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남정맥 종주기

낙남정맥 종주기7(솔티고개-태봉산-유수교)

시인마뇽 2010. 8. 27. 12:00

                                                   낙남정맥 종주기7

 

                            *정맥구간:솔티고개-태봉산-유수교

                            *산행일자:2010. 8. 23일(월)

                            *소재지   :경남 사천/진주

                            *산높이   :태봉산190m/바락지산128m

                            *산행코스:솔티고개-옥녀봉-태봉산-2번구도로-유수교-정동마을입구정류장

                            *산행시간:10시31분-16시10분(5시간39분)

                            *동행      :나홀로 

 

 

  그동안 잘 이어온 산줄기가 하천 앞에서 뚝 끊어지고 물 건너 산줄기와는 물 위에 세워 놓은 다리로 밖에 이어질 수 없다면, 그 산줄기가 다름 아닌 산경표(山經表)에 버젓이 이름을 올린 정맥의 산줄기라면, 필히 그럴만한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다가 딱 한 곳에서 정맥 길에 밤나무 밭을 만들어놓고 사유지라며 다니지 못하게 해 물이 조금 흐르는 골짜기를 건넜다가 복귀한 일은 있어도 정맥을 종주하다가 하천을 만나 끊어진 산줄기를 다리를 건너 이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산은 물을 건널 수 없고 물은 산을 넘을 수 없다는 산자분수(山自分水)의 원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어떠한 산줄기도 물을 건너 이어질 수 없기에 물 건너 산줄기는 새로운 산줄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리가 이러한데도 우리 산줄기 족보의 고전이라 할 산경표(山經表)에 이번에 종주한 낙남정맥이 가화천에서 끝나지 않고 다리 건너 산줄기로 이어져 김해의 분산(盆山)에서 끝나는 것으로 나와 있는 데는 그럴만한 곡절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솔티고개에서 시작해 가화천을 가로지르는 유수교에서 낙남정맥 종주를 마쳤습니다. 다리를 건너 낙남정맥의 들머리를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와 어째서 낙남정맥 길이 물 위 다리로 이어지는가를 알아보았더니 치수(治水)를 목적으로 낙남정맥의 산줄기를 끊어내고 그 자리에 물줄기를 낸 것이었습니다. 원래 낙남정맥의 산줄기는 유수교에서 남쪽으로 10m떨어진 곳을 동서로 이어졌습니다. 이 산줄기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갈라지는 물은 가화천으로 흘러들어갔고 북쪽으로 갈라지는 물은 남강으로 유입됐습니다. 의령군과 함안군의 남강하류 지역과 삼랑진에서 물금에 이르는 하폭이 좁은 낙동강 유역 일대의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남강에 다목적댐을 건설하면서 수제문을 따로 만들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갈 강물 일부를 가화천으로 방류해 사천만으로 흘려보내고자 낙남정맥을 잘라내고 물길을 낸 것입니다. 그래서 남강댐은 다른 댐과는 달리 2개의 수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낙동강으로 방류하는 본문이고 또 하나는 가화천을 통해 남해로 물을 흘려보내는 제수문인데 며칠 전에는 제수문으로 방류한 강물이 본문으로 방류한 강물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낙남정맥이 잘려나간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면 산자분수(山自分水)의 원리는 틀렸고 따라서 산경표도 틀렸다고 잘 못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는 대로 그 곡절을 소상히 밝히는 것입니다.

 

 

 

