든 적든 지금 가지신 것은 자식들에는 그만
나눠주시고 두 분끼리 서로 나누며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빌어본다.
아침7시20분 초당골을 출발해 오봉산으로 향했다. 전날 전남 장성의 방장산을 오른 후 전주로 이동해 시외버
스터미널 근방의 한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새벽같이 서둘러 아침6시 조금 지나서부터 금왕사거리 정류
장에서 운암삼거리로 가는 975번 버스를 기다렸다. 아침6시20분에 첫 버스가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미리 가서
기다렸는데 어인 일인지 6시36분이 되어서야 버스에 올랐다. 운암 삼거리에서 오른쪽의 749번 도로를 따라 몇
분을 걸어 쌍용건설의 순창-운암 도로확장공사 현장 앞에 이르자 길이 끊겨 들머리를 찾느라 한참을 두리번거
렸다. 잘린 도로 건너편에 표지기가 보여 그리로 옮겨 묘지 옆으로 올라섰다. 잠시 멈추어 스패치를 한 후 곧
바로 올라선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갔다. 얼마간 편안한 길을 걷다가 비알 길을 올라 건교부의 측
량점이 서있는 봉우리에서 10분을 더 걸어 삼각점이 세워진 293.4m봉에 다다랐다. 293.4m봉을 출발해 20분
동안 몇 번 방향을 바꾸어 360m봉에 올라선 다음 잠시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확 꺾어 내려가자 아기똥풀의 노
란 꽃들이 떼 지어 피어 있었다. 바로 앞 330m봉을 올랐다가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 749번 도로로 내려선
시각이 9시5분이었다.
10시2분 해발513m의 오봉산에 올라섰다. 749번 도로를 건너 절개면 꼭지점에 오른 후 왼쪽 능선 길을 이어가
다가 묘지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봉우리를 우회하자 둥굴레 군락지가 나타났다. 왼쪽으로 내려가 다시 749
번지방도를 건너 고개 마루 왼쪽 위로 난 완주벧엘기도원/엘노인선교원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길로 들어섰다.
저 만치 앞에서 걸어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의 뒷모습을 보았다. 구부정한 허리로 저 길을 걸어 오르기
가 힘 드실지는 모르지만 어깨를 나란히 한 두 분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고 새삼 곁에 있음이 최고의 행복이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멘트 길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묘지에 다다르자 오른 쪽
아래로 그림 같은 옥정호가 다시 보였다. 여기서부터 오봉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나무를 베어낸 가파른 개활
지여서 많이 힘들었다. 반시간 넘게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미끄러운 길을 올라 오봉산 어깨능선에
오르자 비로소 경사가 완만해졌다. 3-4분 후에 오른 오봉산 정상이 옥정호 최고의 전망지여서 이모저모를 사
진으로 남겼다. 물 한가운데 자리한 붕어섬의 외안날도가 옥정호의 압권이었다. 정상에서 참외를 까먹으며 15
분을 쉰 후 표지목의 안내를 받아 헬기장이 들어선 500m봉까지 별 탈 없이 진출했다. 오봉산 정상에서 왼쪽
아래로 소모마을 길이 갈리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올라선 4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갔다. 3봉에서 젊은 한 분이
건네준 오이를 받아먹고 2봉으로 옮기는 중 왼쪽사면이 절벽인 전망바위가 나타나 잠시 숨을 고르고 사진을
찍었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2봉을 우회해 헬기장에 도착한 시각이 11시8분이었다.
12시47분 49번 국도가 지나는 염암재로 내려섰다. 하얗게 페인트를 칠한 시멘트블록도 보이지 않고 공터를 가
리는 나무들에 걸려 헬기가 과연 착륙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헬기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6분을 내려가자
잡목도 자라지 않은 완전한 벌목지가 나타났다. 이 벌목지를 10분간 내려가 만난 넓은 진입로에서 왼쪽 아래
가 개활지인 오른 쪽 위 능선 길로 올라서자 서쪽 멀리 모악산의 통신탑이 보였다. 헬기장 출발 반시간이 지나
삼각점이 서있는 365m봉을 지나면서 염암재가 가깝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엄청 가파른 봉우리
를 반시간 이상 걸어 오르느라 진땀을 뺐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10분을 더 가서 오른 봉우리가 480m봉으
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들게 올라온 이 봉우리는 해발고도가 500m는 넘는 것 같다.
480m봉에서 급경사 길을 내려가 염암고개로 내려서자 시장기도 최고조에 달해 49번 국도를 건넌 후 일단 해
를 가릴 수 있는 나무그늘을 찾아 점심을 들었다. 예정대로 불재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됐던 것은 예상시간보
다 반시간 이상 늦어진데다 불재를 넘어 전주 가는 마지막 버스가 저녁 6시에 끝나서인데 서두르면 시간을 댈
수 있을 것 같아 13시10분에 염암재를 출발했다.
14시36분 작은불재를 지났다. 염암재에서 450m봉에 이르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아 힘이 훨씬 덜 들었
다. 절개면 상단에서 오른 쪽으로 오르다가 암릉 길에 다다르자 굽이굽이 돌아가는 염암 고개 길이 한눈에 들
어와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450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430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갔다.
이내 평탄해진 능선 길에서 속도를 내어 25분을 더 걸은 후 또 다른 450m봉에 올라 7-8분을 쉬었는데도 다시
10분을 내려가 다다른 작은불재까지 염암재 출발 1시간20분밖에 걸리지 않아 예상시간보다 30분이 단축됐다.
작은불재로 내려서자 이 정도 속도만 유지된다면 목적지인 불재에 저녁 6시 안에 충분히 다다를 것 같았다. 저
만치 떨어져 보이는 600m봉이 이번 산행에서 올라야 하는 최고봉인데 경사는 그리 급해 보이지 않았다. 선채
로 2-3분간 숨을 고른 후 대쳐서 600m봉으로 향했다. 잠시 임도 길을 오르다 벌목지인 잡목숲길로 들어서 한
참을 오르다가 무명봉을 왼쪽으로 우회했다.
