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기(2)-고마움의 탑을 쌓아가며
1973년 여름 디스크 수술 차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일기를 쓴지 35년 만에 다시 병상일기를 씁니다. 지난 10월24일 저 혼자서 강원도 춘천과 화천을 경계 짓는 용화산을 오르는 중 바위에서 떨어져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쳤습니다. 별 수 없이 평촌의 한림대 성심병원에 입원하여 35년 전에 수술 받은 요추부위를 다시 수술 받고 그 위 골절된 흉추를 치료받느라 4주간을 병상에서 보냈습니다. 틈틈이 기록해둔 메모를 바탕으로 병상일기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35년 전에 직립에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자 일기를 썼듯이, 이번에는 사고 후 퇴원하기까지 도와주시고 염려해주신 많은 분들로부터 받은 고마움을 탑으로 쌓아가기 위해서입니다.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자 용화산에서 다친 허리가 엄청 아팠다.
어제 허리를 다치게 된 사고경위는 이렇다. 용화산과 오봉산을 가르는 안부인 배후령을 출발한지 3시간 반이 지나 다다른 용화산의 암릉지대에서 로프를 잡고 암봉에 올라 한 숨을 돌린 후 높이 2m 가량의 바위를 내려가다가 왼쪽 발을 잘못 내딛어 균형을 잃는 바람에 경사가 70도 이상 되는 절벽 아래로 10m(?) 가까이 굴러 떨어졌다. 이 사고로 흉추 세 곳과 요추 두 곳이 골절되는 등 척추를 크게 다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나 혼자만의 단독산행이라서 누가 대신 연락할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다행히도 휴대폰이 터져 119에 구조요청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2시간 후에 춘천소방서의 산악구조대에 구조되어 헬기로 이송되었다. 춘천소방서에서 한림대춘천병원의 응급실로 옮겨 X-ray를 찍고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했지만 타박상외에는 달리 다친 데가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라 해 내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온 고교후배 정병기사장의 차를 타고 산본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허리가 잘라지는 것처럼 통증이 심했고 앞가슴도 누구에게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춘천의 젊은 의사선생이 얘기한 대로 별 것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실제 상황은 그 반대로 악화되어 이대로 집에 머물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인덕원에 사는 큰아들에 전화를 걸어 사고상황을 사실대로 설명하고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아들의 도움으로 며느리가 근무하는 평촌의 한림대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X-ray와 CT촬영을 마친 후 오후 들어 정형외과 910호 병실에 입원했다. 여기 응급실의사선생들도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해 춘천병원의 의사선생과 같은 소견을 내놓았으나 통증이 전혀 줄어들지 않아 일단 입원하고 월요일아침 교수 분의 최종독해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들이 며느리와 오후4시경 처 외조모의 팔순잔치에 참여하고자 자리를 비어 혼자서 고통스런 병상의 첫 밤을 보냈다. 고통속에서도 8년 전에 암으로 먼저 간 집사람이 생각났다. 암으로 밤마다 더해지는 통증을 견뎌내는 그녀를 지켜보기가 무척 안쓰러웠는데 곁에 있음이 행복임을 알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늘의 나보다 훨씬 더 안온했던 것 같다.
*10월26일 일요일
밤새도록 척추 통증으로 고생하다 새벽2시에 진통제를 맞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아침7시가 조금 못되어 사대동창 김종화 친우가 조금 늦게 잠실종합운동장역에 도착할 테니 기다려 달라는 전화를 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고교동창들과 약속한 가야산 산행일이다. 친구에 사고경위를 간략히 설명하고 잘 다녀오라고 전화를 하면서 앞으로 상당기간 산행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동안 열심히 산행을 준비해온 나로서는 단풍나들이를 나서는 친구들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었다. 재작년 10월 이규성 교수의 주선으로 공룡능선을 타고자 경동고24기 7명이 설악산을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어, 모임이름을 명백회로 정하고 서중원군을 회장으로 뽑고 내가 산행을 맡아 안내하는 것으로 해서 산림청에서 선정한 명산100산을 매 분기마다 한 산씩 오르기로 했다. 이번 9번째 오르는 가을분기의 명산은 경남합천의 가야산으로 정했다. 명산100산을 성공적으로 모두 다 오른다면 그때 우리들 나이가 80세를 막 넘어설 것이니 이만한 건강프로그램이 어디 있겠나 싶어 자랑스럽기도 한데 사고로 같이 산행을 할 수 없게 되자 아쉽기 그지없었다.
축구를 하다 인대가 늘어나 걷기가 부자연스러운 막내아들이 와서 오전의 병상을 지켰고 저녁 무렵 큰아들이 와 휠체어를 타고 바깥바람을 쐬러 원내 공원을 다녀왔다. 입원실이 6인실이라서 시끌벅적해 좋기는 하다만 밤늦게까지 TV를 크게 켜놓아 그 소음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진통제를 맞았어도 통증으로 잠 못 이루기는 어젯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0월27일 월요일
아침8시경 간병인 아주머니가 오셨다.
큰아들이 출근하는 낮 동안 거동이 힘든 나를 돌봐줄 간병인을 구한 것이다.
내생각대로 다친 정도가 그리 녹녹치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담당 김용찬교수께서 내 X-ray를 판독한 결과 흉추와 요추가 골절되고 인대가 파열되어 심각한 상황이니 절대로 일어서지 말고 내일 MRI 사진을 찍은 후 모레 수술을 들어가야 한다고 며느리아이에 일러주셨다.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은 내 통증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응급실 젊은 의사들의 진단이 결과적으로 오진으로 밝혀져 약간은 씁쓰레했다.
경동동문산악회의 송기훈부회장과 유한준 후배사장이 문병을 왔다.
뒤이어 가야산을 다녀온 김종화/정준식 두 동기들이 문병 와 산행 담을 들려주었다. 이들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만이라도 통증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병세의 심각성을 인지한 아들이 하루 종일 간병할 아주머니를 새로 구해 저녁부터 이 분에 간병을 맡겼다. 대변은 나오지 않았지만 소변은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처리했다. 진통제 주사를 세 번 맞고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
*10월28일 화요일
진통제 주사를 맞고 누워있어서인지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통증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며늘아기가 아침 일찍 다녀갔다. MRI 검사와 골밀도검사를 받았다. 35년 전 수술 전에 받았던 심전도 검사는 만60세가 안되어 생략됐다. 피속의 산소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 걱정을 했는데 재검사를 받은 결과 수술을 받는 데는 문제될 것이 없다한다. 허리를 고정시키는 보조기 생산업자가 사이즈를 재갔다. 의료보험이 안되는 보조기 값이 무려 32만원이라 한다.
경동고 29기의 김정호, 오창환, 정병기후배와 그의 친구 박현출 님이 내방해 같이 해온 한북정맥 종주를 반추했다. 쾌유를 비는 이들의 문병이 고마웠다.
내일 수술에 대비해 좌약을 사용해 대변을 보고나자 더부룩하던 속이 시원했다.
1973년 요추 디스크수술과 2002년 목 디스크수술로 내 생애 디스크 수술은 다 끝났다 했는데 내일 다시 요추수술을 받아야한다니 사는 것이 참으로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수술을 받으면 치유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기에 마음은 편안했다.
TV에서 국회의원의 언어폭력을 확인해 씁쓰레 하다.
국정감사 중 우리나라 장관들을 “xxx의 졸개”로 표현한 국회의원이 안양의 이종걸 의원이라고 기록해두는 것은 다음 선거에 또 다시 의원으로 뽑히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영국에서는 국어를 정확히 구사하고 스포츠를 뭐든 한 종목은 잘 할 줄 알아야 의원으로 뽑아준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조직폭력배나 쓰는 언어를 국회에서 마구 쏟아내는 사람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정치적 현실이 부끄럽다. 국회에서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국회의원은 그가 여당의원이든 야당의원이든 관계없이 국민소환제를 만들어서라도 모두 국회에서 끌어내어야 우리의 말과 글이 정화되고 영혼도 순수해질 것이다.
*10월 29일 수요일
아침부터 수술준비로 어수선했다.
소변 줄을 꽂는 것도 이렇게 아픈 데 수술을 마치고 마취가 풀린 후의 수술통증을 어떻게 참아낼까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아침8시 수술실로 옮겨졌다. 7, 8, 12번의 흉추와 4, 5번의 요추가 골절되었고 요추 아래 인대가 파열되었으며 갈비뼈 몇 대가 금이 간 것이 이번 사고로 다친 부위이다. 오늘 수술을 받는 곳은 1973년 한 번 수술을 받았던 요추4-5번 사이의 디스크 부위이고, 골절된 흉추는 오랜 시간 베드 레스팅(Bed resting)을 해 고친다고 한다. 어려운 수술이 잘 되었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며느리가 전해주었다.
수술을 끝내고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긴 시각이 오후 1시경이니 수술과 회복에 대략 5시간 걸린 셈이다. 병상에 다시 눕자 통증이 엄청 심해 그냥 참아내지 못하고 쌍용제지 사우 손병운 사장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득달같이 달려온 손병운, 이성현, 서상원 사우들이 말동무가 되어줘 통증을 어느 정도 잊을 수가 있었다. 경동고24기 동기들이 찾아와 격려를 해주어 고마웠다. 명백회의 서중원회장을 비롯해 김남진, 이달헌, 이기후, 김주홍 등이 먼저 왔고 나중에 백인목 동기가 문병 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퇴근 후 두 아들과 며느리가 들러 밤시간을 얼마간 같이 했다.
모두들 돌아가자 통증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천상에서 같이 있을 어머니와 그녀가 생각났다. 암으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먼저 가 나의 아픔을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집사람이 곁에 같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내가 박복해 그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쓸데없이 설움이 벅차왔다. 고가의 무통제 주사를 맞고도 이리도 아픈데 이런 주사가 없던 1973년의 수술 때는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를 일이다.
