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5대강둘레산줄기 환종주기/섬진강 둘레산줄기

4.무등산권 환주기(16-21)

시인마뇽 2010. 9. 10. 08:23

 

 

환주기16:호남정맥 14구간(개기재-돗재)

 

*산행일시:2007. 10. 2일/ 7시25분-17시2분(9시간37분)

 

*소재지  :전남 화순/보성

 

*산높이  :두봉산631m, 태악산530m

 

*산행코스:개기재-두봉산-말머리재-태악산-돗재-한천리삼거리정류장

 

 

 

 

영국의 소설가 서머세트 모옴은 그의 소설 “인간의 멍에”에서 “돈은 제 6감”이라 했다. 돈을 시각, 청

 

각, 촉각, 후각과 미각의 5감에 이어 제 6감이라 칭한 것은 돈 없이는 앞서 열거한 5감이 제대로 기능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 싶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 아무리 많아도 돈 없이는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우리 몸의 감각기능이  올 스톱 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돈이 없다면 몸뚱어

 

리는 내 것이지만 몸뚱어리의 주기능인 감각은 내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 몸뚱어리의 진정한 주

 

인이 내가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돈이라면 이는 분명 서글픈 일이다. 우리 몸의 5감을 유감없이 작동

 

시켜야 삶의 즐거울 수 있는데 돈이 없어 5감의 충동을 억제하고 금욕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면 이 어

 

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껏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토록 냉혹하게 표현한 글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등산은 다르다. 등산이 국민적 스포츠로 떠오른 것은 1997년 IMF 환란 후의 일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인구의 약 8%가 등산을 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난 적이 있다. 이 기사 내용이 틀린 것이 아

 

니라면 300만 명 이상이 산을 즐겨 찾는다는 것인데 올 한해 프로야구의 누적관중 수가 400만 명을 조

 

금 넘음을 볼 때 대단한 숫자다. 등산 인구가 많은 것은 산에서는 돈 없이도 5감을 작동시킬 수 있기 때

 

문이다.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깊은 골짜기와 야생생물의 낙원인 숲을 만나볼 수 있고, 나뭇잎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맡으며 산림욕을 즐길 수 있고, 역동적인 계곡물 소리와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며, 골바람을 맞아 시원한 감촉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이다. 산 속에서는 비록

 

소찬이라도 도시의 성찬보다 훨씬 더 맛이 나는 것은 땀 흘린 후 미각이 돋아나서다. 이처럼 두 다리만

 

조금 고생시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5감을 가동할 수 있는 곳은 산 밖에 없다.

 

 

 

 

 

내가 10년 넘게 산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산에서는 돈이 제 6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서 멀

 

리 떨어진 지방의 먼 산들을 다녀오는데 드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안내산악회를 따라 간다면 돈

 

도 시간도 모두 절약할 수 있는데 굳이 나 홀로 산행을 고집하는 것은 걸음이 늦어서도 그렇지만 혼자

 

서 등산할 때가 여럿이 같이 할 때보다 5감이 훨씬 더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단독산행이 돈이 좀 든다

 

해도 한번 산에 들어가면 추가비용이 전혀 들지 않아 다른 스포츠에 비한다면 비용부담이 훨씬 적다.

 

서너 주 지나면 호남정맥에도 단풍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 때는 내 5감이 더욱 바빠질 것이다. 서머

 

세트 모옴이 살아 있다면 호남정맥 종주 길로 한번 그를 초대해 산사람들에는 돈이 아니고 두 다리가

 

바로 제 6감이라는 사실을 체험토록 할 터인데 그리 할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개기재의 들머리

 

로 들어섰다.

 

 

 

 

 

화순에서 아침 6시20분경 이양 가는 버스를 탔다. 능주를 조금 지나 짙은 안개로 사고를 낸 차들이 길

 

한 옆으로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양에서 만 오천 원에 택시를 잡아 개기재로 옮기면서 전 날 밤

 

지날 때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침햇살에 안개가 밀려나며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장치저수지를 보

 

았다. 옥리를 지날 즈음 안개는 완전히 가셨고 그래서인지 이번 종주산행은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7시35분 개기재를 출발했다. 들머리를 올라서자 버려진 밭떼기가 나타났는데 꽤 넓어 보였다. 묘지 2

 

곳을 지나 구릉에 올랐고 얼마 후 양씨묘비가 서있는 묘지를 지났다. 산행시작 50분이 채 안되어 사방

 

이 나무에 가려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468.6m봉을 올라 삼각점을 확인한 후 안부로 내려섰다가 지그

 

재그로 난 임도를 따라 올랐다. 시야가 트이는 산 중턱의 죽산안공묘지에서 남쪽 산자락을 가득 메운

 

운해를 카메라로 잡아보았다. 얼마고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만난 평평한 능선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

 

을 따라가 8시57분에 535m봉에 오르자 지난 번 봉화산에서 알바를 할 때 밤새 한 잠도 못자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예광탄 발사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9시40분 해발631m의 두봉산을 올라 십분 남짓 쉬었다. 535m봉에서 편안한 길을 따라 계속 북진했다.

 

한두 곳 구릉을 넘어 웅덩이가 파있는 590m봉에 올라 왼쪽으로 확 꺾어 진행했다. 껍질이 말쑥하고 키

 

가 훤칠한 활엽수 숲길을 지나며 나무도 신사나무가 따로 있다면 이 나무가 틀림없다고 생각을 한 것

 

은 신수가 훤하고 줄기 높은 곳에서 가지를 쳐 다른 나무들과 자리싸움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생각

 

보다 시간이 지체된 듯해 590m봉을 지나면서 속도를 내 헐레벌떡 정상에 올라섰다. 도착시간을 체크

 

해보니 개기재에서 두봉산까지 2시간5분이 걸렸다. 지도에 나와 있는 시간보다 15분이 덜 걸린 셈이

 

어서 마음 놓고 10여분을 쉬었다. 정상에서 바라다 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쾌청해 모처럼 가

 

을 하늘의 참모습을 보는 듯했다.  급경사 길을 조심해서 내려가는 중 배낭이 자꾸 등 뒤에서 나를 잡

 

아당겨 확인해보니 두봉산에서 사과를 꺼내 먹느라 열어 둔 배낭을 잠그지 않고 그냥 출발한 것이다.

 

내림 길이었기를 망정이지 오름 길이었다면 배낭 속에 들었던 내용물을 길바닥에 떨어트리고 그냥 갈

 

뻔 했다. 키를 넘는 산죽 길을 걸어 내려가며 4년 전 어느 한분이 이 길을 지날 때 발걸음을 더디게 했

 

다는 올무를 찾아보았으나 이제는 다 제거해서인지 단 한개도 눈에 띄지 않았다. 590m봉에서 시작된

 

서진은 두봉산을 거쳐 550봉m까지 이어졌다. 

 

 

 

 

 

10시48분 해발522.4m의 촛대봉에 올랐다. 550m봉에서 바로 앞 예재-개기재 구간에서 만나지 못한

 

조개껍질을 다시 보았는데 여러 개가 함께 모여 있어 누군가가 꼬막을 싸들고 와 먹은 후 껍질을 버린

 

것으로 생각됐다. 오른 쪽으로 꺾어 산죽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서 만난 돌길이 한동안 계속됐다. 힘

 

들게 걸어올라 이제 촛대봉을 다 왔다 했는데 안부 건너 높은 봉우리가 또 하나 보였다. 6분을 더 걸어

 

촛대봉에 오르자 편히 쉴만한 곳도 삼각점도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때 맞춰 재잘대는 새소리만은 들

 

을 만했다. 촛대봉에서 10분을 쉰 후 급하게 안부로 내려섰다가 봉우리 하나를 넘어 467.5봉에 다다르

 

기까지 반시간이 채 안 걸렸다. 가을 날씨답지 않게 너무 덥다 했는데 어디에선가 한 동안 잠잠했던 바

 

람이 다시 불어왔다.

 

 

 

 

 

12시18분 깊숙한 안부 말머리재로 내려서서 점심을 들면서 20분여 쉬었다. 467.5봉을 지나 밋밋한 능

 

선 길을 걸으며 솔방울이 매달린 채 죽어 있는 소나무 군을 보았다. 줄기와 가지는 오래 가지만 나뭇잎

 

들이 정성들여 피운 꽃과 열매는 그 잎들과 더불어 한해를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다 말라 죽은 소나무 가지를 움켜쥐고 있는 솔방울이 내게는 마치 다 죽어가

 

는 어머니를 붙잡고 있는 비쩍 마른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보여 측은해 보였다. 467.5m봉에서 40분을

 

넘게 걸어 다다른 400m봉에서 340m대의 말머리재로 내려서는 길은 경사가 꽤 급했다. 전남 화순의

 

한천면과 이양면을 소통시킨 말머리재로 내려서자 시장기가 느껴져 다른 때보다 좀 이른 시각에 점심

 

을 들었다. 사람들의 소통은 다른 찻길에 넘겨주었지만 바람의 넘나듦은 옛날과 다름없어 점심을 들고

 

있는 동안 등 뒤가 계속 서늘했다. 12시36분에 작은 돌탑이 세워진 말머리재를 출발해 된비알 길을 23

 

분 동안 꼬박 걸어올라 429m봉에 올랐다. 옷을 뚫고 들어가 마구 팔다리를 찔러대는 명감나무는 정맥

 

종주꾼들에는 공적임이 분명한데 그 열매만은 어찌 저리도 새빨갛고 탐스러운가싶어 카메라에 담아왔

 

다. 429m봉에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420m봉을 오른 시각이 13시12분이었다.