15시27분 헬기장 바로 위 600m봉에 올랐다. 무명봉을 왼쪽으로 우회하자 한동안 평탄한 길이 계속됐다. 조용
히 생각을 키우며 걸어도 좋은 길을 하루살이가 쉴 새 없이 덤벼들어 모처럼의 편안한 길이 아까웠다. 능선삼
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올라서는 중 저만치서 짐승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데 실체가 보이지
않아 긴장됐다. 스틱으로 돌을 계속 때려 금속성 소리를 보내는 한편 경사가 완만한 오름 길을 5-6분 간 뛰다
시피 걸어올라 소리의 진원지에서 일정거리 벗어나자 마음이 놓였다. 꽤 넓은 공터의 헬기장을 지나 4-5m 위
에 있는 봉우리가 바로 600m봉이었다. 정맥 길은 왼쪽으로 이어지고 오른 쪽 으로 치마산 길이 갈리는 600m
봉에서 15분을 쉬었더니 그 무겁던 몸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졌다. 600m봉에서 왼쪽으로 5-6분을 걸어 만
난 봉우리삼거리에서 광속단(狂速團)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표지기를 보고 오른쪽으로 들어섰다가 길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보니 마루금이 왼쪽 아래로 이어졌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10분을 진행해 다다른 능선삼거리
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다 안부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반대방향으로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세분을 만나 인
사를 나누었는데 이 분들의 목적지가 내가 아침에 출발한 운암삼거리라 하니 야간산행이 불가피할 것 같았다.
안부에서 다시 올라 우회한 봉우리가 430m봉이고 한참을 더 걸어 16시37분 올라선 봉우리는 420m봉으로 생
각됐으나 고도계가 고장 나 확인하지 못했다.
17시13분 불재 고개 마루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다. 420m봉(?)에 오르자 서쪽 건너로 전주의 진산 모악산
이 아주 가깝게 보였고 그 아래 구이저수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 봉우리에서 내려와 한참을 걸었어도 패러
글라이딩 활공장이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든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이제 봉우리는 끝났겠지 했는데 또 높은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아 이 봉우리가 다음 종주 시에 오를 경각산인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찾은 활공장은
이미 지나친 것이고 따라서 되돌아가야 불재로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혼미에 빠진 생각을 정리하고자 가
던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꺼내 어떤 경우든 아직 만나지 못한 포장도로 불재를 건너야 경각산으로 길이 이어
짐을 확인하고 그대로 직진했다. 지도를 안보고 감으로만 진행하다가는 이래서 길을 잃는다 했다. 앞에 보이
는 봉우리를 넘어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다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무거운 짐을 지고 활
공장으로 오르는 몇 사람들을 보았는데 정작 활공장은 보지 못했다. 땔감들이 꽤 많이 쌓인 공사장을 지나 전
북 완주의 상관면과 임실의 신덕면을 이어주는 불재 고개마루에 내려섰다가 18시5분에 201번 버스에 올라 전
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하루 산행을 반추했다. 내 경우 산행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길은 오름길이다. 168cm의 작은 키로
는 80kg의 과체중을 견뎌내기가 무리이기에 무릎을 보호하고자 가능한 한 천천히 오른다. 능선 길에서 속도를
내어 오름 길에서 까먹은 시간을 보충하는데 이번 구간처럼 가파른 봉우리가 계속 이어지면 시간당 2Km도 못
걷는다. 체중을 줄이는 일이 지난한 것은 과체중이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빛난 얼인데다 죽어라고 살을 뺄
의지도 없어서다. 걸음이 느려 구간나누기가 정말 어렵다. 답은 오직 과감하게 살을 빼 몸무게를 줄이는 것이
다. 정답을 알고도 풀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하루에 두 갑 반을 피운 담
배를 한 칼에 끊은 6년 전의 결단을 되살려야 할 것 같다. 이 길만이 80세를 넘어서도 계속해 종주 산행에 나설
수 있는 길이다. 생각해 보니 살을 빼는 것도 나눔의 효과가 있겠다 싶었다. 우선 덜 먹을 테니 남들에 그만큼
몫이 더 돌아갈 것이고, 그래서 가벼워진 몸으로 산길을 밟으면 길이 망가지는 것도 같이 줄어들 수 있으니 말
이다. 그래야 나도 아침에 시멘트 길을 오르셨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들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이다.
환주기32:호남정맥 30구간(불재-슬치)
*산행일시:2008. 6. 13일/ 9시13분-17시39분(8시간26분)
*소재지 :전북임실/완주
*산높이 :경각산660m, 갈미봉540m
*산행코스:불재-경각산-쑥재-갈미봉-설치재-슬치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하고 많은 색깔 중에 하필이면 까만색을 써 “새까맣게”로
표현할까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새까맣다”라는 단어는 빛이 아주 까맣다는 뜻으로 까만색이 예쁘거나 고
운 색상이 아니고 어감도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아서다. “새까맣다”라는 단어는 이 뜻 말고도 전혀 아는 것이 없
거나 아주 잊고 있어 기억에 없다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자고로 우리민족은 흰옷을 즐
겨 입어 백의민족으로 불렸다. 색깔을 빌려 동사를 꾸미는 예는 “새까맣게” 말고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나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등 얼마든지 있다. 굳이 색을 빌릴 뜻이라면 “새하얗게” 모여들었다고 하는 것이 백
의민족인 우리나라사람들에게는 백번 맞을 것 같은데 굳이 “새까맣게”로 표현하는 데는 내가 모르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껏 그 이유를 몰라 궁금했었는데 이번 종주 산행 중 에코브리지 앞에서 엄
청 많이 모여든 새까만 개미떼를 보고 아 이래서 그리 표현했구나하고 고개가 끄떡여졌다.