*10월 30일 목요일
아침에 교수님이 회진 오셔서 디스크 수술은 아주 잘됐다며 앞으로 관건은 흉추와 요추가 맞닿는 12번의 골절된 흉추가 제대로 굳는 것이니 절대 의사의 지시를 따를 것을 강조하셨다. 수술이 잘됐다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무통약이 잠긴 것을 모르고 몇 시간을 보내 고통이 더했다.
프로야구의 제전인 코리아 시리즈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시즌 우승팀인 SK가 두산에 승리해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 꼼꼼한 김성근감독의 야구가 통이 큰 김경문감독의 야구를 이긴 것으로 보아 야구는 다른 구기보다 그동안의 실적에 근거한 계수관리가 더 잘 통하는 것 같다. 저녁시간에는 TV에서 야구경기중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끝나고 나자 아쉬움이 남았다.
소식 듣고 놀라신 장모님께서 큰처남과 함께 오셔서 이제는 혼자 산에 다니지 말라신다.
당연한 말씀이시다. 안경을 갖고 온 큰 아들은 골밀도검사결과 다시 다치면 골밀도가 떨어져 크게 다칠 것이니 산행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 더해서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하는지 생각하니 짜증스럽기도 했다. 8년전에 집사람을 여의고 그 2년 후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3년 후 수년간 경영해온 회사를 접으면서 더 이상의 시련이 없기를 빌고 또 빌었는데 이렇게 허리를 다쳐 산에 다시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하니 절망감이 짙게 들었다. 남은 내 인생에서 산을 뺀다면 무엇이 남는다고 그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어야하나 생각하자 통증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10월 31일 금요일
밤10시에 소등하여 간호원들이 혈압과 체온을 측정해가는 새벽5시까지 대략 7시간동안이 하루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하루 종일 침상에서 뒹굴다보면 운동량이 절대 적어 낮잠을 자지 않는데도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등을 눕힌 자세로 오래 있지 못해 번갈아가며 좌우 옆으로 돌아눕기를 계속하느라 2시간 이상 숙면을 취할 수 없어 더욱 그렇다. 오른 쪽 허벅지가 마비된 느낌이다.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무통약도 떨어져 오늘 밤이 가장 고통스러우리라 예상을 했기에 저녁11시에 진통제를 맞고 잠을 청했다.
언제보아도 간호사들은 총총 걸음이다.
간호사뿐만 아니라 의사들도 걸음걸이가 다른 직장인들보다 빠른 것 같다. 그 빠른 걸음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간호사들을 보면 환자를 돌보는 일이 천직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에 비해 간병사 아주머니들은 걸음걸이가 한결 여유롭고 느리다. 환자가 잠이 들면 더러는 방을 옮겨 그 분들끼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간병하는 일이 간호하는 일보다 더 힘들어서 그럴까?
이틀 전에 천식을 앓고 있는 고교생이 옆 침대로 들어왔다.
환자의 기침소리는 참을 만한데 그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고역이어서 마침 맞은 편에 자리가 나 자리를 옮겼다. 이렇더라도 나는 6인실이 좋다.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취를 맡을 수 있고 고통을 같이 나눌 수 있어서이다.
*11월 1일 토요일
6인실 병실은 어쩌면 바깥 사회의 축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 통증이 많이 줄어든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통증이 웬만큼 가시자 병실의 풍경에 눈을 돌릴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복도에서 병실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 첫 병상은 환갑을 며칠 앞둔 내가 자리했고, 맞은편에 30대의 공무원이 입원해 있다. 맨 왼쪽 창가자리는 30대의 총각이, 그 건너편에는 60대의 중소기업 사장이 마주보고 있는데 두 사람 입원한지 몇 달이 지난 정형외과병동에서는 보기 드문 장기입원환자들이다. 가운데 자리 왼쪽 침대에는 고교생이 누워 있고 내 옆자리에는 71세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간병을 받고 있다. 10대 1명, 30대 2명, 60대 2명과 70대의 각각 한 분씩이니 연령층별로 비교적 고르게 분포된 셈이다. 집사람이 없는 나만 간병인을 따로 두고 있고, 다른 환자들은 가족들이 돌보아 부럽기도 했다.
안양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 못하여 다리를 다친 30대 총각은 한 쪽 다리를 절단해 의족을 하고 있어 참 딱해 보였다. 사고를 일으킨 가해자는 별로 다친 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이리 불공평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총각은 이제는 많이 삭인 듯 크게 분노하지 않는 눈치였다. 70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시는 것을 보고 저래서 부부라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깥에서라면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눌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몸져 누워있다는 공통점만으로도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지 입원경위를 서로들 얘기하고 음료수와 과일을 나눠 들 뿐만 아니라 몸 상태가 좀 나은 환자가 거동이 힘든 환자의 식기를 날라주기도 한다. 정형외과의 병실은 입원기간이 짧은 환자들이 많아 웬만하면 그냥 못 본척하고 지내다가 퇴원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아파지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사대 동기들이 찾아와 얼마간 시간을 같이 했다.
며칠 전 앵자봉을 같이 오른 이상훈, 오순문, 원영환 친구들과 이미 한번 다녀간 김종화군 내외, 그리고 이원호, 김지선 친구들이 베풀어준 후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11월 2일 일요일
이 병원에서 자원봉사 중인 교우들이 찾아와 조속한 쾌유를 비는 기도를 주님께 올렸다.
어제는 수녀님께서 기도를 드려주시고 묵주를 주고 가셨다. 거동이 불편해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주일미사를 빼먹을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수녀님과 교우님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셔서 고맙기 그지없다.
어제에 이어 시골의 형님 등 여러 분들이 문병을 왔다.
아침 일찍 경동고의 이길호 동기가 찾아와 오랜 시간 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시간에는 두 동서 내외들이 찾아왔고 조금 있다가 정병기 후배사장이 이규성, 장광종 친우들과 함께 내방했다. 뒤이어 작은 조카 종선이가 시골의 형님과 형수님, 작은 누님을 모시고 올라와 병실이 한동안 떠들썩했다. 뉴질랜드 여행에서 돌아 온지 며칠 안 된 함기영 고교동기가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9시 넘어 돌아갔다.
아버지가 다쳐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종원이가 울먹이며 전화를 해왔다며 큰누님이 전화를 주셨다. 아들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주위의 친지들이 베푸는 고마움을 차곡차곡 쌓아두어 탑으로 올리고 있다.
사고가 났을 때만 해도 2000년대 들어 계속되는 불행으로 사는 것이 힘들고 짜증스럽다 했는데 고마움의 탑이 하루하루 높아지는 것을 보고 이제는 그래도 이 세상은 참 살 맛 나는 세상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 사고로 몸을 다쳐 얼마간 건강한 생활이 불가능하게 됐지만 대신에 사람들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높아가는 고마움의 탑을 지켜보며 빠른 회복을 다짐해본다.
*11월3일 월요일
그새 통증이 많이 줄어들어 어제부터 책읽기를 재개했다.
그동안 TV만 보면서 시간을 죽이기가 정말 힘들었다.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는 것은 몸 동아리의 활동공간이 좁을수록 사고공간이 넓어야 지겨움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공간은 상상력에 비례해 커지기에 사고의 공간을 넓히는 데는 다른 것에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TV를 보는 것보다는 여유롭게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훨씬 도움이 된다. 다만 누워서 책을 읽어야 하기에 내용이 난해하거나 무거우면 쉽게 싫증이 나겠다 싶어 친구가 사다 준 천상병의 산문집으로 책읽기를 시작했다. 일요일인 어제 많이들 다녀가서인지 오늘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꽤 오래 책을 읽었다.
산문집을 통해 소설가 이외수와 더불어 기인으로 불리는 시인 천상병의 일생을 엿볼 수 있었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술을 퍼마셨다는 것을 빼 놓고는 나는 그를 기인으로 부를 만한 기행을 찾지 못했다. 서울상대를 나올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고교시절 시로 문단에 데뷔할 정도로 머리도 뛰어난 사람이 돈을 우습게 알아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천상병 말고도 끼니걱정을 해야 했던 천재시인이 수두룩했을 텐데 당시대에 조금 튀는 시인이었다는 정도의 세평은 모르더라도 그를 기인으로 모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에서 천상병의 휴머니즘을 읽었다.
사람 좋아하고 사람을 위하고 제 배보다 남의 배를 먼저 채워주면 그는 누구라도 휴머니스트로 불려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휴머니즘이 그의 시에서 어떻게 분출됐는지 아직도 그의 시집을 읽어본 바가 없어서 나는 잘 모른다. 과음으로 친구 동생인 부인을 생고생시킨 시인이 술에 관해 어떤 시를 남겼는지 한 번 찾아서 읽어볼 뜻이다. 과연 주선(酒仙) 이태백과 겨룰 만한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 11월 4일 화요일
수술부위에서 피주머니를 떼어냈다.
아침 회진 때 교수님이 피주머니를 제거하고 앉아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침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주치의선생이 다녀가 만나보지못하는 바람에 밤늦게야 피주머니를 제거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것은 내일로 미루었다. 다른 환자들이라면 벌써 떼 냈을 피주머니를 오래 달고 있었던 것은 수술부위에서 계속 피가 흘러 나와서였다. 어제부터 그 양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수술한지 7일째인 오늘에야 떼어냈다. 등에 달고 있었던 피주머니를 떼어내 우선 눕기가 편안하고 일어나서 걷기를 시도해볼 수 있어 이제 큰 고비는 넘겼다 싶었고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생각지도 않은 문병전화가 걸려와 고마웠다.
