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산행기(2)
*산행일자:2018. 3. 29일(목)
*소재지 :충남 부여/보령
*산 높이 :조루봉575m
*산행코스:무량사-능선삼거리-조루봉-전망대
-약수터-성주산자연휴양림-주차장
*산행시간:11시23분-15시20분(3시간57분)
*동행 :서울사대 김종화, 이상훈, 우명길동문
실로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청량리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원주로 가서 치악산을 오른 것이 대학 3학년 때인 1970년 가을이었으니 기차여행을 함께 하는 것은 거의 반세기 만의 일입니다. 1968년 같은 대학에 입학해 4년을 같이 화학을 공부하고 그 연을 놓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온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은 더 소중한 집사람과의 인연도 23년 만에 내려놓아서입니다. 70줄에 접어들기까지 건강을 잘들 관리해 함께 산을 오르고, 또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설령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느냐는 공자님의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여행은 동행한 무심거사(無心居士) 이상훈 군이 제 산행기를 읽고 무심사(無心寺)를 탐방하겠다고 나서 이루어졌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는 천년고찰이 무심사(無心寺)가 아니고 무량사(無量사)라는 것을 안 것은 기차 안에서 등산지도를 보고나서였습니다. 충남 부여의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조선 초기 5세 신동으로 널리 알려진 방외문인 매월당( 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부처님을 모시며 살았던 곳입니다. 제가 실수로 절 이름을 잘못 올려 마치 속아서 이루어진 여행처럼 돼버렸지만, 48년 만에 대학4년의 추억을 반추하는 모처럼 만의 기차여행이어서 즐거움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대천 역에서 하차해 지근거리의 버스종합터미널을 들러 김밥을 몇 줄 사고 나서 택시를 잡아타 무량사로 이동했습니다. 외산을 지나 무량사로 가는 길을 무심거사가 눈에 익다고 한 것은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어내 많은 여행가들을 인문기행에 빠지게 한 유홍준님이 기거하는 부여의 휴휴당(休休堂)을 몇 년 전에 들른 것이 생각나서라 합니다. 반교리 돌담마을에 자리한 휴휴당은 유홍준님이 닷새는 도시에서 생활하고 이틀은 시골에서 머무는 5도2촌의 생활을 꿈꾸며 지은 집이라하니 이름 그대로 느긋하게 쉬어가기 딱 좋겠다 싶었습니다. 무량사 입구에 도착해 일주문을 들어서자 색 바랜 단청이 눈을 끌어 이 절이 함께한 세월의 두께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되었습니다. 이 절에 영정이 모셔진 매월당 김시습 선생에 인사의 예를 올린 후 산행 길에 오르고자 아쉬운 마음으로 천년고찰 탐방을 마쳤습니다.
11시23분 무량사를 출발했습니다. 반시간 넘게 무량사(無量寺)를 둘러본 후 일주문으로 돌아가다 중간에 오른쪽으로 나 있는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오른쪽 위로 꺾인 길을 따라 몇 걸음 오르지 않아 다소곳이 꽃을 피운 진달래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오름 길은 내내 가팔랐으나, 동행들과 담소하면서 천천히 걸어올라 힘든 줄 몰랐습니다. 십 수분을 오른 후 잠시 멈춰 서서 자켓을 벗은 것은 기온이 오른 데다 중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운동을 해 땀이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등산이 운동이 되는 것은 중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서라면 최고의 등산가는 시지프스 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커다란 바위를 중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굴려 올리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기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에 젊어한 때 매료된 것은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문학에서 시지프스를 이 세상에 던져진 실존의 표상으로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오름 길에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숫돌의 검은 원석(?)이 보았습니다. 무량사 출발 1시간 후인 12시 23분에 1.1Km 거리의 능선삼거리에 도착한 것은 오름 길이 된비알길이어서 그랬습니다.