에코브리지(Eco-Bridge)란 동물들이 오고 갈 수 있도록 끊어진 산줄기를 다시 이은 다리를 말한다. 에코브리
지는 동물이동통로이기에 이 다리의 주인공은 단연 산속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이다. 이 다리의 주인공인 까만
개미들이 다리 앞에 모여들어 동그랗게 떼 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새까맣게 모여든다는 표현이 저 까만 개미
떼들 모양에서 연유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궁금해 한 것이 이렇게 풀리자 이번에는 그러면 그
들이 왜 새까맣게 모여들었는지 그 사유가 또 궁금했다. 여기에 에코브리지를 놓은 것은 벌써 옛날 일이어서
개통식에 모여든 것은 아닐 테고 그들만의 애경사가 있어 모여들었다면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 도시 그 이
유를 종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답답해하다가 아 이개미들도 동물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다리 앞에서 촛불시위
를 벌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그럴 것이다. 개미인들 살아 있는 생물인데 한 평생 살아가면서 어찌 불만이 없겠는가? 그 불만은 개인적인 불
만일 수 있고, 최고급 먹을거리인 쇠고기가 미국에서 수입되면 식탁의 안전이 위협받을게 분명하다며 서울시
청 앞에 모여든 대한민국 국민들의 집단적인 불만처럼 일개미들 전체의 명운이 걸려있는 중대 사항을 혼자서
제멋대로 결정하는 여왕개미의 횡포가 불러온 집단적인 불만일 수도 있다. 지구상에 퍼져있는 분포와 또 개체
수를 기준할 때 이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을 들라하면 단연 사람과 개미다. 수많은 동물 중에서 이 두 동
물이 이 땅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둘 모두가 사회적동물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자 한 분은 사람들이 개미와 구
별되는 것은 종교 밖에 없다고 했다. 새까맣게 모여든 개미떼를 보고 수도서울의 밤을 밝히는 촛불시위대를
연상한 것은 바로 이 개미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적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개미들의 시위양상은 어떠할 까 잠시 더 머무르며 관찰했다. 몇 분이 지났는데도 개미들은 원형
의 대오를 깨뜨리지 않았다. 수명이 길지 않은 개미가 그 작은 몸매로 맞는 몇 분이란 수명이 길고 덩치가 훨
씬 큰 사람들이 맞는 며칠에 해당될 텐데 어느 개미하나도 대오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 한 참 후 원형의 대오
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들이라고 어찌 여왕 궁을 진입하겠다고 뛰어가는 개미가 없으랴 싶어
흥미 있게 지켜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류의 개미떼를 보지 못했다. 일부 개미들이 한 쪽으로 움직여
가운데가 홀쭉하고 양 끝이 원형인 아령모양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 했는데 그들의 움직임이 정말 질서정연해
이제 시위를 끝내고 저 에코브리지를 넘는 대장정에 들어가는 듯 했다. 나는 아직도 저 개미들이 새까맣게 모
여든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은 우리 장병들의 움직임만큼 질서정연했다.
사람들에 종교마저 없었다면 개미보다 나은 게 뭐가 있겠나 생각하자 사람과 개미를 모두 어우르는 이 산이
더욱 위대해보였다.
아침9시13분 경각산을 향해 불재를 출발했다. 새벽같이 서둘러 강남에서 5시30분 발 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8시 조금 지나 전주터미널에 도착해 1시간에 한 대 있다는 불재를 넘는 버스를 놓칠까보아 남부시장
까지 택시로 내달렸지만 7시40분 다음 차가 10시에 출발한다는 아주머니들의 말씀을 듣고 나자 난감했다. 결
국 택시 타고 불재까지 갔지만 웬 놈의 배차간격이 이리도 긴 가하는 볼 멘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낮 기온이 섭씨31도까지 올라간다는데 아직은 태양의 열기가 대단치 않았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을 따
라 오르다가 묘지를 지나 솔밭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됐다. 불재 출발 반시간이 채 안되어
전망바위에 오르자 서쪽 건너 모악산이 머리위의 통신 탑만 보였고, 지난번에 확인 못한 패러글이딩 활공장도
흐릿하게 보였다.
10시27분 해발660m의 경각산을 올랐다. 전망바위를 지나 묘지 위 소나무들이 서 있는 무명봉을 올라 남동쪽
으로 내려갔다. 다시 가파른 참나무 숲길을 따라 봉우리 하나를 또 넘어서 산불감시초소에 다다랐다. 고개를
반짝 처 들고 움직이지 않는 자그마한 살모사 한 마리가 스틱을 휘두르자 위협을 느꼈던지 숲속으로 사라졌
다. 헬기장이 들어선 경각산 정상에 올라서자 검은등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높이
오르는 경각산 오름 길에 진을 빼게 되면 남은 길에서 더운 날씨로 고전할게 뻔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산행초
반이라서 그런지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헬기장을 내리쬐는 6월의 땡볕이 따가웠다. 정상을 출발해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해서 걸어 내려갔다. 양 사면의 경사도가 40-50도는 됨직한 좁은 길의 능선을 지나는 중 그동
안 숱하게 보아왔으면서도 며칠 전에야 이름을 익힌 야생화 백선 꽃을 만나 카메라에 담아 왔다. 올라선 봉우
리에서 왼쪽 아래로 효관마을 길이 갈리는 효관재로 내려서자 오른 쪽 아래로 저수지가 보였다.
12시34분 옥녀봉으로 길이 갈리는 550m봉에 다다랐다. 표지기가 엄청 많이 걸린 효관재에서 완만한 길을 따
라 오르다가 암릉 길을 지나 올라선 520m봉에서 다른 때보다 훨씬 이른 11시21분에 점심을 들면서 20분 가까
이 쉬었다. 바로 눈앞에서 얼씬거리며 날아다니는 벌 한 마리가 윙윙대는 소리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굉음
못지않게 귓전을 크게 울렸다. 520m봉을 출발해 편백나무 숲을 지나 다다른 543m봉에서 정동 쪽으로 진행하
며 다시 편백나무 숲을 보았다. 훤칠한 키의 편백나무 숲 아래 땅에는 다른 풀들이 일절 자라지 못해 잣나무
숲보다 더 심하게 메말라보였다. 이러다가는 다른 수종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이 나무의 유아독존이 이 산을
황폐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다다른 무명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봉우리가 550m봉으로 오른 쪽으로 옥녀봉 가는 길이 나뭇가지로 막혀 있었다. 550m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왼쪽으로 꺾어 급하게 내려서자 경사가 완만하고 평탄한 길이 한동안 계속됐다.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왼쪽
으로 내려가 낮은 봉우리에 올랐다가 동쪽으로 내려선 사거리안부가 쑥재로 지도와는 달리 이 고개를 넘는 길
이 잘 나있는 것은 아니었다.
