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기(3)-흥진비래(興盡悲來) (?)
어렸을 때 추석은 그날 하루 잘 먹고 마음 편히 놀 수 있어 기다렸습니다. 송편을 먹을 수 있고 잘 하면 새 옷도 입을 수 있어 구정과 마찬가지로 손꼽아 기다리는 하루였습니다. 결혼해서 추석이 어르신과 고향 분에 자식들을 잘 키우고 있음을 자랑하고픈 하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아들이 올곧게 자라준 덕분입니다.
집사람을 먼저 보내고 나서 추석이 조금은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하늘 높이 떠 휘영청 이 땅을 밝히는 보름달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달이 연인들 간의 메신저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는 것은 “달하, 높이곰 돋으샤 어기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로 시작되는 백제가요 “정읍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달아 높이 높이 솟아 멀리 있는 내님에게 비추어다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노래를 읊은 아낙은 추석날 밤이면 길 떠난 낭군에 높이 솟은 달을 보고 소식을 전하고픈 마음이 더욱 애절했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러합니다.
쾌청한 추석 날 밤 이 땅을 밝게 비친 보름달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한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한 복통이 일어나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어야 해서였습니다. 오른 쪽 배와 명치부근에 통증이 느껴진 것이 차례를 지내고 산본 집으로 돌아온 후인 저녁 6시 경이어서, 늘 다니던 평촌의 한림대병원에 늦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담낭에 생긴 큼직한 돌 때문에 생긴 통증이어서 복강경 수술로 문제의 담낭을 제거한 후 퇴원했습니다. 아직은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 많이 불편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기는 7년만의 일입니다. 2008년 10월 강원도 춘천의 용화산을 오르다가 낙상사고로 척추와 갈비뼈를 크게 다쳐 이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암으로 집사람을 먼저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 시련이 목 디스크 수술과 회사부도정리에 이어 낙상사고로 끝이 났고, 2010년 후로는 기쁜 일이 연속해 생겼습니다. 방송대 입학 및 졸업, 막내아들 결혼 및 득남, 백두대간 및 9개 정맥 종주, “섬진강 둘레산줄기에서 길을 찾다”라는 저서 발간, 결혼 10년 만의 큰아들의 득남 등으로 순조롭게 이어져 마음의 풍요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의미의 고진감래(苦盡甘來)가 허구한 날 계속될 리 없다 싶어 일말의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번의 입원수술이 고진감래(苦盡甘來)의 낙이 끝나고 고생길로 접어드는 ‘흥진비래(興盡悲來)’의 전조가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며칠 안 되는 병상일기를 적어봅니다.
2015년 9월27일(일) 맑음
두 아들과 함께 파주 형님 댁에서 추석차례를 올린 후 인근 선산으로 성묘를 다녀왔습니다. 사람이 죽고 난 후 혼백이 몸에서 빠져나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한다 합니다. 다시 말해 혼(魂)은 하늘을 날아가고 백(魄)은 땅에서 여기저기로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혼(魂)은 향으로 불러들이고 땅으로 흩어진 백(魄)은 술로써 불러 모으기 위해서 제사 때 향과 술을 쓰는 것이기에 성묘 때 술을 갖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풍습이라 하겠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몰라 절만 두 번 올렸는데 다음 성묘 때부터는 약주도 같이 올리고자 합니다. 그러고 보니 차례와 제사는 부모 자식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옛 어른 들과 살아있는 자손들이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먼 훗날 제가 죽어 없어져도 제 자식이 저의 혼백을 불러들여 저와 대화를 시도할 것기에 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어 몸에서 혼백이 빠져나가기까지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이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생로병사의 매 과정마다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갈 것인데 그 중 우리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과 사는 순간의 일이고 생에서 사로 가는 긴 여로에 병이 들고 늙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잘 늙어 가면 노추를 면할 수 있지만 병에는 잘 아프다는 것을 어떤 경우든 기대할 수 없기에 생로병사 중 우리 삶을 간단치 않게 만드는 대표적인 것은 다름 아닌 병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제 생각이 과히 틀리지 않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급성담낭염으로 추석날 밤 입원해 수술을 받고나서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성묘를 다녀오고 산본 집으로 가는 길에 인덕원에서 내려 큰아들이 사준 점심을 잘 먹고 집으로 돌아와 두 시간 가량 푹 쉬었습니다. 