 

 

 

 

 

14시12분 해발530m의 노인봉을 올랐다. 420m봉에서 조금 더 가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 평평한

 

능선 길을 얼마고 걸은 후 된비알 길을 한참동안 올랐다. 목덜미를 내리쬐는 가을태양이 오름길을 더

 

힘들게 했다. 처음에는 삼각점으로 착각한 “전광98”의 시멘트구조물이 함께 자리한 성자봉을 오르는

 

데 말머리재를 출발해 1시간이 넘겨 걸렸다. 지도상에는 이 봉우리에서도 한참 떨어진 노인봉까지 1시

 

간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어 이런 걸음이라면 한천리에서 저녁 5시 경에 출발하는 마지막 군내버스를

 

잡아타기가 어렵겠다는 계산이 나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성재봉에서 쉬지 않고 내달려 18분 만에

 

다다른 500m봉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내려다 본 가을풍경이 일품이었다.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

 

았던 장치저수지가 다소곳이 자리한 남서쪽 아래로 논 뜰에 황금빛 벼들이 가득해 풍요로움이 절로 느

 

껴졌고 전날 1시간여 머무른 옥리마을과 이 마을을 지나 개기재로 이어지는 찻길이 참으로 한가로웠

 

다. 저수지와 논, 그리고 마을과 고갯길이 거의 일직선으로 보이는 500m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내려

 

갔다가 직등 길을 오르며 큰 바위를 지나 노인봉에 다다른 것이 말머리재 출발 1시간36분 후이니 지도

 

에 적힌 시간보다 반시간 이상 더 걸린 것이다. 삼각점과 표지판이 걸려있는 노인봉에서 11분을 쉰 후

 

태악산으로 향했다.

 

 

 

 

 

15시28분 해발530m의 태악산을 올랐다. 노인봉을 지나자 이제까지의 흙길과는 달리 돌길이 많이 나

 

타나 태악산의 이름값을 한다 했다. 커다란 암봉으로 왼쪽으로 에돌며 바위를 안고 내려서기도 했다.

 

오른 쪽의 철조망 울타리 옆을 지나 얼마고 걷다가 암릉을 왼쪽 밑으로 돌아 능선에 오르자 곧추선  큰

 

바위가 나타났다. 얼마 후 무명봉에 올랐다가 가파르게 내려가서 평탄한 능선 길을 걸었다. 능선 길 아

 

래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능선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아래로 묘지와 너덜 길을 지났다. 510m

 

봉을 넘어 깔끔하게 손질한 널따란 묘지를 지나 바로 위의 암봉인 태악산 정상에 올랐더니 남쪽 멀리

 

로 제암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목치를 지나서는 어디서고 뒤돌아볼 적마다 눈에 띄는 의젓한 산이

 

바로 제암산으로 과연 산들을 다스리는 제왕의 산다웠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곁을 같이 한 암봉 태악

 

산에 오르자 마치 510m봉을 다시 보는 듯 했다. 정상에서 7-8분을 쉬면서 여기서부터 부지런히 내달

 

려 버스를 탈 것인가, 아니면 기왕 늦었으니 천천히 걸어 돗재에서 택시를 부를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

 

했다. 좀 힘들더라도 서둘러 버스를 타는 것으로 마음을 다져 먹고 15시 35분에 태악산을 출발했다.

 

 

 

 

 

16시31분 해발320m의 돗재에 도착해 구간종주를 마쳤다. 1시간 20분이 걸리는 하산 길을 봉우리를 3

 

개를 넘어 56분 만에 끝내느라 거의 뛰다시피 했다. 너덜 길 몇 곳을 지나 3번째 봉우리를 넘기까지 오

 

름 길이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돗재로 내려서는 길이 생각보

 

다 멀었다. 찻길이 빤히 보이는데 길은 계속해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며 고도를 낮출 줄 몰랐다. 한참

 

후 왼쪽으로 급하게 내려가 82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봇재로 내려섰다. 한천 자연휴양림 후문(?) 앞

 

도로 변에 세워진 봇재의 표지석을 사진 찍은 후 차도를 따라 왼쪽으로 15분을 정신없이 걸어 내려가

 

 자연휴양림 입구에 도착했다.

 

 

 

 

17시2분 삼거리 슈퍼 앞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다.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젊은이를 불러 세워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15분 후인 17시5분에 저 아래 삼거리 마을 슈퍼 앞에서 출

 

발하며, 거기까지는 부지런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은 걷고 반은 뛰다시피 해

 

출발 3분 전에 슈퍼 앞에 도착했다. 맥주 1병을 시켜 마시는 중 산음 마을을 들러 나오는 버스가 바로

 

도착해 남은 맥주를 그대로 놓아 둔 채 광주 가는 군내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기 까지 1시간 27분 동안 있는 힘을 다해 정신없이 걸었더니 왼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

 

다. 등산에서는 돈이 제 6감이 아님을 온 몸으로 보여준 마지막 시간 반의 질주(?)가 무리였던 것 같다.

 

대학 시절 서머세트 모옴의 “인간의 멍에”를 같이 읽고 여주인공 밀드레드를 화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

 

눈 한 친구가 나중에 내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도 산을 계속 다니려면 하산 길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려와 택시를 잡아타라고 충고를 했다. 돈이 좀 들더라도 무릎을 제대로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

 

요함을 일깨워준 친구의 충고였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부실해지면 돈은 더 위력을 발휘해 확고하게 제

 

6감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산에서만은 돈이 결코 제 6감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려면 보다 철저한 몸

 

관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환주기17:호남정맥 15구간(돗재-묘치고개)

 

*산행일시:2007. 11. 7일/7시9분-15시24분(8시간15분)

 

*소재지  :전남화순

 

*산높이  :천운산602m, 구봉산320m, 천왕산424m

 

*산행코스:돗재-천운산-서밧재-구봉산-천왕산-묘치고개

 

 

 

 

이토록 황홀한 구름바다를 산행 중에 만나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제우스신과 산신령이 작심하고

 

손잡지 않고서는 도저히 빚어 낼 수없는 광활한 운해를 호남정맥의 마루금을 밟으며 두 시간 넘게 지

 

켜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 가을 제일의 행운아였기에 가능했다. 화순 땅을 동서로 가르는 돗재-천

 

운산-서밧재 구간의 한 가운데 자리한 해발 602m의 천운산을 빙 둘러싼 구름바다는 정말 장관이었

 

다. 해발 고도가 300m가 채 안 될 것 같은 주위의 모든 산과 평야를 하얀 구름이 깡그리 뒤덮고 있어

 

도무지 그 넓기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 구름들이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다 하얀 구름위로 솟

 

아 오른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다도해를 지나는 것

 

같았다. 여름 날 이른 아침 깊숙한 골짜기를 가득 메운 높은 산의 구름바다는 햇살이 퍼질 즈음 골바람

 

에 등 떠밀려 능선으로 올라서면 이내 사라지는데, 이번에 지켜본 구름바다는 산들이 높지 않은 만큼

 

골바람도 같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늦가을 아침햇살이 한 여름에 비해 그 세가 턱없이 약해서인지 설

 

악산이나 지리산의 운해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보통사람들 눈으로는 아무리 부비고 보아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에서 미세한 차이를 찾아내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전문가라고 부른다. 구름바다만 해도 그렇다. 내 눈에는 지리산의 구름바다

 

나 이곳의 구름바다나 그저 그게 그건데 기상학자들은 여기에서도 빼놓지 않고 유의미한 차이를 찾아

 

내어 높은 산의 구름바다와  낮은 산의 구름바다를 각각 이름을 달리 지었으니 층운과 층적운이 그것

 

들이다. 층운(Stratus, St)이란 지표면에서 300-600m 상공에 나타나는 하층운으로 지평선과 나란히

 

층을 이루고 지표면에 가깝게 떠있는 구름을 말하며 우리말로는 안개구름이라 부른다. 이번에 호남정

 

맥에서 만난 구름바다는 층운으로 엄밀히 말해서 운해라고 부를 수는 없나보다. 젊어서 지리산에서 야

 

영하며 아침 일찍 만나본 구름바다가 바로 운해로 층운이 아니고 층적운이다. 층적(Stratocummulus,

 

Sc)은 높이 2,000m 미만의 상공에서 발생하는 하층운으로 대부분 물방울로 되어 있으며 층쌘구름으

 

로도 불린다. 임소혁님의 저서 “하늘에 수놓은 구름이야기”에 따르면 이 구름은 판자모양의 구름 또는

 

둥근 덩어리 구름이 층을 이루듯이 떠 있다가 아침나절 공기가 뜨거워지면서 부풀어 오른 구름결이 큰

 

폭포를 이루며 산등을 넘는다고 한다.

