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63.문경새재 탐방기

시인마뇽 2015. 1. 17. 18:34

                                                            문경새재 탐방기

 

 

                                          *탐방일자:2014. 10. 18일(토)

                                          *탐방지   :경북문경시 소재 문경새재

                                          *동행      :쌍용제지 입사동기 5명

                                            (나기훈, 한성환, 이주승, 채일균, 우명길)

 

 

 

  제게는 두 다리로 걷는 것만큼 저의 실존을 강력히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두 돌이 안 되어 걷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직립(直立)이 가능해서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되어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직립을 거부당하고 한 해 동안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은 인간이란 똑바로 서서 걷기를 할 수 없다면 존재의의도 같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직립해 걸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 의술로는 척추수술이 상당한 고난도 작업이이어서 수술보증금이 맹장수술보다 배 가까이 비싸던 때였습니다. 자칫 잘못되면 평생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며 척추수술을 받은 것은 직립해 걷는 것만이 저의 실존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조지프 A. 아마토가 지은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On Foot)"라는 제목의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류가 이 땅에 발을 내딛은 600만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발로 걷는 것이 갖는 의미와 걷기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여러 자료들을 기초로 밝히고 있습니다. 걷기를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게 만든 자동차와 도시로 대표되는 오늘 날 앞으로도 걷기는 계속될 것이고 그 중요성이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걷기만큼 인류의 실존을 증거 할 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워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걷기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생각하는 바 이는 걷기를 통해 잃어버린 휴머니티의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 믿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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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 해서 조령(鳥嶺)으로 불리는 문경새재가 새재로 불리는 것은 하늘재와 이화령사이에 새로 낸 고개여서입니다. 새재는 낙동강과 한강의 유역을 이어주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고개로 다른 고개보다 더 높고 험해 국방상의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은 이 고개를 버리고 탄금대에다 배수의 진을 치고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그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새재 길에 주흘관, 조곡관과 조련관 등 3개의 관문을 세운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여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셈입니다. 이 고개는 낙동강 동쪽인 경상동도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느라 많이 넘었다 합니다. 새재 길이 큰 비가 내려도 걷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얇은 박석을 깔아놓은 흔치않은 박석 길인 것은 과거를 보러 오가는 길이어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1978년 쌍용제지에 입사한 동기 다섯이 경북문경의 새재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총무를 맡고 있는 나기훈 사우의 주선으로 여기저기 가을이 꽉 차게 들어선 10월 중순의 하루를 날 잡아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의 하나인 문경새재를 같이 걸은 것은 우리가 실존해 가능했습니다. 새재를 오르며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입사초기의 회사생활을 화두로 삼은 것은 입사년도는 같지만 퇴사년도는 다섯 명 모두 달라서였습니다. 그래도 4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대화가 중단되지 않은 것은 함께 뒤돌아볼 일들이 많아서였는데, 덕분에 모처럼 옛날로 돌아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을 활짝 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사이 얼마간 잊고 지낸 휴머니티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늦은 아침 쌍용빌딩 건너편 영락교회 안에서 나기훈 사우와 이주승 사우를 만나 채일균 사우의 차를 타고 문경새재로 향했습니다. 옛날의 쌍용빌딩은 회색의 시멘트건물인데다 건물 앞 주차장에 시꺼먼 코란도 차가 빽빽이 주차한 모습이 영락없는 국방부청사다 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백색(?)의 현대식 철조 건물로 탈바꿈해 산뜻했습니다. 문경새재 입구 도자기박물관 앞에서 한성환 사우를 만나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관광안내소에 조금 못 미쳐 자리한 주차장으로 이동해 간신히 빈 곳을 찾아 차를 세웠습니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산책길 즉, 이른바 새재 길은 제1관문을 출발해 마당바위, 제2관문과 동화원터를 차례로 지나 제3관문에 이르는 비포장 길로 전장이 6.5Km에 달합니다. 새재 길은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낸 길로 경관이 수려한데다 오랜 시간 걸어도 두 발에 무리가 덜 가는 흙길이어서 남녀노소 모두가 걸을 수 있는 국민산책로입니다. 오르는데 2시간이 걸린다는 공원 측의 안내문에 따른다면 왕복하는 데 3시간 반가량 걸릴 것 같은데 이만하면 웰빙 산책로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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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2시44분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산책을 시작한 새재 길은 이번에 처음 걷는 것이 아닙니다. 9년 전 백두대간 종주 차 이화령을 출발해 조령산을 오른 다음 제3관문인 새재로 내려가 제3관문-제2관문-제1관문 순으로 걸어내려 갔습니다. 그 때는 초여름이어서 그늘을 만들어 준 초록의 나무들이 고마웠었습니다.

 

 

  주차장에서 20분 가까이 걸어 다다른 제1관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주흘관은 숙종38년인 1708년에 설치된 관문으로 좌우로 길이가 200m에 조금 모자라는 견고한 석성을 관문에 이어 쌓아 매우 견고해 보였습니다. 팔작지붕이 인상적인 제1관문을 통과하자 절정에 이른 붉은 단풍이 저희를 반겼습니다. 길을 꽉 메운 인파의 나들이옷도 색상이 제 각각으로 울긋불긋한 주위의 단풍과 잘 어울려보였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도 한 여름의 장마철처럼 야단스럽지 않았습니다.