저녁 6시경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안양의 처갓집을 찾아가는 중 명치와 오른 쪽 배에서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마을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가 장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곧바로 10분여 누워 쉬면서 혹시나 작년에 앓았던 부정맥이 다시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큰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며느리가 알려준 대로 맥박을 재어보니 규칙적으로 뛰어 일단 안심하고 산본 집으로 돌아왔는데 당연히 줄어들어들 것이라 생각한 통증이 오히려 심해져 밤 10시경 큰아들에 문지메시지를 남기고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 평촌의 한림대병원 응급실로 이동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가지 않아 응급실에서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고통을 참고 힘들게 설명하는 저를 보고 즉각 받아들여 X-ray와 CT검사를 했습니다. 검사결과 담낭에 돌이 들어 있고 십이지장과 담낭을 이어주는 담도에도 작은 문제가 있음을 알아낸 의사선생께서 추석연휴가 끝나야 본격적인 치료가 가능하다고해 일단 입원수속을 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담낭에 통증이 오면 대개의 경우 아랫배를 움켜쥐고 때굴때굴 구른다는데 다행히도 저는 그 정도는 아니어서 혼자서 택시를 타고 응급실을 찾아가 걸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9월28일(월) 맑음
응급처치료를 지불한 후 입원수속절차를 밟았습니다. 응급실에서 누워 있다가 자정을 막 넘겨 10층의 소화기내과 병실로 자리를 옮기고 나자 그 제서야 큰아들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진통제의 힘으로 숙면을 취한 후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금식조치로 영양제 주사를 맞아 말하기와 밥 먹기를 주 기능으로 하는 입이 말하는 기능만 작동되어 아침 식사시간이 별안간 한가해져 무료했습니다. 큰아들이 산본 집으로 가서 옷가지와 책 몇 권을 들고 와 얼마간 머무르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추석연휴로 본격적인 치료가 없어 도와줄 만한 일이 아직은 없어서였습니다. 작은아들에는 손자가 열이 나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다며 병원을 다녀왔다고 해 애나 잘 돌보고 문병오지 말라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가고 시간이 남아돌아 가지고 간 “사도바울”을 읽어내려 갔습니다. 낮잠을 많이 잤는데도 밤10시가 채 안되어 잠이 들어 비교적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9월29일(화) 맑음
6인실의 한 가운데 자리는 7년 전만해도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창가 자리는 춥고 문가 자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조용할 때가 없어 가운데 자리가 선망의 자리였는데 이틀 밤을 자고나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는 아침이 되면 열어 젖힌 칸막이용 커튼이 이번에는 닫혀 있어 창 너머를 바라보고자 창가 자리 환자 보호자에 커튼 좀 걷울 수 수 있겠느냐 정중히 물었더니 대답인 즉 안 된다는 것이어서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다행히 문가 자리 환자께서 동의를 해주어 그 쪽 커튼을 반쯤 제처 놓아 새장안에 갇히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7년 만에 병실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아무래도 공용TV 철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 후부터 대부분의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 텔레비전을 보느라 커튼을 걷어 젖혔는데 TV가 없어져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6인실에서 TV를 내쫓은 것은 다름 아닌 스마트 폰입니다. 이것은 창가 쪽 환자가 밤새도록 스마트 폰을 켜 놓고 보아 잠을 청하는데 애를 먹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큰아들이 다시 문병 왔을 때 마침 창가자리 환자가 퇴원해 그 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간호사 선생께서 세 번 혈압과 체온을 재 갔고, 혈액검사 용 피를 채취해갔는데 혈압도 정상이고 당뇨도 발견되지 않아 다행이다 했습니다. 오전 중 약 40분에 걸쳐 병원에서 틀어준 클래식음악을 감상하면서 MRI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실에서 국악이 클래식을 대체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저녁 무렵 문가 자리 노인환자가 고성을 지르며 간호사를 꾸짖어 이를 참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할아버지 환자가 손녀 나이의 간호사에 주사를 잘 못 놓는다고 경찰에 고발하겠다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은 노추 그대로였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6인실의 풍속도려니 하면서 참기를 잘 했다 한 것은 그 노인이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들어줄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자칫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금식은 계속되었지만 점심때부터 물 마시는 것이 허용되어 냉수로 가슴 속을 씻어내자 새털구름이 펼쳐진 창밖의 맑은 하늘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가을이 분명하게 감지됐습니다.