 

 

 

 

높은 산의 구름바다는 층적운이고, 근교 낮은 산의 구름바다는 층운임을 알자 별안간 구름의 신 제우

 

스와 맞대면하고 싶었다. 과연 제우스신은 층운과 층적운의 차이를 알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다면 언

 

제 어떻게 알았는가가 두루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상에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학교에 들어가도 몇

 

학년 몇 반인지를 아는 부모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아무리 오랫동안 천상의 구름 위에서 노닐고 있다

 

해도 본래 마음 씀이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격신인 제우스가 자기가 만든 그 많은 구름들의 차

 

이를 일일이 다 알고 있지는 못할 것 같아서였다. 제우스신이 구름의 신이라 하더라도 화순 땅의 산들

 

을 거의 다 덮을 만큼 그 많은 구름들을 혼자서는 다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산신령과 손잡

 

지 않고서는 어떤 신이라도 독자적으로 이 땅의 산 속에 구름바다를 만들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번에 만나본 장대하고 광활한 저 구름바다는 제우스신과 산신령의 합작품임에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만난 구름바다가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서, 그리고 서양의 신화와 동양의 설화가 만

 

나서 빚어낸 동서고금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아침7시9분 돗재를 출발했다. 새벽1시에 강남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광주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 10

 

분밖에 걸리지 않아 버스터미널에서 시간 반을 넘게 기다렸다가 5시40분에 출발하는 능주행 군내버스

 

를 탔다. 한 시간 후 하차한 능주에서 택시로 갈아타 돗재로 향했다. 능주를 휘감은 짙은 안개가 돗재

 

에 다다르자 거의 다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여 다행이다 싶었다. 귀부리가 시려와 자켓의 후드를 뒤집

 

어쓰고 산행을 하다가 얼마 후 햇살이 퍼지자 머리에서도 열이나 바로 벗어 제쳤다. 한 달 넘게 정맥

 

종주를 쉰데다 낙엽이 희미한 길을 덮은 곳이 여러 곳 있어 혹시 길을 잃을 까 염려되어 산행속도를 내

 

지 못했다. 15분을 걸어 팔각정에 오르자 왼쪽으로 멀찌감치 자리 잡은 골짜기에 가득 찬 구름바다가

 

선을 보여 놓칠세라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8시24분 해발602m의 천운산을 올랐다. 팔각정에서 천운산을 오르며 오른 쪽 아래에 포진한 운해를 보

 

고 그 규모에 놀랐다. 한 여름이라면 무성한 나뭇잎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구름바다가 나뭇

 

가지 사이로 분명하게 보여 그 아름다움과 규모의 장대함을 모처럼 느꼈다. 한 암봉을 지나서 왼쪽으

 

로 한천 휴게소로 갈리는 안부삼거리에서 0.5Km를 걸어 무인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천운산을 오르자

 

화순시내방향으로도 꽤 넓은 구름바다가 보여 마치 바다 한 가운데 자리한 섬에 오른 것 같았다. 삼각

 

점과 정상석이 함께 세워진 천운산에서 김밥을 꺼내 들은 후 오른 쪽으로 이어진 마루금을 따라 걸어

 

시야가 탁 트이는 590m봉에 올라섰다. 정북 방향으로 너 댓 걸음만 내딛으면 발끝이 닿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가깝게 보이는 무등산도 볼만했지만 인근의 주암호와 동복호에서 밤새 피어오른 안개

 

가 구름이 되어 주위의 낮은 산들을 모두 뒤덮은 운해가 나뭇가지에 가리지 않고 생생하게 보여 더욱

 

좋았다. 590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천운산 제2봉인 568m봉을 거쳐 9시30분에

 

540봉m에 다다르기까지 몇 곳의 전망바위를 지나며 구름바다를 카메라에 옮겨 담느라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10시26분 서밧재에 도착했다. 540m봉에서 얼마고 내려서 해발고도 300m대로 들어서자 땅바닥엽들

 

이 흥건히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점령군 구름바다가 방금 햇살에 밀려 더 아래로 퇴각한 것 같았다.

 

큰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 해발고도가 300m 아래로 떨어지자 이제껏 보아온 구름바다 속으로 내려

 

가 길 앞이 뿌옇게 보였다. 내가 비로소 구름바다 속으로 잠수했다 싶었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아 안개

 

가 사라지자 서운하다 못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처럼 물러날 것 같지 않은 안개가 아침을 데

 

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천운산 산자락에 구름바다의 잔흔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바지 밑동과 구두를

 

적셨지만, 이번 호남정맥을 에워 싼 구름바다는 그동안 착실하게 교분을 쌓아 온 제우스신이 내게 내

 

려준 최대의 선물 같아 마음속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540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난 급경사 길을 내려

 

가다 카메라를 들고 천운산을 오르는 청년들을 만났는데 좀 더 높은 곳에서 운해를 사진 찍고자 오르

 

는 것 같았다. 송전탑을 조금 지나 왼쪽 봉우리로 올라선 다음 오른 쪽으로 내려선 사거리 왼쪽 아래로

 

 광주학생교육원이 보였다. 임도사거리에서 잠시 직진한 후 오른 쪽의 낮은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서밧

 

재로 내려섰다. 왕복 2차선 차도 위로 왕복 4차선이 교차해 지나는 서밧재에서 구봉산으로 오르는 들

 

머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른 쪽으로 조금 내려가 2차선 길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 4차선 도로를 밑으

 

로 건넜다. 문왕석재 앞에서 다시 방향을 꺾어 절개면 상단에 올라서기까지 15분은 족히 걸렸다. 

 

 

 

 

 

11시46분 해발320m의 구봉산에서 잠시 쉬었다. 서밧재의 절개면 상단 위로 난 임도에서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알아채지 못하고 직진해 묘지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와 풀숲이 우거진 산길로 들어섰

 

다. 얼마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산딸기가 길  한가운데서 무성하게 자란 임도를 따라가 밤나무 밭을 지

 

났다. 요즈음이야 일손이 부족해 밤나무가 효자노릇을 전혀 못하고 있지만, 산간을 개발하고 거기에다

 

유실수를 심어 농가소득을 올려보겠다는 한 국가지도자의 경국에 대한 열정과 지혜는 밤나무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통신탑을 막 지나 올라선 야트막한 구봉산에서 한 숨 돌렸다. 사과를

 

까먹으며 20여분을 쉰 후 천왕산으로 향했다. 구봉산에서 내려와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왼쪽으로 난 경사가 급한 산길로 들어섰다. 짧 경사 길을 내려가 만난 밋밋한 능선 길은 15분가량 계속

 

되어 복암교와 영동을 이어주는 안부사서 끝났다.

 

 

 

 

 

13시4분 해발424m의 천왕산에 다다랐다. 차 소리가 들리는 안부사거리에서 시작된 완만한 오름길은

 

얼마 가지 않아 경사가 다급한 비알 길로 바뀌었고, 비알 길 여러 곳에 미끄러운 마사토가 섞여있어 중

 

간의 한 봉우리에 올라서기까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조금 더 오르자 된비알의 바위길이 이어졌

 

는데 그 흔쳐 있지 않아 이번 산행에서 가장 고되게 올라간 것 같다. 삼각점 하나만 달랑 박혀 있는 천

 

왕산에서 짐을 내려놓고 가지고 간 인절미로 요기를 했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모 대학병원의 표지

 

기에 적혀 있는 “내 아직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찾아서”라는 글귀에 눈길이 간 것은 아직도 가보지 못

 

한 먼 곳을 동경하는 그리움이 바로 나 혼자서 정맥길 종주에 나서도록 했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를 하

 

느라 16분을 쉬어서인지  묘치고개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입동을 하루 앞둔 날씨치고는

 

별로 냉기가 느껴지지 않아 산행을 하기에는 오히려 조금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산상의 날씨도 따

 

뜻했다. 천왕봉에서 내려서 봉우리 2개를 넘고 산허리를 에돌아 오른 319m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주라치 안부 방향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길이 아닌 듯해 다시 되돌아 올라왔다. 지도를 꺼내 보고 제 길

 

임을 확인한 후 다시 그 길로 내려가 안부사거리인 주라치에 도착한 시각이 14시6분이었다.

 

 

 

 

 

15시24분 묘치고개로 내려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왼쪽 바로 아래로 15번 국도가 지나는 주라치고개는

 

넓은 임도가 닿는 안부사거리로 임도 옆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노란 감 몇 개가 매달려 있어 마

 

냥 한가롭게 느껴졌다. 2시 방향으로 난 임도로 들어서서 곧 바로 커다란 묘지를 지나며 꼬막껍질을

 

보았다. 한눈에 띄지 않던 조개껍질이 묘지 앞에 무더기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이 지방에서는 꼬막도

 

제상에 올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르게 370m봉을 넘어 삼각점이 세워진 383.5m봉에

 

이르는 길에 고사목 토막들이 길을 자주 막아 걷기가 불편했다. 383.5봉m에서 330m봉으로 가는 길도

 

한 여름에 지났다면 명감나무가시에 찔려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330m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내려

 

선 묘치고개는 서밧치에서 이어지는 15번 국도가 왼쪽의 동복호로 내려서는 좁은 차도와 오른 쪽의 주

 

암호로 넘어가는 넓은 국도가 갈리는 삼거리 안부로 차들 소통이 많아서인지 아직도 반듯한 음식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맥주 한 병을 사든 후 5-6분을 왼쪽 아래로 걸어 내려가 묘치마을 버스정류장에서 광주행 군내버스에

 

오른 것은 17시 15분경이었으니 거의 2시간이 다 되도록 이 고개에서 버스를 기다린 셈이다. 늦가을에

 

접어들고부터는 하산 후 젖은 몸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고통스러워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택시를

 

불러 타곤 했는데 이번에는 전혀 춥지 않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 하루 산행을 마쳤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아침에 만났던 장대하고 광활한 구름바다가

 

황홀하게 펼쳐졌다. 한 친구가 지리산의 반야봉에 올라 띄운 반야용선이 피안에 있는 극락의 세계를

 

향해 지금도 항해 중이라면얼마 후면 반드시 천운산 인근의 구름바다를 지날 것이다. 바다 물길보다

 

편안한 길이 바로 구름바다 길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피안의 세계로 떠나는 반야용선에 몸을 실을 때

 

가 아니어서  천운산에서 이 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하산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이 배에 오르고자

 

반야봉이든 천운산이든 기꺼이 다시 오를 뜻이다.  바다 물길은 나 같은 사람들을 태운 범선이 다니는

 

길이지만 구름바다 길은 신선이나 선녀들을 태운 반야용선이 항해하는 길이기에 더 이상 천상의 천운

 

산에 머무르며 반야용선을 기다리지 않고 사바세계로 하산했다.