13시18분 만수산의 정상인 해발 575m의 조루봉에 올라섰습니다. 능선 삼거리에 설치된 넓은 평상에 앉아 잠시 쉬면서 김종화군이 챙겨 온 사과와 쵸코렛으로 에너지를 보충했습니다. 장군봉으로 가는 왼쪽 길은 출입이 금지되었고, 그 반대방향으로 정상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어 이 길을 따라 북진했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북쪽으로 2.3Km 가량 떨어진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대체로 평탄해 걷기에 좋았습니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가려 침침하고 조망되는 바가 없었지만 아무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없어 이날 하루는 저희가 산 전체를 전세 내어 산행한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480m봉을 넘어 조루봉으로 가는 길에 “이 일대는 폐광된 탄광의 채굴 갱도로 인한 지반침하우려구역이오니 통행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석탄산업합리화 사업단의 안내판을 보았습니다. 북쪽으로 더 걸어가 정상석이 세워진 조루봉에 올라서자 14년 전 과천 분들과 함께 이 산에 올랐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정북 방향으로 보이는 먼발치의 높은 봉우리가 18일 전에 올랐던 성주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임을 확인하고, 정상에서 전망대 쪽으로 조금 내려가 점심을 들었습니다. 반시간 가량 이어진 점심시간이 즐거웠던 것은 아직은 기억력이 쇠퇴하지 않아 40-50년 전의 일을 오늘에 되살려 화두로 올릴 수 있어서였습니다.
15시20분 성주산 휴양림 주차장 앞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13시53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수산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전망대 쪽으로 진행하면서 지반침하우려 안내문을 또 보고 나자 2004년 겨울 이 지대를 지나고 나서 쓴 제 산행기 일부가 생각났습니다. 전망대를 지나자 나뭇가지를 전지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일하는 분들에 물어보았습니다. 전지작업은 재선충 병에 감염된 소나무를 잘라내는 것이고, 잘라낸 소나무 가지는 자주형파쇄기에 넣어 분쇄를 하는데 이때 재선충이 살아서 퍼져나가지 않도록 액체 상태의 약을 살포한다 합니다. 윙윙대는 큰 소리는 전기톱과 파쇄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는데 사람이나 새들에 엄청 시끄럽게 들리는 이 소리가 재선충에도 그리 들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임도사거리에서 왼쪽 아래 성주산 휴양림으로 이어지는 하산 길은 널찍한 임도인데다 시간도 넉넉해 느긋하게 걸어 내려갔습니다. 길가 약수터에서 도롱뇽을 보고 반가워 사진 찍어왔습니다. 제가 도롱뇽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은 어느 환경단체가 이 생물체를 대신해 우리나라 최초로 민사소송을 건 일 때문이 아니고, 어른들을 따라 골짜기 논으로 가서 도랑에 살고 있는 도롱뇽을 갖고 놀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였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 노란 복수초가 무리지어 핀 꽃을 보았고 길가에 몸을 드러낸 노천석탄도 보았습니다. 성주산휴양림을 걷는 기쁨은 길가에 세워진 시비(詩碑)들에서 주옥같은 명시를 읽는 것입니다. 서정주 선생의 ‘추천사’와 신동엽 선생의 ‘껍데기는 가라’는 두 시는 서로 결이 다르지만 시비는 이 산에 함께 세워져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성주산 자연휴양림의 주차장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린 후 택시를 불러 대천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래는 2004년 지반침하 경고문을 보고 장난기가 동해 쓴 글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14년 전의 제 생각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다시 여기에 올립니다.