9. 30일(수) 흐림
연휴가 끝나 아침 8시경 주치의 선생님이 다녀갔습니다. 간수치가 좋아졌다며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내일 위내시경검사로 십이지장과 담낭을 이어주는 담도를 먼저 청소해야 한다고 말씀 주셨습니다. 오전에 폐기능 검사와 심전도검사, 그리고 초음파 검사를 모두 마치고 집에서도 읽지 않는 일간신문을 지하구내매점에서 사들고 병실로 올라왔습니다.
지난 1월 미국을 다녀오느라 중단했던 신문구독을 귀국 후 다시 이어가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유력지들에 대한 불신이 커서입니다. 젊어 한 때 신문사의 기자직에 응시해 떨어졌을 만큼 신문의 역할과 기능에 긍정적이었던 제가 국내 언론을 불신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실보도를 외면하고 여론몰이에 몰두하고 있다는 제 나름의 평가 때문입니다. 한 때 언론이 제4부로 칭해졌을 만큼 영향력이 컸던 시기는 비민주적 권력집단이 이 나라의 정치를 전횡해 언론이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1950-80년대가 아닌가 합니다. 이 때에 우리 언론은 천관우, 송건호, 최일남 등의 대기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제가 이들 대기자들에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에 근거해 직필을 해서입니다. 오랜만에 신문을 읽고 느낀 것은 허접스런 정치기사가 너무 많고 해외뉴스가 심도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직도 열이 38-40도를 오르내린다니 걱정입니다. 담도 안의 담즙제거를 위해 하는위내시경 검사동의서에 자필로 서명했습니다. 어차피 받을 것이라면 한시 빨리 했으면 합니다.
화성에서 소금물을 발견했다는 TV보도를 보고 하나 뿐인 지구가 포화상태가 되면 그 사이 준비해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화성으로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그렇다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구를 지키는 일의 중요성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위내시경검사로 담도를 넓히고 담즙을 제거하는 시술이 잘되어 곧바로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오른 쪽 콧속으로 가느다란 관을 넣어 담도에서 나오는 담즙을 받아내느라 얼마간은 불편할 것 같습니다.
큰아들이 샤워 실에서 제 몸을 닦아주어 온 몸이 개운했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 목욕탕으로 데려가 몸을 닦아주곤 한 제가 이번에는 아들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30여년의 세월이 부자간의 역할을 바꿔놓은 셈인데 이렇게 늙어간다 싶어지자 아들 손길이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작은며느리가 손자의 몸에서 좀처럼 열이 내리지 않아 찾아뵙지 못하다는 전화를 해왔습니다. 병실의 밤이 유독 길어 몇 번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어 분주했던 하루도 같이 잠재웠습니다.
10월1일(목) 비
새벽같이 일어나 X-ray를 두 번 찍고 난 후 아침을 맞았습니다. 창문의 커튼을 젖히고 환기용 작은 창문을 반쯤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물 듯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탁한 실내공기가 어느 정도 환기가 되었다 싶어지자 밖에 비가 내려서인지 한기가 느껴져 창문을 다시 닫았습니다.
