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서호천 따라 걷기

서호천 따라 걷기1( 이목2교-한마루교-서호저수지 축만교)

시인마뇽 2025. 12. 25. 21:33

탐방구간: 이2-한마루교-서호저수지 축만교

탐방일자: 2025. 12. 24()

탐방코스: 이2-배다리쉼터-한마루교-새싹교-서호저수지 축만교-새싹교-화서역

탐방시간: 1440-1720(2시간40)

동행       : 나 홀로

 

 

 

  수원시를 남북으로 관통해 흐르는 황구지천, 서호천, 수원천과 원천리천 등 주요 4대 하천은 모두가 한남정맥의 산기슭에서 발원해 황구지천, 진위천을 거쳐 안성천으로 흘러드는 안성천의 지류입니다.

 

  이들 수원시의 4대 하천 중 제가 전 구간을 따라 걸은 하천은 황구지천 뿐입니다. 20233월에 탐방을 마친 황구지천은 한남정맥이 지나는 의왕시의 오봉산에서 발원해 왕송호수를 거쳐 평택시서탄면의 회화리에서 진위천에 합류되는 진위천의 제1지류입니다. 상기 4개 하천 중 가장 서쪽에 자리한 황구지천은 주로 시가지에서 떨어진 농경지를 헤집고 흐릅니다.경 기도의왕시에서 시작해 수원시와 화성시를 차례로 거쳐 평택시에 이르러 진위천에 합류되는 황구지천은 상기 4개 하천 중 하천의 길이가 가장 긴 하천으로 그 길이는 30Km가량  됩니다. .

 

  나머지 원천천, 수원천과 서호천 등 3개 하천은 모두 굉교산 기슭에서 발원해 크고 작은 저수지를 이룬 후 수원시를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황구지천으로 흘러드는 황구지천의 제1지류입니다. 서호천은 파장저수지와 서호저수지를, 수원천은 광교저수지를, 원천리천은 원천호수를 만든 다음 권선구 고색동과 대황교동에서 황구지천으로 흘러듭니다. 서호천, 수원천과 원천리천의 물을 받아들인 황구지천은 평택시서탄면의 회화리에서 진위천에 합류됩니다. 황구지천을 받아들여 세를 불린 진위천은 평택시고덕면 동고리에서 안성천으로 흘러들고 안성천은 아산방조제를 끝으로 서해와 만납니다. 정리하자면 황구지천은 진위천의 제1지류이자 안성천의 제2지류이고 서호천, 수원천, 원천리천 등은 황구지천의 제1지류이자 진위천의 제2지류이고 안성천의 제3지류가 됩니다.

 

  정조임금께서 수원으로 천도를 꿈꾸었던 것도 수자원이 풍부한 데다 들판이 넓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원천호수, 광교저수지, 서호와 왕송호 등의 저수지는 수원의 넓은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축조된 저수지입니다. 이만하면 수원시(水原市)는 과연 문자 그대로 물 고을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한남정맥의 산기슭에서 발원한 4대 하천들이 넉넉하게 물을 공급해 왕송호수, 서호, 광교저수지, 원천호수 등의 대형저수지를 축조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물고을 수원이 어림잡아 120만명이 살고 있는 특례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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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제가 따라 걸은 하천은 수원시의 이목2교에서 서호저수지에 이르는 서호천으로 북쪽으로는 더 이상 천변 길이 나 있지 않아 상류 쪽 파장저수지에서 시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산본 집을 나서 성균관대역까지는 전철로 이동했습니다. 성균관대역에서 하차해 택시를 타고 가다 노송공원을 들러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이목2교로 이동했습니다. 야목2교에서 물줄기를 거슬러 빵다방 입구 정문까지 가보았으나 차단기가 내려져 더 이상 올라가보지 못하고 이목2교로 되돌아갔습니다.

 

  1440분 수원시의 장안로가 지나는 이목2교를 출발했습니다. 이목2교에서 서호천 우안의 천변길로 내려서자 하천 건너 하수구에서 엄청 많은 물이 서호천으로 흘러드는 것을 보았는데, 인근 아파트단지를 지나왔을 하수구의 물이 저처럼 맑아 보이는 까닭을 몰라 궁금했습니다. 하천 폭이 좁고 천변길도 좁아 조금은 답답한느낌이 들었지만 하천을 거의 다 채운 맑은 물이 힘차게 흘러 보기에  좋았습니다.