 

 

 

 

 

 

 

 

환주기18:호남정맥 16구간(묘치고개-둔병재)

 

*산행일시:2007. 11. 8일/8시55분-16시20분(7시간25분)

*소재지  :전남화순

*산높이  :오산687m

*산행코스:묘치고개-580봉-오산-어림897번지방도-622.8봉-둔병재-수만리버스정류장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을 보노라면 푸르렀던 잎들의 여름날이 떠오른다. 낙엽이란 수명을 다한 나뭇잎의 주검들이어서 이들에는 더 이상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지나가버린  봄과 여름날의 화사했던 기억뿐이다. 조락의 계절 늦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을 지켜보며 나라도 이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라면 지난날의 삶을 과거지사로 치부하고 세월 속으로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긁어모아 반드시 역사로 기록해뒀을 것이다.  내가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은 나이테 이외에는 달리 소통의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는 나무들이 그들의 힘만으로는 푸르렀던 여름날을 역사로 남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1월을 맞아 얼마동안만이라도 봄꽃을 다시 피우며 지나간 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꽃나무들이 있다는 것이다.

 

 

종주 길에 화사했던 지난날을 재현하고자 애쓰는 나무의 절규를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해발 687m의 오산에서 아래로 내려서는 중 어렵사리 몇 송이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았다. 철 지났지만 몸속에 남아 있는 생명에너지를 모두 짜내 화려했던 봄날을 잠시라도 재현해 나름대로 역사를 남기고자 하는 진달래나무의 애씀이 더 없이 애절해 보였다. 진달래만 마지막 봄날의 화사함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커다란 갈참나무 옆에서 자라고 있는 연초록 나뭇잎들도 봄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철지나서 뒤늦게 얼마동안만이라도 꽃을 피우고 새잎을 돋게 하는 진달래와 갈참나무의 애틋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높은 능선 길에 봉분을 앉히고 묘비를 세우는 등 하나라도 더 역사로 남기고자 유난을 떨고 있었다. 돗재-둔병재 구간의 정맥 길 묘들 중 호화분묘도 더러 있었고, 후손들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볼꼴 사납게 방치된 묘지들도 꽤 있었다. 철지나 꽃을 피우는 정도를 훨씬 넘어 마루금을 끊어 묘지를 앉히고 반영구적인 화강암 묘비를 세워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유불급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쓰레했다.

 

 

아침8시55분 묘치고개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화순읍내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7시31분에 광천터미널을 출발하는 동복 행 첫 버스를 읍내 축협 앞에서 20분 넘게 기다려 탔다. 217-1번 군내버스가 광산사무소 앞에서 다른 차들의 전복사고로 잠시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손님도 별로 없는 시골 길을 20분 남짓 쌩쌩 달려 8시43분 묘치마을에 도착했다. 5-6분을 걸어올라 묘치고개에서 짐을 챙긴 후 왼쪽 길로 조금 내려가 둔병재로 향하는 왼쪽의 들머리로 들어섰다. 처음 10분간은 길가에 삼베(?)로 짠 굵은 로프 줄이 쳐져 있는 등 오름 길이 가팔랐다. 부글대는 뱃속을 진정시키느라 350m봉에서 얼마고 쉰 후 오른 쪽으로 꺾어 키가 큰 소나무들이 들어선 밋밋한 능선 길을 따라 걸었다. 동복호가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하루 전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 안개구름이 나타나지 않아 구름 위를 노니는 신선놀음은 역시 사람들이 아닌 신들의 몫이다 했다.

 

 

10시16분 580m봉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350m봉을 출발해 솔밭 길을 지나 산허리를 에도는 가시밭 길 임도를 따라가다 왼쪽 산길로 들어섰다. 풀숲 길을 헤치며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안부로 내려서자 땅바닥에 갓 떨어진 노랑 색상의 단풍들이 더할 수 없이 깔끔했고 이 단풍들을 떨어낸 나무들의 수피 또한 말끔해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 날 뒤늦게 가을의 진수를 만나보는 것 같아 아쉬웠다. 580봉m까지는 얼마 전 올랐던 350m봉보다 훨씬 가파르고 긴 비알 길이어서 조금은 힘들었다. 한 겨울 눈이 쌓이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삼베(?) 밧줄이 산 중턱에서 거의 꼭대기까지 매여져 있어 몇 번이고 잡고 올랐다. 580m봉에 오르는 중 내려다본 동백호는 고도가 낮아서인지 전모는 보이지 않고 남쪽 끝자리만 조금 보였다. 선채로 지나온 길을 기록한 후 바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곳곳에 억새들이 피어있는 밋밋한 능선을 따라 걸었다. 삼각점이 박혀 있을 593.6m봉은 왼쪽으로 우회해 산죽 길을 따라 10시 반 조금 넘어 안부로 내려섰다.

 

 

11시38분 해발 687m의 오산에 올라섰다. 593.6m봉 아래 안부에서 640m봉으로 오르는 길도 가팔랐다. 길바닥을 덮고 있는 가지에서 떨어진지 얼마 안 된 참나무 단풍잎은 윤기가 자르르 흘러 여느 낙엽보다 훨씬 부티나 보였다. 참나무낙엽이 땅에서 완전히 썩어 없어지는 데는 17.9년이 걸린다 하니 아무려면 나이 든 낙엽보다야 새내기 낙엽의 얼굴색이 윤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주검들 앞에서 나이를 따지는 것 같아 민망했다. 삼각점은 없지만 640m봉으로 보이는 산봉우리에 올라서자 다음번에 오를 북쪽에 자리한 무등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살랑대는 미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따끈한 커피 한잔의 도움으로 오래 잊고 지냈던 시인 박재삼님의 시 “산에서” 중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하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을 가을 날 울음 빛 단풍"들의 무덤인 낙엽 속에 묻어두고 11시 정각에 640m봉을 출발했다. 평탄한 능선 길을 얼마고 걷다가 다시 올라 묘지 바로 아래 전망바위에 다다르자 2시 방향으로 동복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루 전만해도 옆 자리의 주암호와 같이 제우스신을 불러들여 사방을 구름바다로 만들었던 동복호가 산 속 깊은 곳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보였다. 헬기장이 들어선 680m봉을 넘어 임도로 내려서는 중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일군의 철쭉나무들을 보았다. 이들을 똑바로 세우지 않은 것은 바람인지 태양인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이 알알이 익힌 청미래 넝쿨의 새빨간 열매만은 가시는 숨겨두었을 망정 보기에 참으로 탐스러웠다. 임도를 지나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 서둘러 사진 몇 커트를 찍었다. 이 봉우리보다 조금 높은 바로 앞의 암봉을 자라(鰲)가 납작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오산(鰲山)으로 부른다 한다. 오산의 정상부인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면서 자라 등이 거북이등만은 못해도  꽤 넓고 안락하다 싶었다.

 

 

묘치고개에서 오산까지 북서쪽으로 가다가 오산에서 한동안 남서쪽으로 진행해 무등산이 다시 멀어지기에 이산만 바라보고 넋 놓고 걷다가는 길을 잘 못 들기 십상이다. 오산에서 높다란 깃봉을 향해 내려가는 길에 몇 송이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았다. 사뿐히 지려 밟고 갈만큼 꽃송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꼭 3년 전에 금강산에서 만나본 진달래꽃처럼 소월의 영령을 불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안양산의 억새를 맛보기로 보여줄 양 꽤 넓은 공터에 억새가 무성했다. 큰길로 내려가 만난 사거리에서 임도 따라 한참을 직진해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9월 한 번 잘 못 든 길을 고집하다 산 속에서 밤을 지새운 일이 있어 이번에는 표지기가 달려 있는 곳까지 군말 않고 되돌아갔다. 깃봉 바로 위에서 왼쪽의 억새숲 속으로 희미하게 난 소로를 따라 갔어야 했는데 억새에 넋을 뺏겨 직진하는 바람에 길을 잘 못 들어 20분 남짓 까먹었다. 깃봉 바로 위 억새 숲길을 지나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 편백나무가 서있는 넓은 임도로 내려서자 비로소 마음이 놓여 짐을 벗어 놓고 20분을 푹 쉬었다. 12시34분 임도를 건너 경사가 매우 급한 비탈길을 내려갔다. 안부에서 다시 오른 570봉에서 또 다시 내려섰다가 520m봉을 오르기까지 임도출발 반시간이 걸렸다. 오른 쪽으로 내려가다 장송들이 가득히 들어선 송림을 지나서 897번 지방도에 다다랐다.

 

 

13시14분 897번 지방도를 건넜다. 농로 따라 2-3분을 직진하다 왼쪽 산길로 올라섰다. 밭을 지나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죽림 길을 7-8분 걸어 오르자 내가 마치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던 것은 그동안 산죽 길은 숱하게 걸었어도 대나무 밭길을 지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였다. 대나무가 사군자의 반열에 든 것은 그 곧기와 푸름을 산죽이 결코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라면, 나 같은 속인이 죽림칠현을 꿈꾼다는 것은 마치 산죽이 대나무와 견주어 보겠다는 것보다 더 치기어린 짓이다 싶어 슬그머니 그 생각을 거둬들였다. 대나무밭에 이어 밤나무 밭을 지나고 나서도 530m봉에 오르기까지 한참을 걸어 올랐다. 묘지를 지나고 송전탑을 막 지나 오른 쪽으로 꺾어 530m봉 바로 밑을 지났다. 1-2분 후 방향을 북서쪽으로 돌려 다시 무등산과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14시17분 삼각점이 세워진 622.8m봉에 올라섰다. 북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려선 임도를 건너 몇 걸음을 옮기자 아주 넓게 자리 잡은 여러 기의 묘지들이 나타났다. 잠시 묘역 안으로 들어가 왼쪽 아래 국동리를 둘러 본 후 산 오름을 계속했다. 오름 길에 오른 쪽 아래로 안심제 저수지가 보였고 묘지도 몇 곳을 더 만났다. 턱밑의 오름길 경사가 만만치 않아 바로 밑 안부에서 622.8m봉에 오르기까지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떡을 들어 골린 배를 진정시킨 후 후식으로 사과와 커피를 들고 나자 고고한 쪽빛 하늘도, 도도한 고산의 뾰족 봉도, 냉랭한 저수지 물도 이 순간만은 땀 흘려 오른 나를 반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자연을 벗 삼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맞고 있어서, 이때 어느 누가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하고 물어왔다면 서슴없이 나는 기쁜 것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건각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 후 하산을 시작했다.