14시28분 해발540m의 갈미봉에 올라섰다. 쑥재에서 15분을 올라 다다른 470m봉에서 갈미봉까지는 남진 길로
경사도 완만하고 길도 좋아 걷기에 편했다. 480m봉을 지나 갈미봉 오름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했는데 조
금 더 오르자 도로를 내기 위해 베어낸 나무들이 길을 가로 막아 왼쪽 아래 넓은 길로 들어섰다. 4-5분을 걸어
만난 불도저 기사 분에게서 군부대의 탄약창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공사를 하고 중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헬
기장이 들어선 해발540m의 갈미봉정상에서 10여m를 더 가서 공사 중인 차도가 끝났다. 갈미봉에서 신설도로
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지 20분이 채 안지나 산불감시초소에 이르자 이 지역은 폭발물처리장이니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서있었다. 나무 아래 그늘에다 돗자리 깔아놓고 한 잠 푹 자면 신선이 따로 없겠다 싶은 거목
들이 꽉 들어찬 숲을 지나서 장재에 다다르자 산불감시초소에서 본 경고판이 또 보였다. 십자안부 장재에서
15분을 걸어 469m봉에 올라선 시각이 15시7분으로 이제껏 길이 좋고 그늘이 잘 져서인지 더운 줄 모르고 한
낮의 땡볕더위를 보냈다.
16시17분 설치재위 에코브리지 앞에서 14분 간 마지막 쉼을 가졌다. 10분 남짓 쉰 469m봉에서 숲길을 지나 오
른쪽으로 나무를 베어내 민둥산이 된 산줄기가 보여 이 땡볕에 어떻게 저 길을 지나나 걱정했는데 정맥 길은
오른 쪽의 그 길이 아니고 앞쪽으로 똑바로 나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조금 내려섰다가 평탄한 산길이 꽤 오래
이어졌으며 한 두 곳 가시 숲길도 지났다. 440m봉을 지나 임도 길을 만난 것이 15시57분으로 469m봉 출발 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숲길에서 차가 충분히 다닐 만한 넓은 임도로 나서자 왼쪽 아래로 차도가 보여 이번 산행
의 목적지인 슬치고개가 멀지 않았다 싶었다. 산나리 한포기가 주홍색 꽃을 활짝 피워 임도 길을 안내했다. 20
분간 이어진 넓은 임도가 햇빛을 가리지 못하는 몇 곳이 그리 길지 않아 걸을 만했다. 산줄기를 들어내고 차도
를 낸 설치재 위로 동물들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도록 에코브리지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호남정맥 종주 객들
도 저 가파른 절개면을 오르내리느라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에코브리지 앞 그늘에서 14분을 쉬는 동안 새까
맣게 원을 이룬 개미떼들을 보았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형체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작은 개
미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작은 개미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어야 저렇게 새까맣게 보일까 궁금해 하
다가 문득 저 개미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데모를 벌이고 있는 시민들처럼 그들의 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7시39분 슬치휴게소에서 맥주 한 캔을 사들으며 종주산행을 마쳤다. 에코브리지를 건너 숲속 길로 들어섰다
가 다시 큰 길로 나와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묘지 위를 지났다. 왼쪽으로 인삼밭이 보이는 산길로 다시 들
어서 똑바로 몇 분을 오르자 이중의 철조망 울타리 안에 세워진 군부대 초소가 보였다. 이 초소 오른 쪽으로
울타리를 돌며 한참을 가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일단 멈춰 섰다. 울타리 안의 한 장병에 길을 물었더니 잘
모른다면서 더 진행하면 길이 막힌다 했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도 군부대 울타리를 지난 기록이 없어 길을 잘
못 들었다고 판단하고 5-6분을 걸어 표지기가 걸려 있는 곳까지 되 내려가자 인삼밭 쪽으로 표지기가 걸려있
어 마음을 놓았다. 인삼 밭을 지나 들어선 숲길에서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나 혹시 멧돼지가 아닌 가
신경이 쓰였다. 다시 만난 임도를 따라 몇 분을 내려가 밭가에 세워진 이동통신탑 앞에 다다랐다. 왼쪽 구릉
위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밭가를 지나 차도로 내려섰다. 이 차도를 따라 오른 쪽으로 4-5분을 걸어 다다른 슬
치고개에서 17번 국도를 건넜다. 주유소 옆 슬치휴게소에서 맥주를 사 드는 중 만난 젊은 한 분이 고맙게도 전
주역까지 태워주어 귀가 길이 편했다.
기차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개미떼들에 물어보지 못하고 빼먹은 게 몇 가지 있었다. 개미들 너희들은 누가
시위를 주도하고, 또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시위대열에 참여하는 지, 폴리스 라인이 설
치되어 있는지, 있으면 그 선을 사람들처럼 수로 밀쳐버리지는 않는지, 혹시라도 선동세력들의 꾐에 빠져 참
여했다며 후회하는 개미들은 없는지 물어볼 것이 많이 있었다. 만약 내가 이 많은 질문을 다 했다면 개미들의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제껏 다 보고도 모르느냐고 말이다.
환주기33:호남정맥 31구간(슬치고개-곰치재)
*산행일자:2008. 6. 22일/ 8시55분-19시21분(10시간26분)
*소재지 :전북 완주/ 임실/ 진안
*산높이 :만덕산763m, 박이뫼산346m
*산행코스:슬치고개-박뫼이산-북치-마재-만덕산갈림길-곰치재
이번 33차 출산으로 호남정맥 종주산행을 마무리하겠다고 마음 다져먹었는데 과욕이었다. 욕심이 서두름을
불렀고 서두름이 알바를 자초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심냈던 종주산행 마무리는 이뤄내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마음은 다급한 데 초반부터 길을 잘 못 들어 1차 가벼운 알바를 했다. 한참 후 또 다시 길을 잘 못 들어 적
지 아니 헤매다가 마루금에 복귀하느라 얼마고 진이 빠졌다. 가장 멍청했던 알바는 온 길을 다시 갔다 되돌아
오는 바람에 반시간을 까먹은 것이다. 재작년 여름 금북정맥 종주 시에는 날짜를 달리해서 전에 걸은 길을 또
다시 걷다가 원 위치했지만 이번에는 한날 한 시에 겪은 일이어서 정신이 다 멍했다. 하루에 세 번이나 알바를
겪게 되면 누구라도 더 이상 발을 내딛기가 겁이 날 정도로 소심해진다. 이런 날 무리하게 산행하면 자칫 사
고로 이어질 수 있어 가까운 데서 탈출하여 산행을 마치곤 했는데 어제는 딱히 탈출할 만한 적당한 지점을 못
찾아 곰치재까지 진출했다. 집 떠날 때 계획한 이번 산행의 끝점이 곰치재였기에 크게 억울해 할 일은 아니
다. 들머리인 슬치고개에 조금 일찍 도착해 3정맥 분기점인 조약봉까지 가보겠다고 욕심을 낸 것이 어리석었
을 뿐이다.