남자분이 혈액검사용 채혈이 필요하다며 주사를 놓았으나 실패하고 한참 후 여자 분이 와서 채혈을 해갔습니다. 간호사분들은 한 번에 주사를 놓는데 단 한 번에 성공하는 남자 분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남녀가 각각 잘 할 수 있는 재능이 같지 않기 때문일 것입이다.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넘어가면서 여성들이 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 남성들이 많은 일자리를 위협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여성 고유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주사를 놓는 일을 남성도 하겠다고 덤벼들어 환자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주치의 문성훈 교수님께서 오셔서 오늘 점심부터 식사를 해도 된다고 말씀해 아홉 끼 만에 죽을 들었습니다. 이제껏 입의 주 기능이 말하는데 있다고 생각해오다 이번 금식을 통해 입의 원초적 기능이 먹는데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병원에 들어와 제 입이 반만 기능하고 나머지 반의 기능을 정지당해야 했던 것은 입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뱃속의 담낭에 염증이 있어서입니다. 이번 입의 일부 기능정지는 입의 잘못이 아니고 전적으로 제 잘못이어서 첫 숟가락을 들면서 입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병도 아닌 것을 알리기가 뭣해 머뭇대다가 마침 부탁할 일이 있어 고교동창 이규성, 중학교 동창 황규직, 방송대 동창 홍성희 학우에 입원사실을 알렸고 큰처남에게도 오는 토요일 장모님생신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렸습니다. 가을비가 내려서인지 몸이 축 늘어지고 기분이 가라앉았었는데 몇 몇 지인들과 통화를 마치고나자 다시 생기가 났습니다.
고맙게도 외과의 이정우 교수님께서 직접 올라오셔서 10월3일자로 수술 일정이 잡혔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창가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갑갑함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다른 환자들이 내는 소리에 신경이 쓰여 귀막이를 하고 잤습니다. 밤새도록 스마트폰을 켜놓은 바로 앞 환자는 나름 소리를 줄인 것 같으나 한밤중에는 많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문가의 노인환자의 무례함은 여전해 병실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래도 7년 전의 정형외과 병실보다 조용한 것은 소화기내과의 병실에 교통 환자가 없어 사건처리 관련자들의 출입이 없어서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밤 10시 이후 새벽5시까지 잠을 자야하는 동안만 어느 정도 조용할 수만 있다면 독실이나 2인실보다 6인실이 사람 사는 동네 같아 더 좋습니다.
10월2일(금) 쾌청
수술날짜가 내일로 잡혀 그 준비로 바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X-ray를 찍고 반 시간도 못되어 또 찍었습니다. 혈관이 잘 안 나타나 채혈을 하는데 세 번이나 주사를 맞았습니다. 외과에서 찾아와 수술부위의 털을 미리 깎아내고 사전에 설명을 듣고 수술동의서에 자필로 서명하는 등 오전 내내 어수선했습니다.
13시경 이규성/조 현 고교동문이 문병을 와 1시간여 환담을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우산 손경석 평전” 등 3권의 책을 가져온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아침에 큰며느리가 갖다 준 큰아들 책 “루카치의 미학”은 환자가 읽기에는 내용이 난해해 “우산 손경석 평전”을 먼저 펼쳐들었습니다.
15시경 인천에 사는 정병기고교동문이 찾아와 빵을 같이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규성교수나 정병기 사장 모두 꽤 오랫동안 함께 산을 다녀 자연 산 이야기로 화제가 모아졌는데 열흘 전에 종주를 마친 한강기맥이 주 대상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먼드래재에서 발이 묶인 정병기동문이 한강기맥종주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일행들이 많아 일정을 잡기가 어려워서라 합니다. 저 또한 혼자가 아니고 팀을 만들어 했다면 아직도 한강기맥종주를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봉현 산우께서 연휴에 저녁 백두대간의 마지막 두 구간을 종주하고자 오늘 밤 설악에 들어간다는 전화를 해왔습니다. 한계령-미시령과 미시령-진부령으로 나누어 두 구간을 마치고나면 남한 땅 1대간9정맥을 모두 마치는 것이어서 마지막 구간은 함께하며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어서 축하인사만 했습니다. 두 해 전 제가 1대간9정맥 종주를 낙동정맥의 통리-매봉산 구간에서 마무리할 때 우정산행을 같이 해준 바 있어 성봉현 산우에 더욱 미안했습니다.