고교동기 이규성교수가 내 입원사실을 파주가 고향인 청파 윤도균 선배님에 문자메시지로 알려드려 이분께서 전화를 해주셨다.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산행기를 올리시는 청파님께서 내 사고를 안 이상 그 사이트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실 것이 확실해 이제 내 사고가 한국의 산하 식구들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내 부주의로 사고가 난 것이어서 동네방네 알릴 뜻이 전혀 없었는데 동향선배분 덕분에 더 이상 숨기기도 어렵다면 퇴원 후 몸이 좋아진 후 용화산의 산행 실패기를 올려 사고경위와 대처내용을 자세히 알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아들이 퇴근길에 들렀다.
흉추를 다친 것은 자칫 장애인으로 평생을 보낼 수 있다며 앞으로는 혼자서 산을 가는 등 무리한 산행을 하지 말 것을 내게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마하고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것은 퇴원 후 몸이 좋아지면 다시 산을 오를 것이고 그리하다 보면 혼자서 산줄기종주산행을 할 것이 분명하기에 이를 뻔히 알면서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였는데 아들은 분명치 못한 내 대답이 불만스러운가 보다. 물론 앞으로는 몇 배 더 조심하고 또 조심해 산에 오를 것이다.
쌍용제지의 서상원, 고교동문 함기영, 송기훈 제씨들이 다시 문병 와 고마웠다.
대학의 최송균 동기가 전화를 해왔다. 내가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고마움을 받아 송구스럽다. 오늘도 이들이 전해준 후의로 고마움의 탑을 쌓아 올린다.
*11월 5일 수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 모처럼 4시간 넘게 푹 잠을 자서인지 몸이 개운했다.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도 다녀오고 복도를 10분가량 걷기도 했다. 물론 보조기를 차고서였다. 교수님께서 화장실에 가는 것과 식사 후 10분씩 걷는 것을 제외하고는 침대에서 누워있어야 골절된 흉추를 치유할 수 있으니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복도로 나가자 중앙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공원의 나무들을 보자 이 정도로 좋아진 것만 해도 큰 진전이다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 밤에 눈을 붙이자 낮 동안 걸은 것이 무리였던지 허리가 아파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모두가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고 조급해하지 말자고 내 스스로를 달랬다.
버럭 오버마가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미국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기회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선도국가이다. 어느 누구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최고의 실증이 바로 오버마의 대통령당선이기에 미국은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 최고의 약속의 땅인 것이다. 그의 승리가 미국의 소수민족들에 희망을 주는 쾌거이기에 진심으로 그의 승리를 축하한다. 그렇기로서니 KBS가 하루 종일 중계방송을 한다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모처럼 내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사고 나기 전 하루 400건이 넘는 조회 수가 100건대로 떨어졌다. 퇴원을 하더라도 몇 달 간은 산을 오를 수가 없어 새 글을 올릴 수가 없으니 이런 추세는 얼마간 계속될 것이다.
송기훈 부회장이 동인랑 동창회지를 갖다 주어 1970년도 설악산 산행사진을 보았다.
김종화 친구가 사대 안승렬 동기의 후의를 전해주었다. 모두들 고맙다. 내년 봄에는 다시 산행을 재개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기에 오늘이 그다지 힘들지 않은 것이다.
*11월 6일 목요일
두 주 만에 처음 면도를 하고나자 병실의 환자들이 나를 보고 다른 사람 같다 한다.
모처럼 오래 자란 수염을 사진으로 남겨놓지 못해 아쉽다. 수염을 깎고 나자 오래 밀린 청소를 한 것 처럼 기분이 홀가분하다. 어쩔 수 없어 수염을 길러보니 그동안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긴 사람들을 단정하지 못하다고 혐오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염을 기른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은 십중팔구 게으르고 지저분한 사람일 것이라고 예단해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흔히들 겉 볼 속이라 한다. 세상사에는 속을 제대로 볼 수 없어 겉을 보고 속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을 것이기에 겉 볼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내실화하는 것보다 포장에 더 비용을 쓰고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좋게 하는 일에 죽자 사자 덤벼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션이나 광고가 비즈니스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겉 볼 속의 이미지 중시 덕분일 것이다. 그러면 주위사람들이 내게서 느끼는 주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서 인연을 맺은 범솥말, 조부근, 성봉현 세분이 내방했다.
성봉현님에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오는 토요일 대구팀과 함께 숨은벽을 오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전화로 알렸더니 바쁜 중에도 짬을 내 문병을 와주었다. 이 분들은 정말 산이 좋아 만난 분들이다.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서 댓글을 주고받다가 재작년 12월 처음 만나 술 한 잔을 나눈 이래 대구의 팔공산, 비슬산과 북한산의 숨은벽을 함께 오르며 우의를 다져왔다. 지난달 성봉현님이 톱을 서 난코스 숨은벽의 바윗길을 오른 것은 오래 추억에 남을 것이다.
아직 바깥은 나가보지 못하고 병원 복도만 10분씩 하루 세 번 걷고 있다.
이 정도나마 운동을 해서인지 오늘 처음으로 낮잠을 다 잤다. 이렇게 조금씩 나지고 있음도 다 주님의 은총이다 싶어 감사할 따름이다.
*11월 7일 금요일
6인실 병실은 마치 시장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시장이 활기를 띠려면 내방객이 많고 또 사고파는 상품이 다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6인실 병실은 1인실이나 2인실보다 시장의 조건을 두루 잘 갖춘 편이다. 새벽 5시면 간호사들이 혈압과 체온을 측정하며 시장 문을 연다. 병실이라는 시장에서 구매되고 소비되는 상품은 의료이다. 의사들이 턱 없이 부족하고 그래서 개원만 하면 돈을 벌었던 옛날에도 병원의 상품은 의료였다. 다만 그 때는 수요보다 공급이 달려 의사들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면 한해에 의사들이 몇 천 명씩 배출되는 요즈음은 공급과잉으로 의료시장이 완전경쟁으로 바뀐 느낌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잘 들어맞는 것만 보아도 병원이 시장임에 틀림없다.
병원이 차려놓은 병실이라는 시장에 곁다리로 좌판을 벌이겠다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다.
대표적인 상인은 단연 산재보험신청업무를 서비스하는 손해사정사들이다. 보험회사 직원들도 자주 들락거리고 이발사 아저씨도 한 주에 한 번은 꼭 들른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만 병실을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새로이 신자를 확보할 목적으로 전도에 힘쓰는 분들도 빈번하게 드나들고 무료로 책을 대여해주는 천주교 자원봉사자들도 자주 뵌다. 이들의 좌판이 침울한 병실에 시장의 활기를 가져올 수 있다면 이 또한 6인실 병실만의 프레미엄이기에 나는 6인실 병실을 1-2인실보다 훨씬 좋아한다.
아침에 간병인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변을 보았다.
허리를 구부릴 수 없어 비데가 설치된 변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제껏 화장지만 써온 내가 화장지대신 물로 닦아내려니 영 익숙하지 않다. 내가 누구인가? 화장지 메이커인 쌍용제지를 18년을 다니면서 비바라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시장에 내놓아 12년 만에 국내시장에서 탑 브랜드로 키우지 않았는가? 그런 나이기에 11년 전에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해서 화장지를 비데로 대체 사용할 생각이 날 리가 있겠는가? 이번에는 몸이 자유롭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비데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지만 몸만 좋아지면 다시 화장지로 닦아낼 생각이다.
한국의 산하에 내 사고소식이 올라와 있다.
운해님이 쾌유를 비는 글을 백두대간 종주기 란에 올렸고 청파님이 산행기 란에 청파님이 올리신 산행기에 조부근님이 댓글을 상세히 달아 내 사고소식을 알렸다. 고맙다.
*11월 8일 토요일
오늘아침 처음으로 혼자서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감고 볼 일도 보았다.
이제껏 고생하신 24시간 간병인 아주머니는 저녁 5시 조금 넘어 그만두었고, 내일부터는 낮 시간에만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오늘 밤부터는 나 혼자서 지내야하기 때문에 아침에 미리 연습을 한 셈인데 막상 해보니까 그새 몸이 많이 좋아져 별 문제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수술 후 열흘간은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침상에서 좌약을 써서 두 번의 대변을 1회용 기저귀로 받아냈고 그리고 소변은 수시로 소변통으로 받아내 처리했다. 매일 아침 얼굴을 씻어주고 양치질을 준비하는 일도 아주머니 몫이었다. 이제 이런 일들을 나 혼자서 웬만큼 해낼 수 있기에 낮 시간 간병으로 바꾼 것이다.
1973년 디스크수술 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어머니가 돌봐주셨다.
가난한 살림에 힘들게 뒷바라지해 대학을 졸업시켰더니 겨우 1년 돈 벌고, 척추를 다쳤다며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집에서 요양하다가 결국에는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한 아들이 밉살스럽기도 했을 텐데 100리길을 멀다 않고 시골집을 오가시며 나를 간병하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때는 간병인 제도가 없었던 것 같은데 설사 있었다 해도 어머니가 당신 아들 간병을 남의 손에 맡길 리가 만무했기에 당신 고생이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잘 해주어도 아무려면 어머니만 하겠는가 싶은 것은 한 밤에는 간병인 아주머니를 깨우기가 미안해 목이 말라도 물을 달래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35년 전 수술을 받던 때보다 시스템이나 서비스는 전반적으로 좋아졌다는 생각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간병인 제도가 그렇고 그 때는 미리 냈던 수술보증금도 없어졌다. 첨단설비인 MRI 검사나 CT촬영은 그 당시에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다. 병원의 부대시설도 엄청나게 좋아졌다. 수술 받고 처음 화장실에 갔을 때 허리는 구부릴 수 없었는데 좌변식변기가 없어 배관을 붙잡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변을 보느라 혼이 났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의료보험제도가 없어 모자라는 치료비를 빚을 내서 낼 수밖에 없었던 그 때에 비하여 모든 것이 분명 좋아졌다. 이 모두가 그동안 부지런히 일해 국부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몸이 편찮아 거동이 불편하신 큰누님을 조카가 모시고 왔다.