조루봉-전망대 능선에 세워진 안내판에 이 산이 폐광지라서 가라앉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 실렸는데 이를 보자 이 만수산의 과거사를 규명하고 싶은 장난기가 동했습니다. 정치권에서 시도하는 과거사규명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고자 고대사를 규명하는 일이 아니기에 일본의 강점기부터 대상이 된다합니다. 저 역시 만수산의 과거사규명은 이 산의 형성을 알아보는 지질학적 접근이 아니라 만수산의 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정도로 그치고자 합니다. 하더라도 정치권의 과거사 규명이 상을 주자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는 것처럼 저의 만수산과거사규명도 그 죄상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만수산의 과거사를 규명해보니 그 죄상이 다음과 같이 밝혀졌습니다. 첫째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제 육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몸 속으로 갱도라는 길을 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인간들의 강권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다는 당시의 상황논리로 만수산은 제 몸에 길을 내고 제 살을 퍼 내가도록 방치한 점을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시기를 살아 온 다른 산들은 지금도 멀쩡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필이면 보통의 흙이 아니고 석탄으로 살을 만들었냐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따뜻하게 살아보고자 만수산의 몸 속에서 파낸 살을 태워 한반도의 공기를 오염시킨 데 대하여 준엄한 역사의 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속에서 캐낸 것이 천연가스였다면 지구를 데우면서도 오염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이면 석탄으로 살을 만들어 한반도를 오염시킨 점은 설혹 채광기간 중 그 공이 있다 해도 중죄임에 틀림없습니다. 셋째 채광이 끝난 후부터 산을 오르는 산 꾼들에 산이 가라앉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을 세워 겁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소시민들이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건강 지키기 프로그램이 등산인데 만수산이 이 소시민들을 받쳐주지 않고 가라앉는다면 이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불법 파업을 자행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법으로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정도면 만수산의 유죄를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만수산의 과거를 규명했느냐,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에 생각이 머물자 답이 궁해졌습니다. 제가 무슨 역사의식을 갖고 만수산의 과거사를 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수산과 마찬가지로 제 과거사를 누가 캐낸다면 저 역시 중벌을 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고 갈파한 E.H.카의 탁견을 새삼 새겨보는 것은 과거사를 규명하는 목적이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교훈을 찾아내는 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산행사진>
만수산(1)
*산행일자:2004.12.12일
*소재지 :충남 보령/부여
*산 높이 :575미터
*산행코스:성주산휴양림주차장-시비조각공원-전망대
-정상조루봉-비로봉-만수마을회관
*산행시간:9시57분-13시37분(3시간40분)
*동행 :과천시산악연맹
어제는 충남 보령과 부여를 경계짓는 나지막한 만수산을 올랐습니다. 과천시 산악연맹의 송년산행으로 오른 만수산은 석탄을 캐냈던 폐광지로 아직도 곳곳에 채광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길 양옆에 시커먼 흙이 드러나 있고, 계곡을 건너 갱도입구가 보였으며 산이 가라앉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차들이 다녀도 좋을 만큼 고개 마루까지 길이 잘 닦여 있었습니다.
아침 9시57분 보령시 성주면의 성주산 휴양림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매표소에서 주차장까지 차창 밖으로 내다 본 휴양림은 고고하고 깨끗하게 잘 자란 소나무들로 그 풍광이 돋보였습니다. 시비조각공원에 다다르자 정 한모님의 시“어머니”가 저의 눈을 끌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로 시작되는 이 시처럼 자식들을 진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어머니들이 흘렸을 눈물이 얼마나 될지 헤아리기 쉽지 않을 듯 싶습니다. 바쁘게 산을 오르느라 한국의 현대시를 일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10시48분 고개마루 쉼터에 오르자 사방이 조망돼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한 여름이라면 햇빛을 가릴 나무가 없어 땀 깨나 흘렸을 포장도로를 25분간 오르자 흙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산악회와의 산행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어느 분이 하모니카를 연주해 힘드는 줄 모르고 그 흙 길을 걸어 고개마루에 올라섰습니다. 산을 오르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음량도 충분했고 연주솜씨도, 선곡도 모두 좋았습니다. 휴대하기 간편하고 이름그대로 자연과 하모니를 잘 이루기에 저도 대학시절 산에서 야영을 할 때는 하모니카를 가지고 가 즐겨 부르곤 했습니다.
11시9분 해발 575미터의 만수산 정상인 조루봉에 도착했습니다.
충남 부여시에서 세운 표지석에 배낭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 등정을 기록했습니다. 비로봉을 거쳐 하산하기로 마음을 먹고 500미터 떨어진 전망대로 되돌아갔습니다.
