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주기10:호남정맥 8구간(그럭재-심수마을)
*산행일시:2007. 8. 23일/ 7시27분-15시27분(8시간)
*소재지 :전남 보성
*산높이 :배각산417m/봉화산475m/활성산465m
*산행코스:그럭재-배각산-봉화산-봇재-활성산-삼수마을
능선 길에서 이름 모르는 활엽수 나무의 줄기를 초록색의 이끼가 뒤덮었고 그 이끼위로 넝쿨이 나무줄
기에 바짝 붙어 위로 치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이든 큰 나무에 이끼가 끼어 있거나 넝쿨이 줄
기를 휘감고 올라가는 2종의 식물이 같이 사는 것은 종종 보아왔지만, 3종의 식물이 한데 어울린 현을
보기는 처음이어서매우 신기했다. 공생이란 두 생물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이어서 적어도 한 쪽
은 반드시 움직이는 동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공생 현장을 보고나서 잘 못된 고정관념일
뿐, 3종의 아니 그 이상의 식물들이 공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모든 생물들이 경쟁과
공생을 통해 견제하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공존의 장이 바로 우리들이 터 잡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자연
이기 때문이다. 어제 공존의 현장을 보고 나는 3종의 식물이 공생한다했지만 다른 분들에는 2종의 식
물이 한 나무에 붙어 기생해 자라는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공생이란 종이 다른 생물들이 서로 도와
가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활엽수 수피에 끼어 있는 이끼와 그 이끼 위로 커가는 넝쿨 들이 어떻게 도움
을 주고받는가를 정확히 규명한 뒤라야 감히 공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저
산을 즐겨 찾으며 산행 중 보고 느낀 바를 자연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산행기를 남기는 산 꾼
일 뿐 이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해 생물학에서 쓰이는 엄격한 의미의 “공생”을 온전하게
따르지는 못하고, 넓은 의미에서 공존이나 기생도 공생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음을 미리 양해말씀
드린다.
생물학에서는 단순히 한 곳에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공생으로 부르지 않는다. 공생은 서로 만났는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와가며 사는 것이 서로에 이익이 된다는 필연이 있어야 가능하
다. 개미가 진딧물이 배설하는 단물을 빨아 먹고 무당벌레로부터 진딧물을 보호해주는 진딧물과 개미
의 관계는 서로가 뭔가를 주고받는 필연적인 공생의 관계인 것이다. 인간사회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
아 단순히 옷깃을 스치는 인연만으로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이고, 우연한 만남을 뛰어넘어 관계라는 필
연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 본 공생의 주인공들에는 그렇게 부둥켜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필연은 과연 무엇일까? 초록의 이끼가 줄기에 붙어 있어 이끼는 오가는 사람들에 밟히지 않아 좋
고 이 나무의 줄기는 초록색의 이끼를 통해 광합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무식한 생각도 해보
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넝쿨은 나무나 이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저 기생하는 것 같았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 먼 곳으로 돌아가라는 멧돼지의 경고음을 여러 번 들었다. 가시나무가 길을 가
로막는 숲길을 헤쳐 나가며 온몸이 가시에 찔린 것도 다반사였다. 이때마다 나는 산길을 걷는 동안만
이라도 이 산속의 식구들과 공생의 관계를 맺을 수는 정말 없는 것인가 하며 안타까워했다. 내 진정과
는 달리 산속의 멧돼지나 식물들에게 한낮 침입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속상했다. 며칠 전
“욕망하는 식물(The Botany of Desire)”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이들과 공생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나의 꿈을 접지 않아도는 희망을 보았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마이클 폴란(Michel Pollan)은 공진화의
개념을 들어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설명했다. 서로 다른 종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하는 공진화의
모든 관계에서는 객체가 주체인 동시에 주체가 객체라고 생각하는 저자는 농경이란 풀이 나무를 이기
려고 사람을 이용해 나무를 베어내게 만드는 전략으로 새롭게 정의를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에 길들여
진 대표적인 식물인 사과, 튤립, 감자, 대마초가 어떻게 사람들을 이용해 최대 소원인 자기들 종을 퍼
뜨렸는가를 들려주고 있다. 호남정맥의 산 식구들과 하나가 되는 길은 그들이 주체가 되고 내가 객체
가 되어 그들이 나를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를 살펴보고 기다리는 길임을 알았다. 이제 내가 할 일
은 자명하다. 멧돼지가 아무 때나 덤벼드는 난폭자가 아니고 낮에는 길을 비켜주고 밤에만 주로 활동
하는 점잖은 야행성동물임을 널리 알리는 일이다. 명감나무 가시가 헤치고 나가기에는 위협적
이지만 생 울타리를 만드는 데는 더할 수 없이 유용함을 널리 알려 이 나무의 서식지를 넓혀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싶었다. 그리한다면 더 이상 산 식구들이 나를 내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희망을 보았다.
아침7시27분 그럭재를 출발했다. 새벽 3시40분에 순천역에 도착해 역사에서 쉬었다가 6시20분에 출
발하는 서광주행 경전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으로 타보는 경전선 열차는 벌교를 지나 조성
역에 다다르기까지 논 뜰을 가르며 달려 바깥 풍경이 시원했다. 아침 이른 시각에 그럭재 들머리에 들
어설 수 있었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순천에 사시는 깜상님 덕분이어서 이 글을 빌려 감사인사 올린
다. 호박꽃이 화사한 작은 밭떼기를 지나 측백나무 숲길로 올라섰다. 짙은 안개로 이슬이 잔뜩 맺힌 풀
길을 걷느라 구두가 다 젖고 나서야 스패치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럭재 출발 반시간 후
통신중계탑이 서있는 임도삼거리에 다다라오른 쪽으로 확 방향을 바꾸어 내려갔다. 얼마 후 만난 삼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몇 걸음 옮겨 다시 오른 쪽 절개면으로 올라섰다. 안개가 가시고 햇살이 퍼지
자 이내 목덜미가 따가워져 수건을 내두르고 산행을 했다. 절개면을 올라 이어지는 정맥 길은 바로 전
의 구간에서처럼 풀 숲길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걷기가 수월했다. 절개면을 올라 20여분을 걸어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거의 90도를 틀어 7-8분을 더 걸어 삼각점이 서있는 해발471m의 배각산에
다다른 시각이 8시37분이었다.
9시40분 해발 475m의 봉화산에 올랐다. 배각산에서 왼쪽으로 꺾어 20분을 내려가다가 유스호스텔 갈
림길에서 잠시 쉰 후 산행을 이어갔다. 2004년에 이 길을 종주한 따라가기님의 산행기에 갈 길이 산딸
기가시 등이 길을 가로막는 고약한 풀 숲길로 적혀있어 불볕더위에 이를 헤치고 나갈 일이 걱정되었는
데 그 후 3년 동안 호남정맥을 종주한 많은 분들이 길을 잘 내 그저 기우로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긴 의자가 세워진 봉화산0.7Km 전방에서 선채로 숨을 고른 후 산죽 길을 지나 임도 건너 숲길
로 들어섰다. 얼마 후 다다른 봉화산 정상에 “새천년의 햇살 보성에서 빛나리” 글이 쓰인 커다란 돌비
석과 정방형의 축대위에 원통형의 돌탑을 새로 쌓아 조형미가 뛰어난 봉수대가 세워져 있어 득량만 앞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상의 넓은 터가 작은 공원 같았다. 원통형 봉수대아래 그늘진 곳에서 털
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쭉 뻗고 아무 생각 없이 10분 간 푹 쉬었다. 날씨가 서늘해져 모기입이 비뚤어
진다는 처서를 맞았는데도 이 여름 마지막 더위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이번 산 나들이는 이
틀간 호남정맥을 종주하고 사흘째는 해남의 두륜산을 오를 계획이어서 첫날부터 무리하다 자칫 더위
라도 먹으면 일정차질이 불가피해질 것 같아 쉬는 횟수와 시간을 최대로 늘려 잡고 천천히 산행했다.
봉수대에서 안부로 내려서는 중 이끼와 넝쿨이 한 활엽수 줄기에 붙어사는 공생의 현장을 지나면서 좀
처럼 보기 힘든 다정한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안부로 내려섰다가 산불감시초소가 들어선
411.4m봉에 도착했다.
11시26분 앙상한 소나무가 서있는 300m봉에 올랐다. 산불감시초소를 출발해 무명봉에 올라서기까지
40분 동안은 여름 태양이 햇살을 쏟아 부어 잠시나마 녹차 밭을 지나지 않았다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
다. 초소에서 내려가 KTF와 SK의 기지국을 차례로 지나면서 하나만 세워 같이 쓰면 될 것 같은데 왜
경쟁적으로 돈을 들여 중계탑들을 세우는지 나는 모른다. 정부규제의 논리적 근거가 유한한 자원의 효
율적 배분에 있다면 멀쩡한 산에다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파헤쳐 세우는 중계탑은 산림보호를 위해서
도 적절히 규제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기지국 출입을 위해 닦아놓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15분을 내려
가 봇재 2.8Km 전방의 보성선씨 추모공원 앞 오거리로 내려선 시각이 10시40분이었다. 추모공원 오른
쪽으로 난 좁은 풀밭 길로 들어서 얼마 후 측백나무 숲을 지나 정맥길 서쪽 바다에 접한 회천사람들이
보성읍과 순천으로 나들이를 할 때 넘나들었다는 재양골(朝陽谷)재로 내려섰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다
녔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313m봉에 올라 토마토를 꺼내
든 후 내려서는 길에 잠자리 한 마리가 콧잔등에 내려앉았다가 이내 날라 가버렸지만 나를 산식구로
맞아들이는 세레머니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원을 2.0Km 남겨놓은 300m봉에 오르자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득량만 앞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세게 불어와 긴 의자에 올라 바지춤을 내리고 모
처럼 거풍을 즐겼다. 나무들이 없어 전망이 뛰어난 이곳에서 왼쪽의 득량만과 오른 쪽으로 조금 비껴
서 멀리보이는 다원휴게소를 오랜 시간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은 구름이 해를 붙잡고 내보내지 않아서였
다. 태양이 다시 얼굴을 내보여 서둘러 300m봉을 출발해 봇재로 향했다.
12시22분 18번 국도변의 봇재에 도착했다. 300봉m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선 십자안부에서 서서
히 올랐다가 오른 쪽 농장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걸
었다. 오른 쪽 비탈면에 녹차 밭이 들어선 임도 길을 10분 가까이 걸어 만난 임도삼거리에서 오른쪽으
로 내려가다 임도를 건너 측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길로 들어섰다. 얼마고 내려가자 제일다원 정문
앞 사거리가 나타나 직진해 시멘트 길을 따라 걸었다. 오른 쪽 밭에서 일을 하다 휴식 중인 할머니들
앞을 그냥 지나기가 뭣해 휴게소가 얼마나 남았냐고 여쭤보자 조금만 내려가면 된다며 이 더운데 혼자
왜 다니나 혀를 차며 뜨악해 하셨다. 4-5분 후 봇재 고개 마루에 도착하자 차도 건너 녹차 밭과 대한다
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휴게소 앞마당에 세워놓은 차양아래에서 점심을 들고 난 후 반시간 넘게 푹 쉬
었다. 이번에는 산행코스를 짧게 잡아 등을 눕힐 벤치만 있다면 한잠 자고 가도 될 법한데 앉은 채로
쉬다가 그냥 일어서자니 아쉬웠다.