 

  제2관문에 이르기 얼마 전 그 옛날 새재를 넘나든 선비들이 묶었을 조령원 터를 지났습니다. 원(院)이란 고려 때부터 세워진 일종의 여관으로 일반여객들에 숙식의 편의를 제공해온 곳입니다. 여기 조령원터의 전체 면적이 6백 평에 이른다 하니 새재길이 보통 길이 아니었음을 그 터의 크기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흘산의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조곡폭포도 볼만했습니다. 새재 길 양쪽에 자웅을 겨룰만한 두 산이 자리하고 있는바, 그 하나는 서쪽의 조령산이고 또 하나는 동쪽의 주흘산입니다. 주흘산은 산수가 아름다워 산림청에서 이 산을 명산100산의 한 산으로 선정했습니다. 조곡폭포는 이처럼 산수가 수려한 주흘산의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3단 폭포로 폭포의 높이가 20m에 이릅니다.

 

 

  오후3시28분 제2관문인 조곡관을 지났습니다. 제2관문은 신립이 패전한지 2년 후인 선조27년(1594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축성한 성입니다. 오늘의 조곡관 모습은 1975년에 복원된 것으로 이때 이름도 조동문(鳥東門)에서 조곡관(鳥谷關)으로 바뀌었습니다.

 

  조곡관을 지나자 내려오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고 비로소 한적한 산속의 길을 걷는다 싶어지자 길옆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습니다.

 

 

                        鳥嶺二首

 

 

     鳥道千盤嶺      새재는 굽이굽이 고갯길이요

     龍湫萬丈淵      용추는 깊고 깊은 연못이라네

     宿雲衣帶下      구름은 산허리를 두르고

     朝旭頂巾前      아침 해 산머리에 빛나네

 

 

     好鳥鳴喬木      어여쁜 새는 나무에서 울고

     嘉魚躍大淵      미끈한 물고기 연못에서 뛰네

     浮沈皆得意      저들이야 모두 제 뜻대로 살건만

     行邁樂暉前      나는야 갈 길 멀어 석양길로 접어든다

 

  조선 중기 문인인 신익전(申翊全)이 지은 오언율시로 어둡기 전에 산책을 끝내려 서두르는 제 마음이 잘 투영된 시(詩)같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시비(詩碑)를 지나 간이정자가 서 있는 쉼터에 이르자 줄곧 앞장섰던 한성환사우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반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목적지인 새재고개에 도착할 수 있다며 쉬지 않고 앞장서서 내달렸더니 얼마 뒤 모두들 제 뒤를 따라 올랐습니다

 

  이제까지 고도차가 거의 나지 않는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과는 달리 쉼터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곡에서 멀어지고 본격적인 오름길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펼쳐졌습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새재의 고갯마루를 향해 내달리다가 “문경새재책바위”안내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을 돌렸습니다. 이 고개에 과거 길에 어울릴만한 전설이 어찌 없을까 궁금해 하던 차 책바위 전설을 읽어보고 그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의 기운을 덮는 돌담을 헐어 그 돌들을 인근 책바위로 날라 옮겨놓고 나서부터 아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고 장원급제를 했으며, 이를 전해들은 후세사람들이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고자 여기 책바위를 많이 찾는다는 내용의 전설로, 지금도 입시철만 되면 이 바위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하니 전설의 효용은 일반 약들과는 달리 유효기간이 없나봅니다.

 

 

  오후4시20분 제3관문인 조령관에 다다랐습니다. 해발640m대의 고갯마루에 자리한 조령관은 선조 초에 쌓은 것이라 하니 앞서 지나온 두 관문과 달리 임진왜란 전에 세워진 것입니다. 1976년에 복원된 이 관문 역시 팔작지붕으로 양 옆으로 석성이 이어졌습니다. 망루에 올라가 신립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여기 새재에 진을 치자는 부장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어찌해서 탄금대에다 배수의 진을 쳤는가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는데 그의 아집 외에는 달리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뒤따라 올라온 사우들과 함께 관문 너머에 조성된 광장을 둘러보면서 저녁 무렵 가을 풍경을 카메라에 옮겨 실은 후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내려가면서도 언제 다시 이런 좋은 길을 이처럼 좋은 때에 다 함께 다시 걸어볼 수 있으랴 싶어지자 발걸음을 내려가는 길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오후5시58분 제1관문으로 돌아가 새재길 산책을 마쳤습니다. 어둡기 전에 도착하느라 서두른 편인데도 힘든줄 몰랐습니다. 새재고개의 높이를 감안하면 이번 산책이 서울근교의 관악산이나 청계산을 오르내리는 산행정도는 족히 될 터인데도 어느 누구도 힘들었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워낙 좋은데다 지우들과 담소를 즐기면서 걸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문경에서 멀지 않은 상주에서 태어난 채일균 사우가 문경새재가 국내 최고의 고갯길로 이름이 나있다며 이번 나들이 길로 추천했습니다. 이번에 걸어보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했습니다. 명승지가 명시를 낳는다면 앞서 소개한 신익전의 ‘조령이수(鳥嶺二首)’ 또한 문경새재가 낳은 명시임에 틀림없습니다. 새재의 산식구들은 모두 제 뜻대로 살아갈 것이고, 갈 길이 멀어 석양 길로 접어든 저희는 수안보로 가서 이석범사우를 만나 저녁을 함께하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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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들어 걷기에 위협이 될 만한 징조가 나타나 얼마간 긴장했었습니다. 3월에는 척추협착증으로 다리에 통증이 느껴져 달 반 넘게 산행을 삼갔습니다. 5월에는 가슴을 죄어 짜는 부정맥 증세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아직도 매일 한 정 씩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약물치료로 몸 상태가 많이 좋아져 9월 들어 한강기맥 종주를 재개했고 문경새재 길도 걸었습니다. 아직은 곧바로 서서 오랜 시간 걸을 수 매우 기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