조루봉-전망대 능선에 세워진 안내판에 이 산이 폐광지라서 가라앉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 실렸는데 이를 보자 이 만수산의 과거사를 규명하고 싶은 장난기가 동했습니다. 정치권에서 시도하는 과거사규명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고자 고대사를 규명하는 일이 아니기에 일본의 강점기부터 대상이 된다합니다. 저 역시 만수산의 과거사규명은 이 산의 형성을 알아보는 지질학적 접근이 아니라 만수산의 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정도로 그치고자 합니다. 하더라도 정치권의 과거사 규명이 상을 주자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는 것처럼 저의 만수산과거사규명도 그 죄상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만수산의 과거사를 규명해보니 그 죄상이 다음과 같이 밝혀졌습니다. 첫째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제 육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몸 속으로 갱도라는 길을 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인간들의 강권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다는 당시의 상황논리로 만수산은 제 몸에 길을 내고 제 살을 퍼 내가도록 방치한 점을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시기를 살아 온 다른 산들은 지금도 멀쩡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필이면 보통의 흙이 아니고 석탄으로 살을 만들었냐는 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따뜻하게 살아보고자 만수산의 몸 속에서 파낸 살을 태워 한반도의 공기를 오염시킨 데 대하여 준엄한 역사의 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몸 속에서 캐낸 것이 천연가스였다면 지구를 데우면서도 오염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필이면 석탄으로 살을 만들어 한반도를 오염시킨 점은 설혹 채광기간 중 그 공이 있다해도 중죄임에 틀림없습니다. 셋째 채광이 끝난 후부터 산을 오르는 산 꾼 들에 산이 가라앉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을 세워 겁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소시민들이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건강지키기 프로그램이 등산인데 만수산이 이 소시민들을 받쳐주지 않고 가라앉는다면 이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불법 파업을 자행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법으로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정도면 만수산의 유죄를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만수산의 과거를 규명했느냐,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에 생각이 머물자 답이 궁해졌습니다. 제가 무슨 역사의식을 갖고 만수산의 과거사를 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수산과 마찬가지로 제 과거사를 누가 캐낸다면 저 역시 중벌을 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고 갈파한 E.H.카의 탁견을 새삼 새겨보는 것은 과거사를 규명하는 목적이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교훈을 찾아내는 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11시15분 되돌아온 전망대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로봉으로 내 달렸습니다.
많은 대원들은 정상에서 바로 무량사로 하산하는데 저는 이 코스가 너무 짧은 것 같아 비로봉을 거쳐 우회하는 먼 길을 택해 저 혼자 고즈넉한 능선 길을 밟았습니다. 산중의 고요함을 시샘하듯 새들이 짖어대어 정적을 깨는가 싶더니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와 자연의 청음과 기계음의 탁음이 어떻게 다른 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12시2분 해발 563미터의 비로봉에 도착, 짐을 풀고 귤을 들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비로봉을 바로 오르지 않고 트래파스를 해 다다른 안부에서 5백미터를 반대방향으로 올라갔다 다시 안부로 되돌아오느라 30분 가량 지체되었지만 안부에서 비로봉까지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걸으며 땀을 빼 온 몸이 개운했습니다. 해발 460미터대의 무명봉에서 남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무명봉에서 도솔암까지 거리가 1.8키로가 된다하니 서둘러도 13시까지 만수리주차장에 대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돼 회장등 집행진에 먼저 출발하라고 전화를 시도했으나 통화가 안되어 기사 분에 전언을 부탁했습니다.
13시26분 무명봉에서 능선을 따라 50분을 걸어 다다른 안부에서 우측으로 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안부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만난 노부부 두 분에 물어 하산 길을 확인했습니다. 어차피 시간 내에 도착하기는 글러 만수리에서 성주면소재지까지 택시로 이동하기로 작정한 터라 하산속도를 조금 늦추고 이제까지 올라선 봉우리들과 걸어온 능선 길을 되돌아보고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또 한차례 집행진에 전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난감해 하는 중 전임회장께서 전화를 해와 버스는 먼저 출발하고 음식점에 가서 봉고차를 보낼 터이니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13시40분 만수리 마을 회관에 도착해 버스에 올라 타 약 4시간의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음식점에 봉고가 없어 도중에 차를 돌렸다 하니 모든 대원들에 고맙고 죄송했습니다. 비로봉을 바로 오르지 않고 트래파스를 해 역방향으로 오르내리느라 30분을 까먹어 본의 아니게 모든 분들에 기다리는 괴로움을 드렸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인종의 역사를 살아온 분들이 바로 저희들의 어머니입니다. 정한모 님의 시 “어머니”를 올리며 산행기를 맺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의 광명을 몰아 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신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만수산>
'VIII.지역 명산 > 지역명산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C-4.장성봉 (0) | 2007.01.03 |
---|---|
C-3.칠보산 (0) | 2007.01.03 |
C.충청 C-1.광덕산 (0) | 2007.01.03 |
B-7.두류산 (0) | 2007.01.03 |
B-6.매화산 (0) | 2007.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