13시8분 봇재의 휴게소를 출발했다. 고개 마루아래서 차도를 건너 대한다원 안으로 들어섰다. 나라 땅
이 아닌 남의 땅에 들어가서 지나가기는 여전히 불편하고 찜찜한 일이어서 다원통과에 신경이 쓰였다.
풀어놓은 개가 짖기만 하고 덤비지 않아 다행이었고 밭에서 일하는 아낙네들이 친절하게 물음에 답해
주어 고마웠다. 밭 한가운데 계단을 걸어올라 밭이 끝나는 마루에서 산속으로 들어서자 이번 산행에서
처음으로 풀 숲길이 나타났다. 장갑을 끼고자 찾다가 봇재 휴게소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났으나 땡볕에
다시 내려갔다 올라 올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산행을 계속 했다. 서쪽으로 10분을 더 걸어 만난
임도6거리에서 왼쪽 두 번째 길로 들어선 숲길은 죽은 나무들이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지만 방금 지나
온 길보다 훨씬 좋았다.
14시34분 해발465m의 활성산을 올랐다. 임도6거리에서 높낮이가 거의 없는 산길을 25분간 걸어 활성
산 남사면을 개간한 녹차 밭에 다다랐다. 그늘을 찾아 13분간 쉰 후 밭가 오른 쪽 길로 들어가 계속 올
랐다. 밭이 끝나자 길도 같이 끊겼다. 왼쪽으로 옮기다 중간 지점에서 표지기를 발견해 그 길로 똑바로
올라갔다. 잡풀들이 무성한 묘지를 막 지나 올라선 봉우리에 아무런 표지가 없었지만 지도에 나온 대
로 이 봉우리가 활성산임을 알았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꺾어 14분을 걸어 내려가 만난 임도3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4-5분을 걷다가 그늘을 만나 또 다시 쉬면서 땀을 식힌 후 15시2분에 다시 일어섰다.
15시27분 삼수마을 정자에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푹푹 찌는 더위에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걷기도 쉽
지 않았다. 임도를 따라 12분을 내려가 차도를 만났다. 고개 마루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차도를 따
라 내려가다가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진 곳에서 짐을 벗어놓고 푹 쉬었다. 목적지인 895번 도로 고개
가 얼마 안남아 쉬면서도 마음이 편했다. 더 누워있다가는 잠이 들 것 같아 다시 일어나 차도를 따라
걸었다. 십 수분을 내려가 다다른 삼수마을 정자에서 나보다 10살이 연하인 한 분에 여기 지형에 관해
몇 가지를 물어 확인했다. 정맥 길은 논 왼쪽의 낮은 구릉지대로 이어지나 길이 나 있지 않아 논 한가
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야 정남쪽으로 보이는 895번 도로에 닿게 되는데 10분이면 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만산행을 접고 군내버스를 기다렸다. 16시 10분을 조금 지나 버스에 올라 타 보성읍내로 나갔
다.
이번 산행에서 걱정했던 두 가지는 폭염과 가시숲길이었다. 불더위야 피할 수 없었지만 가시 숲길은
잠깐 뿐이어서 다행이었다. 이틀을 더 산행할 계획이어서 더위를 먹지 않으려 자주 쉬고 오래 쉬는 동
안 우리의 산하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는 생각이다. 큰 나무와 이끼, 그리고 넝쿨이 공존하는 호남
정맥에 발을 들인 내가 침입자가 아니고 그들과 한 식구로 자리매김 하는 날을 묵묵히 기다리며 내일
도 정맥종주를 이어갈 것이다.
환주기11:호남정맥 9구간(삼수마을-시목치)
*산행일자:2007. 8. 24일/ 7시24분-19시32분(12시간8분)
*소재지 :전남 장흥/보성
*산높이 :일림산664m, 사자산666m, 제암산807m,
*산행코스:삼수마을-일림산-골치-사자산-곰재-제암산-시목치
푹푹 찌는 찜통더위에 맞서 12시간 넘게 호남정맥을 종주하고 나자 내 몸의 탄성한계는 얼마나 될까
새삼 궁금했다. 땅거미가 완전히 져 사위가 깜깜해진 저녁 7시 반이 지난 시각에 목표점인 시목치고개
에 도착해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나서는 혹시나 탄성한계를 넘도록 무리하게 산행해 다시는 일어서
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힘은 쓸수록 생긴다는 시골 어른들의
말씀은 내 몸의 탄성한계가 높았던 젊었을 때는 잘 들어맞았지만 이제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나이
먹어서 한번 몸이 망가지면 좀처럼 회복이 어려우니 돈과 몸을 축내며 쏘다니지 말라는 주변 친지들의
한 마디가 옛날처럼 마냥 고깝게 들리지 않은 것은 젊었을 때 보다 내 몸의 탄성한계가 낮아졌음이 감
지되어서다.
며칠 전 한 일간신문에서 “탄성과 소성, 그리고 파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읽었다. 철로 만들어진 재
료를 양쪽에서 잡아당겨 끊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탄성영역과 소성영역을 차례로 거쳐 파괴
에 이른다고 한다. 외부에서 가한 힘을 제거했을 때 원상태로 돌아가는 영역은 탄성영역이고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고 변형상태로 남아 있는 영역이 소성영역이다. 소성영역의 물체에 힘을 더 가하면 깨지
거나 부셔져 파괴에 이르게 되는 것은 이러한 재료뿐만 아니고 사람 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몸
을 웬만큼 쓰면 탄성영역에 머물러 회복되지만 혹사하면 소성영역에 들어가 몸져눕게 된다. 소성영역
에 들어가서도 몸을 함부로 굴리면 결국은 파괴되어 죽음에 이른다. 웬만큼 산행해서는 내 몸이 좀처
럼 탄성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아 하룻밤 자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 몸이 개운했고 그 이튿날 아
침 일찍 산행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그리하면 산행 중 주저앉아 소성영역에 머무를 것 같
은 두려움이 앞서 무리한 산행은 자제하고 있다.
어제 산행은 탄성한계를 넘나드는 힘든 것이었다. 삼수마을을 출발해 일단 일림산에 오르면 좀 멀기
는 해도 시목치까지 나가야 차들이 다니는 고개 마루에 닿을 수 있다. 순천의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
은 후 아침5시55분에 출발하는 보성행 첫 버스를 탄 것도, 또 보성에서 하차해 택시로 삼수마을로 옮
긴 것도 최대한 쉬는 시간을 많이 확보해 내 몸의 피로도가 탄성영역 안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였
다. 나름대로 탄성한계를 넘지 않도록 산행 중 내내 신경을 썼는데도 막상 목적지인 시목치에 다다르
자 한 걸음도 더 걷지 못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버려 바로 아래 장동의 택시를 불러 버스 정류장으로 내
려갔다. 가히 폭력적인 이번 더위에 몸이 망가지지 않고 더위를 먹지 않은 것은 내 몸이 탄성한계를 넘
지 않도록 나름대로 챙겨서이지만, 산행을 끝내고 나서 택시를 부를 만큼 이번 산행은 힘들었다.
아침 7시24분 삼수마을을 출발했다. 보성읍에서 아침6시 첫 버스를 타지 못한 나는 택시를 타고 이 마
을로 와 그 다음 8시 반 차를 탔을 때보다 시간 반이 빨랐다. 논 사이로 난 시멘트포장도로로 들어선 후
갈멜농원을 거쳐 삼수마을 표지석이 서있는 895번도로에 다다르기까지 딱 10분이 걸렸다.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오른 쪽의 콩밭 옆으로 난 큰 길을 따라 산길로 들어서 418m봉으로 향했다. 고추밭을
지나서 똑바로 올라 만난 임도를 따라 얼마큼 올라가자 풀숲이 우거진 내림 길이 시작됐다. 풀숲을 헤
치고 조금 내려가 보았지만 방향도 아니고 다시 내려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되돌아와 오른 쪽 산속으
로 들어가 힘들게 치켜 올라갔다. 다시 만난 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길이 끊나 다시 오른
쪽 산속으로 들어가 무조건 잡목을 헤쳐 나가며 위로 올라갔다. 얼마 후 오른 쪽 밑에서 올라오는 좋은
길을 만나 이 길을 따라 걸어올라 몇 분 후 한치재에서 올라오는 넓은 길의 능선삼거리에 올라섰다. 능
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418m봉에 오른 시각이 8시21분이니 반시간 이상은 잡목
숲길에서 고생한 셈이다. 어떤 분들은 정맥 길에서 벗어난 한치재에서 출발해 무지막지한 잡목 숲길을
피해 올랐는데 895번 도로에서 제대로 길을 한번 이어보자고 잡목 숲길로 들어섰다가 혼쭐이 났다. 초
반부터 무리한 듯싶어 418m봉에서 복숭아를 까먹으며 20분을 쉬었다.
9시42분 누군가가 작은 바위에 한자로 “日林山”이라고 써놓은 626.8m봉에 올랐다. 418m봉에서 왼 쪽
으로 이어지는 정맥 길은 앞서 헤치고 온 잡목 풀숲 길에 비하면 양탄자 길이어서 날아갈 것 같았다.
왼쪽 아래로 흐릿하나마 바다가 보이고 헬기장까지 고도차가 거의 없는 편안한 길이어서 고진(苦盡)
과 감래(甘來)의 시간차가 이렇게 짧아도 되는 것인지 오히려 불안했다. 회령삼거리 안부로 내려섰다
가 헬기장을 지나 산죽 길에 들어서자 다시 오름길이 시작됐다. 얼마간은 경사가 완만해 힘든 줄 몰랐
는데 626.8m봉이 가까워지자 경사가 급해졌다. 흐렸던 하늘이 다시 개어 남은 하루 더위가 만만치 않
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산마루턱에 올라서자 3년 전에 비 맞고 올랐던 일림산이 그리 멀지 않게 보였
다. 마루턱에서 조금 더 가 만난 작은 표지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일림산까지 펼쳐진 초원은 장
관이었다. 용추골로 갈리는 능선삼거리를 조금 지나 나무 그늘아래에서 10분을 쉬었다.
10시30분 해발664m의 일림산에 다다랐다. 5월이라면 산철쭉이 눈부시도록 화사했을 이 산을 한 여름
에 지나자니 아무 볼 것도 없고 땡볕을 가릴 수 없어 많이 힘들었지만 아무도 없는 너른 평원을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서 고행하는 맛도 곱씹을 만 하다는 생각이다. 보성강 발원지로 갈리는 능선사거리에
서 십 수분을 더 걸어 호남정맥 최남단지점인 일림산 중봉에 도착한 시각이 10시23분이었다. 백운산
에서 서진을 계속하며 남으로 내려온 호남정맥이 이제야 비로소 방향을 바꾸어 백두대간의 영취산을
향해 북진하게 된 것이다. 잠시 후 일림산에 올라서자 구름이 해를 가리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어
인 일인지 3년 전에는 비바람을 이겨내며 똑바로 서있던 정상의 표지석이 뿌리가 뽑힌 채 흙속에 묻혀
있어 안쓰러웠다. 남쪽 아래 바다가 밀어 올린 바람이 삽상해 이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내달리면 사자
산과 제암산을 쉽사리 넘어 시목치에 안착할 것 같았다. 10분을 쉰 후 사자산을 향해 안부로 내려갔다.