산이 내게 최고의 스승인 것은 이렇게 나를 꾸짖어 욕심을 접도록 하기 때문이다. 산이 어제 내게 산에서의
과욕이 금물임을 일깨워주었다. 두 번의 알바로 경고를 주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욕심내는 내게 똑 같
은 길을 두 번 걷도록 벌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6-8월 한 여름에 더 치열하게 산행해 겨우 내내 불어난 몸무게
를 팍팍 줄여왔다. 복중 땡볕 길도 마다않고 10시간 넘게 산행해 몸속의 노폐물을 짜내는데 열을 내곤 했다.
작년 8월 폭염을 무릅쓰고 호남정맥의 삼수마을-사자산-시목치 구간을 12시간 남짓 걸어 종주하느라 진을 뺀
적도 있다. 올 여름에도 그리 할 것이다.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긴 시간 종주가 아니라 과속이다. 충격의 강도
는 단위시간당 운동량의 변화이고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이기에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는 체중을 줄이고 산행속도를 느리게 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체중은 별반 줄이지 못하고 속도를 내다가
는 몇 해 산행 못하고 무릎이 부실해져 주저앉게 된다. 이런 결과는 어느 누구도 바라는 것이 아닐 진데 그래
도 산행을 서두를 때가 종종 있다. 어제가 그러했다. 이런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산, 산뿐이다. 그래서
산이 내게 알바를 시킨 것이다. 그래서 올 여름 내내 욕심내지 못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아침8시55분 슬치고개를 출발했다. 강남에서 아침5시반에 전주행 첫 고속버스에 올라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가 8시가 채 안되어 전주터미널에 도착했다. 금왕사거리의 수협 앞 정류장에서 관촌 가는 시내버스에 오른 시
각이 8시5분이었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슬치고개까지 40분이 걸려 8시45분에 하차했다. 차도를 건너 우측으
로 조금 올라가 왼쪽 위로 난 시멘트 길로 들어섰다. 슬치고개에서 조약봉까지 내가 가지고 간 지도에 11시간
40분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어 사진을 덜 찍고 조금만 서두르면 어둡기 전에 3정맥 분기점에 다다를 것 같았
다. 곰치재에서 끝낼 까 아니면 조약봉까지 갈 까 잠시 고심하다가 조금 더 빨리 그리고 많이 걸어 이참에 조
약봉에서 호남정맥 종주를 끝내기로 뜻을 굳히고 서둘러 슬치고개를 출발했다. 시멘트길이 끝나는 곳에서 오
른쪽으로 꺾어 고추밭을 지나 봉우리에 오르고자 했으나 넝쿨풀숲 길이어서 포기하고 능선을 이어가고자 또
다른 고추밭을 가로 질러 능선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도 길이 선명하지 못하고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
다 싶어 지도를 꺼내보니 진행방향이 달라 이 길이 아님을 직감했다. 다시 시멘트 길로 되돌아가 1-2분을 내려
가다 표지기가 걸린 삼거리에서 북쪽의 넓은 흙길로 들어서 첫 번째 알바를 끝냈다. 박이뫼산(?)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흙길을 지나 다시 시멘트 길을 따라 계속 북진했다. 능선을 따라 난 시멘트 길 좌우에 개간된 밭에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어 참으로 탐스럽다 했는데 밭주인은 농약을 뿌려도 고추 병이 수그러들지 않아 걱정
이라 했다. 해발고도 300m대의 밋밋한 산들을 개간해 일군 밭 사이로 나있는 시멘트 농로를 한 시간 가까이
걸어 능선 오른 쪽에 8개의 봉분이 앉혀진 마지막 묘지를 지나기까지 구름이 해를 가려 그리 더운 줄 몰랐다.
다시 산길로 들어가 415m봉에 오른 시각이 10시 정각으로 알바시간을 감안하면 산행속도는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른 편이어서 이 속도라면 해 떨어지기 전에 조약봉에 다다를 것 같았다.
11시 정각에 두 번째 알바를 끝내고 컨테이너박스가 있는 정맥길 안부로 복귀했다. 415m봉에서 잠시 숨을 고
른 후 큰 길을 따라 내려가자 밭으로 일군지 얼마 안 된 개간지가 나타났고 먼발치로 마이산이 눈에 들어왔다.
개간지 아래로 내려가 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왼쪽으로 이동해 숲속으로 들어가자 아주 희미한 길이 나타
나 그 길을 따라 풀 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넓은 개활지가 나타났다. 둔덕에 세워진 감나무 및 고사리와 취나
물을 재배하고 있어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을 보고 길을 잘 못 들었음을 확실히 알았지만 다시 숲속으로 들
어가 415m봉으로 원위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사리 밭을 지나자 과수원이 나타났고 그 아래로 큰 길이 보
여 과수원 밭 안에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큰 길로 내려선 후 길을 막고 설치한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 민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마리 개들이 달려왔지만 스틱이 두려웠던지 덤벼들지
는 않았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나와 본 주인아주머니에 이 길을 따라 오르면 고개에 닿게 되는 가를 물었더
니 고개에 올라가면 더 이상 길이 없다며 간혹 그 고개 능선 길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고 말씀해주어 그 능선 길이 바로 정맥 길임을 직감했다. 밭으로 일궈 비료 부대를 갖다 놓은 개간지를 지나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컨테이너 박스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표지기가 보였다. 두 번의 알바로 지친 몸을 이
끌고 안부에서 오른 쪽으로 숲길로 들어서 450m봉으로 향했다. 넝쿨 숲길을 지나느라 팔등을 긁힌 후 다다른
450m봉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진행하는 동안 멧돼지가 심하게 분탕질한 흔적이 계속 나타나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 호루라기를 꺼내 불고 스틱으로 돌을 연신해서 쳐댔다. 11시27분 470m봉 바로 앞에서 슬치고개 출
발 2시간 반 만에 처음으로 짐을 내려놓고 10분간 푹 쉬었다. 415m봉에서 북서진해야 할 것을 큰 길 따라 북
동진해 황산재 오른쪽 깊숙이 내려섰다가 컨테이너 안부로 올라선 것이 두 번째 알바의 경위다.