쌍용제지의 하철수사장과 이성현사장이 다녀갔다.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몇 분이 쾌유를 비는 댓글을 올렸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쌓아올리는 고마움의 탑이 다시 높아졌다.
*11월 9일 일요일
세 주 만에 미사를 드렸다.
지하 1층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환자들에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다른 종교 신자들은 달리 장소가 없어 9층 복도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데, 좁기는 하지만 어엿한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리는 것은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에는 특전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특전은 마침 이 병원을 설립하신 분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여서 가능했던 것으로 이 분께서 병원이름도 그래서 성심병원으로 정하셨다 한다. 40분가량 걸린 미사시간이 고통스러웠다. 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어 허리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 호통을 치시는 참뜻을 강론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자 수술 받은 지 며칠 안 된 내가 의자에 너무 무리하게 오래 앉아 있던 것 같아 후유증이 없을까 은근히 걱정되었다.
실비아님이 문병을 왔다.
내가 회사를 꾸려나갈 때 만난 분으로 3년 만에 뵙게 되어 반가웠다. 그동안 따님을 출가시켜 외손자까지 보았고 아드님은 워커힐에 취직이 되었다며 즐거워했다. 우리 큰아들보다 1년 반 이상 늦게 결혼시킨 실비아님은 손자를 보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해 부럽기도 했다. 옛날에 하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대아파트 상가단지 1층으로 옮겨 20평가량의 여성복 매장을 차렸다 한다. 경기가 안 좋으면 패션 쪽이 먼저 타격을 받기에 앞으로 얼마간은 쉽지 않겠다 싶으면서도 워낙 싹싹하게 손님을 대하고 매사를 딱 부러지게 처리하는 분이라서 잘 해나갈 것 같아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매장 문을 닫는 일요일에 쉬지 못하고 문병을 와 시간 반 넘게 시간을 같이해준 실비아님이 고마웠다.
낮 시간만 나를 돌봐줄 간병인 아주머니가 새로 오셨다.
한북정맥 종주팀원인 이기후동문의 아들 결혼식에 갈 수 없는 형편이어서 마침 문병 온 정병기사장에 축의금 전달을 부탁했다.
김주홍 동문이 전화를 해왔다.
이달헌, 이규성 등 고교동문들과 북한산을 성공리에 종주했다며 흥분된 목소리다. 한 동안은 친구들의 산행소식을 들으며 만족해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산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졌다. 그래 넉넉잡고 반년만 참고 기다리자.
*11월 10일 월요일
병원건물 밖으로 나가 바깥 공기를 실컷 마셨다.
며칠 동안 복도 등 병원 안에서 10분씩 걷다가 큰맘 먹고 간병하는 아주머니를 대동해 병원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공기가 차고 삽상했다. 바깥 공기라고 오염이 안 된 것은 아니겠지만 병실보다 훨씬 청량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깥이 주는 자유로움 덕분일 것이다. 난방이 아직 가동되지 않기에 환기를 위해 자주 문을 열어놓으면 별로 활동을 하지 않는 환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추위를 더 타 자칫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병실의 창문은 거의 닫혀 있는 편이다. 또 하나 소음방지를 위해서도 창문을 닫아두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병실에 오래 있으면 머리가 띵하고 속도 더부룩해 6년전 목디스크 수술 차 입원을 했을 때도 문밖으로 나가 병원건물을 자주 돌았었다.
그 때 없던 건물이 새로 보였다.
서쪽으로 기존 병원 건물에 붙여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 마무리공사 중이었다. 내가 여기 한림대성심병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0년3월 이 병원에서 집사람을 장례 치르면서다. 암으로 3년 가까이 고생하며 서울 일원동의 삼성병원을 다니다가 임종을 바로 앞두고 과천 집으로 옮겨 그녀가 소원한대로 집에서 눈을 감았다. 연도를 해주시는 카톨릭교우분들이 편하도록 인근의 이 병원으로 시신을 옮겨 장례를 치렀다. 두 번째 이 병원을 찾은 것은 그 1년 후 가슴이 아파 협심증 증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삼성병원은 진찰에만 3주를 기다려야 한다하기에 포기하고 이 병원으로 와 각종 검사를 받았으나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의사선생께서 급할 때 쓰라고 니트로글리세린을 처방해줬다. 다시 1년 후 목디스크 수술을 이 병원에서 받았고, 그 후로는 이 병원만 다녔다. 올 3월 며느리아이가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이 병원의 의사로 일하기 시작한 덕분에 직계가족으로서 할인혜택을 받게 되어 이제는 다른 병원에 가야할 이유가 없다. 며느리가 다니는 이 병원이 환자가 늘어 새롭게 건물을 확장하는 것을 보니 이 병원이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주말에 병실이 비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이처럼 작은 인연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보통사람이라면 이 땅의 누구도 옳건 그르건 혈연이나 지연, 또 학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진오신 교수님에 오른 쪽 옆구리가 결린다고 말씀드리자 X-ray를 찍어보자고 하셨다.
X-ray 촬영결과는 내일 회진 때 말씀이 있을 것이다. 흉추12번이 내려앉지만 않으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기에 촬영결과에 마음 졸이고 있다.
*11월 11일 화요일
아침 회진 시간에 담당교수분께서 오늘부터 한 번 운동하는 시간을 20분에서 40분으로 늘리라고 말씀 주셨다. 어제 찍은 X-ray를 보니 수술부위는 물론 골절된 흉추12번도 더 이상 내려앉지 않고 좋아지고 있으니 운동시간을 배로 늘리라며 이번 주 중으로 언제 퇴원할지를 결정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더할 수 없이 반가운 소식으로 이만하기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동안 문병온 친지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위로의 말은 “그만하기가 정말 다행이다”라는 한마디였다.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다 혹여 머리라도 부딪혔더라면 신경을 다쳐 반신불수가 될 뻔했는데 척추만 다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는 것이다. 나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고 이 병실 환자들 모두다 문병객들로부터 의례 듣는 말이 이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그냥 듣기 좋으라고 건네는 인사치례만은 아닌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만하기가 다행”이라는 이 한 마디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생관이 그대로 녹아있는 것 같다. 현재 처한 상황보다 더 지독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리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지난 불행한 일은 이제 다 지난 일로 앞으로는 다 잊고 잘 살아가라는 이 한마디에서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한을 삭이고 삶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대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그만하기가 다행”이라는 이 한마디가 지난날의 불행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조치를 강구하는데 장애가 된다 했는데 나이 들어서는 이 한마디처럼 삶에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금언이 따로 있겠는가 하고 생각이 바뀐 것은 적어도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현 상황을 비관해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은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오전에 함기영 산우가 다시 찾아와 얼마간 시간을 같이했다.
오늘 처음 길 건너 안양중앙공원으로 건너가 최대한 큰 원을 그리며 두 바퀴를 돌았다. 40분 남짓 걸은 후 병상에 누웠더니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와 한 시간가량 낮잠을 잤다.
*11월 12일 수요일
수술부위에서 봉합한 실을 빼고 팔목에 꽂아둔 주사바늘도 뺐다.
그리고 얼마나 호전되었는지를 점검하기위해 X-ray를 찍었다. 이제 퇴원이 가까워졌나보다. 혼자서 화장실을 다니고 공원에 나가 산보도 할 정도이니 굳이 병원에 입원해 병실을 지킬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옛날 같지 않아서 이제 큰 병원에서는 가능하면 환자들을 빨리 퇴원시키려고 해 환자들이 오히려 너무 야속한 게 아니냐며 서운해들 한다고 한다. 퇴원해도 좋은 환자를 붙잡아두어 과잉진료를 한다고 얘기 듣는 병원이라면 이는 필시 그 병원의 의술이 뒤쳐져 경쟁력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그런 병원은 아니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병원이 숙박업체가 아니라면 돈도 안 되는 환자를 투숙시키면서 오래 붙잡아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병실의 회전율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여 관리하는 큰 병원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능하면 빨리 퇴원시키는 것이 병원 측은 고수가의 대기환자를 입원시켜 수익을 올릴 수 있고 환자는 의료비를 줄일 수 있으며 건보는 재정악화를 막을 수 있는 등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경우다.
집에 가보아야 아들이 직장을 나가는 낮 시간에는 빈 집을 혼자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이런 환자 저런 환자들과 이 애기 저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 데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면 책 보고 라디오를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죽일 방법이 없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친지들이 심심찮게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집에 박혀 있으면 이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하루 세 번 걷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최대로 누워있어야 골절된 흉추가 자리를 다시 잡을 수 있다는데 집에서는 내 스스로가 식사문제를 해결해야 하기에 아무래도 누워있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혼자서 양말을 신는 것도 큰 과제다. 내 경우 이 병원에서 최대한 오래 입원해 있는 것이 백번 좋지만 병실회전율을 높여야 하는 병원 측과 이해관계가 상충되기에 내 편의만 생각하고 마냥 눌러 앉을 수만도 없는 것이다. 일단은 의사선생님께 여쭈어 이번 주 토요일로 생각되는 퇴원을 한 주 정도 미뤄볼 생각이다.
한형조 교수의 “조선유학의 거장들”을 다 읽었다.