안부에서 골치산으로 올라섰다가 서쪽의 600m봉을 지나 골치로 내려서는 동안 이끼가 길바닥을 살짝
덮어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오른쪽으로 용추계곡 길이 갈리는 사자산3.4Km 전방의 골치에 도착해 짐
을 풀고 더위에 시달린 몸을 추슬렀다. 복숭아를 꺼내먹고 커피를 마시는 등 반시간을 쉬고 나자 원기
가 되살아나 11시47분에 골치를 출발했다.
13시56분 해발 666m의 사자산을 올랐다. 골치 출발 반시간 후 570m봉에 이르기까지 풀 숲길 몇 곳을
지났다. 정오의 시간대에 중력에 반해 가파른 산 오름을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570m봉에 오른 후로는
더 이상 풀 숲길도 나타나지 않고 정맥 길도 완만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540m봉을 지나서 점심을 들었
다. 내 몸이 탄성한계에 이르기 전에 산행을 멈추고 쉬면서 원기를 되찾겠다고 무려 20분을 쉰 후 13시
6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후 오른 쪽으로 휴양림 길이 갈리는 안부삼거리에서 깔딱 길을 올랐
다. 3년 전에 이 길을 내려올 때도 경사가 급하다 했는데 거꾸로 오르는 길은 땡볕 더위가 아니더라도
지치는 일이었다. 까까비탈의 직등 길을 힘들여 올라 밟기 시작한 암릉 길도 결코 짧지 않았다. 골치산
에서 시작한 서진 길은 여기 암릉 길에서 끝나고 본격적으로 북진 길이 시작됐다. 사자산 정상에 올라
서 장흥에서 왔다는 40대 후반의 부부를 만났다. 이틀간의 종주산행 중 유일하게 만난 분들이어서 무
척 반가웠다. 사자산에 오르자 3년 전에 곰재에서 사자산으로 방향을 트느라 오르지 못한 제암산의 암
봉들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사자산에서 간재로 내려서는 길 또한 이끼가 끼어 내림 길이 조심스러웠
다. 이름난 명산들이어서 길 하나는 제대로 잘 나있어 풀숲을 헤치고 나갈 일이 없어 좋았는데 의외의
복병 이끼를 만나 엉덩방아를 몇 번 찧었다. 사자산 정상에서 0.7Km 밖에 걸어 내려오지 않았어도 더
위로 바로 지쳐 간재 안부에서 또다시 5-6분을 쉬었다.
15시18분 곰재에 내려섰다. 간재에서 완만한 비알 길을 올라 커다란 암괴를 오른 쪽으로 에돌자 평원
이 전개되었다. 저 많은 철쭉나무들이 일시에 꽃을 피우면 천상의 화원이 되고도 남을 고원을 지나면
서도 크게 감흥이 일지 않는 것은 끔찍한 더위 때문이었다. 눈에 익은 곰재산에서 숨을 고른 후 곰재로
빨리 내려가 쉬겠다는 일념에서 경사가 급한 길을 서둘러 내려갔다. 곰재에 다다르자 머리가 띵하고
멍했다. 이번 더위가 탄성한계 너머로 나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 듯싶었다. 한참을 꼼짝 않고 퍼져 쉬었
어도 다시 일어나 저 가파른 된비알 길을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물밖에 없는데 이쯤해
서 종주 길을 접고 하산해버릴까 하는 유혹이 일었다. 20분을 쉰 후 몸을 일으켜 세워 제암산을 향해
몇 걸음발을 떼었는데 눈앞에 평상이 보였다. 이 평상에 누워 딱 10분만 하고 살짝 눈을 감은 것이 깊
은 잠에 빠져 30분 만에 눈을 떴다. 깨고 나자 확실히 탄성한계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제 몸을 찾은 듯
온 몸이 개운했다. 16시7분에 다시 곰재를 가볍게 출발했다.
17시 정각 해발 807m의 제암산을 올랐다. 한잠 자고난 덕분에 반시간 직등 길을 쉬지 않고 올라 돌탑
이 세워진 봉우리에 가볍게 올랐다. 길 왼쪽에 서있는 절애의 형제바위를 사진 찍었는데 상이 분명치
않아 아쉬웠다. 돌탑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시설물과 헬기장을 지나 제암산 정상 턱 밑에 오르기까
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곧추선 암봉에 겁에 질려 오를까 말까 한참 고심한 끝에 용기를 내어 도전했
다. 얼마큼 올라선 후 좁은 틈을 헤비고 올라 정상에 이르렀다. 넓적한 바위에 표지석이 서 있었고 사
방에 펼쳐지는 전망도 일품이었다. 맞은 편 낮은 봉에 제암산의 표지석을 세운 것은 위험한 이봉우리
에 오르지 말고 맞은 편 봉에 올라 사진만 찍고 가라는 뜻 같았다. 오르기는 했어도 올라 온 좁은 틈바
구니로 다시 몸을 집어넣고 내려서는 것이 안 되어 난감했다. 이러다가 누가 올 때가지 내려가지 못하
고 이 바위에서 밤을 세워야하는 것인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내 진정하고 왼쪽으로 옮겨 다른 길을
찾아보았다. 위험하기는 해도 잘하면 가능하겠다 싶어 심호흡을 한 후 스틱을 내려설 곳으로 살짝 떨
트린 후 하강을 시작했다. 가까이서 찾아보니 스탠스도 홀드도 모두 쓸 만한 곳이 보여 바위를 안고 내
려섰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막상 바위에 붙고 보니 생각만큼 난코스는 아닌 것을 미리 겁부터
집어먹고 벌벌 떨었던 것이다. 잠시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 시킨 후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산을 향해 발
걸음을 옮겼다. 얼마고 고약한 암릉길을 걸어 전진하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낭떠러지 암벽을 만나 다
시 원 위치해 오른 쪽으로 난 제 길로 내려가느라 또 시간을 까먹었다. 제 길에 들어선 후 20분을 동진
해 17시43분에 제암산자연휴양림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갈림길의 이정표에 따르면 여기에서도 시
목치까지 3.7Km 남아 있다 하니 서둘러도 어둡기 전에 도착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655m봉 암봉
을 우회해서인지 다른 분들 산행기에 나오는 권중웅불망비를 보지 못했다.
19시32분 시목치에서 종주산행을 마쳤다. 655m봉에서 작은산에 이르는 길은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고
오른 쪽 산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최대한 속력을 냈다. 중간에 3-4분을 쉬며 목을 축인 후 계
속 내달려 헬기장을 지나 바로 해발 682m의 작은산을 올랐다. 눈에 익은 표지기들이 석양을 받아 환해
보였다. 10분을 쉰 후 18시38분에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시목치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길은 경사가 급
했고 이끼 때문에 여전히 미끄러웠다. 시목치2.0Km전방인 관광농원 갈림길을 지나서 몇 번 미끄러진
후 송전탑에 이르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설사 어둡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내려가기로 작
정한 터라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얼마 후 팔각정에 다다르자 주차장이 0.8Km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
인데다 계단 길이 나타나 긴장이 풀렸다. 팔각정에서 얼마고 내려가 만난 삼거리에서 왼 쪽 길로 들어
선지 7-8분 후 시목치에 도착했다. 구 도로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른 후 큰 아들에 안착을 알리고 나
자 피로가 엄습해와 꼼짝 않고 몇 분을 누워있었다.
더위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곰재에서는 탄성한계를 넘어 선 듯해 포기해야 하나 걱정했
다. 폭염과의 전투에서 탄성한계를 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시목치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은 마지
막 더위는 어둠이 먹어 삼켰고 휘영청 밝은 달이 완주를 축하해 주었다. 택시 타고 장동으로 옮겨 맥주
를 반주로 해 풍성한 밥상을 남김없이 비우고 나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
작했다. 내일의 두륜산 산행을 위해 해남행 버스에 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 여름 끝 더위의 뒷덜
미를 지켜보았다. 하루 더 두륜산에서 마지막 일전을 치른 후 여름 더위를 남쪽 먼 나라로 정중히 보내
고자 한다.
환주기12:호남정맥 10구간(시목치-피재)
*산행일시:2007. 9. 8일/7시20분-16시36분(9시간16분)
*소재지 :전남 장흥
*산높이 :용두산551m
하늘이 높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것으로 보아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손이 석자만 더 길어도 손끝이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천마산(天摩山)에 올라가 석자가 넘는 스틱으로 하늘을 찔러본들 무슨 소용에 닿겠는가 할 정도로 하늘이 높았다. 불과 보름 전에 제암산 구간을 오를 때만 해도 땡볕을 이겨내기가 힘들어 무슨 놈의 하늘이 이리도 가까이 내려와 사람들을 괴롭히나 원망했다. 며칠을 지척대며 내린 비가 대기를 식혀 목덜미에 와 닿는 햇살의 따가움이 견딜 만해 머리 위를 맴돌던 여름하늘이 어느새 물러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한대로 높은 곳에 있기에 가을이 왔다고 하늘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문학적 수사로는 어떨지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눈에 보이는 북극성도 800광년을 달려야 다다를 수 있는데 그 보다 훨씬 멀리 있는 수많은 별들을 어우르는 하늘을 보고 석자만 가까이 있으면 손끝이 닿을 수 있다고 숫자로 계량해서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늘의 높이가 자로 잴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찾아보다가 구름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 여름에는 답답할 정도로 하늘이 낮게 느껴지지만 구름이 높이 뜬 가을에는 더 할 수 없이 높게 보이기에 말이다. 무한대로 멀리 있는 하늘의 참 높이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고 구름을 통해 그 높이를 어림해 느낄 뿐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번 호남정맥 종주 산행에서는 다른 때보다 자주 고개를 들어 하늘높이 떠다니는 구름들을 눈여겨보았고, 또 하늘에 흩뿌려진 구름 조각들을 하늘과 함께 카메라에 담으면서 하늘의 높이를 가늠해보았다.
그런데 말이다. 말끔한 하늘 곳곳을 사진 찍었어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았다. 하느님이 구름 뒤에 숨어 구름의 양은 물론 하늘의 높이도 조절해왔다는 믿음과는 달리 구름이 하늘 높이 물러간 청명한 가을에도 하느님의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하느님도 하늘처럼 무한대의 높이에 계시기 때문인가 보다. 구름의 신에 물어본다 해도 무슨 수로 그 분의 거처를 알 수 있겠는가 의심됐다. 그렇다면 그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마치 지구상에 모셔온 것처럼 떠들어온, 그래서 하느님의 현시가 벌써 이루어진 양 혹세무민한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궁금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뜻을 모범적으로 받드는 목자들이 아니고 하느님을 사칭해 이익을 추구하는 모리배들임이 틀림없다. 하늘이 높은 이 가을이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딱 알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하느님을 들먹였다.
