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원천리천 따라 걷기

원천리천 따라 걷기2(매탄권선역–곡선1교-원천리천/황구지천합류점)

시인마뇽 2026. 1. 25. 14:24

탐방구간: 매탄권선역곡선1-원천리천/황구지천합류점

탐방일자: 2026. 1. 23()

탐방코스: 매탄권선역-곡선1-대성교-원천리천/황구지천합류점-화산교-병점역

탐방시간: 1424-1737(3시간13)

동행      : 나 홀로

 

 

 

  이번 원천리천 탐방으로 수원시의 4대 하천 따라 걷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총 하천 길이가 약 90Km에 달하는 4대 하천을 탐방하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은 조선조 22대 국왕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수원시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5)의 둘째 아들인 장현세자(일명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조가 세손으로 책봉된 것은 1759년입니다. 3년 후 장현세자 즉,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음을 당하자, 정조는 요절한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영조의 죽음으로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조선의 르네쌍스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 현군(賢)입니다.

 

  정조의 수원과의 인연은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의 영우원(지금의 서울 휘경동)에서 화산(지금의 화성)의 헌륭원(지금의 융릉)으로 이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조는 재위 중에 총12회에 걸쳐 헌륭원으로 능행을 했는데, 그때마다 수원의 화성행궁을 들러 묵어갔습니다. 정조가 헌륭원으로 능행할 목적으로 화성 안에 건립한 화성행궁은 평상시에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국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인 행궁(行宮)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화성행궁입니다. 전체 557칸 규모의 화성행궁은 정조 20년인 1796년에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의 영우원(永祐園)에서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개명했습니다. 정조는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고을 명칭을 수원부에서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습니다. 화성이 다시 수원군으로 개칭된 것은 1895년의 일입니다. 정조는 수원 도읍을 화성으로 옮기고 1793년 성곽 화성을 축조하기 시작해 1796년에 완공했습니다. 성곽의 길이가 5.4Km에 이르는 화성을 축성하는데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28개월만인 1796년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사 총괄을 맡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25-1825)이 설계를 제대로 하고 거중기를 발명해 활용하는 등으로 공사효율을 높여서였습니다.

 

  정조는 이에 더하여 농업용수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수원에 축만제와 만석거 등 저수지도 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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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들어 날씨가 조금 풀린 것 같아 원천리천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이번 나들이로 수원시의 4대하천 탐방을 모두 마친다는 설렘을 안고 원천리천 마지막 구간의 탐방길에 올랐습니다. 산본 집을 출발해 수인분당선의 매탄권선역까지는 전철로 이동했습니다.

 

  1426분 매탄권선역을 출발했습니다. 매탄권선역사거리를 지나 백년교를 건넌 후 오른쪽으로 꺾어 원천리천 좌안길로 내려섰습니다. 길바닥에 눈이 조금 남아 있는 곳이 있어 혹시라도 넘어질까 두려워 조심해서 걸었습니다. 신동수변공원보도육교를 지나자 하천 건너에 자리한 3층 건물의 지혜샘 어린이도서관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1955년에 입학해 다녔던 초등학교에는 도서관이 없었습니다. 중학교에는 도서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용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서울로 유학을 가서 다닌 고등학교의 도서관이 제가 가본 첫 번째 학교도서관인 것 같습니다. 이때 시작한 도서관 이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읽은 도서는 거의 3천권에 이르며,  2006년에 만든 블로그에 독후감을 올린 도서만도 거의 1,800권에 달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책들을 읽고 얼마나 지혜를 얻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쳤으면서도 저보다 책을 더 좋아해 매번 5일장을 찾아가 아야기 책을 빌려다 읽으신 어머니가 특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은 저보다 독서를 통해 훨씬 많이 지혜를 터득하셨으리라는 것입니다.

 

  백년교에서 십여분을 걸어 곡반정교에 이르자 더 이상 천변 길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곡반정교 길로 올라가 2개의 뾰쪽 탑이 선명하게 보이는 건너편의 교회를 사진 찍은 후 덕영대로를 건넜습니다. 롯테캐슬 아파트 단지에서 길 건너 제방에 조성된 소공원 길을 걸어 곡반정1교를 지났습니다. 이내 도착한 무명천/원처리천 합류점에서 길이 막혀 바로 곡선1교로 가지 못하고 왼쪽의 아파트단지로 빙 돌아갔습니다.

 

 

  1554분 곡선1교에 다다랐습니다. 백년교에서 이어온 원천리천 따라 걷기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하천에서 벗어나 카카오맵이 가리키는 대로 아파트 단지 길로 들어섰습니다. 글빛초등학교 앞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반정아이파크캐슬 아파트단지를 지났습니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다다른 중국집 나래궁 앞에서 오른쪽의 골목길을 따라가 무명천/원천리천 합수점에 다다라서야 40분 가량 걸리는 아파트단지 길로 빙 돌아가지 않고 바로 무명천을 건너 곡선1교에 다다를 수 있는 좁은 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원천리천표지판이 세워진 합류점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곡선1교를 사진 찍고나서 원천리천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원천리교를 지나 대성교로 이어지는 원천리천의 남서쪽 제방 길은 공장지대 바로 옆에 길이 나 있어 시내에 조성된 하천의 천변길을 걸을 때와는 달리 오가는 회물차들이 많아 신경이 쓰였습니다. 곡선교를 지나 떼 지어 유영하는 오리들을 보고 해가 떨어지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하천길을 따라 걸으며 저녁 시간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청둥오리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공단 옆 하천인 원천리천의 물이 맑아 물에 잠긴 모래들이 선명하게 보여 의외다 싶었습니다. 이는 공장폐수를 처리하는 하수괸을 별도로 묻어 관리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수원자원과 곡선교를 차례로 지나 대성교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길이 끊기지는 않는지 걱정했는데, 제방 길이 계속 이어져 다행이었습니다. 