저녁 7시가 넘어 문병 온 이기후 고교동문도 역시 산 친구입니다. 9년 전 설악산을 같이 오른 이 친구가 본격적으로 산에 빠진 것은 한북정맥 종주 때부터입니다. 반시간도 못 올라가 쉬기를 반복해야 할 만큼 산에 익숙지 못했던 이 친구가 요즘은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뒤늦게 산과 가까이 덕분에 두 무릎이 멀쩡해 누구보다 오래 산을 오르내릴 수 있는 이 친구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제 저녁 먹은 밥이 소화가 안되어 속이 계속 더부룩했습니다. 입원 첫날 대변을 보고난 후 단 한 번도 속을 비우지 못해 간호사 분께 말씀드려 소화제를 먹고나자 이러다가 항문도 매일 대변을 보는 주 기능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조금 했습니다. 문병 온 친구들이 사온 빵을 큰며느리에 넘겨주면서 세 달전 태어난 새 손자가 아직은 빵을 들기에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뒤늦게 본 손자라서 더욱 보고 싶은데 병원에 몸이 묶여 스마트폰으로 사진만 뚫어지게 보았습니다. 어서 커서 빵도 들고 뛰어다녔으면 합니다.
10월3일(토) 맑음
지난 밤은 귀막이를 하고 잔 덕분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5시에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 현관 문밖으로 나서자 새벽공기 특유의 냉랭함이 느껴졌습니다.
병원건물을 두 바퀴 돌면서 참으로 이 병원과 인연이 깊다 했습니다. 2000년 3월 제가 이 병원을 처음 찾은 곳은 영안실로 수명을 다한 집사람을 영원히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후 2002년 목디스크 수술을 이 병원에서 받았고 2008년에는 척추수술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 담낭제거 수술을 받습니다. 산본 집에서 가깝고 믿을 수 있는 대학병원인데다 며느리가 이 병원에 근무해 제게는 맞춤병원 같은 곳입니다. 부실한 치아에 임플란트 7대를 해 낀 곳도 이 병원입니다.
아침9시에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배에 구멍을 뚫고 하는 복강경시술로 담낭을 제거 한 후 11시20분경 4층의 외과병실로 옮겼습니다. 7년 전의 척추수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경미한 수술인데도 수술 직후 통증은 여전히 심했고 전신마취를 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아픈 배를 참아가며 가래를 뱉어내야 했습니다. 아들이 계속 붙어 간호를 해줄 수 없어 이틀간 간병인을 불러 맡기기로 했습니다. 오후 1시경 인사를 나눈 간병인 아주머니의 나이가 저와 같은 68세임을 알고 세상사는 것이 녹록치 않음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요 며칠 간 춥고 열이 난다 한 것은 체온이 37.3도까지 올라가서였습니다. 자칫 기침을 오래 참다가는 폐렴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옆구리가 결려오고 수술부위에 통증이 더해져도 나는 대로 기침을 하느라 고통스러웠습니다.
창가의 젊은 환자분이 낮 시간 커튼을 젖히는 것을 동의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창밖의 한마음공원은 이 병원이 자랑하는 옥상 쉼터여서 이 쉼터에서 자라고 있는 푸르른 나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5시를 조금 넘겨 1965년 문산중학교를 같이 졸업한 황규직 동창이 문병을 왔습니다. 중학교3학년 한 해 동안 한 집에서 기거한 이 친구는 할머니가 돌보아주었고 저는 바로 옆방을 얻어 자취를 했습니다. 그때 먹을 것을 자주 챙겨주신 이 친구 할머니가 엄청 고마웠으면서도 그 후 딱 한 번 밖에 찾아뵙지를 못해 죄송하고 이 친구에도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돈벌이에서 손을 뗀지가 오래되기는 둘 다 같은 처지에 병원비에 보태 쓰라고 제게 준 10만원이 부담스럽고 고마웠습니다.