아침 7시20분 장동 버스정류장을 출발해 피재로 향했다. 전날 밤 동창들과 저녁모임을 가진 후 영등포역에서 밤 11시가 다 되어 순천행 막차를 탔다. 성묘객들이 자리를 차지해 2시간 동안 서서가느라 잠을 자지 못해 새벽 3시40분경 순천역에 도착했을 때 몸이 파김치가 다 되었다. 순천버스정류장에서 아침5시55분에 출발하는 장흥 행 첫 버스에 몸을 실어 몇 십분이나마 단잠을 자고나자 몸이 조금 개운해졌다. 장동에서 하차해 피재와 곰치 가까이에 이르는 버스 편을 알아본 후 택시를 타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걸어서 시목치로 갔다.
7시50분 시목치를 출발했다. 장동 출발 20분 후에 다다른 시목치에서 산행을 채비했다. 장흥군의 장동면과 부산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시목치는 감나무재의 한자(漢字)이름으로 고개 마루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이 고개의 유래를 읽어보고 뭐 좀 안다고 섣불리 나서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했다. 한 마디로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감나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갑낭재(匣囊峙)로 보검을 칼집에서 빼드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데 그 후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감나무재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를 시목치로 부른다는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내 눈에는 칼을 빼드는 형상이 보이지 않았는데 관산덕론기에 이 고개의 유래를 실은 풍수지리학의 대가 도선국사의 눈에는 이 고개가 그리 보였던 모양이다. 시목치에서 20분 가까이 가파른 길을 따라 349m봉에 오르는 동안 누런 짐승이 저 만치 앞쪽에서 쏜살같이 능선 길을 가로 질러 내달리는 바람에 잠시 멈춰 섰지만 하도 빨리 사라져 그 짐승이 멧돼지인지 고라니인지 식별하지 못했다. 기왕이면 날렵하고 귀여운 고라니이기를 바랐지만 그 후 길 언저리에 분탕질한 흔적으로 보아 멧돼지가 틀림없어 한동안 긴장했다.
9시3분 369봉에 올라 8분을 쉬었다. 349m봉에서 편백나무 숲을 지나 임도 길 안부로 내려섰다가 벽시계가 걸려 있는 왼쪽으로 다시 올라 묘지가 들어선 구릉을 지나 무명봉에 올라섰다. 이 봉우리에서 조금 내려섰다가 녹슨 깡통이 버려진 369m봉에 올라 있을 법한 삼각점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369m봉 산마루에서 정남으로 보이는 제암산은 지난번에 오른 암산이어서 그 빼어난 자태가 온전하게 눈에 들어왔지만 남서쪽으로 보이는 어디서 본 듯한 잘 생긴 산은 천관산인지 두륜산인지 아니면 아주 다른 산이지 짐작되는 바가 아무 것도 없었다. 앞서 길을 가로 질러 내달은 짐승이 멧돼지로 밝혀지자 자연 헛기침이 많아졌고 스틱 끝으로 바위 돌을 쳐 쇠 소리를 내는 것도 잦아졌다. 369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반시간 가까이 걸어 367m봉에 올랐고 다시 고개를 두 곳 넘어 전망바위에 다다르자 왼쪽 산 밑으로 다소곳이 들어앉은 마을이 한껏 평온해 보였다.
10시48분 만년임도로 내려섰다. 전망바위에서 안테나가 세워진 안부로 내려서는 바위 길은 물기가 남아 있어 상당히 미끄러웠고 몇 곳은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며 내려서기도 했다. 안부에서 직등 길을 올라 348m봉에 오르자 이 가을이 바다에서 실어온 바람을 풀어놓아 엄청 시원했다. 보름 전에는 그늘 속에 들어가도 등 뒤를 흥건히 적신 땀이 식을 줄 몰랐는데 그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목덜미를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일단 그늘로 들어서면 바로 등 뒤가 서늘했다. 갑낭재 출발 3시간이 다 되도록 겨우 4.9Km를 걸어 방이마을과 심정마을을 이어주는 만년임도에 내려서자 속도를 조금 더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3Km 떨어진 용두산을 향해 쉬지 않고 내달음질했다. 만년임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임도 길 안부에 다다라 여기저기로 갈라진 길을 세고 나서 여기가 시내라면 신호등을 설치했어야 할 육거리 안부임을 알았다. 305m봉에 올라 하늘 높이 떠다니는 구름들을 카메라로 잡아 보았다.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기시지 않은 초가을 하늘의 구름은 냉기로 똘똘 뭉친 겨울철의 구름보다 그 높이가 낮고 형태도 오래 가지 못하지만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에 들어섰음을 알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12시21분 해발 551m의 용두산에 올랐다. 305m봉에서 오른 쪽으로 휘어진 길을 급하게 내려섰다가 한동안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탄한 정맥 길을 밟았다. 바람이 선선하고 그늘진 평탄한 능선 길을 세상만사 훌훌 털고 걷노라면 모처럼 나도 산식구가 되었다는 편안한 느낌이 들곤 한다. 다시 묘지까지 급하게 올랐다가 덜 가파른 길을 잠시 더 걸은 후 456m봉에 올라서 12분을 쉬었다. 456m봉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0m가량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헬기장 두 곳을 지나자 오름 길이 완만해졌다. 산불감시시설의 풍속계가 계속 돌고 있는 용두산 정상은 시야가 트여 전망이 일품이었다. 정북 방향의 산은 무등산인 듯했고 남동쪽에 자리한 제암산은 여전히 여러 암봉 들의 제왕임을 자랑하는 듯했다. 영암의 월출산은 정서 방향으로 보였고 남서쪽의 천관산(?)도 그 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러 봉우리들과 구름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산죽 길을 지나 왼쪽으로 임도가 나있는 금장재로 내려섰다.
14시1분 병무산을 올랐다. 목표점인 피재를 5.8Km 앞둔 금장재를 출발해 직등 길로 올라섰다. 십 수분 걸어 오른 471m봉에서 왼쪽으로 편안한 능선 길이 이어졌다. 얼마 후 한참 내려가 장평면과 부산면을 이어주는 안부사거리에 닿은 시각이 13시15분으로 시장기가 느껴져 길 옆 그늘에서 점심을 들었다. 20분 후 도로 건너 산길로 올라서 병무산으로 향했다. 시목치를 출발해 수 없이 많은 봉을 오르내려 이골이 난 터라 3번째 헬기장으로 올라서는 직등 길도 오를 만했다. 살모사로 보이는 작은 뱀이 바로 앞에서 길을 가로 지르며 고개를 똑 바로 들고 나를 쳐다보는 모양새가 상당히 공격적이어서 큰 뱀이었다면 긴장했을 것이다. 날을 세운 공격 자세가 내가 휘두른 스틱으로 무너지자 뱀은 이내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는데 몇 걸음을 옮겨 놓자 이번에는 개구리가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가 아니다 싶었는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그 역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4번째 헬기장 바로 위의 돌로 낮게 쌓은 축대를 지나 봉우리에 오르자 지형도에도 없는 병무산의 이름이 적혀있는 표지목이 서있었지만, 표지석이나 삼각점이 없어 따로 없어 이 산의 이름을 달리 확인할 길이 없었다. 정작 삼각점이 세워진 곳은 병무산에서 20분을 북진하여 다다른 봉우리로 월간 산에서 펴낸 지도상의 513.7m봉이 아닌가 싶었다. 길 왼 쪽 나뭇가지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보인 탐진댐이 다소곳해 보였다. 삼각점봉에 오르자 한동안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불어왔고 가버린 여름이 아쉬워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매미들의 마지막 합창 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왔다.
15시55분 피재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다. 5번째 헬기장에서 얼마고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헬기장은 소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헬기장이 여럿 들어선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각각 고유번호가 매겨져 눈길을 끌었다. 6번째 헬기장을 끝으로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반시간을 걸어 올라선 410m봉에서 숨을 돌린 후 피재로 내려서다가 젊은이를 만난 것이 유일한 만남이었다. 광주의 한 일간지에 종주기를 올린다는 이 젊은이와 반갑게 통성명을 한 후 헤어져 피재로 향했다. 마지막 십분 여 내림 길을 빼놓고는 대체로 평탄한 길이 계속되어 410m봉에서 1시간 가까이 걸어 내려왔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820번 도로가 지나는 피재는 장평면과 유치면을 아우르는 고개로 광주 가는 직행버스가 멈추는 봉림리에 걸어서 20분이면 다다를 수 있다.
14시36분 봉림리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다. 피재에서 쉬고 나서 오른 쪽으로 차도를 따라 가 봉림리정류소에 도착했다. 50분을 기다려 광주 가는 직행버스에 올라 화순에서 하차했다. 찜질방 위치를 확인 한 후 화순의 성당을 들러 저녁 7시 반에 시작되는 특전미사를 올렸다. 산 꼭대기에 올라 구름사진을 찍으며 만나 뵙고 싶었던 하느님을 특전미사를 올리며 모셨다. 그 분은 역시 하늘 높이 계셨고 성령만이 함께 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망덕산을 출발해 계속 만난 조개껍질이 용두산을 넘어서자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조개껍질과 같이한 장장 160여Km의 동반 산행은 끝났지만 궁금증이 풀린 것은 아니다. 여기 조개껍질을 방사선검사로 생성연대를 측정해본다면 어떻게 해서 조개껍질이 정맥 능선 길에 있는가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정맥 길에 산재한 조개가 호남정맥보다 그 생성이 늦은 것은 당연하지만 끝은 같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호남정맥이 가라앉아 종말을 맞는 시기를 계산할 수 없는 터에 그 짧은 조개껍질의 생성연도를 따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했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 이르기까지 조개껍질이 견뎌온 시간을 반추하며 앞으로 내딛고자 한다.
환주기13:호남정맥 11구간(피재-곰치)
*산행일시:2007년 9월 9일 7시57분-17시40분(9시간43분)
*소재지 :전남 장흥/화순
*산높이 :가지산511m, 삼계봉504m, 국사봉499m
*산행코스:봉림리-.피재-가지산-삼계봉-국사봉-곰치
산길에서 공사로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안내문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남정맥 종주 길에 정맥길 산허리를 잘라서 길을 내는 공사장을 여러 곳 지났지만 안내문은 고사하고 길 안내용 화살표를 그려 놓은 공사장도 본 적이 없다. 능선 길에 송전탑을 세우느라 산객들에 불편을 준 것은 틀림없기에 공사장 50m 전 후에 안내문을 해 단 것이 당연한데도 새삼 고마운 것은 호남정맥 종주꾼들을 위한 시공사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여서다.