15시25분 둔병재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다. 622.8m봉에서 590m봉까지 10분가량 지속된 산죽길이 얼굴을 때려 짜증스러웠다. 590m봉에서 6-7분간은 넓은잎나무들의 낙엽이 땅을 덮은 전형적인 가을산길이 이어지다가 600m봉을 얼마 앞두고 암릉 길로 바뀌었다. 600m봉을 지나 다시 나타난 산죽들은 편백나무 조림지가 가까워지자 사라졌다. 622.8m봉 출발 후 반시간 조금 넘어 편백나무 조림지 위 임도를 만났다. 왼쪽의  임도를 따라 7-8분을 걸어 다다른 전망대에서 안양산을 일별 한 후 경사 길을 내려가 둔병재 고개 마루에 걸쳐 놓은 출렁다리를 건넜다.

 

 

16시20분 수만리정류장에 도착해 산행을 모두 끝냈다. 둔병재 고개 마루를 넘어 아스팔트 차도를 따라 서쪽으로 1-2분을 걸어가다 오른 쪽 안양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를 만났다. 왕복 2차선의 지방도를 따라 들국화마을 앞 수만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40분 동안의 걷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서성리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기다린 1시간도 산본 집까지 갈 길이 멀어서 역시 길고 지루했다. 이 버스의 종점인 서성리 하서마을은 그림 같은 서성제 저수지를 끼고 있어 풍광이 뛰어났다. 다시 수만리를 지나 화순읍내로 들어가는 이 버스를 타고 광천터미널로 가서 저녁 7시40분에 강남행 일반고속버스를 탔다.

 

 

  여름 내내 길손들을 괴롭혔던 가시투성이의 명감나무가 이토록 견실한 열매를 결실할 줄은 정말 몰랐다. 산길을 걸으며 빨강색 열매가 예쁘고 탐스럽다 했는데 그 열매가 양팔을 숱하게 찔러댄 명감 열매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둥글고 새빨간 이 열매는 가지에 오랫동안 달려 있어 이듬해 3월에도 산속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청미래” 또는 “망개”라고 불리는 이 열매는 사람들도 먹을 수 있다하니 명감은 이 열매 하나로 가학의 역사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철지나 다시 생기 오르는 진달래와 연초록 나뭇잎, 마루금에다 묘지를 앉히는 사람들, 새빨간 열매 뒤에 가시를 숨기고 있는 청미래 넝쿨들은 지금도 쉬지 않고 제들 나름대로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그 옛날을 조심스럽게 재현하거나, 떠들썩하게 과시하거나 슬쩍 비수를 숨기는 것 모두가 나름대로 역사를 써 나가는 방법이다. 나 역시 글 쓴다는 핑계로 부끄러운 역사를 계속해 써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종주기를 올리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환주기19:호남정맥 17구간(둔병재-광일목장 위 삼거리)

 

*산행일자:2007. 11. 12일/11시54분-18시(6시간6분)

 

*소재지   :광주/전남화순

 

*산높이   :무등산1,187m, 안양산853m

 

*산행코스:둔병재-안양산-장불재-서석대-장불재-광일목장위삼거리-원효사버스정류장

 

 

 

지난 5월 고등학교 반 친구와 백운산을 같이 오른 지 반 년 만에 또 다시 무등산을 함께 올랐다. 두 산 모두 호남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전남광양의 백운산은 호남정맥의 출발점이자 종점이고 광주의 무등산은 이 정맥 중간지점의 산이어서 두 번 산행 모두 호남정맥종주에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백두대간 종주는 반 이상을 안내산악회의 도움으로 마쳤지만, 정맥만은 혼자서 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2004년 5월에 한북정맥에 첫 발을 들였다.  그 후 여기 무등산에 오르기까지 각 정맥마다 몇 구간은 고마운 이들과 산행을 같이 해 이 세상의 훈훈함을 맛보았다. 한북 4구간, 한남 1구간, 금북 1구간, 한남금북 2구간과 금남정맥 1구간을 지인들과 같이 했고 호남정맥은 이 친구와 2구간을 같이 했다. 하루 종일 걸어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구간이 거의 다인 정맥 길을 하루 종일 같이 걸어주는 고마운 이들이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나홀로 산행”을 막는 주적은 고독과 공포이다. 하루 종일 말없이 혼자서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외로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밀려오는 외로움을 혼자서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산이 아니고 집이라 해도 그 긴 시간을 혼자서 아무 말도 안하고 보내야 한다면 얼마가지 않아 실어증환자가 될 것이다. 고독을 이기는 길은 대화를 하는 것이다. 종주 길에 오르면 사람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하기에 나는 수많은 산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애쓴다. 그래서 잠시 멈춰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고 또 사진을 찍는다. 때로는 혼자서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보고 소리 내어 감탄사를 발하곤 한다. 나무들도, 바위도, 구름도, 새들도 모두가 산 식구들이고 이제는 내 벗이기도 하다. 아무리 훤한 대낮이라도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노라면 공포감이 엄습해 올 때가 많다. 멧돼지도 무섭고 살모사도 소름끼친다. 한번 공포감에 빠져들면 살랑거리는 바람소리도, 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란다. 산에 들어 있는 시간만이라도 산식구가 되어 저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고자 애쓸 때 공포감도 같이 사라진다. 라디오를 크게 켜놓고 혼자서 산행하는 분들을 드물게 만나는데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라디오 소리는 사람들에게는 화음이지만 산식구들에는 소음이기 때문이다. 왜 혼자서 산행을 하느냐고 누가 물어온다면 바로 이 고독과 공포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고독과 공포를 이기고 나면 내가 비로소 산식구가 되어 산행의 깊숙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산행할 때 느끼는 이것들은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자극이 되고 또 이를 극복해나가면서 세상사는 지혜도 배울 수 있다. 고독과 공포 속에 긴 시간 산행을 해보아야 곁을 같이 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 더욱 그렇다.

 

 

 

오전 11시56분 둔병재를 출발해 안양산으로 향했다. 아침6시30분에 강남을 출발한 고속버스가 기흥

 

을 지나가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예정보다 반시간이 늦은 10시 반에 광주에 도착했다. 11

 

시20분경에 화순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해 국밥을 사 든 후, 택시 한 대를 잡아 1만원을 들여 둔병재

 

로 옮겼다. 출렁다리에서 수만리 쪽으로 3-4분간 찻길을 따라가다 오른 쪽의 표지기가 많이 매달린 들

 

머리로 올라섰다. 경사가 가파르고 길을 덮은 낙엽들로 길이 미끄러워 산 오름이 생각보다 더뎠다. 혹

 

시나 해서 헤드랜턴을 준비해오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해 떨어지기 전에 마쳐야 무등산 곳곳을 제대로

 

카메라에 옮겨 담을 수 있고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는데 둔병재 출발이 50분가량 늦은데다 낙엽 길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산행시작 27분 만에 능선삼거리에 다다라 안양산 휴양림

 

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만났다.

 

 

 

 

 

 

13시6분 해발853m의 안양산을 올랐다. 능선삼거리에서 안양산으로 오르는 길은 낙엽 길이 아니어서

 

한결 힘이 덜 들었다. 로프가 쳐진 완만한 경사 길을 지나 마지막 20분은 억새밭 길을 올랐다. 작년 9

 

월에 이 길을 지날 때에는 푸르름을 잃지 않은 억새들이 이번에는 모두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헬기장

 

이 들어선 넓은 공터의 안양산 정상은 어느 방향으로도 시야가 탁 트인 최고의 전망지여서 북쪽의 무

 

등산, 서쪽의 만연산과 동쪽의 동복호가 아주 가깝게 보였고 남동쪽 멀리로 모후산도 잘 보였다. 정상

 

에서 내려서 왼쪽 아래 수만리로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를 조금 지나 무명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는

 

동안 화사했던 봄날을 찾아 헤매는 철쭉 꽃 몇 송이를 보았다. 안양산 출발 40분이 지나 936m봉의 암

 

봉 위에 올라서자 칼로 자른 듯 네모반듯한 입석대 바위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안양산 정상에

 

조금 못 미쳐서 만난 억새들이 936m봉에서 장불재에 이르는 광활한 고원을 꽉 채워 한가을 황금색 논

 

뜰을 보는 듯했다.

 

 

 

 

 

15시8분 무등산 주봉인 천황봉을 바로 앞에 둔 서석대에 올랐다. 936m봉에서 백마능선 안부로 내려서

 

키를 넘는 억새들이 바람에 출렁이며 춤을 추는  은빛 군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노라니 이 자연의 진

 

짜 춤꾼들은 바로 억새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나 남은 암봉을 오른 쪽으로 에돌아 936m봉 출

 

발 반시간이 다되어 다다른 장불재는 사통팔달의 드넓은 고개 마루여서 이길 저 길로 올라온 산객들이

 

쉬어 가는 만남의 광장이다. 여기 장불재는 사람들만 모여드는 광장이 아니다. 거대한 최신식 방송통

 

신탑과 석기시대의 커더란 고인돌(?)이 마주 서 있어 스스럼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의 광장이

 

기도하다. 장불재를 출발해 서석대를 다녀오는 데 대략 한 시간을 쓴 것은 입석대와 서석대가 옷자락

 

을 잡아서였다. 7천만 년 전부터 이 자리에서 무등산을 지켜온 저 바위들이 우리들에 하고 싶은 얘기

 

들이 꽤 많은 듯했다. 주상절리의 곧추선 암벽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이십 수년 전 반문

 

명적 폭거로 자식들을 잃고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이 고을 어머니들의 한스런 이야기도 귀담아 들

 

어보라 했다. 통곡의 세월은 흘러가버렸고 무등산 하늘은 쾌청하고 냉랭해 그 쌀쌀맞기가 저 아래 광

 

주호의 차디찬 물과 닮아보였다. 장불재로 되돌아와 규봉암으로 향했다.