이 책에서 혜강 최한기를 만난 것은 의외였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혜강 최한기가 조선조 말 최고의 유학자였음을 이제껏 몰라온 나의 천학이 부끄러웠다. 작고하신 철학자 박종홍 교수께서 대담하고 철저한 경험주의자로 규정한 혜강 최한기가 실용과 혁신을 추구한 면에서는 다산 정약용을 뛰어 넘었다 하니 앞으로 이 분의 글을 더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하이맛 이규성 산우가 송백산악회에 내 입원사실을 알려 몇 분이 다녀가셨다.
송회장님, 김대장님, 산도깨비님과 막걸리 대장님들 모두 백두대간을 같이 종주한 분들이다. 천자봉, 돌백, 월인, 초이스님 등 대간 종주동기분들도 전화를 해왔다. 경동고 후배 이현석군과 김종화 동기 그리고 송기훈 후배가 문병을 왔고 모교인 경동고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고동준 동기가 전화를 해주었다. 저녁 늦게 큰처남이 다시 들렀다. 고마움의 탑이 다시 높아졌다.
*11월 13일 목요일
수술부위의 마지막 소독이 끝난 후 샤워를 혼자서 해냈다.
이제 양말 신는 것을 빼고는 나 혼자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간병인 아주머니의 도움은 내일까지만 받기로 했다.
환자를 돌보는 간병 일도 거의 중국동포들에 돌아가 우리나라 간병인들의 수입이 옛날보다 훨씬 못한 모양이다. 먼저 분보다 젊은 40대 후반의 이 아주머니께서 지난 토요일 처음 시작할 때 내게 아침에 반시간을 일찍 나올 테니 저녁 때 한 시간 먼저 일찍 퇴근했으면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그 이유를 물은 즉 월요일부터 금요일에는 저녁 7시부터 복지사 자격시험에 대비해 학원을 다니기 때문이라 해 그리 하시라고 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아주머니들이 하도 많이 간병인으로 등록해놓아 자기 순번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느라 쉬는 날이 많아서 조선족이 응시하지 못하는 복지사일을 해볼 까 한다는 것이다. 중국교포 간병인들은 대체로 24시간 간병을 선호하는데 병원 안에서 숙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병원에서 같이 간병 일을 하고 있는 조선족부부도 있다고 한다.
힘들고 귀찮은 일을 중국교포에 거의 다 넘어간 것 같다.
그렇게 넘겨주어도 문제가 안될 만큼 우리경제가 팍팍 돌아갔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다. 지난 달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가 우리나라 경제에도 커다란 타격을 줄 것이고 그 결과로 실물경기가 위축되어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해 조만간 그동안 중국교포들에 맡겼던 3D업종의 고된 일거리들도 우리나라 실업자들이 다시 찾아나설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새삼 일자리를 놓고 중국교포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치유하기 힘든 심각한 갈등을 겪을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숱한 청년들이 이 땅에 발 붙이고 제대로 살아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건실한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두 아들과 며느리가 새삼 믿음직스럽고 고맙게 느껴졌다.
병원 건너 중앙공원을 40분 넘게 걸었는데도 피곤한 줄 모르겠다.
매일 매일 몸이 좋아지는 것이 절로 느껴진다. 다만 침대에 오래 등을 눕혀 있다가 오른 쪽으로 돌아누울 때 오른 쪽 옆구리가 결리는 것은 여전하다. 퇴원은 가까워지는데 결리는 것은 나지지 않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퇴원이 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집에 돌아가서도 상당기간 보조기를 차고 요양해야 할 것이니 조급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11월 14일 금요일
한 자세로 오래 있을 수 없어 거의 2시간 간격으로 자세를 바꿔 누워 있어야하기에 한 밤중이라도 깊은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새벽 5시 경에는 이미 눈을 뜬 채 혈압을 재러오는 간호사를 맞곤 한다. 간호사가 다녀 간 후 내 자리 독서 등을 켜는 것은 이때부터 아침식사가 나오기까지 약 2시간 동안이 책을 읽기에 딱 좋아서다. 아침 식사 후면 의사선생님들이 바쁘게 회진 돌고 이후로는 TV를 켜놓아 좀처럼 책읽기에 정신을 집중하기 힘들다.
오늘 새벽에는 책읽기를 잠시 미루고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가보았다.
밤새 어둠 속에 몸을 맡겼던 중앙공원이 여명을 맞아 제 모습을 어떻게 내보이나 궁금해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아직은 어둠이 지배하는 밤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나무들의 윤곽만 어슴푸레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 위로 별들이 보였다. 공기가 오염된 시내에서는 밤하늘을 수놓는 총총한 별들을 관측하기가 어려워 시내 가까이에 있는 천문대를 시골 높은 산으로 옮겨 놓는다는데 오늘 새벽에는 어인 일인지 하늘에 박혀 있는 꽤 많은 별들이 바로라도 내려앉을 기세로 중앙공원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 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내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몇 달만 잘 추스르면 다시 산에 오를 정도로 몸이 좋아질 터이니 그 때는 이런 도시의 병원이 아니고 시골 산 속에서 만나자고 속삭이는 듯 했다. 2007년 3월 금남정맥을 종주할 때 전북 진안의 무릉원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별들이 아주 가깝게 보여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 했다. 중앙공원 위 별들이 내게 빨리 건강을 회복해 그 때 그 별들을 다시 보러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여명의 이 시간까지 나를 기다렸다 싶어 나도 한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여명을 기다렸다가 막 차도로 들어선 차량의 라이트에 밀려 사라지는 별들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환송해 주었다. 태양이 건강한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둠을 몰아내고 이 땅을 밝힌다면 별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해 오늘을 아파하는 환자들에 희망의 빛을 전해주는 등대라 할 것이다. 어두워야 더욱 빛나는 별은 분명 천사임에 틀림없다.
회진오신 교수 분께서 이제 1시간씩 걸어도 좋다고 하셨다.
병실을 나서 중앙공원을 천천히 두 바퀴를 돌고 돌아오면 1시간가량 걸리는데 오늘은 세 번을 나가 두 바퀴씩 돌았어도 전혀 힘든 줄 몰랐다. 새벽 시간 별들과 산뜻하게 인사를 나눈 후 하루를 시작한 덕분일 것이다.
송기훈 부회장이 수원에 사시는 이두성 고교선배를 모시고 문병을 왔다.
한북정맥 종주팀원이자 친구부인인 김양미님께서 교우 몇 분들과 함께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다. 백두대간을 같이 종주한 송백의 나뭇꾼님께서도 책 한권을 사들고 병상을 찾아와 송백 카페에 손수 올린 내 소식과 옛날사진을 스크랩해 내 블로그에 올려주셨다. 이 소식을 접한 대전에 사는 대학동문 한 분이 안부메일을 보내왔다. 운해님이 내 입원소식을 올린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따라가기님, 김석환님, 수객님, 소백산님과 유종선님이 조속한 쾌유를 비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이렇게 해서 친지들과 함께 쌓는 고마움의 탑이 오늘 하루만도 내 키보다 더 높아진 것 같다.
*11월 15일 토요일
수술 후 18일 만인 오늘에야 비로소 간병인의 조력 없이 독자적인 병상생활에 들어갔다.
이 병실의 다른 환자들보다 훨씬 오래 간병인을 써온 것은 요추4-5번의 디스크수술은 벌써부터 혼자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호전되었으나 수술을 하지 않은 골절된 흉추12번이 저절로 굳어질 수 있도록 병상에 오래 누워있어야 했고 허리를 구부릴 수 없어서였다.
집안 식구들 중 누구라도 나를 보살펴 줄만큼 시간 여유가 있다면 굳이 돈을 들여 간병인을 쓰지 않았을 터인데 아들 며느리 모두 다 직장에 나가 별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간병 일은 간호사들의 고유업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모든 병원이 간병인제도를 따로 두는 것은 자질구레한 병 수발을 전부 전문직인 간호사들에 맡긴다면 의료수가가 지금보다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고 그리되면 환자확보가 힘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집사람이 입원했던 1997년만 해도 우리나라 최고의 삼성병원에서는 보호자들에 간병 일을 금지하고 면회만 허용해 저녁 8시만 되면 경비들을 시켜 보호자들을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당시 나는 역시 삼성이다 했는데 IMF환란이 터지면서 흐지부지되어 얼마 후 삼성병원도 다른 병원들처럼 간병인을 두는 것을 제도적으로 허용했다. 간호사들이 환자들에 양질의 간호서비스 제공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서도 간병인제도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양질의 간호서비스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이 간호실 벽에 적혀 있어 한 번 옮겨본다. “Best Nursing"이란 Best Talk, Best Work, Best Call, Best Look, Best Note를 뜻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환자들에 수준 높은 간호서비스를 성실하고 친절하게 제공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병원의 간호서비스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무한경쟁에서 이 병원이 살아남는 데는 의사들의 질 높은 의료행위도 중요하지만 환자라는 고객과의 접점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들의 역할도 이에 버금갈 만큼 중요하다. 이 병원 간호사들이 다른 병원의 간호사들보다 더 잘한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을 하나만 들라면 바로 친절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친절은 매뉴얼화 된 친절뿐만 아니고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친절도 포함해서다. 매뉴얼화된 친절은 어느 간호원이나 다 하는 예의바른 친절(courtesy)이지만 환자들이 조금만 매뉴얼에서 벗어난 서비스를 요구할 때 금방 얼굴색이 바뀌고 보호자가 없냐고 묻는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친절(kindness)은 환자들을 감동시키기에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간병할 때의 친절을 이르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일본의 제휴회사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회사 여직원의 웃음 어린 차 접대를 보고 파트너 직원에 일본여성들은 참 친절하다고 칭찬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 일본여직원들은 상냥하고 예의바르기는 해도 친절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상사들이 부탁해도 업무 외의 일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병인을 쓸 만큼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의탁할 데 없는 환자들도 같이 느낄 만한 친절이 정말 친절일 것 같아 내 의견을 적어보았다.