시목치-피재- 곰치 구간을 이틀 간 걸으면서 장흥군이 챙겨준 산객들을 위한 배려도 더 할 수 없이 고마웠다. 이 구간을 먼저 오른 분들의 산행기를 읽고 나서 걱정한 것은 명감나무 등 가시나무가 무성한 잡목 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조계산을 지나 일림산에 이르기까지 가시나무 길을 뚫고 가느라 생고생을 해 이번 구간 종주를 마치고 나면 온통 팔다리가 가시에 찔리고 긁혀 엄청 쓰라리고 가려울 것이라 단단히 각오했는데 장흥군에서 길섶의 잡목과 풀들을 베어내고 길을 다듬어 가시 한번 찔리지 않고 20Km가 훨씬 넘는 긴 구간을 무사히 지났다. 장흥군의 배려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름 없는 봉우리들을 이어가는 정맥 길 곳곳에 표지목을 세워 길안내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정맥 길을 종주하며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성한 가시나무들이 가로 막는 풀숲 길을 어떻게 통과하고, 또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제 길을 찾아 이어가느냐 인데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곳 장흥군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배려를 해준다면 그 어려움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자상하게 마음을 쓰고 염려해준다는 뜻의 배려(配慮)를 개인적인 영역의 일로 차치한다면 지자체의 주민들을 위한 구체적인 배려가 단체장의 덕성 정도로 치부될 것이다. 옛날 전제국가에서는 백성들에 대한 배려를 고을수령의 개인적인 시선(施善)에 기댈 수밖에 없었겠지만 풀뿌리민주주의의 전범인 지자제가 본격적으로 작동되는 민주국가에서는 개인의 시선이 아닌 시스템에 의해 행해져야 할 것이다. 일반회사들의 고객에 대한 배려는 CEO개인의 덕성이나 취향에 따르지 않고 고객만족시스템에 의해 작동된다. 지자체의 주민들에 대한 배려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주민들을 행정서비스의 소비주체이자 고객으로 모시고 고객만족시스템을 가동시킬 때 비로소 주민들은 지자체의 진정한 배려에 감사할 것이다. 장흥군의 산객들에 대한 배려가 단체장 개인의 관심을 뛰어 넘는 고객만족시스템의 정상적 가동에 따른 것이기에 단편적 배려가 아닌 종합적서비스로 나타났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대간을 종주하며 길부터 막고 보는 몇몇 국립공원의 산객들을 향한 적대적 조치에 분개해온 나로서는 친절한 길안내와 깔끔한 길 다듬기로 산객들을 배려하는 장흥군 당국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침7시57분 봉림리를 출발해 피재로 향했다. 광주 발 장흥 행 직행버스를 아침7시10분에 화순에서 탔다. 이양과 능주, 그리고 청풍 등의 화순군의 면소재지를 두루 들러 손님을 태운 후 곰치고개를 넘어 장흥 땅 봉림리에 도착하기까지 50분 가까이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넘실대는 들녘 을 보고 겉보기에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이 안으로는 부글부글 속을 끓일 수밖에 없는 급격한 경제 환경의 변화가 걱정됐다. 봉림리에서 유치면과 경계를 이루는 피재까지 걸어가는데 20분이 걸렸다.
8시17분 피재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새벽 3시에 곰치를 출발했다는 한 호남정맥 종주 팀이 아침식사를 들고 있어 여기서 잠시 쉬며 산행채비를 점검해보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곧바로 오른 쪽 임도로 들어섰다. 잠깐 동안 시멘트임도가 나타났고 임도 왼쪽 측백나무 숲속으로 버섯종균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임도가 끝나서 풀 숲길을 잠시 걸은 후 산을 깎아서 내고 있는 흉물스런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올랐다. 산허리를 잠시 에돈 후 비알 길로 340m봉에 올라서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오름 길도 경사가 급했고 중간에 배탈이 나 속을 비워서다. 340m봉에서 시작된 평평한 능선 길은 오래지않아 끝났고 다시 직등 길을 올라 405m봉에 다다른 시각이 9시25분이었다. 여러 개의 표지기와 몇 그루의 나무들이 405m봉에 오른 나를 반겨 이 봉우리에서 짐을 내려놓고 10분을 쉬었다.
10시14분 사거리안부인 장평우산갈림길로 내려섰다. 405m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길을 걸어 서쪽으로 전망이 확 트이는 전망바위에 다다랐다. 바로 앞 구간을 지날 때 나뭇잎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보인 탐진댐이 비로소 전신을 다 드러내보였다. 탐라국사람들이 육지로 올라와 처음으로 배를 대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탐진강을 높이 막아 전라남도 서남해안지역에 공업용수와 생활용수를 원활히 공급하고자 만든 다목적탐진댐은 그 규모가 주암댐의 40% 정도로 작아 댐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산허리를 적시고 있는 초록빛 강물이나 파란색과 주홍색의 현대감각 나는 교각들도 어느 하나 표를 내며 나서지 않고 어우러져 빚어내는 조화로운 댐의 정경은 장흥군이 숨겨둔 또 하나의 비경이다. 반시간 가량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편안한 길을 걷다가 얼마동안 내려가 장평우산 갈림길에 다다랐다. 안부에 내려서서 하늘 높이 유영하는 새털구름을 보고 가을이 와있다 했는데, 새들에 밀릴까봐 마지막 목청을 돋우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 아직도 지난여름이 이 산하에 드리운 그림자를 다 거둬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11시7분 해발 511m의 가지산을 올랐다. 사거리안부가 깊지 않아 맞은편의 389m봉으로 올라서는 길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가지산의 암봉이 선명하게 잘 보이는 389m봉에서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몇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는 가지산을 향해 안부로 내려섰다가 산허리를 왼쪽으로 에돌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 능선삼거리에 다다르자 피나무(?) 숲이 우거져 시원했다. 정맥 길에서 왼쪽으로 조금 빗겨 있는 가지산을 오르자 389m봉에서 만난 한분이 먼저 올라와 있었다. 큰덕골재를 출발해 아침 9시에 곰치에 이르렀으나 몸이 안 좋아 일행들과 헤어지고 차를 타고 피재로 옮겨 가지산을 올랐다는 이 분은 고향이 같은 파주분이어서 더더욱 반가웠다. 이번 산행 최고의 전망대는 단연 가지산이다. 정수리가 암봉인 가지산에서 정 서쪽으로 바라다 본 영암의 월출산은 기암괴석만으로도 다른 산들과 확실히 대비되고, 탐진 댐을 가득 채운 수려한 물줄기의 탐진강과 남쪽의 제암산도 훌륭한 볼거리다. 다시 산죽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능선삼거리로 돌아와 사과를 까먹은 후 11시40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려 14분 만에 올라선 510봉에다 장흥군에서 현 위치가 가지산이라고 적어놓은 표지목을 세워놓아 헛갈렸다.
13시27분 해발 504m의 삼계봉에 올랐다. 510m봉에서 로프를 잡고 큰 바위를 돌아 내려갔다가 돌로 축대를 쌓은 송전탑을 지나 460m봉에 올랐고 평탄한 길을 따라 걷는 중 종주 객들을 만났다. 송전탑 50m전 후에 공사로 불편을 드려 죄송해 하는 안내문을 읽고 나자 방금 지나온 송전탑이 되돌아 보였다. 안내문이 걸린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잔디를 입히지 않아 시뻘건 황토 흙이 노출되어 보기에 흉해 기왕에 시작한 공사라면 깔끔히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422m봉을 지나 장고목재로 가는 능선 길에 즐비하게 피어 있는 연붉은 꽃들이 쑥부쟁이 등의 가을꽃들과 함께 길을 환하게 했다. 넓은 임도가 지나는 사거리안부인 장터목재를 12시41분에 출발하여 묘지와 풀숲 길을 지나자 비로소 된비알길이 시작되었다. 이 직등 길을 오르기가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로프를 설치할 만큼 경사도 급한데다 점심을 들지 않아 더 했다. 장고목재 출발 20분 후에 올라선 450m봉에 삼계봉표지목을 세운 장흥군의 실수는 가지산에 이어 두 번 째 인데 국사봉에서도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었다. 450m봉에서 로프 길을 17분을 더 올라 삼계봉에 다다르자 삼각점이 보여 무척 반가웠다. 산죽 길을 3분간 걸어 내려선 안부에서 그늘을 찾아 점심을 들며 푹 쉬었다. 18분간의 긴 휴식을 끝내고 10분을 올라 490m봉에 오르자 어느 한 분이 보성수계와 탐진수계가 갈리는 여기가 삼계봉임을 알리는 안내문을 걸어 놓아 정말 헷갈렸다. 삼계봉을 나타내는 이런저런 표지물이 450m봉, 504m봉, 490m봉에 연이어 걸려있는데 지형도에 나와 있는 504m봉에 삼계봉의 표지물을 다시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떼어버려야 할 것이다.
15시19분 해발499m의 국사봉에 올랐다. 490m봉에서 산죽 길을 7-8분 걷고 얼마간 더 걸어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430m봉에는 헬기장이 들어섰고 바람재삼거리 표지목이 세워져 있었다. 땅끝기맥이 갈리는 봉우리삼거리 430m봉에서 표지기가 많이 달려 있는 왼쪽 길로 들어섰다가 땅끝기맥 분기점을 알리는 노적봉의 표지석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어 알바를 면했다. 오른 쪽 아래 93-6-8의 고유번호가 붙은 넓은 정식 헬기장을 지나 그늘 길로 들어선 후 수풀이 우거진 임도 길의 바람재에 도착했다. 바람재에서 동쪽에 자리한 해발 448m의 깃대봉을 올라서는 데는 길이 편안해 10분밖에 안 걸렸지만 해발499m의 국사봉 행 길은 오르내림이 심해 반시간이 더 걸렸다. 깃대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다가 깊숙한 안부를 거쳐 된비알 길을 치켜 올라 무명봉에 오른 다음 조금 더 걷다가 오른 쪽으로 확 꺾어 완만한 경사 길을 천천히 올랐다. “준.희”라는 분의 “국사봉”표지물이 없었다면 별 특징 없는 이 봉우리가 국사봉임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국사봉에서 십분 남짓 쉰 후 헬기장을 지나 아주 가파른 길을 따라 깊숙한 안부로 내려섰다.
16시37분 476m봉에 다다랐다. 오른 쪽으로 길이 갈리는 깊숙한 삼거리안부인 백토재에서 임도 따라 이동하다가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헬기장에서 내려가는 길은 급했지만 오름길은 2개봉을 넘기까지 완만했다. 475m봉이 가까워지자 다시 된비알 길로 변해 숨 가쁘게 올랐는데 앞서 지나온 깃대봉으로 스텐레스판에 이름이 적혀 있어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475m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내려선 임도를 두 번 건넌 후 풀숲 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오름길로 들어섰다. 국사봉에서 476m봉까지 지도상에는 50분이면 다다를 수 있다 했는데 쉬지 않고 왔는데도 1시간 6분이 걸려 찜찜한 마음으로 표지목을 보자 현 위치가 국사봉이고 곰치휴게소까지 3.4Km가 남았다고 엉터리로 적혀 있어 짜증이 났다.
17시40분 839번 도로의 곰치로 내려가 종주산행을 마쳤다. 476m봉에서 직진해 왼쪽 돌길로 내려섰다. 표지목에 적힌 대로 3.4Km가 남았다면 18시18분에 곰치를 출발하는 광주행 버스를 타기가 바쁠 것 같았다. 안부에서 능선 길로 올라서 고사목들을 카메라에 담은 후 312m봉에 올라서자 곰치고개를 넘나드는 차 소리가 들렸다. 3-4분을 내려가 만난 묘지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20분이 걸렸는데도 476m봉에서 곰치까지 한 시간 밖에 안 걸렸다. 이번산행에서 마음에 걸린 것은 물을 건넌 것이다. 곰치고개를 넘으며 길을 깎아지른 절개면을 보고 산자분수의 능선 길을 놔두고 계곡으로 길을 틀어 낸 이유를 알았다. 고개 마루에서 10m 가량 화순 쪽으로 도로변에 자리한 곰치휴게소에 들러 맥주를 들며 이틀간의 정맥종주를 자축한 후 저녁 6시18분에 출발하는 군내버스에 몸을 실어 광주로 향했다.