12시35분 삼각점이 서 있는 416.2m봉을 지났다. 470m봉에서 조금 내려가 안부에 다다르자 나뭇잎 사이를 비
집고 들어선 햇살이 반갑게 느껴졌다. 고도차가 별로 없는 봉우리 두 개를 넘기까지 길이 평탄해 막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원추리(?)와 이름 모르는 나무 열매를 카메라에 담았다.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오른쪽으로
483m봉이 갈리는 470m봉에 다다랐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다 다시 오른 430m봉에서 북진
하여 삼각점이 세워진 416.2m봉에 도착해 지도상의 제 위치를 확실하게 확인했다. 오른쪽 아래 마루금과 나
란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차도가 반갑게 다가온 것은 두 번의 알바로 길의 고마움을 새롭게 느꼈기 때문이
다. 봉우리 하나를 오른쪽으로 에돌아 복귀한 능선 길은 오른쪽 사면이 목초지로 개간된 듯 파란 풀밭이 시원
스레 보였다. “만덕산정상4Km”, “죽림온천9km”과 “임실”의 안내판이 길바닥에 놓여있는 이정표가 세워진 곳
을 13시3분에 지났다. 무덤이 있는 무명봉 바로 아래 그늘을 찾아 점심을 들면서 25분을 쉰 후 13시45분에 정
맥종주를 이어갔다.
14시52분 오른쪽으로 오봉산 행 표지가 있는 봉우리삼거리로 되돌아왔다. 민둥산의 무명봉을 넘어 불도자로
낸 넓은 길이 좌우로 갈리는 능선사거리를 지났는데 아무런 표지물이 없어 왼쪽 아래로 종현 길이 갈리는 슬
치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시 숲속 길로 들어서 몇 분을 내려가다 올라선 봉우리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진행했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몇 개를 넘어 올라선 530m봉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오른 쪽으로 오봉산 행 표
지기가 있고 마루금은 왼쪽으로 이어져 그동안 까먹은 시간을 벌충하고자 산행을 서둘렀다. 17분을 내달려 오
른 무명봉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표지기들을 사진 찍은 후 왼쪽의 제 길로 내려간다 했는데 한참 후 진행
방향을 체크해보니 북쪽이 아니고 남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어 온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면 오봉산 갈림길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싶어 계속해 달렸더니 원치 않은 오봉산 갈림길이 나타났다. 꼭 반시
간을 헛걸음질 하고 나자 어처구니도 없고 맥이 풀려 이제 산행을 접고 적당한 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맞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되돌아온 봉우리에서 조금 더 가 550m봉에 오르면 오른 쪽 아래 가까이에 임도길이 지도에
나와 있어 일단 그 봉우리까지 가서 하산여부를 결정하자 마음먹고 돌아온 길을 되짚어 다시 걸었다. 표지기
를 사진 찍느라 방향을 잘 못 잡은 봉우리에서 7분을 쉰 후 왼쪽으로 10분을 걸어 550m봉에 올라서자 오른 쪽
아래 마을에 자리한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오른 쪽 사면이 벌목지인 능선 길을 따라가다 숲길로 들어가 잡풀
이 무성한 묘지의 580m봉에 올랐다가 내려선 안부가 오른 쪽 아래 상회마을로 길이 갈리는 마치 고개였다. 마
치 고개에서 10분가량 올라 표지기가 엄청 많이 걸린 610m봉에 다다른 시각이 16시10분으로 이 봉우리에서
10분을 쉬면서 이번에는 곰치재까지 가서 종주산행을 접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17시17분 만덕산 갈림길에 다다랐다. 610m봉에서 만덕산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에 완주군에서 마련한
이정표와 쉼터가 있고, 인수봉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암봉과 암릉 구간도 있어 앞서 걸어온 능선 길과는 좀 달랐
다. 610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서자 “정상1.6Km/정수사2.1Km/동부교회수련원4.3Km"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
었고 10분을 더 가자 의자가 있는 제5쉼터가 나타났다. 잠시 쉰 후 왼쪽으로 내려가 우뚝 솟은 암봉을 우회했
다. 이어지는 암릉 길을 오르며 뒤돌아 본 암봉은 우람하면서도 아담해 북한산의 인수봉을 작게 해 옮겨놓은
것 같았다. “원불교훈련원 2.3Km"의 스텐리스 표지봉을 지나 이동통신탑이 서있는 만덕산 갈림길에 다다르자
진안의 마이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만덕산 정상으로 향하는 중 나와 반대방향으
로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부부 한 팀을 만났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 내가 걸어온 길과 이분들이 하산하고
자 하는 슬치가 어디쯤인가를 설명 드리고 다시 만덕산으로 향했다. 시야가 트이지 않아 답답한 만덕산 정상
에서 대삼각점을 사진 찍은 후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10분을 쉬는 바람에 갈림길 도착 반시간이 더 지난 17시
50분에 곰치재로 출발했다. 동쪽으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꺾어 또 하나의 암봉을 우회하면서 산죽 길을 지나고
너덜 길을 지나자 제4쉼터와 제3쉼터를 보지 못했는데 뜬금없이 제2쉼터가 나타나 또다시 의자에 앉아 쉬어갔
다.