 

 

 

 

 

16시52분 광일목장으로 내려서는 억새밭 능선삼거리에서 구간종주를 마쳤다. 장불재에서 무등산의

 

남쪽 사면에 낸 허리 길로 우회하며 이제껏 걸어 오른 부드러운 억새밭 길과는 전혀 다른 너덜겅의 바

 

위 길을 지났다. 인도의 지봉스님이 법력으로 바위들을 괴어놓았다는 지봉너덜은 장불재와 규봉암 중

 

간지대에 있는 암괴류(Block stream)로 마치 돌무더기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규봉을 바로 뒤에 둔

 

규봉암도 볼만 했다. 관음전과 삼성각, 그리고 법고누각이 들어앉은 작은 암자지만  용암이 굳어져 형

 

성된 6각형의 세로기둥인 주상절리(Culumnar joint)가 늠름해 보이는 규봉이 에워싸고 있고 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동복호가 가깝게 있어 풍광이 이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규봉암을 지나

 

이내 너덜 길은 끝났고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져 최대한 속도를 높였다. 반시간이 조금 지나 광일목장

 

후면부의 삼거리에 다다랐는데 직진 길은 목장 길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삼거

 

리에서 5-6분을 더 걸어 무등산 정상에서 북봉을 거쳐 북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능선이 꼬막재로 에

 

도는 허리 길과 만나는 즈음에서 억새밭으로 내려서는 삼거리를 만났는데 이 길이 정맥 길임은 다음

 

날 확인했다.

 

 

 

 

 

18시 원효사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모두 끝냈다. 광일목장 위 억새밭도 억새의 크기와

 

밭 넓이가 장불재에 못지않았다. 억새밭 길이 끝나는 묘지에서 돌계단과 목제계단을 차례로 지나 공원

 

관리사무소가 3.4Km 남은 꼬막재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약수터를 거쳐 능선쉼터

를 지나자 석양의 붉은 햇살을 받은 단풍나무들이 더욱 붉게 불타고 있었다.  편백나무 숲 지대를 지나

 

공원관리 사무소에 다다르기 직전에 해가 넘어가 어렵지 않게 하산했다. 곧 이어 1187번 시내버스에

 

올라 광천터미널에서 하차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간단히 든 후 함께 산행한 이규성 교수는

 

서울로 올라갔고 나는 하루를 더 묵어 다음 날 정맥종주를 준비했다.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무등산의 산 오름은 군부대가 들어있어 정

 

상을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대신에 산허리를 에도는 허리길이 길게 나있어 산책길처럼 편안

 

했다. 이런 편안한 길이라면 혼자 나서도 고독과 공포를 느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혼자 걷는 것

 

보다 오랜 친구와 같이 걸은 이 길이 훨씬 편안하고 푸근했기에 친구에 고마움을 표한다. 친구 덕분에

 

 산식구들을 하루 잊고 종주산행을 했지만, 바로 이어서 하는 다음 구간 산행에는 다시 이 들을 불러내

 

고자 한다. 무등산이 워낙 후덕해 다음 구간의 말산들도 날카롭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되지만 그래도

 

이들과 벗해야 덜 외롭고 덜 무섭기에 다시 이들을 불러내어 같이 산행할 뜻이다.  

 

 

 

 

 

 

 

 

환주기20:호남정맥 18구간(광일목장위 삼거리-유둔재)

 

*산행일시:2007. 11. 13일/ 9시54분-16시44분(6시간50분)

 

*소재지  :전남 담양/화순/광주

 

*산높이  :북산777m

 

*산행코스:공원관리사무소-광일목장위삼거리-북산-백남정재-448봉-유둔재-경상리정류소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에서 원효사로 오르는 길에 한 음식점에서 된장의 5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플래

 

카드를 내걸어 눈길이 갔다. 다른 것과 섞여도 고유의 향기와 맛을 잃지 않는 단심(丹心)이 오덕의 첫

 

째요, 오래도록 상하거나 변함이 없는 항심(恒心)이 그 둘째요, 비리고 기름진 냄새를 없애면서 본래의

 

자양은 생선이나 고기보다 못하지 않는 불심(佛心)이 그 셋째라 했다. 넷째는 선심(善心)으로 매운 맛

 

과 독한 맛을 중화시켜 자연과 동화되는 것을 말하고 어떤 음식과도 어울리고 자연과 동화되는 화심

 

(和心)이 마지막 덕이라 했다.

 

 

 

 

마음가짐이 된장의 오덕만 같다면 누구라도 1대간 9정맥 종주를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다른 욕

 

심 내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의 등뼈를 한 번은 밟아보겠다는 단심을 갖는 것이 대간과 정맥

 

종주의 시작이다. 한번 시작하면 쉽게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하겠다는 변치 않는 항심이 뒷받침되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는 기회나 다른 스포츠들이 유혹해 올 때 종주산행이 그 유혹

 

들보다 진정한 달콤함은 절대로 못하지 않다고 믿는 불심도 필요하다. 욱한 마음과 삐지기 쉬운 성정

 

을 가라앉히고 같이 산행하는 분들에 마음을 쓰는 선심을 갖고 있다면 그는 종주산행의 리더가 될 수

 

있다. 나처럼 혼자서 종주 길에 나서는 사람들에는 나무와 야생화, 산짐승과 새, 흙과 바위, 바람과 구

 

름 그리고 햇살 등 모든 산식구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화심이 꼭 필요한 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긴 시

 

간 혼자서 걸으며 엄습해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된장의 오덕은 뭐니 뭐니 해도 발효과정에서 얻어진다. 발효란 시간을 삭이며 숙성하는 과정으로 슬로

 

우 푸드를 만드는 요체다. 대간이나 정맥 종주는 어느 한 산을 정해 오르내리고 나면 쉽게 끝나는 점의

 

산행이 아니다. 몇 백 키로가 넘는 장대한 산줄기를 오랜 기간 한 걸음 한걸음씩 옮겨 놓으며 이어가야

 

하는 선의 산행이다. 종주하는 산객들에는 선을 이어가는 기나긴 과정이 바로 발효과정이다. 선을 이

 

어가는 동안 중간에 그만두고자 하는 또 다른 자기와 싸워가며 시간을 삭이고 완성도를 조금씩 높여가

 

는 것이 대간종주이고 정맥종주다. 그래서 나는 1대간 9정맥 종주를 모두 마친 분들에게서 된장처럼

 

깊은 맛과 그윽한 멋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하고 또 한편 시간을 삭이며 기다

 

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겠다 싶어서 하는 말이다.

 

 

 

 

 

1990년대 함께 이 지역 영업을 담당했던 광주의 옛 동료들과 만나 마신 술이 너무 과했는지 아침 6시

 

40분 광천터미널발 원효사행 첫 버스를 못타고 7시50분경에야 1187번 시내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

 

서 1시간 남짓 달려 다다른 종점에서 하차해 인근 원효사를 들러보았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절

 

은 6.25전쟁 때 완전 소실된 것을 다시 지어서인지 절간 어디에서도 대사의 체취를 느낄 수 없었다. 옛

 

날에는 천불전이 있었다 할 만큼 대찰이었을 텐데 지금은 사천문도 보이지 않는 작은 사찰이어서 무등

 

산의 산세를 드러내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듯싶었다. 거사님들 공덕비와 함께한 부도 자리가 색달

 

랐다. 절 길 양옆에 아침햇살을 받아 제 색이 나는 단풍잎들이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띄고 있어 한시도

 

대웅전을 뜨지 못하고 가부좌를 하고 계시는 부처님께서도 잠시 밖으로 나가셔서 산사에 드리운 만추

 

를 맞이하실 만하다 했다. 그리 크지 않은 원효사를 찬찬히 둘러본 후 공원관리사무소로 돌아와 산행

 

채비를 했다.

 

 

 

 

 

아침9시54분 무등산관리공원사무소를 출발했다. 정맥 마루금까지는 전날 서둘러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는 것이기에 길은 눈에 익었지만 오름길이어서 1시간을 채 못 걸어 내려온 꼬막재를 오르는데 1

 

시간20분이 걸렸다. 길도 넓고 수종도 다양했다. 소나무에 이어 참나무가 참 많다 했는데 그 아래로 산

 

죽도 무성했다. 뒤이어 편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길을 걸어올라 첫 번째 쉼터인 오성원에 이르기까지

 

꼭 1시간이 걸렸다. 아침 늦은 시간이어서 새들이 우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터미널을 출발할 때만

 

해도 새목이재까지 진출할 생각이었지만, 예정에 없던 원효사 탐방으로 시간이 더 늦어져 2시간이 덜

 

걸리는 유둔재에서 마치는 것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오성원에서 10분을 더 걸어 능선쉼터에 다다르

 

자 정상을 왼쪽으로 완만하게 에도는 우회길이 이어져 이후부터는 한동안 산행이 편안했다. 10분후에

 

 도착한 꼬막재의 높이가 640m가 아니고 710m라고 표지기에 적어 넣은 어느 한분에 손을 들어 주고

 

자 하는 것은 능선아래 오성원의 해발고도가 660m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11시50분 광일목장 위삼거리에서 마루금에 올라 정맥종주를 시작했다. 1187번 버스를 꽉 채운 연세

 

드신 분들은 아마도 원효사 뒤로 난 길을 따라 산책에 나셨는지 우회 길에서 한분도 만나 뵙지 못했다.