수술에 대비해 오늘 자정부터 시작된 금식이 일부 풀려 저녁8시부터 물을 마시기 시작해 이기후 동문이 사온 인삼진액도 같이 마셨습니다. 진통제를 들고 잠을 청했습니다. 수술이 잘 되었다니 얼마나 빨리 회복하느냐는 제 몫입니다.
10월4일(일) 맑음
아침 5시에 일어나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조금 걸어보았으나 수술부위의 통증이 엄청 심해 그만두었습니다. 금식이 완전히 풀려 점심 식사로 죽을 들고나자 몸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아 다시 일어나 4층의 어린이 공원을 찾아갔습니다.
집에 있는 침대의 스프링상태가 안 좋아 오래 누우면 등이 좀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 큰아들에 침대를 갈아야겠다고 말했더니 오늘 낮에 집에 가서 침대사이즈를 재왔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두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사준 침대로 20년은 족히 됐으니 이제 갈 때도 됐지만 결심을 못하고 미뤄온 것이어서 이 참에 꼭 바꿀 생각입니다.
작은며느리와 손자 모두 감기가 심하게 걸려 막내아들이 혼자서 문병을 왔습니다. 저야 곧 퇴원을 할 것이기에 걱정되는 것은 손자의 감기입니다. 추석날 열이 40도까지 올라가 병원을 다녀온 세 살 박이 손자가 이제 열이 38도로 내려가자 감기가 걸려 고생을 하고 있으니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두 아들을 키울 때보다 손자들에 더 애틋이 정을 쏟는 것은 모든 할아버지들이 다 같은 것으로 보아 정(情)도 어느 정도는 학습의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 늦게 큰처남이 다녀갔습니다. 장모님께서 제가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제가 좋아하는 감주를 만들어 보내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큰처남에 항상 고마워하는 것은 살아생전 집사람에 정말 잘해주어서입니다. 집사람을 보낸 지 15년이 넘었는데도 처가 식구들과의 관계가 예전처럼 유지되어 두 아들도 외가 집을 다니고 있습니다.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며 읽고 있는 “우산 손경석 평전”은 제목과는 달리 평전으로서 갖출 바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반복되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한국산서회를 창립한 우산 손경석선생은 우리나라 등산사에서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독보적인 존재로 황무지에서 산서문화를 일군 존경받는 산악인입니다. 2013년 타계한 선생을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등산 반세기” 등 선생의 저서를 몇 권 읽어 제게는 낯선 분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분이 책임지고 평전을 다시 썼으면 하는 것은 제가 1973년 여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고은의 “이중섭 평전”을 읽고 난 가슴 뛰는 듯한 감흥이 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 사이 차도가 있어 진통제의 도움 없이 취침했고 밤중에 일어나 혼자서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내일 있을 담도검사에 대비해 자정부터 다시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10월5일(월) 맑음
아침 일찍 담도조형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며느리를 만났습니다. 병세가 완전히 호전된 것이 아니어서 혼자서 거동하기가 불편해 고심하다가 하루만 더 간병인을 쓰기로 결정하자 마음이 놓였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 복도를 걷던 중 쌍용제지에서 함께 일한 지인을 만났습니다. 우울증을 앓으시는 노모를 정신병동에 병실이 없어 일반병실로 입원시켰더니 일반 환자와는 달리 보호자가 24시간 붙어 있어야한다고 해 정신병동에 병실이 날 때 다시 입원시키기로 하고 일단 퇴원수속을 밟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울증처럼 가벼운 증세에도 자식들이 저토록 애를 먹는데 중풍이나 치매를 앓게 되면 오죽하랴 싶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수명이 늘어날수록 노인병에 걸릴 확률이 늘어나 피해가기가 어려운데도 오래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서중원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험금 신청에 필요한 서류목록을 문자로 받았습니다. 2008년 허리를 크게 다쳐 수술을 했을 때는 제가 몇 년 전의 사업실패로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여서 두 아들이 치료비를 지불했습니다. 애들을 키우고 자기 집을 장만하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2010년 3월에 보험을 들어놓아 두 아들에 병원비를 부담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산 손경석 평전”을 다 읽었습니다. 이번 달 산서회의 모임에서 이 책을 가지고 회원들이 독후감을 서로 나눌 계획입니다만, 그새 몸이 좋아져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퇴원하면 우선 선생의 마지막 역작인 “한국등산사”를 사서 읽어볼 뜻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분들이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제 선입견이 편견임을 안 것은 산서회에 가입하고 나서입니다. 이 회의 고문이신 93세의 김영도선생님께서는 작년에 “세로토레- 매스너,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역서를 내셨습니다. 올 들어 저보다 연배이신 한상철 고문님은 산을 소재로 한 한시집 “北窗”을 지어냈고 홍하일 님은 올 여름 “조선 선비, 설악에 들다”라는 흥미로운 산서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저도 열심히 준비해 이 대열에 끼고 싶습니다.