순천역을 전진기지로 한 정맥 종주는 이번으로 끝났다. 호남정맥 종주 차 순천을 자주 내려갔고 그 덕분에 순천만, 고인돌공원, 낙안읍성, 소록도, 팔영산 과 두륜산 등 호남의 명소들을 두루 탐방했다. 참, 광양에서 시작된 조개껍질과의 끈질긴 동행도 바로 앞 구간에서 끝났다. 광양, 순천, 보성과 장흥의 호남 땅이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호남정맥을 종주한 덕이기에 이에 투자된 시간과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불후의 소설인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 이청준 선생을 배출한 장흥군이 보여준 세심한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환주기14:호남정맥 12구간(곰치-예재)
*산행일시:2007. 9. 22-23일/ 시간 분소요
*소재지 :전남화순/장흥/보성
*산높이 :봉미산506m, 군치산412m, 고비산422m, 봉화산427m
*산행코스:곰치-봉미산-큰덕골재-봉화산-구례리산자락/예재-봉화산-예재
몇 십 년 만에 산자락에서 밤을 지새우며 훨훨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보았다. 1970년대 초 만해도 어느
시골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반딧불이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공존을 모색하지 않고 홀로 잘 살기를
고집해온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다. 반딧불로 불을 밝혀 책을 읽어 성공했다는 옛 이야기는 다시는 재
현될 수 없는 전설이기에 반딧불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해도 누가 그리 애틋해 할지 잘
모르겠다. 혹자는 환경운동가만은 그래도 슬퍼하지 않겠는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라고 진정
슬퍼서 울기야 하겠는가? 그들이 환경보호운동을 강화는 하겠지만, 진정 반딧불을 사랑해서 오매불망
조가(弔歌)라도 지어 바칠 것으로 나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의 환경보호운동도 결국은 우리 인간들이
영원히 잘 살기 위한 몸짓이지 반딧불 그 곤충의 삶을 위해 벌이는 운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호남정맥의 산자락에서 만난 반딧불을 반긴 것은 상황이 좋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정맥 길에서 벗어
나 총소리가 연신 들리는 골짜기로 잘 못 들어갔다가 산자락으로 피해서 밤을 새야했던 딱한 처지에
놓여 있어서 더 반가웠다. 밤새도록 총소리가 계속 나는 데 어느 산짐승이 같이 밤을 새겠다고 나설까
마는 반딧불은 총소리가 전혀 무섭지 않는 듯 내 주위를 맴돌며 얼마고 시간을 같이해 주었다. 낮 동안
재잘대던 산새들은 숨죽이고 오직 가을살이 풀벌레들만이 간간히 그들 특유의 노래 소리를 들려주는
깜깜한 산 속에서 별안간 넘쳐 나는 밤 시간을 감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일정 간격으로 울리는 총
소리에 단 십분도 눈을 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밝혀야 했던 내게는 시간과 골짜기물만 흐르고 있
을 뿐 다른 것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숨죽이고 있는 정지 상태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눈
을 감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별 오만가지 생각으로 고통스럽게 시간을 죽이
는 중 반딧불의 출현은 나로 하여금 아련한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주어 고맙게도 추억을
반추하며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고마움을 준 반딧불과 풀벌레들의 생존을 위해 나도 어느 환경운
동가들 못지않게 애쓰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곰치고개에서 예재까지 11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아 화순의 이양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곰치고개로 옮
겼다. 50분만 더 걸으면 목적지인 예재에 닿을 수 있는 봉화산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해 놓고 봉화산에
서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내려가다 결국에는 이 산의 한 자락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아
침 봉화산을 다시 올라 예정했던 곰치-예재 구간의 정맥종주를 마쳤다. 생각지 못한 알바로 생고생을
했지만 반딧불과 풀벌레들을 친구로 사귀는 생각지 못한 소득을 얻었으니 이번 호남정맥 종주가 결코
쓸데없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다.
9월22일 아침 7시37분 곰치재를 출발했다. 지난 5월 팔공산을 함께 오른 성봉현님과 조부근님을 오
랜만에 만나 맥주 몇 잔을 걸친 후 전날 밤 11시 넘어 고속버스에 올랐다. 광주로 내려가 광천터미널에
서 시간을 보내다 인근 식당에서 해장국을 사든 후 아침5시40분발 이양 가는 화순군 군내버스를 탔다.
새벽을 달려 6시10분 경 화순을 들른 버스는 능주와 청풍을 거쳐 7시가 조금 못되어 이양에 도착했다.
이양에서 9천원에 택시를 잡아 곰치휴게소로 이동했다. 곰치-큰덕골재-예재 구간을 한 번에 종주하려
면 산행시간을 최소한 11시간은 확보해야 해 광천터미널에서 곰치 가는 7시10분발 첫 버스를 기다리
지 못하고 이양에 와서 택시를 탔다. 곰치휴게소에서 커피를 빼 든 후 고개 마루를 사진 찍고자 했으나
바테리가 나가 허탕을 쳤다. 산행시간도 빡빡한데 오히려 잘됐다 하며 들머리로 올라선 후 이슬에 젖
은 풀숲 길을 헤치고 나가느라 바지자락을 다 적셨는데 이내 길이 끊겨 오른 쪽 능선으로 올라섰다. 들
머리 출발 10분 후에 제 길을 나타난 것으로 보아 길을 잘 못 든 것이 분명했다. 제 길로 들어선 후로는
오름 새도 완만하고 길도 잘 나있어 속도를 냈다. 능선 길을 따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다가 비알 길을
올라 첫 번째 헬기장 봉우리에 올라섰다.
8시29분 해발506m의 봉미산에 올랐다. 삼각점과 “준. 희” 두 분의 “봉미산” 표지기가 걸려 있어 정상
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높은 봉미산 정상에 오르자 헬기장이 넓게 들어서 시원했
지만 안개가 가시지 않아 주위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10여분을 쉰 후 봉미산을 출발해 몇 걸음을
옮겨 놓자 바로 앞 구간에서 자취를 감췄던 꼬막 껍질이 다시 보여 놀랍고 반가웠다. 피재를 지나서는
바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다시는 눈에 띄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조개껍질이 다시 나타나 나와의 끈
질긴 동행이 아직 남아 있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비교적 편안한 길을 걸어 봉우리 두개를 넘어 해발
494m의 세 번째 헬기장에 도착하자 해가 나기 시작해 지나온 연봉들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경사가
아주 급한 내리막길을 20분 가까이 걸어 왼쪽 아래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 안부에 도착했다.
10시5분 해발496m의 숫개봉에 도착했다. 삼거리 안부에서 산길을 따라 가녀린 모습의 연붉은 꽃들이
연이어 피어 있어 꾸준한 오름 길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391.4m봉에 올랐어도 삼각점이 없어 소수점
아래 한 자리 수까지 적혀있는 지도상의 고도를 믿어야 하는지 의심이 갔다. 내림 길은 잠시였고 묘지
를 지나 올라선 평평한 능선 길이 한동안 계속 되다가 숫개봉에 다가서자 된비알의 오름 길로 변했다.
봉미산에서 이 봉우리까지 지도에 적혀 있는 2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시간24분만
에 도착해 해떨어지기 전에 예재에 이를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숫개봉이라 써 놓은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는 희뿌연 아크릴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 그나마 이 봉우리가 그 봉우리임을 확인할 수 있
었음을 고마워하면서도 이 산을 관리하는 지자체에서는 장흥군처럼 이정목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인가
아쉽기도 했다. 10분을 쉬면서 등의 땀을 식힌 후 거의 150도를 확 꺾어 내려서는 길로 들어서자 이제
껏 올라온 길로 되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착각하기도 했다. 임도로 내려서는 길에 맨 흙의 층계를
여러 곳 지나며 걱정했던 대로 엉덩방아를 찧어 바지를 흙 범벅으로 만들었다. 풀들이 잘 자란 임도를
따라 오른 쪽으로 잠시 걸어 왼쪽 산길로 들어섰는데 알고 보니 이 길은 366m봉을 우회하는 길이었다.
깊숙한 산 속에 자리한 묘지에는 대부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후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
지만 추석이 가까워도 어느 후손하나 찾아오지 못했던지 4기의 봉분이 들어선 넓은 묘지가 풀밭으로
변해버렸다. 420m봉을 오른 후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얼마고 내려서다가 다시 올라 삼각점이 세워진
431m봉에 다다른 시각이 11시15분으로 숫개봉을 출발해 딱 1시간이 걸렸다.
12시12분 해발412m의 군치산에 다다랐다. 때맞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숨을 돌린 후
431m봉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리 길지 않은 바위 길을 조심해서 내려섰다. 왼쪽 아래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가 먼 옛날의 칙칙폭폭 증기기관차 소리는 아니었지만 먼 곳에의 동경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했다. 급하게 내려섰다가 한 기의 묘가 있는 봉우리로 올라선 후 땟재로
내려섰다. 또 다른 묘지 봉을 지나고 군치산에 올라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거풍을 즐겼다. 나
홀로 정맥을 종주하며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전이 바로 거풍이다. 두 다리와 발은 주인을 잘 못 만나
생고생을 한다고 아우성이지만 사타구니만은 정반대로 주인을 잘 만나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
는 거풍을 즐길 수 있다고 좋아할 것이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돌무더기 안부로 내려섰다가 380m
봉에 오르기까지 오르내림이 별로 없어 모처럼 산행이 편했다.
13시17분 큰덕골재로 내려서 점심을 들면서 긴 시간 편히 쉬었다. 380m봉에서 411m봉으로 오르는 길
도 고도차가 별로 없어 편안했다. 411m봉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는 중 오른 쪽 아래로 저수
지 복흥제가 보였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와 장흥의 복흥리와 화순의 초방리를 이어주는 큰덕골재가 멀
지 않다싶었다. 임도로 내려서 왼쪽으로 진행하는 중 비가 내렸다. 끈질기게 내리는 비로 하늘의 안색
을 살피며 며칠을 미루다가 기상청에서 주말에는 날씨가 좋아진다고 하여 종주 길에 나서면서 아침부
터 태양이 구름 뒤에 숨어서 좀처럼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 뭔가 수상쩍다 했다. 오후가 되자 하늘
이 본색을 드러내고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얼마 후 비가 그쳐 죽산
안씨 묘지석만 덜렁 있는 안부사거리 큰덕골재에서 점심을 들었다. 군내버스로 곰치까지 가서 여기 큰
덕골재에서 구간종주를 마치겠다는 생각을 바꾸어 이양에서 곰치까지 택시를 이용한 것은 일찌감치
곰치를 출발해 차들이 지나다니는 예재까지 한 번에 내달리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 큰덕골재에서 마
치고 마을로 하산했다가 다시 이 고개로 올라서기가 너무 멀고 불편할 것 같아 계획을 바꾸었는데 예
정시간보다 반시간 가량 일찍 도착하고 나자 참 잘 바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남정맥을 가로 지르
는 큰덕골재는 길이 넓어 예재로 찻길이 뚫리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나드는 과객들이 적지 않았을 것
이다.
