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명소 탐방기
*탐방일자:2014. 10. 17일(금)
*탐방지 :경기도 포천시 소재 옥병서원(玉屛書院),
창옥병(蒼玉屛), 박순선생 묘(朴淳先生 墓)
*동행 :군포시여성회관 한문반 김정석선생님 및 회원
밖에서 들어오는 물이 없고 오로지 흘러나가기만 한다하여 명명된 “포천(抱川)”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고구려 때 불린 “마홀”입니다. 물이 많은 골이라는 뜻의 “몰골”을 음차 한 “마홀”이 견성군, 청성, 그리고 포주를 거쳐 포천(抱川)으로 바뀐 것은 조선태종13년인 1413년이니, 포천(抱川)이라는 지명은 장장 6백년 넘게 보존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포천시 관내의 큰 물줄기로는 포천(抱川)과 영평천(永平川)이 있습니다. 영평천(永平川)은 조선조 고종32년(1835년) 영평현(永平縣)이 포천군(抱川郡)에 편입됨에 따라 더해진 것으로, 한북정맥의 백운산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일동으로 접어들면서 서쪽으로 물 흐름을 바꾸어 아우라지에 이릅니다. 이곳에서 한탄강에 합류되는 영평천은 임진강과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갑니다. 한북정맥의 수원산에서 발원한 포천은 북쪽으로 흐르다 영종면의 사은교에서 영평천에 합류됩니다. 영평천과 포천에 물을 대는 둘레산줄기는 한북명성지맥과 한북정맥, 그리고 한북왕방지맥입니다. 영평천과 포천을 가르는 산줄기는 한북정맥의 운악산에서 분기해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무명의 산줄기로, 금주산과 관음산을 거쳐 영평천에서 끝납니다.
그동안 저는 한북정맥 및 명성지맥과 왕방지맥을 종주하느라 포천의 명산들을 꽤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포천의 산들 거의 다가 높고 험해 제 고향 파주의 산들보다 훨씬 산답습니다. 포천의 산은 많이 다녔지만, 유적지와 명승지를 찾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매주 금요일 군포시 여성문화회관에서 김정석선생님을 모시고 한문을 공부하는 한문반 동아리에서 현장학습 차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소재한 옥병서원(蒼玉屛), 창옥병(蒼玉屛)과 박순선생 묘(朴淳先生 墓) 등 세 곳을 다녀왔습니다. 박순선생을 배향하는 옥병서원, 이 서원 바로 아래 영평천에 면해 있어 선생께서 자주 들른 창옥병, 그리고 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박순선생 묘가 있어, 이번 포천명소탐방의 키워드는 단연 박순선생이라 하겠습니다.
박순선생은 조선조의 14대 임금 선조를 모시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 上 )의 영의정을 지낸 분입니다. 성정이 고르지 못하기로 이름난 선조 임금을 모시고 장장 15년씩이나 영의정 자리를 지킨 것은 “절조(節操)가 송균(松筠)같고 정신(精神)은 수월 (水月)같은 현상(賢相)”이라 칭찬한 선조임금의 신뢰가 있어 가능했을 것입니다.
박순선생은 중종18년인 1523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명종 8년(1553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선생은 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선조5년(1572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 오릅니다. 선생이 포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같은 서인인 이이와 성혼을 편들다 탄핵되어 영평현의 백운산에 은둔해 있을 때부터입니다. 선생은 글씨는 송설체(宋雪體)에 능했으나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으며, 백광훈, 최경창, 이달 등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선조22년(1589년) 유명을 달리한 선생은 외동딸이 살던 이곳 영평 땅에 묻히셨으며, 여기 영평 외에도 개성과 광주 그리고 나주 등 네 곳에서 서원을 세워 선생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명종23년(1568년) 대사간이 된 선생은 문정왕후의 아우로 29년이나 국정을 전횡해온 윤원형과 요승 보우를 탄핵한 것만으로도 선생의 강직함은 칭송받고도 남을 일입니다. 선생의 탄핵을 계기로 명종임금은 이들을 숙정하고,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거리에 나가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고 선생의 신도비에 적혀 있습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이 지은 “한국사 이야기”에 선생의 이름이 모두 4번 나오는데, 이 회수는 같이 정승을 지낸 동인의 이산해나 서인의 정철에 비할 바가 못되는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이것은 박순선생이 이들 두 정승만큼 역사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일을 아니여서 그럴 것입니다.