 

군부대가 자리해 해발1,187m의 정상을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이 산 높이를 따 번호를 매긴 1187

 

번 버스를 타고 가 원효사 길을 산책하는 것으로 풀고 계시는(?) 노인 분들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다.

 

꼬막재에서 광일목장후면부라는 표지목이 세워진 삼거리에 닿는데 반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오름길

 

의 해맑은 단풍잎들은 거의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조망을 좋게 해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계단 길을 따라 묘지에 올라 만난 억새들은 시작에 불과했고 왼쪽아래 광일목장으로

 

갈리는 삼거리에 펼쳐진 억새밭은 하루 만에 다시 보아도 장관이었다. 일단 목장후면부삼거리까지 갔

 

다가 들어오지 말라는 목장 안으로 몰래 내려서기가 꺼림직 해 다시 목장 위 삼거리로 되올라와 동쪽

 

아래로 펼쳐지는 키를 넘는 억새밭으로 내려섰다. 전날 밤 술자리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려 별 수 없이

 

내 머리를 메모리칩으로, 가슴을 감광판으로 삼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꽃들의 은빛 물결을 마음속에

 

 담아 갔다.

 

 

 

 

 

12시18분 해발777m의 북산을 올랐다. 억새밭을 지나 목장가까이로 내려서자 고삐 풀린 우공들 몇이

 

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혹시나 저들이 침입자로 오인하고 덤벼들지 않을까 겁이 덜컥 났다.

 

목장 옆 넓은 길을 놔두고 왼쪽으로 내려가 한참을 돌아 안부를 지나서 신선대 가까이에 올라서자 비

 

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제껏 야생동물인 멧돼지와의 커뮤니케이션에도 별 문제가 없었던 내가 길들여

 

진 소를 보고 겁을 집어 먹은 것은 고삐 풀린 소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어렸을 때 시골에서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안부에서 북산으로 오르는 길에 쇠똥이 많고 소들이 다닌 길 아닌 길들이 여기 저

 

기 나있어 안개가 잔뜩 끼면 길 찾기에 애를 먹겠다 싶었다. 산불감시초소 바로 옆에 세워진 삼각점을

 

보고 돌탑이 세워진 이 봉우리가 북산 정상임을 확인한 후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2-3m를 내려가

 

바람이 가려지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 점심을 들면서 반시간을 쉬었다.

 

 

 

 

 

13시48분 경상리와 무동리를 이어주는 십자안부 백남정재를 지났다. 점심을 들은 후 모처럼 십 수 분

 

간 맥을 놓고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맡겨서인지 전날 밤 과음으로 띵했던 두통이 말끔히 가셨다. 15년

 

전 10월 내가 맡은 호남지역의 대리점 사장 분들 여러분이 타고 있던 여객선이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

 

해 유명을 달리했을 때 동분서주 고생한 옛 동료들과 오랜만에 같이한 자리여서 자연 이야기도 길었고

 

마신 술도 꽤 많았다. 그리 힘들게 지켜낸 회사는 두 번이나 다른 회사에 넘어갔고, 나도 10년 전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바쁘게 내 길을 걸어왔는데 여기 광주 사는 두 동료들로부터 저녁대접을 받아 고마웠

 

다. 백남정재로 내려서는 길이 의외로 힘들었다. 경사가 급한데다 매끈매끈한 새 낙엽이 길을 덮어 엄

 

청 미끄러웠다.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자 스틱에 의지해 천천히 내려가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고 팔도

 

아팠다. 억새밭 헬기장을 지나 올라선 소나무밭 능선에서 내려서는 길은 더 미끄러웠다. 낙엽만 없다

 

면 30-40분이면 족한 길을 1시간을 다 걸어 백남정재에 다다랐다. 십자안부 백남정재는 고개마루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남북으로 좁은 길나 있어 성황당이 들어선 시골 산길의 옛 정취를 그대로 느꼈

 

다.  

 

 

 

 

 

14시53분 447.7m봉에 올라 삼각점을 확인했다. 백남정재에서 430m봉으로 올라서기까지 십여 분간

 

낙엽이 가파른 길을 덮어 진땀을 흘렸다. 410m봉을 넘어 얼마 후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묘지를

 

거쳐 갈림길이 희미한 능선사거리를 지났다. 몇 분 후 올라선 무명봉에서 5-6분을 쉰 후 왼쪽으로 꺾

 

어 급하게 내려갔다. 풀 숲길을 막 내려서 만난 임도를 따라 내려가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진행해 곧바

 

로 송전탑을 지났다. 임도 따라 계속 오르다 왼쪽으로 난 산길로 올라서 얼마고 오르자 커다란 묘지가

 

보였다. 한참을 더 걸어 올라선 삼각점의 447.7m봉은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을 베어내 조망이 그런대

 

로 괜찮았고, 작년5월에 오른 담양의 추월산이 동쪽 가까이에 보여 반가웠다. 베어낸 나무들을 치우지

 

 않고 내버려둔 447.7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낙엽 때문에 여전히 미끄러웠다.

 

 

 

 

 

16시12분 88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유둔재로 내려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447.7m봉에서 왼쪽 깊숙이

 

안부로 내려서자 오른 쪽 바로 아래로 파란 지붕들이 보였다. 안부사거리를 지나 눈앞의 420m봉으로

 

올라서는 동안 가파른 오름 길 중간 중간에서 몇 번이고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정맥 길은 420m봉을

 

끝까지 오르지 않고 8부 능선쯤에서 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는데 전망이 어떠할까 궁금해 꼭대

 

기까지 올라갔지만, 나무들이 앞을 가려 전망이 별로였다. 420m봉에서 되돌아와 얼마고 내려서자 잘

 

조성된 묘지가 보였다. 오른 쪽으로 다시 꺾어 887번 도로에 내려서기 직전 옷을 갈아입고 유둔재로

 

내려섰다.  경상리와 가암리를 경계 짓는 고개 마루에서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한 후 왼쪽 경상리 쪽

 

으로 내려갔다.

 

 

 

 

 

16시44분 경상리버스정류장에 닿아 하루 산행을 끝냈다. 유둔재 고개마루에서 25분가량 걸어 내려가

 

는 길은 S자형으로 굽이진 데다 갓길이 좁아 큰 차가 지날 때는 움찔 했다. 17시가 조금 못되어 가암리

 

에서 유둔재를 넘어오는 225번 버스에 오르고 나자 이 고개를 지나는 차편을 몰라 졸였던 마음이 풀렸

 

다. 40분가량 걸려 광천터미널에 도착해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서도 여유롭게 18시15분발 강남행 고

 

속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다른 분들이라면 하루에 뛰는 둔병재-장불재-유둔재 구간을 나는 두 번에 나누어 종주한 덕분에 광주

 

의 진산 무등산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된장만큼 오랫동안 같이 발효과정을 겪은 산 친구와 무등산을

 

같이 올랐고 저녁때는 직장동료들을 만나 내 인생의 발효기인 1990년대를 되돌아보며 발효주인 맥주

 

를 한껏 마셨다. 속이 깊기로는 사람들보다 더 깊어 웬만한 채찍에도 펄쩍 뛰지 않고 눈만 껌벅거리는

 

못 믿어 얼마고 비껴 돌아가는 등 이틀간 무등산 일원을 산행하고 나자 된장의 오덕을 두루

 

갖춘 산이 바로 무등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빛고을 광주시가 예향의 도시로 자리매김해 전 세

 

계적 비엔날레를 계속해 열 수 있는 것도 진산인 무등산의 단심, 항심, 불심, 선심과 화심 등 오덕을 이

 

도시에 옮겨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1대간9정맥을 혼자서 종주하는 내가 예향의 도시 빛고을에서 하룻

 

밤을 묵으며 된장의 오덕을 읊조렸다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흉들을 일은 아니겠다 싶어 버스 안에서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무등산을 같이 오른 이규성교수와 빛고을에서 저녁자리를 만들어준 양방현사장 및 김재을 사장에 감

 

사 하며 종주기를 맺는다.

 

 

 

 

 

 

 

 

 

 

 

 

 

 

환주기21:호남정맥 19구간(유둔재-입석리고개)

 

*산행일시:2008. 3. 12일/ 10시56분-17시41분(6시간45분)

 

*소재지  :전남 담양/화순

 

*산높이  :국수봉558m

 

*산행코스:유둔재-최고봉-노가리재-활공장-국수봉-입석리고개

 

 

 

환주기21:호남정맥 19구간(유둔재-입석리고개)

 

*산행일시:2008. 3. 12일/ 10시56분-17시41분(6시간45분)

 

*소재지  :전남 담양/화순

 

*산높이  :국수봉558m

 

*산행코스:유둔재-최고봉-노가리재-활공장-국수봉-입석리고개

 

 

 

넉 달 만에 다시 나선 호남정맥 종주산행은 전남담양의 유둔재에서 시작했다. 작년 11월 무등산을 둘

 

러본 후 이 고개에서 호남정맥 종주를 일단 멈춘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힘들여 먼 곳까지 내려가 봤

 

자 고작 5-6시간 걷고 나면 해가 넘어가 더 이상 종주 산행을 진행할 수 없어서였다. 그 후로는 겨우

 

내내 집에서 가까운 경기도 땅의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에서 갈라져나간 지맥 종주에 주력해오며 산줄

 

기탐방을 이어왔다. 임진강 제1지류인 한탄강에서 지맥이 다하는 한북감악지맥과 한북왕방지맥을 종

 

주했고, 팔당 앞 한강에서 산줄기가 다하는 한남검단지맥종주도 이 동안에 마쳤다. 이 달 들어 날씨가

 

많이 푹해졌고 해도 충분히 길어졌다 싶어 어제야 비로소 호남정맥 종주 길에 다시 올랐다.