15시18분 해발422m의 고비산을 올랐다. 큰덕골재에서 똑 바로 이어지는 정맥 길은 속살이 그대로 드
러난 황토 길이었고 길바닥에 전선이 늘어져 있어 군부대에서 사계정리를 위해 나무들을 베어낸 것으
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군부대는 없었다. 374m봉과 390m봉을 거쳐 349m봉(?)에 이르자 흙
길이 끝나 풀길로 들어섰다. 이내 무성한 풀 숲길이 나타나 풀숲을 헤치고 나가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
다. 큰덕골재 출발 1시간 남짓 지나 397m봉에 올라섰지만 이렇다 할 표지거리가 없었다. 잠시 머물다
가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 묘지를 지났고 바로 아래 임도를 따라가 사거리안부에 다다랐다. 완만한 오
름 새는 어느새 바뀌어 된비알 길을 얼마고 올라 고비산 정상에 섰다. 여기까지 산행은 순풍에 돛단 듯
이 순조로웠다. 고비산에서 남쪽으로 급하게 내려가 오른 쪽 명동마을로 자갈길이 넓게 난 안부를 지
났다.
17시24분 해발 427m의 봉화산을 올랐다. 자갈밭 안부를 지나 봉화산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50분간
불안했던 것은 20-30분 안에 나타나야할 가위재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표지기가 계속 붙어 있어 길을
잘 못 든 것은 아닐 터이고 그렇다면 지도가 잘 못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쉬지 않고 시간
반을 내달려도 가위재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내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불안했다. 능선 길에서 퍼져
앉아 10분 여 쉬다가 힘들게 오른 440m봉에서 20분을 더 걸어 한 봉우리에 서자 “봉화산”의 이름 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가위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
나친 것이다. 이제 목적지인 예재까지 50분 거리 밖에 안 되어 어둡기 전에는 충분히 마칠 수 있겠다
했는데 잠시 방심을 해서인지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잘 못 들어 예재에 닿는데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9시8분 다시 봉화산에 올라섰다. 이번에는 아예 예재에서 거슬러 올라가 하산 길을 잘 못
드는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아침8시8분에 예재를 출발해 꼭 1시간 만에 386m봉을
거쳐 봉화산에 올라 전날 못 마친 짧은 구간 종주를 다시 시작했다. 정상에서 오른 쪽 동쪽 길을 택해
야 하는 것을 왼 쪽 북쪽 길로 들어선 것이 전날 알바의 주원인이었음을 알았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굵
은 빗줄기도 이미 맞은 가을을 되 물리지는 못해 길바닥에 나뒹구는 나뭇잎들 대부분이 누런색을 띄고
있었다. 봉화산 출발 3-4분 후에 시리산으로 이름 붙여진 465.3m봉에 오르자 봉화산에도 없는 삼각점
이 보였지만 지도에 적혀있는 헬기장은 보이지 않았다. 안부로 내려서는 길은 완만했고 꽤 길었다. 안
부에서 올라선 첫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얼마고 걸어 386m봉에 이르렀다. 이렇게 좋은
길을 놔두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 생고생을 했다며 실소하는 사이 어느새 예재에 닿았다.
9시55분 예재에서 이틀에 걸친 14구간 종주를 마쳤다. 전날 비를 맞아 쓸린 사타구니가 계속 비를 맞
고 산길을 오르내려서인지 심하게 쓰라려 더 이상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기 힘들었다. 예재에서 개기
재까지 6시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구간이어서 이 구간 종주를 마친 후 집에 돌아가겠다고 이양에서
택시를 타고 왔는데 봉화산만 다녀오고 택시를 불러 다시 이양으로 돌아갔다. 광주를 거쳐 산본에 도
착해 아슬아슬하게 주일미사를 보고나자 파노라마 같은 종주산행이 이제야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알바에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길을 잘 못 들었음이 분명하면 아무리 늦더라
도 반드시 원위치하라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이 가르침을 예외 없이 따를 것이다. 설사 반딧불을 다시
볼 수 있는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온다 해도 과감히 버리고 원위치할 것이다. 이것이 욕심을 다스리는 길
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이번 알바의 진상은 이렇다. 봉황산 정상에서 비를 맞으며 나침반을 꺼내 지도에 나와 있는 북동쪽으
로 방향을 잡고 왼쪽 길을 선택해 예재 길로 내려섰다. 길이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고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찜찜했지만 방향이 분명히 맞는데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어 더 빨리 내달려 두 서너 봉을
넘었다. 당연히 걸려있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했다. 일단 맞은편 봉우리까
지 가서 조망한 후 최종 결정을 하기로 하고 깊숙한 안부로 내려서자 제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고 그
래서 앞 봉우리로 오르는 것을 멈추고 봉화산으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이미
너무 많이 내려왔다는 생각이 든 데다 다시 봉화산으로 올라가 예재까지 가기는 날이 저물어 쉽지 않
겠다 싶어 일단 인근 마을로 하산하고 다음 날 일찍 다시 봉화산을 올라 정맥 길을 이어가기로 최종 결
정했다. 왼쪽으로 산허리를 지르는 희미한 길을 따라 10분 가까이 옮기자 바로 아래 계곡이 보였다. 사
방을 둘러봐도 이렇다 할 길도 보이지 않았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에 다다를 수 있겠다는 판단
에서 계곡 시작점으로 내려갔는데 길은 사라지고 온갖 잡풀들이 우거진 덤불숲이 나타나 아연실색했
지만 다른 수가 없어 계곡 안으로 내려가 물속을 텀벙대고 무조건 내려갔다. 바위에 무릎이 부딪히고
작은 키의 잡목들이 얼굴을 때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정글 속 계곡을 빠져 나
오자 이번에는 총성이 계속 울려 겁이 덜컥 났다. 무슨 군대가 주말에 사격훈련을 실시하나 투덜대면
서도 얼마 안 있으면 끝나겠다 싶어 잠시 퍼지고 앉아 쉬었다가 혹시라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사격
을 멈출 것 같아 사람 살리라고 몇 번 이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허사였고 총알의 진행하는 길과는 많
이 빗겨 있는 것 같아 또 다시 덤불 숲길을 헤치고 내려갔다. 구두와 바지 및 배낭 카버가 몽땅 젖었고,
팔다리가 여기 저기 긁혔으며, 벌써 저녁 6시반이 다 되어 어둑어둑하기 시작했어도 얼마 후 논둑에
올라서자 마음이 놓였다. 일단 논둑길만 따라 내려가면 분명 동네가 나타날 것이고 그리되면 살았다
싶어지자, 제 고향 파주에서라면 벌써 버려졌을 산골짜기 천수답에서 저토록 실하게 벼들이 익어 넘실
대는 것을 보고 인근 농민들이 여름 내내 정성들여 돌보았을 손길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기쁨도 잠시
뿐으로 논둑에 올라서 4-5분을 걷자 그동안 저를 비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한 총알이 바로
옆을 지나는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그리 멀지 않은 논두렁에 빨간 표지판이 세워진 것을 보고 서둘
러 논둑에서 내려서 산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내 만난 임도를 따라 몇 걸음을 옮기자 이 임도가 논둑
에 바짝 붙어 아래로 내려가 더 이상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논둑 멀리 산자락에서 짐을 내려놓았다. 그
리고 저녁 6시40분부터 사격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분명 주말인데 저녁 8시가 넘어도 사격훈련은 끝나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 일요일이 되었어도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안전지대로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위험은 없었지만 총성이 계속 울려 하산을 포기하
고 하염없이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자 정말 난감했다. 떡과 복숭아 그리고 남은 쵸코렛을
모두 꺼내 먹고 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여벌의 옷들을 갈아입었다. 잔뜩 흐린 날씨에 간헐적으로
후드득 뿌리는 빗줄기가 걱정은 됐지만 계속되는 총성으로 멧돼지로부터 공격받을 일은 없겠다 싶었
고 그렇다면 내가 바로 이날 밤 이산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지 어디선
가 반딧불이 나타나 하늘을 맴돌며 나를 반겼다. 그것도 여러 차례를 말입니다. 나를 반겨 맞은 풀벌레
들의 노래 소리도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들어볼 까 싶어 한껏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밤의 소리를 음미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어쩔 수 없는 산사람이다 했다. 어쩌다가 맞은 산속의 밤이 무섭지 않은 것은
이런 저런 소리들이 나와 밤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산속의 식구들을 놀라게 한 총소리는 빼더라도, 골
짜기를 흐르는 물소리, 후드득 비 뿌리는 소리, 풀벌레들의 가녀린 노래 소리, 어디에선가 비구름을 몰
고 오는 바람소리, 총성에 깜짝 놀라 자지러지는 새소리, 가까운 곳에서 라이트를 비치며 달리는 자동
차 소리, 서광주와 진주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경전선 기차소리, 계속해서 가만히 있기가 힘들어 몸
을 움직이며 내가 내는 버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면 이 밤을 지내기가 정말 지겹고 무료했을 것이
다. 아니 이 모든 소리들이 사라진다 해도 마지막 지구가 회전하며 내는 소리는 언제고 나와 같이 했을
것이다. 그 소리는 땅덩이가 움직이는 소리 같이 묵직하기도 하고 바람이 이는 소리처럼 가볍게 들리
기도 했다. 이런 저런 사념들이 모처럼 시간제한을 받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지구가 도는 소
리에 생각이 끊겨 아쉽기도 했다. 밤은 소리와 함께 흘러 가버렸고 드디어 아침이 다가오는 빛이 감지
됐다.
아침6시10분 밤이 물러서자 시꺼먼 구름만 그대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어둠은 모두 사라졌다. 사방이
밝아지자 논둑 옆으로 바짝 붙은 오른 쪽 큰 길과 왼 쪽으로 난 넓은 길이 보였다. 왼쪽 길은 산허리를
잘라 막 길을 낸 임도로 논에서 한참 떨어져 절대 안전한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십여 분을 걸어 경전
선 철길로 내려섰고 철길을 따라 이양 쪽으로 걷다가 차도로 올라섰다. 교화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불러 이양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새롭게 의문이 생겼다. 내가 머무른 산자락 아래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 사격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어느 군대가 주말에 밤새도록 사격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
렇다면 지난밤의 총성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양에서 죽 살아온 택시기사분도 이 근처에 사격장
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궁금증이 풀린 것은 사흘 후 추석 성묘를 끝내
고 나서였다. 선산의 지형이 지난 알바를 한 곳과 비슷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더니 시골 조카가 그 소리
는 총소리가 아니고 불빛이 번쩍이고 소리는 크게 나지만 총알이 들어 있지 않은 예광탄을 터뜨리는
소리라고 답해주었다. 한 해 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최근 급증한 멧돼지나 조류가 난입하는 것을 막고
자 논밭에다 일정 시간간격으로 자동으로 터지는 예광탄을 설치한 곳이 꽤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총알에 맞을까 겁을 내어 산자락에 주저앉아 밤을 샌 내가 참 어리석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알바의 궁
금증은 모두 풀렸다. 이렇게 해서 소설 같은 알바상황은 모두 끝났다.