 

 

  1643분 원천리천/황구지천 합류점인 황계교에 다다랐습니다. 대성교 앞에서 좌회전해 경수대로를 따라 진행해 SK LPG 충전소를 지나자 왼쪽 아래 반정지하차도로 이어지는 계단 길이 보였습니다. 빈정지하차도를 건너 다다른 정조로 앞에서 왼쪽으로 진행해 금강유리 앞에서 길을 건너 황계지하차도를 지나 수원천과 원천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이 곳은 지난 달 수원천을 따라 걸을 때 온 곳이어서 눈에 익었습니다. 원천리천이 황구지천으로 흘러드는 합수점은 황계교 다리 아래인데 이 다리 북쪽은  모두 펜스로 가려져 합류점을 사진 찍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황계교를 찾아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만, 이 다리를 건너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3년전 황구지천을 따라 걸을 때는 이 다리 서쪽 끝에서 원천리천 천변으로 접어들어 우안길을 걸었고, 지난 달 수원천을 따라 걸을 때는 동쪽 끝에서 천변길로 들어서 좌안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언제 다시 이 다리를 찾아오랴 싶어 황계교를 건너 황구지천 우안길로 들어섰습니다. 방금 건넌 황계교 아래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것은 원천리천과 황구지천의 합류점이 선명하게 보여서였습니다

 

 

  1737분 병점역에 도착해 청량리행 전철에 올랐습니다. 황계교를 출발한지 20분이 조금 못되어 화산교를 건너 직진해 번정천 위에 놓인 통진교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자 깔끔한  화산생태공원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주인을 따라 나선 반려견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적에 파묻혔을 화산공원을 오른 쪽에 두고 병점역을 향해 남진했습니다.

 

  이번에도 해 떨어지기 전에 탐방을 끝내려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산본 집을 떠날 때는 이번 코스는 짧아 서두르지 않아도 해가 지기 전에 충분히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아파트 단지 길로 돌아가느라 40분가량 더 걸려 서둘러 진행했습니다. 화산생태공원 주차장을 지나 병점역으로 가는 길에 차디찬 바람을 맞은 것은 해 질 무렵 기온이 내려가면서 공기의 이동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 지기 10여분 전에 병점역에 도착해 곧바로 청량리행 전철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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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수원에 행궁을 짓고 화성을 축성한 것은 헌륭원에 안장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정조는 지극한 효심으로 거금 87만냥을 들여 수원에 화성을 쌓았습니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제작해 공사 기간을 단축한 덕분에 공사비용을 많이 줄였으나, 예전과 달리 기술자나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했고,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적대주, 누조주, 공심돈주, 포루 등과 같은 새로운 시설을 도입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정조가 이 큰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1661년부터 약60년간 조선이 청과 일본간의 중계무역으로 번 돈이 남아 있어 가능했습니다. 명이 망한 후 청의 강희제는 명의 부활을 도모한 정성공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봉쇄하기 위해 1661년 푸젠성에서 산둥성에 이르는 장대한 중국 연안의 주민을 15Km안의 내륙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에 정성공 세력은 타이완으로 들어가 거점을 삼고 청에 대항했습니다. 이 격동의 군사적 정세로 인해 조선왕조는 이후 60년간 청과 일본간의 무역을 중계해 이익을 듬뿍 누리게 되었다고 이영훈교수는 저서 한국경제사1에서 밝혔습니다. 조선이 중계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이 얼마인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정조가 화성을 축성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정조가 선정을 펼쳤다고는 하나 많은 백성들이 살 만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살았는가는 1792년 북청부사로 있던 성대중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갑민가를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갑민은 원래 서울의 문벌 좋은 집안 출신으로 변지로 쫓겨나 향직도 빼앗기고 서민으로 몰락한 사람들을 이릅니다. 윤덕진 · 손종흠 두 교수는 저서 고전시가강독에 실린 갑민가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습니다.

 

  “신역을 물려고 채삼과 사냥 나가서 겪는 고초를 실감나게 제시한다. 산삼을 캐어 왔으나 관에서는 신역을 돈피 외에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다시 돈피를 사러 간 새에 아내는 관가에 끌려가 옥 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노부모는 기절하고 아이들은 울부짖는 참상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고을(북청)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말한다. 그리고 결사를 통해 본사에서 제시한 갑산고을의 학정을 재확인한다.”

 

  갑산고을의 학정을 고발한 가사 갑민가는 정조가 재위 중에 지어졌습니다.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는데 들인 거금을 백성들의 구휼과 산업 발전에 썼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거금을 들여 축성한 화성이 그 후 목적에 맞게 전쟁 때 요긴하게 쓰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입니다. 정조가 거금을 들여 화성을 축조한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이었는가는 한번 따져볼 만한 일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