저녁시간이 되자 빗발이 드세졌다.
아침, 점심으로는 중앙공원을 돌았으나 저녁 식사 후에는 병원 1층의 로비에서 스무 바퀴를 돌았다. 바깥 공원을 도는 것보다 훨씬 단조로워 지루했다.
고교동기 김주홍군 내외와 이규성 교수가 찾아와 얼마동안 시간을 같이했다.
이 친구들에 또 송백산악회 카페에 빠른 회복을 비는 글을 올린 수선화 님 등 몇 분들에 고마움을 표한다.
*11월 16일 일요일
오늘은 경동동문산악회에서 한북정맥 종주를 마치는 날이다.
한북정맥이란 북한 땅인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뻗어나가며 적근산, 대성산, 광덕산, 국망봉, 운악산, 수원산, 불갑산, 도봉산과 노고산을 차례로 일군 후 고향 땅 파주 교하의 장명산을 끝으로 한강의 지류인 곡릉천으로 내려앉는 산줄기를 이르는 것으로 남한 땅인 대성산 남쪽 아래 수피령에서 시작해 장명산에 이르기까지 도상거리가 160Km를 조금 넘는다. 매월 셋째 주 일요일에 이 정맥을 종주하기로 하고 작년9월 총5명의 대원이 수피령을 출발했다. 지난 달 고양 일산의 잣골고개에서 13차 종주산행을 마치기까지 산행인원도 늘어나 한 번 산행에 보통 15-18명의 동문들이 참여해왔는데 이 대부대의 종주산행을 줄곧 내가 이끌어왔기에 오늘의 마지막 산행을 앞장서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것이 내게는 엄청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8월에 이미 종주를 마친 내가 한북정맥에 다시 발을 들인 것은 얼마간 침체에 빠진 동문산악회의 중흥을 위해서였다.
한북정맥은 내게 점의 산행을 선의 산행으로 바꾸도록 한 고마운 산줄기다.
2004년 봄까지는 주로 어느 한 산을 정해 정상을 올라섰다가 바로 하산하는 점의 산행을 해왔고 더러는 당일산행으로 몇 개의 산봉우리를 이어 능선을 탔었지만, 몇 회에 걸쳐 산줄기를 연이어 오르내리기는 그 해 8월에 종주산행을 마친 한북정맥이 처음이었다. 그 후 선의 산행에 흠뻑 빠져 안내산악회를 따라 백두대간을 종주했고 지지난 달에 백두대간의 영취산에 올라 호남정맥 등 남한 땅 7개 정맥을 나 혼자서 종주했다. 이제 남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의 종주산행은 몸을 잘 추스른 후 내년 봄에 도전해 볼 뜻이다. 내가 이리도 산줄기 이어걷기에 열을 내는 것은 사람들이 한 평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은근과 끈기를 키우는데 이만큼 좋은 것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가 “나무”라는 시에서 읊었듯이 하느님이 만드신 나무들과 벗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종일 걷노라면 육체의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의 건강을 지키는데 이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다. 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온갖 생물들과 이런 저런 묵언의 대화를 나누노라면 혼자 걷는 종주산행도 무섭다거나 외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후 4시가 채 안되어 마지막 구간의 산행대장을 맡은 정병기 후배가 장명산을 올랐다가 곡릉천으로 내려가 한북정맥종주산행을 모두 마쳤다며 전화를 주었다. 뒤풀이에 참석하는 송기훈 부회장에 양주 한 병을 사 보내 동문들의 완주를 축하했다. 이들에게는 한북정맥 종주가 정맥 종주의 처음이기에 완주의 기쁨이 남달랐을 텐데 감격의 순간을 같이 하지 못해 엄청 아쉬웠다. 총14회의 종주 산행 중 눈길도 걸었고 우중산행도 감행하는 등 마냥 종주 길이 편안했던 것만은 아니었던만큼 완주의 기쁨이 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어제 저녁 8시에 일찍 취침을 해서인지 새벽4시도 안되어 잠을 깼다.
다시 눈을 붙이지 못하고 한 동안 뒤치락거리다 끝내는 독서 등을 켜고 책읽기를 시작해 신정일 님의 “한강역사문화기행”을 다 읽었다. 강줄기 탐사는 먼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옹기종기모여 살아온 강을 따라 걷는 것이기에 우리의 문화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줄기를 따라 걷는 것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인지 이 분의 탐사기에는 막상 한강 그 자체는 별로 보이지 않고 이 강에 붙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으며 그것도 양반족의 강변풍경을 영탄하는 시가들이 많이 보였다. 몸이 다 나으면 섬진강 강줄기를 따라 걸은 후 섬진강탐방기를 써보겠다는 내게 이 책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지만, 막상 주인공인 강은 숨어들고 객꾼인 양반들이 나서는 내용은 좀 줄여볼 생각이다.
아들은 이분의 탐사기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이분만큼 발로 쓰는 작가가 흔치 않은 데, 게다가 나와는 달리 “신택리지” 수권을 내놓을 만큼 한문과 지리에 이분만큼 밝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 분의 한강탐사기를 다 읽고 난 아들의 비판인즉 내용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이고 이정도 내용이라면 개인 블로그에 싣는 것은 몰라도 남들이 다 보는 책으로 내기는 빈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도 우리나라 유수 강들의 강줄기와 이 강들에 물을 대는 산줄기환주를 마친 후 탐방기를 책으로 펴낼 생각을 갖고 있기에 아들의 이 한 마디가 따끔하게 들렸다. 3년 전에 아들이 결혼할 때 졸고를 모아 “산들머리 산날머리”라는 허접스러운 산행기모음집을 내놓아 하객들에 답례선물로 드린바 있는 나로서는 이분의 탐사기만한 글을 쓰는 것도 엄청 어려운 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들의 비판이 지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녀석에 부끄럽지 않는 책을 내놓으려면 적지 아니 내공을 쌓아두어야 할 것 같다.
쌍용제지 입사동기인 나기훈, 이석범사우가 문병을 왔다.
한북정맥 완주 뒤풀이를 마친 몇몇 친구들이 고맙다며 전화를 해왔다.
*11월 17일 월요일
퇴원날짜가 오는 토요일로 정해졌다.
욕심 같아서는 이 병원에서 머무르면서 흉추12번의 완전치유를 기다리면 좋겠지만 달리 치료를 받는 것도 없이 마냥 병상을 지키는 것도 멋쩍고 미안한 일이어서 오는 토요일에 퇴원을 했으면 한다고 말씀드리자 교수 분께서 쾌히 승낙해주셨다. 40분에서 1시간으로 늘어난 걷기운동도 무난하게 해내고 하루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고 잘하며 화장실도 잘 다녀오기에 양말을 신는 것을 빼고는 당장 퇴원해도 별 문제 없을 정도로 몸이 많이 좋아졌다.
창가 병상을 몇 달간 지켜온 60대의 환자분이 퇴원한 것은 지난 토요일의 일이다.
나보다 네 살이 위인 이 분은 퇴원을 하고서도 한동안 통원해 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거동이 안 되는 환자들의 식기를 날라주고 나이를 가리지 않고 말동무가 되어주어 910호실의 실장 역할을 단단히 해온 이 분이 퇴원해 한동안 병실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이분을 뒤이은 환자는 대학생으로 사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커브를 돌다 60대 노인이 운전한 직진 차에 치였다는데 헬맷을 써 머리는 다치지 않았지만 가슴과 다리를 크게 다친 모양이다. 내기 이 젊은이를 들먹이는 것은 병세가 위중해서가 아니고 그와 여친이 빚어내는 새로운 풍속도가 쇼킹하게 보여서이다. 다친 환자는 대학1년생이고 연예계 진출을 희망한다는 여친은 휴학한지 1년 된 중학교 3년생이라 하는데 양가에서 이 둘의 사귐을 받아들이고 결혼시킬 뜻이라 한다. 나는 이 학생들로부터 “엄마”와 “어머니”의 극명한 차이를 배웠는데 “엄마”는 친어머니를 이름 하는 것이고 “어머니”는 장모나 시어머니의 호칭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사랑 말고도 할 일이 엄청 많은 어린 자식들을 벌써부터 사위 며느리로 정해놓고 양가의 모친들이 번갈아가며 이 환자를 돌보는 것을 보고 이런 것이 요즈음의 새로운 풍속이 정말 맞나 싶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의 사랑성사가 기특하기보다 철없어 보이는 것은 내 생각이 너무 고루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부터 한 번에 두 바퀴에서 세 바퀴로 늘려 중앙공원을 돌았다.
한 번에 한 시간씩 걸리니 하루에 세 시간을 걷는 셈인데 어제부터 발뒤꿈치가 너무 아파 오랜 시간을 걷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고교후배인 정성기 사장이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에 응급실에 입원해 있어서 문병을 못 왔다며 전화를 해왔다. “졸저 ”산 들머리 산 날머리“를 출간해준 이 후배가 지방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함께 전해주었다. 종욱이가 책을 갖다 주었다. 인대가 늘어난 다리가 다시 아프다해 걱정이다.