 

 

 

다시 찾은 유둔재에서 한국가사문학관을 에워싼 정맥 길을 오르내리며 송강 정철을 떠올렸다. 15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가사문학관을 여기 담양에 지어놓은 것은 아버지를 따라

 

이곳 담양으로 내려온 후 관직에 있을 때와 귀양살이 동안을 빼놓고는 그가 줄곧 여기 창평에 머무르

 

면서 성산별곡,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을 지어 가사문학을 꽃피웠기 때문일 것이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은 송강이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관동별곡을 일컬어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재성이 저절로

 

펴지고 세속의 더러움이 없어서 예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참된 가사는 이 세편일 뿐이다”라고 극찬

 

했다 한다. 이들 작품만으로도 과연 그는 조선조를 통 털어 최고의 문학적 천재라는 칭송을 들을 만 했

 

을 것이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을 잠시 제쳐놓고 문인 송강이 아닌 정치인 정철을 만나보았다. 동시대를 같

 

이 살아온 율곡 이이는 정철을 두고 “충직하고 의로운 선비이나 다만 성격이 편협해 아량이 적은 것이

 

병폐다”라고 평했다. 송강 정철은 당쟁의 한 중심에 서서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며 옥석

 

을 가리지 않고 정적인 동인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가 기축사옥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 후 후계자 선정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나고 창평에 내려와 있는 동안 불후의 명작 사미인곡을 남겼

 

다하여 그의 정치적과오가 씻어진 것은 아니다. 백성을 보지 않고 임금만 쳐다보며 정치를 권력의 쟁

 

탈로만 인식했다면 그가 남긴 작품들이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칭송받을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 지난여름 영화 “밀양”을 보았을 때와 똑 같은 당혹감이 느껴졌다. 이청준님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해 연출한 어느 한 감독의 불후의 명작이 바로 여우 전도연을 세계적 스타로 바꿔놓은

 

영화 “밀양”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노작이다 하면서도 영화감독이 아닌 문화체육부 장관으로서

 

그가 자꾸 생각났다. 한 정권의 문화를 관장하는 부서의 장관으로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 건

 

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는 예술인들을 그가 대표했다는 것이 내 소견이어서 그가 감독한 영화

 

“밀양”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마음 편히 볼 수는 없었다. 송강 정철을 요즈음의 인사청문회에 출석

 

시켜 공과 과를 따진다면 과연 그에 좌의정이란 중책을 맡길 수 있을까 선뜻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이

 

런 평가들이 그들보다 더한 나의 편협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먼저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싶어 더

 

이상 송강 정철의 정치적 편력을 문제 삼지 않고 나머지 가사문학 길을 마저 걸었다. 

 

 

 

 

 

10시56분 유둔재를 출발했다. 새벽부터 서둘러 강남에서 5시50분에 광주 가는 일반고속버스를 탈 수

 

있었다. 10시 정각에 광천동터미널을 출발한 225번 버스에 올라 50분 후 유둔재에 이르는 동안 송강

 

정철선생의 문학을 기리는 가사문학관을 지났다. 고개 마루에서 차도를 건너 가사문학길 코스를 알리

 

는 안내판 앞에서 임도로 들어서자 대나무들이 3월을 맞아 생기를 되찾은 듯 푸르러 보였다. 10분을

 

걸어 묘지 앞에서 임도 길을 버리고 좁은 산길로 들어서 본격적인 산 오름을 시작했다. 베어낸 참나무

 

들을 비닐로 씌워놓은 무명봉에서 오른쪽 안부로 내려섰다가 삼각점이 서 있는 456.5m봉에 올라서자

 

사격소리가 들렸다.

 

 

 

 

 

12시12분 17번 표지목이 세워진 새목이재를 지나면서 노부부 두 분을 뵈었다. 조상님들의 묘지를 찾

 

아 올라오신 이 분들은 이제껏 오른 쪽 외동에서 올라왔는데 이번에는 새 길을 알아두고자 유둔재에

 

차를 세워놓고 가사문학관 길을 따라 오셨다며 이제 차를 둔 유둔재로 다시 내려가실 참이라 하셨다.

 

막상 새 길은 알아놓았는데 너무 멀어 옛날처럼 외동 길로 올라와야겠다고 말씀하시며 자리를 뜨는 두

 

 분을 보고 새 봄을 맞아 일찌감치 선영을 찾으신 그 분들의 효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혹시나 근력이

 

남아 계실 때 미리 올라와 고별인사를 드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같이 들어 그 분들의

 

뒷모습이 마냥 쓸쓸해 보였다. 16번 표지목이 서있는 묘지를 지나서 450m봉에 올랐다가 왼쪽 안부로

 

내려섰다.

 

 

 

 

 

13시51분 “최고봉”이라는 표지가 걸린 해발493m의 봉우리를 올랐다. 456.5m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쉬지 않고 꽤 많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동안 어느새 13시가 후딱 지나 배가 고팠다. 456.5m봉에

 

서 시간 반 남짓 걸어 까치봉이 그리 멀지 않은 해발480m의 삿갓봉에 올라섰다. 이 봉우리에서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들면서 15분을 쉬는 동안 생기를 되찾고 13시36분에 삿갓봉을 출발해 오른 쪽으로

 

내려섰다. 15분을 걸어 올라선 493m봉에 “최고봉”이라는 표지를 걸어놓은 것은 이봉우리가 아마도 가

 

사문학 길의 연봉들 중 최고로 높은 봉우리 때문인 것 같은데 혹시라도 송강께서 이 봉우리에 올라 사

 

미인곡을 착상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아예 “송강봉”이나 “사미봉”으로 명명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유둔재출발 3시간 만에 가사문학 길과 헤어져 송강과의 동행길이 끝나자 집에 돌아가

 

면 그의 역작 사미인곡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14시44분 포장도로가 지나는 노가리재를 건넜다. 가사문학길 갈림길을 지나 막 베어낸 소나무들이 길

 

을 막는 능선 길을 지났다. 450m봉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갔다가 경사가 급한 무명봉을 올

 

랐다. 얼마 후 다다른 송전탑을 지나 노가리재로 내려섰다. 예상했던 대로 고개이름이 점잖지 못한 것

 

은 예전에 나무꾼들이 장보러가는 길에 이 고개에 모여 앉아 노가리를 풀었다하여 붙여졌기 때문이다.

 

노가리재에서 큰 길을 따라 올라 다다른 월봉산제2이륙장에서 잠시 쉬면서 언제고 패러글라이딩을 타

 

고 저 아래 넓은 창평 벌을 훨훨 날게 될 나를 상상해보았다.

 

 

 

 

 

16시 정각 전망바위에 올랐다. 길가의 소나무를 베어내 한 동안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든

 

것이 아닌지 불안했지만 얼마 후 표지기가 다시 보였고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빨라 저녁 6시안에 목적

 

지인 입석리고개에 충분히 다다를 것 같아 안심됐다. 좌 사면이 거의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인 능선

 

길을 걸어 희멀겋게 잘 생긴 커다란 암봉에 올라서면서 나무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와 흰색과,

 

주홍색 그리고 검은색의 이름 모르는 삼색조를 만났다. 호남정맥에 새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가 들

 

꽃만이 아니고 이 들 새들도 있음을 새삼 깨달아 그들의 전신을 사진 찍고자 했으나 한자리에 진득하

 

게 머무르지 않고 여기 저기 날아다니는 통에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창평벌과 월봉산이 한 눈에 들어오

 

는 전망바위에 올라서서 발아래 저수지와 넓은 벌을 조망하자 저녁 한 때 시골 풍경이 참으로 한가로

 

워 보였다. 전망바위에서 조금 내려가 오른 쪽으로 철조망울타리를 친 길을 만나 안부로 내려서자 오

 

른쪽으로 저수지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17시11분 해발557.6m의 국수봉을 올랐다. 안부에서 조금 올라 이번 산행에서 가장 가팔라 보이는 오

 

름길을 올라 산불감시초소가 서있는 468m봉에 올랐다. 468m봉에서 안부로 내려와 철문을 비집고 안

 

으로 들어서 조금 올라가 만난 월성봉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얼마간 편한 임도 길을 걷다가 묘

 

지 2곳을 지나 오른 봉우리가 국수봉으로 삼각점과 무인시스템이 서 있었다. 국수봉에서 잠시 쉰 후

 

입석리로 하산했다. 하산 길에 만난 시멘트도로 왼쪽 길로 계속 내려가 한쪽 사면을 이발기로 삭발을

 

한 것 같은 벌목지를 지나 시멘트 길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꺾어 조금 내려가 다다른 곳이 범죄 없는

 

마을의 입간판이 세워진 입석리 고개다.

 

 

 

 

 

17시41분 89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입석리고개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다. 수령이 355년 된 거목

 

등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지켜선 입석리고개에서 오른 쪽으로 3-4분 떨어진 입석리 정류장으로 내

 

려가 18시10분에 창평 행 버스를 탔다. 창평서 담양 가는 33번 버스의 운행코스는 한갓진 시골을 모두

 

들르도록 되어 있어 덕분에 담양 땅 시골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종주산행이 내게 주는

 

보너스다.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종주산행에 오르지 않고서는 무슨 수로 이처럼 멀리 떨어진 촌구석

 

을 샅샅이 볼 수 있겠는가?담양에서 하룻밤을 묵어 화순에 이어 내가 묵고 간 호남의 소도시 숫자를

 

하나 늘렸다. 

 

 

 

 

 

역사적 인물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송강 정철처럼 문학과 정치에서 나름대

 

로 족적을 남긴 분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치 낙제생이자 천재 문학가로 평한 이이화님의 한 마디에 귀

 

기울여지는 것은 송강 정철도 당 시대를 고민하는 신하였을 뿐 결코 현인은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이

 

다. 스스로 범인 속의 인걸로 칭한 송강의 호연지기를 접해본 것만으로도 이번 호남정맥 종주는 아주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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