점심부터 금식이 풀려 죽을 들었고 오후 4시경 담도로 연결되는 가느다란 줄을 콧속에서 빼내자 이제 퇴원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내일 퇴원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미 퇴원소식을 들은 터라 병상에서의 마지막 밤이 더할 수 없이 평안했습니다.
10월6일(화) 맑음
침상에서 일어나 내려갈 때 수술부위가 아픈 것은 여전하지만 이 정도는 퇴원해서 견딜만한 해 예정대로 퇴원수속을 밟았습니다. 아침 시간에 잠깐 들른 큰며느리가 간병인에 간병비를 계산해 드리고 우선 병원비 230여 만 원을 지불했습니다.
서중원사장이 알려준 대로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간호실과 원무과 및 접수대 10번 창구에서 챙겼습니다. 1층에서 약을 타는 것으로 퇴원수속을 마치고 큰처남 차로 산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열흘 만에 돌아온 집에 여기저기 먼지가 보였지만 아들이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보낸다고 해 일단 미뤄두고 점심을 요기하고자 큰처남 차로 시내 죽 집을 찾아갔습니다. 큰처남은 아직 식사하기에 이르다며 먼저 가 저 혼자서 죽을 사든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술부위가 아파 과연 혼자서 지낼 수 있겠나 걱정됐습니다. 저녁식사도 나가서 사들었습니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이번이 제 평생 네 번째 받은 수술입니다. 그때마다 처음 얼마간은 수술을 잘 못 받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스스로 나질 것이라 믿지 못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나중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을 만큼 몸이 좋아진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어서입니다. 제가 현대의학을 신봉하는 것은 예방과 치료가 보다 과학적이고 병을 고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사례들을 충분히 쌓아왔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남은 일은 의사선생님이 권하는 대로 기름기 있는 음식을 삼가고 앞으로 석 달 간 금주(禁酒)와 금산(禁山)을 잘 지키고 매일 40분 정도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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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퇴원한지 한 주가 지났습니다. 치유속도가 생각만큼 빠른 것 같지는 않지만 매일 매일 좋아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밥을 지어먹고 청소도 했습니다. 어제부터 하루에 4km 가량을 천천히 걸어 일상을 상당부분 회복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10월13일이 9월 초하루입니다. 입원 날 꽉 찼던 달도 기울다 그도 끝나 오늘밤부터 조금씩 몸집을 늘려 두 주후면 다시 꽉 찰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제 몸이 몰라보게 좋아질 것이라 믿고 다시 보름달을 기다렸다가 스마트폰으로 제 사진을 달님에 보낼 뜻입니다. 하늘 높이 솟은 보름달이 제 건강한 모습을 집사람에 전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어 오늘 밤 밖에 나가 초생달을 올려다보고자 합니다.
이번 아픔이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끝나고 흥진비래(興盡悲來)의 전조라는 처음 생각을 떨쳐버리기로 했습니다. 달은 매달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면서도 수십억 년을 변함없이 존재해왔고 존재할 것인데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급성담낭염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싶어서입니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작은 일을 가지고 일희일비를 할 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진실로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제가 받아온 고마움의 탑이 이번 아픔으로 더욱 높아졌습니다. 아들 며느리 모두가 고맙고 의료진에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염려해준 친우들도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두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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