 

  서호천 양안에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는 것은 서호천 위에 놓인 다리가 촘촘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2교에서 서호저수지까지 하천길이는 5Km가 채 안 되는데 차가 다니는 다리만 이목2-서호제1-이3-배다리교-율목교-노루교-선화교-샘내교-동남교-대월교-청솔교-한마루교-꽃뫼버들교-천천교-꽃뫼양지교-화산교-새싹교 등 17개나 됩니다. 여기에 징검다리 등 간이 다리를 더하면 25개는 족히 될 것 같습니다.

 

  이목2교에서 내려선 서호천 우안의 천변길을 얼마 걷지 않아 이내 징검다리를 건넜습니다. 산책 중인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는 좌안길을 따라 걸어 배다리교를 지나자 하천 건너로 해우재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이목천이 서호천으로 흘러드는 합류점과 배다리쉼터 건물이 보였습니다. 작은 보와 돌계단을 지나 흘러내려가는 서호천을 따라 걸어가다가 비산 공사, 소음 공해, 살인공사를 당장 멈추라는 고층아파트의 벽보를 보고 소음이 바로 공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버드나무 몇 그루가 운치를 더해준 서호천 물가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물오리들을 지켜보자 아등바등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다 싶어 오리들이 부러웠습니다.

 

  1531분 만석거에서 흘러내려오는 영화천이 서호천과 만나는 합류점인 한마루교 아래를 지났습니다. 대월교에 조금 못 미쳐 서호천 초기우수처리시설 안내도를 보고나서 서호천 물이 맑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초기우수처리시설이란 도로, 상가, 주택 등 불특정장소에서 발생하는 오염농도가 높은 초기 우수(합류식 하수 월류수 포함) 처리를 위하여 여과재를 통해 정화시켜 하천으로 방류하여 수질을 개선하는 시설로, 서호천에 11곳에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호천에서 유영하는 물오리가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은 이 하천에 유입되는 물이 초기우수처리시설을 거치면서 많은 물고기들이 살아갈 만큼 충분히 정화되었음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대월교를 거쳐 다다른 한마루교 바로 아래가 영화천/서호천의 합류점으로, 이 합류점을 지나자 돌과 널빤지로 다리를 놓은 이색적인 징검다리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수원화서교회를 거쳐 천천교와 꽃외양지교를 차례로 지나 앙상한 갈대 몇 그루가 쓸쓸히 천변을 지키고 있는 모습들을 보자 저도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천변길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 제가 걷고 있는 천변 길이 모수 길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원팔색길의 하나인 모수길이란 물길의 근원이다 하여 백제시대부터 모수국이라 불렸던 수원의 대표적인 하천인 서호천과 수원천을 따라 낸 길로 도심 속의 자연환경을 만끽할 수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라 합니다.

 

  수원팔색길이란 수원이 지닌 8()의 의미를 담아 수원시의 곳곳을 연결하여 만든 길로 수원의 자연,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모수길, 지게길, 매실길, 여우길, 도란길, 수원둘레길, 요행길과 화성성곽길을 총칭하는 수원팔색길 중 제가 전 구간을 걸은 길은 화성성곽길 뿐입니다. 이번에 들어선 모수길도 전 구간이 아닌 몇몇 구간만 따라 걷고자 하는데, 이는 제가 따라 걷는 길이 팔색길 전부가 아니고 주요 하천을 따라 걷는 길이어서 그렇습니다.

 

  화서역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곳에서 제방으로 올라서 수원성감리교회를 지나자 천변은 잡목과 숲 넝쿨로 덮여 지금까지 걸어온 천변길과 달랐습니다..