*11월 18일 화요일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한 겨울에 최저기온이 섭씨 영하5도라면 그리 춥다할 수 없겠지만 내 몸이 아직은 냉랭한 기온에 익숙지 못한 초겨울이어서 혹여 감기라도 걸릴 까봐 얇은 환자복에 트레이닝복 바지와 며칠 전에 큰아들이 사다준 등산용다운을 껴입고 병실 문을 나섰다. 간호실을 지나자 나를 본 간호사가 환자가 허락 없이 바깥나들이를 나선다며 안 된다고 펄쩍뛰었다. 의사선생님 지시대로 걷기운동을 해야 하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사복을 껴입은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사정해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병원 문을 나서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바깥 공기가 냉랭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아침 8시가 넘었는데도 공원을 도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공원을 세 바퀴 다 돌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중 어린 자식을 유아원(?)에 혼자 보내며 안쓰러워하는 이병원의 여의사 한 분을 보고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집 사람이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두 아들은 어머니가 돌봐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간은 맨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는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아들이 많이 걱정되었다. 당시 나는 용인에서 서울로 통근을 하고 있어 양재역에서 전철로 갈아탔는데 이 때 잠시 짬을 내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막내아들에 문 잘 잠그고 학교 잘 다녀오라고 전화를 걸곤 했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안팎으로 모두 밖으로 나가 일을 해야 애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는데 우리 세대들처럼 어른들의 조력을 받기가 여의치 못하고 국가적으로 보육시스템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그 어려움이 상당한 것 같다. 이러한 어려움이 우리나라 젊은이들로 하여금 아이들을 기피하도록 만들어 출산율을 세계최저수준으로 떨어트렸다 한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구가 줄어들어 병원은 물론 내수시장에 기반을 둔 모든 기업들이 곤경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젊은 부부들이 마음 놓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국가적 과제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회진 때 어제 발뒤꿈치가 아파 걷는데 애를 먹었다고 말씀드리자 의사선생께서 보시고 피부가 너무 건조해 갈라진 것이라며 바르는 약을 처방해주셨다. 허리를 구부릴 수 없어 약을 발라줄 것을 간호사들에 부탁을 했는데 밤늦게야 이 병동에서 최고로 친절하다고 칭찬받는 한 간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매뉴얼화된 예의바른 친절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친절이 같지 않음을 확인한 셈이다.
함기영, 송기훈 두 동문이 다시 문병을 왔다.
손수 재배한 고구마를 한 상자 싸들고 온 함기영 동문에 고마움을 표한다.
*11월 19일 수요일
이번 주 들어서는 하루에 세 번씩 매번 한 시간 걷는 것이 유일한 재활치료다.
그러기에 비가 온다거나 날씨가 춥다고 밖에 나가 걷는 일을 거를 일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영하 7도로 떨어진 냉랭한 공기를 뚫고 중앙공원을 세 바퀴 돌았다. 바람을 안고 걸을 때에는 가슴팍이 써늘했고 햇볕이 닿지 않는 한 쪽 귀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렸다. 건강한 몸이라면 이 정도 추위야 눈 하나 까딱도 않겠지만 수술을 받고난 후 맞는 첫 추위여서인지 공원을 돌면서 이러다가 감기가 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추위에 움츠린 나를 따뜻하게 녹여준 것은 옆방 꼬마환자의 아침인사였다.
손(?)을 다쳐 912실에 입원한 환자는 세 살 박이 박지윤 꼬마로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낯을 트며 “할부지”하고 인사를 해왔다. 지난 주 나를 간병한 아주머니가 뒤이어 엄마가 출근하는 낮 시간에 이 꼬마를 돌보면서 여러 번 우리 방으로 데리고 와 놀다 가곤 했기에 이 꼬마가 내 낯을 충분히 익혔을 텐데도 나를 보면 앵하고 울거나 딴 청을 하곤 해왔기에 오늘 아침 인사가 더 반갑고 흐뭇했다. 4년 전 시골의 형님 댁에 손녀가 생긴 후 두 분의 언쟁이 바람처럼 사라진 것을 보고 집안에는 역시 애들이 있어야 활기가 돈다 함을 확인했는데 이 병실의 활기역시 이 꼬마환자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두 아들이 내게 안길 손자 녀석들도 이 꼬마 환자 못지않게 귀여울 것이라 생각하니 아픈 몸이 많이 나진 것 같았다.
내 발뒤꿈치에 약을 발라준 친절어린 문 간호사가 내일이 이 병원 환경점검의 날이라 한다.
젊어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환경심사의 날에 좋은 평점을 얻기 위해 방과 후 늦게까지 학생들과 남아 환경미화를 준비했던 일이 새롭게 기억났다. 그 때 나를 도와준 미술선생 한 분은 바로 3년 후 나와 결혼한 내 처였다. 나를 도와준 친절한 이 간호사가 좋은 평점을 받아 칭찬받을 수 있도록 퇴근길에 들른 큰아들을 시켜 침대 밑에 처박아 둔 음료수를 꺼내 옷장에 넣는 등 주변 환경을 깨끗이 했다.
*11월 20일 목요일
첫눈이 안겨준 가장 기쁜 소식은 내 병세에 관해 김용찬교수님으로부터 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다.
교수님께서 2층으로 나를 불러 그동안의 진행경과가 좋았다며 앞으로도 꼭 보조기를 차고 생활해야하고 하루 세 번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며 식사시간과 운동시간 외에는 병원에서처럼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는 퇴원후의 요양지침을 말씀해주셨다. 운동시간은 한 번에 1시간20분으로 늘려도 좋으며 하루 반시간 정도 컴퓨터를 하는 것은 괜찮다는 말씀에 더 해서 골밀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양호해 요양 후 등산은 물론 조기축구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내 최대의 관심이 몸이 다 나은 후 옛날처럼 산에 다닐 수 있느냐인데 이것이 된다하니 내려주신 요양지침을 착실히 지켜 하루라도 더 빨리 병상에서 일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내가 무심했던 것을 교수분께서 직접 챙기셔서 할머니를 먼저 진료하시는 것을 보고 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2층 척추쎈타에서 할머니 한 분과 내가 교수님의 진료를 기다리는 중 간호사의 호명에 따라 내가 먼저 교수님 방에 들어서자 할머니를 먼저 보시겠으니 내게 양보를 해달라고 양해를 구하셨다. 교수님 말씀이 없더라도 나보다 몸이 많이 편찮아 보이시는 할머니가 먼저 진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데도 나는 미쳐 이 생각을 못하고 먼저 들어가 부끄럽기는 했어도 어른들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이 이 병원에는 아직도 살아있구나 싶어 모처럼 흐뭇했다.
점심 식사 후 중앙공원을 돌면서 첫 눈을 맞았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눈을 맞으며 걷는 것이 참으로 정취 있다 했는데 날씨가 푹해져 내린 눈은 금방 녹았고 공원을 한 바퀴 돌자 어느새 눈 녹은 물기가 옷에 스며들어 이내 중단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옷은 조금 젖었어도 서설의 함박눈이 공중을 훨훨 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나이를 먹었어도 눈을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한 것은 그 마음이 바로 동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사람이 세상을 떠난 2000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내 생일을 챙겨준 전 회사 팀장들이 문병을 왔다. 내일이 사장님 회갑이신데 오늘 저녁을 같이 하자고 오전에 유영제 팀장이 연락을 해와 허리를 다쳐 입원해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득달같이 소방석이사 및 강정구팀장을 만나 같이 문병을 온 것이다. 8년전 이 팀장들과 함께 회사를 설립해 5년 가까이 운영해오다 자금난으로 회사를 접은 것이 3년 전의 일이기에 지금은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자기 사업을 하고 있는데도 옛날에 모시던 사장이라고 못난 나의 생일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는 이 들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11월 21일 금요일
퇴원을 하루 앞두고 병상에서 60번째 돌을 맞았다.
1948년 가을이 끝날 즈음인 음력10월24일(양력11월24일) 경기도 파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우순창/조금순 두 분을 부모로 하여 해질 무렵에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음력으로 오늘이 꼭 60돌인 날이다. 그간 내가 태어난 해의 무자 년이 해마다 간지를 바꿔가며 60년이 흘러 다시 무자 년으로 돌아왔으니 이르기를 환갑이라 하는데 요즈음은 드러내놓고 환갑이 되었다고 애기하다가는 팔불출 소리를 듣기가 십상이어서 60돌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병상에서 맞는 환갑이 잔치분위기일 수는 없고, 조금은 쓸쓸했다.
60돌을 맞는 나를 곁에서 지켜보며 흘러간 젊은 시절을 함께 이야기하고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으로 여생을 같이 할까 숙의할 집사람이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해 더욱 그러했다. 집사람이 23년을 같이 했던 옆자리가 오늘따라 더 휑하니 비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60번째 돌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젊었을 때만 해도 환갑연은 자식들이 올리는 생애 최고의 향연이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수명이 1960년의 52세여서 2005년에는 79세로 늘어남에 따라 환갑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환갑을 맞으신 부모님에 축하연을 차려드리지 않는 것은 불효중의 불효였다. 다들 먹고 살만해진 덕에 평균연령이 80세 가까이로 늘어나 60돌 환갑 때 차리는 전통적인 장수축하연은 10년 후인 칠순으로 미룬다. 대신에 이제는 환갑을 맞이하여 지난 60년의 인생을 반추하고 앞으로 30년 가까이 전개될 새로운 인생을 어떤 프로그램으로 꾸려나갈 것인가 숙고해보는 것이 더 의미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자식들이 집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이나 다른 나라로 나들이를 다녀오시라고 주선하는 것이 요즈음의 풍속도인 것 같다. 내 두 아들도 산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내게 모처럼 해외의 명산을 다녀오시라고 바깥나라 나들이를 준비해왔는데 생각지 못한 추락사고로 내가 병상에 누워있게 되어 뒤로 미뤄진 것이다.