환주기15:호남정맥 13구간(예재-개기재)
*산행일시:2007. 10. 1일/11시20분-17시30분(6시간10분)
*소재지 :전남 화순/보성
*산높이 :계당산 580m
*산행코스:예재-378봉-계당산-개기재-옥리 중촌마을
올처럼 끈질기게 비가 내렸던 가을이 언제 있었는가 할 정도로 9월 들어 비를 거른 적이 한 주도 없다.
일조량 부족으로 추수를 앞둔 농민들의 시름이 더 해 갈 수 밖에 없어 시골풍경이 그리 여유로워 보이
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내리는 비와 같이 흘렀고 내리쬐는 태양과 함께 흘렀다. 그렇게 흐르고 또
흘러 10월에 접어들자 논 뜰도 산골마을도 가을색이 완연했다. 태풍으로 쓰러진 벼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바라만 보아야 하는 농민들의 가슴 속이야 새까맣게 타버렸겠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올
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혼자서 정맥 길을 종주하는 내게는 고개 마루에서 종주산행을 마치고 가까운 마을
로 내려가 버스를 기다릴 때가 있다. 어제 저녁 화순의 옥리마을에 다소곳이 내려앉은 가을 풍경은 이
러했다. 예재-개기재 구간의 호남정맥 종주를 마치고 개기재에서 반시간 가까이 걸어 내려가 만난 옥
리 중촌마을에서 한 시간 남짓 버스를 기다리며 저녁시간을 이 가을과 함께 했다. 이 마을의 버팀목은
다섯 아름도 훨씬 더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였다. 아직도 나뭇잎은 푸른데 밑동의 수피가 단풍처럼 붉
어보였다. 이 나무줄기에서 뻗어나간 커다란 가지가 밑으로 쳐져 내려앉는 것을 막고자 쇠파이프로 받
친 것을 보고 이 마을에서 이 거목이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 가 쉽게 짐작되었다.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장방형의 쉼터 사각정은 장정들 15-20명은 넉넉하게 누워 쉴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마루에 등을 눕혀
편히 쉬고 싶었지만 남의 동네 정자에서 벌렁 누워 있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냥 걸터앉기만 했
다. 느티나무 앞으로 58번 도로가 지나고, 도로변에 “옥리 중촌마을”의 화강암 이정표가 서 있었다. 자
연부락은 느티나무 뒤쪽에 들어앉았고 그 앞으로 느티나무보다 먼저 가을이 내려앉은 논 뜰이 자리하
고 있는데 태풍으로 쓰러진 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안쓰러웠다. 해가 뉘엿뉘엿 서편으로 넘어갈 즈
음 할아버지가 풀을 가득 실은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4-5세로 보이는 어린 손녀가 그
뒤를 따랐다. 건너편 한우를 기르는 축사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지난 가을 사료로 쓰고자 쌓아 둔 볏짚
건초 단을 풀어 날랐다. 마지막 몸을 불살라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어둠을 맞는 도로변 색색
의 코스모스도 지나가는 차들이 일으킨 바람에 하느작거렸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하
자 느티나무에 몸을 숨겼던 새들이 길 건너 산속으로 날아갔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맥 놓고 버스를
기다리는 나를 보고 지나가는 차들에 부탁하면 태워줄 거라며 손을 흔들어 보라고 일러주셨지만 급할
것이 없어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시골의 저녁 풍경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라이트를 켜고 달려온 버스
에 올라탔다.
일면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의 가을 풍경 속에서 속을 끓이고 있는 농민들의 고된 역정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이 땅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대부터 우리 농촌은 발 빠른 근대화를 따라 잡
고자 헐떡거리며 쫓아왔다. 아들딸들이 도시에서 벌어들인 농외소득을 농사지어서 올린 농가소득에
합해도 도시보다 가구소득이 적었다. 벌써부터 그들도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아 고향의 어르신들께 매
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는 자식들이 이제는 거의 없어 오로지 농가소득만으로 살아가야하는 농민들로
서는 우루과이 라운드나 한미FTA 체결 같은 굵직한 환경변화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앞
으로 살아 갈 길이 막연해 망연자실해 하고 있을 우리 농민들이 맞는 올 가을은 잦은 비로 그나마 소출
도 줄어들 것이 빤하기에 더욱 우울할 것이다. 더할 수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산골마을이 겉만 아니라
속도 편한 그런 날들을 그들과 함께 기다리며 옥리마을 정자에서 일어섰다.
아침 6시5분 강남의 센트랄시티를 출발하는 광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야간열차나 심야버스보
다 몇 배나 편안했던 것은 집에서 충분히 잠을 자고나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9시55분에 광천터미널을
떠나는 장흥행 직행버스를 타고 가다 이양에서 하차하여 택시비 만 오천 원을 들여 이곳 예재에 도착
한 시각이 11시10분이 조금 넘어서였다. 이번 구간은 예재에서 시작해 개기재에서 끝나는 5시간 반 정
도 걸리는 짧은 코스여서 굳이 밤차를 타지 않아도 됐다.
11시20분 예재를 출발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고 바람도 불지 않아 또 비가 오는 것이 아닌 가
신경이 쓰였다. 얼마 후 만난 임도삼거리에서 직진하다 바로 왼쪽 산 능선으로 올라섰다. 예재 출발 15
분 후에 헬기장을 지나 우측사면이 벌목지인 능선 길을 걸었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벌목지 상단의
능선 길은 잡목과 가시나무들이 덤불을 만들어 발목을 잡기가 일쑤여서 이런 구간은 통과하기가 여간
짜증스러운 것이 아니다. 측백나무가 길 양옆으로 들어 선 능선을 따라 올라 무명봉을 넘자 이번에는
철쭉나무와 죽어 쓰러진 다른 나무들이 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10분을 내려가 안부사거리에 도착했다.
12시13분 378m봉을 올랐다. 안부사거리에서 오르자 밋밋한 풀 숲길이 나타났다. 378m봉에 올랐어도
시야가 막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가파른 길을 한 참 내려가 무성한 칡넝쿨이 하늘을 가린 터널을 지
났다. 안부에 내려서자 햇살이 다시 퍼지기 시작했고 조용했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오른 쪽 아래로
창천제 호수가 보였다. 379m봉에 올라가 알바를 한 봉화산을 뒤돌아보았다. 360m봉에서 급하게 내려
가 밋밋한 길을 걷다가 무명봉 바로 아래에서 치받이 길을 올라 460m봉 어깨에 다다랐다. 그새 13시
가 넘어 점심을 들면서 20분 가까이 쉬었다.
13시53분 523m봉에 올랐다. 460m봉의 밋밋한 어깨 능선 길은 이내 끝났고 직등 길을 올라 다다른
460m봉에서 얼마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남쪽으로 제암산이 보이는 바위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523m봉 턱 밑에서 치고 올라가는 길도 힘들었다. 똬리를 틀고 길 한가운데 가만히 자리 잡은 누런 뱀
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스틱으로 쫓아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거품을 내뿜은 채 오래 전에
죽은 뱀을 산길에서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523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섰다가 철쭉나무 숲길
과 억새 밭길을 지나 560m봉에 다다랐다.
15시 정각 해발580m의 계당산에 올라섰다. 철지난 꽃들이 초라해 보이는 것은 꽃송이수가 적기 때문
이다. 늦가을 금강산에서 만나 본 진달래도 생기가 없었고 560m봉을 오르며 우연히 눈에 띈 철쭉꽃도
애잔해 보였다. 어렵게 올라선 560m봉은 덤불숲이어서 표지기가 잘 보이지 않았고 처음에는 길을 못
찾아 당황했다. 560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다다른 바로 옆 572m봉에서 서서히 내려섰다가 비알 길을
오르는 동안 잠시 억새밭을 지났다. 정상은 좁은 풀밭으로 삼각점이 세워졌고 산 이름이 적힌 스텐판
도 걸려있어 최고봉임을 알았다. 정상에 자리한 보리수는 열매가 익지 않아 시큼 새큼함을 맛볼 수 없
었다. 동쪽 아래 저수지 뒤에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조계산이 아닐까 싶었고 그 오른 쪽으로 기지
국이 보이는 산은 아마도 고동산 같아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잠자리와 노랑나비의 작별인사를 받고
계당산에서 일어나 오른 쪽으로 내려가 만난 헬기장은 철쭉 터널을 지나느라 애를 먹은 내게는 천상낙
원이었다. 쑥부쟁이, 엉겅퀴 외에도 이름 모르는 가을꽃들이 20-30평은 될 법한 헬기장 공터에 가득히
피어 있어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헬기장을 지나서 풀 숲길은 조금 후 끝났고 보통의 산길이 이어
져 걸을 만 했다. 15시55분에 509m봉에 다다르자 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6시50분 개기재에서 산행을 마쳤다. 509m봉에서 조금 내려섰다 다시 올라 16시 정각에 490m봉에
이르자 표지기 들이 잔뜩 걸린 큰 소나무가 보였다. 이제부터 하산 길인데다 어차피 개기재 아래 옥리
마을에서 한참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기에 서두를 이유가 없어 마음이 편했다. 490m봉에서 오른 쪽
으로 꺾어 마루금을 이어갔다. 가는 곳마다 표지기가 걸린 “비실이 부부” 두 분들도 이 금을 이어 갔을
것이다. 봉화산에서 된 알바를 겪고 나자 먼저 오른 분들의 표지기가 한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부부가
함께 올라 걸어 놓은 것이 유독 눈에 띈 것은 진작 그리하지 못하고 뒤 늦게 홀로 종주 길에 나선 내가
부끄러워서이다. 묘지를 지나자 오른 쪽 아래로 황금색 벼들이 출렁이는 논 뜰이 정연하게 들어섰고,
그 뒤로 저수지와 고동산(?)이 보였다. 마지막 봉우리인 380m봉에서 개기재로 내려서는데 20분이 걸
렸다. 개기재 고개의 절개면 꼭지점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의녕남씨 묘지를 지난 후 개기재로 내려섰
다. 오른 쪽 고개 마루로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와 길 건너 계곡물로 손을 씻은 후 옥리마을로 출발했
다.
17시30분 옥리 중촌마을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모두 마쳤다. 개기재에서 옥리마을로 내려가는 58번
도로는 차량소통이 비교적 뜸했다. 2백m쯤 내려가 지난 상촌까지 버스가 온다. 도로변의 코스모스와
갈대들이 차가 지나가는 대로 하느작거리는 것을 보고 흔들리고 허리를 굽힐망정 꺾이지 않는 저들의
유연성이 오늘을 사는 지혜다 싶었다. 옥리 마을에 도착해 사각정 쉼터에서 짐을 내려놓고 한 시간 여
푹 쉬었다. 그리고 이 시골의 가을 풍경을 지켜보았다.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단독종주를 고집하는 것은 빨리 걷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시골
마을에서 짧으나마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다. 지친 몸을 추슬러 바로 차에 오를 수 있는 안내
산악회는 경제적이고 편하지만, 산골마을의 정자에 걸터앉아 넉넉한 자연풍경을 관조하고 촌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정겨움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 가을이 이제부터라도 비를 멈춰 이 마을의 가을
걷이가 풍요로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IV.5대강둘레산줄기 환종주기 > 섬진강 둘레산줄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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