선생은 윤두수, 정철과 함께 심의겸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선조7년인 1574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낭관추천을 받았으나 김효겸이 반대해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훈구파를 제압한 사림파들이 심의겸을 따르는 동인과 김효겸을 따르는 서인으로 나뉩니다. 각 파의 영수로 서인은 박순, 동인은 허엽이 추대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두 분 모두 서경덕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제자인 것으로 보아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친소관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조임금은 두 세력의 대결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자 심의겸과 김효원을 모두 지방으로 내쫓았습니다.
선생은 기대승의 제자이자 이이의 문하생인 정여립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여립은 이이가 죽자 이이를 비롯해 서인인 성혼과 박순 등을 비판하고 동인 유성룡에 접근해 말을 바꿔 탑니다만, 종국에는 전주에서 세를 모아 모반을 획책하다가 처형됐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 일본의 침략을 논하는 자리에서 선조는 누가 도원수의 자격을 갖추었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영의정 박순은 정개청이라는 선비가 지혜와 포부가 크다고 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정개청은 훗날 정여립과 친구사이라 해서 유배를 가다가 장독으로 죽어 임진왜란에 참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전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 상반되게 진언했습니다. 조헌은 임금께 어차피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더 이상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지 말고 방비를 서둘러야 한다면서 동인을 배척하고 서인 박순과 정철을 옹호하는 글을 올립니다. 이 글로 유배 길에 오른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합니다. 이미 고인이 된 선생을 굳고 높은 절개를 지닌 조헌이 옹호를 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인간됨이 어떠했는가가 어느 정도 짐작됩니다.
1.옥병서원(玉屛書院)
이번 나들이에 안양의 수일재 회원들이 합류해 버스 한 대가 꽉 찼습니다. 아침 8시를 조금 지나 산본을 출발한 버스가 포천의 옥병서원에 다다른 시각은 10시반경으로 햇살이 활짝 퍼져 출발시의 냉기가 완전히 가셨습니다. 포천을 지나서부터 87번 국도를 따라 북진을 계속하다가 양평천의 진군교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좁은 길을 비집고 2백m가량 들어가자 오른 쪽 언덕 위에 자리한 옥병서원이 보였습니다.
이 서원에 배향된 박순선생이 어떠한 분인가 알아보고자 신도비 내용을 요약한 “사암 박순선생 신도비개요”를 먼저 일별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서원 앞에 이르자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서원 안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유명서원 같으면 해설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서원규모도 매우 작고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어 관리 편의 상 문을 잠가 놓은 것 같습니다.
건물 안의 맨 뒤쪽에 사당을, 원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은 중심에, 원생과 빈객이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는 강당 양 옆쪽에 두는 것이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입니다. 큰 서원은 장판고, 서고, 제기고와 사택창고 등이 추가됩니다. 정문과 담장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사당입구에 중문을 두어 출입을 통제했다고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탐방한 옥병서원(玉屛書院)은 서원의 일반배치를 따르기에 너무 규모가 작았습니다. 담장 안으로 들여다 본 옥병서원은 강당 및 동제와 서제만 보일 뿐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3년 전 경북 영천의 도계서원을 들렀을 때도 문이 잠겨 있어 담장너머로 들여다 본 일이 있습니다. 시조 “조홍시가(早紅詩歌)”를 지은 노계 박인로 선생을 제향하는 도계서원도 여기 옥병서원과 규모가 비슷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서원에는 사당이 있었습니다. 조라포(助羅浦)의 만호였던 노계 박인로 선생이 영의정을 지낸 박순선생보다 죽어서 더 대접을 받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서원의 규모가 이토록 작은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음을 문 옆 안내문을 읽고 알았습니다. 인조27년(1649년)에 창건된 이 서원은 숙종39년(1713년) 사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종5년(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됩니다. 우여곡절을 겪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1980년으로, 고작 갖춘 것이 본당과 동재, 서재 삼문 담장입니다. 박순 선생 외에도 이의건, 김수항, 김성대, 이화보, 윤봉양 등 모두 여섯 분이 배향되는 이 서원에 사당이 들어앉을 날이 언제일지 궁금합니다.