 

  169분 새싹교를 건너 서호저수지 서안길로 들어섰습니다. 애당초 뜻한 바는 해발 104m의 여기산 중턱에 자리한 우장춘 박사묘지를  참배하는 것이었으나 선거연수원에 길이 막혀 포기했습니다. 서호자수지 서안길을 걸으며 제가 놀란 것은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흰뺨검둥오리가 이 저수지에 모여들어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서호저수지가 흰뺨검둥오리와 가마우지의 철새도래지가 된 것은 섭씨13도의 따뜻한 물이 상류에서 유입되면서 한 겨울에도 저수지가 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급수 이상의 깨끗한 물에서 살고 있는 민물가마우지가 서호저수지에서 살고 있는 것은 이 저수지가 그만큼 깨끗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둥오리, 중대백로, 물닭, 큰기러기와 뿔논병아리들도 이 저수지에 살고 있습니다.

 

  농진청 국립식량과학원을 지나 서호저수지 남단에 자리한 정자 항미정(杭眉亭)을 들렀습니다.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朴綺壽, 1774~1845)가 창건한 항미정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시구 서호는 항미 같다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항미정을 둘러보고 색다르다 싶었던 것은 북쪽 끝에서 서쪽으로 두 칸의 공랑(公廊)을 붙인 것입니다. 여기 항미정은 1908년 순종 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능행을 했을 때 들러 차를 마신 곳으로 2021년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승격되었다고 안내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항미정을 출발해 서호저수지의 수문 위에 놓인 축만교(祝萬橋)를 건너 남쪽 제방 축만제(祝萬堤) 위를 걸었습니다. 축만제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축만제가 단순한 제방이 아니고 아래 글과 같이 서호 저수지를 이르는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 안내문에 따르면 축만제는 1799년 조선 국왕 정조가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길이 1,246, 너비 720척이라는 당시로서는 최대 크기로 조성한 저수지를 이릅니다.

 

  “정조는 1795년에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萬石渠),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군처에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했었다.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이 크게 성공하자 정조는 만석거와 만년제의 3배 규모에 달하는 축만제를 조성하였고,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수익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으로서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로 불린다. 정조 시대의 농업기반시설은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勤業模範場), 해방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 설립으로 이어졌고,' 수원은 20세기 농업중심지가 되었다. 축만제의 가치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11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축만제 아래 잘 정비된 넓은 논은 일제강점기의 권업모범장이 아니었나 싶은데,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1720분 화서역에 도착해 서호천 1구간의 따라 걷기를 전부 마쳤습니다. 서호저수지 남쪽의 축만제 제방길을 건너 서호 동안의 산책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서호저수지를 한 바퀴 빙돌아 다시 새싹교에 다다른 시각은 176분이었습니다. 산책 나온 한 분께 여쭈어 확인한 대로 육교를 건너 화서역에 도착하자, 이내 광운대행 1호선 전철이 도착해 이 전철을 타고 귀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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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호천을 따라 걷는 길에 제가 서호 인근의 여기산에 자리한 우장춘박사의 묘지를 참배하고자 했던 것은 제가 본관이 같은 단양우씨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가 일본에서 출생한 것은 일본군의 명성황 시해를 방조한 부친 우범선(禹範善)의 일본 망명 때문입니다. 우범선은 1895년 을미사변 때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휘하 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하여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것을 방조한 죄로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듬해 아관파천으로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동경에 살면서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와 결혼하여 재기를 꿈꾸던 중 190312월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인 우범선과 일본인 사카 사이에 태어난 우장춘은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습니다. 1916년 전문대학인 도쿄제국대학실과에 들어가 1919년 졸업한 후 바로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했습니다.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한 우장춘은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했습니다.

 

  1950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한 우장춘박사는 1959년에 사망하기까지 만9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 중앙원예기술원장 · 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면서 채소 종자의 국내 자급문제를 해결했고, 무균종서(無菌種薯)의 생산으로 6·25전쟁 이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국해서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조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한 우장춘 박사는 우씨 가문의 의 명예를 같이 드높여 자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정부는 1959년 우장춘 박사가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해를 수원시에 소재했던 구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麗妓山)에 안장해 예를 다했습니다. 매년 810일이면 제자들과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는데 저는 이제껏 묘지를 찾아가 한번도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대역죄를 평생의 업보로  지고 살면서도 우리나라 육종학을 반석으로 끌어올린 우장춘 박사를 기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글을 올립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