  오전10시31분 2번 국도가 지나는 솔티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서울의 남부터미널에서 아침6시에 오른 첫 버스가 진주에 도착한 것은 9시40분경이었습니다. 진주터미널에서 9시50분에 출발하는 완사행 버스를 갈아타고 가다 솔티에서 하차해 산행채비를 한 후 옥녀봉등산로 안내도 앞에서 산길로 올라섰습니다. 북쪽으로 조금 올랐다가 오른쪽으로 내려가자 시멘트길 안부사거리가 나타났습니다. "옥녀봉2.0Km" 이정표 옆으로 난 북쪽 길을 따라 오른쪽 울타리를 옆에 끼고 올라선 낮은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희미한 흔적을 따라 정맥 길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풀숲이 우거지고 전혀 길이 나 있지 않아 포기하고 똑바로 내려선 곳이 옥녀봉1.5Km 전방지점의 십자안부였습니다. 이 안부에서 나무계단 길을 걸어 오른 봉우리가 해발171m의 옥녀봉인줄 모르고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 시멘트 차도로 내려섰습니다. 차도를 건너 "옥녀봉0.2Km" 표지목이 가리키는 대로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선 곳이 안내도에 나와 있는 “옥녀봉”으로 고도계의 높이가 120m로 나와 있어 이를 170m로 보정하면서도 이 봉우리가 지도상의 옥녀봉이 아니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옥녀봉”에서 내려다 본 진양호에서 눈을 뗄 수 없어 딴 데 신경 쓸 여지가 없었습니다. 솔티고개를 출발할 때만 해도 갈 길이 멀고 날씨가 무더워 옥녀봉을 들를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진양호 조망은 분명 생각지 못한 보너스로 이번에 아니 올랐으면 후회할 뻔 했습니다. 진양호는 남강댐 건설로 생긴 경상남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인공호수입니다. 옥녀봉에서 조망되는 진양호는 덕천강이 남강에 합류되는 서쪽의 덕천교에서 동쪽의 진수대교에 이르는 일부이나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그림 같고 남쪽 먼발치의 금오산 및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리산 천왕봉이 조망되어 옥녀봉은 진양호 최고의 전망지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이에 더해 옥녀봉에 엮인 비련의 러브스토리가 그 훨씬 후에 생긴 진양호의 이름을 드높였을 것입니다. 베를 짜서 덕천강에 씻어 팔아온 미모의 옥녀는 지나가던 민도령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과거에 급제하면 결혼을 하겠다며 민도령을 위해 옷감을 준비하고 있는 중 고을사또가 자신을 탐하는 것을 알고 민도령을 위해 준비한 옷감을 모두 잘라버리고 여기 덕천강에 투신했다 합니다. 이 사또는 급사하고 과거에 급제한 민도령도 따라 몸을 던졌고 이 벼랑 끝을 지나는 혼인행차가 매번 화를 당했다 합니다. 옥녀의 고혼을 달래고자 옥녀봉이 생겼고 이 지역이름이 완사(浣紗)라 불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옥녀봉의 암반에서 내려다 본 강물은 파랗다 못해 시퍼랬습니다. 팔각정 아래 안내판에 적힌 옥녀봉전설을 여기에 상세히 옮긴 것은 이 전설이 이 지방의 서사민요인 아래  “진주난봉가”와 대비되어서입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 삼 년을 살고 나니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아가 아가 메느리아가

             진주낭군을 볼라거든 진주남강에 빨래를 가게

             진주남강에 빨래를 가니 물도나 좋고 돌도나 좋으니

             이리야 철석 저리야 철석 어절철석 씻고나 나니

             하날 겉은 가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 못 본 체로 지내가네.

             껌둥빨래 껌께나 씻고 흰 빨래는 희게나 씨여

             집에라고 돌아오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아가 아가 메느리 아가 진주낭군을 볼라그덩

             건너 방에 건너나 가서 사랑문을 열고나 바라

             건너 방에 건너나 가서 사랑문을 열고나 보니

             오색가지 안주를 놓고 기생첩을 옆에나 기고 희희낙락하는구나.

             건너방에 건너나 와서 석 자 시 치 멩주 수건 목을 매여서내 죽었네.

             진주 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첩으야 정은 삼 년이고 본 처야 정은 백년이라

             아이고 답답 웬일이고

 

 

 

  민도령의 청혼을 받은 옥녀는 사또로부터 절개를 지키고자 투신했고, 진주낭군의 본처는 남편의 난봉에 절망해 자결했으니 죽음을 택한 이유가 서로 달랐다는 것이 하나고, 민도령은 자신을 위해 절개를 지키고자 투신한 옥녀를 못 잊어 따라 죽었으나 진주낭군은 본처를 죽음으로 이끌고도 슬퍼 울기는 했어도 따라 죽지 않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다른 점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옥녀와 민도령의 러브스토리가 진주낭군과 그 처와의 사랑싸움보다 훨씬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도 많은 연인들은 사랑의 힘이 죽음을 뛰어 넘을 만큼 위대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1시45분 옥녀봉 팔각정을 출발했습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강바람이 솔솔 부는 팔각정에서 한 잠 자고 가도 좋으련만 정맥 길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다시 “옥녀봉2.0Km” 지점까지 되돌아가야 해 갈 길이 바빴습니다. 옥녀봉 출발 36분 만에 되돌아온 “옥녀봉2.0Km"지점의 시멘트길 고개에서 동쪽으로 몇 m 내려가 차도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 점심을 들으며 반시간 넘게 쉬면서 몇 번이고 지도를 보고 숙고한 끝에 차도를 따라 올라가 연평리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서 정맥길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아스팔트길을 따라 북쪽으로 진행했습니다. 달랑 집 한 채만 있는 밋밋한 고개 마루에서 북동쪽의 산길로 올라서서 정맥 길에 복귀한 후 가파른 길을 올라 묘지 앞에 이르렀습니다. 잠시 정맥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난 희미한 길을 따라 묘지 위 봉우리를 올라갔으나 나뭇잎이 시야를 가려 기대했던 진양호를 보지 못하고 다시 묘지로 돌아오느라 10분 남짓 까먹었습니다.