2. 창옥병(蒼玉屛)
백운산에서 발원한 양평천(永平川)이 창옥병에 이르러 절경을 빚은 것은 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은교에서 포천(抱川)의 물을 몽땅 받아들여 세를 불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가뭄에 물이 많이 빠져 드러난 바위가 진흙이 남아 있어 깔끔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물이 제법 많이 남아 있어 바닥을 내보이지 않고 그 아래 진군교 다리 아래로 흘러 내려갔습니다. 가을이 내려앉은 창옥병이 참으로 고즈넉하고 정겨워, 그 정경을 정성들여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옥병서원에서 길을 건너 내려간 곳이 영평천으로 물이 제법 많이 흘렀습니다. 이번 창옥병 탐방의 주요 과제는 영평천 남쪽 가의 암벽에 새겨진 한시와 양평천 한 가운데 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을 찾아 읽어보는 것이어서 초등학교 때 원적 가서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포천시 홈페에지에 실린 사진을 보면 창옥병은 영평천에 면해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을 이르는 데, 이번에는 보물찾기를 하느라 창옥병의 병풍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선조19년(1568년) 선생께서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배견와(拜鵑窩)를 지어 은거하면서, “題 二養亭壁”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題 二養亭壁>
谷鳥時時聞一箇 골짜기에는 새소리마저 때때로 들리고
匡床寂寂散羣書 침상은 적막하고 책들은 흩어져 있네
可憐白鶴臺前水 가엾어라 백학대 앞을 흐르는 물이여
纔出山門便帶淤 이 산문을 나서면 바로 흙탕물이 되는 것을
청옥병 바위에 암각된 “題 二養亭壁”은 김수증이 쓴 것으로, 제목이 “水鏡臺”로 바뀌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선조임금의 윤음은 “松筠, 節操, 水月, 精神”으로 석봉 한호가 쓰고 신이가 새겼다 합니다. 옥병서원의 “사암 박순선생 신도비개요”에 따르면 삼사에서 박순선생을 탄핵하자 선조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주동자를 유배 보냈다고 하는데, “영의정은 절조(節操)가 송균(松筠) 같고 정신(精神)은 수월(水月) 같은 현상(賢相)인데 어찌 모함하느냐”하는 내용의 교서 속에 암각에 새겨진 윤음의 문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나머지 암각문은 散襟臺, 障蘭, 水鏡臺, 淸鶴臺, 吐雲床 , 窪尊, 淸冷潭 등입니다. 이중 散襟臺, 水鏡臺, 淸冷潭, 窪尊만 직접 찾아 확인했고 나머지 障蘭와 淸鶴臺는 끝내 찾지 못하고 창옥병 탐방을 끝냈습니다.
3.박순선생 묘(朴淳先生 墓)
인근 주민에게 물어 옥병서원에서 동쪽으로 4-5백m쯤 걸어 다다른 박순선생의 묘 역시 옥병서원처럼 단출했습니다. 마을을 지나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한 선생의 묘지에 오르자 북쪽으로 한북명성지맥 종주 차 오른 보장산이 가깝게 잘 보여 비로소 이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머릿속에 분명히 그려졌습니다.
영의정을 지낸 선생께서 이토록 한적한 영평 땅에 묻히신 까닭을 안 것은 묘 입구의 안내문을 읽고 나서입니다. 선생은 율곡 이이가 탄핵될 때 그를 옹호하다가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습니다. 선조임금은 교서를 내려 탄핵주동자를 유배 보내나 선생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외동딸이 사는 이곳 영평으로 내려와 영평천변에 정자 배견와(拜鵑窩)를 짓고 여생을 보냅니다. 안내문을 다 읽고 나자 새삼 영의정의 외동딸이 이 촌구석으로 시집 왔는가와 선생께서 자주 대하기가 부담스러웠을 사돈 댁 동네로 거처를 옮긴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곡장이 둘러싼 묘지에 부인과 합장을 하지 않아 봉분이 쌍분으로 조성된 것을 가지고 부인의 묘가 왼쪽이냐 오른 쪽이냐 하며 여러 말들이 오간 것은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모호해서인 것 같습니다만, 부인은 남편 왼쪽에 묻는 것이 맞다 합니다. 석물로는 문인석, 장영등, 망주석과 상석이 보였습니다.
선생의 묘는 제 고향 파주의 윤관 장군 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왜소했습니다. 고려의 문하시중인 윤관의 묘역에는 홍살문이 세워졌고 문인석은 물론 무인석도 서 있으며 묘역도 굉장히 넓어 왕릉에 버금간다 했습니다. 문하시중에 상당하는 영의정까지 지낸 분의 묘역이 너무 작아 초라해 보이기는 했지만, 임금의 권유를 뿌리치고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보낸 분이어서, 이런 작은 묘지에 모시는 것이 선생을 뜻을 제대로 받드는 것이다 싶기도 합니다.
묘지를 둘러본 후 옥병서원으로 돌아가 그 다음 탐방지인 연천으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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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탐방으로 박순 선생이 후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보기 드물게 학문과 덕망을 두루 갖춘 사대부임을 확인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15년씩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지 못한 점입니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3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지만 왜란의 조짐은 영의정에 재직했을 때부터 있어온 것이기에 선생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반드시 후하지 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탐방사진>
1.옥병서원
2.창옥병
3.박순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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