지나온 60년간의 내 인생이 화려하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 가치 있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없는 살림에 악착같이 공부해 우리시골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한 것이 내가 잘한 첫 번째 일이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가슴 뿌듯해 하셨으며 나 또한 경쟁력을 갖게 되어 급격한 환경변화에 낙오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앞서 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집사람을 만나 두 아들을 낳고 건실하게 가정을 꾸려나간 것도 서울의 유수대학을 졸업한 것 이상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집사람이 두 아들을 올곧고 건강하게 키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수 기업에서 자기 일을 성실히 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대견스럽고 며느리 또한 아들 못지않게 역동적으로 일하고 있어 또한 그러하다. 졸업 후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 결과적으로 국부를 키우는데 일조한 것도 잘한 일이다. 5년간의 교직생활에 이어 사기업에서 20년을 일했으며 마지막 5년간은 직접 제조회사를 차려 40명이 넘는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나뿐만 아니라 집사람도 27년간 교직에 봉직해 제자들을 키워냈다. 3년 전에 능력부족으로 5년간 경영해온 회사를 접은 것이 내 인생 마지막 오점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래서 지금도 그 여파로 조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이끌어온 내 삶이 가치 있었다고 자평한다.
지난 30년간은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고 모자람 없이 쓰고자 하는데 주력해왔다면, 앞으로 30년간은 주어진 범위 내에서 돈을 아껴 쓰고 대신에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데 내 시간을 쓸 생각이다. 새로운 경험이란 국토 껴안기다. 지난 5년간 지속해온 우리나라 산줄기 종주는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다. 우리나라 유수 강들의 물줄기도 탐방하고 이 강들에 물을 대는 산줄기도 걸어볼 생각이다. 내 국토 껴안기가 얼마고 진전되면 그 감동을 언제고 책으로도 펴낼 생각이다. 우리나라 문학이나 역사/지리를 다시 공부하고 싶다. 내 후년쯤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욕심 같아서는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와 박사학위도 받고 싶다. 한문도 공부하여 우리나라 고전을 주해 없이 보고 싶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내가 책을 지을 때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육체적 건강은 내 국토 껴안기로, 정신적 건강은 새로운 공부로 지켜간다는 것이 60돌을 맞아 그려보는 내 삶의 얼개다. 또 하나 욕심을 낸다면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금의 시력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난 60년간 읽고 모아온 약 2,000권의 도서에 다시 그 만큼을 더 읽어 읽어내고 싶다. 이리하려면 돈 버는 일에 따로 나서지 않아도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여기 저기 국토를 돌아다니고 부지런히 도서관에 나가야할 것이다. 자식들이 이상의 프로그램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확신하기에 60돌이 더욱 의미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1973년 여름 아버지 환갑날 내가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어 회갑연을 차리지 못하고 칠순으로 미뤘다. 35년 만에 내가 또 병원에 입원해 병상에서 60돌을 맞는 것이 그 때 아버지 회갑연을 해드리지 않아 벌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두분이 나를 잘 키워주셔서 오늘 이 글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저 두분에 고마울 뿐이다.
쌍용제지 입사동기인 손이연 사우가 다녀갔다.
*11월 22일 토요일
입원4주 만에 한림대 성심병원을 퇴원했다.
그간 바위에서 떨어져 골절된 요추를 수술 받고 흉추는 베드레스팅(Bed Resting)으로 치유해왔다. 더 이상 병원에 머무르면서 치료를 받을 것이 없어 일단 퇴원을 하지만 몸이 다 나은 것은 아니다. 집에서도 상당기간 의사선생님의 지침대로 보조기를 차고 생활하고 하루 세 번 한 시간 씩 운동하는 것 말고는 계속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부러진 흉추를 다시 굳혀야 한다. 앞으로도 몇 달 동안 장소만 바꿔 비인생활(非人生活)을 더 해야 한다. 헬기로 이송해야 할 만큼 크게 다친 내가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이 병원 의료진의 정성어린 치료덕분이다. 김용찬교수님과 이성진 주치의선생님, 그리고 9층 정형외과의 문간호사님을 비롯한 많은 간호사님들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병원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이 병원이 직원가족에 제공하는 할인혜택을 받고도 4백만원가량 나왔다. 여기에 보험으로 처리 안 되는 간병비와 보조기 값을 더하면 5백만원이 되는 셈이다. 병원비로 보태라고 친지들에게서 받은 것이 있어 안 받겠다는 아들에 2백만원을 떼 맡겼다.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노인이라면 적지 아니 부담이 될 만한 큰돈이다. 의료보험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천만원 돈이 훨씬 넘을 텐데 생각하자 1970년대에 국민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고 박정희대통령의 결단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국민복지란 없이 사는 사람들에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받을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며 병들고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한다면 이것이 최상의 국민복지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국민복지의 부족함을 얘기하지만 이 정도의 복지도 말만 앞세우고 반대만 일삼는 몇 몇 시민단체 덕분이 아니고 박대통령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이 나라의 부를 일으킨 기업가들, 그리고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일해 온 보통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도 그늘진 곳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국민복지는 세금 한 푼 안내면서 온갖 진리와 선을 다 전세 낸 양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입이나 붉은 머리띠가 아닌, 실천적으로 국부를 증강시키는 데서 나올 것이 분명하다.
내 퇴원에 대비해 큰 아들이 주 2회 한나절 씩 집안일을 도와주는 가사도우미를 신청했고 막내아들이 허리를 구부리지 못하는 나를 위해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했다. 카세트테이프만 틀 수 있는 지금의 포터블라디오는 CD플레이어가 있고 리모컨이 되는 것으로 바꿀 생각이다. 거실의 텔레비전을 내가 장기간 누워 있을 안방으로 옮기는 것은 조금 기다렸다 결정하려 한다. 음악과 책만으로 등을 눕힌 비인생활을 견뎌보고 너무 무료하다 싶으면 그 때가서 옮겨도 되겠기에 말이다. 비인생활을 하는 중 그동안 소원했던 음악과 소설에 빠져보고자 한다.
입원해 있는 동안 문병을 오고 도움을 준 고마운 이들에 오늘 퇴원했고 고맙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들이 전해준 고마움으로 쌓은 감사 탑은 고스란히 집으로 옮겨놓았다. 모두들 고맙고 또 고맙다. 아들이 내게 고맙다는 표현에 너무 인색하다고 한다. 아들과 며느리 내식구들에도 고맙다는 인사를 정식으로 전한다.
늦어도 내년 4월 다시 산에 오를 수 있도록 요양을 잘하고 걷기운동을 계속해 몸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다. 산행에의 꿈을 이어가는 것이 내 실존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이 꿈이 있어 비인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우명길,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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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 병상일기를 여기서 접고자 합니다.
등을 눕힐 병상만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놓았을 뿐 완치된 상태가 아니어서 저의 병상생활은 퇴원 후에도 몇 달간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는 봄이 다 가기 전에는 낮은 산은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 아직은 정확히 모릅니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병상생활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병원에서보다 훨씬 단조롭습니다. 그러기에 일기로 남길만한 건들이 거의 없어 병상일기를 그만 마무리합니다.
퇴원 후 제 하루 일과는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차려먹고 난 후 산본역 근처의 공설운동장을 1시간가량 돌고 옵니다. 등을 눕혀 음악을 듣고 책을 보다가 오후 1시쯤 해서 침상에서 일어나 점심을 찾아 먹습니다. 다시 운동장에 나가 운동장 7바퀴(약3Km)를 돈 후 집에 가는 길에 슈퍼를 들러 장을 보기도 합니다. 골절된 흉추를 달래느라 다시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책과 씨름합니다. 하루 세끼 꼬박 밥을 찾아 먹는 것이 작은 낙이기에 저녁을 거를 리가 없습니다. 저녁 식사 후 이번에는 가까운 학교운동장과 붙어있는 근린공원을 이어서 한 시간 가량 걷습니다. 밤 시간에 걷는 것이어서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염려되어 상당히 조심을 합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8시20분에 시작되는 홈드라마를 다 보고나면 다시 침상에 눕습니다. 밤 시간 독서는 수면제이기에 11시 이전에 잠이 듭니다만 아침5시 조금 넘어 눈을 뜨기 까지 몇 번은 눈이 떠져 눕는 자세를 바꾸곤 합니다. 1월들어서는 누워있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컴퓨터에 앉아서 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곤 합니다.
산본을 멀다않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어 제 하루 생활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단조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 친구들 덕분에 시내로 나가 1-2시간 무리해서 맥주를 들은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주말산행을 마치고 찾아온 경동동문산악회원들, 퇴사 후 오랜 만남으로 쌍용제지라는 계약의 직장을 인연의 장으로 바꾼 몇몇 사우들, 백두대간을 같이 뛴 돌백님과 카우보이님, 그리고 고향 땅 파주의 도마산초등학교 동창들이 찾아와 장기간 병상생활로 겪을지도 모를 제 알콜결핍증을 해소해주었습니다. 이들과 맥주를 들고나서 그 이튿날 아침 운동은 거르는 것은 옆구리 통증이 더해진 것 같아서입니다. 한남정맥 종주 길에 만나 뵌 인천의 요물님과 북한산님이 저의 쾌유를 비는 전화를 주셨습니다. 이규성 동기는 제게 23권의 책을 갖다 주느라 산본 제집을 두 번이나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마움의 탑은 퇴원 후에도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마움의 탑이 높아져 몽고의 침공으로 소실된 황룡사의 9층 목탑을 다시 보는 듯합니다. 이 탑을 같이 쌓아 올린 모든 분들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산에 오를 수 있을 때 하루 날잡아 춘천소방서의 119산악구조대 여러분들을 찾아 뵙고 감사인사 올리고자 합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이런 병상일기를 다시 쓰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할 뜻입니다.
이제는 불편한 몸으로 쓰는 병상일기를 접고 대신에 건강한 몸으로 산행일기를 다시 쓰고자 합니다. 다시금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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