 

 

  13시52분 해발191m의 태봉산에 올랐습니다. 돌아온 묘지에서 남동쪽 방향의 숲속으로 내려섰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서울지방과는 달리 진주지방은 폭염주의보가 발해질 만큼 무더웠습니다. 해발 고도가 고작 100m대인 낮은 산줄기를 따라 밟는 것이어서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처럼 고산을 넘나드는 시원한 골바람을 기대할 수 없어 더 후덥지근했습니다. 나지막한 봉우리를 2-3개 넘는 동안 다리에서도 땀이 나 바지가랑도 젖기 시작했습니다. 묘지 출발 40분이 채 못 되어 삼각점이 박혀 있고 표지기가 걸린 태봉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가 길 왼쪽의 잘 다듬어진 묘지에서 십 수 분간 푹 쉬었습니다. 생각지 않은 옥녀봉을 다녀오느라 두 시간을 그냥 보내 목표했던 진주IC분기점까지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아 이번에는 유수교까지만 진행하기로 하고 모처럼 마음 편히 쉬었습니다. 가까이에서 팔랑거리는 나비 한 마리도 더위를 먹은 듯 날개 짓이 많이 힘들어보였습니다.

 

 

 

  14시40분 2번 구 도로를 건넜습니다. 묘지에서 푹 쉰 후 14시15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돌가닥 길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얼마 후 2번 도로까지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진데다 시간도 넉넉해 천천히 걸어 내려가 더위를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웅덩이보다 조금 큰 연못을 지나 고가도로 밑으로 지나는 2번 구 도로로 내려섰습니다. 고가도로를 밑으로 지나자 마자 “박가네 가든”표지판 앞에서 오른 쪽 밭 위로 올라가 시멘트 수로를 만났습니다. 여기까지는 정확히 따라왔는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두 방향으로 난 수로 중 왼쪽 위로 난 수로를 따라 오르다가 수로 건너 오른쪽 숲 속으로 들어가 머리 위의 봉우리를 향해 무조건 십 수분 간 위로 치고 올라갔습니다. 14시58분에 올라선 봉우리가 지형도에 나와 있는 해발 128m의 바락지산으로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갔습니다. 고도가 낮아지자 모기들이 극성이어서 어디서건 오래 쉬지 못하고 곧바로 일어나야 했습니다. 바락지산에서 얼마간 남동쪽으로 내려가 살구나무 단지에 이르자 서쪽 건너편으로 한 주 전에 지났던 내동공원묘지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묘지 몇 곳을 지나는 중 동쪽으로 유수철교가 보여 유수교가 멀지 않았다 했습니다.

 

 

 

  15시56분 유수교에 도착했습니다. 살구나무단지에서 시멘트길로 내려가는 중 자주 색의 칡꽃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가난으로 채우지 못한 당분을 섭취하고자 들로 산으로 싸다닌 어린 시절에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캐먹은 단 것은 칡뿌리였습니다. 칡넝쿨이 무성했던 자리를 파들어 가 실한 뿌리를 캐낸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도 칡꽃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산 사진을 찍고 나서야 칡꽃이 요염하다 느꼈습니다. 철문이 반쯤 열린 조용한 건물이 왼쪽 가까이에 보이는 도로에 내려선 시각은 15시36분으로 그늘을 찾아 잠시 쉬면서 땀을 식혔습니다.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폐교된 가화초등학교의 교적비가 세워진 삼거리에 이르자 바닥이 드러난 가화천이 보였습니다. 삼거리에서 가화천을 오른쪽으로 끼고 북쪽으로 아스팔트길을 따라 올라 1049번 지방도와 만나는 유수교에 도착해 구간종주를 마쳤습니다.

 

 

 

  16시10분 정동마을 정류장에서 하루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유수교를 건너 다음 구간의 들머리를 확인한 다시 돌아오면서 가화천을 사진 찍었습니다. 옥녀봉을 오르느라 종주구간이 많이 짧아진 이번 산행의 수확은 낙남정맥이 잘려나간 곳을 확인한 것으로 유수교 남쪽 아래 시멘트로 바닥과 양 벽면을 해놓은 곳이 낙남점맥을 잘라낸 곳이었습니다. 북쪽 정동마을 버스정류장에서 10분을 기다려 진주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낙남정맥은 허리를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했습니다. 전북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섬진강 물을 끌어대고자 호남정맥은 옆구리가 뚫려야 했습니다. 치수(治水)는 산허리를 잘라내고 옆구리를 뚫으면서 수로를 바꿔야 할 만큼 지난한 일입니다. 낙남정맥을 잘라내고 수로를 낸 가화천이 그 위를 비행하는 두루미들로 마냥 평화로워보였습니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 못한 모양입니다. 홍수피해가 줄어든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은 남강댐이 고맙겠지만 유로가 13km 밖에 안 되는 가화천을 통해 남강댐의 담수가 너무 많이 사천만으로 흘러들어가 양식업이 피해를 보는 등 사천 쪽 주민들은 이런 저런 손해를 보나 봅니다. 이렇듯 치수 사업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갈등이 두려워 치수사업을 포기한다면 자연과 인간은 더 큰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 하는 것이 치산치수입니다. 낙남정맥도 이런 사리를 잘 알기에 허리를 내주었을 것입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