19시21분 곰치재로 내려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제2쉼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곰치재가 있으리라는 내 생
각이 잘 못이었다. 500m봉 대의 봉우리가 계속 이어져 하산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낮 시간이 가
장 긴 하지가 바로 하루 전이어서 어둡기 전에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싶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500m대 봉우
리를 몇 개 넘어 내려선 안부 오른 쪽에 넓은 평원이 나타나 시원해 보였는데 이 안부가 바로 오두재였다. 다
시 봉우리2개를 넘어 곰치재로 내려서 하루 산행을 끝냈다. 임진왜란 때는 비록 패했지만 왜군의 호남평야 진
입을 막고자 우리 의병들이 용감히 싸운 전적지이고, 모래재 길이 뚫리기까지는 전주와 진안을 오가는 차들이
다 넘나들었던 곰치재지만 이 고개를 지나는 넓은 도로가 노선버스가 다니지 않는 비포장도로여서 별 수 없이
택시를 불러 진안으로 이동했다.
하루에 3번씩이나 알바를 하느라 목표했던 호남정맥의 마무리종주는 다음으로 미루었다. 잦은 알바로 얼이 빠
져 산행기록도 부실했고 그래서 산행기를 쓰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조약봉까지 갔다면 노선버스를 탔을 텐데
중간에 끊는 바람에 꽤 많은 택시비가 추가로 들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번에 종주산행을 마치고자 했던
것은 위 문제들을 단박에 풀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긴 시간을 서둘러 산행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었나 보다. 그
래서 산이 나를 알바를 시켰던 것 같다. 내게는 과연 산이 최고의 스승이다.
환주기34:호남정맥 32구간(곰치재-3정맥분기점 조약봉)
*산행일시:2008. 6. 23일/ 9시33분-14시(4시간27분)
*소재지 :전북완주/진안
*산높이 :조약봉565m
*산행코스:곰치재-웅치전적비-514.5봉-적천재-3정맥분기점 조약봉-모래재
산은 강의 어머니다. 모든 강의 발원지는 산이다. 그리고 강에 물을 대는 젖줄이 바로 산이다. 그러기에 산은
강의 어머니인 것이다. 산은 강의 아버지다. 서로 다른 강물들이 섞이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가름하는 것이 산
이다. 한 집안의 울타리역할을 아버지들이 하듯이 강줄기 둘레에 울타리를 쳐 강물의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
산줄기다. 그래서 산은 강의 아버지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다. 산은 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것
이다.
호남기맥과 호남정맥은 섬진강의 서쪽 울타리다. 두 능선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섬진강으로 흘러들
어간다. 섬진강이 서쪽의 탐진강, 영산강, 동진강 및 만경강과 몸을 섞지 않는 것은 바로 호남정맥이 울타리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섬진강이 독립된 수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북쪽 울타리와 동쪽 울타리가 더 있어주어
야 한다. 북쪽의 금강과는 금남호남정맥이 가르고 동쪽의 낙동강과는 백두대간과 낙남정맥이 가름해준다. 이
들 울타리산줄기는 다른 강물의 유입과 다른 강물에로의 유출을 막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받아
섬진강으로 모아주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당연 호남정맥만으로는 섬진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로서의 역
할을 다 해내지 못한다.
조약봉에서 종주를 멈춘다면 나는 섬진강에 머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섬진강 산(山)울타리를 반만 오르고
산이 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라고 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행히 호남정맥을 종주하며 내 생각이 진화를 거
듭했다. 전남 광양의 망덕산에서 호남기맥을 시작할 때는 호남정맥과 금남호남정맥 종주를 목표로 했지만 이
제는 섬진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산(山)울타리를 모두 돌아보자고 생각이 진화했다. 그러기에 호남정맥 종
주 끝은 금남호남정맥 종주의 시작일 뿐이다. 시간은 연속해서 흐르는 데 카렌다를 만들어 한해를 마무리 짓
듯 호남정맥종주의 마무리산행도 섬진강 울타리 산줄기는 경남하동의 두우산까지 계속되는데 중간에 한번 매
듭져본다는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 쉰 후 7월 중 금남호남정맥 종주 길에 다시 나
설 뜻이다.
아침9시33분 곰치재를 출발했다. 생각지 못한 세 번의 알바로 바로 전날 호남정맥이 끝나는 조약봉까지 가지
못하고 곰치재를 날머리로 해 산행을 접었었다. 택시를 불러 진안으로 나간 다음 버스타고 전주로 가 찜질방
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역순으로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곰치재에 다다랐다. 이번에도 고
심한 것은 호남정맥이 끝나는 조약봉까지 코스가 너무 짧아 아예 오룡고개까지 진출해 금남호남정맥에 첫발
을 들일 까하는 구간 나누기 문제였다. 일단 산행을 시작하고 조약봉에서 결정하자고 생각을 정리한 후 조약
봉으로 향했다. 오름 길이 시멘트길이어서 지열이 느껴졌는데 그 길은 이내 웅치전적비에서 끝났다.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호남평야를 지키자는 이 지방 의병들의 애국심과 애향심은 비록 전투에서 패했다하더라도 영원
히 기려져야 할 것이고 이런 전적비들이 이들의 충절을 되새기게 할 것이다. 전적비에서 비알 길을 올라 곰치
재 출발 25분 후에 다다른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 쪽의 600m봉을 들르지 않고 바로 왼쪽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가파른 길을 내려서자 작년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아직도 온전하게 길을 덮고 있어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폭
신했다. 종주 마지막 날 노란 망사를 뒤집어 쓴 보기 드문 버섯을 카메라에 담고 나자 바로 이 한 컷이 호남정
맥이 내게 주는 공로패다 싶었다. 낙엽 길도 푹신해 좋고 여러 종의 새들도 온 몸을 드러내 반기는데 희귀종의
버섯마저 모델을 서겠다고 이렇게 나서주니 아직 끝점까지 2시간 넘게 남았는데도 산식구들의 종주축하 세레
머니가 너무 고마웠다.
10시30분 곰티재를 지났다. 600m봉 어깨 능선에서 내려서 좋은 길을 얼마간 걸어 다다른 참나무 묘지를 지나
그 위 무명봉을 오른 쪽으로 우회했다. 한참 후 내려선 안부에서 좌우로 임도 길이 갈렸는데 오른 쪽 아래 임
도길이 새터교 길이었다. 임도를 건너 산길로 들어서자 길 오른 쪽에 낡은 철망이 쳐져 있어 이 철망 울타리를
따라 오르내리다 곰티재에 다다랐다. 옛날에 버스가 넘나든 곰치재의 웅치전적지 안내판은 완주군이, 그 위의
웅치전적비는 전라북도가, 그리고 사람들만 겨우 넘어 다녔을 여기 곰티재의 웅치전적지 안내판은 진안문화
원에서 세운 것들로 웅치전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무려 세 곳에나 있어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곰티재 십자안부
에서 묘지 위 능선으로 올라가 전날 오른 만덕산의 늠름한 자태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다. 묘지 위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축사 같은 건물이 보이는 안부로 급하게 내려섰다가 급경사 길을 올라 571m봉에 도착했다. 571m
봉에서 가파른 암릉길을 지나 다다른 563m봉에서 왼쪽의 좁은 암릉 길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잡목들이 무
성한 봉우리에서 삼각점을 찾지 못해 이 봉우리가 514.5m봉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11시45분 왼쪽 아래로 신보활석광산 길이 갈리는 십자안부 적천재를 지났다. 514.5m봉에서 비알길을 내려가
만난 갈림길에서 봉우리 하나를 오른 쪽으로 우회해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무명봉에서 7-8분을 쉬었다. 골바
람이 시원했는데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는 이 바람이 머지않아 비를 몰고 올지 어찌 알았는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한참 내려갔다가 480m봉에 오르며 커다란 자갈이 박힌 역암을 만나 이 산줄기도 마이산의 두
통 바위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가 했다. 키를 넘는 산죽 길을 지나 오른 무명봉에서 십자안부 적
천재로 내려서자 1989년에 대한광업진흥공사에서 세운 콘크리트표지판이 박혀 있었다. 적천재에서 급하게 올
라선 497m봉에서 다른 길로 내려가 20분간 알바를 했다. 직진해야 할 것을 표지기가 걸려있는 오른쪽으로 조
금 내려가자 2기의 묘가 자리한 넓은 묘지가 나타났다. 안개가 뿌옇지만 모래재 공원묘지가 확연하게 보이는
묘지에서 조금 더 내려가자 비교적 선명한 길이 이어져 한참을 더 내려가다 표지기가 눈에 띄지 않아 진행방
향을 점검했다. 북진길이 아니고 남동쪽으로 내려가고 있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다시 묘지 위 497m봉으로
향했다. 후드득 내리는 빗방울이 드세져 우의를 입고 내려온 길을 다시 오르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이미 조약
봉에서 호남정맥 종주를 마치고 하산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서두르지 않아도 됐다. 12시21분에 다시 오른
497m봉에서 북쪽의 제 길을 찾아 마루금을 이어갔다.
13시15분 3정맥 분기점인 조약봉에 도착해 호남정맥 종주산행을 모두 마쳤다. 497m봉에서 북쪽으로 내려갔
다가 봉우리 2개를 넘어 미끄러운 길을 급하게 내려가느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노란 망사버섯이 나를 반겼고,
좀처럼 몸을 드러내지 않는 새들이 얼굴을 내보여줬으며 20분간의 가벼운 알바를 겪었고 내장산을 지난 후
처음 엉덩방아를 찧은 것들 모두가 내게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전신주가 비스듬히 걸쳐있는 능선 길을 내
려가 오른 쪽 아래 모래재 휴게소로 바로 내려가는 안부에 다다랐다. 조약봉에 오르는 길은 이제까지 걸어온
길처럼 편하지 못했다. 싸리나무와 산딸기가 얼굴을 때리는 잡목 숲길을 걸어올라 헬기장에 에 이른 후 한 걸
음에 내달아 조약봉에 도착했다. 작년 4월 금남정맥 종주 시 처음으로 올랐을 때는 종주를 마친 기쁨에 겨워
저 많은 표지기를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무탈하게 종주산행을 마치게 해준 산줄기에 고마움
을 표하고자 걸어놓았겠다 싶었다. 종주의 기쁨과 고마움을 모두 담은 표지기가 다시 보였다.
14시 정각 모래재휴게소로 내려가 모든 산행을 마치고 전주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기차타고 상경하는 중 축하
주를 사겠다는 한 고교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한북정맥을 같이 뛰는 동료 넷이서 자리를 마련해준다 해 고마
웠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며 내가 받은 고마움을 하나하나 쌓아갔다. 조약봉에서 표지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작
년 5월 광양의 외망에서 시작해 여기 3정맥분기점에 이르기까지 총34회를 출산했는데 이번 마지막 산행까지
건각을 주시고 보살펴주신 주님께 먼저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까이서 보살피는 집사람에도
완주를 고했다. 근무 중인 두 아들에는 문자메시지를 띄운 후 경동동문산악회의 정병기후배에 전화를 걸어 완
주를 알렸다. 아직도 고마워할 분들이 많이 있다. 백운산과 무등산의 두 구간을 우정산행한 경동동문산악회
이규성회장, 순천에서 무네미고개까지 차편을 도와주신 깜상님, 광주에서 알콜결핍증을 깔끔하게 낫게 해준
양방현사장님, 산에 다니면 쉽게 배가 고플 것이니 실컷 먹으라고 밥도 반찬도 고봉으로 많이 내준 정읍버스
정류장의 한식집 할머니에게도 감사인사 드린다. 한국의 산하에 종주기를 올린 성봉현님과 따라가기님에 고
마움을 표한다. 경동고 동문들도 고맙기는 마찬가지이고, 졸고를 실을 공간을 내준 송백산악회도 고맙다. 댓
글주신 모든 분들과 졸고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도 감사인사 올린다. 아침 일찍 차를 태워주신 군내버스 기
사님도 고맙다. 종주길 거의 반을 끈질기게 같이한 능선의 꼬막 조개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웬만하면 올해 안으로 하동의 두우산에 올라 건너편 광양의 망덕산을 카메라에 담아 올 뜻이다. 산(山)울타
리 종주가 끝나면 이어서 섬진강 강줄기를 밟아 볼 뜻이다. 산줄기와 강줄기를 모두 밟고 나면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님을 찾아뵈어 내가 본 섬진강과 산(山)울타리의 아름다움을 고할 뜻이다. 산줄기종주가 이처럼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기에 생각의 진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호남정맥 산줄기에 감사인
사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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